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르멘 폴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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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카르멘 폴로(1900–1988)는 프란시스코 프랑코의 아내이자 스페인 내전 및 프랑코 정권 시기 영부인이다. 그녀는 오비에도의 부유한 집안에서 태어나 1923년 프랑코와 결혼하여 모로코와 스페인에서 생활했다. 스페인 내전 중 프랑스와 포르투갈로 피신했다가 남편과 재회했으며, 프랑코가 국가 원수가 되면서 영부인으로서 공식 활동을 시작했다. 프랑코 사후 메이라스 영주로 서임되었으나, 이후 은퇴하여 1988년 마드리드에서 사망했다. 그녀의 사치스러운 생활 방식과 권위적인 태도는 비판의 대상이 되기도 했으며, 프랑코 정권의 유산과 함께 그녀에 대한 평가는 현재까지도 논쟁의 대상이 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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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르멘 폴로 - [인물]에 관한 문서 | |
---|---|
기본 정보 | |
본명 | 마리아 델 카르멘 폴로 이 마르티네스-발데스 (María del Carmen Polo y Martínez-Valdés) |
작위 | 초대 메이라스 여후작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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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일 | 1900년 6월 11일 |
출생지 | 스페인 아스투리아스 오비에도 |
사망일 | 1988년 2월 6일 |
사망지 | 스페인 마드리드 |
배우자 | 프란시스코 프랑코 (1923년 결혼, 1975년 사별) |
자녀 | 카르멘 프랑코, 초대 프랑코 여공작 |
묘지 | 밍고루비오 묘지 |
경력 | |
직함 | 메이라스 여후작 (1975년 11월 26일 – 1988년 2월 6일) |
가족 | |
부모 | 아버지: 펠리페 폴로 어머니: 라모나 마르티네스-발데스 |
2. 가족
카르멘 폴로는 오비에도의 부유한 변호사였던 아버지 펠리페 폴로 이 플로레스 데 베레테라(1860–1926)와 어머니 라모나 마르티네스-발데스 이 마르티네스-발데스(1870 – 1914년 2월 8일) 사이에서 태어났다.[8] 폴로 가문은 자산가이자 지역 유력자였으며, 보수적이고 독실한 가톨릭 신자 집안이었다.
카르멘 폴로는 1917년, 당시 모로코에서 오비에도로 전근 온 프란시스코 프랑코 소령을 처음 만났다. 카르멘의 가족은 프랑코가 군인이라는 이유로, 전사할 경우 카르멘이 미망인이 될 수 있다는 점을 들어 결혼을 반대했다. 하지만 두 사람은 계속 만남을 이어갔다. 1923년, 프랑코가 중령으로 승진하고 스페인 외인 부대 사령관으로 임명되면서 카르멘의 아버지도 더 이상 반대할 수 없게 되어 결혼이 성사되었다.
1936년 스페인 내전이 발발하자, 카르멘 폴로와 그녀의 딸은 프랑스 르아브르로 피신했다. 그들은 딸 ''네누카''가 납치될 것을 우려하여 가명을 사용했다.[1] 이후 프랑코의 사촌이자 측근인 살가도-아라우호가 그들을 찾아 스페인으로 돌아왔다.[1]
3. 프란시스코 프랑코와의 만남과 결혼
1923년 10월 22일, 오비에도의 산 후안 엘 레알 교회에서 결혼식이 거행되었다. 알폰소 13세 국왕이 신랑 들러리를 섰는데, 실제로는 아스투리아스 군사 지사 안토니오 로사다 장군이 대리했다. 신부 들러리는 카르멘의 이모인 이사벨 폴로였다. 증인은 베가 데 안조 후작과 프랑코의 형제들인 니콜라스와 라몬이었다.
4. 스페인 내전과 영부인 시절
1936년 9월, 프란시스코 프랑코가 대원수(generalísimo)이자 국가 원수로 선출되면서 카르멘 폴로는 스페인의 영부인이 되었다.[1] 그녀는 '라 세뇨라'로 불렸으며, 공식 석상에 자주 등장했다. 진주 목걸이를 즐겨 착용하여 '진주 목걸이 부인(La Collares)'이라는 별명을 얻었다.[1]
프랑코 부부는 엘 파르도 왕궁을 중심으로 생활하며, 스페인 정치에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했다는 평가를 받는다.[1] 엘 파르도 궁전은 스페인 정치 생활의 중심지였으며, 프랑코 가문의 개인적인 행사도 이곳에서 열렸다.[1]
4. 1. 영부인으로서의 활동과 논란
카르멘 폴로는 스페인의 영부인으로, "라 세뇨라"로 불리며 화려한 모습으로 프랑코 정권의 이미지를 구축하는 데 일조했다. 특히 대량의 모자, 드레스, 진주 목걸이를 수집했는데, 그중에서도 진주 목걸이는 그녀의 트레이드마크가 되어 ''라 콜라레스''(목걸이 여사)라는 별칭으로 불리기도 했다.
