자금성
"오늘의AI위키"의 AI를 통해 더욱 풍부하고 폭넓은 지식 경험을 누리세요.
1. 개요
자금성은 1406년 명나라 영락제 때 건설을 시작하여 1420년 완공된 중국 베이징에 위치한 궁궐이다. '자(紫)'는 북극성을, '금(禁)'은 출입 금지를, '성(城)'은 도시를 의미하며, 황제와 황실, 내시를 제외한 일반인의 출입이 엄격히 제한되었기에 붙여진 이름이다. 명, 청 왕조의 중심지였으며, 현재는 고궁박물원으로서 약 186만 점의 소장품을 보유하고 있다. 1987년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재되었으며, 중국 건축과 예술에 큰 영향을 미쳤다.
더 읽어볼만한 페이지
- 1420년 완공된 건축물 - 천안문
천안문은 자금성 남쪽에 위치한 중국의 상징적인 성문으로, 중화인민공화국 건국 선포식 이후 중국을 대표하는 상징물이 되었으며, 마오쩌둥 초상화와 슬로건이 걸려 있고, 역사적 사건의 중심지이자 관광 명소이다. - 1420년 완공된 건축물 - 천단
천단은 중국 베이징에 위치한 명청시대 제례 건축물로, 황제가 하늘에 제사를 지내고 풍년을 기원하던 곳이며, 천원지방 사상에 따라 설계된 건축물과 상징적 배치가 특징적이고, 현재는 시민들의 공원으로 활용되며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다. - 자금성 - 태극전
태극전은 자금성 내에 위치한 건물로, 명나라 때 미앙궁으로 지어져 황후와 후궁의 거처로 사용되었으며, 청나라 시대에는 여러 차례 수리를 거쳐 서태후가 경극 관람을 위해 사용하기도 했다. - 자금성 - 함복궁
함복궁은 자금성 내 서6궁 중 하나로, 명나라 때 수안궁으로 건립되어 가정제 때 함복궁으로 이름이 바뀌었으며, 청나라 시기에는 후궁들의 거처로 사용되고 건륭제, 가경제, 도광제, 함풍제 등이 머물렀던 주요 건축물이다. - 중국의 궁전 - 대명궁
대명궁은 당나라 수도 장안에 위치했던 궁궐로, 당 고종 때 완공되어 당나라 정치 중심지 역할을 수행했으며, 주요 전각과 호수를 갖추고 안사의 난 이후 중요한 역할을 했으나 낙양 천도와 함께 소멸되었고, 현재는 대명궁 국가유적공원으로 조성되어 실크로드의 일부로 세계유산에 등재되었다. - 중국의 궁전 - 원명원
원명원은 청나라 황실 정원으로 옹정제, 건륭제, 가경제 시대를 거치며 확장되었으나, 1860년 영불 연합군에 의해 파괴되어 유적지로 남았으며, 현재 보존 및 복원 노력과 함께 문화재 반환 문제, 복원 방식 논쟁 등 사회적 반향을 일으키고 있다.
자금성 | |
---|---|
지도 정보 | |
기본 정보 | |
![]() | |
이름 | 자금성 |
중국어 간체 | 紫禁城 |
중국어 병음 | Zǐjìnchéng |
만주어 | ᡩᠠᠪᡴᡡᡵᡳ ᡩᠣᡵᡤᡳ ᡥᠣᡨᠣᠨ |
만주어 로마자 표기 | dabkūri dorgi hoton |
만주어 뜻 | 이전 내부 도시 |
기타 중국어 표기 | 광둥어: Zi2-gam3-sing4 예어: Jí-gam-sìhng 민난어: Chí-kìm-siâⁿ 대만어: Tsí-kìm-siânn 우어: Tzu3-chin4-ch eng2 |
설립 | 1406년–1420년, 1925년 (공공 박물관으로 개방) |
유형 | 미술관 황궁 사적지 |
면적 | 72 헥타르 |
건축 양식 | 중국 건축 |
건축가 | 콰이샹 |
유네스코 세계 문화유산 등재 | 1987년 (등재 번호: 439-001) |
유네스코 세계 문화유산 기준 | 문화: i, ii, iii, iv |
관람객 수 | 1670만 명 |
웹사이트 | 중국어 웹사이트 영어 웹사이트 |
위치 정보 | |
주소 | 중국 베이징시 둥청구 경산 앞거리 4 |
좌표 | 39°54′57″N 116°23′27″E |
박물관 정보 | |
관장 | 왕쉬둥 |
기타 정보 | |
가치 | 696억 6천만 달러 이상 (약 540억 파운드 이상) |
관련 명칭 | 자금성 고궁 고궁박물원 |
중국어 정보 | |
중국어 간체 | 紫禁城 |
중국어 번체 | 紫禁城 |
중국어 병음 | Zǐjìnchéng |
한어 병음 | ㄗˇ ㄐㄧㄣˋ ㄔㄥˊ |
가타카나 | 쯔진청 |
유네스코 정보 | |
등재명 | 명청 왕조의 황궁 (베이징과 선양) |
2. 명칭
자금성은 그 엄청난 규모와 황제(황제), 황실(황실), 그리고 내시를 제외한 모든 사람들의 출입을 엄격히 제한했기에 그 이름이 붙여졌다. 무단으로 궁궐에 들어가면 즉결 처형이라는 형벌이 있었다.[8]
1406년 명나라 영락제가 베이징으로 천도하면서 건설을 시작한 황궁으로, 명나라부터 청나라 시대까지 24명의 황제가 살았던 궁궐이다. 자금성 주위는 해자와 성벽으로 둘러싸여 있는데, 해자의 너비는 52m, 깊이는 6m이다. 궁궐 주위 장벽의 길이는 4km, 높이는 10m나 된다. 자금성은 중국에 현존하는 가장 크고 보존이 잘 된 고대 건축물이며, 황제만 사용할 수 있는 용 문양이 곳곳에 새겨져 있다.[11]
"자금성"이라는 이름은 여러 의미를 지닌다. "자(紫)" 또는 "자주색"은 북극성을 가리키는데, 고대 중국에서는 이 별을 자미성(紫薇星)이라고 불렀고, 전통적인 중국 점성술에서는 옥황상제의 천상의 거처였다. 주변 천체 지역인 자미원(紫微垣|자미원중국어)은 옥황상제와 그의 가족의 영역이었다. 지상의 황제의 거처인 자금성은 그 지상의 상응물이었다. "금(禁)"은 금지 또는 타부를 의미한다. "성(城)"은 원래 성, 요새 또는 방어 시설을 의미했지만, 현대 중국어에서는 도시를 의미한다.
오늘날 이 유적지는 중국어로 ''고궁(故宮)''(故宮|고궁중국어)이라고 가장 흔히 알려져 있는데, 이는 "옛 궁궐"을 의미한다.[10] 이 건물들을 기반으로 한 박물관은 "고궁박물원"(故宮博物院|고궁박물원중국어)으로 알려져 있다.
명나라와 청나라 시대에 자금성은 ''대내(大內)''(大內|대내중국어) 또는 "궁성(宮城)"(宮城|궁성중국어)으로도 알려져 있었다.
3. 역사
1961년 중국 정부로부터 제1차 전국 중점문물보호단위로 지정되었고, 1987년에는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지정되었다. 자금성은 건축물과 고대 예술품, 궁정 역사 유적 등을 전시하는 대형 종합 박물관이기도 하다.
자금성은 거의 500년 동안 황제와 그 가족들의 거주지이자 중국 정부의 상징적, 정치적 중심지였다. 1949년 중국 공산당 지도자 마오쩌둥은 천안문에서 중화인민공화국 건국을 선포했다.
최근 자금성 내 상업 시설 입점에 대한 논란이 있었다. 2000년 문을 연 스타벅스는 반발을 불러일으켜 2007년 문을 닫았고, 2006년에는 일부 기념품 가게가 외국인 관광객에게 바가지를 씌우기 위해 중국인 입장을 거부한다는 보도가 나오기도 했다. 2017년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자금성 내에서 만찬을 가지며 중화인민공화국 역사상 처음으로 자금성 내부에서 식사한 미국 대통령이 되었다.
2024년 11월 5일은 마지막 황제 푸이가 궁궐에서 쫓겨난 지 100주년이 되는 날이었다.
3. 1. 명나라 시대
영락제가 1406년 자금성 건축을 시작하여 1420년 완공되기까지 14년이 걸렸으며, 100만 명 이상의 노동자가 동원되었다.[11][12] 중국 남서부에서 발견되는 고급 녹나무와 베이징 근처에서 채취되는 큰 대리석 등이 사용되었고, 정전 바닥은 쑤저우에서 특별히 구운 "금 벽돌"로 포장되었다.[12][13]
1420년부터 1644년까지 자금성은 명나라의 중심지였다. 그러나 명 후기, 나라의 혼란이 극심해지면서 1644년 4월, 이자성이 이끄는 반군에게 함락되어 자신을 순나라의 황제로 선포했다.[14] 그는 곧 전 명나라 장군 오삼계와 만주족의 연합군 앞에 도망쳤고, 그 과정에서 자금성 일부에 불을 질렀다.[15]
3. 2. 청나라 시대
이자성의 군대를 격파한 만주족은 중국 북부에서 우위를 점했고, 순치제는 자금성에서 청나라가 중국 전체를 통치한다고 선포하는 의식을 거행했다.[16] 청나라의 통치자들은 주요 건물의 이름을 "최고"가 아닌 "조화"를 강조하는 의미로 바꾸었으며,[38] 건물 명판을 중국어와 만주어 두 가지 언어로 표기했다.[17] 또한 궁궐에 샤머니즘적인 요소를 도입했다.[18]
1860년 2차 아편전쟁 중에는 영국과 프랑스 연합군이 자금성을 점령하여 전쟁이 끝날 때까지 점령했다.[19] 1900년 의화단 운동 당시 서태후는 자금성을 떠나 피신했고, 이듬해까지 조약국 군대가 자금성을 점령했다.[19]
1908년 12월, 서태후가 아이신기오로 푸이를 차기 황제로 지명함으로써, 푸이는 겨우 2살 10개월 만에 황제에 즉위하여 청나라 제12대 선통제가 되어 자금성에 거처를 마련한 중국 마지막 황제가 되었다.
1911년 10월 신해혁명이 일어나고, 위안스카이의 요구를 받아 1912년 2월 푸이는 퇴위했지만, 중화민국 임시정부의 "우대 조건"으로 푸이와 그의 일족은 자금성 내정 거주를 허락받았다.
그러나 1924년 10월 펑위샹의 베이징 정변 당시, 11월 5일을 기하여 푸이를 포함한 황족은 자금성에서 퇴거하라는 통고를 받았고, 이후 '''고궁'''이라 불리며 루브르 박물관 등의 사례를 따라 1925년 10월 10일에 박물관으로 조직되었다.
3. 3. 중화민국 시대
1912년 중국 마지막 황제인 푸이가 퇴위하면서 자금성은 중국의 정치 중심지에서 벗어났다. 협정에 따라 푸이는 내정(Inner Court)에 머물렀고, 외정(Outer Court)은 공공 용도로 사용되었다.[20] 그러나 1924년 쿠데타로 푸이는 자금성에서 쫓겨났다.[21] 이후 1925년 자금성에는 고궁박물원이 설립되었다.[22]
1911년 신해혁명이 발발하고, 1912년 푸이가 퇴위하였으나, 중화민국 임시정부의 "우대 조건"에 따라 푸이와 그 일족은 자금성 내정에 거주하는 것이 허락되었다.
그러나 1924년 펑위샹의 베이징 정변으로 푸이를 포함한 황족은 자금성에서 퇴거하라는 통고를 받았고, 이후 '''고궁'''은 1925년 10월 10일 박물관으로 조직되었다.
3. 4. 중화인민공화국
1949년 중화인민공화국 수립 후, 혁명 열기에 휩싸인 국가에서 자금성은 일부 손상되었다.[26] 그러나 문화 대혁명 기간 동안 저우언라이 총리가 자금성을 지키기 위해 군 부대를 파견하면서 더 이상의 파괴는 막았다.[27]
1961년 중국 국무원에 의해 국가 중요문화재로, 1987년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지정되었다. 현재 건물 자체도 명나라와 청나라의 역사를 전하는 고궁박물원의 유물 중 하나로 일반에 공개되고 있다.
1987년 “명과 청 황제의 궁궐”로서 유네스코 세계 문화 유산에 지정된[28] 자금성은 현재 고궁박물원이 관리하고 있으며, 모든 건물을 1912년 이전 상태로 수리하고 복원하기 위해 16년간의 재건 프로젝트를 진행하고 있다.
최근에는 자금성 내부에 입주한 상업 기업의 존재가 논란이 되고 있다. 2000년에 오픈한 스타벅스는 반대를 불러일으켰고 결국 2007년 7월 13일에 문을 닫았다. 2006년에는 외국 방문자에게 가격을 속이기 위해 중국 시민들의 입장은 거부하는 몇몇 기념품 숍에 대한 보도도 있었다.
2017년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자금성 내부에서 만찬을 하며, 중화인민공화국 역사상 처음으로 자금성 내부에서 식사를 한 미국 대통령이 되었다.
중화인민공화국베이징시의 고궁박물원()은 원래 궁궐(紫禁城, 별칭은 고궁)이었던 곳을 박물관으로 만든 곳이다. 2011년 5월 기준으로 소장품은 회화, 도자기, 서적 등 180만 점이다(청나라가 남긴 유물은 전체의 약 85%이다)[105].
2007년 인정된 중국의 5A급 관광지이다.[106] 일반 입장료는 40위안(4월부터 10월까지는 60위안)이다. 유학생의 경우 학생증으로 학생 할인이 적용될 수 있지만, 기본적으로 외국인은 어린이도 일반 요금이 적용된다. 120cm 이하의 어린이는 외국인을 포함하여 무료이다. "진보관" 및 (시계)관은 각각 별도 요금(10위안)이다. 부지는 넓고, 매점과 간이식당이 있다[107]. 또한 많은 언어의 음성 가이드 서비스가 준비되어 있으며, 그중에는 인공 언어인 에스페란토도 있다. 등급은 중국 국가 1급 박물관으로 분류된다.
정치적 사정으로 분리된 타이완(중화민국)의 국립고궁박물원과는 2009년 10월에 처음으로 공동 전시회 "옹정제 - 청·세종 문화재 대전"을 개최했으며[108], 2016년 9월에는 국립고궁박물원 원장 퇴임 직후의 펑밍주가 중화인민공화국 정부의 초청으로 베이징 고궁박물원 고문에 취임하여 타이완에서 논란이 되었다[109].
2013년부터 문화재 보호와 서비스 향상을 목표로 하는 "평안고궁" 프로젝트가 진행되고 있다[110].
2022년 7월에는 고궁박물원에서 대여한 미술품을 이용하여 홍콩고궁문화박물관이 개관했다[111].
현재는 고궁박물원 부지 밖이 된 천안문과 단문에 오르는 것도 유료로 가능하며, 정문인 오문 앞에도 민영의 작은 전시관이 많이 있다.
2024년 7월 27일 "베이징 중축선: 중화의 이상적 질서를 보여주는 건축물군"의 일부로 또 다른 세계유산에 등재되었다.[89]
4. 구조
자금성은 해자와 성벽으로 둘러싸여 있다. 해자는 너비 52m, 깊이 6m이며, 동서남북으로 해자를 가로지르는 4개의 다리가 있다. 궁궐 주위의 성벽은 길이 4km, 높이 10m이며, 4개의 큰 출입구가 있다. 자금성은 중국에서 가장 크고 보존이 잘 된 고대 건축물로, 황제의 상징인 용 문양이 곳곳에 새겨져 있다.
1406년 명나라 영락제가 베이징으로 천도하면서 건설한 황궁으로, 명~청 시대 24명의 황제가 살았던 궁전이다. 1961년 중국 정부는 자금성을 제1차 전국 중점문물보호단위로 지정했고, 1988년에는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다. 자금성은 건축물, 고대 예술품, 궁정 역사 유적 등을 전시하는 대형 종합 박물관이기도 하다.
자금성은 명나라부터 청나라까지(1420~1912) 중국 황실의 궁궐이었다. 베이징 중심에 위치하며 현재는 궁궐 박물관으로 사용되고 있다. 거의 500년 동안 중국 정부의 중심이었으며, 황제와 그 가족들의 거처였다. 1406년부터 1420년까지 지어졌고, 전체 980여 채의 건물과 72 헥타르의 넓이를 가지고 있다.
자금성은 직사각형 구조로 남북으로 961m, 동서로 753m이다. 현재 980개의 건물이 있고, 8,886개의 방이 있다. 자금성 안에는 9,999개의 방이 있다는 소문이 있지만, 조사 결과 사실이 아닌 것으로 밝혀졌다. 청나라 시대까지만 해도 자금성은 황성의 일부였고, 황성은 베이징 내성의 일부였다. 황성에서 남쪽으로 내려가면 베이징 내성을 지나 베이징 외성으로 나갈 수 있었다.
자금성은 남북 축을 따라 건물들이 배열되어 있으며, 이 축을 따라가면 천안문 광장과 베이징 외성의 정문까지 곧바로 갈 수 있다. 이 축은 정확히 남북은 아니고, 약 2도 정도 비틀어져 있는데, 학자들은 이 축이 원나라 시대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한다.
자금성은 고대 베이징 성곽 도시의 중심으로 설계되었으며, 황궁이라 불리는 더 큰 성곽 지역 안에 있다. 황궁은 다시 내성 안에 있으며, 남쪽에는 외성이 있다. 베이징의 도시 계획에서 여전히 중요한 의미를 지니는 자금성의 중앙 남북축은 베이징의 중심축으로 남쪽으로는 천안문을 지나 천안문 광장과 용정문까지 이어진다. 북쪽으로는 징산 공원을 지나 고루와 종루까지 이어진다.[36] 이 축은 정확히 남북으로 정렬되어 있지 않고 2도 이상 기울어져 있는데, 연구자들은 이 축이 원나라 시대에 그들의 다른 수도인 상도와 정렬되도록 설계되었다고 믿고 있다.[37]
베이징의 고궁은 남북 길이 961m, 동서 너비 753m, 면적 72ha, 약 980개의 건물로 구성되어 있다. 주변은 너비 52m의 해자가 둘러싸고 있다. 성벽의 높이는 12m이고, 바닥 두께는 10m, 꼭대기 두께는 6m~7m이다. 남쪽에는 오문(午門), 동쪽에는 동화문(東華門), 서쪽에는 서화문(西華門), 북쪽에는 신무문(神武門)[90]이 있다.
자금성이라는 이름은 상제(창조주)가 살고 있다고 여겨지는 별인 '''북극성'''을 '''자미성(紫微星)'''이라고 하고, 북극성 주변을 도는 별자리 주변을 자미원(紫微垣)이라고 부른 데서 유래한 「'''자'''궁(紫宮)」과, 「상제의 명을 받들어 세계 질서 유지를 책임지는 황제(천자)」의 거처인 「'''금'''성(금단의 성, 서민들이 자유롭게 출입하는 것을 금지한 성)」이라는 두 단어를 합쳐 만든 것이다.[91]
자금성은 세계의 중심을 지상에 구현한 영역이며, 상제를 대신하여 지상을 다스리는 황제의 궁전으로 건설되었다. 그래서 “천자는 '''남면'''한다”는 말처럼, 북쪽에 황제의 궁전이 위치해 있다.
자금성 주변에는 중난하이, 원명원, 이화원 등의 별궁도 건설되었다. 이들은 정원을 중심으로 한 시설로 자금성보다 훨씬 넓은 부지를 가지고 있다.
자금성은 크게 외조(外朝)와 내조(內朝) 두 부분으로 나뉜다.
- '''외조(外朝)''': 황제가 공식적인 업무를 처리하고 의례를 행하던 곳이다.
- '''내조(內朝)''': 황제와 황실 가족들이 생활하던 사적인 공간이다.
외조와 내조에는 각각 3개의 주요 건물이 중심축에 위치해 있다.
외조의 주요 건물:
- 태화전(太和殿): 자금성에서 가장 크고 중요한 건물로, 황제의 즉위식이나 국가적인 행사가 열렸다.
- 중화전(中和殿): 황제가 태화전에서 행사를 치르기 전 잠시 머무르며 준비하던 곳이다.
- 보화전(保和殿): 태화전과 비슷한 용도로 사용되었으며, 과거 시험이 치러지기도 했다.
내조의 주요 건물:
- 건청궁(乾淸宮): 명나라 시대에는 황제의 침실이었으나, 청나라 시대에는 집무실로 사용되었다.
- 교태전(交泰殿): 황후의 생일 축하 행사 등이 열렸던 곳이다.
- 곤녕궁(坤寧宮): 명나라 시대에는 황후의 침실이었으나, 청나라 시대에는 만주족의 전통 제례 의식을 치르는 곳으로 바뀌었다.
내조의 서쪽과 동쪽에는 각각 서6궁(西六宮)과 동6궁(東六宮)이 있는데, 이곳은 황실 후궁들의 거처였다.
그 외에도 자금성에는 다음과 같은 다양한 용도의 건물들이 있다.
- '''문연각(文淵閣)''': 사고전서를 보관하기 위해 지어진 도서관이다.
- '''남3소(南三所)''': 명나라 때는 황태자가 살던 곳이었으나, 청나라 때는 황자들의 처소로 사용되었다.
- '''영수궁(寧壽宮)''': 건륭제가 퇴위 후 살기 위해 지은 궁전으로, 자금성의 축소판과 같은 구조를 가지고 있다.
- '''구룡벽(九龍壁)''': 영수궁 권역의 황극문 바깥에 있는 벽으로, 9마리의 용이 새겨져 있다.
- '''어화원(御花園)''': 황제와 후비들이 휴식을 취하던 정원이다.
- '''건복궁화원(建福宮花園)''': 강남 지역 원림의 느낌을 살려 조성한 정원이다.
- '''진비정(珍妃井)''': 광서제의 애첩 진비가 서태후에 의해 죽임을 당한 우물이다.
- '''창음각(暢音閣)''': 황실 가족과 신하들이 연희와 경극 등을 관람하던 극장이다.
4. 1. 성벽과 문
자금성은 높이 7.9m의 성벽과 깊이 6m, 폭 52m의 해자로 둘러싸여 있다. 성벽은 아래쪽이 8.62m, 위쪽이 6.66m로 위로 갈수록 좁아지는 구조이다. 이 성벽들은 모두 단단히 굳힌 흙으로 쌓았으며, 양면에는 벽돌을 두르고 모르타르로 접착했다.[38][39][40]성벽의 네 모서리에는 72개의 모서리를 지닌 거대한 누각인 각루(E)가 있다. 이는 송나라 시대의 설화에서부터 전해져 오는 구조를 답습한 것이다. 성벽을 제외한 높이는 약 27.5m이고, 당시의 모습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는 건물들 중 하나이다. 이 탑들은 외부에서 자금성을 볼 때 가장 눈에 잘 띄는 구조물이었기 때문에, 이와 관련된 설화도 많다. 청나라 시기에 장인들이 이 누각을 보수공사할 때, 그 설계가 워낙 교묘하여 함부로 손을 대지 못했고, 결국 전설적인 목수 루반의 손을 빌려서야 겨우 보수할 수 있었다는 이야기가 전해온다.[38]
벽의 네 면에는 각각 정문이 하나씩 있는데, 남쪽에는 오문(A), 북쪽에는 신무문(B), 동쪽에는 동화문(D), 서쪽에는 서화문(C)이 있다.

