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 피터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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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진 피터스는 미국의 배우이다. 1947년 영화 《카스티유의 기사》로 데뷔하여 1950년대 중반까지 《나이아가라》, 《아파치》 등 여러 영화에 출연하며 인기를 얻었다. 1957년 하워드 휴즈와 결혼 후 배우 활동을 중단했다가, 1970년대 텔레비전 영화와 드라마에 출연하며 복귀했다. 2000년 백혈병으로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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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 피터스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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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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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명 | 엘리자베스 진 피터스 |
출생일 | 1926년 10월 15일 |
사망일 | 2000년 10월 13일 |
출생지 | 미국 오하이오주 이스트 캔턴 |
사망지 | 미국 캘리포니아주 칼즈배드 |
안장지 | 캘버 시티 홀리 크로스 묘지 |
국적 | # 템플릿 제거 및 정보 없음 |
직업 | 배우 |
활동 기간 | 1947년–1988년 |
사생활 | |
배우자 | 스튜어트 W. 크래머 3세 (1954년 결혼, 1955년 이혼) 하워드 휴즈 (1957년 결혼, 1971년 이혼) 스탠 허프 (1971년 결혼, 1990년 사별) |
2. 초기 생애
피터스는 1926년 10월 15일 오하이오주 이스트캔턴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세탁소 관리자였던 제럴드 피터스(1900–1937)이고, 어머니는 엘리자베스 토마스(결혼 전 성 디젤, 1898–1987)이다. 여동생 셜리 피터스(1935년 출생)가 있다. 이스트캔턴의 작은 농장에서 자랐으며, 이스트캔턴 고등학교를 다녔다. 종교는 감리교였다.[2] 미시간 대학교에 다니다가 오하이오 주립 대학교로 옮겨 교사가 되기 위해 문학을 공부했다.[3]
미인대회 미스 오하이오 수상을 계기로 할리우드에 진출하여 1947년 영화계에 데뷔했다. 20세기 폭스와 계약하고 1950년대 중반까지 여러 영화에 출연하며 배우로서 경력을 쌓았다. 1957년 하워드 휴즈와 결혼하며 은퇴했으나, 이후 텔레비전 작품을 통해 간헐적으로 활동을 이어갔다.
1945년 가을, 오하이오 주립 대학교에서 교사 자격증을 공부하던 중 미스 오하이오 주립 대학교 선발대회에 참가하여 다른 11명의 결선 진출자를 제치고 우승했다. 사진작가 폴 로빈슨이 후원한 이 대회에서 우승 상품으로 20세기 폭스와의 스크린 테스트 기회를 얻었다.[4]
3. 경력
3. 1. 20세기 폭스
그녀의 에이전트인 로빈슨은 피터스와 함께 할리우드로 가서 그녀가 20세기 폭스와 7년 계약을 맺도록 도왔다. 그녀는 배우가 되기 위해 대학을 중퇴했는데, 나중에 이 결정을 후회했다.[4] 1940년대 후반에 피터스는 촬영 중간에 학업을 마치고 학위를 받기 위해 대학으로 돌아가기도 했다.[5]
폭스는 그녀의 첫 영화인 ''나는 지금 누가 그녀에게 키스하는지 궁금해''(1947)에서 그녀가 "인공 주근깨와 뿔테 안경"을 쓴 "미운 오리 새끼" 역할을 맡을 것이라고 발표했으나,[6] 그녀는 결국 그 영화에서 하차했다. 또한 피터스는 1946년에 영화 ''스쿠다 후! 스쿠다 헤이!''(1948)의 농가 소녀 역할 오디션을 보았지만, 프로듀서와 감독은 그녀가 역할에 적합하지 않다고 판단했다.[7]
