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아마르 알 카다피
"오늘의AI위키"의 AI를 통해 더욱 풍부하고 폭넓은 지식 경험을 누리세요.
1. 개요
무아마르 알 카다피는 1969년 리비아 육군 중위로 군사 쿠데타를 일으켜 왕정을 폐지하고 국가원수, 총리 등을 역임하며 42년간 리비아를 통치했다. 그는 이슬람주의, 범아랍주의, 사회주의를 융합한 자마히리야 체제를 선포하고 '인민 직접민주주의'를 표방했으나, 독재 정치를 펼쳤다. 반미주의를 주창하며 미국과 대립했고, 테러 지원 의혹으로 비난받았다. 2011년 아랍의 봄 시위로 시작된 리비아 내전에서 축출되었고, 고향 시르테에서 사망했다. 그의 통치는 사회 개혁과 경제 발전을 이뤘다는 긍정적 평가와 함께, 인권 탄압, 테러 지원, 장기 집권 등 부정적 평가를 받는다.
더 읽어볼만한 페이지
- 리비아의 장군 - 압둘 파타 유니스
압둘 파타 유니스는 1969년 리비아 혁명의 핵심 인물이자 카다피 정권의 주요 인사였으나, 2011년 리비아 내전에서 반군 총사령관으로 활동하다 벵가지에서 암살당해 그의 죽음을 둘러싼 논란이 일었다.
무아마르 알 카다피 - [인물]에 관한 문서 | |
---|---|
기본 정보 | |
공식 명칭 | 무아마르 무함마드 아부 미냐르 알카다피 |
로마자 표기 | Mu'ammar Muhammad Abu Minyar al-Qaddafi |
아랍어 표기 | معمر محمد أبو منيار القذافي |
출생 정보 | 약 1942년 이탈리아령 리비아, 카스르 아부 하디 |
사망 정보 | 2011년 10월 20일 리비아, 시르테 |
사망 원인 | 반군에 의해 살해됨 |
묻힌 곳 | 리비아 사막 내 미확인 장소 |
배우자 | 파티아 누리 (1969년–1970년, 이혼) 사피아 파르카시 (1970년 이후) |
자녀 | 아들 (8명): 무함마드 카다피 사이프 알이슬람 카다피 알사디 카다피 무타심 카다피 (사망) 한니발 카다피 사이프 알아랍 카다피 (사망) 카미스 카다피 (사망, 논란 있음) 밀라드 (양자) 딸 (2명): 아이샤 카다피 하나 카다피 (양녀) |
거주지 | 바브 알아지지야 |
최종 계급 | 대령 |
복무 기간 | 1961년–2011년 |
출신 학교 | 리비아 대학교 벵가지 군사 대학교 |
지지 세력 | 리비아 왕국 (1961–1969) 리비아 아랍 공화국 (1969–1977) 리비아 아랍 사회주의 인민 자마히리야 (1977–2011) |
군대 | 리비아군 |
참전 | 욤키푸르 전쟁 리비아-이집트 전쟁 차드-리비아 분쟁 도요타 전쟁 우간다-탄자니아 전쟁 제1차 라이베리아 내전 리비아 내전 (2011년) 2011년 리비아 군사 개입 |
![]() | |
정치 경력 | |
직함 | 형제 지도자이자 혁명 가이드 |
임기 시작 | 1979년 3월 2일 |
임기 종료 | 2011년 10월 20일 |
전임자 | 본인 (혁명 지도 평의회 의장) |
후임자 | 무스타파 압둘 자릴 (국가 과도 위원회 의장) |
총리 | 압둘 아티 알오베이디 자달라 아주즈 알탈히 무함마드 아즈 자루크 라자브 자달라 아주즈 알탈히 아부제드 오마르 도르다 압둘 마지드 알쿠드 무함마드 아흐마드 알망구시 임바레크 샤메크 슈크리 가넴 바그다디 마흐무디 |
직함 2 | 전국 인민 회의 사무총장 |
임기 시작 2 | 1977년 3월 2일 |
임기 종료 2 | 1979년 3월 2일 |
전임자 2 | 직책 신설 |
후임자 2 | 압둘 아티 알오베이디 |
직함 3 | 혁명 지도 평의회 의장 |
임기 시작 3 | 1969년 9월 1일 |
임기 종료 3 | 1977년 3월 2일 |
전임자 3 | 이드리스 1세 (리비아 왕) |
총리 3 | 마흐무드 술레이만 마그리비 압데살람 잘루드 |
후임자 3 | 본인 (형제 지도자이자 혁명 가이드) |
직함 4 | 리비아 정부 수반 |
직함 4 상태 | 혁명 지도 평의회 의장 |
임기 시작 4 | 1970년 1월 16일 |
임기 종료 4 | 1972년 7월 16일 |
전임자 4 | 마흐무드 술레이만 마그리비 |
후임자 4 | 압데살람 잘루드 |
직함 5 | 아프리카 연합 의장 |
임기 시작 5 | 2009년 2월 2일 |
임기 종료 5 | 2010년 1월 31일 |
전임자 5 | 자카야 키크웨테 |
후임자 5 | 빙구 와 무타리카 |
소속 정당 | 리비아 아랍 사회주의 연맹 (1971년–1977년) 무소속 (1977년–2011년) |
기타 정보 | |
관련 정보 | 무아마르 카다피의 개인 생활 아랍 민족주의 나세르주의 제3 세계 이론 녹색서 지옥으로의 탈출 무아마르 카다피 살해 사건 무아마르 카다피 사망에 대한 국제적 반응 무아마르 카다피의 평가와 유산 카다피 충성파 리비아의 역사 (무아마르 카다피 통치) 리비아의 정치 (무아마르 카다피 통치) 리비아 혁명 지도 평의회 리비아 총인민위원회 리비아 아랍 공화국 아랍 공화국 연방 리비아 아랍 사회주의 인민 자마히리야 1970년 리비아 이탈리아인 추방 1973년 오일 쇼크 리비아 문화 혁명 리비아의 대량 살상 무기 서베를린 디스코테크 폭탄 테러 팬암 103편 폭파 사건 UTA 772편 폭파 사건 무아마르 카다피 하의 리비아의 대외 관계#반군 및 준군사 조직 지원 |
군사 활동 | 1969년 리비아 쿠데타 욤키푸르 전쟁 레바논 내전 리비아-이집트 전쟁 차드-리비아 분쟁 1986년 시드라만 해상 전투 1986년 미국 리비아 폭격 도요타 전쟁 2011년 리비아 내전 2011년 리비아 군사 개입 |
선거 및 국민투표 | 1971년 리비아 아랍 공화국 연방 국민투표 |
2. 이력
1969년, 리비아 육군 중위로 복무하던 중 군사 쿠데타를 일으켜 왕정을 무너뜨리고 리비아의 국가원수이자 국가평의회 의장, 총리, 국방장관 자리에 올랐다. 1977년에는 이슬람주의, 범아랍주의, 사회주의를 결합한 독특한 정치 체제인 '''자마히리야'''(인민권력)를 선포했다. 그는 '인민 직접민주주의'를 명분으로 내세우며 의회와 헌법을 폐지하고, 이를 통해 자신의 절대적인 독재 권력을 더욱 강화했다.[239]
1969년, 리비아 육군 중위 시절 군사 쿠데타로 왕정을 무너뜨리고 집권했다. 이후 국가원수 등 요직을 겸하며 권력을 장악하고, 1977년에는 이슬람주의, 범아랍주의, 사회주의를 융합한 독자적인 '''자마히리야'''(인민권력) 체제를 선포하며 장기 독재의 기반을 마련했다.[239] 공식 직함 없이 '혁명의 지도자이자 수호자'로 불리며 민족주의와 반미주의에 기반한 통치를 이어갔고, 이로 인해 로널드 레이건 미국 대통령으로부터 '''중동의 미친 개'''[240]라는 비난을 받기도 했다. 2009년에는 아프리카 연합 의장을 지내는 등 아프리카 내 영향력을 행사했으며, 리비아 역사상 최장기 집권자였다. 그러나 2011년 아랍 민주화 시위가 리비아로 확산되면서 내전이 발발했고, 같은 해 10월 20일 고향 시르테에서 반군에게 사살되며 42년간의 통치를 마감했다.
1972년 총리직에서는 물러났지만, 이후에도 스스로를 '리비아 아랍 자마히리야의 위대한 9월 사회주의 인민 혁명의 수호자' 또는 '혁명의 지도자이자 수호자'라고 칭하며 민족주의와 반미주의를 내세운 독재 정치를 이어갔다. 이러한 그의 행보 때문에 로널드 레이건 전 미국 대통령은 그를 '''중동의 미친 개'''[240]라고 비난하기도 했다.
2009년 2월부터 2010년 1월까지는 아프리카 연합 의장을 맡기도 했다. 그는 1551년 오스만 제국이 리비아 지역(당시 트리폴리)을 통치하기 시작한 이래 가장 오랫동안 리비아를 통치한 지도자였다.
하지만 2011년 초 시작된 아랍 지역의 민주화 시위 물결은 리비아에도 영향을 미쳤다. 2011년 2월, 카다피 정권에 반대하는 대규모 반정부 시위가 일어났다. 같은 해 8월 22일, 반정부 세력인 자유 리비아군이 수도 트리폴리에 진입하여 그의 아들 두 명을 생포했다. 결국 카다피는 2011년 10월 20일, 자신의 고향인 시르테에서 반군의 공격을 받아 사살되었다.
3. 생애
3. 1. 생애 초기
리비아 시르테 주 시르테 근처 사막 지대에서 1942년 유목민인 베두인족의 한 갈래인 카다파 부족 가문에서 태어났다. 전통적인 베두인식 이슬람 종교 교육을 받으며 성장했다. 가난한 환경 속에서 여러 형제 및 친척들과 함께 자랐으나, 학업과 성공에 대한 강한 의지를 보였다고 전해진다.
카다피의 초기 교육은 지역 이슬람 교사에게 받은 종교 교육이었다.[1][2] 이후 근처 시르테로 이주하여 초등학교에 다녔고, 4년 만에 6학년 과정을 마쳤다.[3][4][5][6] 당시 리비아의 교육은 무상이 아니었으나, 그의 아버지는 경제적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아들의 교육을 중요하게 생각하여 큰 희생을 치렀다.[7][8][9][10][11] 카다피는 주중에는 모스크에서 잠을 자고, 주말이나 휴일에는 부모님을 만나기 위해 약 32.19km를 걸어가곤 했다. 가난한 베두인 출신이었기에 도시 출신 급우들에게 괴롭힘과 차별을 당하기도 했지만, 많은 이집트 출신 교사들과 교류하며 이집트의 급변하는 정세에 대해 알게 되었다.[12][13][14][15] 이후 그의 가족은 리비아 남중부 페잔의 시장 마을인 사브하로 이주했고, 아버지가 부족 지도자의 관리인으로 일하는 동안 카다피는 중학교에 진학했다. 이는 그의 부모 세대는 누리지 못했던 기회였다.[16][17][18][19] 카다피는 학교에서 인기가 많았으며, 이때 사귄 친구 중 일부는 훗날 그의 정권에서 중요한 역할을 맡게 되는데, 특히 가장 가까운 친구는 압둘 살람 잘루드였다.[20][21][22]
1952년, 10살 때 라디오 방송을 통해 이집트의 가말 압델 나세르 등이 이집트 왕정을 무너뜨리고 공화정을 선포한 1952년 이집트 혁명 소식을 접하고 깊은 영향을 받았다. 이때부터 나세르의 아랍 사회주의와 민족주의 이념을 따르기 시작했으며, 아랍 세계를 통일하여 서구 기독교 세계에 맞서려는 의지를 갖게 되었다고 한다. 1956년 수에즈 위기(제2차 중동 전쟁) 때는 반이스라엘 시위에 참여하기도 했다.