오문(午門)은 1420년에 처음으로 세워졌고, 1647년과 1801년에 보수 공사를 거쳐 현재의 모습에 이르렀다. 정면 9칸(60.05m), 측면 5칸(25m)의 전루를 가지고 있고, 자금성의 다른 문들과는 달리 양 옆에 두 개의 날개가 펼쳐져 있다. 오문에는 총 5개의 문이 있는데, 이들 중 3개는 가운데 부분에, 나머지 2개는 양 옆의 날개 부분에 있다. 맨 가운데 문은 오직 황제만이 출입할 수 있었고, 유일한 예외는 결혼식 날의 황후와 과거시험에서 장원에 급제한 학자들이었다. 나머지 관리나 시종들은 모두 양 옆의 4개 문을 사용했다. 오문을 지나면 태화문으로 들어갈 수 있다.[42][43]
오문은 '오봉루(五鳳樓)'라고도 불리는데, 이는 5개의 전각들로 구성된 오문이 마치 봉황이 날개를 활짝 펼친 모습과 비슷하다고 여겨졌기 때문이다. 황실 칙령과 법령이 이곳에서 공포되었고, 장수들이 전쟁에서 승리하고 돌아왔을 때 황제가 이 문에서 군사들을 치하했다. 가끔씩 이 행사와 함께 전쟁 포로들이 참수되기도 했다. 민간 구전에는 이곳에서 태만한 관리들이 사형당했다는 말도 있으나, 실제로는 체벌에 준하는 형벌을 받는 것에 그쳤다.

