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포레토 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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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카포레토 전투는 제1차 세계 대전 중 이탈리아 전선에서 독일군이 오스트리아-헝가리군을 지원하여 벌어진 전투이다. 1917년 10월 24일 시작된 이 전투에서 독일군은 새로운 침투 전술을 사용하여 이탈리아군의 방어선을 돌파했다. 이탈리아군은 무능한 지휘와 정보 부족으로 인해 막대한 피해를 입고 후퇴했으며, 이는 이탈리아 군사 역사상 최악의 패배로 기록되었다. 전투 후, 이탈리아는 지휘부를 교체하고, 군사 전략을 수정하여 재건에 힘썼다. 카포레토 전투는 문학 작품과 군사 전술에 영향을 미쳤으며, "카포레토"라는 단어는 이탈리아에서 패배를 의미하는 용어로 사용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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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포레토 전투 - [전쟁]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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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치 정보 | |
기본 정보 | |
분쟁 명칭 | 카포레토 전투 |
다른 명칭 | 12차 이손초 전투 |
일부 | 이탈리아 전선, 제1차 세계 대전 |
날짜 | 1917년 10월 24일 – 1917년 11월 19일 |
장소 | 코바리드,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현재 슬로베니아) |
결과 | 중앙 동맹국의 승리 |
영토 변화 | 중앙 동맹국, 피아베 강까지 150km 진격 |
교전 세력 | |
교전국 1 | 이탈리아 왕국 |
교전국 2 |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독일 제국 |
지휘관 | |
지휘관 1 | 루이지 카도르나 루이지 카펠로 아르만도 디아츠 |
지휘관 2 | 아르투어 아르츠 폰 슈트라우센부르크 오토 폰 벨로 스베토자르 보로예비치 오스카르 폰 후티어 |
병력 | |
병력 1 | 257,400명 1,342개 포병대 41개 사단 |
병력 2 | 353,000명 2,518개 포병대 35개 사단 |
사상자 및 손실 | |
사상자 1 | 사망 13,000명 부상 30,000명 포로 265,000 – 275,000명 낙오 300,000명 탈영병 50,000명 포 3,152문 박격포 1,712문 기관총 3,000정 소총 300,000정 |
사상자 2 | 70,000명 또는 20,000명 사망 및 부상 |
기타 | 600,000명의 국내 실향민 발생 |
관련 전투 | |
기타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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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배경
카포레토 전투는 독일군이 이탈리아 전선에서 오스트리아-헝가리군을 본격적으로 원조한 최초의 전투였다. 루이지 카도르나의 이손초 강(소차 강) 유역 전선을 통한 돌파 정책 고수는 많은 이탈리아군의 희생을 불러왔지만, 이 작전이 성공하면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전선과 전쟁 수행 능력이 급격히 저하될 위험이 있었다. 제11차 이손초 전투로 인해 이손초강(소차강) 유역의 고리지아 함락이 임박한 상황에서, 독일의 파울 폰 힌덴부르크와 에리히 루덴도르프 장군은 오스트리아군 아르츠 폰 슈트라우스베르크의 통합작전 제의를 수락한다.
1917년 시점의 오스트리아-헝가리군은 막대한 손실을 입었고, 사상자와 포로를 합쳐 무려 150만 명에 달했다. 제국 내 민족 갈등 또한 날로 심화되었고, 독일계와 헝가리계를 제외한 병사들 사이에서는 전쟁 혐오가 만연했다. 독일군 참모본부는 다가오는 제12차 이송조 전투에서 오스트리아-헝가리군이 더 이상 전선 돌파를 저지하기 어렵다고 판단했다. 오스트리아-헝가리군의 전선 붕괴는 독일군에게도 위기적인 상황을 초래할 것이 명백했다. 상황의 심각성을 인지한 독일 제국은 여러 차례 회피해 왔던 원군 파병을 결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공격 계획은 처음에 오스트리아 측에서 제안되었고, 반이시차 고지(Bainsizza Plateau) 북쪽, 톨민(Tolmin)에서의 공세가 예정되었다. 이탈리아 측 톨민 부근의 방어는 허술했지만, 산악 지형이었기에 대규모 병력 집중이 어렵다고 판단되었다. 독일군은 산악전에 정통한 콘라트 크라프트 폰 델멘징겐(Konrad Krafft von Dellmensingen) 장군을 현지에 파견하여 작전 계획의 가능성을 타진했다. 델멘징겐 장군은 "어려움은 많지만 톨민 돌파는 가능하다"는 보고를 올렸고, 독일군은 침투 전술을 활용하여 오스트리아-헝가리군을 지원하기로 결정했다.
독일-오스트리아 연합군은 독일군 6개 사단과 오스트리아군 9개 사단으로 제14군을 편성하여 주력으로 삼았다. 그 좌익에는 오스트리아 제3군과 제4군으로 구성된 보레비츠 군집단이 전개되었고, 이송조-톨민 일대에 37개 사단이 배치되었다. 한편, 이탈리아군은 독일 제14군 정면에 이탈리아 제3군을 배치했고, 이송조-톨민 일대에는 47개 사단이 배치되었다.
