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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익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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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신익희는 일제강점기와 대한민국 초기 정치인으로, 대한민국 임시정부에서 활동하며 독립운동에 참여했다. 광복 후에는 대한민국의 건국에 참여하여 국회의장과 민주당 대표최고위원을 역임했다. 그는 1956년 대통령 선거 유세 중 뇌출혈로 사망했으며, 그의 죽음은 타살 의혹과 조병옥과의 갈등을 불러일으켰다. 신익희는 국민대학교를 설립하여 교육에도 기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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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익희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1952년 신익희
이름신익희
본명신익히
로마자 표기Sin Ikhi 또는 Sin Ikhui
한자 표기申翼熙
해공
해후
여구
출생일1894년 6월 9일
사망일1956년 5월 5일
출생지경기도 광주군 초월면 서하리
사망지충청남도 서천군에서 전라북도 익산군으로 가는 기차 안
정치
소속 정당국민회
민주국민당
민주당
대한민국 국회 의장제2대
국회 의장 임기 시작1948년 8월 4일
국회 의장 임기 종료1954년 5월 30일
국회 의장 이전이승만
국회 의장 이후이기붕
국회의원경기도 광주
국회의원 임기 시작1948년 5월 31일
국회의원 임기 종료1956년 5월 5일
학력
대학교와세다 대학
가족 관계
배우자해영 이승희 (사별)
해화 김순이 (재혼)
중국 여성 사씨 (동거녀 정인)
자녀1남 2녀 (적장녀 신정완, 적출 외동아들 신하균)
친인척큰아버지 신식(申植)
조카 신해균
종손 신창현
사돈 이시영
형제이복 형 신보희(申輔熙)
동복 형 신재희(申宰熙)
부모신단 (부)
정경랑 (생모)
풍양 조씨 부인 (적모)
전주 이씨 부인 (적모)
기타
대한민국 임시정부 직책외무부 차장
임시정부 임기 시작1943년 3월 4일
임시정부 임기 종료1945년 8월 28일
임시정부 국가수반김구
임시정부 부수반김규식
임시정부 외무부장조소앙 (직무대행 서리)
조소앙 (직무대리)
조소앙
남조선과도입법의원 직책의장 겸 상임위원장
남조선과도입법의원 임기 시작1947년 6월 3일
남조선과도입법의원 임기 종료1948년 5월 20일
미군정청 민정장관안재홍
미군정청 수상안재홍
미국 대통령해리 S. 트루먼
미군정청 군정사령관존 리드 하지
군 복무예비역 대한광복군 중장
경력대한독립촉성국민회 당무위원
한국독립당 당무위원
무소속 국회의원
민주국민당 당무위원장
민주국민당 최고위원 겸 고문
3선 국회의원 출신
기념 사업회 웹사이트해공 신익희 기념사업회

2. 생애

신익희는 일본 유학 후 귀국, 3·1 만세 운동에 참여한 뒤 중화민국으로 망명하여 대한민국 임시정부 창설에 참여하였다.[9] 임정에서 법무부 차장, 외무부 차장, 내무부장 등을 역임했다. 1940년 임시정부 각료로 입각하고, 1945년 2월에는 임정 내무부 산하 경위대를 조직했다. 1945년 12월 귀국 후에는 정치공작대를 조직하고 독립촉성국민회와 반탁운동에 참여했으며, 백의사를 북한에 파견하기도 했다. 1948년 김구, 김규식의 남북협상론에 반대하여 이승만의 단정 수립에 참여했다.

1948년 5월 10일 제헌 국회의원 총선거에 당선되어 제1대, 2대, 3대 민의원의원을 지냈다. 1948년 5월 초대 국회부의장에 선출되었으며, 국회의장 이승만이 대한민국 대통령이 되자 그 뒤를 이어 국회의장에 선출되었다. 대한민국 재건 초기 이승만을 지지하여 대한국민당을 창당했으나, 이후 야당 성향으로 변모하고 민주국민당 창당에 참여하였다. 1954년 김성수, 조병옥, 윤보선, 장면, 박순천 등과 함께 호헌동지회와 민주당 창당에도 참여하는 등 야권 지도자로 활약하다가 1956년 제3대 대통령 선거에 출마했으나, 선거 유세 도중 열차에서 갑자기 사망하고 말았다.

그는 국민대학(현 국민대학교)을 설립하고 초대 학장을 지내기도 하였다.