신무문(神武門)은 자금성의 북문이자 후문이다. 1420년에 영락제가 자금성을 지을 때 함께 처음으로 지어졌고, 그 당시의 이름은 현무문(玄武門)이었다. 하지만 나중에 강희제가 즉위하며, 황제의 이름에 玄자가 들어가 있다는 이유로 문의 명칭에서 이 한자를 빼버리고 대신 神자로 피휘하였다.[95] 신무문을 나서면 먼저 자금성의 해자가 나오고, 이를 지나서 경산공원으로 올라갈 수 있다. 정면 5칸, 측면 1칸의 전루가 위에 있으며, 총 3개의 문이 있다. '고궁박물원'이라는 뜻의 편액이 입구 위에 걸려있다. 선통제가 퇴위하며 자금성을 떠날 때 이 문을 이용한 것으로 유명하다.

동화문(東華門)은 자금성의 동문이다. 1420년, 다른 문들과 함께 처음으로 지어졌다. 정면 5칸, 측면 3칸의 전루를 가지고 있다. 청나라 시절에는 황제나 황후, 황실 고위 인사들이 세상을 떠났을 때 그 재궁(梓宮)이 이곳을 통하여 나갔기에 이 문을 귀신의 문, 즉 '귀문(鬼門)'이라고 부르기도 하였다.

서화문(西華門)은 자금성의 서문이다. 동쪽에 있는 동화문과 거의 일치하는 모습을 하고 있으며, 1420년에 처음으로 지어졌다. 동화문과 마찬가지로 정면 5칸, 측면 3칸의 각루를 갖고 있다. 1900년 당시 8개국 연합군이 베이징을 점령하였을 때, 서태후와 광서제가 이 문을 통하여 자금성을 급히 빠져나갔다.
4. 2. 외조(外朝)
전통적으로 자금성은 두 부분으로 나뉘는데, 남쪽의 외조(外朝)는 의례용으로 사용되었다. 일반적으로 자금성에는 세 개의 수직 축이 있으며, 가장 중요한 건물들은 중앙 남북 축에 위치해 있다.[42]정양문으로 들어가면 구불구불한 내금수하를 가로지르는 다섯 개의 다리가 있는 큰 광장이 나온다. 광장 너머에는 태화문(太和門)이 있다. 그 뒤에는 3단의 흰색 대리석 계단이 있는 광장[53]이 있고, 이 계단 위에는 궁전 단지의 중심인 세 개의 궁전이 있다. 남쪽에서부터 태화전(太和殿), 중화전(中和殿), 보화전(保和殿)이다.[44]
태화문(太和門)은 태화전으로 통하는 전문으로, 명나라 때 처음 지어졌을 때에는 봉천문(奉天門)이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었으며, 가정제 때 황극문(皇極門)으로 개칭되었으며, 이후 순치제 때 태화문이라는 이름을 얻게 되었다.[44] 1886년에 등불에서 번진 불길로 인해 한번 전소되었던 바 있으며, 현존하는 유적은 1894년에 다시 복구한 것이다. 정면 9칸, 측면 3칸의 건물이며, 높이 23.8m, 면적은 1371.4m2이다. 명나라 시대에 황제가 이곳에서 신하들의 아침 조회를 받았으나 실질적인 업무는 하지 않았고 거의 황제의 성실성을 보여준다는 식의 상징성을 띠고 있을 뿐이었다. 청나라 시대에는 주로 건청문에서 황제의 아침 조회가 열렸고, 태화문은 조금 더 상징적인 행사들을 주로 수행하는 역할을 맡았다. 태화문의 왼쪽에는 정경문(貞慶門), 오른쪽에는 소덕문(昭德門)이 자리한다.