사브하에서는 많은 교사가 이집트인이었으며, 카다피는 이곳에서 처음으로 카이로에 본부를 둔 '아랍의 목소리' 방송을 포함한 범아랍주의 신문과 라디오 방송을 접할 수 있었다.[23][24][25][26] 성장 과정에서 카다피는 1948년 아랍-이스라엘 전쟁, 1952년 이집트 혁명, 1956년 수에즈 위기, 그리고 1958년부터 1961년까지 존속했던 아랍 연합 공화국(UAR)의 짧은 역사 등 아랍 세계를 뒤흔든 중요한 사건들을 목격했다.[27] 그는 자신의 영웅인 나세르 대통령 치하의 이집트에서 일어난 정치적 변화를 존경했다. 나세르는 아랍 민족주의, 서구 식민주의와 신식민주의 및 시오니즘의 거부, 그리고 자본주의에서 사회주의로의 전환을 주장했다.[28][29][30][31] 카다피는 쿠데타 방법을 설명한 나세르의 저서 ''혁명의 철학''에도 큰 영향을 받았다.[32][33] 그의 이집트인 교사 중 한 명인 마흐무드 에파이는 카다피의 정치 사상에 공감하며 성공적인 혁명을 위해서는 군대의 지지가 필수적이라고 조언한 것으로 알려졌다.[34]
카다피는 리비아 군주제를 비판하는 시위를 조직하고 관련 포스터를 배포하는 등 정치 활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다.[35][36][37] 1961년 10월에는 시리아의 아랍 연합 공화국 탈퇴에 항의하는 시위를 주도하고 나세르에게 지지 전보를 보내기 위한 모금 활동을 벌였다. 이 소요로 인해 학생 20명이 체포되었으며, 카다피와 동료들은 술을 판매한다고 비난받던 지역 호텔의 창문을 부수기도 했다. 이러한 활동으로 인해 당국은 카다피와 그의 가족을 사브하에서 추방했다.[38][39][40][41][42]
이후 미스라타로 이주하여 미스라타 중학교에 다녔다.[43][44][45][46][47] 그는 아랍 민족주의 활동에 대한 관심을 이어갔지만, 도시에서 활동하던 아랍 민족주의 운동, 아랍 사회주의 바스당, 무슬림 형제단 등 기성 정당 가입은 거부하며 파벌주의를 비판했다.[48] 이 시기 그는 나세르와 1789년 프랑스 혁명에 관한 책, 시리아 정치 이론가 미셸 아플락의 저작, 그리고 에이브러햄 링컨, 쑨원, 무스타파 케말 아타튀르크 등의 전기를 탐독했다.[49]
카다피는 벵가지에 있는 리비아 대학교 분교에서 역사를 잠시 공부했으나, 군에 입대하기 위해 중퇴했다.[50][51] 과거 시위 전력에도 불구하고, 1963년 미스라타 출신 동지 여러 명과 함께 벵가지의 왕립 육군 사관학교에 입교했다. 당시 리비아에서 군대는 가난한 청년들에게 사회적 신분 상승의 거의 유일한 기회였으며, 카다피는 군대를 정치적 변화를 위한 잠재적 도구로 인식했다.[52][53][54] 당시 리비아군은 영국군의 지도를 받고 있었는데, 제국주의자로 간주한 영국에 대한 반감 때문에 카다피는 이를 불쾌하게 여겼다. 그는 영어 학습을 거부하고 영국 장교들에게 무례하게 행동했으며, 결국 시험에 낙방하기도 했다.[55] 영국 교관들은 그의 불복종과 폭언을 보고했으며, 1963년 사관학교 사령관 암살 사건 연루 의혹을 제기하기도 했으나, 이러한 보고는 묵살되었고 카다피는 훈련 과정을 빠르게 이수했다.[56][57]
1964년, 카다피는 충성스러운 동료들과 함께 나세르의 이집트 자유장교단을 본떠 만든 혁명 조직인 '자유장교단 중앙위원회'를 결성했다. 카다피의 주도 하에 이들은 비밀리에 회합하며 비밀 점조직을 구성하고 급여를 모아 공동 기금을 마련했다.[58][59][60] 카다피는 리비아 전역을 돌며 정보를 수집하고 동조 세력을 규합했으나, 정부 정보 당국은 그를 큰 위협으로 여기지 않고 간과했다.[61] 1965년 8월 사관학교를 졸업한 후,[62] 카다피는 육군 통신부대의 통신장교로 임관했다.[63][64]
1966년 4월, 추가 군사 훈련을 위해 영국으로 파견되었다. 9개월간 버킹엄셔주 비컨스필드에서 영어 과정을 이수했고, 도싯주 보빙턴 캠프의 육군 항공대 신호 교관 과정과 켄트주 하이쓰에서 보병 신호 교관 과정을 수료했다.[65][66][67][68] 이후 퍼진 소문과 달리, 영국 왕립 육군사관학교에는 입학하지 않았다.[69] 보빙턴 신호 과정 책임자는 카다피가 영어 학습의 어려움을 극복하고 능숙한 통신 절차를 보여주었다고 보고했으며, 그의 취미가 독서와 축구라고 언급하며 "재미있는 장교, 항상 쾌활하고, 근면하며, 성실하다"고 평가했다.[70] 그러나 카다피는 영국을 싫어했으며, 영국 육군 장교들이 자신에게 인종차별적인 모욕을 했다고 주장했다. 그는 영국 문화에 적응하는 데 어려움을 겪었고, 런던 피카딜리 거리를 전통 리비아 복장을 입고 활보하며 자신의 아랍 정체성을 드러내기도 했다.[71][72][73][74] 그는 훗날 영국에 가기 전에는 리비아보다 영국이 더 발전했다고 생각했지만, 영국을 경험한 후 "우리의 가치관, 이상, 사회적 특성에 대해 더욱 자신감과 자부심을 느끼며" 귀국했다고 술회했다.[75][76][77]
3. 2. 청년기
카다피의 초기 교육은 지역 이슬람 교사로부터 받은 종교 교육이었다.[173][174] 이후 근처 시르테로 이사하여 초등학교에 다녔고, 4년 만에 6학년 과정을 마쳤다.[173][175][176][174] 당시 리비아에서는 교육이 무료가 아니었지만, 그의 아버지는 재정적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아들의 교육이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카다피는 주중에는 모스크에서 잠을 잤고, 주말과 휴일에는 부모님을 방문하기 위해 약 32.19km를 걸어갔다. 교육을 받지 못한 그의 아버지는 아들을 학교에 보내기 위해 큰 희생을 치렀다.[173][175][177][176][174] 가난한 베두인으로서 그는 도시 출신의 반 친구들로부터 차별을 겪기도 했으나, 많은 이집트 교사들과 교류하며 이집트에서 일어나는 사건들에 대해 알게 되었다.[173][175][176][174]
시르테 이후 그의 가족은 리비아 남중부 페잔의 시장 마을인 사브하로 이사했고, 그의 아버지가 부족 지도자의 관리인으로 일하는 동안 무아마르는 중학교에 다녔다.[175][177][176][174] 카다피는 학교에서 인기가 있었고, 이때 사귄 친구들 중 일부는 나중에 그의 행정부에서 중요한 역할을 맡았는데, 가장 가까운 친구는 압둘 살람 잘루드였다.[178][175][176]
사브하의 많은 교사들은 이집트인이었고, 카다피는 이곳에서 처음으로 카이로에 본부를 둔 '아랍의 목소리' 방송을 포함한 범아랍주의 신문과 라디오 방송을 접할 수 있었다.[178][175][176][174] 성장하면서 카다피는 아랍 세계를 뒤흔든 중요한 사건들을 목격했는데, 여기에는 1948년 아랍-이스라엘 전쟁, 1952년 이집트 혁명, 1956년 수에즈 위기, 그리고 1958년부터 1961년까지 존속했던 아랍연합공화국(UAR) 등이 포함된다.[174] 카다피는 그의 정치적 영웅인 이집트의 나세르 대통령 하에서 시행된 정치적 변화를 존경했다. 나세르는 아랍 민족주의, 서구 식민주의와 신식민주의, 시온주의에 대한 거부, 그리고 자본주의에서 사회주의로의 전환을 주장했다.[175][179][176][174] 카다피는 쿠데타 방법을 설명한 나세르의 책 『혁명의 철학』(فلسفة الثورة|팔사파트 알타우라ar)의 영향을 받았다.[175][177] 그의 이집트 교사 중 한 명은 카다피의 정치적 견해에 공감하며 성공적인 혁명을 위해서는 군대의 지지가 필요하다고 조언했다고 전해진다.[177]
카다피는 군주제를 비판하는 시위를 조직하고 관련 포스터를 배포했다.[175][176][174] 1961년 10월, 그는 시리아의 UAR 탈퇴에 항의하는 시위를 주도하고 나세르에게 지지 전보를 보내기 위한 자금을 모금했다. 이 소요로 인해 20명의 학생이 체포되었으며, 카다피와 그의 동료들은 술을 제공했다는 이유로 지역 호텔의 창문을 깨뜨리기도 했다. 처벌로 당국은 카다피와 그의 가족을 사브하에서 추방했다.[178][175][177][176][174]
카다피는 미스라타로 이사하여 미스라타 중학교에 다녔다.[178][175][177][176][174] 그는 아랍 민족주의 활동에 대한 관심을 유지하면서도, 도시에서 활동하던 금지된 정당들(아랍 민족주의 운동, 아랍 사회주의 바스당, 무슬림 형제단)에 가입하는 것을 거부하며 파벌주의를 비판했다.[174] 그는 나세르와 1789년 프랑스 혁명에 대한 책, 시리아 정치 이론가 미셸 아플락의 저서, 그리고 에이브러햄 링컨, 쑨원, 무스타파 케말 아타튀르크의 전기 등을 탐독했다.[174]
카다피는 리비아 대학교 벵가지 분교에서 역사를 잠시 공부하다가 군에 입대하기 위해 중퇴했다.[180][181] 전과 기록에도 불구하고, 그는 1963년 미스라타 출신의 여러 동료들과 함께 벵가지의 왕립 육군 사관학교에서 훈련을 시작했다. 당시 군대는 빈곤한 리비아인들에게 사회적 신분 상승의 거의 유일한 기회였고, 카다피는 군대를 정치적 변화를 위한 잠재적 도구로 인식했다.[175][176][181] 사관학교 시절, 그는 영국군이 주도하는 훈련 방식에 반감을 가졌으며[175], 재학 중 동료들과 함께 나세르의 이집트 자유장교단을 본떠 비밀 혁명 조직인 자유장교단 중앙위원회를 결성하고 점조직 형태로 활동을 시작했다.[175][177][176]
3. 2. 1. 군인 생활
1961년 벵가지의 육군사관학교에 입학하여 재학 중 동료 생도들과 함께 왕정 타도를 목표로 하는 자유장교단을 조직하기 시작했다.[173] 1965년 사관학교 졸업 후 영국으로 유학을 떠나 1년간 파견 근무를 했고, 귀국 후 통신부대 장교로 임관했다. 이후 그리스 아테네의 헬레나 군사 학교와 영국에서 추가로 군사 훈련을 받았다.
카다피는 나세르의 아랍 민족주의에 깊은 영향을 받았으며, 군 복무 중에도 혁명 사상을 키워나갔다. 1960년대 후반, 이드리스 국왕의 정부는 석유 자원 분배 문제와 부패, 6일 전쟁 패배 이후 고조된 반서방 감정 등으로 인해 국민적 지지를 잃어가고 있었다.
1969년 9월 1일, 국왕 이드리스 1세가 병 치료차 튀르키예에 머무는 사이, 카다피가 이끄는 자유장교단은 "예루살렘 작전"을 개시하여 무혈 쿠데타를 일으켰다.[34] 이들은 트리폴리와 벵가지의 주요 시설을 장악하고 왕세자 사이드 하산 알리다 알-마흐디 알-산누시를 체포하여 왕위 계승권을 포기시켰다.[15] 쿠데타 성공 후 카다피는 라디오 연설을 통해 리비아 아랍 공화국의 수립을 선포하고 "반동적이고 부패한" 왕정의 종식을 알렸다. 이 쿠데타는 처음에는 "백색 혁명"으로 불렸으나 나중에 "9월 1일 혁명"으로 명명되었다.
카다피가 '대령'(العقيد|알아키드ar, 영어: colonel)으로 불리는 이유에 대해서는 여러 설이 있으며, 공통적으로는 존경했던 이집트의 가말 압델 나세르 대통령이 육군 대령이었던 점을 따른 것으로 본다. 카다피 정권은 공식적인 국가원수 직책을 두지 않았으며, '대령'은 국가원수를 나타내는 칭호가 아니다. 리비아군에는 대령보다 높은 계급(장성)도 존재하며, 카다피의 친구이자 군 사령관이었던 아부 바크르 유니스 자브르(Abu-Bakr Yunis Jabr영어)는 준장(عميد|아미드ar) 계급이었다.[173]
영국 유학 경험에도 불구하고 카다피의 영어 실력은 능숙하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1986년 미국의 리비아 공습 이후, 미국 초등학생들이 보낸 평화 호소 편지에 카다피가 영어로 답장했으나 문법과 철자 오류가 많았다는 일화가 있다. 그러나 2007년 아사히 신문 기사에서는 외국 요인과의 회담에서 영어 실력이 향상된 것 같다는 언급도 있었다.
3. 2. 2. 쿠데타와 집권 과정
1969년 리비아 육군 중위로 복무하던 카다피는 군사 쿠데타를 계획하고 실행했다. 9월 1일, 카다피와 동료 장교들은 수도 트리폴리를 공격하며 기습적으로 쿠데타를 감행했다. 당시 신병 치료를 위해 터키에 체류 중이던 국왕 이드리스 1세는 그대로 퇴위당해 망명했고, 국가의 주요 기관들은 큰 유혈 사태 없이 장악되었다.
'무혈 쿠데타'로 정권을 잡은 카다피는 쿠데타 직후 군 총사령관에 올랐고, 자신의 정치적 영웅이었던 이집트의 나세르를 따라 스스로 대령으로 승격했다. 12명으로 구성된 자유장교단 중앙위원회는 스스로를 새로운 공화국의 정부인 혁명지도평의회(RCC)로 선포했다. 카다피는 RCC 의장이 되어 사실상 국가원수가 되었다. 압둘 살람 잘루드가 총리가 되었고, 술레이만 마그리비가 이끄는 민간 각료회의가 RCC의 정책을 시행하기 위해 설립되었다. 리비아의 행정 수도는 알-바이다에서 트리폴리로 이전되었다.
RCC는 이론적으로는 합의를 통해 운영되는 합의체였지만, 실제로는 카다피가 주도했다. 다른 구성원들은 그의 과도한 행동을 제한하려 하기도 했다. RCC 구성원들의 신원은 1970년 1월 10일에야 공개되었는데, 이들은 대부분 농촌 출신의 젊은 노동 계층 및 중산층 남성들이었고 대학 학위가 없는 경우가 많았다. 이는 이전에 국가를 통치했던 부유하고 고등 교육을 받은 보수적인 엘리트들과는 대조적이었다.
1969년 11월, 잠정 헌법이 공포되었고, 신생 리비아 아랍 공화국이 선포되었다. 카다피는 국가원수 겸 국가평의회 의장, 총리, 국방장관을 모두 겸직하며 권력을 집중시켰다. 1969년 9월 1일 설치된 리비아 비상 혁명위원회는 1977년 3월 2일까지 존속되었다.
쿠데타 이후 RCC는 혁명 정부를 공고히 하고 국가를 현대화하는 작업을 진행했다. 정치계와 군대에서 왕당파와 이드리스 국왕의 세누시 가문 인사들을 숙청했다. 카다피는 이들이 리비아 국민의 의지에 반한다고 여겼다. 왕당파 정치인과 언론인들을 재판하기 위해 인민재판소가 설립되었고, 많은 이들이 투옥되었으나 처형된 사람은 없었다. 이드리스 1세는 궐석재판을 통해 사형을 선고받았다. 카다피 집권 3개월 후인 1969년 12월, 육군 장관과 내무 장관이 쿠데타를 시도했으나 실패했다.[16] 1970년에는 이드리스의 조카인 아흐메드 알-세누시가 또 다른 쿠데타를 시도했으나 실패하고 사형을 선고받았다(이후 감형 및 사면됨).[17][18]
1970년에는 법 체계에 샤리아를 도입하는 입법 개정이 이루어졌고, 정당 활동 금지 조치는 유지되었으며 노동조합 활동과 파업이 금지되고 신문 발행이 중단되는 등 사회 통제가 강화되었다. 카다피는 1971년 9월과 1973년 2월에 개혁 속도에 대한 불만 등을 이유로 잠시 사임했으나 곧 복귀했다. 1972년에는 총리직에서 물러났지만, 여전히 '혁명의 지도자이자 수호자'를 자처하며 실권을 유지했다.
1973년부터 카다피는 '문화 혁명'을 시작하여 이슬람, 아랍 민족주의, 사회주의를 융합한 자신만의 독특한 정치 이념인 '''자마히리야'''(인민 직접민주주의) 체제 구축을 추진했다. 1976년에는 자신의 사상을 담은 『녹색의 책』을 출간했다. 1977년에는 '인민 주권 확립 선언'을 통해 자마히리야를 공식 국가 이념으로 채택하고, 국호를 '사회주의 리비아 아랍 자마히리야 국'[182](1986년 '대리비아 아랍 사회주의 인민 자마히리야 국'으로 개칭)으로 변경했다. 이 체제 하에서 국권의 최고 기관으로 전국인민회의가 설치되었고, 카다피는 초대 서기장(국가원수 격)에 취임했다. 그는 1979년 서기장직을 포함한 모든 공직에서 사임했지만, '혁명 지도자'라는 칭호 아래 리비아의 실질적인 최고 권력자로 군림하며 전제적인 독재 권력을 강화했다.[239] 이러한 그의 통치 방식과 반미주의적 성향 때문에 로널드 레이건 전 미국 대통령은 그를 '중동의 미친 개'[240]라고 비난하기도 했다.
3. 3. 집권
1969년, 리비아 육군 중위로 복무 중이던 카다피는 동료 장교들과 함께 군사 쿠데타를 일으켜 왕정을 폐지하고 리비아의 국가원수 겸 국가평의회 의장, 총리, 국방장관에 올랐다.[239]
1977년 그는 이슬람주의, 범아랍주의, 사회주의를 융합한 독자적인 정치 체제인 '''자마히리야'''(인민권력)를 선포했다. 표면적으로는 '인민 직접민주주의'를 내세웠으나, 실제로는 의회와 헌법을 폐지하며 자신의 절대 권력을 공고히 하는 과정이었다.[239] 1972년 총리직에서 물러난 이후에도 스스로를 '리비아 아랍 자마히리야의 위대한 9월 사회주의 인민 혁명의 수호자' 또는 '혁명의 지도자이자 수호자'로 칭하며 민족주의와 반미주의에 기반한 독재 정치를 이어갔다. 이러한 그의 행보는 로널드 레이건 당시 미국 대통령으로부터 '''중동의 미친 개'''[240]라는 격한 비난을 받기도 했다.
카다피는 리비아 지역이 1551년 오스만 제국의 영토가 된 이후 리비아 역사상 최장기 집권자였으며, 2009년 2월부터 2010년 1월까지 아프리카 연합 의장을 지내기도 했다. 그러나 2011년 초 시작된 아랍 민주화 시위의 여파는 리비아에도 미쳐, 같은 해 2월 대규모 반정부 시위가 발생했다. 결국 8월 22일 자유 리비아군이 수도 트리폴리를 장악했고, 카다피는 10월 20일 고향 시르테에서 반군에게 사살되며 그의 42년간의 통치는 막을 내렸다.
3. 3. 1. 집권 초기
1969년 9월 1일, 리비아 육군 중위였던 카다피는 동료 장교들과 함께 수도 트리폴리에서 군사 쿠데타를 일으켜 정권을 장악했다. 당시 건강 문제로 터키에 체류 중이던 국왕 이드리스 1세는 폐위되었고 왕정은 무너졌다. 카다피가 이끄는 신정부는 공화정을 선포하고 국호를 "리비아 아랍 공화국"으로 정했다. 카다피를 의장으로 하는 혁명 지도 평의회(Revolutionary Command Council, RCC)가 공화국의 최고 정치 기관으로 선포되었으며, 카다피는 국가원수 겸 혁명 지도 평의회 의장, 총리, 국방장관을 겸임했다.[239] 1970년부터 2년간 총리와 국방장관을 겸했으나, 1972년 총리직과 국방장관직에서 물러나고 국가원수 겸 혁명 지도 평의회 의장직만 유지했다.
