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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주포구락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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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진주포구락무는 진주 지역에서 전승되던 전통 춤이다. 진주목의 연회나 진주 촉석루에서 열린 의암별제, 향사례 등에서 공연되었으며, 공을 던져 풍류안에 넣는 놀이와 춤을 결합한 형태를 보인다. 진주 목사 정현석의 《교방가요》에 춤의 진행 순서가 기록되어 있으며, 10명의 기녀와 심판 1명으로 구성되어 공연되었다. 이윤예에 의해 복원되었으며, 현재는 정금순이 그 맥을 잇고, 진주민속예술보존회를 중심으로 전승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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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주포구락무 - [유적/문화재]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진주포구락무
진주포구락무
종류무형문화재
지정 번호12
지정일1991년 12월 27일
전승지경상남도 진주시 판문동 산171-1
전승자정금순, 박설자
문화재청 지정 번호22,00120000,38

2. 역사

2. 1. 기원과 전래

2. 2. 진주포구락의 형성

2. 3. 일제강점기와 그 이후

3. 내용 및 구성

이 춤은 진주목의 연회는 물론이고 매년 춘추로 진주 촉석루에서 개최되던 의암별제, 백일장, 향사례와 투호례, 향음주례 등에서 추었다고 전한다. 특히 항사례와 투호례에서 춤을 출 때 놀이가 끝나면 활쏘는 남자들은 선비가를 불러 선창을 하고, 춤추던 여자들은 후렴을 받아 춤추며 흥겨운 한마당이 이루어졌다고 한다.

성공하면 머리에 꽃을 꽂아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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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주 목사 정현석의 교방가요(敎坊歌謠)에는 그림과 함께 기록된 포구락의 진행순서를 다음과 같이 소개하고 있다.

# 여러 기녀들이 동헌 마당에 구문(毬門)을 설치한다.

# 여러 기녀들이 일제히 절한다.

# 풍악이 울리면 쌍쌍이 마주하고 춤을 춘다.

# 기녀 두 명씩 구문 동편과 서편에 앉아 공을 가지고 희롱하다가 일어선다. 나머지 기녀들은 쉰다.

# 공을 집어들고 춤을 춘다.

# 왼손은 머리에 올리고 오른손은 높이 들어 풍류안(風流眼) 속으로 던진다. 여러 번 어루다가 던진다. 적중시킨 사람은 머리에 꽃을 꽂고, 적중하지 못한 사람은 뺨에 먹물로 점찍는다. 만약 공을 떨어뜨리지 않았으면 다시 잡아서 다시 던진다. 또 적중시키지 못한 사람도 역시 그와 같이 한다. 만약 풍류안(風流眼)에 포구(抛毬)를 넣었더라도 그 안에 얹혀서 떨어지지 않은 사람은 상(賞)도 없고 벌(罰)도 없다. 나머지 기녀들도 차례로 짝을 지어 이상과 같이 던진다.

# 의식이 끝나면 일제히 춤추고 일제히 절하고 물러 나간다.

교방가요에 삽화된 그림을 보면, 공연할 때 젊은 기녀 세 쌍과 어린 기녀 두 쌍이 참가했으며, 심판을 보는 노기가 성공하지 못한 기녀들에게 뺨에 먹물을 찍어주던 것을 보아 10명과 한 명의 심판으로 구성되어 가무와 놀이를 즐겼던 것으로 보인다.

3. 1. 공연 내용

이 춤은 진주목의 연회는 물론이고 매년 춘추로 진주 촉석루에서 개최되던 의암별제, 백일장, 향사례와 투호례, 향음주례 등에서 추었다고 전한다. 특히 항사례와 투호례에서 춤을 출 때 놀이가 끝나면 활쏘는 남자들은 선비가를 불러 선창을 하고, 춤추던 여자들은 후렴을 받아 춤추며 흥겨운 한마당이 이루어졌다고 한다.

진주 목사 정현석의 교방가요(敎坊歌謠)에는 그림과 함께 기록된 포구락의 진행순서를 다음과 같이 소개하고 있다.

# 여러 기녀들이 동헌 마당에 구문(毬門)을 설치한다.

# 여러 기녀들이 일제히 절한다.

# 풍악이 울리면 쌍쌍이 마주하고 춤을 춘다.

# 기녀 두 명씩 구문 동편과 서편에 앉아 공을 가지고 희롱하다가 일어선다. 나머지 기녀들은 쉰다.

# 공을 집어들고 춤을 춘다.

# 왼손은 머리에 올리고 오른손은 높이 들어 풍류안(風流眼) 속으로 던진다. 여러 번 어루다가 던진다. 적중시킨 사람은 머리에 꽃을 꽂고, 적중하지 못한 사람은 뺨에 먹물로 점찍는다. 만약 공을 떨어뜨리지 않았으면 다시 잡아서 다시 던진다. 또 적중시키지 못한 사람도 역시 그와 같이 한다. 만약 풍류안(風流眼)에 포구(抛毬)를 넣었더라도 그 안에 얹혀서 떨어지지 않은 사람은 상(賞)도 없고 벌(罰)도 없다. 나머지 기녀들도 차례로 짝을 지어 이상과 같이 던진다.