태화전(太和殿)은 자금성의 정전으로, 높이 8.13m의 3층 백색 대리석 기단 위에 세워졌고, 총 높이는 35.05m이며 청동 화로들이 그 주위에 세워져 있다. 본래 명나라 시대에는 봉천전(奉天殿)이라는 이름이었으나, 1562년 가정제 때 황극전(皇極殿)이라는 이름으로 개칭되었고, 현재의 이름 '태화전'은 청나라 시대에 순치제가 1645년에 직접 지은 이름이다. 면적 2368m2, 폭 66m를 자랑하며, 정면 11칸, 측면 5칸의 건물이며 자금성 내부에서 규모가 가장 큰 건축물이다. 또한 중국에서 현존하는 가장 거대한 목조 건축물이기도 하다. 태화전의 천장에는 거대한 황금 용이 조각되어 있으며, 거대한 여의주를 물고 있다. 전설에 따르면, 황제에게 반역할 뜻을 품고 있는 자가 이 앞에 서면 천장의 용이 이 여의주를 뱉어내 그자를 죽인다고 한다. 총 72개의 남목 기둥으로 지탱되고 있으며, 그들 중 특히 황제의 옥좌와 가까운 6개의 기둥들은 모두 금이 덧씌워져 있으며, 옥좌는 황금으로 용이 꿈틀되며 승천하는 모습이 새겨져 있다. 명나라 시대에는 황제가 바로 이곳에서 대신들과 국사를 의논하였으며, 청나라 시대에는 이곳에서 황제의 즉위식, 결혼식, 책봉식과 같은 국가의 가장 중요한 행사들만 열리게 되었다. 또한 명, 청 시절 24명의 황제가 제위를 물려받을 때 모두 태화전에서 성대한 의식을 거행하였다.[47]


중화전(中和殿)은 태화전에서 행사가 있을 때, 이를 준비하기 위해 내조에서 나온 황제가 잠시 쉬던 곳이며, 황제가 예복을 갈아입던 의상실이었다. 정면 3칸, 측면 3칸의 정방형 모습을 하고 있으며 높이는 약 29m, 면적은 580m2이다. 1420년에는 화개전(華蓋殿)이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었으며, 가정제 때 중극전(中極殿), 순치제 때 현재의 이름인 중화전으로 개칭되었다. '중화'라는 단어는 예기(禮記)의 중용(中庸)의 구절들 중, '중이란 천하 모든 것의 가장 큰 근본이며, 화란 천하 모든 것에 두루 통하는 도이다(中也者天下之本也, 和也者天下之道也)'라는 구절에서 따온 것이라고 한다. 보통 황제들은 이 곳에서 간단한 상소문들을 읽고 처리하거나 신하들을 잠시 만나기도 하였으며, 이 곳에서 예복을 갈아입고 태화전 쪽으로 나갔다.[48] 특히 청나라의 황제들은 의상 감각이 유난히 뛰어났다고 하며, 법도에 따라 특정 달, 특정 날에 입는 예복이 정해져 있었지만 평상복도 오늘 입었던 것은 그 다음 날 입지 않을 정도로 호화로운 생활을 하였다고 한다. 또한 중화전은 황제가 개인적으로 대신들이나 외국사절을 만나기도 한 곳이기도 하고, 과거 시험을 치르는 곳이기도 하였다.

보화전(保和殿)은 태화전과 같은 설계로 만들어졌으나, 태화전보다는 약간 작은 크기로 높이 29.5m, 면전 1240m2이다. 정면 9칸, 측면 5칸의 전각이며 1420년에는 근신전(謹身殿), 가정제 때에는 건극전(建極殿), 순치제 때에 보화전이라는 이름으로 바뀌었다. 또한 명나라 당시에는 중화전과 마찬가지로 황제가 이 곳에서 약간의 휴식을 취하거나 상소문을 읽고 신하들을 접견하는 등 간단한 일상 업무들을 소화하였다. 추가적으로 보화전에서는 황제가 제야, 정월보름 및 비정기적으로 대신들을 대상으로 성대한 연회를 벌였으며, 청나라 건륭제때부터 이곳에서 과거의 최종시험을 치렀다.[49]

홍의각(弘義閣)은 무영전과 문화전과 마찬가지로, 동쪽에 위치한 체인각과 대칭을 이루는 구조로 지어졌다. 정면 9칸, 측면 3칸의 전각이며, 그 높이는 약 25m이다. 1420년, 명나라 시대 초기에는 무루(武樓), 가정제 때에는 무성각(武成閣), 청나라 순치제 시대에 지금의 이름인 홍의각이라는 이름을 갖게 되었다. 한때 이 곳에 명나라 시대의 편찬물은 <영락대전>이 보관되어 있었으나, 현재는 소장되어 있지 않다.

체인각(體仁閣)은 서쪽에 자리한 홍의각과 대칭을 이루는 전각으로, 정면 9칸, 측면 3칸, 높이 25m의 크기를 가지고 있다. 1420년, 명나라 초기에는 문루(文樓), 가정제 때에는 문소각(文昭閣), 청나라 순치제 재위 시에 체인각이라는 명칭을 얻었다. 1678년, 강희제 때에 143인의 학자들이 모여 명나라의 역사를 기록한 <명사(明史)>를 펴내었다. 1783년에 화재로 인해 소실되었다가 이후 다시 중건되었다.
외조의 궁전들에는 모두 거대한 대리석 답도가 용을 양각하여 조각되어 있다. 특히 보화전 뒤에 있는 거대한 답도는 무려 16.57m에 달하는 거대한 대리석을 통째로 깎아 만들었고, 무게가 200톤을 넘어가며, 중국에서 가장 큰 양각 조각이다.[12] 태화전 앞에 있는 답도도 거대하긴 하지만, 이 답도는 2개의 거대한 돌덩어리를 이어붙여 만든 것이다. 이 돌덩어리들의 이음새는 조각 사이에 워낙 교묘하게 숨겨져 있어 찾지 못하다가, 후에 20세기가 되어서야 보수 공사를 할 때 발견했다고 한다.[51]
4. 3. 내조(內朝)
내조는 자금성 안에서 벽으로 외조와 뚜렷하게 구분되며, 황실 가족이 생활하던 공간이다. 청나라 때 황제는 이곳에서 업무와 생활을 함께 했고, 외조는 주로 의례 용도로만 쓰였다. 내조에는 외조처럼 중심이 되는 세 개의 궁전이 있다.
건청문(乾淸門)은 건청궁과 외조를 잇는 문으로, 앞에는 보화전, 뒤에는 건청궁이 있다. 1420년에 처음 지어졌고 1655년에 다시 고쳐 지었다. 동쪽에는 경운문(景運門), 서쪽에는 융종문(隆宗門)이 있다. 자금성의 상징인 금으로 도금한 청동 사자상이 건청문 양옆에 있다.
건청궁(乾淸宮)은 2층 건물로, 흰색 대리석 단 위에 있다. 내조의 세 중심 전각 중 가장 크다. 건청문을 통해 들어갈 수 있으며, 명나라 때는 황제의 침실이었다. 그러나 청나라 옹정제 때부터 선대 황제를 기리기 위해 침실을 서쪽 양심전으로 옮기면서 건청궁은 업무를 보는 공간으로만 쓰였다. 건청궁은 황금 용으로 장식되어 있고, 황제 자리 위에는 순치제가 쓴 '정대광명(正大光明)' 액자가 걸려 있다. 황제 계승 시기에는 이 액자 뒤 함에 후계자 이름을 적어 보관했고, 황제가 죽은 뒤 함을 열어 생전 쪽지와 함 속 이름이 같으면 새 황제로 즉위했다. 부속 건물로는 단응전(端凝殿), 무근전(懋勤殿) 등이 있다.

교태전(交泰殿)은 건청궁과 곤녕궁 사이에 있는 정사각형 모양 건물로, 피라미드 모양 황색 기와지붕으로 덮여 있다. 황후 생일인 천추절 축하 행사를 이곳에서 했다. 건륭제 때 25개 옥새를 만들어 보관했다. 건륭제가 만든 물시계와 가경제가 만든 서양식 자명종도 전시되어 있다.

곤녕궁(坤寧宮)은 2층 건물이다. 원래 명나라 때 황후 침실이었다. 청나라가 자금성을 차지하면서 가장 큰 변화를 겪은 건물 중 하나다. 만주족 샤머니즘 신앙이 들어오면서 곤녕궁 앞에 샤머니즘 장식, 우상, 기도용 비단 매트 등이 놓였다. 옹정제 이후 곤녕궁을 동난각과 서난각으로 나누었다. 동난각은 황제와 황후 신혼방, 이후에는 황후 침실로 쓰였다. 서난각에서는 만주족 전통 제례 의식을 치르고 양, 소 등을 하늘에 바쳤다.

양심전은 명나라 가정제 때 처음 지어졌고, 청나라 때 크게 확장해 다시 지었다. 옹정제 때부터 황제 침실로 사용하기 시작해 총 8명 황제가 이곳을 침실로 썼다. 양심전은 중앙 주홀과 보조 방으로 나뉜다. 중앙 홀에서는 만주족 대신들과 황제가 정무 토론을 했고, 보조 방은 황제 침실로 쓰였다. 동치제와 광서제 때 동태후와 서태후가 수렴청정을 했다. 이곳에서 청나라 마지막 어전회의가 열려 황태후가 선통제 퇴위 조서에 도장을 찍었다.
세 궁전 뒤에는 황실 정원이 있고, 정원을 지나면 신무문으로 자금성을 나갈 수 있다. 내전 서쪽에 양심전이 있는데, 원래 부속 궁전이었으나 옹정제가 주요 침소로 쓰면서 중요 건물이 되었다. 청나라 후대에는 대부분 국정이 내전 동쪽에서 이루어졌고, 특히 서태후 집권 시기에 이런 경향이 강했다. 양심전 주위에는 주요 회의 기구와 정부 기관이 들어왔다.
내조 북동쪽에 건륭제가 퇴위 후 살기 위해 지은 영수궁이 있다. 자금성 양식을 본떠 지었고, 외조, 내조, 사원, 정원까지 비슷하다. 영수궁 입구에는 구룡벽이 있고, 2017년 보수, 복원공사를 마쳤다.
4. 4. 동6궁(東六宮)과 서6궁(西六宮)