3. 2. 영화 데뷔와 초기 활동
미인대회에서 미스 오하이오로 선발된 것을 계기로 할리우드로 건너가 1947년 영화계에 데뷔했다. 피터스는 원래 린다 다넬이 타이론 파워의 상대역으로 출연하기로 했던 영화 ''카스티유의 기사''(1947)의 여성 주연으로 발탁되었다. 이는 다넬이 ''영원한 앰버'' 제작에 참여하게 되면서 생긴 기회였다. 피터스는 아직 스크린 데뷔 전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대대적인 홍보와 함께 촬영 기간 동안 스타 대우를 받았다.[8] ''카스티유의 기사''는 흥행에 성공하며 그녀의 이름을 알렸다. 영화 평론가 레너드 말틴은 피터스가 이후 10년간 주로 시대극과 서부극에 출연하며 "섹시한 불꽃 같은 역할"을 소화했다고 평가했다.[9]
하지만 그녀는 서부극 ''옐로우 스카이''(1948)에서 비슷한 역할을 제안받았을 때, 역할이 "너무 섹시하다"는 이유로 거절했다.[9] 이로 인해 스튜디오와의 관계가 악화되어 첫 번째 정직 처분을 받기도 했다.[9]
1947년 말 촬영에 들어간 그녀의 두 번째 영화 ''딥 워터스''(1948)에서는 ''카스티유의 기사''의 감독이었던 헨리 킹과 다시 작업했다. 피터스는 킹 감독에 대해 "그는 자신이 무엇을 원하고 어디로 가야 하는지 아는 분이며, 나는 그를 매우 신뢰하기 때문에 이번 작업은 나에게 정말 획기적인 일"이라고 언급했다.[4] 이 영화는 데뷔작만큼 큰 성공을 거두지는 못했지만, 피터스는 다시 한번 주목받으며 바바라 벨 게디스, 발리, 리처드 위드마크, 완다 헨드릭스와 함께 그해 최고의 신인 5인 중 한 명으로 선정되었다.[10]
이후 클리프턴 웹과 함께 ''미스터 벨베데어, 대학에 가다''(1949)에 출연할 예정이었으나, 최종적으로는 셜리 템플이 그 역할을 맡게 되었다.[11]
1949년 초, 피터스는 레이 밀랜드의 상대역으로 ''매년 봄이 오면''(1949)에 출연 계약을 맺었다. 그녀는 역할을 위해 머리를 금발로 염색하겠다고 제안했으나 스튜디오는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9] 영화는 성공했지만, 대부분의 홍보는 상대 배우인 밀랜드에게 집중되었다.
다음 작품인 시대극 ''사랑스런 악당''(1950)에서는 폴 더글러스와 호흡을 맞췄다. 이 영화 촬영을 위해 그녀는 앉기조차 힘들 정도로 몸에 꽉 끼는 드레스를 입어야 했다.[12] 원래 ''턴드 업 토즈''(Turned Up Toeseng)라는 제목이었던 이 영화에 피터스는 ''매년 봄이 오면'' 개봉 직후인 1949년 6월 캐스팅되었다. 그녀는 영화 속 노래와 춤 장면을 소화하기 위해 베티 그레이블의 댄스 강사에게 개인 레슨을 받기도 했다.[13]
1950년에 이르러 피터스는 1947년부터 주연 배우로 활동했음에도 불구하고 대중에게 점차 잊혀져 갔다. 그해 말, 그녀는 영화 ''내 작은 소녀를 돌봐줘''(1951)에서 대학생 역할의 조연으로 캐스팅되었다.[14] 한 지역 신문은 피터스가 감독 진 네굴레스코에게 자신의 바느질 솜씨를 보여준 덕분에 역할을 얻었다고 보도하기도 했다.[15] 한때 순수한 시골 소녀 이미지로 인기를 얻었지만, 배우로서 성장하면서 스튜디오는 그녀에게 맞는 역할을 찾는 데 어려움을 겪었다.[16]
3. 3. 스타덤
진 피터스는 영화 ''앤 오브 디 인디스''(1951)에서 주연을 맡았고, 언론은 이 영화를 통해 그녀가 스타덤에 올랐다고 평가했다.[17] 이 영화 개봉 전, 그녀는 말론 브란도의 상대역으로 영화 ''Viva Zapata!''(1952)에 캐스팅되었다. 당시 줄리 해리스도 이 역할의 후보로 고려되었다. 1951년, 피터스는 마릴린 먼로와 처음으로 함께 영화 ''젊은 당신처럼''에 조연으로 출연하며 인연을 맺었다.[24]
피터스는 드라마 영화 ''햇살이 비칠 때까지 기다려 넬리''(1952)에서 주연을 맡으며 경력 시작 이후 가장 많은 홍보를 받았다.[18] 영화 촬영을 위해 캔자스주 허친슨에 머무는 동안 '미스 위트하트 오브 아메리카'라는 칭호를 받기도 했다.[19] 이후 옴니버스 영화 ''O. 헨리의 풀 하우스''(1952)와 제프리 헌터와 공동 주연을 맡은 ''황야의 탈출''(1952)에 출연했다.