== 이탈리아군의 전략적 오판 ==
1917년 봄과 여름 내내 이탈리아는 이송조 지역에서 오스트리아-헝가리군에 대해 여러 차례 공세를 펼쳤다.[4] 제11차 이손초 전투에서 이탈리아가 승리한 후, 카를 황제는 빌헬름 2세 황제에게 편지를 쓰고 독일군을 이탈리아에 배치해 줄 것을 요청했다.[4] 1917년 8월 파울 폰 힌덴부르크와 아르투르 아르츠 폰 슈트라우센부르크는 동부 전선에서 이송조 지역으로 군대를 파병하기로 결정했다.[4] 에리히 루덴도르프는 이에 반대했지만 묵살되었다.[4]
독일과 오스트리아-헝가리의 전투 계획은 오토 폰 벨로의 독일 사단이 콘라트 크라프트의 안내를 받아 베네치아 돌출부의 북동쪽 모서리 근처에 있는 줄리안 알프스의 일부를 공격하는 것이었다.[6] 한편 스베토자르의 오스트리아-헝가리군은 돌출부의 동쪽 끝과 아드리아 해안 근처의 일부 지역을 공격할 것이었다.[6]
이 지역에 독일과 오스트리아-헝가리 군대가 증강되고 있다는 사실은 이탈리아 정찰 비행으로 알려졌다.[6] 이탈리아군 총사령관 루이지 카도르나는 독일군의 개입 가능성을 경고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방어 강화 대신 공세 준비를 명령했다. 당시 이탈리아군 사령부는 정보를 경시하는 경향이 있었고, 카포레토 일대의 배치 병력은 부족한 상태였다. 더욱이 이탈리아는 무심코 무선으로 기상 정보를 제공함으로써 적을 도왔다.[7]
== 독일군의 참전과 새로운 전술 ==
1917년 봄과 여름, 이탈리아는 이송조 지역에서 오스트리아-헝가리군에 대해 여러 차례 공세를 펼쳤고, 제11차 이손초 전투에서 가장 큰 승리를 거두었다.[4] 그러나 이탈리아군과 오스트리아-헝가리군 모두 지쳐있어 카를 황제는 빌헬름 2세에게 지원을 요청했다.[4]
1917년 8월, 파울 폰 힌덴부르크와 아르투르 아르츠 폰 슈트라우센부르크는 동부 전선에서 병력을 이동시켜 이탈리아 전선에 투입하기로 결정했다.[4] 에리히 루덴도르프는 반대했지만 묵살되었다.[4] 9월에는 황실 참모본부의 화학자 오토 한이 이끄는 전문가들이 독가스 공격에 적합한 장소를 찾기 위해 이송조 전선을 방문했다.[5] 그들은 베네치아 평원으로 이어지는 카포레토 지역을 공격 지점으로 제안했다.[5] 또한, 독일은 산악전 전문가 콘라트 크라프트 폰 델멘징겐 중장을 파견하여 지형을 정찰하게 했다.[6]
스베토자르 보로예비치가 지휘하는 오스트리아-헝가리군은 공세에 대비하고 있었고, 9개의 오스트리아 사단과 6~8개의 독일 사단으로 구성된 새로운 제14군이 편성되어 독일군 오토 폰 벨로가 지휘했다.[6] 독일 사단은 루덴도르프의 일반 예비대였으며,[6] 그의 전략 고문인 게오르크 베첼 중령은 이탈리아 전선의 약점을 공격할 것을 조언했다.[6]
독일과 오스트리아-헝가리의 전투 계획은 오토 폰 벨로의 독일 사단이 콘라트 크라프트의 안내를 받아 줄리안 알프스의 일부를 공격하고, 스베토자르의 오스트리아-헝가리군은 돌출부의 동쪽 끝과 아드리아 해안 근처를 공격하는 것이었다.[6]
== 에르빈 롬멜의 참전 ==
훗날 제2차 세계 대전에서 명성을 떨친 에르빈 롬멜도 이 전투에 소대장으로 참전하여 큰 전과를 올렸다.[4][5][6][7]
2. 1. 이탈리아군의 전략적 오판
1917년 봄과 여름 내내 이탈리아는 이송조 지역에서 오스트리아-헝가리군에 대해 여러 차례 공세를 펼쳤다.[4] 제11차 이송조 전투에서 이탈리아가 승리한 후, 카를 황제는 빌헬름 2세 황제에게 편지를 쓰고 독일군을 이탈리아에 배치해 줄 것을 요청했다.[4] 1917년 8월 파울 폰 힌덴부르크와 아르투르 아르츠 폰 슈트라우센부르크는 동부 전선에서 이송조 지역으로 군대를 파병하기로 결정했다.[4] 에리히 루덴도르프는 이에 반대했지만 묵살되었다.[4]독일과 오스트리아-헝가리의 전투 계획은 오토 폰 벨로의 독일 사단이 콘라트 크라프트의 안내를 받아 베네치아 돌출부의 북동쪽 모서리 근처에 있는 줄리안 알프스의 일부를 공격하는 것이었다.[6] 한편 스베토자르의 오스트리아-헝가리군은 돌출부의 동쪽 끝과 아드리아 해안 근처의 일부 지역을 공격할 것이었다.[6]
이 지역에 독일과 오스트리아-헝가리 군대가 증강되고 있다는 사실은 이탈리아 정찰 비행으로 알려졌다.[6] 이탈리아군 총사령관 루이지 카도르나는 독일군의 개입 가능성을 경고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방어 강화 대신 공세 준비를 명령했다. 이탈리아는 무심코 무선으로 기상 정보를 제공함으로써 적을 도왔다.[7]
2. 2. 독일군의 참전과 새로운 전술
1917년 봄과 여름, 이탈리아는 이송조 지역에서 오스트리아-헝가리군에 대해 여러 차례 공세를 펼쳤고, 제11차 이송조 전투에서 가장 큰 승리를 거두었다.[4] 그러나 이탈리아군과 오스트리아-헝가리군 모두 지쳐있어 카를 황제는 빌헬름 2세에게 지원을 요청했다.[4]1917년 8월, 파울 폰 힌덴부르크와 아르투르 아르츠 폰 슈트라우센부르크는 동부 전선에서 병력을 이동시켜 이탈리아 전선에 투입하기로 결정했다.[4] 에리히 루덴도르프는 반대했지만 묵살되었다.[4] 9월에는 황실 참모본부의 화학자 오토 한이 이끄는 전문가들이 독가스 공격에 적합한 장소를 찾기 위해 이송조 전선을 방문했다.[5] 그들은 베네치아 평원으로 이어지는 카포레토 지역을 공격 지점으로 제안했다.[5] 또한, 독일은 산악전 전문가 콘라트 크라프트 폰 델멘징겐 중장을 파견하여 지형을 정찰하게 했다.[6]
스베토자르 보로예비치가 지휘하는 오스트리아-헝가리군은 공세에 대비하고 있었고, 9개의 오스트리아 사단과 6~8개의 독일 사단으로 구성된 새로운 제14군이 편성되어 독일군 오토 폰 벨로가 지휘했다.[6] 독일 사단은 루덴도르프의 일반 예비대였으며,[6] 그의 전략 고문인 게오르크 베첼 중령은 이탈리아 전선의 약점을 공격할 것을 조언했다.[6] 이탈리아는 무선으로 기상 정보를 제공하여 독일군에게 도움을 주었다.[7]
독일과 오스트리아-헝가리의 전투 계획은 오토 폰 벨로의 독일 사단이 콘라트 크라프트의 안내를 받아 줄리안 알프스의 일부를 공격하고, 스베토자르의 오스트리아-헝가리군은 돌출부의 동쪽 끝과 아드리아 해안 근처를 공격하는 것이었다.[6] 이탈리아는 정찰 비행으로 독일과 오스트리아-헝가리 군대의 증강을 인지하고 있었다.[6]
당시 오스트리아-헝가리군은 막대한 손실을 입었고, 제국 내 민족 갈등이 심화되어 병사들의 사기가 저하된 상태였다. 독일군 참모본부는 제12차 이송조 전투에서 오스트리아-헝가리군이 더 이상 전선 돌파를 저지하기 어렵다고 판단하여 원군 파병을 결정했다.
