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탈리아 왕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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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이탈리아 왕국은 1861년 사르데냐 왕국의 주도로 이탈리아 통일(리소르지멘토)을 통해 건국되었으며, 사르데냐의 국왕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2세가 초대 국왕이 되었다. 통일 이후 이탈리아는 자유주의 시대를 거치며 산업화와 식민지 확장을 추진했으나, 사회적 불안과 경제적 어려움을 겪었다. 제1차 세계 대전 참전 이후 파시스트 정권이 등장하여 베니토 무솔리니의 독재 체제가 수립되었고, 제2차 세계 대전에 추축국으로 참전했으나 패배했다. 전쟁 이후 국민투표를 통해 왕정이 폐지되고 공화국이 수립되었으며, 이탈리아는 유럽 공동체의 창립 멤버로 참여하여 경제 성장을 이루었다.
이탈리아 왕국은 이탈리아 통일을 통해 영토를 확장했으며, 제1차 세계 대전 이후 트리에스테와 트렌티노-알토 아디제/쥐드티롤을 병합했다. 1915년 비밀 런던 조약에서 연합국은 이탈리아에게 오스트리아 연안 지방, 카르니올라 공국 서부, 북부 달마티아 등을 약속했다.[2] 그러나 1919년 베르사유 조약 체결 후 1920년 라팔로 조약 (1920)에 따라 이탈리아는 북부 달마티아에 대한 주장을 포기했다. 제2차 세계 대전 중에는 류블랴나 주와 달마티아 총독부 지역을 추가로 얻었다.[3]
2. 역사
이탈리아 왕국은 1861년 이탈리아 통일로 건국되어 1946년 국민투표로 왕정이 폐지될 때까지 존속한 국가이다. 현재 이탈리아 영토를 포함하고, 때로는 그보다 더 넓은 지역을 차지했다. 1870년까지 점진적으로 영토를 확장했으며, 1919년에는 트리에스테와 트렌티노-알토 아디제/쥐드티롤을 병합했다. 제1차 세계 대전 중 런던 조약에 따라 연합국에 참전할 경우 여러 지역을 할양받기로 약속받았으나,[2] 베르사유 조약 체결 후 라팔로 조약에 따라 북부 달마티아에 대한 주장은 포기되었다. 제2차 세계 대전 중에는 류블랴나 주와 달마티아 총독부 지역을 추가로 얻었다.[3]
제2차 세계 대전 종전까지 식민지, 보호령, 군사 점령지 및 괴뢰 국가를 설립하고 유지했다. 여기에는 에리트레아, 이탈리아 소말리아, 리비아, 에티오피아(1936년부터 1941년까지 이탈리아가 병합), 알바니아(1939년부터 이탈리아 보호령), 영국령 소말릴란드, 그리스 일부, 코르시카, 모나코를 포함한 남부 프랑스, 튀니지, 코소보, 몬테네그로(모두 제2차 세계 대전 중 점령한 지역), 크로아티아(제2차 세계 대전 중 이탈리아와 독일의 위성국), 그리고 톈진의 이탈리아 조계 등이 포함된다.[4]
이탈리아 반도는 오랫동안 여러 소국으로 분열되어 있었으나, 1848년 혁명 이후 통일 분위기가 고조되었다(이탈리아 통일 운동). 사르데냐 왕국은 프랑스 제국과 연합하여 오스트리아 제국을 격파하고 북이탈리아를 통일하였다.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2세는 교황령을 병합하고, 주세페 가리발디가 남이탈리아를 헌상함으로써 이탈리아 대부분이 사르데냐의 지배하에 들어갔다. 1861년 3월 14일,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2세가 이탈리아 국왕으로 즉위하고 이탈리아 왕국이 성립하였다.