1953년, 새뮤얼 풀러 감독은 마릴린 먼로 대신 피터스를 영화 ''사우스 스트리트의 픽업''의 캔디 역으로 선택했다. 풀러 감독은 피터스가 역할이 요구하는 성적 매력과 강인하고 현실적인 면모를 동시에 갖추었다고 판단했으며, 먼로는 역할에 비해 너무 순진해 보인다고 생각했다. 셸리 윈터스와 베티 그레이블도 후보였으나 거절했다. 그러나 피터스 자신은 캐릭터의 노골적인 성적 매력 때문에 역할에 만족하지 못했다.[20] 그녀는 ''앤 오브 디 인디스''(1951), ''비바 자파타!''(1952), ''황야의 탈출''(1952)에서 연기했던 것처럼 좀 더 현실적이고 평범한 역할을 선호했다.[21]
''사우스 스트리트의 픽업'' 촬영 당시, 피터스는 머리를 탈색하라는 제안을 받았지만, 윈터스나 그레이블과 비교되는 것을 피하기 위해 거절했다.[22] 대신 역할에 맞는 "섹시한 걸음걸이"를 연기하는 데는 동의했다.[22] 그녀는 마릴린 먼로의 도움을 받아 팜므파탈 역할을 이해했다고 전해진다.[16] 피터스는 나중에 영화 제작 자체는 즐거웠다고 회상했지만, 인터뷰를 통해 다시는 팜므파탈 역할을 맡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그녀는 "''사우스 스트리트의 픽업''은 제 경력에 도움이 되었지만, 그렇다고 제가 몸에 딱 붙는 스웨터와 스커트를 입고 돌아다닐 거라는 의미는 아니에요. 저는 그런 타입이 아니에요. 마릴린 먼로에게는 잘 어울리지만, 저에게는 어울리지 않을 거예요."라고 말했다.[23] 다른 인터뷰에서는 현실적이고 때로는 꾸밈없는 여성을 연기하는 것이 드라마 측면에서 더 많은 것을 보여줄 수 있다고 설명했다.[21]
그녀는 자신의 연기 철학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했다.
: 옷걸이 같은 역할에는 삶의 본질을 파고드는 대사나 상황이 거의 없어요. 최신 유행의 옷을 입은 여자도 평범한 사람처럼 느끼고 생각할 수 있지만, 그 옷 때문에 진정한 감정을 표현하기 어려워지죠. 거울을 보면 보이는 모습에 맞춰 살아가야 하는 것처럼요. 화면에서도 마찬가지예요. 세련되고 우아한 캐릭터의 대사는 저에게 잘 맞지 않는다고 생각해요. 배우의 세련됨은 오랜 훈련에서 나오지만, 저는 학교에서 바로 스크린으로 왔고, 연기를 배우는 과정에 있어요. 제가 이해할 수 있는 역할을 하고 싶어요. 저는 오하이오주 캔턴 근처 시골에서 자랐기 때문에 솔직하고 정직한 접근 방식을 선호해요. 꾸며낸 말투나 복잡한 속임수는 저와 제가 이해하는 캐릭터 모두에게 낯설어요. 할리우드 스타의 화려함—흰 담비 모피나 프랑스 수영복을 입고 사진 찍히는 모습—이 대중을 혼란스럽게 한다고 생각해요. 그들은 우리를 똑같이 날씨나 작업 환경에 영향을 받는 인간으로 보지 않아요. 저는 그런 겉모습에서 벗어나 본질에 다가가고 싶기 때문에, 호세파나 앤, 또는 ''황야의 탈출''의 루이즈 같은 캐릭터를 선택해요.[21]
피터스는 마릴린 먼로, 조셉 코튼과 함께 ''나이아가라''(1953)에 출연했다. 원래 이 역할은 ''O. 헨리의 풀 하우스''(1952)에서 함께 출연했던 앤 백스터에게 제안되었으나 피터스가 대신 맡게 되었다. 1952년 여름에 촬영된 ''나이아가라''에서 피터스의 캐릭터는 처음에는 비중이 컸지만, 영화는 결과적으로 당시 더 큰 인기를 누리던 먼로를 중심으로 편집되었다.[25]
1953년 피터스의 세 번째 영화는 ''살인을 위한 설계''로, 조셉 코튼과 다시 한번 호흡을 맞췄다. 1952년 12월 캐스팅 당시 피터스는 영화에서 노래할 기회가 있어 기쁘다고 밝혔으나, 실제 영화에서는 그녀의 노래 대신 피아노 연주 장면만 사용되었다.[26][27] 영화 개봉 직후인 1953년 7월, 영화사는 피터스와의 계약을 2년 연장했다.[28]