공격 계획은 처음에 오스트리아 측에서 제안되었고, 반이시차 고지 북쪽, 톨민에서의 공세가 예정되었다. 그러나 톨민 부근의 이탈리아군 방어는 허술했지만, 산악 지형이라 대규모 병력 집중이 어렵다고 판단되었다. 델멘징겐 장군은 "어려움은 많지만 톨민 돌파는 가능하다"는 보고를 올렸고, 독일군은 침투 전술을 활용하여 오스트리아-헝가리군을 지원하기로 결정했다.
독일-오스트리아 연합군은 독일군 6개 사단과 오스트리아군 9개 사단으로 제14군을 편성하고, 그 좌익에 오스트리아 제3군과 제4군으로 구성된 보레비츠 군집단을 배치했다. 이탈리아군은 독일 제14군 정면에 이탈리아 제3군을 배치했지만, 카포레토 일대의 배치 병력은 부족했다.
2. 3. 에르빈 롬멜의 참전
훗날 제2차 세계 대전에서 명성을 떨친 에르빈 롬멜도 이 전투에 소대장으로 참전하여 큰 전과를 올렸다.[4][5][6][7]3. 전투
1917년 10월 24일, 악천후와 오스트리아-헝가리 군의 준비 부족으로 연기되었던 공격이 시작되었다. 바람이 없었고 전선은 안개가 자욱했다.[8] 오전 2시, 보베츠/플레조 근처에서 리븐스 발사기와 유사한 894개의 금속 관(독일어: Gaswurfminen)이 역경사면에 매설되어 동시에 전기적으로 작동, 600ml의 염소-비소제와 디포스겐을 발사하여 이탈리아군 참호를 독가스 구름으로 뒤덮었다.[9] 이탈리아군 방독면은 2시간 이하로만 보호할 수 있었기에, 500~600명이 사망했다.[9] 다른 지역은 일반 수류탄의 독가스로 폭격을 받았다. 6시까지 전선은 조용했고, 이탈리아군 철조망과 참호는 박격포 사격을 받았다.
6시 41분, 2,200문의 포가 발포하여, 많은 포탄이 예비군 이동로를 겨냥했다. 8시에 고지대 요새 아래에서 두 개의 대형 지뢰가 폭발했고 보병이 공격했다.[10][11] 곧 이들은 계곡의 거의 방어되지 않은 이탈리아군 요새에 침투하여 제4군과 제27군 사이에 있는 이탈리아 제2군의 방어선을 돌파했다. 알프스군은 인접 능선, 마타주르와 콜로브라트의 요새와 포대에 침투하여 전화선을 설치, 포병과 연락을 유지했다.[25] 특수 훈련을 받은 돌격대 부대가 MG 08/15 막심 경기관총, 경량 참호 박격포, 산악포, 화염방사기, 수류탄을 사용하여 공격을 주도했다.[12]
계곡의 공격자들은 이탈리아로 이어지는 도로를 거의 방해받지 않고 행군했으며, 일부는 첫날에 25km를 진격했다. 이탈리아군은 중앙 부대가 공격한 지역 양쪽에서 공격자를 물리쳤지만, 폰 벨로의 성공적인 중앙 돌파는 이탈리아군 전체를 혼란에 빠뜨렸다. 폰 벨로의 돌파를 막기 위해 병력을 이동해야 했지만, 이는 전선의 다른 지점을 약화시켰다. 이탈리아군의 전체 방어선이 위협받았다.
이탈리아 제2군 사령관 루이지 카펠로는 고열로 병상에 누워 있었다. 카펠로는 부대가 패배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탈리아멘토 강으로 후퇴할 허가를 요청했지만, 루이지 카도르나는 이탈리아군이 버틸 수 있다고 믿고 거부했다. 1917년 10월 30일, 카도르나는 이탈리아군 대부분의 후퇴를 탈리아멘토 강 건너편으로 명령했다. 이탈리아군은 강을 건너는 데 나흘이 걸렸고, 독일군과 오스트리아-헝가리군은 그들을 추격하며 포주올로 전투와 같은 매복을 했다. 11월 2일, 에밀 레들 대위의 제4보스니아 보병연대 제4대대의 공격[13] 후, 오스트리아-헝가리군 제55보병사단[14]이 탈리아멘토 강에 교두보를 확보했다. 하지만 공격의 신속한 성공은 보급선 한계로 이어졌다. 독일군과 오스트리아-헝가리군은 추가 공격을 할 수 없었다. 카도르나는 더 후퇴하여 11월 10일까지 피아베 강[8]과 그라파 산에 방어선을 구축했다.