2. 1. 생애 초기

신익희는 경기도 광주 출신으로, 임진왜란 때 충주 탄금대 전투에서 전사한 신립의 후손이자 인조반정의 공신 신경희의 후손이며, 신사임당의 방계 후손이었다.[11] 그는 고아가 되어 이복형 신규희의 손에 자랐으며, 어린 시절 일본으로 유학을 갔다.

2. 1. 1. 출생과 가계

해공 신익희는 경기도 광주 초월면 서하리 사마루(社村)의 소론계 명문가 출신으로 본관은 평산(平山)이다.

신익희는 좌의정(정1품) 문희공 신개의 후손으로, 자헌대부(정2품) 장례원경(정2품)을 지낸 신단(申檀)과 그의 넷째 부인 동래 정씨 정경랑(鄭敬娘) 사이에서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아버지 신단은 판서와 장례원경을 지낸 인물로 고향에서는 신판서로 불렸다. 신익희의 선조는 임진왜란 때 충주 탄금대 전투에서 전사한 신립의 후손으로, 인조반정의 공신 신경희의 동생 신경연(申景禋)의 9대손이었다. 이이의 어머니 신사임당은 그의 13대 방조인 신명화(申命和)의 딸이었다. 그의 집안은 9대 방조 신경진이 서인에 가담하면서 서인이었다가, 뒤에 노소 분당때는 소론에 가담하여 이후 소론계열이었으나 정치색이 뚜렷하지 않은 관계로 노론 벽파가 승리하고, 세도 시대가 되었으나 관직에 계속 있을 수 있었다.

아버지 신단은 첫 부인에게서 보희를 얻었으나 첫 부인은 일찍 사망하여 두 번 재혼하였다. 두 번째 부인 역시 요절하고, 세 번째 부인 전주이씨에게서 규희, 필희, 정희와 딸 1명을 두고, 정경랑에게서는 요절한 아들과 재희, 익희를 두었다.

어머니 동래 정씨 정경랑은 1867년 경남 김해에서 아전인 정태조의 딸로 태어나 경기도 양평에서 성장한 후, 경기도 광주의 신단에게 시집갔다. 신단은 아들로는 신보희(申輔熙)·신규희(申揆熙)·신필희(申弼熙)·신정희(申庭熙)·이름 미상·신재희(申宰熙)·신익희 등 7형제와 1녀를 두었고, 신익희는 이중 여섯째 아들이자 막내아들이었다.[11] 어머니 정경랑은 김해의 향리였던 정태조(鄭太朝)의 딸로, 아버지는 일찍 여의고 홀어머니와 오빠 1인이 있었다. 그는 뒤에 한성으로 올라와 이집, 저집에 의탁하여 생계를 이어가다가 판서 신단의 집에 거처하게 되었고, 그의 넷째 부인이 되었다. 정경랑은 신단에게 시집와 첫 아들을 두었으나 일찍 요절했고, 둘째 아들로 신재희를 두고, 이어 셋째 아들로 신익희를 두었다. 신재희는 동아일보의 기자였으나 뒤에 동생이 독립운동가라 하여 핍박을 받자 역시 중국으로 망명했다.

배다른 형 중 큰형 신보희는 큰아버지 신식의 양자로 출계하였으나, 결혼 직후 사망했다. 이로서 둘째 이복형인 신규희가 장남이 되었는데, 그는 어린 시절 신익희에게 한학과 천자문, 명심보감 등을 가르쳤다. 친형인 신재희의 부인은 경주 이씨로, 형수 경주 이씨는 이조판서 이유원의 딸이었다.

2. 1. 2. 소학교, 한성학교 시절

1905년 형 신규희의 추천으로 광주 남한산성의 소학교에 입학했다.[12] 1908년 이복 형 신규희의 뜻에 따라 조카 신정균 등 일가 소년들 몇 명과 함께 경성관립한성외국어학교 영어학과로 진학하였다.[14]

신익희는 형편이 여의치 않아 동갑내기 조카 신정균과 함께 경성에서 하숙했는데, 신정균의 장인인 호조참판 이위의 배려로 이위의 댁에서 학교로 통학하였다. 신익희는 영어학과, 신정균은 한문학과에 입학하였다. 신익희는 이위 댁에서 가정교사로 활동하며 용돈을 벌기도 했다.

훗날 관립한성외국어학교 영어학과 동창생인 독립운동가 겸 한글학자 이희승은 '나보다 두 살 위인 신익희는 명석한 두뇌와 원만한 성품으로 동료 학생들과 교사들에게 인기가 높았다.'고 회고했다.