같은 해, 그녀는 필름 느와르 ''비키''에도 출연했다. 이 영화는 ''I Wake Up Screaming''의 리메이크 작으로, 작가 레오 타운센드가 피터스를 염두에 두고 판권을 구매했다.[29] 타운센드는 피터스를 "그가 본 가장 위대한 팜므파탈 중 한 명"이라고 평가하며 1952년 12월 그녀에게 역할을 제안했다.[29]
다음으로 피터스는 진 크레인을 대신하여 영화 ''분수 세 개''(1954)에 캐스팅되어 1953년 말 이탈리아에서 촬영을 진행했다.[9] 피터스는 이 역할에도 만족하지 못했는데, 1953년 9월 인터뷰에서 "도로시 맥과이어, 클리프턴 웹, 매기 맥나마라가 출연한다는 소식을 듣고 드디어 제게 맞는 지적인 역할을 맡게 될 줄 알았어요. 하지만 이탈리아에 가서 대본을 읽어보니 또다시 흙냄새 나는 소녀 역할이더군요."라고 말했다.[1]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화는 큰 성공을 거두며 피터스를 다시 한번 주목받게 했다.[30]
3. 4. 후기 활동 및 은퇴
피터스는 1954년 서부극 《아파치》와 《브로큰 랜스》에 출연했다. 《아파치》는 워너 브라더스에서 대여한 작품이었다. 《브로큰 랜스》는 큰 주목을 받지 못했지만, 《아파치》에서의 연기는 비평가들의 호평을 받았다. 한 평론가는 그녀의 연기를 "훌륭하다"고 평가하며 "오늘날 할리우드에서 가장 훌륭한 젊은 여배우 중 한 명이 될 것"이라고 예측했다.[30]
1955년 개봉한 《피터라는 남자》는 피터스의 마지막 영화가 되었다. 이 영화에서 그녀는 미국 상원 목사이자 장로교 목사인 피터 마셜의 아내 캐서린 마셜 역을 연기했다. 《피터라는 남자》 개봉 후, 피터스는 여러 영화 출연 제안을 거절했고, 이로 인해 소속사였던 폭스로부터 출연 정지 처분을 받기도 했다.[9] 결국 피터스는 사생활에 집중하기 위해 폭스를 떠나기로 결정했다.[9]
이후 하워드 휴즈와 결혼하면서 배우 활동을 중단하고 은퇴했다. 1957년, 제작자 제리 월드는 그녀에게 할리우드를 떠나지 말라고 설득했지만 실패했다.[31] 그녀는 휴즈의 영향으로 배우 활동을 계속하는 것을 꺼렸으며, 1957년 말에는 배우 대신 제작자가 될 계획이라고 밝히기도 했다.[32]
1959년 3월, 피터스가 영화 《온 세상의 기쁨(The Best of Everything)》에서 조연으로 스크린에 복귀할 것이라는 발표가 있었으나,[33] 실제 출연은 이루어지지 않았고, 이전에 언급했던 영화 제작 계획 또한 실행되지 않았다.
1970년, 피터스가 영화 3편과 주간 TV 시리즈 출연을 고려하고 있다는 언론 보도가 나오면서 그녀의 연기 복귀에 대한 소문이 돌았다.[34] 그녀는 텔레비전 영화 《와인즈버그, 오하이오》(1973)를 복귀작으로 선택했다. 처음에는 "이 대본을 매우 좋아합니다. 저에게 딱 맞는 나이이고, 제가 화려한 여자인 척할 필요도 없어요."[36]라며 프로젝트에 대한 열정을 보였으나, 방영 후에는 "이 쇼나 제 연기에 만족하지 못했어요. 꽤 지루하다고 생각했어요."[35]라고 소감을 밝혔다. 그녀의 상대 배우였던 윌리엄 윈덤은 피터스에 대해 "현장에서 따뜻하고, 친절하고, 매력적이었다"고 긍정적으로 평가했다.[36]
1976년에는 TV 미니시리즈 《머니체인저스》에서 조연을 맡았다. 출연 계기에 대해 그녀는 "저도 잘 모르겠어요. 일시적인 미친 짓이었을 거예요. 제 오랜 친구인 로스 헌터를 만났는데, 그가 NBC-TV를 위해 《머니체인저스》를 제작하고 있었고, 저에게 출연할 생각이 있는지 물었습니다. 재미있을 것 같았어요. 역할도 괜찮고, 너무 크지도 않고, 상대역을 맡은 크리스토퍼 플러머를 매우 존경해요."[37]라고 설명했다.
