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미스 카다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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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카미스 카다피는 무아마르 카다피의 아들로, 1986년 미국의 리비아 폭격으로 부상을 입었다. 그는 군사 교육을 받았으며, 제32 강화 여단(카미스 여단)을 이끌었다. 2010년에는 스페인에서 석사 학위를 시작했으나, 2011년 리비아 내전과 관련된 이유로 퇴학당했다. 그는 AECOM에서 인턴으로 일하며 미국을 방문했으나, 내전 발발 후 리비아로 돌아갔다. 2011년 리비아 내전에서 카미스 여단을 이끌고 자위야 공격을 지휘했으며, 트리폴리 시위 진압과 미스라타 전투에도 참여했다.

카미스 카다피 - [인물]에 관한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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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생애 및 경력

카미스 카다피는 정치에 관심이 없다고 알려졌으나, 2000년대에 그의 형 무타심 카다피가 권력 찬탈 음모 혐의로 2001년 이집트로 추방되면서 두각을 나타냈다. 무아마르 카다피는 무타심의 제77 전차 대대를 해체하고 그 자리에 제32 강화 여단(일명 카미스 여단)을 창설했다. 카미스는 대체로 유능하고 아버지에게 충성스러웠으며 형제들과 좋은 관계를 유지했다는 평가를 받았다. 그는 특히 개혁적인 형 사프 알-이슬람 카다피와 가까웠고 아랍의 봄 초기에 그와 상당한 시간을 보냈다.

2.1. 초기 생애 및 교육

카미스 카다피는 세 살 때인 1986년 4월 15일 미국의 리비아 폭격으로 부상을 입었다. 바브 알-아지지야 군사 기지가 1986년 베를린 디스코 클럽 폭탄 테러에 대한 보복으로 공격받아 머리에 부상을 입었다.

그는 트리폴리의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하고 군사학 학사 학위를 받았으며, 프룬제 군사 아카데미와 러시아 연방군 참모본부 군사 아카데미를 졸업했다. 2008년에는 알제리를 방문하여 압델라지즈 부테플리카 대통령의 영접을 받았다.

2010년 4월, IE 비즈니스 스쿨(구 인스티튜토 데 엠프레사)에서 마드리드에서 석사 학위 과정을 시작했으나, 2011년 3월 "리비아 국민에 대한 공격과의 연관성"을 이유로 퇴학당했다.

2011년 초, 카다피는 AECOM 기술 공사에서 인턴으로 근무했다. AECOM의 글로벌 커뮤니케이션 담당 수석 부사장인 폴 제나로에 따르면, 카다피는 인턴십의 일환으로 2011년 2월에 군사 기지와 랜드마크를 방문하는 등 미국을 순방했다. 이 여행은 2011년 리비아 내전이 시작된 후 2월 17일에 중단되었고, 카다피는 리비아로 돌아갔다. 미국 정부 관계자는 나중에 이 여행을 계획하거나, 조언하거나, 비용을 지불하는 데 어떤 역할도 하지 않았다고 부인했다.

2.2. 군 경력

그는 리비아 내전에서 아버지를 돕기 위해 급히 리비아로 돌아온 후, 자위야 공격을 지휘했다. 그는 무아마르 카다피에게 충성하는 리비아 무장 군대의 특수 부대 여단인 카미스 여단을 이끌었다. 이 전투 결과 친 카다피 군대가 도시를 탈환했다.

그는 또한 2월 말에서 3월 초에 수도 트리폴리 안팎에서 발생한 반정부 시위를 진압하는 데 도움을 주었다. 그의 군대는 미스라타 전투에도 참여했다. 2011년 6월, 그는 그의 여단에서 체포된 병사에 의해 즐리텐에서 친 카다피 군대를 지휘하고 있는 것으로 보고되었으며, 그 병사는 카미스가 그의 군대에게 "미스라타를 점령하거나 내가 직접 너희를 죽이겠다. 미스라타를 점령하지 못하면 우리는 끝이다."라고 말했다고 보고했다.

2.3. 사망 관련 의혹

2011년 3월 20일, 반(反) 카다피 성향의 알 마나라 미디어는 카미스가 일주일 전 조종사의 바브 알 아지지야 비행기 추락으로 인한 부상으로 사망했다고 보도했다. 그러나 이는 독립적인 뉴스 소스에서 확인되지 않았으며, 비행기 추락 자체도 알 마나라와 밀접한 관계가 있는 알제리 신문 '슈루크' 외에는 보도되지 않아 야당의 선전 활동이었을 가능성이 제기되었다.