=== 경제 정책 ===
혁명지도위원회(RCC)의 초기 경제 정책은 국가자본주의적 성격을 띠었다. 기업가를 지원하고 리비아 부르주아 계급을 육성하기 위한 계획들이 수립되었다. 리비아의 경작 가능 토지를 넓히고 수입 식량 의존도를 줄이기 위해, 1969년 9월 정부는 농업 생산성 향상을 목표로 하는 "녹색 혁명"을 시작했다. 식량 자급자족 달성이 목표였으며, 이를 위해 이탈리아 이주민들에게서 몰수했거나 사용되지 않던 토지를 회수하여 재분배하고, 북부 해안선과 내륙 오아시스 지역에 관개 시스템을 구축했다. 그러나 생산 비용이 생산물 가치를 넘어서는 경우가 많아 리비아 농업은 적자 상태를 유지했고 국가 보조금에 크게 의존했다.
원유는 리비아의 핵심 수출품이었기에, 카다피는 석유 부문 개혁에 집중했다. 1969년 10월, 그는 기존의 무역 조건이 외국 기업에게 리비아보다 더 많은 이익을 안겨준다며 불공정하다고 선언하고 생산량 감축을 위협했다. 같은 해 12월, 압둘 살람 잘루드는 리비아 원유 가격 인상 협상에 성공했다. 1970년 다른 OPEC 회원국들도 이를 따르면서 세계 유가가 상승했다. RCC는 1971년 3월 20일 트리폴리 협정을 통해 석유 기업들로부터 소득세 인상, 과거 미지급금, 그리고 더 유리한 가격 조건을 확보했다. 이 조치들 덕분에 리비아는 첫 해에만 약 10억달러의 추가 수입을 얻었다.
석유 부문에 대한 국가 통제를 강화하기 위해 RCC는 국유화 프로그램을 추진했다. 1971년 12월 브리티시 페트롤리엄의 사히르 유전 지분을 몰수한 것을 시작으로, 1973년 9월에는 리비아에서 활동하는 모든 외국 석유 생산업체의 운영 지분 51%를 국유화한다고 발표했다. 여기에는 리비아 유전 발견에 중요한 역할을 했던 넬슨 번커 헌트의 지분과 아르망 해머의 옥시덴탈 페트롤리엄 등이 포함되었다.[21][22][23] 카다피는 이를 사회주의로 나아가는 필수 단계로 여겼다. 이러한 정책은 경제적으로 성공을 거두어, 리비아의 국내총생산(GDP)은 1969년 38억달러에서 1974년 137억달러, 1979년 245억달러로 급증했다. 결과적으로 리비아 국민의 생활 수준은 카다피 정권 초기 10년간 크게 향상되어, 1인당 평균 소득은 1951년 40USD에서 1979년 8170USD로 증가했는데, 이는 당시 이탈리아나 영국 같은 여러 산업국가의 평균보다 높은 수준이었다. 1969년에는 모든 외국 소유 은행에 대해 폐쇄하거나 합자회사로 전환하도록 명령했다.
=== 사회 개혁 ===
RCC는 샤리아를 기반으로 사회 개혁 조치들을 시행했다. 알코올 소비가 금지되었고, 나이트클럽과 기독교 교회가 문을 닫았으며, 전통적인 리비아 의복 착용이 장려되었다. 또한 아랍어가 공식적인 의사소통과 도로 표지판에서 허용되는 유일한 언어로 지정되었다. RCC는 최저임금을 두 배로 인상하고, 법정 가격 통제를 도입했으며, 임대료를 30~40% 인하했다. 카다피는 이전 왕정 하에서 여성에게 부과되었던 엄격한 사회적 제약을 완화하고자 개혁을 추진했고, 이를 위해 혁명 여성 조직을 설립했다. 1970년에는 양성 평등과 임금 균등을 명시한 법이 제정되었고, 1971년에는 리비아 여성 연맹 설립을 후원했다. 1972년에는 16세 미만 여성의 결혼을 금지하고 여성의 동의를 결혼의 필수 전제 조건으로 규정하는 법이 통과되었다. 카다피 정권은 여성에게 교육 및 고용 기회를 넓혀주었으나, 이러한 혜택은 주로 도시 중산층 여성들에게 집중되었다.
1969년부터 1973년까지 RCC는 석유 수입을 활용하여 사회 복지 프로그램에 자금을 지원했다. 이를 통해 주택 건설 프로젝트가 진행되었고 의료 및 교육 시스템이 개선되었다. 주택 건설은 노숙 문제를 해결하고 도시화로 인해 생겨난 판잣집을 대체하는 주요 사회적 과제였다. 의료 부문도 확장되어, 1978년 리비아의 병원 수는 1968년보다 50% 이상 증가했고, 의사 수는 10년 동안 700명에서 3,000명 이상으로 늘어났다. 말라리아가 근절되었고, 트라코마와 결핵 발병률도 크게 감소했다. 의무 교육 기간은 6년에서 9년으로 확대되었으며, 성인 문해력 프로그램과 무상 대학교육이 도입되었다. 바이다 대학교가 설립되었고, 트리폴리 대학교와 벵가지 대학교가 확장되었다. 이러한 조치들을 통해 정부는 리비아 사회의 빈곤층을 교육 시스템에 통합하는 데 기여했다. 또한 RCC는 공공 부문을 크게 확장하여 수천 개의 일자리를 창출했다. 이러한 초기 사회 프로그램들은 카다피의 개인적인 카리스마, 젊음, 베두인 출신이라는 배경, 그리고 반이탈리아 투사 오마르 무크타르의 계승자임을 강조하는 그의 연설과 맞물려 리비아 내에서 큰 인기를 얻었다.
=== 국가 통합 및 정치 조직 ===
강력한 지역 및 부족 간 분열을 극복하기 위해, RCC는 통합된 국가적 리비아 정체성 개념을 장려했다. 이 과정에서 부족 지도자들을 구체제의 대리인으로 비판했으며, 1971년 8월 사브하 군사 법원은 많은 부족 지도자들을 반혁명 활동 혐의로 기소했다. 행정 구역 경계는 부족 경계를 넘어 재조정되었고, 혁명을 지지하는 현대화 인사들이 전통적인 지도자들을 대체하려 했으나, 지역 사회의 거부로 인해 어려움을 겪었다. 이러한 시도의 한계를 깨달은 카다피는 1971년 6월, 자신이 의장을 맡은 대중 동원 전위당인 아랍 사회주의 연합(ASU)을 창설했다. ASU는 RCC를 "최고 지도 권위"로 인정했으며, 전국적으로 혁명적 열기를 고취시키기 위해 설계되었다. 그러나 ASU는 관료주의적으로 운영되었고 카다피가 기대했던 대중적 지지를 얻는 데는 실패했다.
=== 외교 정책 ===
가말 압델 나세르의 아랍 민족주의는 혁명사령부(RCC)에 즉각적인 영향을 미쳤다. 이집트, 시리아, 이라크, 수단 등 주변 아랍 민족주의 정권들은 RCC를 신속하게 승인했으며, 이집트는 경험이 부족한 RCC를 돕기 위해 전문가들을 파견했다. 카다피는 범아랍주의 사상을 강력히 주장하며 북아프리카와 중동 전역에 걸친 단일 아랍 국가 건설의 필요성을 역설했다. 1969년 12월, 리비아는 이집트, 수단과 함께 트리폴리 헌장에 서명하여 세 나라의 최종적인 정치적 통일을 목표로 하는 범국가적 연합인 아랍 혁명 전선을 수립했다. 1970년에는 시리아도 가입 의사를 밝혔다.
1970년 9월 나세르가 갑작스럽게 사망하자, 카다피는 그의 장례식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다. 나세르의 뒤를 이은 안와르 사다트는 단일 국가 대신 아랍 국가들의 정치 연방 창설을 제안했고, 이는 1971년 4월 실행에 옮겨졌다. 이를 통해 이집트, 시리아, 리비아는 리비아의 막대한 석유 자금을 지원받는 연방을 구성했다. 1971년 7월, 카다피는 1971년 수단 쿠데타에서 소련에 맞서 사다트를 지지했으며, 쿠데타 주모자들을 태운 영국항공 여객기를 리비아 전투기를 동원해 강제 착륙시킨 후 카르툼으로 압송하여 수단 지도자 자파르 니메이리에게 넘겨 즉결 처형되도록 했다.[24] 1972년 2월, 카다피와 사다트는 비공식적인 합병 헌장에 서명했지만, 관계가 악화되면서 실행되지 않았다. 사다트는 리비아의 급진적인 노선에 대해 점차 경계심을 갖게 되었고, 1973년 9월 연방 설립 시한은 아무런 진전 없이 지나갔다.
1969년 쿠데타 이후, 4개국(프랑스, 영국, 미국, 소련) 대표들은 RCC 대표들과의 회담을 요청했다. 영국과 미국은 리비아 내 군사 기지를 유지하고 추가적인 불안정을 우려하여 신속하게 RCC를 외교적으로 승인했다. 1970년 미국은 카다피의 호의를 얻기 위해 최소 한 차례의 반쿠데타 계획을 사전에 알리기도 했다. 그러나 이러한 협력 시도는 실패로 돌아갔다. 카다피는 국가 주권을 확립하고 외국의 식민주의 및 제국주의 영향력을 제거하겠다는 확고한 의지를 보였다. 그의 정부는 미국과 영국에 리비아 내 군사 기지 철수를 강력히 요구하며 "인민 혁명을 표현하기 위해 일어선 무장 세력은 제국주의의 기지가 리비아 영토에 존재하는 동안 판잣집에서 사는 것을 용납하지 않을 것"이라고 선언했다. 결국 영국은 1970년 3월, 미국은 같은 해 6월에 기지를 철수했다.
1970년 10월에는 이탈리아의 영향력을 축소하기 위해 모든 이탈리아인 소유 자산을 몰수하고, 약 1만 2천 명에 달하는 이탈리아계 주민과 소수의 리비아 유대인 공동체를 추방했다. 이 날은 "복수의 날"이라는 국경일로 지정되었다. 이탈리아는 이것이 1956년 이탈리아-리비아 조약을 위반한 것이라고 항의했지만, 유엔의 제재는 이루어지지 않았다. 지중해에서 NATO의 영향력을 줄이기 위해 1971년 리비아는 몰타에 NATO의 군사 기지 사용 중단을 요청하는 대가로 원조를 제공했다. 타협안으로 몰타 정부는 NATO 기지 사용을 허용하되, 아랍 영토 공격에는 사용하지 않는다는 조건을 달았다. 이후 10년간 카다피 정부는 돔 민토프의 몰타 정부와 강력한 정치적, 경제적 유대를 구축했으며, 리비아의 압력으로 몰타는 1980년 영국 공군 기지 계약을 갱신하지 않았다. 군사력 증강을 위해 RCC는 프랑스와 소련으로부터 무기를 구매하기 시작했으며, 특히 소련과의 관계 강화는 당시 냉전 중이던 미국과의 관계를 더욱 악화시켰다.
카다피는 이스라엘을 지원하는 미국을 강하게 비판하며 팔레스타인과 이스라엘-팔레스타인 분쟁에서 팔레스타인 편을 들었다. 그는 1948년 이스라엘 건국을 아랍 세계에 강요된 서구 식민지 점령으로 간주했으며, 이스라엘과 서방 목표물에 대한 팔레스타인의 폭력 행위를 고향의 식민화에 맞서는 억압받는 민족의 정당한 저항이라고 보았다. 아랍 국가들에게 이스라엘에 대한 "끊임없는 전쟁"을 촉구하며, 1970년 반이스라엘 무장 단체를 지원하기 위한 지하드 기금을 조성했다. 1972년 6월에는 반이스라엘 게릴라 훈련을 위한 첫 번째 나세르주의 자원봉사 센터를 설립했다.
초기에는 나세르처럼 팔레스타인 지도자 야세르 아라파트와 그의 조직 파타를 선호했으나, 시간이 지나면서 아라파트가 너무 온건하다고 여기고 더 폭력적인 행동을 촉구하며 관계가 악화되었다. 대신 팔레스타인 해방 인민전선, 팔레스타인 해방 인민전선 – 총사령부, 팔레스타인 해방 민주전선, 아스-사이카, 팔레스타인 인민 투쟁 전선, 아부 니달 조직과 같은 더 과격한 민병대들을 지원했다. 그는 서독에서 이스라엘 선수들을 살해한 1972년 뮌헨 올림픽 테러를 저지른 검은 9월 단체에 자금을 지원했으며, 살해된 무장대원들의 시신을 리비아로 이송하여 영웅으로 장례를 치러주었다.
카다피는 흑표당, 이스라엘 민족, 전능한 블랙 P. 스톤 네이션, 투파마로스, 4월 19일 운동, 니카라과의 산디니스타 민족 해방 전선, 남아프리카의 아파르트헤이트에 맞서 싸운 ANC 등 해방 운동 단체, 임시 아일랜드 공화국군, ETA, 액션 디렉트, 붉은 여단, 유럽의 적군파, 아르메니아 비밀 해방군, 일본 적군, 아체 자유 운동, 필리핀의 모로 국민 해방 전선 등 전 세계의 다양한 무장 단체들을 재정적으로 지원했다.[25] 그는 에리트리아 독립 전쟁에서처럼 특정 분쟁에서 지지하는 편을 바꾸기도 하는 등, 지원 대상에 대해 다소 무차별적인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1970년대 내내 이러한 단체들은 리비아로부터 재정 지원을 받았고, 리비아는 식민지주의와 신식민지주의에 맞선 제3세계 투쟁의 지도자로 인식되었다. 이들 중 다수는 비판자들에 의해 "테러리스트"로 규정되었지만, 카다피는 이러한 규정을 거부하고 그들을 해방 투쟁에 참여하는 혁명가로 간주했다.
=== 자마히리야 체제 구상 ===
1973년부터 카다피는 "문화 혁명"을 시작하여 이슬람, 아랍 민족주의, 사회주의를 융합한 자신만의 독특한 국가 체제인 '''자마히리야'''(인민 직접민주주의) 건설을 추진했다. 1974년에는 "정치 이론 연구에 전념하겠다"며 혁명 지도 평의회 의장 권한을 2인자인 압둘 살람 잘루드 소령에게 잠시 위임했다(이는 권한 위임일 뿐 사임은 아니었다). 1976년에는 마오쩌둥 어록을 본떠[180][181] 자신의 사상을 정리한 『녹색서』(The Green Book)라는 제목의 책을 출판했다. 녹색은 이슬람의 상징색으로, 사회주의의 붉은색에 대응하여 "이슬람 사회주의"를 상징한다. 그리고 1977년, 카다피는 소위 '인민주권확립선언'을 공포하고 "자마히리야"를 공식적으로 국가의 지도 이념으로 도입했다. 이에 따라 국호도 "'''사회주의 리비아 아랍 자마히리야 국'''[182]"(1986년에 "'''대리비아 아랍 사회주의 인민 자마히리야 국'''"으로 개칭)으로 바뀌었다. 자마히리야 체제 하에서 국권의 최고 기관으로 전국인민회의가 설치되었고, 카다피가 초대 전국인민회의 서기장(국회의장직에 해당하며 국가 원수로서의 권한도 가졌다)에 취임했다. 이후 카다피는 1979년에 전국인민회의 서기장을 포함한 모든 공직에서 사퇴했지만, "혁명 지도자"라는 칭호 아래 실질적인 국가 원수로서 리비아를 계속 지휘했다.
3. 3. 2. 반미주의와 이슬람 사회주의
1977년 이슬람주의, 범아랍주의, 사회주의를 융합한 '''자마히리야'''(인민권력) 체제를 선포하였다. 그는 '인민 직접민주주의'라는 독특한 체제 구축을 명분으로 의회제와 헌법을 폐지하고 전제 독재권력을 강화했다.[239] 카다피의 정치 이론은 1974년부터 연구에 전념하여 1975년 발간된 《녹색서》(The Green Book)에 집대성되었다.