이후 1981년에는 당시 남편이었던 스탠 호프가 제작한 텔레비전 영화 《피터와 폴》에 출연했으며, 1988년 드라마 《제시카의 추리극장》에 게스트로 출연한 것을 마지막으로 연기 활동을 마쳤다.
4. 사생활
피터스는 경력 초기에 대중의 주목을 받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고 밝혔으며[4], 20세기 폭스의 동료 배우였던 진 크레인은 그녀가 "파티 걸과는 거리가 멀었다"고 회상하며 경력에 매우 진지했다고 언급했다.[38] 스튜디오와의 갈등에도 불구하고 다른 계약 배우들과는 좋은 관계를 유지했으며[9], 특히 마릴린 먼로와 절친한 사이였다.[22] 그 외에도 조셉 코튼, 데이비드 니븐, 레이 밀랜드, 마리 맥도널드, 진 크레인 등과 친분을 쌓았다.[9] 한 전기 작가는 피터스에 대해 나쁜 말을 한 사람을 찾기 어려웠다고 언급하기도 했다.[9]
1946년 액터스 랩(Actors Lab)에서 학생으로 만난 배우 오디 머피와 가까운 관계를 가졌으며, 이 시기에 하워드 휴즈를 처음 만났다.[41] 1947년 휴즈와의 관계가 공개적으로 알려지며 결혼설이 돌았으나, 당시 피터스는 경력과 병행할 수 없다고 생각했다.[4]
1954년, 피터스는 텍사스의 석유 재벌 스튜어트 크레이머(스튜어트 W. 크레이머의 손자)와 결혼했다.[39] 두 사람은 만난 지 몇 주 만에 결혼했으나 몇 달 후 헤어졌다.[34] 당시 피터스가 은퇴할 것이라는 추측이 많았지만, 그녀는 휴가 후 할리우드로 돌아갈 것이라고 밝혔다.[40]
1957년 크레이머와 이혼한 후, 피터스는 하워드 휴즈와 결혼했다. 결혼 직후 휴즈는 대중의 시선에서 사라졌고, 괴짜 은둔자로 알려지게 되었다.[42] 칼럼니스트 잭 앤더슨은 피터스가 "휴즈가 유일하게 사랑했던 여자"라고 주장했으며[44], 휴즈는 피터스와 관계가 없을 때에도 보안 요원을 붙여 그녀를 감시하게 했다고 전해진다. 이는 나이아가라 촬영 중 피터스와 가까워진 배우 맥스 쇼월터가 확인한 사실이다.[45]
1957년부터 1971년까지 이어진 결혼 생활 동안 피터스는 연기 활동과 사교계 활동을 중단했다. 그녀는 휴즈의 보안 요원들의 보호 아래 있었지만, "여배우처럼 행동하지 않았기 때문에" 대중에게 거의 알려지지 않은 채 익명으로 생활했다고 밝혔다.[46][47] 이 기간 동안 그녀는 자선 활동, 공예, 그리고 UCLA에서 심리학과 인류학 등을 공부하는 데 시간을 보냈다.[47]
1971년, 피터스는 휴즈와 이혼했다. 그녀는 당시 수십억 달러 가치의 휴즈 재산에 대한 모든 청구를 포기하는 대가로 연간 70000USD의 평생 위자료를 받기로 합의했다. 피터스는 결혼 생활에 대해 공개적으로 이야기하기를 거부하며 현재와 미래에 집중하고 싶다고 말했다.[47] 그녀는 평생 '하워드 휴즈 부인'으로 알려지는 것을 피하고 싶었지만, "상황이 어떤지 알고, 누가 슈퍼스타인지 안다"며 현실적으로 어려울 것임을 인정했다.[47]
1971년 말, 피터스는 20세기 폭스의 임원이었던 스탠 호프와 세 번째로 결혼했다. 두 사람은 호프가 1990년에 사망할 때까지 결혼 생활을 유지했다.[48]
피터스는 2000년 10월 13일, 74번째 생일을 이틀 앞두고 캘리포니아주 칼즈배드에서 백혈병으로 사망했다. 그녀는 캘리포니아주 컬버 시티에 있는 홀리 크로스 묘지에 안장되었다.[49]
5. 사망
2000년 백혈병으로 사망했다.