2. 2. 청년기

경기도 광주에서 태어났다. 1908년 한성관립외국어학교를 졸업하고, 일본 와세다 대학교 정치경제학부에 유학하였다. 유학 중 한국 유학생들과 학우회를 조직하여 임원을 맡고, 기관지 『학지광』을 발간하는 등 학생 운동을 전개하였다. 1913년 귀국 후 경성중동학교와 보성법률상업학교에서 교편을 잡았다.

2. 2. 1. 일본 유학과 대학 재학

1910년 한성 관립외국어학교 영어과를 졸업하고 1911년 결혼 후, 일본 동경 유학을 떠났다. 세이소쿠 영어학교 고등수험과에 입학하였고, 1913년 와세다 대학 정치경제학과에 입학하였다.[18][19]

모교 와세다 대학


유학 중, 한국 유학생들과 학우회를 조직하여 총무, 평의회장, 회장 등 임원을 맡았으며,[20] 기관지 《학지광(學之光)》을 발간하면서 학생운동을 하였다.

와세다 대학에서 장덕수를 만나 함께 독립운동을 위한 비밀활동을 하기도 했다.[21]

2. 2. 2. 교육 계몽 활동

1913년 고향인 경기도 광주에 동명강습소를 열었다.[20] 1914년 여름방학때 동경공업고등학교를 갓 졸업한 나경석과 함께 축구단을 조직하여 전국을 순회하였다. 이때 신익희는 부여에 들려서 시합에 참가한 일도 있었다.[23] 1917년 귀국 후 보성법률상업학교 교수가 되었다.[20] 보성전문에서는 법학 교수와 재무학 교수로 학생들에게 비교헌법, 국제공법, 재정학을 가르쳤다. 신익희는 어려운 단어를 쉽게 풀이하고 쉬운 단어를 활용하여 보다 많은 학생들과 청강생들이 몰려들었고, 그보다 나이가 많은 학생들로부터까지 명강의로 불리며 큰 인기를 끌었다.

2. 3. 독립운동

1919년 3·1 운동 직후 상하이로 망명하여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에 참여, 초대 내무차장에 취임하였다. 이후 내무총장, 법무총장, 문교부장, 외무부장 등과 국무원 비서실장, 임시의정원 부의장을 역임하였다. 1933년 난징에서 대일전선통일동맹을, 1937년 조선민족전선을 결성하고, 1942년부터 임시정부 외교위원회 부위원장으로 외교 활동을 하였다.

광복 후 대한민국 임시정부 내에서 장준하 등 젊은 인재들을 영입하려 했으나 실패했고, 정치공작대를 조직하여 독자적인 청년단체로 활용하였다.

2. 3. 1. 독립운동에 투신

1918년 최린, 송진우 등과 독립운동을 논의하였다.[9] 1919년 3·1 운동 당시 해외와의 연락 임무를 맡았으며,[9] 일제의 체포를 피해 상하이로 망명하였다.

2. 3. 2. 임시정부 활동

1919년 상하이 시에서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에 참여하여 초대 내무차장에 취임하였다.[9] 이후 내무총장, 법무총장, 문교부장, 외무부장 등을 역임하였으며, 국무원 비서실장과 임시의정원 부의장을 겸임하였다.

대한민국 임시정부 국무원 기념 사진(1919년 10월 11일). 앞줄 왼쪽부터 신익희, 안창호, 현순. 뒷줄 김철, 윤현진, 최창식, 이춘숙


1933년에는 난징에서 대일전선통일동맹을, 1937년에는 조선민족전선을 결성하였고, 1942년부터는 임시정부 외교위원회 부위원장으로서 외교 활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였다.

2. 3. 3. 독자세력 구축 운동

대한민국 임시정부 내에서 장준하 등 젊은이들을 자신의 측근으로 영입하려 노력했으나 실패하였다. 광복 후 정치공작대를 조직하여 독자적 청년단체로 활용하였다.

2. 4. 광복 직후의 정치 활동

임정이 연립내각으로 발족할 때 신익희는 한국청년당의 대표로 입각[32] 하였다. 장준하는 '그러나 그 청년당은 사실 1인 1당의 고독한 당이어서 신내무부장이 외로웠던 것은 사실이다.[32]'라고 증언하였다.

장준하 등 일본군 탈영병들이 광복군으로 편입되어 이동해갔으나 신익희는 이들 청년들을 자신의 측근으로 영입하려 노력했다. 신익희는 일본군이나 학도병을 탈출하여 임정으로 찾아오는 젊은이들 외에, 광복군 훈련장에도 직접 방문하여 청년들 중 일부를 포섭하려 했다. 장준하는 자신의 자서전 돌베개에서 다음과 같이 기록하였다.