1972년 총리직에서 물러난 이후에도 정부 문건과 관영 통신에서 '리비아 아랍 자마히리야의 위대한 9월 사회주의 인민 혁명의 수호자' 내지는 '혁명의 지도자이자 수호자'를 자칭하며 민족주의, 반미주의 독재정치를 폈다. 이러한 그의 노선 때문에 로널드 레이건 전 미국 대통령으로부터 '''중동의 미친 개'''[240]라는 비난을 받기도 하였다.
카다피는 철저한 반미주의를 내세워 미국 군사기지를 철수시키고, 외국 자본을 추방했으며 이탈리아인, 프랑스인 등 서방 국적자들을 추방했다. 외국의 석유 회사들을 통제하고 석유 자원을 국유화했으며, 도로와 해운, 항만, 항공 등의 주요 기반시설 역시 국유화를 단행했다.
1970년부터 2년간 총리·국방장관을 겸임하면서 완전한 이슬람 사회주의 국가 건설을 목표로 하는 문화대혁명을 주도했다. 엄격한 이슬람 율법을 적용하여 음주를 금지시키고, 독자적인 형태의 직접 민주주의를 구상하였다. 이러한 사상은 《녹색서》에 자세히 설명되어 있다.
경제 정책 면에서는 1969년부터 농업 생산성 향상을 위한 "녹색 혁명"을 시작하여 식량 자급자족을 목표로 삼았다. 석유 부문에서는 외국 기업과의 불공정한 계약 조건을 문제 삼아 1970년대 초반 OPEC 회원국들과 함께 유가 인상을 주도했다. 이를 통해 리비아는 첫 해에만 약 10억달러의 추가 수입을 확보했다. 1971년 BP의 자산 몰수를 시작으로 석유 산업에 대한 국유화를 강력하게 추진하여, 1973년에는 리비아 내 모든 외국 석유 생산업체 지분의 51%를 국유화했다.[21][22][23] 이는 카다피가 사회주의로 나아가는 중요한 단계로 간주한 조치였다. 외국 소유 은행 역시 폐쇄하거나 국영 합자회사로 전환시켰다. 이러한 정책과 유가 상승에 힘입어 리비아의 국내총생산(GDP)은 1969년 38억달러에서 1974년 137억달러, 1979년 245억달러로 크게 증가했고, 국민 생활 수준 역시 향상되어 1979년 1인당 평균 소득은 8170USD에 달했는데, 이는 당시 이탈리아나 영국 등 일부 산업국가들의 평균보다 높은 수치였다.
사회적으로는 샤리아를 기반으로 한 개혁을 단행했다. 알코올 소비 금지, 나이트클럽 및 기독교 교회 폐쇄, 전통 리비아 의복 착용 장려, 아랍어를 유일한 공식 언어로 지정하는 등의 조치가 이루어졌다. 최저임금 인상, 물가 통제, 임대료 인하 등 사회 복지 정책도 시행되었다. 또한, 혁명 여성 조직 설립을 지원하고 양성 평등 및 임금 균등 법안을 제정했으며, 16세 미만 여성의 결혼을 금지하는 등 여성의 사회적 지위 향상을 위한 정책을 추진했으나, 그 혜택은 주로 도시 중산층 여성에게 집중되는 경향이 있었다. 석유 수입을 활용하여 주택 건설, 의료 시스템 확장, 무상 의무 교육 확대(6년에서 9년으로) 등 사회 복지 프로그램에 적극적으로 투자했다.
1973년 4월, 카다피는 "인민혁명"을 선포하고 5개 항 계획을 발표했다. 이는 기존 법률 폐지, 반대 세력 제거, 관료주의 타파, 인민위원회 구성을 통한 인민 무장, 외세 영향력 배제를 위한 리비아 문화혁명 등을 골자로 했다. 인민위원회는 직접 민주주의의 실현 방안으로 제시되었으나, 실제로는 카다피와 혁명지도위원회(RCC)의 통제하에 운영되었으며, 반대파를 색출하는 감시 시스템의 역할도 수행했다.
외교적으로 카다피는 가말 압델 나세르의 범아랍주의를 계승하여 1972년 이집트, 시리아와 아랍공화국연방 결성을 시도했으나 성공하지 못했다. 팔레스타인해방기구(PLO)를 강력히 지지했으며, 이 때문에 1979년 이집트-이스라엘 평화 조약을 체결한 이집트의 안와르 사다트 대통령과 관계가 극도로 악화되었다.
카다피 정권은 반미주의 노선에 따라 미국 및 서방권 국가들과 지속적으로 대립했다. 1984년 런던 주재 리비아 대사관 직원에 의한 영국 경찰 살해 사건, 1985년 로마 및 빈 공항 테러, 1986년 서베를린 디스코텍 폭탄 테러 등 여러 테러 사건의 배후로 지목받았다. 이에 미국 로널드 레이건 행정부는 리비아를 테러 지원국으로 규정하고 리비아 공습을 감행하여 카다피 암살을 시도했으나 실패했다. 이 공습은 국제 사회로부터 비판을 받았다. 1988년 발생한 로커비 상공 팬암기 폭파 사건 역시 리비아 정보기관의 소행으로 지목되었으며, 카다피가 용의자 인도를 거부하면서 리비아는 유엔의 제재를 받게 되었다. 이러한 일련의 사건들로 인해 리비아와 서방의 관계는 오랫동안 적대적이었다.
3. 3. 3. 단일 아랍 국가 건설 시도
아랍 민족주의자였던 카다피는 가말 압델 나세르의 범아랍주의를 계승하여 중동 지역에 단일 아랍 국가를 건설하려는 시도를 했다.
1972년에는 이집트의 안와르 사다트, 시리아의 하피즈 알아사드와 함께 범아랍주의 3개국에 의한 아랍공화국연방 구성을 추진했다. 처음에는 이집트와 아랍 연합 구성에 합의했으나, 중동 전쟁 이후 이집트의 사다트 대통령이 이스라엘과의 평화 협정을 추진하는 등 독자적인 노선을 걷자 이에 반발하여 양국 관계는 악화되었다.[183] 결국 아랍공화국연방은 본격적인 통합을 이루지 못하고 5년 만에 해체되었다. 카다피는 1979년 사다트 대통령이 이스라엘과 평화협정을 맺자 이집트와의 관계를 완전히 단절했다.
1980년에는 시리아와의 합방을 선언하기도 했으나, 곧이어 이란-이라크 전쟁이 발발하면서 합방 계획은 무산되었다. 카다피는 이란-이라크 전쟁 당시 이라크의 사담 후세인과 이란의 호메이니에게 사람을 보내 전쟁이 미국과 서방 세력의 이간질이라며 중단을 촉구했지만, 양측 모두 이를 거절했다. 카다피는 특정 국가의 편을 들지 않고 중립적인 입장에서 전쟁 중단을 요구하며 상황을 지켜보았다.
카다피는 팔레스타인해방기구(PLO)의 강력한 지지자였으며, 자금 지원 등을 통해 서아프리카를 중심으로 영향력을 유지하려 했다. 또한 지역 기구인 사헬-사하라 지역 국가 공동체(CEN-SAD)를 창설하여 아프리카에서의 영향력 확대를 위한 발판으로 삼았다.
3. 3. 4. 서방과의 화해 제스처
21세기 초, 특히 미국의 경제 제재와 이라크 전쟁 이후 카다피 정권은 서방 세계와의 관계 개선을 시도하는 모습을 보였다.
1999년 팬암기 폭파 사건 용의자를 헤이그 국제 사법 재판소에 송환했으며, 2003년 8월에는 리비아 국가로서의 사건 개입은 부인하면서도 리비아 공무원이 저지른 사건의 책임을 지고 총 27억달러의 보상에 합의했다.[239] 2001년 미국 동시다발 테러가 발생했을 때는 아랍 국가 지도자들 중 알카에다를 강력히 비난한 인물 중 하나였고, 리비아 내 이슬람 극단주의 조직인 '리비아 이슬람 전투단'과 대립하기도 했다.
이라크 전쟁 이후, 조지 W. 부시 행정부가 이끄는 미국 등 서방 국가들의 다음 공격 대상이 될 것을 우려했는지, 2003년 말에는 핵무기 개발 프로그램을 포기하고 국제원자력기구(IAEA)의 사찰을 수용하겠다고 전격 선언했다. 미국 등 서방 국가들은 이러한 리비아의 태도 변화를 긍정적으로 평가하여 경제 제재를 해제하고 테러 지원국 명단에서도 삭제하는 조치를 취했다.
2004년 미국과 외교 관계를 복원했으며, 2006년 5월 15일에는 양국 간 국교 정상화가 공식 발표되었다. 이 과정에서 리비아 정부는 팬암기 폭파 사건 등 테러 사건 희생자 유족에게 보상금으로 15억달러를 지불했고, 미국 측 역시 과거 미군의 리비아 공습 당시 발생한 민간인 피해에 대해 3억달러를 지불했다.[186] 2008년 9월에는 콘돌리자 라이스 당시 미국 국무장관이 트리폴리를 방문하여 카다피와 회담하였고,[241] 같은 해 10월 미국인 희생자에 대한 보상금 지급이 완료되면서 양국 관계는 완전히 정상화되었다. 2009년 7월 이탈리아 라퀼라에서 열린 G7 정상회의 만찬에서는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과 악수하며 관계 개선을 과시하기도 했다.[187]
이탈리아와의 관계에서도 변화가 있었다. 카다피는 과거 리비아 내 이탈리아인들의 재산을 몰수하고 추방했던 것에 대해 사과했으며, 이탈리아의 식민 지배에 대한 사과를 받아들였다.[242] 2009년 리비아 혁명 40주년 기념식에는 실비오 베를루스코니 이탈리아 총리가 직접 참석하여 식민 지배에 대한 사과와 배상 합의를 재확인했다.[188][189]
이러한 서방과의 관계 개선 움직임은 카다피의 정치적 관심이 범아랍주의에서 범아프리카주의로 이동한 것과 관련이 있다는 분석도 제기된다. 실제로 그는 2000년 토고에서 열린 아프리카 통일 기구(OAU) 정상회의에 참석해 지역 통합의 필요성을 역설했고, 2002년 OAU가 아프리카 연합(AU)으로 개편되는 과정에서 리비아가 주도적인 역할을 수행했다. 2009년 2월부터 2010년 1월까지는 아프리카 연합 의장직을 맡기도 했다.
하지만 서방과의 화해 제스처에도 불구하고 카다피 특유의 예측 불가능하고 돌출적인 언행은 여전했다. 2009년 9월 23일, 처음으로 참석한 유엔 총회 연설에서는 뉴욕 외곽에 유목민 전통에 따라 텐트를 치고 머물렀으며, 연설에서는 유엔 안전보장이사회를 "테러 이사회"라고 비난하고 유엔 헌장을 집어 던지는 행위를 보였다.[190] 또한 탈레반이 종교 국가를 원한다면 바티칸처럼 만들게 해주면 된다는 발언, 오바마 대통령을 "아프리카의 아들이자 나의 아들"이라고 칭한 것, 존 F. 케네디 전 미국 대통령 암살 배후에 이스라엘이 있다는 주장, 신종 인플루엔자가 백신 판매를 위해 인위적으로 만들어졌다는 음모론 등을 제기했다. 예정된 연설 시간 15분을 훌쩍 넘겨 1시간 36분 동안 연설을 이어갔고, 이 때문에 오바마 대통령을 비롯한 많은 참석자들이 자리를 떴으며 아랍어 동시통역사가 지쳐 교체되는 일도 있었다. 그의 이러한 행동은 2년 후, 카다피 정권을 무너뜨린 리비아 국민의회 측 인사에 의해 같은 유엔 총회 자리에서 비판받게 된다.[191]
3. 4. 리비아 내전과 암살
2011년 초 튀니지에서 시작된 아랍 민주화 시위의 바람은 리비아에도 불어닥쳤다. 같은 해 2월, 40년 넘게 이어진 카다피의 장기 독재에 반대하는 대규모 반정부 시위가 전국적으로 확산되었다. 카다피 정권은 시위대를 무력으로 진압하려 했으나, 이는 오히려 국민적 저항을 격화시켜 내전으로 번지는 결과를 낳았다.
반정부 세력은 자유 리비아군을 결성하고 벵가지 등 주요 도시를 거점으로 삼아 정부군과 치열한 전투를 벌였다. 국제 사회는 카다피 정권의 반인도적 행위를 규탄하며 제재를 가했고, NATO는 군사적으로 개입하여 반군을 지원했다. 결국 2011년 8월 22일, 반정부군이 수도 트리폴리에 진입하면서 카다피 정권은 사실상 붕괴되었다.
트리폴리 함락 이후 카다피는 고향인 시르테로 도피하여 마지막 저항을 시도했지만, 2011년 10월 20일 시르테가 함락되는 과정에서 반군에게 생포되어 사살되었다. 이로써 42년간 리비아를 철권 통치했던 그의 시대는 막을 내렸다.
3. 4. 1. 장기 집권과 내전
1969년 리비아 육군 중위 시절 군사 쿠데타를 일으켜 왕정을 무너뜨리고 권력을 장악했다. 이후 국가원수, 국가평의회 의장, 총리, 국방장관을 겸임하며 리비아의 최고 지도자가 되었다. 1977년에는 이슬람주의, 범아랍주의, 사회주의를 혼합한 독자적인 정치 이념인 '''자마히리야'''(인민권력) 체제를 선포했다. 그는 '인민 직접민주주의'를 내세우며 의회와 헌법을 폐지했지만, 이는 사실상 자신의 전제 독재 권력을 강화하기 위한 조치였다.[239]
1972년 총리직에서 물러난 이후에도 '리비아 아랍 자마히리야의 위대한 9월 사회주의 인민 혁명의 수호자' 또는 '혁명의 지도자이자 수호자'로 불리며 실권을 행사했다. 그는 강력한 민족주의와 반미주의를 내세운 독재 정치를 펼쳤고, 이로 인해 로널드 레이건 당시 미국 대통령으로부터 '''중동의 미친 개'''[240]라는 비난을 받기도 했다.
집권 초기 혁명지도위원회(RCC)는 국가자본주의적 경제 정책을 추진하며 기업가 지원과 리비아 부르주아 계층 육성을 시도했다. 1969년 9월에는 식량 자급자족을 목표로 농업 생산성을 높이기 위한 "녹색 혁명"을 시작했다. 이탈리아 이주민들로부터 몰수한 토지를 재분배하고 관개 시스템을 구축했지만, 높은 생산 비용으로 인해 농업은 국가 보조금에 의존하는 상태를 벗어나지 못했다.
리비아의 핵심 산업인 원유 부문에서는 강력한 국익 우선 정책을 펼쳤다. 1969년 10월, 외국 석유 회사와의 불공정한 계약 조건을 비판하며 가격 인상을 요구했고, 1970년에는 이를 관철시켜 다른 OPEC 회원국들의 동참을 이끌어내며 국제 유가 상승에 영향을 미쳤다. 1971년 트리폴리 협정을 통해 석유 회사로부터 더 높은 세금과 유리한 가격 조건을 확보하여 첫해에만 약 10억달러의 추가 수입을 올렸다. 이후 브리티시 페트롤리엄을 시작으로 외국 석유 회사들의 자산을 국유화하는 조치를 단행했으며, 1973년에는 리비아 내 모든 외국 석유 생산 업체의 지분 51%를 국유화한다고 발표했다.[21][22][23] 이러한 정책은 경제 성장으로 이어져 1969년 38억달러였던 GDP는 1979년 245억달러로 크게 증가했고, 같은 기간 1인당 평균 소득도 40USD(1951년 기준)에서 8170USD로 급증하여 당시 일부 서유럽 국가 수준을 넘어서기도 했다. 외국계 은행도 폐쇄하거나 합자회사로 전환하도록 했다.
사회적으로는 이슬람 율법에 기반한 개혁을 추진했다. 알코올 소비를 금지하고 나이트클럽과 기독교 교회를 폐쇄했으며, 전통 의상 착용을 장려하고 공용어와 도로 표지판에서 아랍어만 사용하도록 했다. 최저임금 인상, 물가 통제, 임대료 인하 등 서민 생활 안정을 위한 조치도 시행했다. 여성의 사회적 제약을 완화하기 위해 혁명 여성 조직을 설립하고, 1970년에는 양성 평등과 동일 임금을 명시한 법을 제정했으며, 1972년에는 여성의 동의 없는 조혼을 금지하는 법을 통과시켰다. 이를 통해 여성의 교육 및 취업 기회가 확대되었으나, 주로 도시 중산층에게 혜택이 집중되었다는 평가도 있다.