6. 출연 작품
영화 | |||
---|---|---|---|
연도 | 제목 | 배역 | 비고 |
1947 | 카스틸의 선장 | 카타나 페레즈 | |
1948 | 딥 워터 | 앤 프리먼 | |
1949 | 잇 해펀스 에브리 스프링 | 데보라 그린리프 | |
1950 | 러브 댓 브루트 | 루스 매닝 | |
1951 | 애즈 영 애즈 유 필 | 앨리스 호지스 | |
테이크 케어 오브 마이 리틀 걸 | 댈러스 프레윗 | ||
앤 오브 더 인디즈 | 앤 프로비던스 선장 | ||
1952 | 혁명아 자파타 | 호세파 사파타 | |
넬리 | 넬리 할퍼 | ||
루어 오브 더 와일더니스 | 로리 하퍼 | ||
오 헨리 단편집 | 수잔 굿윈 | "마지막 잎새" 부분 | |
1953 | 나이아가라 | 폴리 커틀러 | |
사우스 스트리트의 소매치기 | 캔디 | ||
어 블루프린트 포 머더 | 린 캠런 | ||
비키 | 비키 린 | ||
1954 | 애천 | 아니타 허친스 | |
아파치 | 널린 | ||
부러진 창 | 바바라 | ||
1955 | 피터라 불리는 사나이 | 캐서린 우드 마샬 |
텔레비전 | |||
---|---|---|---|
연도 | 제목 | 배역 | 비고 |
1973 | 와인스버그, 오하이오 | 엘리자베스 윌라드 | 텔레비전 영화 |
1976 | 머니체인저 | 베아트리스 헤이워드 | 미니시리즈 |
1981 | 베드로와 바울 | 프리실라 | 텔레비전 영화 |
1988 | 제시카의 추리극장 | 시오반 오데아 | 1 에피소드 |
6. 1. 영화
진 피터스는 영화 ''앤 오브 디 인디스''(1951)에서 주연을 맡았으며, 이 작품을 통해 스타덤에 올랐다는 평가를 받았다.[17] 이 영화 개봉 전에는 말론 브란도의 상대역으로 영화 ''Viva Zapata!''(1952)에 캐스팅되었다. 줄리 해리스 역시 이 배역 후보로 고려되었다. 1951년, 피터스는 마릴린 먼로와 처음으로 함께 영화 ''젊은 당신처럼''에 조연으로 출연했다.[24]피터스는 드라마 영화 ''햇살이 비칠 때까지 기다려 넬리''(1952)에서 주연을 맡으며 경력 초기부터 많은 주목을 받았다.[18] 영화 촬영을 위해 캔자스주 허친슨에 머무는 동안 '미스 위트하트 오브 아메리카'라는 칭호를 받기도 했다.[19] 그녀는 여러 배우가 출연한 영화 ''O. 헨리의 풀 하우스''(1952)와 제프리 헌터와 공동 주연을 맡은 ''황야의 탈출''(1952)에도 출연했다.
1953년, 새뮤얼 풀러 감독은 영화 ''사우스 스트리트의 소매치기''의 캔디 역으로 마릴린 먼로 대신 피터스를 선택했다. 풀러 감독은 피터스가 성적 매력과 함께 강인하고 현실적인 면모를 동시에 갖추었다고 판단했으며, 먼로는 역할에 비해 너무 순수해 보인다고 생각했다. 셸리 윈터스와 베티 그레이블도 고려되었으나 거절했다. 피터스 자신은 캐릭터의 성적인 면모 때문에 역할에 완전히 만족하지는 못했으며, ''앤 오브 디 인디스''(1951), ''비바 자파타!''(1952), ''황야의 탈출''(1952)에서처럼 좀 더 현실적인 역할을 선호했다.[20][21]
''사우스 스트리트의 소매치기'' 촬영 당시 머리를 탈색하라는 제안을 받았으나, 윈터스나 그레이블과 비교되는 것을 피하기 위해 거절했다.[22] 대신 역할에 맞는 "섹시한 걸음걸이"를 연기하는 데는 동의했으며,[22] 마릴린 먼로의 도움을 받아 팜므파탈 역할을 이해하려 노력했다.[16] 피터스는 나중에 영화 제작 과정이 즐거웠다고 회상하면서도, 다른 팜므파탈 역할은 맡지 않겠다고 인터뷰에서 밝혔다. 그녀는 "''사우스 스트리트의 픽업''은 제 경력에 도움이 되었지만, 그렇다고 제가 타이트한 스웨터와 스커트를 입고 다니지는 않을 거예요. 저는 그런 타입이 아니에요. 마릴린 먼로에게는 잘 어울리지만, 저에게는 어색할 거예요."라고 말했다.[23] 다른 인터뷰에서는 현실적이고 때로는 꾸미지 않은 여성을 연기하는 것이 드라마 측면에서 더 많은 것을 보여줄 수 있다고 설명했다.[21]
