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암별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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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의암별제는 임진왜란 당시 순국한 논개를 기리기 위해 1868년 진주목사 정현석이 시작한 제례 의식이다. 종묘대제나 석전대제와 같이 음악, 노래, 춤이 어우러진 형태로 진행되었으며, 300명의 기생들이 참여하여 성대하게 거행되었다. 일제강점기에 단절되었으나, 1992년 진주검무 인간문화재 성계옥의 노력으로 복원되었다. 의암별제는 현재 진주 지역의 문화 행사로 이어지고 있으며, 진주한량무, 진주삼천포농악, 진주검무 등 다양한 무형문화재 공연도 함께 진행된다.
1868년 고종 5년, 진주목사 정현석은 논개의 사당을 중건하고, 매년 6월 중 길일을 택하여 제향을 실시하도록 했다. 이것이 의암별제의 시작이다.[1]
1593년 임진왜란 중 진주성이 함락될 때 진주 촉석루 아래 의암 바위에서 왜장을 끌어안고 남강에 투신하여 순국한 의기(義妓) 논개를 추모하는 제례이다. 의암별제는 음악, 춤, 노래가 함께 어우러지는 것이 특징이며, 제례가 끝난 후에는 여흥가무가 이어진다.[2]
2. 역사
정현석은 기생 문화와 국악에 관심이 많았으며, 조선 시대 종묘대제(宗廟大祭)나 석전대제(釋奠大祭)를 제외하고 음악, 노래, 춤이 어우러진 제사의식은 전례가 없었기에, 논개의 정신을 기리기 위해 제의와 가무를 결합한 의암별제를 창안했다.[1]
1868년 첫 제례는 300명의 기생이 3일 동안 진행하는 악가무로 장관을 이루었고, 정현석은 "무진년 6월에 단을 만들어 향불을 피워 3백 명의 기녀들이 정성으로 제를 올리니 논낭자의 충의의 영혼이 내려오는 듯 하구나."라고 감회를 표현했다.[1]
1893년 고종 30년, 진주성 함락 300주년 기념 의암별제에는 수천 명의 구경 인파가 몰렸다고 전해진다.[1]
2. 1. 기원과 배경
1868년 고종 5년, 진주목사 정현석은 진주병사(경상우병마절도사)와 의논하여 논개의 사당을 중건하고, 춘추상제와 별도로 매년 6월 중 길일을 택해 논개 제향을 실시하도록 했다. 이것이 의암별제의 시작이다.[1]
정현석은 기생 문화와 국악에 관심이 많았으며, 논개의 정신을 기리기 위해 제의와 가무를 결합한 의암별제를 창안했다. 조선시대 종묘에서 역대 임금을 제사 지내는 종묘대제(宗廟大祭)나 문묘(文廟)에서 공자 등 유학자들을 제사 지내는 석전대제(釋奠大祭)를 제외하고, 음악, 노래, 춤이 어우러진 제사의식은 전례가 없었다.[1]
1868년 첫 제례는 300명의 기생이 3일 동안 진행하는 엄숙한 제례의식과 악가무로 장관을 이루었다. 정현석은 "무진년 6월에 단을 만들어 향불을 피워 3백 명의 기녀들이 정성으로 제를 올리니 논낭자의 충의의 영혼이 내려오는 듯 하구나."라고 감회를 표현했다.[1]
1893년 고종 30년, 진주성 함락 300주년 기념 의암별제에는 수천 명의 구경 인파가 몰렸다고 전해진다.[1]
2. 2. 구한말 의암별제
1868년 고종 5년, 진주목사 정현석은 진주병사(경상우병마절도사)와 의논하여 논개의 사당을 중건하고, 춘추상제와 별도로 매년 6월 중 길일을 택해 논개 제향을 실시하도록 했다. 이것이 의암별제의 시작이다.[1]
정현석은 기생 문화와 국악에 관심이 많아, 논개의 정신을 기리는 제의와 가무를 결합한 의암별제를 시작했다. 조선시대 종묘에서 역대 임금을 제사지내는 종묘대제(宗廟大祭)나 문묘(文廟)에서 공자 등 중국 성인과 한국 유학자를 위해 제사를 지내는 석전대제(釋奠大祭)를 제외하고, 이처럼 음악, 노래, 춤이 어우러진 제사의식은 전례가 없었다.[1]
1868년 첫 제례 때 300명의 기생들이 3일 동안 엄숙한 제례의식과 악가무, 즉 의암별제 가무를 선보였는데, 그 광경이 장관이었다고 전해진다. 정현석은 그 감격을 다음과 같이 표현했다.[1]
:"무진년 6월에 단을 만들어 향불을 피워 3백명의 기녀들이 정성으로 제를 올리니 논낭자의 충의의 영혼이 내려오는 듯 하구나."