석유 수입을 바탕으로 주택 건설, 의료, 교육 등 사회 복지 프로그램에 적극 투자했다. 주택 건설로 노숙 문제를 해결하고 도시 빈민가를 정비했으며, 병원과 의사 수를 크게 늘려 말라리아를 퇴치하고 트라코마, 결핵 발병률을 낮췄다. 의무 교육 기간을 9년으로 확대하고 성인 문해 교육과 무상 대학교육을 도입했으며, 바이다 대학교, 트리폴리 대학교, 벵가지 대학교 등을 확장하여 교육 기회를 넓혔다. 이러한 사회 정책과 카다피 개인의 카리스마, 베두인 출신 배경, 반식민 투쟁 영웅 오마르 무크타르의 계승자임을 내세운 선전 활동은 초기 대중적 지지를 확보하는 데 기여했다.
1977년 3월, 카다피는 '인민 권력 수립 선언'을 통해 국호를 '대사회주의인민리비아아랍자마히리야'(الجماهيرية العربية الليبية الشعبية الاشتراكية|알자마히리야 알아라비야 알리비야 아샤비야 알이슈티라키야ara)로 변경하고, 전면 녹색의 새로운 국기를 채택했다. 공식적으로는 전 국민이 참여하는 187개의 기본인민회의(BPC)를 통해 국가를 운영하는 직접 민주주의 체제를 표방했다. 인민회의 대표들이 모이는 인민총회(GPC)가 최고 결정 기구 역할을 했으나, 실제로는 카다피와 측근들이 권력을 장악하고 있었으며 인민총회는 카다피의 정책을 추인하는 형식적인 기구에 머무는 경우가 많았다. 때로는 카다피의 제안이 거부되거나(초등학교 폐지 요구), 카다피가 인민총회의 지지 없이 정책을 강행하기도 했다(여성 군 입대 허용). 카다피는 인민회의 외의 다른 정치 조직(정당, 노동조합, 여성 단체 등)을 모두 금지했다. 이러한 한계에도 불구하고, 자마히리야 체제는 이전보다 더 많은 참여와 대표성을 보장했다는 평가도 있다.
법 체계는 처음에는 코란과 샤리아를 따르려 했으나, 곧 샤리아가 자신의 정치 이념인 《녹색 수첩》의 사회주의 원칙과 맞지 않는다며 입장을 바꿨다. 이로 인해 보수적인 이슬람 성직자들의 반발을 사기도 했다.
외교적으로는 1977년 이집트와 국경 분쟁을 겪었으며, 이집트와 수단이 미국과 가까워지자 소련과의 관계를 강화했다. 1976년 소련을 방문하여 레오니드 브레즈네프와 회담했고, 유고슬라비아의 요시프 브로즈 티토, 루마니아의 니콜라에 차우셰스쿠와도 긴밀한 관계를 유지했다.[41][42]
1980년대 미국의 경제 제재 이후 카다피의 태도에 변화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1988년 트리폴리 감옥 벽을 불도저로 부수고 400명의 수감자를 석방하는 포퓰리즘적 행보를 보였고, 1999년에는 팬암기 폭파 사건 용의자를 헤이그 국제 사법 재판소에 인도했다. 2003년에는 리비아 공무원의 책임을 인정하고 총 27억달러의 보상에 합의했다. 2001년 9.11 테러 당시 알카에다를 강력히 비난했으며, 리비아 내 이슬람 극단주의 조직인 '리비아 이슬람 전투단'과 싸우기도 했다.
이라크 전쟁 이후 서방의 압박을 의식했는지, 2003년 말 전격적으로 '''핵 포기'''를 선언하고 국제 사찰을 수용했다. 이에 미국 등 서방 국가들은 경제 제재를 해제하고 테러 지원국 지정을 철회했으며, 2006년 미국과의 국교 정상화가 이루어졌다. 리비아는 팬암기 폭파 사건 등 희생자 유족에게 15억달러를 보상금으로 지불했고, 미국 역시 과거 리비아 공습 당시 민간인 피해에 대해 3억달러를 지불했다.[186] 2008년 미국인 희생자 보상이 완료되면서 국교는 완전히 정상화되었고, 2009년 라퀼라 G7 정상회의에서는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과 악수하며 관계 개선을 과시했다.[187]
이러한 변화는 카다피의 관심이 성과 없는 '범아랍주의'에서 서방과의 이해 충돌이 적은 '범아프리카주의'로 옮겨갔기 때문이라는 분석도 있다. 실제로 2000년 아프리카 통일 기구(OAU) 정상회의에 참석하여 지역 통합을 역설했고, 2002년 OAU가 아프리카 연합(AU)으로 개편되는 과정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했다. 2009년 2월부터 2010년 1월까지는 아프리카 연합 의장을 맡기도 했다.
2009년 9월, 리비아 혁명 40주년 기념식에는 이탈리아의 실비오 베를루스코니 총리, 베네수엘라의 우고 차베스 대통령, 수단의 오마르 알-바시르 대통령 등 주로 아프리카와 중동 국가 정상들이 참석하여 카다피와의 관계를 과시했다.[188][189]
그러나 42년간 이어진 그의 장기 독재는 결국 국민적 저항에 부딪혔다. 2011년 초, 이웃 국가 튀니지에서 시작된 민주화 시위의 영향으로 리비아에서도 카다피 퇴진을 요구하는 대규모 반정부 시위가 발생했다. 카다피는 시위대를 무력으로 진압하고 국민들에게 전면전을 촉구했지만, 이는 오히려 내전으로 격화되는 결과를 낳았다. 반정부 시민군은 벵가지 등 주요 도시를 장악하고 NATO의 군사적 지원을 받으며 수도 트리폴리로 진격했다.
2011년 8월 22일 반정부군이 트리폴리에 진입하여 카다피의 아들 둘을 생포했고, 8월 24일까지 수도 전역을 장악하면서 카다피 정권은 사실상 붕괴되었다 ('''2011년 리비아 내전'''). 카다피는 고향인 시르테로 도피하여 저항을 계속했지만, 결국 10월 20일 반군에 의해 사살되었다.
내전 기간 동안 국제사회는 카다피 정권을 강하게 비난했다. 2월 26일 유엔 안보리는 유엔 안전보장이사회 결의 1970을 만장일치로 채택하여 카다피 정권에 대한 제재를 결의했고, 6월 27일 국제형사재판소(ICC)는 카다피를 반인도적 범죄 혐의로 체포영장을 발부했다.[192] 9월 9일 국제형사경찰기구(인터폴)는 카다피에 대한 국제 수배령을 내렸다.[193][194]
3. 4. 2. 사망
내전이 진행 중이던 2011년 8월, 수도 트리폴리가 함락되어 정권이 사실상 붕괴된 후에도 카다피는 저항을 이어갔다. 하지만 9월 21일에는 혁명군이 남부 시르테를 점령했고, 10월 17일에는 바니 왈리드를 점령했다. 국제 사회의 압박도 거세졌다. 2월 26일, 유엔 안전 보장 이사회는 만장일치로 결의 1970호를 채택했고, 6월 27일 국제형사재판소(ICC)는 반인도 범죄 혐의로 카다피에 대한 체포영장을 발부했다.[192] 9월 9일에는 국제형사경찰기구(인터폴)가 카다피에 대한 국제 수배를 발령했다.[193][194]
결국 2011년 10월 20일, 리비아 국민의회는 구 정권의 마지막 거점이었던 시르테 인근에서 카다피가 사망했다고 발표했다.[168] 사망 경위에 대해서는 여러 주장이 엇갈린다. 대체로 시르테 함락 후 여러 대의 차량과 함께 탈출을 시도하던 중 NATO군(프랑스 공군의 미라주 2000 전투기와 미국 공군의 무인기 RQ-1 프레데터[195][196])의 공습을 받았고,[197] 파괴된 차량에서 내려 근처 하수관으로 피신했다가 반카다피 세력(국민해방군)에게 체포되어 사망했다는 점은 일치한다.
그러나 사망에 이르게 된 구체적인 과정에 대해서는 논란이 있다. 리비아 국민의회는 "카다피를 벵가지 등 주요 도시로 이송하려 했으나, 이동 중 구 정부군과의 교전이 발생해 총격전에 휘말려 사망했다"고 공식 발표했다.[198][199] 하지만 다수의 언론과 소식통은 교전은 없었으며, 카다피가 사로잡힌 후 분노한 민병대원들에게 린치를 당해 살해되었다고 보도했다.[200][201] 실제로 살해 직후 촬영된 영상에는 피투성이가 된 카다피의 시신을 둘러싸고 환호하는 민병대원들의 모습과 시신을 반라로 만들고 구타하는 등의 비윤리적인 행위가 담겨 있었다. 알자지라 등 언론이 이 영상을 보도하면서 국민의회의 공식 발표에 대한 의문이 커졌다.[200][201]
국제법상 전시 포로를 재판 없이 처형하는 것은 불법 행위이다. 카다피 역시 기본적 인권으로서 공정한 재판을 받을 권리가 있었다. 만약 민병대가 고의로 포로 상태의 카다피를 살해했다면 이는 전쟁범죄에 해당하며 국제 사회의 비판을 피하기 어렵다.[202] 유엔은 리비아 국민의회에 카다피 사망 경위에 대한 추가 조사와 설명을 요구했고,[203] 국제앰네스티는 "신정부는 (구 정권과 같은) 학대의 문화와 결별해야 한다"며 복수를 명분으로 한 전쟁범죄는 혁명의 정당성을 훼손할 수 있다고 경고했다.[204] NATO군 역시 자신들의 공습이 카다피 체포 및 사망의 결정적 계기가 되었을 수 있다는 보도에 대해 "(카다피가) 타고 있는지 몰랐으며, 개인을 표적으로 삼지 않았다"고 해명하며 전쟁범죄 연루 가능성을 부인했다.[197]
한편, 살해 당시 영상을 인터넷에 게시한 한 병사는 자신이 카다피를 살해했다고 주장하며, "벵가지와 미스라타 중 어디로 연행할지를 두고 논쟁이 벌어졌고, 자군 기지로 데려갈 수 없게 되자 현장에서 처형했다"고 말했다고 보도되었다.[205] 이 병사는 카다피가 붙잡힌 곳은 하수관이 아니라 도로였고 NATO군의 차량 공격은 무관하다고 주장하기도 했다.[205] 이 외에도 카다피가 소지했던 금색 권총으로 자신이 사살했다고 주장하는 소년병도 나타나는 등[206] 사망 경위를 둘러싼 혼란은 계속되었다.
카다피의 시신은 10월 22일 리비아 서부 미스라타로 옮겨져 부패를 막기 위해 한 쇼핑센터의 대형 냉장고에 보관되었다.[207] 같은 날 생존설 등을 불식시키기 위해 시신이 일반에 공개되었고, 수백 명의 시민들이 그의 마지막 모습을 보기 위해 줄을 섰다.[208]
유족들은 카다피의 고향이자 사망지인 시르테에 매장해달라고 요청했지만, 국민의회는 이를 거부하고 10월 25일 새벽, 사막의 비밀 장소에 시신을 매장했다고 발표했다. 매장 장소가 카다피 지지자들에 의해 "성지"로 추앙받는 것을 막기 위해 장소는 공개되지 않았다.[209] 카다피의 사망 소식에 환호하는 리비아 국민들의 모습은 전 세계에 보도되었으며, 이는 독재 정치의 억압적인 현실과 비극적인 종말을 다시 한번 보여주는 사건으로 기록되었다.
카다피 정권의 잔혹성을 보여주는 또 다른 사례로, 1984년 당시 30세 남성이 반체제 테러리스트 혐의로 벵가지의 농구장에서 많은 아동들을 참관시킨 관람형 재판에 회부되어 코트 안에서 교수형에 처해지는 전 과정을 촬영한 베타맥스 테이프가 휴먼 라이츠 워치 관계자에 의해 발굴되었다 (제공자는 처형된 남성의 형제였다). 이 영상은 디지털화하여 공개되었다. 이 처형은 카다피 정권 최초의 공개 처형으로 여겨지며, 영상은 리비아 국영 TV를 통해 리비아 전역에 중계되었다.
4. 정치 이념
1980년대 초 리비아는 경제적 어려움을 겪었으며, 석유 수입 감소에도 불구하고 대인공강 건설과 같은 대규모 인프라 프로젝트를 추진했다. 군사비 지출은 늘어난 반면 다른 예산은 삭감되었고, 외채가 증가하자 긴축 조치와 함께 외국인 노동자를 대규모로 추방했다. 국내적으로는 카다피에 대한 위협이 계속되었는데, 1984년 바브 알 아지지야 관저 공격 시도 후 5,000명의 반체제 인사가 체포되었으며, 1985년에는 군 내부에서 두 차례의 암살 시도가 있었다.[53] 또한 군 실력자였던 하산 이슈칼 대령이 의문의 교통사고로 사망하기도 했다.[54][55][56]
카다피는 이웃 나라 차드의 내전에 깊숙이 개입했다. FROLINAT의 친리비아 파벌인 구쿠니 우에데이 세력을 지원하며 1980년 차드를 침공하고 정치적 합병까지 제안했으나, 아프리카 연합(OAU)의 반대로 무산되었다. 이후에도 리비아는 차드 내전에 계속 개입했지만, 프랑스와의 토요타 전쟁에서 패배하며 군 사령관 칼리파 하프타르가 포로로 잡히는 등 굴욕을 겪었다.[59][60][61][62][63] 카다피는 하프타르 등 포로들의 존재를 부인했고, 이에 분노한 하프타르는 반카다피 세력에 합류하여 미국 CIA의 지원을 받게 되었다.[64] 이러한 리비아의 잦은 개입은 많은 아프리카 국가들의 반감을 샀고, 1982년 OAU는 카다피의 의장직 차지를 막기 위해 트리폴리 회의를 취소하기도 했다. 다만, 제리 로링스의 가나, 토마스 상카라의 부르키나파소 등 일부 아프리카 국가와는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했다.
카다피는 1984년 모로코 국왕 하산 2세와 우즈다 조약을 맺고 아랍-아프리카 연합을 결성하는 등 예측 불가능한 외교 행보를 보였다.[27] 이 과정에서 카다피는 폴리사리오 전선 지원 중단을 약속했고, 하산 2세는 전 RCC 위원 우마르 무하이시를 리비아로 인도했으며 그는 즉시 살해되었다.[27] 그러나 이 연합은 모로코의 친미, 친이스라엘 정책 등으로 인해 2년 만에 파기되었고, 이에 격분한 카다피는 아부 니달과 함께 하산 2세 암살을 모의하기도 했다.[65][66]
1981년 출범한 미국 로널드 레이건 행정부는 리비아를 소련의 꼭두각시 정권으로 간주하고 강경 노선을 취했다. 카다피는 소련과의 관계를 과시하며 바르샤바 조약 가입을 위협하기도 했으나, 소련 역시 예측 불가능한 카다피를 경계했다. 1981년 8월, 미국은 리비아가 영해라고 주장하는 시르테 만에서 군사 훈련을 실시했고, 이 과정에서 리비아 전투기 2대를 격추했다(1981년 시르테 만 사건). 레이건 행정부는 워싱턴 주재 리비아 대사관을 폐쇄하고 미국 기업들에게 리비아 내 미국인 주재원 감축을 권고했으며, 카다피가 카를로스를 고용해 레이건 암살을 시도했다는 의혹을 제기하기도 했다.[43] 미국은 1982년 리비아산 원유 수입 금지 조치를 내렸고, 1986년에는 모든 미국 기업의 리비아 철수를 명령했다. 1986년 봄, 미 해군은 다시 시르테 만에서 훈련을 실시했고 리비아군의 반격을 격퇴하며 리비아 함정을 격침시켰다(1986년 시르테 만 사건). 영국과의 관계 역시 1984년 런던 주재 리비아 대사관 앞에서 영국 경찰관 이본 플레처가 리비아 외교관에 의해 살해된 사건으로 인해 악화되었다.