내정의 세 주요 건물 서쪽과 동쪽에는 서6궁(西六宮)과 동6궁(東六宮)이 있는데, 이 궁들은 황실 후궁들의 거처였다. 세 주요 건물의 서쪽과 동쪽에 각각 여섯 개의 궁이 있었기에 이러한 이름이 붙었다. 통로로 연결된 열두 개의 궁궐 건축 양식은 거의 동일하다. 서6궁과 동6궁은 모두 남북으로 이어지는 골목길 양쪽에 세 개의 궁궐이 있는 배치를 가지고 있다. 각 궁궐에는 자체적인 안뜰, 정전, 측전이 있다. 정전은 중앙에 있고, 측전은 동쪽과 서쪽에 있다. 앞마당과 정전은 접견에 사용되었고, 뒷마당과 정전은 거주 공간으로 사용되었다.[62][63]
첩 이상의 품계를 가진 황실 후궁에게는 궁궐의 주요 구역에 거처가 주어졌고, 그 궁궐의 관리자가 되었으며, 그 자체로 영광이었다. 낮은 품계의 황실 후궁(귀인 이하)들은 궁궐의 측전에 거주하며 상위 품계의 황실 후궁의 감독을 받았다.[62][63]
열두 궁궐은 많은 청나라 황제들이 태어나고 성장한 곳이며, 황실의 일상생활을 이루었다.[62][63]
청나라 말기, 서태후는 서6궁 중 한 곳에 거주하며 "서쪽 황후"로 알려졌고, 섭정을 함께 한 동태후는 동6궁 중 한 곳에 거주하며 "동쪽 황후"로 알려졌다.
궁궐의 이름은 다음과 같다.
동6궁(東六宮) | 서6궁(西六宮) |
---|---|
4. 5. 기타 구역
- '''전심전(傳心殿)''' : 문화전 동쪽에 있는 제사 의례용 건물이다. 동서 길이 25m, 남북 길이 100m 구역 안에 제사 때 사용되는 건물들이 있다. 경산정(硬山頂)에 정면 5칸, 측면 3칸의 치생소(治牲所), 3칸의 축판방(祝版房), 3칸의 신주(神廚), 5칸의 치방(值房) 등이 있다. 청나라 강희제 때는 이곳에 복희·신농·요·순·우·탕·문왕·무왕, 주공, 공자의 신위를 모시고 철마다 제사를 지냈다.
- '''문연각(文淵閣)''' : 1776년에 완성된 전각으로, 1773년에 편찬된 사고전서를 보관하기 위해 지어졌다. 해녕 지역의 유명 장서각인 천일각의 구조를 참고하여 지었으며, 청나라의 대표적인 장서처인 북4각(문연각·문원각·문진각·문소각)과 남3각(문종각·문회각·문란각)의 건축 규범이 되었다. 자금성에서 거의 유일하게 검은색 기와를 얹었는데, 이는 검은색이 오행에서 '물'을 상징하여 화재를 예방하기 위함이었다고 한다.
- '''남3소(南三所)''' : 명나라 때는 황태자가 살던 곳이었으나, 청나라 강희제 때 일반 궁인들의 처소로 바뀌었다. 1746년에 다시 황자들의 처소로 사용되면서 전각과 정원을 새로 꾸몄다. 동쪽에 위치하여 생명과 성장을 상징하는 청색과 녹색의 유리기와를 얹은 것이 특징이다. 1782년 9월 16일 도광제가 이곳 힐방전에서 태어났다.
- '''내각대당(內閣大堂)''' : 청나라 때 전각대학사들이 모여 국사를 논하던 곳이다. 전각대학사는 현재의 국무위원과 비슷한 지위로, 국가에서 가장 명예로운 직책 중 하나였다.
- '''남훈전(南薰殿)''' : 명나라 때 세워진 정면 5칸의 전각으로, 금보와 금책문을 보관했다. 1749년(건륭 14)에 중수하여 역대 황제·황후·공신의 초상화 121축을 보관하는 진전으로 기능하였다. 그러나 장제스가 국부천대하면서 이 초상화들을 대만으로 가져가 현재는 타이베이 국립고궁박물원에 소장되어 있다.
- '''자녕궁(慈寧宮)''' : 1536년에 지어졌고, 화재로 소실되었다가 중건되었다. 청대에 이르러 1653년, 1689년, 1751년에 수리를 거쳤다. 명나라 때는 만력제의 생모 효정태후 등이 거주했고, 청나라 때는 순치제의 생모 효장문황후(孝莊文皇后, 1613.3.28~1688.1.27) 이래로 태황태후, 황태후 등의 정궁으로 사용되었다.
- '''대불당(大佛堂)''' : 자녕궁의 후전으로, 정면 7칸, 측면 3칸의 전각이다. 청나라 때 황태후와 황태비들이 예불을 올리던 장소로, 불상들과 불교 의례 기물들이 전시되어 있다.
- '''수강궁(壽康宮)''' : 자녕궁 서쪽에 있으며 1736년에 완공되었고, 1820년과 1890년에 중수하였다. 건륭제의 생모 효성헌황후(孝聖憲皇后, 1693.1.1~1777.3.2), 건륭제의 후궁 영귀비(穎貴妃, 1731~1800) 등이 이곳에서 거주했다.
- '''수안궁(壽安宮)''' : 수강궁 북쪽과 무영전 남쪽에 있는 전각이다. 1420년에 처음 지어질 때는 함희궁(咸熙宮)이었다가 1525년에 함안궁(咸安宮)으로, 1751년에 건륭제의 생모 효성헌황후의 육순을 기념해 수안궁으로 개칭하였다. 효성헌황후의 육순과 칠순 생일날 건륭제가 하례를 올렸던 장소다. 부속 전각으로 춘희전(春禧殿), 복의재(福宜齋), 훤수당(萱壽堂)이 있다.
- '''영화전(英華殿)''' : 정면 5칸의 전각으로, 1420년 처음 지어졌다. 당시에는 융희전(隆禧殿)이었다가 1567년에 영화전으로 개칭했다. 황태후와 태비, 태빈들이 예불을 올리던 장소로 사용되었다.

- '''황극전(皇極殿)''' : 1689년에 강희제의 재위 기간에 처음 지어졌다. 처음에는 영수궁(寧壽宮)이라 하였다가 1772년부터 1776년에 걸쳐 영수궁 권역을 새로 지을 때 전전을 황극전으로 개칭하였다. 1796년 건륭제가 가경제에게 양위하고 태상황으로 물러난 뒤 이곳에서 마지막 천수연을 거행했으며, 1894년에는 서태후의 60세 생일을 하례받았다. 1904년에는 서태후의 70세 생일을 하례하러 온 9개국 사절을 접견하기도 했다.
- '''구룡벽(九龍壁)''' : 영수궁 권역의 황극문 바깥에 있으며 길이 29m, 높이 3.5m, 두께 0.45m로 1772년에 세워졌다. 9마리의 용이 5개의 구역에 나뉘어 새겨져 있는데, 이는 역경에서 천자의 지위를 가리키는 구오지존(九五之尊)을 상징한다. 산서성 대동(大同)의 구룡벽, 북경 북해공원의 구룡벽과 함께 '중국 3대 구룡벽'으로 불린다. 동쪽에서 3번째 용은 일부가 깨져서 나무로 복원되었다.
자금성 구룡벽 - '''영수궁(寧壽宮)''' : 황극전 뒤쪽에 있는 전각으로, 영수궁의 후전이다. 광서제 때 서태후가 여기서 잠시 거주하면서 장식이 변형되었다가 1979년에 중수하면서 건륭제 때의 장식으로 복원했다.
- '''양성전(養性殿)''' : 1772년에 지어진 영수궁의 침전이다. 퇴위한 건륭제가 잠시 거주하기도 하였다. 이 전각도 서태후가 머물면서 장식을 변형시켜 원래의 모습을 잃어버렸다.
- '''낙수당(樂壽堂)''' : 양성전 뒤쪽에 있는 전각으로, 정면 7칸, 측면 3칸, 길이 36.15m, 너비 23.20m, 면적 839㎡의 크기이다. 1772년에 지어져 1802년과 1891년에 중수되었고, 1894년부터는 서태후가 이곳의 서난각을 침실로 사용했다. 이곳에는 건륭제 때 제작한 높이 224cm, 너비 96cm, 무게 5t에 이르는 옥세공품 <대우치수도옥산(大禹治水圖玉山)>이 보관되어 있다.
- '''이화헌(頤和軒)''' : 낙수당 뒤쪽에 있으며 정면 7칸, 측면 1칸의 전각으로 뒤쪽의 경기각과 천랑으로 연결되어 工자형 평면을 가진다. 1772년에 지어져 1802년과 1891년에 중수되었다.
- '''경기각(景祺閣)''' : 낙수당과 천랑으로 연결된 정면 7칸, 측면 3칸의 2층 전각이다. 1771년에 건설된 뒤 1802년과 1891년에 중수되었다. 경기각 동쪽 2층에는 옆의 작은 가산과 연결되는 한백옥 다리가 있다.
- '''창음각(暢音閣)''' : 1772년에 짓기 시작해 1776년에 완성한 3층 누각으로, 황실 가족과 신하들이 궁정에서 연희와 경극 등을 관람하던 극장이며 1802년과 1891년을 거쳐 수리하였다. 높이는 20.71m이고, 상층은 복대(福臺), 중층은 녹대(祿臺), 하층은 수대(壽臺)로 내부가 3개 층으로 구성된 희대(戱臺)가 있다. 서태후는 경극을 매우 좋아해서 생일날 이곳에서 경극을 관람했고, 광서제 때 서태후의 취향에 맞춰 창음각을 대대적으로 고쳐 지었다. 궁궐 내 현존하는 경극용 극장 건물로는 가장 규모가 크다.
- '''심연서옥(尋沿書屋)''' : 영수궁화원 안에 있으며 1772년에 지어진 정면 5칸, 측면 1칸의 전각이다. 현판은 건륭제의 어필로 되어 있으며, 서태후가 낙수당에 거처할 때 광서제가 매일 이곳에서 문안인사와 식사 시중을 들었다.
- '''고화헌(古華軒)''' : 영수궁화원 안에 있는 전각으로, 1772년에 건립되었다. 건륭제의 어필로 된 현판과 대련이 걸려 있으며, 단아한 장식이 특징이다.
- '''수초당(遂初堂) :''' 고화헌 뒤쪽에 있는 전각으로 1772년에 지어진 이후, 1802년과 1891년에 중수하였다. 정면 5칸, 측면 3칸의 전각이며, 건륭제의 어필로 쓰여진 한자와 만주어 현판이 걸려 있다.
- '''부망각(符望閣)''' : 영수궁화원에 있는 전각 중 가장 높은 건물로, 외부는 2층이지만 내부는 3층이다. 1772년에 세운 이래 1802년과 1891년에 중수하였다. 자금성 내 건복궁화원의 연춘각(延春閣)을 모방하여 지었다. 건륭제 때는 매년 정월 21일에 이곳에서 왕공대신들을 불러 음식을 내렸고, 가경제는 부망각에서 바라본 경치를 읊은 시를 짓기도 했다.
- '''권근재(倦勤齋)''' : 부망각 뒤쪽에 있으며, 영수궁화원의 가장 북쪽에 있는 전각이다. 1772년에 건복궁화원의 경승재(敬勝齋)를 모방해 지었으며 동쪽 5칸은 부망각과 마주보고 있다.
- '''경복궁(景福宮)''' : 1689년에 강희제가 양모 효혜장황후(孝惠章皇后, 1641.11.5~1718.1.7)의 거처로 지은 전각이다. 1772년에 중건하면서 건륭제가 국정을 돌본 이후 휴식을 취하는 공간으로 사용했다. 1802년과 1891년에 중수했다. 내부에는 건륭제 때 궁중에서 사용한 서양 기물들이 진설되어 있다.
- '''진비정(珍妃井)''' : 영수궁 북쪽 정순문(貞順門) 내에 있는 우물이다. 1900년에 8개국 연합군이 베이징을 점령하자 서태후가 서안으로 도망치기 직전 광서제의 애첩 진비(珍妃)를 우물 속에 던져 익사시킨 곳으로 유명하다. 이후 진비의 넋을 달래기 위해 작은 영당이 마련되었다.