통일 후에도 오스트리아 제국 지배하에 있던 "미회수의 이탈리아" 지역 병합 요구가 계속되었다. 1866년 프라하 조약으로 베네토를, 1889년 우잘리 조약으로 에리트레아를, 1908년 이탈리아령 소말릴란드를, 1912년 이탈리아-튀르키예 전쟁 승리로 리비아를 획득하였다. 제1차 세계 대전에는 런던 비밀 조약에 의해 연합국으로 참전하였으나, 획득한 영토는 적었고 피우메 획득은 불가능하였다. 이러한 "무산된 승리Vittoria mutilatait"에 대한 불만은 파시즘 대두로 이어졌다.
1922년 로마 진군으로 베니토 무솔리니의 파시스트당이 권력을 장악하고 파시스트 체제가 구축되었다. 1936년 에티오피아 제국 침공(제2차 에티오피아 전쟁)으로 영국, 프랑스와 대립이 심화되었고, 나치 독일과 접근하여 추축국을 형성하게 된다. 1939년 알바니아 침공으로 알바니아 왕국을 동군 연합으로 왕국에 편입시켰다.
제2차 세계 대전에서는 독일 편에 가담하여 북아프리카와 발칸 반도에 침공하였으나(그리스-이탈리아 전쟁), 연합국의 저항으로 정체되었다. 1943년 시칠리아섬에 연합군이 상륙하자, 국왕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3세와 파시스트당 일부는 무솔리니를 실각시키고 피에트로 바돌리오 정권은 연합국과 휴전 협정을 체결하였다(이탈리아의 항복). 그러나 독일은 이탈리아 북부를 점령하고 이탈리아 사회 공화국을 건국하였다. 이탈리아는 독일과 연합국의 전쟁 최전선이 되었다. 1946년 국민투표로 왕정이 폐지되고 이탈리아 공화국이 성립되었다.
2. 1. 건국과 통일 과정 (1848년~1870년)
1861년 사르데냐 왕국에 의한 이탈리아 통일(리소르지멘토)로 이탈리아 왕국이 건국되었고, 사르데냐 국왕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2세가 이탈리아 국왕이 되었다. 통일 후 군대가 해체되고 많은 사람들이 실직했을 뿐만 아니라, 통일 국가에 이상을 그리던 사람들과 죄의 감면을 약속받고 전쟁에 참여했던 사람들의 희망이 받아들여지지 않아 국내는 안정되지 못했다. 특히 정복된 남이탈리아에서 통일 정부에 대한 반발이 거세어, 그들은 크로코를 대표로 하는 ("산적" 또는 "도적"으로 번역됨)가 되어 왕국에 반기를 들었다 (→이탈리아 통일 운동#남부 문제의 발생 참조). 브리간테는 1861년 크로코의 멜피 침공부터 본격화되었지만, 지주로부터의 약탈을 주로 하는 활동은 민중으로부터 환호를 받았다. 로마 문제에서 비롯된 1862년 가리발디의 아스프로몬테 사건을 계기로 한 계엄령과 그에 이은 1863년의 법 제정으로 브리간테에 대한 압력이 높아졌다. 고통으로 인해 민중을 공격하기 시작한 브리간테는 점차 지지를 잃었고, 1864년 내통자가 정보를 누설하면서 일거에 진압되었다.
1865년, 토리노에서 피렌체로 수도를 천도했다. 이듬해, 덴마크 전쟁 이후 프로이센과 오스트리아 사이에서 영유권을 둘러싸고 시작된 프로이센-오스트리아 전쟁에 개입한 제3차 이탈리아 독립 전쟁에서는 프로이센 편에 참전했다. 그 결과 오스트리아 영토 중 트렌티노와 트리에스테를 제외하고 베네토를 병합했다.