'우리가 일단 임정을 떠나 토교에 와 있는데도 신익희 내무부장은 우리 대원을 한 둘 씩 불러내어가곤 했다. 한두 차례 불리어 간 동지가 있었을 때 우리는 그 의도를 알 수가 있었지만, 그것이 상당히 은밀한 계획으로 진행되는 것임을 나중에야 알았다. 왜냐하면 불리어 갔다온 대원들이 왜 불려갔는지를 똑똑히 말해주지 않고 그저 어물어물해버렸기 때문이다. 여러 차례 다녀온 대원들이 늘고 그 횟수가 늘어 마침내는 수십 명이 되자, 그들은 마침내 우리로부터 이탈해, 다시 임정에 되돌아갈 것을 정식으로 제의하기 시작했다.[33] 간다는 이유는 임정 내무부 관할로 '경위대'라는 것이 새로 조직되는데, 그 경위대원이 되기 위해서라고 했다.[33]'

장준하 등은 경위대원이 되려고 다시 임정으로 가겠다는 동지들을 붙잡았으나 실패했다. '우리들 전체는 그동안 같이 고생해온 정을 호소, 몇 번이나 말렸으나 그들은 이미 신 내무부장관과 관계가 깊어진 듯 끝내 고집을 부렸고 마침내는 가고 말았다.[33]'고 한다.

동지들이 신익희를 따라 가자 장준하는 분노했다. 장준하는 일단 그들을 보내놓고 밤새워 등사 전단을 만들었다. 등사 전단 내용은 신익희 내무부장을 비롯한 기타 정당의 정당인들을 규탄하는 것이었다. 그들은 이것을 등불 잡지의 호외 형식으로 만들었다. 다음날 아침 일찍 장준하 외 20명은 그것을 안고 몽둥이까지 하나씩 들고 임정을 향해서 출동했다.[32] 젊은이들이 몽둥이를 들고 자신을 찾아온다는 소식을 듣고 신익희는 피신했다. 임정 청사에 닿은 장준하 일행은 '경위대를 해체하라', '젊은이는 전선에 나가 죽게 하라'는 등의 구호를 외치고 신익희를 찾았다. 그러나 신익희는 어느새 재빠르게 사라져버렸다.[32] 결국 이들은 규탄대상을 놓치고 말았다.

독자적 세력 구축에 실패하자 결국 당을 해산하고 한국독립당에 입당한다. 그리고 그의 경위대는 귀국 직후 정치공작대로 변환시켜서 독자적 청년단체로 활용하였다.

2. 4. 1. 광복과 귀국

귀국 후


해방 후 조선인민공화국 인민내각의 척신부장(遞信部長)으로 선임되었으나[4], 1945년 12월 3일 귀국 후에는 김구임시정부 계열과는 다른 노선을 선택하여 이승만과 가까워졌다. 또한 한민당을 친일파로 비판하며, 한민당과의 불화를 심화시키기도 하였다.

2. 4. 2. 임정정치공작대와 백의사 거사지휘

1946년 2월 말 신익희는 대한민국 임시정부 정치공작대의 조중서 등과 백의사염동진과 연계하여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 기념식에서 폭탄 투척 계획을 세웠다. 2월 15일에는 무임승차권인 승차 편의 공여에 관한 의뢰장과 임시정부 신임장을 발급해 주었다.[38][39][40]

1946년 3월 1일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는 평양역 앞에서 '3.1 운동 27주년 기념식'을 열었는데, 백의사 청년단원들은 김일성에게 폭탄을 던졌다. 집회가 진행되는 도중 연단을 향해 수류탄이 던져졌는데, 집회 경비를 담당한 소련군 부대장 노비첸코 소위수류탄을 되잡아 던지려다가 그의 손에서 폭발하였다. 노비첸코는 이 폭발로 오른팔이 잘려나가고 한쪽 눈을 다치는 중상을 입었지만, 김일성은 무사했다.[38][41][42]

김구와 신익희의 지시를 받은 백의사는 3명의 청년을 평양으로 보냈는데, 북한의 3.1절 행사장에 폭탄을 던진 사람은 남한에서 올라간 열여덟 살 소년 김형집이었다.[38][39][40] 나머지 요원들은 최용건김책의 집에도 습격·폭탄을 던졌으나 성공하지 못했고, 강량욱의 집에 던진 폭탄은 강량욱의 아들과 딸을 죽게 만들었다.[38][39][40]

청년단원 중 한 명이 대한민국 임시정부 내무부장 신익희의 명의로 2월 15일에 발급된 승차 편의 공여에 관한 의뢰장과 임정 신임장을 분실했고,[38][40][43] 이는 북한 측에 의해 입수되면서 발각되었다.