전투 전에도 독일은 식량과 보급에 어려움을 겪었다. 에르빈 롬멜은 "영양 부족 군대"에 대한 요구에 대해 불평했다.[15] 독일 제국에 대한 연합국 봉쇄는 식량 부족과 영양실조를 초래했다. 부적절한 보급과 카포레토 전투 이전의 고된 행군은 독일군과 오스트리아-헝가리군에 큰 타격을 입혔다. 공격이 피아베 강에 도달했을 때 중앙 열강 군인들은 보급품이 부족했고 탈진 상태였다.[15] 이탈리아군이 압력에 맞서기 시작하자 독일군은 추진력을 잃고 소모전에 휘말렸다.
3. 1. 이탈리아군의 붕괴
1917년 10월 24일 오전 2시, 리븐스 발사기와 유사한 894개의 금속 관(독일어: Gaswurfminen)을 통해 발사된 600ml의 염소-비소제와 디포스겐이 이탈리아군 참호를 덮치면서 500~600명의 이탈리아군이 사망했다.[9] 이탈리아군은 2시간 이하로만 보호 가능한 방독면을 보유하고 있었기 때문에 독가스 공격에 취약했다.[9][35] 6시 41분에는 2,200문의 포가 발포되었고, 8시에는 두 개의 대형 지뢰가 폭발한 후 보병이 공격을 개시했다.[10][11]
독일군과 오스트리아-헝가리군은 MG 08/15 막심 경기관총, 경량 참호 박격포, 산악포, 화염방사기, 수류탄으로 무장한 돌격대를 앞세워 이탈리아 제2군의 방어선을 돌파했다.[12][25] 특히, 계곡을 따라 진격한 독일군은 첫날에만 25km를 전진하는 큰 성과를 거두었다.[34]
이탈리아 제2군 사령관 루이지 카펠로는 병상에 있었고, 루이지 카도르나는 초기에 탈리아멘토 강으로의 후퇴 요청을 거부했다.[35] 카도르나는 침투 전술의 위력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일부 부대의 돌파는 시간을 들여 막아낼 수 있다고 판단했다. 10월 30일이 되어서야 카도르나는 이탈리아군 대부분에게 탈리아멘토 강 건너편으로 후퇴를 명령했지만, 이미 너무 늦은 결정이었다. 이탈리아군은 강을 건너는 데 4일이 걸렸고, 그동안 독일군과 오스트리아-헝가리군은 이들을 추격하며 매복 공격(포주올로 전투)을 가했다.[13] 11월 2일, 오스트리아-헝가리군 제55보병사단[14]은 탈리아멘토 강에 교두보를 확보하는 데 성공했다.
하지만, 독일군과 오스트리아-헝가리군의 보급선은 한계에 도달했고, 독일 제국에 대한 연합국 봉쇄로 인해 식량 부족과 영양실조 문제가 심각했다.[15] 에르빈 롬멜은 전투에서의 공로로 푸르 르 메리트 훈장을 받았지만, "영양 부족 군대"에 대한 불만을 표출하기도 했다.[15] 결국 이탈리아군이 피아베 강[8]과 그라파 산에 새로운 방어선을 구축하면서, 독일군은 더 이상 진격하지 못하고 다시 소모전에 돌입하게 되었다.
3. 2. 카도르나의 늑장 대응과 이탈리아군의 후퇴
루이지 카도르나는 탈리아멘토 강으로 후퇴하자는 루이지 카펠로의 요청을 거부했다.[10][11] 카도르나는 이탈리아군이 재편성하여 버틸 수 있다고 믿었다.[10][11] 그러나 카도르나는 침투 전술의 의미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고, 일부 부대가 돌파당한 것은 시간을 들여 밀어내면 된다고 안일하게 생각했다.1917년 10월 24일 오전 2시, 독일군은 짙은 안개 속에서 기습 공격을 개시했고, 맹렬한 포격과 연막, 독가스 살포로 이탈리아군 진지를 혼란에 빠뜨렸다.[33][34] 이탈리아군은 구식 방독면만을 지급받은 상태였고, 효과적인 반격을 하지 못했다.[35] 특히 집중적인 포격을 받은 이탈리아 제2군의 방어선은 무너졌고, 독일군 돌격대는 수류탄과 화염방사기를 활용하여 벙커와 토치카를 파괴했다.[34] 독일군은 종일까지 25km 후방까지 돌파했다.
이탈리아군은 핵심 주력인 오스트리아-헝가리군을 격퇴했지만, 독일군 돌파 부대에 대한 대처는 어려웠다. 카도르나는 후방 예비 전력 배치를 소홀히 했고, 오스트리아-헝가리군을 밀어낸 전선에서 병력을 철수시켜 독일군 돌파를 막으려 했지만, 이는 전선 병력 부족을 심화시키는 결과를 초래했다.