- '''중화궁(重和宮)''' : 건륭제가 왕자 시절 지내던 곳으로, 황제 즉위 후 궁으로 바꾸었다. '중화'라는 명칭은 순 임금을 가리키는 경칭에서 유래했다. 1743년부터 매년 새해에 대학사와 한림들에게 다연(茶宴)을 베풀다가 함풍제 이후에는 중단되었다.
- '''우화각(雨花閣)''' : 수십 좌의 불상이 안치된 궁중에서 가장 큰 3층 불전으로, 1749년에 건륭제가 몽골 출신 국사의 건의에 따라 티베트 탁림사(托林寺) 단성전(壇城殿)을 모방해 개건했다. 꼭대기 지붕 처마에는 금박을 입힌 4마리 용 조각이 있다. 티베트 불교 라마승들이 황제와 황실 가족의 안녕을 기원하며 불공을 드리던 공간이었다.
- '''수방재(漱芳齋)''' : 1420년에 자금성을 처음 지을 때 세워진 뒤 건륭제 때 중수되어 황태후의 생일날 연회를 베풀고 축하하는 공간으로 사용되었다. 동치제의 후궁 헌철황귀비(獻哲皇貴妃, 1856.7.2~1932.2.3)가 이곳에 잠시 거주하기도 하였다.

- '''어화원(御花園)''' : 자금성 중심축 위에 있는 후원으로 곤녕궁 후면에 있다. 명나라 때는 궁후원(宮後園)이라 했다가 옹정제 때 어화원으로 개칭하였다. 황제와 후비들이 휴식을 취하고 경치를 감상하는 용도로 사용되었다. 동서 135m, 남북 89m, 면적 12,015m²이며, 흠안전(欽安殿)을 중심으로 동쪽에는 어경정(御景亭)·이조당(璃藻堂)·부벽정(浮碧亭)·만춘정(萬春亭)·강설헌(絳雪軒)이, 서쪽에는 연휘각(延輝閣)·위육재(位育齋)·징서정(澄瑞亭)·천추정(千秋亭)·양성재(養性齋)·사신사(四神祠)·정정(井亭)·녹대(鹿臺) 등이 있다.
- '''건복궁화원(建福宮花園)''' : 자금성 서북쪽에 있으며 건륭제가 1742년부터 강남 지역 원림의 느낌을 살려 조영한 화원이다. 1923년 화재로 소실되었다가 1999년 복원공사를 시작하여 2001년 완료되었다. 현재는 최상급 국빈들을 접견하는 장소로 사용되고 있다.
- '''영수궁화원(寧壽宮花園)''' : 건륭제가 1772년부터 1776년까지 영수궁을 개건하면서 조성한 후원으로, 건륭화원이라고도 불린다. 가산과 괴석, 꽃과 나무, 정자와 누대를 조화시키고 풍부한 색채를 사용한 것이 특징이다.
- '''자녕궁화원(慈寧宮花園)''' : 명나라 때부터 있었지만 1769년에 개건되었다. 동서 50m, 남북 130m, 면적 6,800m²로 정자와 누대 등 11채의 건물이 있다. 이곳의 조경수들은 예제와 종법, 풍수를 고려해 배치되었다.
- '''위육재(位育斎)''' : 명나라와 청나라 시대에는 불당이었으나, 현재는 음식점이다.
- '''탁조당(攡藻堂)''' : 궁정의 서적을 보관했던 곳으로, 「사고전서휘요(四庫全書薈要)」가 여기에 보관되었다. 현재는 서점이다.
- '''신무문(神武門)''' : 자금성의 북문. 청나라 강희제 이전의 명칭은 현무문(玄武門)이었으나, 강희제의 휘(諱)를 피하기 위해 현(玄)자를 신(神)으로 바꾸었다.[95] 현재는 고궁박물원(故宮博物院)의 정문이며, 곽말약(郭沫若)의 글씨로 "고궁박물원(故宮博物院)"이라는 현판이 걸려 있다.
- '''자녕궁(慈寧宮)'''(gosingga elhe gurung): 청나라 건륭제가 건설하였다.
- '''수강궁(寿康宮)'''(jalafungga elhe gurung): 청나라 옹정제가 어머니인 황태후를 위해 건설한 이후로 황태후와 태비의 거처가 되었다. 현재는 고궁박물원 도서관이 자리하고 있다.
- '''장락부화전'''
- '''수안궁(寿安宮)''' : 명나라 시대에는 함안궁(咸安宮)이라 불렸다. 청나라 건륭제가 어머니를 위해 재건하였다.
- 춘희전(春禧殿)
- 복의재(福宜斎)
- 훤수당(萱寿堂)
- '''영화전(英華殿)'''(yangsangga eldengge deyen): 명나라 시대에는 만수절이 행해진 곳이며, 청나라 시대에는 황후, 황태후, 후비들의 불당이 있던 곳이다.