그녀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옷걸이는 삶의 본질을 꿰뚫고 들어가는 대사나 상황이 거의 없어요. 결국, 최신 파리 패션을 입은 여자는 평범하고 단순한 영혼처럼 느끼고 생각할 수 있지만, 그녀가 입은 옷은 그녀가 느끼고 생각하는 것을 정확하게 드러내는 것을 막을 거예요. 거울을 한 번 보면 그녀는 그곳에서 보는 것에 맞춰 살아야 해요. 화면에서도 마찬가지예요. 캐릭터가 세련되고 우아하고 대사가 '밝거나' '잘난 척'하는 경우, 저는 그런 대사를 읽는 데 적합한 사람이라고 생각하지 않아요. 여배우의 세련됨은 대개 수년간의 훈련에서 비롯돼요. 저는 교실에서 스크린으로 왔고, 가는 길에 배우고 있어요. 저는 제가 이해하는 역할을 하고 싶어요. 저는 오하이오주 캔턴 근처에서 태어나 자란 시골 소녀이기 때문에 솔직하고 정직한 접근 방식을 좋아해요. 억양, 음모, 교활한 왜곡은 저에게도, 제가 가장 잘 이해하는 캐릭터에도 생소해요. 저는 종종 할리우드 스타의 화려함—영원히 우리가 흰 담비 모피와 부푼 튤, 프랑스 수영복이나 매끄러운 새틴을 입고 사진을 찍는 것—이 대중을 혼란스럽게 한다고 생각해요. 그들은 우리를 기후와 작업 조건에 대해 그들과 같은 불편함을 겪는 인간으로 인식하지 않아요. 그들은 한 쌍의 울프하운드를 이끌고 세트장에 들어서는 여신을 보기를 기대해요. 저는 그 모든 것에서 벗어나 사물의 핵심으로 들어가고 싶기 때문에, 저는 호세파나, 앤, 또는 루이즈, ''황야의 탈출''의 소녀와 같은 캐릭터를 선택해요.[21]
피터스는 마릴린 먼로, 조셉 코튼과 함께 ''나이아가라''(1953)에 출연했다. 이 영화에서 피터스는 원래 캐스팅되었던 앤 배스터를 대신했는데, 두 사람은 ''O. 헨리의 풀 하우스''(1952)에서 함께 출연한 바 있다. ''나이아가라'' 촬영은 1952년 여름에 진행되었다.[24] 피터스의 역할은 처음에는 주연이었으나, 영화는 결과적으로 당시 더 큰 인기를 누리던 먼로를 중심으로 편집되었다.[25]
1953년 피터스의 세 번째 영화는 ''살인을 위한 설계''로, 조셉 코튼과 다시 호흡을 맞췄다. 그녀는 1952년 12월 이 영화에 캐스팅되었으며, 노래하는 장면이 있어 출연을 기대했지만 실제 영화에서는 피아노 연주 장면만 사용되었다.[26][27] 영화 개봉 직후인 1953년 7월, 영화사는 피터스와의 계약을 2년 연장했다.[28] 같은 해 필름 느와르 영화 ''비키''에도 출연했다. 이 영화는 ''I Wake Up Screaming''의 리메이크 작으로, 작가 레오 타운센드가 피터스를 염두에 두고 판권을 구매했다.[29] 타운센드는 피터스가 "그가 본 가장 위대한 팜므파탈 중 한 명"이라고 생각하여 1952년 12월 그녀에게 역할을 제안했다.[29]
다음으로 피터스는 크레인을 대신하여 영화 ''분수 세 개''(1954)에 캐스팅되었고, 촬영은 1953년 말 이탈리아에서 진행되었다.[9] 피터스는 자신의 역할에 대해 불만족스러움을 표하며 1953년 9월 인터뷰에서 "도로시 맥과이어, 클리프턴 웹, 매기 매크나마라가 출연한다는 소식을 듣고 드디어 제게 맞는 역할을 맡게 될 줄 알았어요. 그들은 똑똑하고 세련된 사람들이니까요. 하지만 이탈리아에 가서 대본을 읽어보니, 제가 또다시 흙냄새 나는 소녀 역할을 맡게 될 거라는 걸 알았죠. 대본에는 제가 길 잃은 트럭에 거의 치일 뻔한 장면도 있었어요."라고 말했다.[1]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화는 큰 성공을 거두며 피터스를 다시 주목받게 했다.[30]
1954년 피터스가 출연한 다른 영화로는 서부극 《아파치》(워너 브라더스에서 대여)와 《브로큰 랜스》가 있다. 《브로큰 랜스》는 큰 주목을 받지 못했지만, 《아파치》에서의 연기는 비평가들의 호평을 받았다. 한 평론가는 그녀가 "훌륭한 연기를 보여주었다"고 칭찬하며 "오늘날 할리우드에서 가장 뛰어난 젊은 여배우 중 한 명이 될 것"이라고 평가했다.[30]
피터스의 다음 영화이자 마지막 작품은 1955년에 개봉한 《피터라는 남자》였다. 이 영화에서 그녀는 미국 상원 목사이자 장로교 목사인 피터 마셜의 아내 캐서린 마셜 역을 연기했다. 《피터라는 남자》 개봉 이후, 피터스는 여러 배역 제안을 거절했고, 이로 인해 스튜디오로부터 출연 정지 처분을 받기도 했다.[9]
영화 | |||