카도르나가 상황의 심각성을 깨닫고 전군에 이손초 강 후방으로의 후퇴를 명령한 것은 10월 30일이었다.[10][11] 하지만 이미 너무 늦어 전선 곳곳이 돌파되었고, 많은 부대가 섬멸되었다. 이탈리아군은 탈리아멘토 강을 건너 후퇴하는 데 4일이 걸렸고, 그 동안 독일군과 오스트리아-헝가리군은 추격을 계속하며 포주올로 전투와 같은 매복 공격을 감행했다.[13] 11월 2일에는 오스트리아-헝가리군이 탈리아멘토 강에 교두보를 확보했다.[13][14]
결국 카도르나는 더 후퇴하여 11월 10일까지 피아베 강과 그라파 산에 방어선을 구축했다.[8]
4. 전투의 여파
브라이언 R. 설리반은 카포레토 전투를 "이탈리아 군사 역사상 최대의 패배"라고 칭했다.[16] 존 R. 슈인들러는 "어떤 기준으로 보더라도, 제12차 이존초 전투(카포레토 전투)와 그 여파는 이탈리아 군대에 전례 없는 재앙을 의미했다"라고 썼다.[17] 이 재앙은 "충격으로 다가왔고", "속죄양 찾기를 촉발했으며", 1919년 이탈리아 군사위원회가 이 참사의 원인을 조사하는 것으로 절정에 달했다.[18][19][20] 라팔로에서는 연합군의 군사 협력을 개선하고 공동 전략을 개발하기 위해 최고전쟁평의회가 설립되었다.[24] 루이지 카도르나 원수는 패배 후 사임을 강요당했는데, 이는 수상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오를란도에 따르면 결정적인 계기였다. 카도르나는 참모진의 다른 장군들과 관계가 좋지 않은 것으로 알려져 있었고, 전투가 시작될 무렵에는 217명의 장군, 255명의 대령, 355명의 대대장을 해임했다.[21][22]
게다가 그는 너무 가혹하다는 이유로 병사들에게 혐오받았다.[23] 카도르나는 전선에서 약 30km 뒤에서 전투를 지휘했고, 파두아까지 160km 후퇴했다. 카도르나는 아르만도 디아스와 피에트로 바돌리오로 교체되었는데,[6] 바돌리오는 전투 초기에 독일군에 의해 쉽게 압도된 군단 중 하나를 지휘했지만, 위원회 청문회에서 모든 혐의에서 벗어났다. 이탈리아 선전 부서가 설립되어 병사들에게 토지와 사회 정의를 약속했다. 이탈리아는 이 시점부터 더 신중한 군사 전략을 받아들였다. 디아스는 침략과 패배로 인해 자극받은 국가적 쇄신을 이용하면서 파괴된 병력을 재건하는 데 노력을 집중했다.
퇴각 명령 후 4일을 보내 가까스로 타리아멘토 강에 도착했을 때 독일군은 이미 강 앞까지 추격해 와 있었다. 11월 2일, 타리아멘토 강에 교두보가 건설되었지만, 독일-오스트리아군은 공세 한계점에 도달하여 진군을 멈추었다.[33] 이후 피아베 강을 따라 건설된 방어진지가 양군의 전선이 되었다.[33] 독일-오스트리아군은 이탈리아군의 반격으로 2만 명의 사상자를 냈지만, 이탈리아군은 3만 1천 명의 사상자라는 고통을 감수해야 했다. 게다가 후퇴에 늦은 전체 병력의 4분의 1에 해당하는 27만 5천 명의 병사가 포로가 되었고, 살아남은 부대에서도 군 사령부에 대한 격렬한 불신과 적의로 인해 향후 복종을 거부하고 이탈하는 자들이 끊이지 않았다. 후임 사령관이 된 아르만도 디아스 장군은 책임 소재를 명확히 할 것을 병사들에게 약속하고, 군 사령부를 믿도록 끈기 있게 호소하며 이탈자들의 전열 복귀에 힘썼다.
독일군은 후에 군 사령관이 되는 에르빈 롬멜이 회고했듯이, 여유 없는 상황에서 파견된 원군은 물자 부족에 시달렸다.[36] 독일 해군의 해상봉쇄 돌파 실패는 전쟁이 장기화됨에 따라 심각한 식량 부족을 초래했고, 병사들의 체력과 사기는 저하되고 있었다. 그 속에서 얻은 승리는 큰 의미를 가졌지만, 동시에 피아베 강에서 이탈리아군이 체제를 재정비할 귀중한 시간을 제공하는 결과가 되었다.[36] 이탈리아군이 체제를 재정비하자 재차 돌파는 어려워졌고, 독일군 도착 이전과 같은 소모전으로 회귀했다.
이탈리아군이 입은 피해는 막대하여, 인적 손실뿐 아니라 대포, 기관총, 박격포도 다수를 잃었다. 병사들은 카돌나(Cadorna) 장군의 엄격하고 유연성 없는 지휘 아래 사기가 저하되었으며[37], 군에서 이탈하는 병사들도 심각한 상황이었다. 롬멜(Rommel)이 이끄는 부대는 1500명의 병사들을 무장 해제시키는 데 성공했다.[35] 카돌나 장군과 보셀리 총리가 해임되고, 새로운 아르만도 디아즈(Armando Diaz) 장군과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오를란도(Vittorio Emanuele Orlando) 총리가 국가 지도를 맡았다.
오를란도 총리는 연합군으로부터 일시적인 원군을 얻는 동시에, 더 중요한 전략 자원의 제공을 받는 데 성공했다. 디아즈 장군은 이탈한 병사들의 복귀를 촉구하면서, 남은 부대를 재편성하여 피아베 강에 강력한 방어선을 구축했다. 원정 온 영국군과 프랑스군은 피아베 강에서 버틸 가능성을 부정하고 더 후방인 민키오 강으로 이동했기 때문에, 피아베 강 방어는 전적으로 이탈리아군 잔여 병력에 달려 있었다. 이 제1차 피아베 강 전투에서 이탈리아군은 설욕을 하고, 독일-오스트리아군의 전진을 막았다. 디아즈 장군에 의해 재건된 이탈리아군은 보급과 지휘 체계를 크게 개선하면서 오스트리아-헝가리군의 단독 대공세를 제2차 피아베 강 전투에서 물리치고, 서부 전선과 마찬가지로 연합군의 승기를 완전히 빼앗았다. 이윽고 오스트리아-헝가리군의 사기가 저하되자 비토리오 베네토 전투를 벌여, 4일간의 저항을 꺾고 오스트리아-헝가리군을 붕괴시켜, 빌라 지우스트 휴전 협정을 체결하고 오스트리아-헝가리군은 항복했다.