# 의식이 끝나면 일제히 춤추고 일제히 절하고 물러 나간다.

교방가요에 삽화된 그림을 보면, 공연할 때 젊은 기녀 세 쌍과 어린 기녀 두 쌍이 참가했으며, 심판을 보는 노기가 성공하지 못한 기녀들에게 뺨에 먹물을 찍어주던 것을 보아 10명과 한 명의 심판으로 구성되어 가무와 놀이를 즐겼던 것으로 보인다.

3. 2. 진행 순서 (정현석의 《교방가요》)

이 춤은 진주목의 연회는 물론이고 매년 춘추로 진주 촉석루에서 개최되던 의암별제, 백일장, 향사례와 투호례, 향음주례 등에서 추었다고 전한다. 특히 항사례와 투호례에서 춤을 출 때 놀이가 끝나면 활쏘는 남자들은 선비가를 불러 선창을 하고, 춤추던 여자들은 후렴을 받아 춤추며 흥겨운 한마당이 이루어졌다고 한다.

진주 목사 정현석의 교방가요(敎坊歌謠)에는 그림과 함께 기록된 포구락의 진행순서가 다음과 같이 소개되어 있다.

# 여러 기녀들이 동헌 마당에 구문(毬門)을 설치한다.

# 여러 기녀들이 일제히 절한다.

# 풍악이 울리면 쌍쌍이 마주하고 춤을 춘다.

# 기녀 두 명씩 구문 동편과 서편에 앉아 공을 가지고 희롱하다가 일어선다. 나머지 기녀들은 쉰다.

# 공을 집어들고 춤을 춘다.

# 왼손은 머리에 올리고 오른손은 높이 들어 풍류안(風流眼) 속으로 던진다. 여러 번 어루다가 던진다. 적중시킨 사람은 머리에 꽃을 꽂고, 적중하지 못한 사람은 뺨에 먹물로 점찍는다. 만약 공을 떨어뜨리지 않았으면 다시 잡아서 다시 던진다. 또 적중시키지 못한 사람도 역시 그와 같이 한다. 만약 풍류안(風流眼)에 포구(抛毬)를 넣었더라도 그 안에 얹혀서 떨어지지 않은 사람은 상(賞)도 없고 벌(罰)도 없다. 나머지 기녀들도 차례로 짝을 지어 이상과 같이 던진다.

# 의식이 끝나면 일제히 춤추고 일제히 절하고 물러 나간다.

교방가요에 삽화된 그림을 보면, 공연할 때 젊은 기녀 세 쌍과 어린 기녀 두 쌍이 참가했으며, 심판을 보는 노기가 성공하지 못한 기녀들에게 뺨에 먹물을 찍어주던 것을 보아 10명과 한 명의 심판으로 구성되어 가무와 놀이를 즐겼던 것으로 보인다.

3. 3. 구성 인원

이 춤은 진주 촉석루에서 개최되던 의암별제, 백일장, 향사례와 투호례, 향음주례 등에서 추었다고 전한다. 특히 항사례와 투호례에서 춤을 출 때 놀이가 끝나면 활쏘는 남자들은 선비가를 불러 선창을 하고, 춤추던 여자들은 후렴을 받아 춤추며 흥겨운 한마당이 이루어졌다고 한다.

진주 목사 정현석의 교방가요(敎坊歌謠)에는 그림과 함께 포구락의 진행순서가 기록되어 있다. 교방가요에 삽화된 그림을 보면, 공연에는 젊은 기녀 세 쌍과 어린 기녀 두 쌍이 참가했으며, 심판을 보는 노기가 성공하지 못한 기녀들에게 뺨에 먹물을 찍어주던 것을 보아 10명과 한 명의 심판으로 구성되어 가무와 놀이를 즐겼던 것으로 보인다.

4. 특징

5. 전승 현황

진주포구락무


진주교방(晋州敎坊) 출신 이윤예(李潤禮, 1903년~1995년)의 증언을 통해 복원되었다. 이윤례는 1903년 진주에서 태어나 진주권번 출신으로 진주검무 최초의 예능보유자였으며, 1966년부터 1969년까지 진주 모의당에 있으면서 의기사를 지키기도 했다.

현재는 정금순이 그 맥을 이어가고 있으며, 진주민속예술보존회를 중심으로 전승되고 있다. 보유후보자는 김행자, 전수조교는 김정희(피리), 남정희(무용)이다.

6. 관련 도서


  • 《교방가요》, 성무경 역주, 보고사, 2002

7. 갤러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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