폴로는 공식 석상에 거의 항상 남편과 동행했다. 1940년 3월부터 엘 파르도 왕궁에 거주했으며, 여름에는 메이라스 파소 저택에서 시간을 보냈다. 요트 '아소르'를 이용해 낚시를 즐기기도 했다. 메이라스 파소는 원래 에밀리아 파르도 바잔의 소유였으나, '국민적 기부'를 통해 프랑코 부부에게 넘어갔다고 알려져 있다.
1950년에는 안토니오 마리아 클라레트의 시성식에 참석하기 위해 로마를 방문, 교황 비오 12세를 알현했다. 엘 파르도 궁전은 프랑코 치하 스페인 정치의 중심지이자 프랑코 가문의 사적인 행사 장소였다. 폴로는 딸 카르멘과 크리스토발 마르티네스-보르디우의 결혼을 통해 귀족 가문과의 연결을 강화하며 만족감을 드러냈다.
그녀는 스페인 통치에 있어 남편에게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1947년 국가원수 계승법 제정으로 군주제가 부활했으나, 프랑코 사후 부르봉 왕가 출신이 국왕이 되도록 규정되었다. 폴로는 스스로를 왕비처럼 여기며 행동했고, 공식 행사에서 "왕비의 행진곡"이 연주되기도 했다. 그녀는 국내외에서 자신의 지위를 과시하며 주변 사람들에게 존경과 공손한 태도를 요구했다.
또한, 마드리드와 스위스 등지에서 부동산 거래를 통해 상당한 재산을 축적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5. 프랑코 사후
1975년 11월 20일 남편 프랑코가 사망하고 6일 후, 국왕 후안 카를로스 1세는 카르멘 폴로에게 메이라스 여영주 작위와 스페인 귀족 작위를 수여했다. 이 작위와 존칭은 그녀의 손자 프란시스코 프랑코에게 상속되었다.[5]
이후 폴로는 가족의 몰락을 지켜봐야 했다. 1978년, 그녀의 딸은 아버지 소유였던 상당의 금, 보석, 메달을 밀수하려다 마드리드 바라하스 국제공항에서 체포되기도 했다.[5] 1984년에는 증손자 프란시스코가 11세의 나이로 교통사고로 사망하는 비극을 겪었다.
말년에 폴로는 집에서 거의 나오지 않고, 집에서 미사를 드리며 외부와 단절된 생활을 했다. 그녀는 언론을 무시하고 정치나 남편에 대한 기사를 읽는 것을 거부하며 "내 삶의 혼란을 고려할 때 많은 기독교적 인내가 필요하다"라고 말했다.
1988년 2월 6일, 폴로는 마드리드에서 87세의 나이로 사망하여 엘 파르도의 밍고루비오 묘지에 묻혔다.[6] 그녀의 남편은 이전에 바예 데 로스 카이도스에 안치되었지만, 2019년 10월 24일에 발굴되어 폴로 옆에 재안치되었다.[7]
5. 1. 유산과 평가
1975년 11월 20일 남편 프랑코가 사망한 후, 후안 카를로스 1세가 스페인 국왕으로 즉위했다. 프랑코의 유언에 따라 카르멘은 메이라스 여영주로, 딸은 프랑코 여공작으로 서임되었다. 왕정 복고 후에도 프랑코 지지자들에게 우상시되었지만, 이후 카르멘은 은퇴 생활에 들어가 공식적인 자리에 거의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1988년 2월 6일 마드리드에서 87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엘 파르도에 있는 밍고르비오 묘지에 묻혔다.[9] 전몰자의 계곡에 매장되어 있던 프랑코도 2019년 10월 24일에 이 묘지로 이장되어 카르멘과 함께 재매장되었다.[10] 메이라스 영주위는 손자인 프란시스코 프랑코가 계승했다.
참조
[1]
뉴스
Carmen Polo de Franco of Spain Dies
https://www.washingt[...]
1988-02-07
[2]
뉴스
El pueblo 'roba' las llaves de Meirás y del palacio de Cornide a Franco
https://elpais.com/c[...]
2018-10-28
[3]
웹사이트
María del Carmen Polo y Martinez-Valdez, 1. señora de Meirás
http://www.geneall.n[...]
[4]
웹사이트
Carmen Polo: La Esposa de Francisco Franco – la Guerra Civil Española
https://sites.jmu.ed[...]
2017-12-30
[5]
뉴스
La cosecha del dictador
http://www.elpais.co[...]
El País
2007-09-09
[6]
뉴스
Estos serán los 18 compañeros de tumba de Franco en el cementerio de El Pardo
https://www.elespano[...]
2018-09-15
[7]
웹사이트
Franco's remains to finally leave Spain's Valley of the Fallen
https://www.theguard[...]
2019-10-23
[8]
웹사이트
María del Carmen Polo y Martinez-Valdez, 1. señora de Meirás
http://www.geneall.n[...]
[9]
뉴스
Estos serán los 18 compañeros de tumba de Franco en el cementerio de El Pardo
https://www.elespano[...]
2018-09-15
[10]
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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