카다피는 해외 반체제 인사들에 대한 탄압도 서슴지 않았다. 전직 CIA 요원 에드윈 P. 윌슨을 고용하여 미국에서 반카다피 활동을 하던 리비아 유학생 파이살 자갈라이의 암살을 시도했으며,[67][68][69] 1984년에는 미국에서 유학 중이던 알-사덱 하메드 알-슈웨히디를 공개적으로 처형했다.
미국은 리비아가 1986년 베를린 디스코텍 폭탄 테러를 배후 조종했다고 비난하고 보복 공격을 결정했다. CIA 내부에서는 시리아가 더 큰 위협이며 공격이 오히려 카다피의 위상을 높여줄 것이라는 비판도 있었으나, 리비아는 "쉬운 표적"으로 간주되었다. 레이건은 영국의 지지를 얻었지만 다른 유럽 동맹국들은 국제법 위반이라며 반대했다. 1986년 4월 15일, 미군은 엘도라도 캐니언 작전을 개시하여 리비아 군사 시설 등을 폭격했고, 이 과정에서 민간인을 포함해 약 100명의 리비아인이 사망했다. 카다피의 자택도 폭격 대상에 포함되었으며, 카다피는 무사했지만 그의 아들 두 명이 부상당했고, 입양한 딸 한나가 사망했다고 주장했으나 그녀의 존재 여부는 논란이 있다. 이 공습은 국제적인 비난을 받았지만, 역설적으로 카다피의 반미, 반제국주의 지도자로서의 명성을 국내외적으로 강화시키는 결과를 낳기도 했다.
이후에도 카다피는 예측 불가능한 행보를 이어갔다. 1997년에는 국제연합 제재로 비행이 금지된 상황에서도 쿠데타가 발생한 니제르를 방문하여 환영을 받았다. 2009년에는 우간다 왕족과의 불륜설을 보도한 현지 언론사를 고소하여 배상 판결을 받아냈으며, 2010년에는 종교 갈등을 겪던 나이지리아를 향해 남북 분리 발언을 하여 나이지리아 정부의 강력한 반발을 사기도 했다.
5. 평가
해외 순방 시에는 거의 예외 없이 자국 대사관 정원에 텐트를 치고 야영을 하며 그곳에서 정상 회담을 하는 등의 행동을 했다. 이는 자신이 베두인 (유목민) 출신임을 강조하기 위한 것으로 여겨진다. 또한 젊은 여성 군인들을 경호원으로 대동하고 다녔는데, 이 여성들은 서구 언론에서 "카다피 걸스"로 불렸다.[216]
1989년 9월, 베오그라드에서 열린 비동맹 국가 정상회의에 참석하여 회의장 밖에 텐트를 치고 낙타를 공수해 화제를 모았다. 이때 일본 언론과의 기자회견에서는 소비에트 연방의 페레스트로이카에 대해 "나는 지지한다. 하지만 우리는 그보다 먼저 '녹색의 책'으로 혁명을 수행했다"라고 말했으며, 레바논에서의 서구 인질 석방을 주장했다. 정상회의 연설에서는 "이스라엘을 알래스카로 옮겨 버려라"라고 발언하기도 했다. 1990년에는 국제 회의에서 "이스라엘에 미사일을 발사해야 한다"고 발언했으나, 이스라엘은 이를 "평소의 카다피 발언"이라며 무시했다.
2009년 11월 유엔 정상회의에서는 개발도상국의 빈곤 문제 해결을 촉구하는 의미의 "단식" 퍼포먼스를 무시하고, 500명의 이탈리아 미녀들을 초대한 파티를 열어 논란을 빚기도 했다. 2010년 3월 시르테에서 열린 아랍 연맹 정상회의에서는 개최국 정상임에도 불구하고 카다피에 대한 반감 등으로 인해 회원국 22개국 중 10개국 정상만이 참석했다.
2010년 6월 12일, 남아공 월드컵 기간 중 리비아 국내 연설에서 국제축구연맹(FIFA)을 "선수 인신매매를 하는 국제적인 마피아"라고 비판하며, "가난한 나라에서 선수들을 돈으로 사서 훈련시킨 후 부유한 나라에 판다"고 주장했다. 또한 가난한 소국도 월드컵 개최 권리가 있다며 FIFA가 인신매매로 번 돈으로 이들 국가의 개최를 지원해야 한다고 말했다. 리비아는 이 해 월드컵 예선에서 탈락하여 본선에 출전하지 못했다.
2011년 리비아 내전 발발 초기에는 "중화인민공화국의 천안문 사건에서는 전차에 의해 사람들이 유린당하여 중국의 통일이 유지되었다. 국가의 통일을 위해서라면 무엇이든 한다[217]"라고 말하며 반체제 세력에 대한 학살 등의 무력 탄압을 정당화했다.[218][219] 이 발언에 대해 중화인민공화국 외교부는 직접적인 비판을 피하면서도 리비아의 조속한 안정 회복을 희망한다는 입장을 밝혔다.[218] 당시 중국은 리비아 내 철도 건설 등 여러 이권을 가지고 있었으며,[220][221] 내전 발발 후 자국민 3만 명을 철수시켰다.[222]
5. 1. 긍정적 평가
1980년대 후반, 리비아는 감소하는 석유 수입에 대처하기 위해 일련의 자유화 경제 개혁을 단행했다. 1987년 5월, 카다피는 "혁명 속의 혁명"을 선포하며 산업과 농업 개혁을 시작했고, 이는 소규모 사업의 재개를 가져왔다. 혁명위원회의 활동에는 제약이 가해졌으며, 1988년 3월 신설된 대중 동원 및 혁명 지도부 부처는 혁명위원회의 폭력 및 사법적 역할을 제한하여 그 권한을 축소시켰다. 카다피 자신도 같은 해 8월 혁명위원회를 공개적으로 비판했다.1988년 3월에는 수백 명의 정치범이 석방되었다. 같은 해 6월, 리비아 정부는 '대중 시대의 인권에 관한 대녹색헌장'을 발표했다. 이 헌장은 27개 조항을 통해 리비아의 인권 상황 개선을 위한 목표, 권리, 보장을 명시했으며, 사형 제도의 사용을 제한하고 궁극적으로 폐지할 것을 촉구했다. 헌장에서 제안된 조치 중 상당수는 다음 해에 시행되었으나, 일부는 미시행 상태로 남았다. 또한 1989년에는 식민주의와 제국주의에 맞서 싸운 제3세계 인물들에게 수여하는 카다피 국제 인권상을 제정했으며, 초대 수상자는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반아파르트헤이트 운동가인 넬슨 만델라였다. 1994년부터 1997년까지는 특히 경제 부문에서 부패를 근절하기 위해 정화 위원회를 설립하여 운영했다.
1988년에는 테러 지원 중단을 선언하며 국제 사회와의 관계 개선을 시도하는 듯한 모습을 보였다. 이는 "아랍의 불량배"에서 "지중해의 신사"로 변모하려는 시도로 평가되기도 했으나, 당시 국제 사회로부터 큰 주목을 받지는 못했다.
지역 협력에도 관심을 보여, 1989년 리비아를 포함한 모리타니, 모로코, 튀니지, 알제리 5개국이 참여하는 아랍 마그레브 연합의 창설을 환영하며 이를 새로운 팬아랍주의 연합의 시작으로 간주했다.
국제 사회와의 관계 개선 노력의 일환으로, 넬슨 만델라의 중재 하에 1998년 팬암 103편 폭파 사건 용의자 2명을 네덜란드 내 스코틀랜드 법원으로 인도하는 데 합의했다. 이 결정으로 1992년부터 리비아에 부과되었던 유엔의 경제 제재가 해제되는 성과를 거두었다. 앞서 1997년 10월, 만델라는 리비아를 방문하여 아파르트헤이트 투쟁에 대한 리비아의 지원에 감사를 표하고 카다피에게 희망훈장을 수여하며 제재를 비판한 바 있다.
5. 2. 비판
카다피 정권 하에서 인권 침해와 정치적 탄압은 지속적으로 문제 제기되었다. 1988년 3월, 수백 명의 정치범이 석방되었으나, 카다피는 리비아에 더 이상 정치범이 없다고 허위 주장을 펼쳤다. 같은 해 6월 발표된 '대중 시대의 인권에 관한 대녹색헌장'은 사형제 제한 등을 명시했으나, 일부 조치는 이행되지 않았다. 1980년 5월에는 해외 망명 중인 반체제 인사들에게 귀국하지 않으면 생명을 보장할 수 없다고 협박했으며, 이후 유럽 각지에서 망명 리비아인들이 살해당하는 사건이 실제로 발생했다. 1978년 레바논의 시아파 지도자 무사 알사드르가 리비아 방문 중 실종된 사건 역시 리비아 정권의 개입 의혹이 제기되었고, 레바논 사법 당국은 2008년 카다피를 포함한 리비아인 8명에 대해 납치 교사 혐의 등으로 체포영장을 발부했다. 1993년 12월에는 망명 중이던 전 리비아 외무장관 만수르 라시드 엘-키키아가 카이로에서 납치되었고, 그의 시신은 2012년에 발견되었다.[70][71]카다피 정권은 국제 테러 조직 지원 의혹에서도 자유롭지 못했다. 리비아는 임시 아일랜드 공화군과 같은 반서방 무장세력에 대한 지원을 강화했으며, 1988년 스코틀랜드 로커비 상공에서 발생한 팬암 103편 폭파 사건과 1989년 니제르 상공에서 발생한 UTA 772편 폭파 사건에 연루되었다는 의혹을 받았다. 특히 팬암기 폭파 사건과 관련하여 영국과 미국은 리비아인 용의자 2명의 인도를 요구했으나 카다피는 이를 거부했고, 결국 유엔은 1992년 3월 결의 748호를 통해 리비아에 대한 경제 제재를 가했다. 이 제재는 리비아 경제에 막대한 손실(약 9억달러)을 입혔다. 1988년 테러 지원 중단을 선언하기도 했으나, 국제 사회의 불신은 계속되었다. 1989년 1월에는 리비아 전투기 두 대가 미국에 의해 격추되기도 했다.
내부적으로도 카다피 정권은 불안정한 상황에 직면했다. 무슬림 형제단과 리비아 이슬람 전투단 등 이슬람주의 반대 세력이 성장했으며, 카다피에 대한 여러 차례의 암살 시도가 있었다. 1996년에는 리비아 이슬람 전투단과 영국 MI6가 연루된 것으로 추정되는 암살 시도가 발생하기도 했다.[74] 1993년 10월에는 군부 내 일부 세력이 CIA 등의 지원을 받아 쿠데타를 시도했으나 실패했다.[72][73] 1995년에는 벵가지에서 이슬람주의자들의 반란이, 1996년에는 트리폴리에서 반카다피 축구 폭동이 일어나는 등 저항이 이어졌다. 또한 리비아는 1987년부터 화학무기인 겨자 가스를 생산하면서도 이를 부인했으며, 핵무기 개발도 시도했으나 실패했다.
카다피는 아랍 및 아프리카 국가들과의 관계에서도 갈등을 빚었다. 2003년 아랍 연맹 정상 회담에서는 당시 왕세자였던 사우디아라비아의 압둘라와 공개적으로 격렬한 언쟁을 벌였고, 이후 압둘라 암살을 시도했다는 의혹도 제기되었다.[85][86][87][88] 이 불화는 2009년 아랍 연맹 정상 회담에서도 재현되었으며,[93][94][95] 카다피는 사우디아라비아를 공격하기 위해 후티 반군을 지원했다는 의혹도 받았다.[97] 범아랍주의에 실망한 카다피는 20세기 말부터 범아프리카주의를 강조하며 아프리카 연합(AU) 창설에 기여했지만, 그의 급진적인 아프리카 통합 구상(아프리카 합중국)은 다른 아프리카 지도자들에게 비현실적이라는 비판을 받았다. 2008년에는 아프리카 부족 지도자들로부터 "왕중왕"으로 추대되기도 했다.

한편, 1989년에는 식민주의와 제국주의에 맞서 싸운 제3세계 인물들에게 수여하는 카다피 국제 인권상을 제정하여 첫 수상자로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넬슨 만델라를 선정하는 등 모순적인 행보를 보이기도 했다. 1996년에는 방글라데시 총리 셰이크 하시나에게 편지를 보내 아버지 셰이크 무지부르 라흐만의 암살범들의 사면을 요청하기도 했는데, 이 암살범들은 리비아와 사업 관계를 맺고 있었다.[80][81]
6. 기타
1999년, 리비아는 관계 정상화를 위해 영국 정부와 비밀 협상을 시작했다. 리비아는 중국과 북한과의 관계를 공고히 했으며, 2002년 4월 장쩌민(Jiang Zemin) 중국 주석이 리비아를 방문했다. 그러나 2006년 5월, 천수이볜(Chen Shui-bian) 타이완 총통의 트리폴리 방문으로 중국과의 관계가 악화되었다.[98][99][100]
이라크 전쟁(Iraq War)의 영향을 받아 2003년 12월, 리비아는 대량살상무기(Weapon of mass destruction) 보유를 포기하고 화학 및 핵무기 프로그램을 폐기했다. 그 결과 미국과의 관계가 개선되었다. 토니 블레어(Tony Blair) 영국 총리는 2004년 3월 카다피를 방문했고, 두 사람은 긴밀한 개인적 유대 관계를 발전시켰다. 2003년, 리비아는 록비 테러 희생자 유족들에게 미국과 영국이 남은 유엔 제재 해제 조건으로 제시한 금액인 27억달러를 지불했다. 리비아는 폭탄 테러에 대한 어떠한 역할도 계속 부인했다.[101] 2009년, 카다피는 리비아에서 활동하는 세계 에너지 기업들에게 록비 테러 희생자 유족들과의 합의금을 충당하도록 강압하려 했다.[102]
2004년, 카다피는 브뤼셀(Brussels)에 있는 유럽 연합(European Union, EU) 본부를 방문하여 리비아와 EU 간의 관계 개선을 보여주었고, EU는 리비아에 대한 제재를 해제했다. 아프리카에서 유럽으로의 불법 이민을 막기 위한 유럽의 노력에서 전략적 역할을 수행한 카다피는 2010년 10월, 아프리카 이민자들이 유럽으로 넘어오는 것을 막기 위해 EU로부터 5000만유로 이상을 받았다. 카다피는 유럽의 문화적 정체성이 새로운 "흑인 유럽"에 잠식되는 것을 막는 데 필요하다고 말하며 이 조치를 장려했다.
카다피는 또한 과거 이탈리아의 리비아 식민지 정책에 대한 배상으로 이탈리아 정부와 여러 인프라 프로젝트에 투자하는 협정을 체결했다. 실비오 베를루스코니(Silvio Berlusconi) 이탈리아 총리는 2006년 리비아에 공식 사과했고, 카다피는 그 용기에 대해 그를 "강철 인간"이라고 불렀다. 2008년 8월, 카다피와 베를루스코니는 벵가지(Benghazi)에서 역사적인 협력 조약에 서명했다.[103][104] 이 조약에 따라 이탈리아는 과거 군사 점령에 대한 보상으로 리비아에 50억달러를 지불하고, 리비아는 해안에서 발생하는 불법 이민을 막고 이탈리아 기업에 대한 투자를 늘리는 조치를 취하기로 했다.[104][105]
미국이 2006년 리비아를 테러 지원국 목록에서 제외한 후, 카다피는 여전히 서구에 대한 반대 발언을 계속했다. 시리아에서 열린 2008년 아랍 연맹 정상회의(2008 Arab League summit)에서 그는 동료 아랍 지도자들에게 사담 후세인(Saddam Hussein)처럼 미국에 의해 전복되고 처형될 수 있다고 경고했다.[106][107] 2009년 9월 베네수엘라에서 열린 제2차 아프리카-남미 정상회의(Second Africa-South America Summit)에서 그는 나토(NATO)에 대항할 아프리카와 라틴 아메리카 전역의 군사 동맹을 촉구했다.[108] 같은 달 그는 뉴욕시를 방문하여 2009년 9월 23일 처음으로 유엔 총회(United Nations General Assembly) 연설에서 "서구의 침략"을 비난했으며, 할당된 15분 대신 90분 이상 연설했다.[109]
2010년 봄, 카다피는 스위스 경찰이 그의 가족 구성원 두 명을 스위스 내에서 범죄 혐의로 기소한 후 스위스에 대해 지하드(jihad)를 선포하여 양국 관계가 깨졌다.