친(親) 카다피 리비아 정부는 3월 21일에 카미스의 사망을 부인했다. 힐러리 클린턴 미국 국무장관은 여러 출처로부터 카다피 아들 중 한 명이 비동맹 공습으로 사망했다는 보도를 들었지만, 이를 확인할 "증거가 충분하지 않다"고 말했다. 3월 25일, 알 아라비야 텔레비전은 한 소식통이 카미스의 사망을 확인했다고 보도했지만, 알 자지라 등 다른 언론들은 이를 루머라고 일축했다.

2011년 3월 29일, 리비아 정부는 카미스가 트리폴리에서 지지자들에게 인사하는 장면을 공개하며 주장을 반박하려 했지만, 이전에 가짜 실시간 이미지를 사용한 적이 있어 확인되지 않았다. 6월 9일, 미스라타에서 붙잡힌 친 카다피 군인은 카미스가 즐리텐에서 살아있다고 말했다.

2011년 8월 5일, 혁명 연합군 대변인은 나토의 즈리튼 카다피 작전실 공습으로 카다피군 32명이 사망했으며, 그 중 한 명이 카미스라고 밝혔다. 그러나 리비아 정부 대변인 무사 이브라힘은 이를 부인하며, 로이터 통신에 "즈리튼에서 저지른 범죄를 은폐하려는 더러운 속임수"라고 말했다. 나토 또한 카미스의 사망 보고를 확인할 수 없었다. 8월 9일, 카미스로 보이는 남자가 리비아 국영 텔레비전에 출연하기도 했다.

2011년 8월 22일, 알 자지라는 트리폴리 전투에서 카미스와 압둘라 알-세누시의 시신이 발견되었을 수 있다고 보도했다. 그러나 반군 사령관은 카미스가 바브 알-아지지야에 있다고 믿는다고 말했다. 알-세누시는 2012년 3월 17일 모리타니에서 생존 상태로 체포되어 9월 5일 리비아로 송환되었다.

2011년 8월 29일, 반 카다피 세력은 나토의 아파치 헬리콥터가 카미스 카다피의 토요타 랜드 크루저를 파괴했다고 주장했다. 카미스 카다피의 경호원이라고 주장하는 한 남자는 그가 사망했다고 말했지만, 즉각적인 시각적 확인은 없었다. 며칠 후, 가디언은 타르후나에 억류된 전 경호원과의 인터뷰를 통해 카미스가 실제로 이 공격으로 사망했음을 확인했다.

과도 국가 위원회는 9월 4일, 카미스가 사망했고 바니 왈리드 근처에 묻혔다고 주장했다. 10월 15일, 시리아의 친 카다피 TV 방송국 Arrai TV는 8월 29일에 그가 사망했다는 추모 메시지를 게시했다.

2012년 4월, 뉴욕 타임스는 카미스 카다피의 지휘 아래 도시를 탈출한 후 총격전에서 사망했다는 기사를 냈다. 2012년 10월 17일, 휴먼 라이츠 워치는 카미스 카다피가 8월 29일 트리폴리를 탈출하던 중 나토의 공습으로 사망했다고 밝혔다.

2011년 8월 29일, 국제형사재판소는 카미스를 반인도적 범죄 혐의로 기소할 계획이었다고 보도되었다. 같은 날 늦게, 카미스는 NATO의 공습으로 사망한 것으로 알려졌다.

사이프 알-이슬람 카다피가 체포된 후, 카다피는 심문관들에게 카미스 카다피가 여전히 살아있다고 말했다는 보고서가 나왔다. 2012년 2월 25일, 스트랫포는 킨탄의 전사들이 카미스 카다피를 체포했다고 보도했으나, NTC에 의해 부인되었다.

바니 왈리드에서 카다피 지지자들에 대한 군사 작전 와중에, 리비아 부총리는 2012년 10월 20일 카미스 카다피가 전투 중에 사망했다고 주장했다. 리비아 국민 회의 대변인은 카다피가 "전투 중에" 사망했다고 주장했지만, 그의 시신은 발견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정부 대변인은 AFP 통신에 무사 이브라힘의 체포에 대한 공식적인 확인이 없다고 부인했으며, 카미스 카다피의 사망 소문에 대해서도 언급하지 않았다. AP 통신은 카다피의 사망 보고서를 확인되지 않은 소문이라고 묘사했다. 무아마르 카다피의 전 대변인 무사 이브라힘은 카미스의 사망에 대한 보고서를 부인했다. 10월 24일, 정부 대변인은 카다피의 살해와 이브라힘의 체포에 관한 허위 보고에 대해 사과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