1893년 고종 30년, 진주성 함락 300주년을 맞아 열린 의암별제에는 수천 명의 구경 인파가 몰렸다는 기록이 있다.[1]
2. 3. 일제강점기의 단절과 복원
의암별제는 조선시대 종묘제례와 문묘제례에 버금가는 종합가무제례로, 그 자체가 갖고 있는 반일적 특성 때문에 일제 강점기 때 단절되었으나 진주검무 인간문화재 성계옥 여사의 평생에 걸친 노력으로 1992년 그 빛을 보게 되었다.[1]
의암별제 복원은 성경린(고증), 김천흥(무보), 고 김기수(악보) 선생 등 한국 국악계의 3대 거성들이 참여한 역사적인 문화숙원 사업이었다.[1] 의암별제는 정현석 진주목사가 남긴 《교방가요》에 그 기록이 자세히 남아있어 뚜렷한 고증이 가능했고, 국악계의 지원으로 그 엄장한 제례의식의 복원이 가능했다.[1]
또한 진주 교방 출신으로 마지막 생존자인 김수악 명인(진주검무와 진주교방굿거리춤의 전승자)과 같은 이들의 정확한 고증과 검증이 없었다면 더욱 힘든 일이었을 것이다.[1]
3. 구성
3. 1. 제례 절차
의암별제는 음악, 춤, 노래가 동시에 어우러져 행해지는데, 크게 10가지 순서로 구성된다.[2]
첫째, 제찬을 갖추어 진주 촉석루에 차려 놓는다. 둘째, 채화를 그릇마다 꽂아 놓는다. 셋째, 헌관 이하 여러 제관은 예복을 갖추고 촉석루 아래에 대기한다. 넷째, 영신악이 연주되는 동안 영신례(迎神禮)를 행한다. 다섯째, 상향(上香)의 음악과 노래와 춤과 함께 예를 진행한다. 여섯째, 초헌(初獻)의 음악과 노래와 춤과 함께 예를 진행한다. 일곱째, 아헌(亞獻)의 음악과 노래와 춤과 함께 예를 진행한다. 여덟째, 종헌(終獻)의 음악과 노래와 춤과 함께 예를 진행한다. 아홉째, 의암별곡과 별무에 맞추어 사신례와 음복례와 망요례를 행한다. 열째, 제례가 끝나면 여흥가무로 이어진다.[2]
3. 2. 여흥가무
여흥가무에는 각종 무형문화재가 선보이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행사 | 문화재 | 지정번호 | 행사주체 |
---|---|---|---|
진주한량무 | 경상남도 무형문화재 | 3호 | 진주 한량무 보존회 |
진주삼천포농악 | 대한민국 국가무형문화재 | 제11-가호 | 진주삼천포농악 보존회 |
진주검무 | 대한민국 국가무형문화재 | 제12호 | 진주검무 보존회 |
진주포구락무 | 경상남도 무형문화재 | 제12호 | 진주포구락무 보존회 |
진주교방굿거리춤 | 경상남도 무형문화재 | 제21호 | 진주교방굿거리춤 보존회 |
신관용류 가야금산조 | 경상남도 무형문화재 | 제25호 | 신관용류 가야금산조 보존회 |
논개음악회 | - | - | 진주시립전통예술단 |
참조
[1]
웹인용
의암별제 가무
http://jinju.grandcu[...]
디지털진주문화대전(한국학중앙연구원)
2008-12-16
[2]
서적
의암별제지
진주민속예술보존회
2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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