2. 4. 3. 우익 정치인 활동

1946년 대한독립촉성국민회 부위원장, 자유신문사 사장 등을 역임하였으며 국민대학(현 국민대학교)을 설립하여 초대 학장을 맡았다. 겸임 교수로 활동하며 민족학과목을 강의하였고, 행정연구반을 구성하여 건국 후 시행할 행정 자료를 수집하였다. 제8대 대한체육회(대한체육회의 전신) 회장에 추대되었다.[4]

2. 4. 4. 미군정에 대한 쿠데타 계획

1946년 8월 신익희는 미군정에 대한 쿠데타를 계획하였다. 중경 임시정부 추대 운동은 신익희에 의해 쿠데타적인 형태로 추진되었다.[45] 좌익에서 군정의 철퇴와 정권을 인민위원회에 넘길 것을 요구할 때, 극우세력은 군정의 철퇴와 정권을 즉시 중경 임시정부에 넘기라는 내용의 유인물을 8월 29일 국치일에 배포했다.[45] 8월 15일 며칠 전 경찰은 좌익의 음모사건을 빌미로 좌익 간부를 검거하고 가택을 수색하였는데, 실제 쿠데타 계획은 중경임시정부의 내무부장이던 신익희가 준비하고 있었다.[45] 신익희의 거사는 원래 8·15에 하도록 계획되어 있었으나, 이승만김구가 찬동하지 않아 8월 29일로 연기되었다.[45][46]

신익희는 1945년 12월 8일 중경임정 비밀회의에서 설립이 결의된 특별정치부대를 동원하여 8월 29일 국치일에 정부 건물을 접수하여 '독립정부'를 수립할 계획을 세웠다.[45] 그러나 이 계획은 8월 21일8월 22일장덕수, 윤치영 등이 미군 CIC에 정보를 제공함으로써 실패로 돌아갔다.[45][47]

신익희는 새 정부가 세워질 때 주요 지위를 약속하고 부유층으로부터 많은 돈을 거둬들였다는 혐의를 받았다.[45] 1946년 8월 16일 CIC와의 인터뷰에서 민전의 간부 김광수는 신익희는 한국 전체의 경찰조직에 대해 상당한 통제권을 갖고 있었고, 나아가 각 지역의 우익 리더들로부터 자금을 요청하기 위해 지방을 여행 중이라고 말했다.[45][48] 8월 22일 윤치영은 CIC 요원에게 신익희가 1) 8·29에 중경임정 승인 탐색, 2) 영향력 있는 새 인물 임정에 배치, 3) 승인될 새 정부 구성 탐색, 4) 군정의 무능을 폭로하고 새 정부 수립 요구를 위한 미군정에 대한 대중시위를 갖는다는 4단계 계획을 갖고 있음을 알려주었다.[45][49] 쿠데타가 좌절되자 신익희는 윤치영을 책망했고, 윤치영은 후회했다. 좌익측은 그가 부유층들에게 돈을 거둔 것을 계속 반복하여 공격했다.

이후 신익희는 CIC의 출두 요청을 받고 출두하였다. 8월 27일 신익희는 CIC 요원의 심문에서 이승만김구가 이 계획을 알고 있었고, 그것을 반대하지 않았다고 진술했다.[45][50] 좌익간부에 대한 검거와 가택수색이 있었던 8월 8일 신익희와 백관수의 가택도 수색되었다.[45][51] 존 하지는 그에게 다시 한번 일을 벌이면 사살할 수 있다는 경고를 하고 되돌려보냈다.

2. 4. 5. 국민대학교 창립

교육 계몽의 중요성을 인식한 신익희는 김구가 수립한 건국실천원양성소와 이범석의 민족청년단에서 강사로 활동했다. 귀국 직후, 대학교 설립을 위한 자금 모금에 나섰고, 와세다 대학 동창인 김성수, 장덕수를 비롯하여 김구, 이승만, 김규식 등으로부터 지원을 받았다. 1946년 9월 미군정청 문교부의 인가를 받아 국민대학관을 건립하였다.[1]

국민대학관은 초기에는 일반 성인을 대상으로 하는 야간 대학 형태로 운영되었으나, 이후 주간반도 편성되었다. 설립 초기 부지가 없어 보인상업학교에 임시로 자리 잡았으나, 1948년 2월 서울 창성동 체신요원양성소 부지를 매입하여 교사를 신축하였다.[1]