- '''석경문(錫慶門)'''[102]: 현재는 진보관(珍寶館) 입장권 판매소이다.
- '''녕수궁 정문''' : 현재는 진보관 입구이다.
- '''구룡벽(九龍壁)''' : 중국에서 유명한 세 개의 “구룡벽” 중 하나이다. 길이 29.4m, 높이 3.5m에 달하는 거대한 瑠璃 장식의 벽으로, 1772년(건륭 37년)에 건설되었다. 현재는 고궁 관광의 주요 명소 중 하나이다.
- '''황극전(皇極殿)''': 1795년(건륭 60년), 건륭제가 황위를 물려주고 태상황이 된 후, 원정(院政)을 베푼 청녕궁(清寧宮)의 정전이다.
- '''녕수궁(寧壽宮)''': 명나라 시대의 명칭은 인수궁(仁壽宮)이다. 1795년(건륭 60년), 건륭제가 황위를 물려주고 태상황이 된 후, 거주했던 침전이다. 현재는 진보관 제2전시실이다.
- 금소옥수전(金昭玉粋殿)
- '''양성전(養性殿)''' : 청나라 건륭제 시대에 양심전(養心殿)을 본떠 지은 건물이다. 현재는 청나라 시대 그대로의 궁궐 모습으로 전시되어 있다.
- '''창음각(暢音閣)''' : 궁중의 희극장(舞台)이었으나, 현재는 청궁 연극의 의상과 소품 등이 전시되어 있다.
- 열시루(閲是楼)
- '''연기문(衍祺門)''' : 건륭원(乾隆花園)의 남문.
- '''낙수당(樂壽堂)''' : 청나라 건륭제 시대에 원명원(圓明園)의 순화헌(淳化軒)을 본떠 지은 건물이다.
- '''건륭원(乾隆花園)''' : 청나라 건륭제 시대에 조성된 정원.
- '''진비정(珍妃井)''' : 의화단(義和團)의 난 중이던 1900년(광서 26년) 8월 15일에 광서제가 가장 총애했던 비(妃)인 진비(珍妃)가 서태후에 의해 던져져 죽임을 당한 우물.
- '''순정문(順貞門)''' : 녕수궁의 북문. 현재는 진보관 출구이다.
- '''이화헌(頤和軒)'''
- '''경기각(景祺閣)'''
- '''심연서옥(尋沿書屋)'''
- '''고화헌(古華軒)'''
- '''수초당(遂初堂)'''
- 연취루(延趣樓)
- 취상루(翠賞樓)
- 양화정사(養和精舍)
- '''부망각(符望閣)'''
- 옥취헌(玉粹軒)
- 죽향관(竹香館)
- '''권근재(倦勤斎)'''
- '''경복궁(景福宮)'''
- 불일루(佛日樓)
- 범화루(梵華樓)
- 경수당(慶壽堂)
- 조상소(兆祥所)
- '''서원(西苑)''' : 자금성 서쪽의 북해(北海), 중해(中海), 남해(南海)의 저수지와 주변 녹지에 조성된 정원과 별궁군. 현재는 중화인민공화국의 정부기관이 있으며, 비공개 구역도 있다.
- '''경산(景山)''': 자금성 뒤편의 산으로 현재 경산공원(景山公園)이 되어 있다. 1644년 명나라 숭정제(崇禎帝)가 목을 매 자결한 곳이다.
5. 종교
종교는 당시 중국 황실에서 중대한 위치를 차지했다. 이러한 경향은 청나라로 갈수록 뚜렷하게 나타났는데, 특히 만주의 샤머니즘이 곤녕궁을 중심으로 퍼져나갔고, 중국 고유의 도가(道家)가 여전히 청나라 시기에도 중요한 신앙으로 분류되었다. 자금성 안에는 태묘와 중산공원 안에 있는 사직단의 두 유교 사원이 있었고, 천단을 포함하여 여섯 개의 도교 사원이 있었는데, 하나는 황실 정원 한가운데에, 하나는 내조의 한가운데에 위치했다.
중국 황실에서 숭배한 종교에는 불교가 있는데, 자금성 내부에는 티베트 불교와 라마교가 성행했다. 불교적 이미지들이 궁궐의 이곳저곳에 그려져 있고, 한 전각에는 엄청난 규모의 불화, 만다라, 불상들이 보관되고 있다.[65]
종교는 황실의 삶에서 중요한 부분이었다. 청나라 시대에는 자금성의 중화전(Palace of Earthly Harmony)이 만주 샤머니즘 의식의 장소가 되었다. 동시에 중국 고유의 도교는 명나라와 청나라 전반에 걸쳐 중요한 역할을 계속했다. 황실 정원과 내정 중앙 지역에 두 곳의 도교 사당이 있었다.[66]
청나라 궁궐에서 또 다른 널리 퍼진 종교는 불교였다. 티베트 불교(라마교) 사찰을 포함하여 여러 사찰과 신당이 내정 전역에 산재해 있었다. 불교 상징물 또한 많은 건물의 내부 장식에 널리 사용되었다.[67] 그중에서도 화우각(Pavilion of the Rain of Flowers)이 가장 중요한 곳 중 하나이다. 이곳에는 많은 불상, 불화, 그리고 만다라가 의식적인 배치로 모셔져 있었다.
6. 건축 양식
자금성의 건축 양식은 아주 작은 부분까지도 철학적, 종교적 사상을 담아 만들어졌다. 이는 당시 황제의 위대함을 드러내기 위한 것이었다. 자금성에 주요하게 쓰인 양식들은 다음과 같다.
- 황색은 황제의 색깔이었기 때문에, 자금성에 있는 거의 모든 건물들은 황금색 기와를 이고 있다. 오직 2개의 건물만이 예외인데, 황실 도서관에는 화재를 예방하기 위한 목적으로, 당시 물을 상징하는 색깔이었던 검은색으로 기와를 이었다. 또한 왕자들의 거주지인 남3소에도 황색이 아니라 녹색의 기와가 얹혀져 있는데, 이는 녹색이 성장과 나무를 상징하는 색깔이었기 때문이다.[45]
- 외조와 내조의 주요 궁전들은 모두 3개씩 짝을 맞추고 있는데, 이는 도가 사상을 반영하여, 우주의 원리를 표현하기 위해 이처럼 지어진 것이다.
- 자금성의 모든 건물들의 지붕에는 잡상들이 올라가 있는데, 이 잡상의 개수는 그 건물의 지위를 상징한다. 그다지 중요하지 않은 건물은 3\~5개가 얹혀져 있었고, 그 건물의 지위가 올라갈수록 잡상의 개수도 늘어났다. 특히 태화전에는 10개의 잡상이 올라가 있고, 당시 중국 대륙에서 유일하게 잡상을 10개씩 얹을 수 있는 건물이었다.
- 자금성의 배치도 전통적 궁궐의 배치에 따른 것인데, 궁궐의 맨 앞에는 조상들을 모시는 사원이 있고, 그 뒤에 업무를 보는 공식 공간, 맨 뒤에 사적인 공간을 배치하는 형식을 따른 것이다.[77]
자금성의 설계는 전반적인 배치에서부터 가장 작은 세부 사항까지, 철학적 및 종교적 원칙을 반영하고 무엇보다도 황실 권력의 위엄을 상징하도록 정교하게 계획되었다. 상징적인 디자인의 몇 가지 주목할 만한 예는 다음과 같다.
- 황색은 황제의 색깔이다. 따라서 자금성의 거의 모든 지붕은 황색 유약 기와를 사용한다. 단 두 가지 예외가 있다. 문원각(文淵閣)의 서고는 검은색 기와를 사용했는데, 검은색은 물과 관련이 있었고 따라서 화재 예방을 위해서였다. 마찬가지로, 태자의 거처는 녹색 기와를 사용했는데, 녹색은 목과 관련이 있었고 따라서 성장을 상징했기 때문이다.
- 외조와 내조의 주요 전각들은 모두 세 개의 건물로 구성되어 있는데, 이는 하늘을 나타내는 건(乾) 괘 ☰의 형태이다. 반면 내조의 거처는 여섯 개의 건물로 구성되어 있는데, 이는 땅을 나타내는 곤(坤) 괘 ☷의 형태이다.[38]
- 건물 지붕의 경사진 용마루는 일련의 작은 조각상으로 장식되어 있으며, 그 선두에는 봉황을 탄 사람이 있고, 그 뒤를 황룡이 따릅니다. 조각상의 수는 건물의 지위를 나타낸다. 작은 건물은 세 개 또는 다섯 개일 수 있다. 중화전은 열 개의 조각상을 가지고 있는데, 이는 황실 시대에 이러한 장식이 허용된 유일한 건물이다. 결과적으로, "항십(行十)" 또는 "열 번째 순위"[74]라고 불리는 열 번째 조각상[75]은 자금성에서도 독특하다.
- 건물의 배치는 '''예기'''에 명시된 고대 관습을 따른다. 따라서 조상 사당[76]는 궁전 앞에 있다. 창고는 궁궐 단지의 앞쪽에, 거처는 뒤쪽에 배치되어 있다.
7. 소장품
자금성에 소장되어 있는 대부분의 미술품과 공예품은 청 황실이 수집한 것이다. 이 소장품들은 중국 전통 회화, 서적, 도자기, 각종 도장, 조각상, 동경, 청동기 유물 등으로 이루어져 있다. 중국 정부의 최근 발표에 따르면 약 1,862,690개의 소장품이 자금성에 있으며, 황실 도서관에는 명나라와 청나라 시대의 행정 서류를 포함한 수많은 진귀한 고서들이 보관되어 있다. 이 고서 기록들은 문화대혁명 이후 중국 정부가 베이징의 중국국가도서관에서 옮겨온 것이다.[78]
1933년, 일본이 중국을 침략하면서 자금성에 있던 대부분의 보물들은 약탈을 피해 다른 곳으로 옮겨졌다. 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이 보물들은 난징으로 옮겨졌으나, 국공내전에서 중국 공산당이 승리하면서 국민당 정부는 국부천대를 결정, 난징에 있던 자금성의 보물들 중 가치있고 작은 것들을 골라 대만으로 가져갔다. 이 유물들은 현재 대만의 국립 고궁 박물원에 전시되어 있다. 한편, 나머지 유물들은 공산당에 의해 베이징으로 돌아갔으나, 일부는 아직도 난징 박물관의 지하 수장고에 보관되어 있다.[25]
자금성에는 340,000여 점의 도자기와 자기 세공품이 있으며, 이 중 상당수는 송나라와 당나라 시기의 희귀한 유물들이다. 또한 50,000여 점의 회화가 전시되어 있는데, 이 중 약 400여 점은 원나라 이전의 작품이다. 청동기 유물은 은나라 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가며, 약 10,000여 점이 보관되어 있다. 황실에서 사용하던 금문(金文)도 잘 알려진 보물 중 하나이다. 18, 19세기 시계 관련 유물은 세계 최대 규모로, 약 1,000여 점이 있으며 중국 및 영국, 프랑스, 스위스 등 외국에서 제작된 시계들이 섞여 있다. 옥 세공품은 약 30,000여 점이 소장되어 있다.
자금성에 소장된 유물들 중 일부는 황실 요인들이 생전에 실제로 사용하던 물품들로, 당시 황실의 생활 양식을 알 수 있게 해준다는 점에서 역사적, 문화적으로 큰 의미를 가진다.[84]
중화인민공화국 베이징시의 고궁박물원(간체자: )은 원래 궁궐(자금성, 별칭은 고궁)이었던 곳을 박물관으로 만든 곳이다. 2011년 5월 기준으로 소장품은 회화, 도자기, 서적 등 180만 점이다(청나라가 남긴 유물은 전체의 약 85%이다).[105]
중국의 5A급 관광지(2007년 인정)로,[106] 일반 입장료는 40위안(4월부터 10월까지는 60위안)이다. 유학생의 경우 학생증으로 학생 할인이 적용될 수 있지만, 기본적으로 외국인은 어린이도 일반 요금이 적용된다. 120cm 이하의 어린이는 외국인을 포함하여 무료이다. "진보관" 및 시계관()은 각각 별도 요금(10위안)이다. 부지는 넓고, 매점과 간이식당이 있으며,[107] 여러 언어의 음성 가이드 서비스가 준비되어 있다. 등급은 중국 국가 1급 박물관으로 분류된다.
정치적 사정으로 분리된 타이완(중화민국)의 국립고궁박물원과는 2009년 10월에 처음으로 공동 전시회를 개최했으며,[108] 2016년 9월에는 국립고궁박물원 원장 퇴임 직후의 인물이 중화인민공화국 정부의 초청으로 베이징 고궁박물원 고문에 취임하여 타이완에서 논란이 되었다.[109]
2013년부터 문화재 보호와 서비스 향상을 목표로 하는 프로젝트가 진행되고 있다.[110]
2022년 7월에는 고궁박물원에서 대여한 미술품을 이용하여 홍콩고궁문화박물관이 개관했다.[111]
8. 영향
자금성은 이후 중국 건축 발전에 큰 영향을 미쳤을 뿐만 아니라, 수많은 예술 작품에도 영감을 주었다. 명나라 시대에 그려진 자금성 그림이 이를 잘 보여준다.
9. 관련 항목






