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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원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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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최원봉은 일제강점기 조선 출신의 정치인으로, 1950년 제2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당선되었다. 국방부 검찰과장을 역임했으며, 이승만 정부의 귀속재산 처리법 개정안에 반대했다. 한국 전쟁 중 터키군 수송 차량과의 충돌 사고로 사망했으며, 유족들은 사고의 진상 규명을 요구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그의 아들은 가수 최백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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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원봉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이름최원봉
한자 표기崔元鳳
국적대한민국
출생일1922년 4월 18일
출생지일제강점기 경상남도 동래군 장안면 좌천리
사망일1950년 11월 10일 (29세)
사망지대한민국 충청북도 영동군 황간면
거주지대한민국 경상남도 부산, 밀양, 양산
종교개신교 (장로회)
부모최창민 (부)
자녀최백호 (아들)
형제동생 2명, 여동생 2명
정치 경력
소속 정당무소속
의원 선수1
의원 대수2
주요 경력한국독립당 초급행정위원 (1947년)
국방부 4국 경찰과 과장
무소속 국회의원

2. 생애

1922년 4월 18일 일제강점기 조선 경상남도 동래군 장안면 좌천리(현 부산광역시 기장군 장안읍 좌천리)에서 태어나, 1940년 부산 항일 학생 의거(乃台事件)에 간접적으로 연루되어 중학교를 중퇴했다. 1948년 대한민국 정부 수립 후 국방부 검찰과장을 역임했으며, 1950년 5월 제2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무소속으로 당선되었다. 이승만 정부와 정책적으로 대립했으며, 특히 귀속재산처리법 개정에 반대했다.[1]

한국 전쟁 발발 후 부산으로 피난을 갔으며, 1950년 11월 8일 전쟁의 정부 책임을 묻는 국무위원 인책 관련 권고안을 국회의장 신익희 등 90여 명의 연서로 본회의에 상정했으나 보류 처리되었다.[1]

1950년 11월 10일, 서울에서 부산으로 가던 중 한국 전쟁에 참전한 터키군 수송 차량과 충돌하는 사고로 사망했다. 이 죽음에 관해서는 여러 의혹이 제기되었다. 4·19 혁명 이후, 유족이 정부에 진상 조사를 요구했지만 거부당했다.[1]

2. 1. 초기 생애와 항일 운동

1922일본어년 4월 18일 일제강점기 조선 경상남도 동래군 장안면 좌천리(현 부산광역시 기장군 장안읍 좌천리)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최창민(1975년 사망)은 큰 포목점을 운영했으며, 최원봉은 3남 2녀 중 장남이었다. 1940년 부산 항일 학생 의거(乃台事件)에 간접적으로 연루되어 중학교를 중퇴했다.[1]

2. 2. 정치 활동과 이승만 정부와의 갈등

1948년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 국방부 검찰과장을 역임했다.[1] 1950년 5월 제2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무소속으로 당선되었으며, 이승만 정부의 귀속재산처리법 개정안에 대해 특혜 및 부정의 소지가 있다며 반대했다.[1]

한국 전쟁 발발 후 부산으로 피난 간 정부를 따라 피난길에 올랐다.[1] 1950년 11월 8일, 전쟁의 정부 책임을 묻는 국무위원 인책 관련 권고안을 국회의장 신익희 등 90여 명의 연서로 본회의에 상정했으나, 안건은 보류 처리되었다.[1]

2. 3. 의문의 죽음과 진상 규명 노력

1950년 11월 10일, 최원봉은 서울에서 부산으로 가던 중 경북 김천 황간 부근에서 한국 전쟁 지원을 위해 내한한 터키군 수송 차량과 충돌하는 사고로 사망했다. 터키군 수송 차량이 갑작스럽게 도로를 벗어나면서 사고가 발생했는데, 단순 사고가 아니라 의도된 사고라는 의혹이 제기되었다.[1]

4·19 혁명 이후, 유족들은 정부에 진상 조사를 요구했지만, 번번이 이유 없이 거절당했다.[1] 1997년 토요 미스테리 극장에서 '어느 국회의원의 죽음' 편을 통해 최원봉 의원의 죽음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는 방송을 방영했다.[1]

1951년 국회는 최원봉 의원을 포함하여 전쟁으로 인해 납북, 행방불명, 사망한 국회의원들을 '국회의원 제적수에 관한 특별법'으로 제명 처리하고, 공석이 된 지역구에 대한 재보궐 선거를 실시했다.[1] 최원봉 의원의 지역구였던 경상남도 부산 무 지역구의 재보궐 선거 당선자는 전진한 의원이었다.[1]

3. 가족 관계

관계이름
아버지최창민 (1975년 사망)
아들최백호(가수)


4. 역대 선거 결과

연도선거 종류소속 정당득표수 (득표율)순위당락비고
1950년총선무소속7,445표 (33.97%)1위당선초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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