전투 후, 연합국은 종래의 각국별 전쟁 지휘를 개편하고, 이탈리아의 라팔로(Rapallo)에서 통일된 전쟁 계획을 결정하는 가 열렸고,[38] 이후 베르사유(Versailles)에서 정기적으로 개최하기로 했다.[30]
4. 1. 이탈리아군의 막대한 피해
이탈리아군의 손실은 막대했다. 1만 3천 명이 사망하고 3만 명이 부상했으며 26만 5천 명에서 27만 5천 명이 포로로 잡혔다.[26][6] 코바리드 전투 후 이탈리아군 포로들은
4. 2. 카도르나 해임과 연합군의 지원
브라이언 R. 설리반은 카포레토 전투를 "이탈리아 군사 역사상 최대의 패배"라고 칭했다.[16] 이 재앙은 이탈리아에 큰 충격을 주었고, 1919년 이탈리아 군사위원회가 참사 원인을 조사하는 결과로 이어졌다.[18][19][20] 루이지 카도르나 원수는 패배의 책임을 지고 해임되었는데,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오를란도 총리에 따르면 이는 결정적인 계기였다. 카도르나는 참모진의 다른 장군들과 관계가 좋지 않은 것으로 알려져 있었으며, 전투가 시작될 무렵에는 217명의 장군, 255명의 대령, 355명의 대대장을 해임했다.[21][22] 게다가 그는 병사들에게 너무 가혹하다는 이유로 혐오받았다.[23] 카도르나는 아르만도 디아스와 피에트로 바돌리오로 교체되었다.[6]카돌나(Cadorna) 장군의 엄격하고 유연성 없는 지휘 아래 이탈리아 병사들의 사기는 저하되었으며[37], 군에서 이탈하는 병사들도 심각한 상황이었다. 카돌나는 많은 책임을 지고 강제로 예편당했다. 그의 실패는 단순히 제12차 이손초 전투의 패배뿐만 아니라 이손초 전선 전체 지휘에서 비합리적인 지휘를 반복했기 때문이다. 카돌나는 병사들뿐 아니라 자신의 참모와 지휘관들과도 불신으로 가득 찬 관계로 알려져 있었다.[39] 자신이 마음에 들지 않는 인물들을 잇달아 해임하여 지휘 체계를 혼란에 빠뜨렸고, 무려 장군 217명, 장교 255명, 사관 355명을 독단적으로 해임했다.[40] 심지어 750명이나 되는 장병을 처형하는 잔혹 행위까지 저질렀으며, 엄격한 규율주의자라는 별명답게 유연성이 부족하고 극단적인 통제적 태도는 오히려 군 내부의 결속을 잃게 만들었다.[41]
카포레토 전투 이후, 영국과 프랑스는 이탈리아에 증원군을 파병했다. 이들은 6개의 프랑스 보병 사단과 5개의 영국 보병 사단, 그리고 상당한 규모의 공군 부대를 지원했다. 그러나 이들 부대는 민초 강에 배치되었기 때문에, 진격하는 독일군과 오스트리아-헝가리군을 저지하는 데는 아무런 역할도 하지 못했다. 피아베 강은 이탈리아가 새로운 방어선을 구축할 수 있는 천연 장벽 역할을 했다.
오를란도 총리는 연합군으로부터 일시적인 원군을 얻는 동시에, 더 중요한 전략 자원의 제공을 받는 데 성공했다. 아르만도 디아즈(Armando Diaz) 장군은 이탈한 병사들의 복귀를 촉구하면서, 남은 부대를 재편성하여 피아베 강에 강력한 방어선을 구축했다. 원정 온 영국군과 프랑스군은 피아베 강에서 버틸 가능성을 부정하고 더 후방인 민키오 강으로 이동했기 때문에, 피아베 강 방어는 전적으로 이탈리아군 잔여 병력에 달려 있었다.
전투 후, 연합국은 라팔로에서 회의를 열어 최고 전쟁 평의회를 구성했다.[38] 이후 베르사유(Versailles)에서 정기적으로 개최하기로 했다.[30]
이탈리아군 사령부는 "근대전에서는 적의 위협만으로는 사기를 유지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군 내부에 선전을 담당하는 선전국이 설치되었고, 사회 정의의 실현 등을 병사들에게 약속했다. 또한 군사 전략은 보다 신중해졌고 소모전을 피하게 되었으며, 카포레토 전투 이후 사상자는 대전 중 총 사상자 65만 명 중 5분의 1 수준으로 줄었다.
이 전투 이후 이탈리아어에서 "카포레토"라는 단어는 패배를 의미하는 속어가 되었다. 예를 들어 베니토 무솔리니는 1922년 사회주의자들의 실패한 총파업에 대해 "이탈리아 사회주의에 대한 카포레토"라고 언급했다.[39]
4. 3. 이탈리아 국내의 변화
카포레토 전투는 이탈리아 군사 역사상 최대의 패배로 기록되었으며, 이탈리아 사회에 큰 충격을 가져왔다.[16][17] 이 재앙은 속죄양 찾기로 이어졌고, 1919년 이탈리아 군사위원회가 참사의 원인을 조사하는 결과로 나타났다.[18][19][20]패배 후 루이지 카도르나 원수는 사임했으며,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오를란도 총리는 그를 대신할 인물로 아르만도 디아즈(Armando Diaz)를 임명했다.[6][21] 카도르나는 참모진의 다른 장군들과 관계가 좋지 않았고, 전투 시작 전 많은 장군, 대령, 대대장을 해임한 상태였다.[21][22] 또한, 병사들에게 가혹하다는 이유로 혐오를 받았다.[23]
전투 초기 독일군에 압도되었던 피에트로 바돌리오는 위원회 청문회에서 모든 혐의를 벗었다.[6] 정부는 이탈리아 선전 부서를 설립하여 병사들에게 토지와 사회 정의를 약속하며 민심을 수습하고, 보다 신중한 군사 전략을 채택했다. 디아스는 파괴된 병력을 재건하는 데 집중했다.[37]
라팔로(Rapallo)에서는 연합군의 군사 협력을 개선하고 공동 전략을 개발하기 위해 최고전쟁평의회가 설립되었다.[24][38]
5. 역사적 의의와 영향
카포레토 전투는 이탈리아 군사 역사상 최악의 패배 중 하나로 기록된다.[29] 이 전투는 이탈리아 사회 전반에 큰 영향을 미쳤으며, "카포레토"라는 용어는 끔찍한 패배를 상징하는 단어로 사용되었다.[29] 1922년 실패한 1922년 이탈리아 총파업을 무솔리니는 "이탈리아 사회주의의 카포레토"라고 칭하기도 했다.[29]
이 전투로 인해 루이지 카도르나 장군과 파올로 보셀리 총리가 해임되고, 아르만도 디아즈 장군과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오를란도 총리가 새롭게 이탈리아를 이끌게 되었다. 디아즈 장군은 병사들의 복귀를 촉구하고 군을 재편하여 피아베 강에 방어선을 구축, 제1차 피아베 강 전투에서 독일-오스트리아군의 공세를 저지하는 데 성공했다. 이후 이탈리아군은 제2차 피아베 강 전투에서 오스트리아-헝가리군의 단독 공세를 막아내고, 비토리오 베네토 전투에서 승리하여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을 붕괴시켰다.