---|---|---|---|
연도 | 제목 | 배역 | 비고 |
1947 | 카스틸의 선장 | 카타나 페레즈 | |
1948 | 깊은 물 | 앤 프리먼 | |
1949 | 매년 봄마다 | 데보라 그린리프 | |
1950 | 사랑스러운 야수 | 루스 매닝 | |
1951 | 젊은 당신처럼 | 앨리스 호지스 | |
내 어린 소녀를 돌봐줘 | 댈러스 프레윗 | ||
앤 오브 디 인디스 | 앤 프로비던스 선장 | ||
1952 | Viva Zapata! | 호세파 사파타 | |
햇살이 비칠 때까지 기다려 넬리 | 넬리 할퍼 | ||
황야의 탈출 | 로리 하퍼 | ||
O. 헨리의 풀 하우스 | 수잔 굿윈 | "마지막 잎새" 부분 | |
1953 | 나이아가라 | 폴리 커틀러 | |
사우스 스트리트의 소매치기 | 캔디 | ||
살인을 위한 설계 | 린 캠런 | ||
비키 | 비키 린 | ||
1954 | 분수 세 개 | 아니타 허친스 | |
아파치 | 널린 | ||
브로큰 랜스 | 바바라 | ||
1955 | 피터라는 남자 | 캐서린 우드 마샬 |
6. 2. 텔레비전
1970년, 피터스가 영화 3편과 주간 TV 시리즈 출연 제안을 고려하고 있다는 언론 보도가 나오면서 그녀의 연기 복귀설이 돌았다.[34] 그녀는 텔레비전 영화 ''와인스버그, 오하이오''(1973)를 선택하며 복귀했다. 처음에는 "저는 이 대본을 매우 좋아합니다. 저에게 딱 맞는 나이이고, 제가 화려한 여자인 척할 필요도 없어요."라며 프로젝트에 대한 열정을 보였으나,[36] 나중에는 "저는 이 쇼나 제 연기에 만족하지 못했어요. 꽤 지루하다고 생각했어요."라고 평가했다.[35] 함께 출연한 배우 윌리엄 윈덤은 피터스에 대해 "현장에서 따뜻하고, 친절하고, 매력적이었다"고 긍정적으로 평가했다.[36]1976년에는 TV 미니시리즈 ''머니체인저''에서 조연을 맡았다. 이 역할을 맡은 이유에 대해 피터스는 오랜 친구인 제작자 로스 헌터의 제안이었고, 역할의 비중이 적당했으며 상대 배우인 크리스토퍼 플러머를 존경했기 때문이라고 설명하며 "재미있을 것 같았다"고 덧붙였다.[37]
이후 당시 남편이었던 스탠 호프가 제작한 1981년 텔레비전 영화 ''베드로와 바울''에 출연했으며, 1988년 ''제시카의 추리극장''에 게스트로 출연한 것을 마지막으로 연기 활동을 마쳤다.
연도 | 제목 | 배역 | 비고 |
---|---|---|---|
1973 | 와인스버그, 오하이오 | 엘리자베스 윌라드 | 텔레비전 영화 |
1976 | 머니체인저 | 베아트리스 헤이워드 | 미니시리즈 |
1981 | 베드로와 바울 | 프리실라 | 텔레비전 영화 |
1988 | 제시카의 추리극장 | 시오반 오데아 | 1 에피소드 |
7. 라디오 출연
wikitext
년도 | 프로그램 | 에피소드/출처 |
---|---|---|
1953 | 럭스 라디오 극장 | 넬리가 해가 빛날 때까지 기다려[50] |
1954 | 럭스 라디오 극장 (CBS) | 지구가 멈춘 날 (1954년 1월 4일) |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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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7-1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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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8-1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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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6-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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