참조
[1]
뉴스
故宫2017年接待观众逾1699万人次 创历史新纪录
https://www.chinanew[...]
2017-12-31
[2]
웹사이트
UNESCO World Heritage List: Imperial Palaces of the Ming and Qing Dynasties in Beijing and Shenyang
https://whc.unesco.o[...]
UNESCO
2007-05-04
[3]
서적
A History of Chinese Science and Technology, Volume 3
Springer
[4]
웹사이트
Advisory Body Evaluation (1987)
https://whc.unesco.o[...]
UNESCO
2016-02-25
[5]
웹사이트
1900万!故宫年客流量创新高-新华网
http://www.xinhuanet[...]
2020-01-21
[6]
웹사이트
How much the world's most valuable palaces are worth
https://www.msn.com/[...]
MSN.com
2020-12-10
[7]
웹사이트
Imperial Palaces of the Ming and Qing Dynasties in Beijing and Shenyang
https://whc.unesco.o[...]
2021-12-01
[8]
서적
The Forbidden City
Harvard University Press
[9]
논문
Perspective of urban land use in Beijing
1990-04
[10]
웹사이트
Gugong (disambiguation)
null
[11]
서적
Palaces of the Forbidden City
Viking
[12]
서적
The Invisible Palace
Foreign Language Press
[13]
비디오
Gugong: "I. Building the Forbidden City"
https://www.cctv.com[...]
CCTV
2005
[14]
서적
The Invisible Palace
[15]
서적
朝鲜李朝实录中的中国史料 (Chinese historical material in the Annals of the Joseon Yi dynasty)
Zhonghua Book Company
[16]
뉴스
甲申三百年祭 (Commemorating 300th anniversary of the Jia-Sheng Year)
1944-03-20
[17]
뉴스
故宫外朝宫殿为何无满文? (Why is there no Manchu on the halls of the Outer Court?)
https://ha.people.co[...]
2006-06-16
[18]
웹사이트
坤宁宫 (Palace of Earthly Tranquility)
https://125.35.3.4/C[...]
The Palace Museum
[19]
비디오
Gugong: "XI. Flight of the National Treasures"
https://www.cctv.com[...]
CCTV
2005
[20]
서적
The Invisible Palace
[21]
서적
正说清朝十二帝 (True Stories of the Twelve Qing Emperors)
https://archive.org/[...]
Zhonghua Book Company
[22]
뉴스
故宫X档案: 开院门票 掏五毛钱可劲逛 (Forbidden City X-Files: Opening admission 50 cents)
https://culture.peop[...]
People Net
2005-10-06
[23]
웹사이트
National Palace Museum – Tradition & Continuity
https://www.npm.gov.[...]
National Palace Museum
[24]
웹사이트
National Palace Museum – Tradition & Continuity
https://www.npm.gov.[...]
National Palace Museum
[25]
뉴스
三大院长南京说文物 (Three museum directors talk artefacts in Nanjing)
https://www.people.c[...]
People Net
2003-10-19
[26]
뉴스
故宫曾有多种可怕改造方案 (Several horrifying reconstruction proposals had been made for the Forbidden City)
https://news.eastday[...]
Eastday
2006-02-04
[27]
뉴스
"文化大革命"中谁保护了故宫 (Who protected the Forbidden City in the Cultural Revolution?)
https://cpc.people.c[...]
People Net
2006-11-07
[28]
웹사이트
Imperial Palace of the Ming and Qing Dynasties
https://whc.unesco.o[...]
[29]
웹사이트
Forbidden City restoration project website
https://gjdx.dpm.org[...]
[30]
웹사이트
故宫慈宁宫花园明年8月开放 拟推年票定价300元
http://politics.peop[...]
2014-08-18
[31]
웹사이트
Amazing Facts About the Forbidden City
https://museumca.org[...]
Oakland Museum of California
[32]
null
null
null
[33]
뉴스
ART REVIEW; They Had Expensive Tastes
https://www.nytimes.[...]
2001-08-31
[34]
웹사이트
Numbers Inside the Forbidden City
https://www.china.or[...]
China.org.cn
2007-07-20
[35]
논문
Bodily Changes: Castration as Cultural and Social Practice in the Space of the Forbidden City
2021-07
[36]
뉴스
https://house.people[...]
People Net
2006-05-30
[37]
뉴스
https://www.cas.ac.c[...]
Chinese Academy of Sciences
2005-03-02
[38]
비디오
Gugong: "II. Ridgeline of a Prosperous Age"
https://www.cctv.com[...]
CCTV
2005
[39]
서적
2003
[40]
서적
1984
[41]
일반
[42]
서적
1984
[43]
서적
1984
[44]
서적
1984
[45]
웹사이트
Yin, Yang and the Five Elements in the Forbidden City
https://www.dpm.org.[...]
[46]
서적
1984
[47]
웹사이트
太和殿 (Hall of Supreme Harmony)
https://www.dpm.org.[...]
[48]
웹사이트
中和殿 (Hall of Central Harmony)
https://www.dpm.org.[...]
[49]
웹사이트
保和殿 (Hall of Preserving Harmony)
https://www.dpm.org.[...]
[50]
서적
1984
[51]
서적
1984
[52]
잡지
Secrets of Beijing's Forbidden City
Center for Inquiry
2020-05-01
[53]
서적
1984
[54]
서적
1984
[55]
서적
1984
[56]
서적
1984
[57]
서적
2003
[58]
서적
1984
[59]
서적
1984
[60]
서적
1984
[61]
서적
1984
[62]
웹사이트
Six Western Palaces, Xiliugong - Forbidden City, Beijing
https://www.travelch[...]
[63]
웹사이트
Six Eastern Palaces, Dongliugong - Forbidden City, Beijing
https://www.travelch[...]
[64]
웹사이트
Palace of Compassion and Tranquility - Forbidden City
https://www.travelch[...]
[65]
서적
1984
[66]
서적
1984
[67]
서적
1984
[68]
웹사이트
Symbolism in the Forbidden City: The Magnificent Design, Distinct Colors, and Lucky Numbers of China's Imperial Palace
http://www.asianstud[...]
[69]
서적
1984
[70]
웹사이트
Working People's Cultural Palace
https://www.china.or[...]
China.org.cn
[71]
웹사이트
Zhongshan Park
https://web.archive.[...]
China.org.cn
2007-07-29
[72]
뉴스
Forbidden City Buffer Zone Plan submitted to World Heritage conference
https://web.archive.[...]
Xinhua Net
2005-07-16
[73]
뉴스
Beijing confirms 7 World Heritage alternate items; Large scale reconstruction of Imperial City halted
https://web.archive.[...]
Xinhua Net
2005-06-04
[74]
비디오
Gugong: "III. Rites under Heaven "
https://www.cctv.com[...]
CCTV
2005-01-01
[75]
웹사이트
Hall of Supreme Harmony
https://web.archive.[...]
[76]
웹사이트
祠堂与祠堂文化 _世界王氏网
http://www.wwdoa.com[...]
[77]
학술지
Why were Chang'an and Beijing so different?
1986-12-01
[78]
서적
The forbidden city: the biography of a palace
Charles Scribner's Sons
[79]
웹사이트
Collection highlights – Paintings
https://web.archive.[...]
[80]
웹사이트
Collection highlights – Bronzeware
https://web.archive.[...]
[81]
웹사이트
Collection highlights – Timepieces
https://web.archive.[...]
[82]
서적
Jade: A Study in Chinese Archeology & Religion
Reprint (1989): Peter Smith Pub Inc
[83]
웹사이트
Collection highlights – Jade
https://web.archive.[...]
[84]
웹사이트
Collection highlights – Palace artefacts
https://web.archive.[...]
[85]
웹사이트
中国三大宮廷建築 | テーマ別世界遺産 | 世界遺産オンラインガイド
https://worldheritag[...]
[86]
서적
Palaces of the Forbidden City
New York: Viking
[87]
서적
The Invisible Palace
Beijing: Foreign Language Press
[88]
비디오
Gugong: "XI. Flight of the National Treasures"
2005-01-01
[89]
웹사이트
“北京中轴线——中国理想都城秩序的杰作”成功列入《世界遗产名录》
http://www.news.cn/2[...]
2024-07-27
[90]
일반
[91]
웹사이트
中国の清朝皇帝に関する読本(清時代、台湾、清朝、紫禁城、故宮博物院、衣装、ラストエンペラー)
https://web.archive.[...]
[92]
일반
[93]
서적
NHK 꿈의 미술관 세계의 명건축 100선
신건축사
[94]
서적
만화사전
[95]
웹사이트
明初紫禁城与現在的有何不同-香港商報
http://www.hkcd.com/[...]
2016-07-07
[96]
웹사이트
http://blog.sina.com[...]
[97]
웹사이트
故宮博物院 同道堂
https://www.dpm.org.[...]
[98]
일반
[99]
웹사이트
https://b953040032.p[...]
[100]
웹사이트
https://you.ctrip.co[...]
[101]
웹사이트
毎日頭條 不是菩提的英華殿「菩提」:故宮最美古樹
https://kknews.cc/co[...]
[102]
웹사이트
故宮博物院 錫慶門
https://www.dpm.org.[...]
[103]
웹사이트
故宮博物院 重華宮
https://www.dpm.org.[...]
[104]
웹사이트
知乎 漱芳斎真的是小燕子住的地方嗎?
https://zhuanlan.zhi[...]
[105]
서적
두 개의 고궁박물원
신초사
[106]
웹사이트
故宫博物院
https://www.mct.gov.[...]
中華人民共和国文化観光部
2021-07-22
[107]
텍스트
[108]
뉴스
雍正文物大展在台開展 両岸故宮交流"春華秋実"
http://www.china.com[...]
2017-12-25
[109]
뉴스
台北・故宮博物院前院長が北京・故宮研究院の顧問に 「機密が漏れる」と台湾・与党は批判
https://www.sankei.c[...]
207-12-25
[110]
웹사이트
故宮博物院、地下宝庫を40%拡大へ 文化財の保護機能も拡充
https://www.afpbb.co[...]
AFP
2019-09-24
[111]
뉴스
「香港故宮文化博物館」オープン 愛国教育に活用
https://www.sankei.c[...]
2022-10-01
[112]
웹사이트
NHKスペシャル 故宮の至宝 - NHK名作選(動画・静止画) NHKアーカイブス
https://www2.nhk.or.[...]
[113]
뉴스인용
'숭례문 복원', 자금성 완벽부활 프로젝트서 본받자
http://www.segye.com[...]
세계일보 연예
2008-02-14
[114]
뉴스인용
중국절대권력표상‘자금성’을손금보듯
https://news.naver.c[...]
본 사이트는 AI가 위키백과와 뉴스 기사,정부 간행물,학술 논문등을 바탕으로 정보를 가공하여 제공하는 백과사전형 서비스입니다.
모든 문서는 AI에 의해 자동 생성되며, CC BY-SA 4.0 라이선스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위키백과나 뉴스 기사 자체에 오류, 부정확한 정보, 또는 가짜 뉴스가 포함될 수 있으며, AI는 이러한 내용을 완벽하게 걸러내지 못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제공되는 정보에 일부 오류나 편향이 있을 수 있으므로, 중요한 정보는 반드시 다른 출처를 통해 교차 검증하시기 바랍니다.
문의하기 : help@durumi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