제1차 세계 대전 이후 1917년 12월, 이탈리아의 자선 단체인 이탈리아 전투 참전용사 국가협회(Opera Nazionale Combattenti)가 설립되어 참전 용사들을 지원했다.[28] 이 단체는 1977년에 문을 닫았다.[28]
전투 후, 연합국은 라팔로(Rapallo)에서 회의를 열어 통일된 전쟁 계획을 결정하는 최고 전쟁 회의를 창설했고,[38] 이후 베르사유(Versailles)에서 정기적으로 회의를 개최했다.[30]
카포레토 전투는 문학과 예술 작품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 어니스트 헤밍웨이의 소설 《무기여 잘 있거라》는 이 전투를 배경으로 하고 있으며, 쿠르치오 말라파르테는 《카포레토 만세(Viva Caporetto)》에서 이 전투에 대한 통렬한 비판을 담았다. 제2차 세계 대전의 명장 중 한 명인 에르빈 롬멜은 이 전투에 소대장으로 참전하여 1500명의 포로를 잡는 전과를 올리기도 했다.[35] 또한, 독일의 후티어 전술은 이탈리아 전선에서 창안되어 훗날 전격전 전술의 기본이 되었다. 오늘날 코바리드 마을에는 이존초 전투와 카포레토 전투를 기리는 박물관이 있다.
5. 1. 군사 전술의 변화
5. 2. 문학 작품에서의 묘사
어네스트 헤밍웨이의 소설 《무기여 잘 있거라》는 카포레토 전투를 배경으로 하여 전쟁의 참혹함과 허무함을 묘사하고 있다. 이 전투는 쿠르치오 말라파르테가 1921년에 출판한 그의 첫 번째 책 ''카포레토 만세''에서 통렬하게 비판받았으며, 이 책은 검열과 탄압을 받다가 1980년에 출판되었다. 또한, 알레산드로 바리코의 소설 ''이 이야기''에도 이 전투가 중요하게 다루어지고 있다. 영국의 작가이자 군사 역사가인 사이릴 폴스는 ''카포레토 전투''라는 책을 통해 전투에 대한 작전적, 전술적 설명을 담고 있다. 에르빈 롬멜의 회고록이자 군사 교본인 보병 공격은 "돌격대" 전술에 대한 통찰력을 제공한다. 스웨덴 작가 F.J. 노르드스테트는 ''카포레토''라는 소설에서 이 전투에 대해 썼다.오늘날 코바리드 마을에는 이존초 전투 전반과 특히 카포레토 전투를 기리는 박물관이 있다.
5. 3. "카포레토"라는 용어의 사용
전투 이후 "카포레토"는 이탈리아에서 끔찍한 패배를 의미하는 용어로 사용되었다.[29] 무솔리니는 1922년 실패한 1922년 이탈리아 총파업을 "이탈리아 사회주의의 카포레토"라고 불렀다.[29] 전쟁 후 여러 해 동안 카포레토는 여전히 자유주의 국가의 신뢰성을 훼손하는 데 사용되었다.[21]카포레토 전투는 여러 책의 주제가 되었다. 영국의 작가이자 군사 역사가인 사이릴 폴스(Cyril Falls)의 단행본인 ''카포레토 전투(The Battle of Caporetto)''는 전투에 대한 작전적, 전술적 설명을 담고 있다. 에르빈 롬멜(Erwin Rommel)이 중위 시절의 경험을 바탕으로 쓴 보병 공격(Infantry Attacks)은 "돌격대(stormtrooper)" 전술에 대한 통찰력을 제공한다. 스웨덴 작가 F.J. 노르드스테트(F.J. Nordstedt) (필명 크리스티안 브로우)는 소설 ''카포레토(Caporetto)''에서 이 전투에 대해 썼다. 어니스트 헤밍웨이(Ernest Hemingway)의 소설 ''무기여 잘 있거라(A Farewell to Arms)''에는 카포레토의 피비린내 나는 여파가 생생하게 묘사되어 있다. 쿠르치오 말라파르테(Curzio Malaparte)는 ''카포레토 만세(Viva Caporetto)''에서 이 전투에 대한 통렬한 비판을 썼으며, 이 책은 검열과 억압을 거쳐 1980년에 출판되었다. 알레산드로 바리코(Alessandro Baricco)의 소설 ''이 이야기(Questa storia)''에도 이 전투가 두드러지게 등장한다.
오늘날 코바리드 마을에는 이존초 전투와 카포레토 전투를 기리는 박물관이 있다.