카다피는 2007년 프랑스 대통령 선거에서 니콜라 사르코지(Nicolas Sarkozy)에게 자금을 지원한 것으로 알려졌다.[110][111][112][113] 그는 또한 2000년부터 오스트리아 극우 정치인 요르크 하이더(Jörg Haider)에게 자금을 지원했다.[114][115][116]
6. 1. 빈 라덴과 알카에다와의 관계
2001년, 카다피는 공개적으로 알카에다(al-Qaeda)의 미국 9.11 테러(September 11 attacks)를 규탄하고 희생자들에게 애도를 표했으며, 무장 이슬람주의에 대한 미국 주도의 테러와의 전쟁(War on Terror)에 리비아가 참여할 것을 촉구했다. 그의 정부는 국내 이슬람주의를 계속 억압하는 한편, 카다피는 샤리아(sharia) 법의 광범위한 적용을 주장하기도 했다.7. 저서
- 그린북 (1975) - 한국어판 제목: 《그린 북 - 리비아 혁명의 정치철학》
참조
[1]
뉴스
Muammar Gaddafi: How He Died
https://www.bbc.co.u[...]
BBC News
2011-10-31
[2]
블로그
Tuesday, 23 August 2011 – 16:19
http://blogs.aljazee[...]
Al Jazeera
2011-08-23
[3]
웹사이트
After Much Wrangling, General Assembly Seats National Transitional Council of Libya as Country's Representative for Sixty-Sixth Session
https://www.un.org/p[...]
United Nations
2011-09-16
[4]
서적
Encyclopedia of Arabic Language and Linguistics
Brill
[5]
웹사이트
How are you supposed to spell Muammar Gaddafi/Khadafy/Qadhafi?
https://www.straight[...]
[6]
웹사이트
How Many Different Ways Can You Spell 'Gaddafi'
https://web.archive.[...]
ABC News
2009-09-22
[7]
뉴스
Saif Gaddafi on How to Spell His Last Name
http://www.thedailyb[...]
2011-03-01
[8]
웹사이트
Rebel Discovers Qaddafi Passport, Real Spelling of Leader's Name
https://www.theatlan[...]
2011-08-24
[9]
웹사이트
How Do You Spell Gaddafi's Name?
https://web.archive.[...]
2011-02-25
[10]
웹사이트
Google Books Ngram Viewer
https://books.google[...]
[11]
웹사이트
The Prosecutor v. Muammar Mohammed Abu Minyar Gaddafi, Saif al-Islam al-Gaddafi and Abdullah al-Senussi
http://www.icc-cpi.i[...]
International Criminal Court
2011-11-11
[12]
잡지
LIBYA: Family Troubles
https://content.time[...]
1955-07-04
[13]
웹사이트
Qaddafi – The Man and His Rise to Power – Association for Diplomatic Studies & Training
https://adst.org/201[...]
[14]
서적
Political Development and Social Change in Libya
Lexington Books
[15]
웹사이트
Qaddafi collaborator Khuwaildi Al-Hamidi dies of heart attack
https://www.libyaher[...]
2015-07-27
[16]
웹사이트
Reuters Archive Licensing
https://reuters.scre[...]
[17]
뉴스
Gaddafi-Opfer Al-Senussi: "Gott entscheidet, was mit dir passiert"
https://www.spiegel.[...]
2011-03-13
[18]
웹사이트
Arm us to save us: Libyan ex-prisoner appeals - Univision Wires
http://wires.univisi[...]
2012-03-23
[19]
뉴스
COUNCIL IN LIBYA FORMS A CABINET
https://www.nytimes.[...]
1972-07-17
[20]
뉴스
New Cabinet Meets
https://www.nytimes.[...]
1972-07-18
[21]
서적
International Law Reports
Cambridge University Press
[22]
뉴스
The Riddle of Armand Hammer
https://www.nytimes.[...]
1981-11-29
[23]
뉴스
Occidental-Libya Exploration Pact Set
https://www.nytimes.[...]
1974-02-08
[24]
서적
Assassination in Khartoum
https://books.google[...]
Indiana University Press
[25]
뉴스
Five Draw Long Sentences for Terrorism Scheme
https://www.nytimes.[...]
1987-12-31
[26]
웹사이트
Refworld {{!}} Libya: The role of Omar al-Meheshi in Colonel Qaddafi's revolution; his activities in the 1975 coup attempt and in developing opposition movements in Morocco and Egypt (1969 - present)
https://www.refworld[...]
United Nations High Commissioner for Refugees
[27]
웹사이트
Fighter Against Qaddafi Betrayed
https://www.cia.gov/[...]
1985-11-13
[28]
웹사이트
Libya - Exiled Opposition
http://www.country-d[...]
[29]
웹사이트
Foreign Relations of the United States, 1969–1976, Volume E–9, Part 1, Documents on North Africa, 1973–1976 - Office of the Historian
https://history.stat[...]
[30]
웹사이트
Cancer kills top Qaddafi aide ten days before trial verdict
https://www.libyaher[...]
2015-07-17
[31]
웹사이트
اكتشف 10 معلومات عن اللواء مصطفى الخروبي
https://www.afrigate[...]
[32]
웹사이트
Libya's Revolution Revisited
https://merip.org/19[...]
1986-11-04
[33]
웹사이트
في كتابه الجديد.. محمد عبد الهادى علام يكشف بالوثائق تفاصيل جديدة ومثيرة حول اغتيال بويصير والكيخيا (1-2)
https://gate.ahram.o[...]
[34]
웹사이트
For Amal, life (re)begins at 75
https://www.arabnews[...]
2011-10-19
[35]
뉴스
A stadium called Gaddafi
http://www.indianexp[...]
2011-02-25
[36]
웹사이트
The iconic Gaddafi Stadium Sports thenews.com.pk
https://www.thenews.[...]
2020-10-04
[37]
웹사이트
Gaddafi's Mental Follies and Megalomania
https://www.israelde[...]
2016-03-09
[38]
서적
Cold War Jet Combat: Air-to-Air Jet Fighter Operations 1950–1972
https://books.google[...]
Pen and Sword
[39]
뉴스
Gaddafi is gone, long live Libya
https://www.thenews.[...]
2011-08-26
[40]
웹사이트
Colonel Gaddafi pressurises General Zia-ul-Haq to supply Libya with nuclear weapon
https://www.indiatod[...]
2013-11-13
[41]
서적
Red Horizons: Chronicles of a Communist Spy Chief
Regnery Gateway
[42]
뉴스
Ion Mihai Pacepa, Romanian spy and star defector who revealed the sordid reality of the Ceausescus and their regime – obituary
https://www.telegrap[...]
2021-02-25
[43]
웹사이트
What ever happened to the Libyan hit squad? - UPI Archives
https://www.upi.com/[...]
[44]
웹사이트
"No One Is Safe": Hunting the Libyan Hit Squads of the 1980s
https://www.insideho[...]
[45]
뉴스
CAIRO FAKES PICTURES AND FOILS LIBYAN DEATH PLOT
https://www.nytimes.[...]
1984-11-18
[46]
간행물
Libya: The Doublecross and the Hit Hoax
https://content.time[...]
1984-12-03
[47]
뉴스
Relationship With CIA Aide Gave Credibility to Arms Seller
https://www.washingt[...]
1981-09-10
[48]
간행물
Italy's Darkest Night
http://fly.historicw[...]
2012-06-27
[49]
웹사이트
The Mystery of Flight 870
https://www.theguard[...]
2006-07-21
[50]
간행물
The Profile of Intelligence: Libyans
Congress Publications
[51]
뉴스
Gaddafi is gone, long live Libya
http://www.thenews.c[...]
2011-08-26
[52]
웹사이트
Pakistan - Libya Relations
http://www.p2prelati[...]
Peoples' Relation
2011-07-26
[53]
뉴스
LIBYAN MILITARY TERMED RESTIVE UNDER QADDAFI
https://www.nytimes.[...]
1986-01-14
[54]
뉴스
Libya Seen Weighing Government Changes
https://www.washingt[...]
1986-04-27
[55]
웹사이트
Qaddafi aide Khalifa Hunaysh dies from cancer in hospital in Munich.
https://www.libyaher[...]
2012-03-19
[56]
웹사이트
Food Scarce, Shops Shuttered : Libya Today Far Cry From Kadafi's Utopian Vision
https://www.latimes.[...]
1986-01-17
[57]
서적
Nimeiry face aux crises tchadiennes
[58]
서적
Le FROLINAT à l'épreuve du pouvoir
[59]
뉴스
Habre Policy in Chad: Name Ex-Foes to Key Posts
https://query.nytime[...]
1987-08-18
[60]
뉴스
Mitterrand meets Qaddafi even as some say Libya still in Chad
https://www.csmonito[...]
[61]
뉴스
Chad said to win vast Libyan booty
https://www.nytimes.[...]
1987-04-01
[62]
서적
A Study of Crisis
[63]
뉴스
Is General Khalifa Hifter The CIA's Man in Libya?
http://www.businessi[...]
2014-04-22
[64]
간행물
The Unravelling: Libya's New Strongman
http://www.newyorker[...]
2015-02-23
[65]
웹사이트
Morocco-Libya: Gaddafi Plotted to Assassinate Hassan II, CIA Reveals – The North Africa Post
https://northafricap[...]
[66]
웹사이트
1987, when Muammar Gaddafi was planning to assassinate King Hassan II
https://en.yabiladi.[...]
[67]
웹사이트
Uncover the mystery of a notorious Fort Collins shooting
https://www.colorado[...]
[68]
뉴스
DEFENDANT DESCRIBES SHOOTING OF LIBYAN
https://www.nytimes.[...]
1981-11-26
[69]
뉴스
It's 2 Convictions, 32 Years, And More Trials for Wilson
https://www.washingt[...]
1983-03-14
[70]
뉴스
LIBYAN DISSIDENT MISSING IN CAIRO, FEARED ABDUCTED
https://www.washingt[...]
1993-12-14
[71]
뉴스
Prominent Gaddafi opponent buried after 19 years
https://www.abc.net.[...]
2023-03-05
[72]
서적
Libya: Background and U. S. Relations
https://books.google[...]
DIANE
2023-02-03
[73]
서적
Country Reports on Human Rights
https://books.google[...]
2023-02-03
[74]
웹사이트
http://news.bbc.co.u[...]
[75]
뉴스
In Chad, Talk of a Libyan Resurgence
https://www.nytimes.[...]
2023-02-08
[76]
웹사이트
Why the World Won't Criticize Chad
https://foreignpolic[...]
2021-04-14
[77]
뉴스
REBELS IN CONTROL OF CHAD'S CAPITAL
https://www.nytimes.[...]
2021-04-20
[78]
서적
Dictionary of African Biography
https://books.google[...]
OUP USA
2020-10-18
[79]
뉴스
Despair As Visit Banned By Gaddafi
1995-11-05
[80]
웹사이트
Gaddafi And The Killers Of Sheikh Mujibur Rahman – Analysis
https://www.eurasiar[...]
2023-02-06
[81]
웹사이트
Gaddafi and the assassins
https://www.thedaily[...]
2023-02-06
[82]
뉴스
LIBYA'S GADHAFI SAYS HIS FUTURE IS AFRICAN
https://www.washingt[...]
2023-02-13
[83]
뉴스
Gaddafi says Africans must reject conditional aid
https://www.reuters.[...]
2021-03-13
[84]
웹사이트
Muammar Gaddafi Apologized for the Cruel Treatment of Africans During the Arab Slave Trade {{!}} The African Exponent.
https://www.africane[...]
2020-12-21
[85]
뉴스
An Arab House, Openly Divided
https://www.washingt[...]
2023-02-04
[86]
뉴스
Libya 'plotted to kill' Saudi Crown Prince
https://www.irishtim[...]
2023-02-04
[87]
웹사이트
Qatar plotted to assassinate King Abdullah: Saudi Media Advisor
https://www.egypttod[...]
2023-02-04
[88]
뉴스
'UAE ruler's friend' ran Libyan plot to kill Saudi crown prince
https://www.middleea[...]
2023-02-04
[89]
뉴스
Two Said to Tell Of Libyan Plot Against Saudi
https://www.nytimes.[...]
2023-02-04
[90]
웹사이트
Former Qatari Emir conspired with Qaddafi against Saudi Arabia
https://english.alar[...]
2023-02-04
[91]
웹사이트
Libya's Gaddafi sought to replace Saudi Arabia's ruling family
https://www.theafric[...]
2023-02-04
[92]
웹사이트
Gaddafi, extremist preacher discuss overthrowing Saudi, Kuwaiti governments: Audio
https://english.alar[...]
2023-02-04
[93]
웹사이트
Muammar Gaddafi accuses Saudi Arabia's King Abdullah of lying at Arab summit
https://www.telegrap[...]
2009-03-30
[94]
웹사이트
Libya's Gaddafi hurls insults at Saudi king
https://www.smh.com.[...]
2023-02-04
[95]
웹사이트
Libyan, Saudi leaders walk out of Arab Summit after a spat
https://gulfnews.com[...]
2009-03-30
[96]
웹사이트
Libyan, Saudi leaders 'make up' at Doha meeting
https://www.france24[...]
2023-02-04
[97]
웹사이트
Mana'a and al-Ahmar received money from Gaddafi to shake security of KSA, Yemen
http://www.yobserver[...]
2021-03-02
[98]
웹사이트
China blasts Libya over Taiwan president's visit
https://mg.co.za/art[...]
2023-02-03
[99]
웹사이트
China's African mischief
https://www.aljazeer[...]
2023-02-03
[100]
뉴스
Taiwan's Chen stops over in Libya
http://news.bbc.co.u[...]
2023-02-03
[101]
서적
The Europa World Year: Kazakhstan – Zimbabwe, Volume 2
Routledge
[102]
뉴스
Shady Dealings Helped Qaddafi Build Fortune and Regime
https://www.nytimes.[...]
2023-03-05
[103]
웹사이트
Ratifica ed esecuzione del Trattato di amicizia, partenariato e cooperazione tra la Repubblica italiana e la Grande Giamahiria araba libica popolare socialista, fatto a Bengasi il 30 August 2008
http://www.senato.it[...]
Parliament of Italy
2009-06-10
[104]
뉴스
Gaddafi to Rome for Historic Visit
http://www.ansa.it/s[...]
ANSA
2009-06-10
[105]
뉴스
Italia-Libia, firmato l'accordo
http://www.repubblic[...]
2009-06-10
[106]
웹사이트
Qaddafi Warns Chuckling Arab Leaders in 2008 That Their End Is Near
https://www.theatlan[...]
2023-02-04
[107]
웹사이트
Gaddafi condemns Arab leaders
https://www.aljazeer[...]
2023-02-04
[108]
웹사이트
Gaddafi Proposed the Creation of a South Atlantic Military Alliance
http://en.mercopress[...]
2017-07-13
[109]
뉴스
Libyan Leader Delivers a Scolding in U.N. Debut
https://www.nytimes.[...]
2009-09-23
[110]
뉴스
French police hold ex-president Sarkozy over 'Gaddafi funding'
https://www.bbc.com/[...]
2018-03-20
[111]
웹사이트
Sarkozy funding scandal: what does it all mean?
https://www.euronews[...]
2018-03-20
[112]
웹사이트
Gaddafi relations haunt Sarkozy in 2007 campaign financing case
https://www.france24[...]
2018-03-20
[113]
웹사이트
Gaddafi funded 'mentally deficient' Sarkozy, interview claims
https://www.france24[...]
2014-01-28
[114]
웹사이트
Ties That Bind Kadafi and Neo-Fascists
https://www.latimes.[...]
2000-08-13
[115]
웹사이트
Austria investigates Haider links
https://www.aljazeer[...]
[116]
웹사이트
Gaddafi backs 'friend' Haider
https://www.telegrap[...]
2000-06-16
[117]
웹사이트
Libya
https://www.g-fras.o[...]
[118]
웹사이트
Libya oil eyed by Western companies
https://money.cnn.co[...]
[119]
웹사이트
Ten Reasons Libya Under Gaddafi Was a Great Place to Live
https://www.africane[...]