신익희는 국민대학의 설립자이자 이사장 겸 초대 학장이었다. 1946년 9월 초대 학장에 취임하였으나, 정계 진출로 인해 학교 경영에 전념하기 어려워 1954년 3월 박이순에게 학장직을 넘겼다.[1]

2. 5. 정치 활동

신익희는 일본 유학 후 귀국, 3·1 만세 운동에 참여한 뒤 중화민국으로 망명하여 대한민국 임시정부 창설에 참여하였다.[9] 임정에서 법무부 차장, 외무부 차장, 내무부장 등을 역임했다. 1945년 12월 귀국 후에는 김구 등 임시정부 계열과는 다른 노선을 선택하여 이승만과 가까워졌다. 독립촉성국민회 부위원장, 국민대학교 초대 총장 등을 역임하였다.

1948년 김구, 김규식의 남북협상론에 반대하여 이승만의 단정 수립에 참여했다.[5] 1948년 5월 10일 제헌 국회의원 총선거에 당선되어 제1대, 2대, 3대 민의원의원을 지냈다.

1948년 5월 초대 국회부의장에 선출되었으며, 국회의장 이승만이 대한민국 대통령이 되자 그 뒤를 이어 국회의장에 선출되었다. 대한민국 재건 초기 이승만을 지지하여 대한국민당을 창당하여 활동했으나, 이후 야당 성향으로 변모하고 민주국민당 창당에 참여하였다. 1954년 김성수, 조병옥, 윤보선, 장면, 박순천 등과 함께 호헌동지회와 민주당 창당에도 참여하는 등 야권 지도자로 활약하였다. 1956년 제3대 대통령 선거에 출마했으나, 선거 유세 도중 열차에서 갑자기 사망하고 말았다.

2. 5. 1. 대한민국 정부 수립에 참여

1946년 10월 남조선과도입법의원 대의원에 피선되고 1947년 의장이 되었다.[52] 1947년 지청천대동청년단과 합작해 대한국민당을 결성하고 대표최고위원이 되었다.

1948년 5월 10일 대한민국 제헌 국회의원 선거에 출마, 당선되었다.

2. 5. 2. 국회의장

1948년 5월 10일 대한민국 제헌 국회의원 선거에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5월 31일 대한민국 제헌국회 부의장에 취임하였고, 의장인 이승만이 대통령으로 선출되자 국회의장에 선출되었다.[5] 1950년 5월 제2대 총선에서 제2대 국회의원에 당선된 후 다시 국회의장에 선출되었다.

2. 5. 3. 야당 정치인 활동

1946년 남조선과도입법의원 대의원에 피선되고 1947년 의장이 되었다.[52] 같은 해 지청천대동청년단과 합작해 대한국민당을 결성하고 대표최고위원이 되었다.[21]

1948년 5월 10일 대한민국 제헌 국회의원 선거에 출마, 당선되었으며, 같은 해 제7대 대한축구협회 회장에 선출되었다.[53] 정부 수립 후 이승만과 소원해진 한민당의 김성수의 제안을 받아들여 1949년 민주국민당을 결성하고 위원장에 취임하였다.[5]

1950년 5월 제2대 총선에서 제2대 국회의원에 당선된 후 국회의장으로 선출되었다. 한국 전쟁 당시 거짓 방송을 하고 서울에서 탈출한 이승만과 함께 도강파로 비판받았다.

1955년, 민국당을 중심으로 이승만 반대 세력이 결집하여 발족한 민주당의 대표 최고위원이 되었다.

2. 5. 4. 서거

제3대 대통령 선거 유세 중이던 1956년 5월 5일, 장면과 함께 전주로 가는 호남선 열차 안에서 뇌일혈로 쓰러져 서거하였다.[71] 당시 신익희는 전북 이리로 향하던 중이었으며, 새벽 5시경 열차 안에서 뇌출혈을 겪었다.[71] 수행원들이 인공호흡을 시도하며 의사를 찾았지만, 열차 안에는 의사가 없었다. 신익희가 졸도한 후 45분 만에 열차는 이리역에 도착했고, 가까운 호남병원으로 옮겨졌으나 끝내 숨을 거두었다.[71] 정확한 사망 장소는 불분명하나, 이리역과 함열역 사이로 추정된다.[71]

신익희는 새벽에 일어나 침대에 걸터앉아 넥타이를 매다가 갑자기 고개를 떨어뜨렸다. 이후 깨어나 열차 안에서 홍차를 마신 뒤, 종손이자 비서인 신창현에게 휴지를 달라고 말했는데, 이것이 그의 마지막 말이 되었다.