6. 평가
브라이언 R. 설리반은 카포레토 전투를 "이탈리아 군사 역사상 최대의 패배"라고 불렀다.[16] 존 R. 슈인들러는 "어떤 기준으로 보더라도, 제12차 이존초 전투(카포레토 전투)와 그 여파는 이탈리아 군대에 전례 없는 재앙을 의미했다"라고 썼다.[17] 이 재앙은 "충격으로 다가왔고", "속죄양 찾기를 촉발했으며", 1919년 이탈리아 군사위원회가 이 참사의 원인을 조사하는 것으로 절정에 달했다.[18][19][20] 라팔로에서는 연합군의 군사 협력을 개선하고 공동 전략을 개발하기 위해 최고전쟁평의회가 설립되었다.[24] 루이지 카도르나 원수는 패배 후 사임을 강요당했는데, 이는 수상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오를란도에 따르면 결정적인 계기였다. 카도르나는 참모진의 다른 장군들과 관계가 좋지 않은 것으로 알려져 있었고, 전투가 시작될 무렵에는 217명의 장군, 255명의 대령, 355명의 대대장을 해임했다.[21][22]
게다가 그는 너무 가혹하다는 이유로 병사들에게 혐오받았다.[23] 카도르나는 전선에서 약 30km 뒤에서 전투를 지휘했고, 파두아까지 160km 후퇴했다. 카도르나는 아르만도 디아스와 피에트로 바돌리오로 교체되었는데,[6] 바돌리오는 전투 초기에 독일군에 의해 쉽게 압도된 군단 중 하나를 지휘했지만, 위원회 청문회에서 모든 혐의에서 벗어났다. 이탈리아 선전 부서가 설립되어 병사들에게 토지와 사회 정의를 약속했다. 이탈리아는 이 시점부터 더 신중한 군사 전략을 받아들였다. 디아스는 침략과 패배로 인해 자극받은 국가적 쇄신을 이용하면서 파괴된 병력을 재건하는 데 노력을 집중했다.
6. 1. 진보 진영의 시각
카포레토 전투는 이탈리아 군사 역사상 최대의 패배로 기록된다.[16] 이 재앙과 같은 패배는 이탈리아 사회에 큰 충격을 주었으며, 패배의 원인에 대한 조사가 이루어졌다.[18][19][20]진보 진영에서는 루이지 카도르나 원수를 비롯한 이탈리아군 지휘부의 무능함과 경직된 사고방식을 비판한다. 카도르나는 참모진의 다른 장군들과 관계가 좋지 않았고, 전투 시작 전부터 많은 장군과 장교들을 해임했다.[21][22] 또한, 그는 병사들에게 가혹한 규율을 적용하여 혐오의 대상이 되었다.[23] 카도르나는 전선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서 전투를 지휘했고, 결국 패배 후 사임해야 했다.[6] 그의 실패는 이손초 전선 전체 지휘에서 반복된 비합리적인 지휘 때문이라는 비판을 받는다. 그는 병사들뿐만 아니라 자신의 참모와 지휘관들과도 불신으로 가득 찬 관계를 맺었다.[39] 자신이 마음에 들지 않는 인물들을 잇달아 해임하여 지휘 체계를 혼란에 빠뜨렸고, 수많은 장병을 처형하는 잔혹 행위까지 저질렀다.[40][41]
이러한 군 지휘부의 문제점은 보수적인 군 조직 문화에서 기인한 것으로, 진보 진영은 이를 패배의 주요 원인 중 하나로 지적한다.
이탈리아군 사령부는 카포레토 전투 이후 "근대전에서는 적의 위협만으로는 사기를 유지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군 내부에 선전국이 설치되어 병사들에게 사회 정의 실현 등을 약속했고, 군사 전략은 보다 신중해졌다.
카포레토 전투의 패배는 이탈리아 사회 내부의 문제점을 드러냈으며, 더 나아가 베니토 무솔리니로 대표되는 파시즘의 발흥에 영향을 미쳤다는 평가를 받는다. "카포레토"라는 단어는 이탈리아어에서 패배를 의미하는 속어가 되었다.[39]
6. 2. 한국의 시각
카포레토 전투는 이탈리아 군사 역사상 최대의 패배로 기록되며, 이탈리아군에 전례 없는 재앙을 안겨주었다.[16][17] 이 참사는 이탈리아 사회에 큰 충격을 주었고, 1919년 군사위원회가 구성되어 패배의 원인을 조사하게 되었다.[18][19][20]한국의 시각에서 카포레토 전투는 전쟁에서 정보의 중요성과 유연한 대응의 필요성을 강조하는 사례로 분석된다. 특히, 루이지 카돌나 원수는 독일군의 개입 정보를 무시하고 변화된 전장 상황에 적절히 대응하지 못했다는 비판을 받는다.[21][22] 카도르나는 전선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서 전투를 지휘했고, 지나치게 가혹한 방식으로 병사들을 대했기 때문에 혐오의 대상이 되었다.[23] 그는 217명의 장군, 255명의 대령, 355명의 대대장을 해임하는 등 지휘 체계에 혼란을 야기했고, 이는 전투 패배의 주요 원인 중 하나로 지적된다.[21][22]
카포레토 전투의 졸전은 당시 이탈리아의 무능하고 부패한 지배층에 대한 반감을 증폭시켰고, 이는 훗날 무솔리니의 파시즘 발흥에 기여하는 한 요인이 되었다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실제로 무솔리니는 1922년 사회주의자들의 실패한 총파업을 "이탈리아 사회주의에 대한 카포레토"라고 언급하며, 이 전투가 이탈리아 사회에 미친 영향을 드러내기도 했다.[39]
이탈리아는 카포레토 전투 이후 군 내부에 선전 부서를 설치하고, 병사들에게 토지와 사회 정의를 약속하며 사기 진작에 힘썼다. 또한, 보다 신중한 군사 전략을 채택하여 소모전을 피하고, 인명 피해를 줄이는 데 집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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