[120]
뉴스
Gaddafi issues warning to EU over African trade
https://www.reuters.[...]
2010-11-29
[121]
뉴스
Gaddafi's Youngest Son Killed in NATO Airstrike; Russia Condemns Attack
https://www.washingt[...]
2011-04-30
[122]
뉴스
Amnesty Questions Claim That Gaddafi Ordered Rape as Weapon of War
https://www.independ[...]
2011-06-24
[123]
뉴스
West Prepares to Hand Rebels Gaddafi's Billions
https://www.independ[...]
2011-07-16
[124]
웹사이트
Arab League Gives Its Full Backing to Libya's Rebel Council
http://www.taipeitim[...]
2011-08-26
[125]
웹사이트
Negotiations over Bani Walid
https://www.aljazeer[...]
[126]
뉴스
Hunted: A first-hand account of Gaddafi's desperate last days
https://www.washingt[...]
[127]
웹사이트
Gaddafi taunts NATO in new broadcast
https://www.france24[...]
2011-09-20
[128]
뉴스
Gaddafi broadcasts are "sacred right" - TV chief
https://www.reuters.[...]
2011-09-16
[129]
웹사이트
Middle-east Arab News Opinion
https://eng-archive.[...]
[130]
뉴스
Libya conflict: Anti-Gaddafi fighters take Sabha
https://www.bbc.com/[...]
2011-09-22
[131]
뉴스
In His Last Days, Qaddafi Wearied of Fugitive's Life
https://www.nytimes.[...]
2011-10-22
[132]
웹사이트
Libya, Gaddafi's latest message: "Tonight I will die a martyr, be proud of me"
https://www.agenzian[...]
2021-10-21
[133]
뉴스
Muammar Gaddafi: How He Died
https://www.bbc.co.u[...]
BBC News
2011-10-22
[134]
웹사이트
Gaddafi's Emotional Farewell Message to His Family Before He was Killed
https://www.africane[...]
[135]
웹사이트
Listen to Gaddafi's last audio recording addressed to his family hours before he was killed
https://face2faceafr[...]
2018-10-22
[136]
뉴스
Gaddafi: 'He died an angry and disappointed man'
https://www.bbc.com/[...]
2011-10-30
[137]
웹사이트
Qaddafi's Frantic Last Days Get Reexamined
https://www.theatlan[...]
2011-10-31
[138]
뉴스
GlobalPost: Qaddafi Apparently Sodomized After Capture
https://www.cbsnews.[...]
CBS
2011-10-24
[139]
뉴스
Gadafy's Killers Will Be Tried, Claims NTC
https://www.irishtim[...]
2011-10-28
[140]
간행물
Why Putin Is Right to Fear for His Life
https://time.com/628[...]
2023-05-18
[141]
뉴스
Report: Libyan Militias Executed Dozens, Possibly Including Gadhafi
http://news.blogs.cn[...]
CNN
2012-10-17
[142]
뉴스
Muammar Gaddafi 'Buried in Desert Grave at Dawn'
https://www.bbc.co.u[...]
BBC News
2011-10-21
[143]
뉴스
What Did Qaddafi's Green Book Really Say?
https://www.nytimes.[...]
The New York Times
2011-05-27
[144]
서적
My Vision
John Blake
2005
[145]
뉴스
The One-State Solution
https://www.nytimes.[...]
The New York Times
2009-01-22
[146]
뉴스
Europe Should Convert to Islam: Gaddafi
http://timesofindia.[...]
The Times of India
2010-08-31
[147]
웹사이트
Moammar Gadhafi Won't Stay in Bedford Tent After All
https://abcnews.go.c[...]
ABC
2009-09-23
[148]
뉴스
Qaddafi Cancels Plans to Stay in New Jersey
https://www.nytimes.[...]
The New York Times
2009-08-29
[149]
뉴스
When in Rome, Gaddafi Will Do as the Bedouins
https://www.smh.com.[...]
The Sydney Morning Herald
2009-06-11
[150]
뉴스
Gaddafi 'Raped' His Female Bodyguards
https://www.timesofm[...]
The Times
2011-08-28
[151]
뉴스
Book Review: Gaddafi's Harem, By Annick Cojean, Trans. Marjolijn de Jager
https://www.independ[...]
The Independent
2013-10-25
[152]
웹사이트
Muammar Gaddafi's sexual crimes
https://www.salon.co[...]
Salon
2013-09-22
[153]
뉴스
Gaddafi formed special department to find prostitutes
https://www.business[...]
Business Standard India
2013-09-24
[154]
뉴스
Gadhafi's Ukrainian Nurse Talks About Life with 'Daddy'
http://edition.cnn.c[...]
CNN
2011-09-04
[155]
웹사이트
Libya's First Lady Owns 20 Tons of Gold: Reports
http://www.alarabiya[...]
Al Arabiya News
2011-03-06
[156]
웹사이트
The Gaddafi Family Tree
https://www.bbc.co.u[...]
BBC News
2011-10-20
[157]
뉴스
Gaddafi cousin arrested in Egypt
https://www.bbc.com/[...]
BBC News
2013-03-19
[158]
뉴스
Gadhafi's Final Weeks, As Told By A Top Security Official
https://www.npr.org/[...]
NPR
2011-10-25
[159]
뉴스
Qaddafi's Authority Said to Be Weakening
https://www.washingt[...]
The Washington Post
1984-04-29
[160]
뉴스
Gaddafi's inner circle
https://www.washingt[...]
The Washington Post
[161]
뉴스
Obama: Gadhafi Regime Is 'No More'
http://content.usato[...]
USA Today
2011-10-20
[162]
뉴스
Many in Sub-Saharan Africa Mourn Qaddafi's Death
https://www.nytimes.[...]
The New York Times
2011-10-22
[163]
뉴스
On the First Anniversary of Qaddafi's death – Is Libya Better off a Year On?
http://www.libyahera[...]
Libya Herald
2012-10-20
[164]
뉴스
GNC Officially Renames Libya the 'State of Libya' – Until the New Constitution
https://www.libyaher[...]
Libya Herald
2013-01-09
[165]
뉴스
Hijacking Ends Peacefully After Libyan Airliner Lands in Malta
https://www.nytimes.[...]
The New York Times
2016-12-23
[166]
웹사이트
In Saif Hands: Gaddafi's Son to Run for Libya President
https://www.alaraby.[...]
The New Arab
2018-03-19
[167]
기타
[168]
웹사이트
カダフィ大佐死因は「頭部の銃撃」 検視の医師
https://www.nikkei.c[...]
日本経済新聞
2011-10-23
[169]
기타
[170]
기타
[171]
웹사이트
Gaddafi? Qaddafi? Kaddafi? Let's call the whole things off! - newsling
http://newsling.word[...]
[172]
기타
[173]
기타
[174]
기타
[175]
기타
[176]
웹사이트
http://www.kfc.co.jp[...]
[177]
웹사이트
Libyan Army - UNIFORM INSIGNIA
http://www.uniformin[...]
[178]
뉴스
カダフィ大佐 なぜ大佐?
http://osaka.yomiuri[...]
2009-07-10
[179]
뉴스
2009年9月の朝日新聞「特派員コラム」
2009-09
[180]
서적
The Art of Uprising: The Libyan Revolution in Graffiti
Lulu.com
2011
[181]
서적
Libya: History and Revolution
ABC-CLIO
2014
[182]
웹사이트
https://www.mofa.go.[...]
[183]
간행물
Libya Has Trouble Building the Most Deadly Weapons
The Risk Report
1995-12
[184]
뉴스
Libyan Arms Designs Traced Back to China
https://www.washingt[...]
2004-02-15
[185]
뉴스
2008-11-01
[186]
뉴스
ブッシュ米大統領、カダフィ大佐と初めて電話会談 有力後継者、訪米へ
2008-11-18
[187]
뉴스
ラクイラ・サミット:固めの握手 カダフィ大佐と米大統領
http://www.mainichi.[...]
2009-07-10
[188]
뉴스
リビア革命40周年式典 西側首脳は欠席
http://www.news24.jp[...]
2009-09-02
[189]
뉴스
リビアで革命40周年記念式典、西側首脳は欠席
https://jp.reuters.c[...]
2009-09-02
[190]
뉴스
カダフィ氏、国連総会で大荒れ…憲章投げ捨てる
http://www.yomiuri.c[...]
2009-09-24
[191]
뉴스
リビア暫定首相「民主国家を建設」…国連で演説
https://web.archive.[...]
2011-09-25
[192]
뉴스
カダフィ大佐らに逮捕状=デモ弾圧、市民殺害の疑い―国際刑事裁
2011-06-27
[193]
뉴스
カダフィ大佐を国際手配 ICPO、身柄拘束要請
https://www.nikkei.c[...]
2011-09-09
[194]
뉴스
ICC検察官、カダフィ大佐の国際手配強化をICPOに要請
https://jp.reuters.c[...]
2011-09-09
[195]
웹사이트
U.S. Drone Involved in Final Qaddafi Strike, as Obama Heralds Regime's 'End'
https://www.foxnews.[...]
FOXニュース
2011-10-20
[196]
웹사이트
カダフィは誰に殺された? 暗殺再現アニメ
https://www.gizmodo.[...]
GIZMODO
2011-10-21
[197]
뉴스
リビア:カダフィ大佐死亡 NATO、作戦終了へ 「貢献格差」明らか
https://web.archive.[...]
2011-10-22
[198]
뉴스
【カダフィ大佐死亡】 国民評議会副議長が確認 リビア全土解放を宣言へ
https://web.archive.[...]
2011-10-21
[199]
뉴스
リビア:カダフィ大佐 故郷のシルトで最後を迎える
https://web.archive.[...]
2011-10-21
[200]
뉴스
「大佐は銃撃戦で死亡」反カダフィ派が表明映像と食い違い、議論も
2011-10-21
[201]
뉴스
カダフィ大佐拘束後、銃撃戦で死亡か「連行中、殺害」情報も
2011-10-21
[202]
뉴스
再送:カダフィ大佐の死因は調査必要、「即時処刑は違法」=国連
https://jp.reuters.c[...]
2011-10-22
[203]
뉴스
国連、カダフィ大佐の死因解明を要請
[204]
뉴스
カダフィ大佐死亡:移送途中に銃殺の可能性強まる
[205]
뉴스
「カダフィを射殺」と名乗り=街頭で遭遇、2発撃ち込む-兵士
[206]
뉴스
カダフィ氏は少年が殺害 金色の銃でと英紙報道
http://www.47news.jp[...]
2011-10-22
[207]
뉴스
カダフィ大佐の遺体、事実上公開 店の冷蔵室に
http://www.nikkei.co[...]
2011-10-22
[208]
뉴스
カダフィ大佐の遺体公開=遺族は故郷埋葬を要求-リビア
http://www.jiji.com/[...]
[209]
뉴스
リビア:カダフィ大佐遺体を埋葬 砂漠の秘密の場所
http://mainichi.jp/s[...]
[210]
서적
Libya: Qadhafi's Revolution and the Modern State
Westview Press
1986
[211]
서적
Seeking Gaddafi: Libya, the West and the Arab Spring
Biteback
[212]
서적
Libya: From Colony to Revolution
Oneworld
[213]
뉴스
サルコジ仏元大統領、汚職疑惑で訴追 リビア大佐から選挙資金調達か
https://www.afpbb.co[...]
フランス通信社
2018-03-22
[214]
Youtube
https://m.youtube.co[...]
[215]
Twitter
https://mobile.twitt[...]
[216]
뉴스
カダフィ・ガールズ 写真特集
http://www.jiji.com/[...]
2011-04-10
[217]
뉴스
Qaddafi's Most Bizarre Moments in a Bizarre Speech
https://www.theatlan[...]
2011-02-22
[218]
뉴스
中国、カダフィ大佐の「天安門」発言に困惑
2011-02-24
[219]
뉴스
【リビア騒乱】腹心の公安相が辞任し反乱を呼びかけ 内戦の様相
http://sankei.jp.msn[...]
2011-02-23
[220]
뉴스
中国鉄建、リビアで受注した3件の鉄道工事、全面停止
https://www.excite.c[...]
2011-03-08
[221]
뉴스
<中華経済>中国鉄建がリビアの幹線鉄道建設受注
https://www.recordch[...]
2008-02-18
[222]
뉴스
海洋安全保障雑感~米国東海岸便り(No.7)
https://www.mod.go.j[...]
海上自衛隊幹部学校
2017-11-28
[223]
뉴스
カダフィ政権への中国の武器売却疑惑、リビア暫定政府が調査
https://www.afpbb.co[...]
2011-09-06
[224]
웹사이트
マライア・キャリー、カダフィ家族のためにプライベートコンサート
https://eiga.com/new[...]
[225]
뉴스
カダフィ氏「回転ベッド」愛用し、階段を35段以上上れない
https://www.news-pos[...]
小学館 NEWSポストセブン
2011-05-23
[226]
뉴스
カダフィの息子が役員に 伊の強豪ユベントス
https://web.archive.[...]
47NEWS
2002-08-27
[227]
웹사이트
とあるリビア人選手のサッカー人生
http://qoly.jp/index[...]
Qoly
[228]
뉴스
リビア 租税回避地使い核取引 130億円送金
https://mainichi.jp/[...]
2016-05-23
[229]
웹사이트
The Gaddafi family – its key members
http://www.guardian.[...]
ガーディアン
2011-08-30
[230]
뉴스
カダフィ大佐の次男拘束、正式な確認はなかった=IOC
https://jp.reuters.c[...]
ロイター
2011-08-23
[231]
뉴스
カダフィ氏次男のセイフ・イスラム氏を拘束
https://web.archive.[...]
2011-11-19
[232]
뉴스
カダフィ大佐の息子、恩赦で釈放 リビア
https://www.cnn.co.j[...]
2017-06-12
[233]
뉴스
Gaddafi's son Saif 'to run for Libyan president' in 2018 elections
https://www.telegrap[...]
2018-03-20
[234]
뉴스
リビア「国民会議」を延期=戦闘激化、政治解決困難に
https://www.jiji.com[...]
2019-04-10
[235]
뉴스
カダフィ一族まで海外逃亡の動き 長女、五男の妻が脱出図り、拒否
http://sankei.jp.msn[...]
2011-02-24
[236]
웹사이트
Libya: the battle for control of Sirte
http://www.telegraph[...]
デイリー・テレグラフ
2011-08-25
[237]
뉴스
カダフィ大佐四男も処刑か=拘束後の生存映像-シリアTV
http://www.excite.co[...]
時事通信社
2011-10-24
[238]
뉴스
カダフィ大佐娘の親善大使解任 国連開発計画
http://www.asahi.com[...]
2011-02-24
[239]
뉴스
카다피는 누구
http://news.hankooki[...]
한국일보
2011-02-21
[240]
뉴스
카다피 누구인가… 무혈 쿠데타로 집권, 42년 ‘피의 통치’
http://news.kukinews[...]
국민일보
2011-10-20
[241]
뉴스
미국-리비아 역사적 회담...'적대' 청산 협력관계로
http://www.ytn.co.kr[...]
YTN
2008-09-06
[242]
뉴스
伊, 리비아 식민지배 사과 65년만에… 25년간 50억달러 보상키로
http://news.khan.co.[...]
경향신문
2008-08-31
[243]
뉴스
카다피, UN총회서 96분 연설…동시통역사 기진맥진해 교체
http://news.kukinews[...]
국민일보
2009-09-24
[244]
웹인용
빈 라덴-카다피 '기막힌 악연'
http://search.ytn.co[...]
본 사이트는 AI가 위키백과와 뉴스 기사,정부 간행물,학술 논문등을 바탕으로 정보를 가공하여 제공하는 백과사전형 서비스입니다.
모든 문서는 AI에 의해 자동 생성되며, CC BY-SA 4.0 라이선스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위키백과나 뉴스 기사 자체에 오류, 부정확한 정보, 또는 가짜 뉴스가 포함될 수 있으며, AI는 이러한 내용을 완벽하게 걸러내지 못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제공되는 정보에 일부 오류나 편향이 있을 수 있으므로, 중요한 정보는 반드시 다른 출처를 통해 교차 검증하시기 바랍니다.
문의하기 : help@durumi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