3. 논란과 의혹

신익희의 죽음에 대해, 일각에서는 음해 세력에 의한 독살설을 제기했다.[74] 1956년 대선 운동 직전, 후보 등록 후 장면과 함께 서울행 열차에 탑승했으나, 좌석에 앉은 지 몇 분 만에 심한 질병을 호소하며 화장실로 갔다가 사망했다. 이 때문에 독살설이 퍼졌지만, 사인은 뇌일혈 및 심장마비였다. 장면은 회고록에서 신익희의 죽음에 대한 의혹 제기 가능성을 언급했다.[75]

1953년 10월, 신익희가 영국 여왕 엘리자베스 2세 대관식 참석 후 인도 뉴델리에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조소앙과 만나 영세중립화 음모를 꾀했다는 의혹이 민주국민당 소속 함상훈에 의해 제기되었다.[61] 민주국민당은 이를 부인했고,[61] 내무장관 백한성함상훈에게 해명을 요구했으나, 구체적인 증거는 제시되지 않았다.

1954년 3월, 함상훈은 다시 영세중립화 의혹을 제기했으나, 증거를 제출하지 못했다. 대한민국 국회 진상조사 결과 신익희와 조소앙의 만남에 대한 증거가 없어 함상훈은 당에서 제명되었다. 조병옥, 김준연 등은 함상훈을 옹호했지만 출당을 막지는 못했다.

3. 1. 타살 의혹

일각에서는 신익희가 음해 세력에 의해 독살당했다는 주장도 있다.[74] 호남선을 타고 서울로 상경하던 중 홍차를 마신 뒤 종손이자 비서인 신창현에게 뒤지(휴지) 몇 장을 얻어 화장실에 들어갔다가 갑자기 배를 쥐고 쓰러졌다. 이 때문에 시중에는 독살설이 유포되기도 하였으나, 사인은 뇌일혈 및 심장마비로 밝혀졌다.

장면은 자신의 회고록에서 신익희의 죽음을 놓고 의혹을 제기할 수도 있었음을 강조했다.[75] 그는 '민주당에서도 그런 수법으로 해공 선생의 사인을 전략적으로 선동하여 ‘암살의 혐의가 있어 조사 중이다’라고 했더라면, 그때 자유당의 타격은 어떠했을까? 민주당의 성격은 여기서도 단적으로 나타난 것이다.'라고 주장했다.[75]

1956년 대선 운동을 시작하기 직전, 후보 등록 기간이 끝난 후 장면과 함께 서울로 가는 열차에 탑승했다. 그러나 좌석에 앉은 지 몇 분 만에 심한 질병을 호소하며 화장실로 급히 달려갔고, 그 직후 사망했다.

3. 2. 조병옥의 의심

1953년 10월 민주국민당 대표 신익희가 영국 여왕 엘리자베스 2세의 대관식에 참석하고 인도 뉴델리를 순방하던 중,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조소앙을 만나 영세중립화 음모를 꾀했다는 의혹이 제기되었다.[61] 이는 민주국민당 소속 함상훈의 성명서에 의해 공개되었는데, 함상훈민주국민당의 선전부장이었다.[61]

이러한 주장은 민주국민당에 의해 적극적으로 부정되었고[61], 내무장관 백한성함상훈을 불러 해명을 요구했으나, 함상훈은 구체적인 증거를 제시하지 못했다. 그러나 조병옥함상훈의 의견에 동조하며 신익희를 의심하였다.

1954년 3월 함상훈은 다시 영세중립화 의혹을 제기했지만, 증거를 제출하지 못해 사건은 종결되었다. 대한민국 국회 진상조사단의 조사 결과 신익희와 조소앙이 만났다는 구체적인 증거자료가 제시되지 못하자 결국 함상훈은 당에서 제명 조치되었다. 조병옥김준연 등은 함상훈을 두둔했으나 출당을 막지는 못했다. 그러나 조병옥은 신익희를 계속 의심하였다.

1954년 3월 16일 조병옥은 신익희와 최두선을 제외한 민주국민당의 간부들을 소집했다. 그리고 그는 신익희가 조소앙을 만났다고 확신하였다. 조병옥은 서랍에서 한 장의 도표를 꺼내서 설명하며 신익희가 틀림없이 만났다고 주장했다.[76]

조병옥은 신익희를 의심했고, 김준연은 그에게 '잘 알아봐야겠다'며 응수했다.[76] 민주국민당 내에서는 뉴델리 밀회 사건 발표에 대해 함상훈이 누군가의 사주를 받은 것이라고 판단했지만, 조병옥 역시 신익희가 뉴델리에서 조소앙을 만났다고 확신하자 아무도 이 문제에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다.

4. 가족 관계

海公중국어 신익희의 가족 관계는 다음과 같다.[11]

관계이름비고
아버지신단(申檀)판서, 장례원경 역임
어머니동래 정씨 정경랑(鄭敬娘)정태조(鄭太朝)의 딸
이복 형신보희(申輔熙)큰아버지 신식(申植)에게 출계, 요절[79]
이복 형신규희(申揆熙)한학, 천자문, 명심보감 등을 가르침
이복 형신필희(申弼熙)
이복 형신정희(申庭熙)
친형신재희(申宰熙)동아일보 기자, 임시정부 요원[77]
본처이승희(李承姬)1남 1녀
장녀신정완(申貞婉)
사위김재호(金在浩)광복군 소령 역임[81]
외손자김유생(金渝生)봉봉사중창단 멤버, 작사가[7]
아들신하균(申河均)대한민국 국회의원 역임[6]
김해화(金海華)
정인사씨(謝氏)중국 항주 출신, 딸 1명을 두었으나 요절[85][86]


  • 조카 신해균은 화가로, 인공기를 도안했다는 주장이 있다.[92]
  • 넷째 형 신재희의 부인은 경주 이씨로, 이조판서 이유승의 딸이자, 이회영, 이시영 등의 여동생이었다. 이시영은 대한민국 초대 부통령을 지냈다.

5. 평가

신익희는 온건하고 합리적인 자유주의적 정치인으로 평가받는다. 정치인 이철승은 신익희를 "현실주의적인 융통성과 탄력이 있는 자유주의자"라고 평가했다.[87] 그러나 잦은 정치 노선 변경과 변심은 비판의 대상이 되기도 한다. 이철승은 신익희가 환국 직후 윤길중 등 친일 고관들까지 포섭하여 정치 공작대를 조직한 점을 언급하며, 이러한 융통성 때문에 억측과 오해를 받았다고 평가했다.[87] 또한 제2대 민의원의장 재직 시 뉴델리 사건과 같이 야당(민국당)의 운명을 좌우하는 여당(자유당)의 모략에 앞장섰다는 비판도 받았다.[88]

1946년 초, 신익희는 미소공동위원회 참가를 한국독립당 중앙당에 건의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1946년 6월 23일 한국독립당 서울시 지구당 위원장 직을 사퇴하고 탈당했다.

대한독립촉성국민회(독촉국민회)는 1946년 2월 8일 독립촉성중앙협의회와 신탁통치반대국민총동원위원회의 통합으로 이뤄졌지만, 이승만의 사조직으로 자리 잡았다. 여기에 '조직의 달인'으로 불리던 신익희가 김구에서 이승만으로 노선을 변경한 것이 큰 영향을 미쳤다고 알려져 있다. 이후 신익희가 이승만과 결별하고 유림 측에 합작을 청했을 때 "자네는 이승만 앞에서 기생첩 노릇을 했던 사람이 아닌가!"라는 호통을 들은 일이나,[89] 신익희가 자유신문 사장이 되어 김구를 고문으로 내세운 것을 김구가 정면 반박한 일[90] 모두 이러한 '변절' 때문이었다고 전해진다.[91]

1947년 7월 이후 신익희는 임시정부와 노선을 달리하며 임시정부를 이탈, 이승만을 총재로 하는 독립촉성국민회로 합류했다. 독립촉성국민회 부총재(부위원장)로 활동하면서, 귀국 초기에는 한국민주당(한민당)과의 타협을 거부했으나 പിന്നീട് 한국민주당과 연대한 점은 부정적으로 평가받는다.

장준하는 신익희가 광복군 훈련장에 찾아와 젊은이들을 경위대로 영입해가는 것을 조롱하며, "명분을 위해 내무부 밑에 경위대를 둔다고 하였을 것이 당연한 일이었다. 임정 조직을 한 모든 정당이 다 그렇듯이 그들에겐 당세 확장이 곧 그 발언권 강화와 직결되는 입장이었다."라고 회고했다. 장준하와 20명의 일행은 임정을 찾아가 권력의 하수인이 되어가는 젊은이들을 보고 '경위대를 해체하라', '차라리 젊은이는 전선에 나가 죽게 하라'며 신익희를 규탄하며 몽둥이를 들고 찾아가기도 했다.[32]

6. 기타

한국 전쟁 당시 거짓 방송을 하고 서울에서 탈출한 이승만과 함께 도강파로 비판받았다.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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