1870년에 일어난 프로이센-프랑스 전쟁으로 인해 로마 교황령을 수호하고 있던 프랑스군이 철수하자, 이탈리아는 교황령을 점령하고(로마 점령), 이탈리아 전토의 통일을 달성하였다. 이듬해 로마로 수도를 천도하였다. 또한 같은 해 5월 13일에 교황 보장법을 제정하여 교황의 지위를 보장하려고 하였으나, 교황은 이를 거부하고 국정 불참을 호소하는 등 이탈리아 왕국과 로마 교황의 대립 구도가 형성되어, 무솔리니 정권 시대에 라테라노 조약(1929년)이 체결될 때까지 이어졌다.
2. 2. 자유주의 시대 (1870년~1914년)
1870년에 일어난 프로이센-프랑스 전쟁으로 교황령을 수호하던 프랑스군이 철수하자, 이탈리아는 교황령을 점령하고 이탈리아 전역의 통일을 달성하였다. 이듬해 로마로 수도를 천도하였다. 같은 해 5월 13일 교황 보장법을 제정하여 교황의 지위를 보장하려고 하였으나, 교황은 이를 거부하고 국정 불참을 호소하여 이탈리아 왕국과 로마 교황청의 대립 구도가 형성되었다. 이 대립은 베니토 무솔리니 정권 시대에 라테란 조약(1929년)이 체결될 때까지 이어졌다.
1881년 프랑스의 튀니지 침공을 계기로, 프랑스 총리 쥘 페리가 주도하는 영토 확장론에 대립하여 1882년 삼국동맹을 체결했다. 그러나 이후 다른 유럽 열강들과 마찬가지로 식민지 획득을 모색하며 제국주의 정책을 전개했다. 1889년 소말릴란드 식민지화를 시작했고, 1893년 에티오피아를 침공했으나, 프랑스의 지원을 받아 근대화에 성공한 에티오피아 군대를 과소평가하여 아두와 전투에서 패배했다(제1차 에티오피아 전쟁). 1902년 청에서 의화단의 난을 진압한 결과 톈진 조계를 획득했고, 1911년 리비아의 영유권을 놓고 오스만 제국과 싸워 승리하여(이탈리아-튀르키예 전쟁) 1912년 리비아를 병합했다.
2. 3. 제1차 세계 대전과 파시즘의 대두 (1914년~1922년)
제1차 세계 대전에서 이탈리아는 영토 문제(미수복 이탈리아)로 오스트리아와 대립했기 때문에, 삼국 동맹이 방어를 위한 조약이라고 주장하며 프랑스-이탈리아 협상을 이유로 중립 선언을 했다.[86] 잠시 전황을 관망했지만, 1915년에 런던 비밀 조약을 맺고 미수복 이탈리아와 이스트리아, 달마티아의 할양을 조건으로 연합국 편에 참전했다.[87] 천혜의 요새인 알프스 산맥에 자리 잡은 오스트리아군에 맞서 이탈리아 왕국은 지형적 불리함을 극복하기 위해 많은 신병을 징집하여 싸웠다.[92][93] 수많은 정면 돌격으로 이탈리아 왕국군은 막대한 사상자를 냈지만, 조금씩 전선을 확보하며 고리치아 등 중요 거점을 점령했다. 오스트리아군 구원에 온 독일군의 신전술(침투 전술)로 고전했지만, 결국 밀어붙여 연합국의 승리에 기여했다.
전승국이 됨으로써, 근대 이전 이탈리아 전쟁부터 수백 년 동안 가상의 적이었던 합스부르크 가의 세력을 붕괴시켰고, 제1차 세계 대전에서 이탈리아는 국제 연맹의 상임 이사국이 되는 등 국제 사회에서 지위를 높였다. 그러나 영국, 프랑스, 일본, 미국과 함께 주도한 파리 강화 회의에서는 트리에스테, 남티롤과 이스트리아의 합병은 인정되었지만, 전후 민족 자결의 기운이 고조됨에 따라 달마티아를 포기해야 했다. 오를란도 총리는 항의하며 한때 회의에서 귀국했지만, 결국 이를 승인해야 했다. 이 때문에 이탈리아 국민 사이에서는 "상처 입은 승리", "강화 회의의 패전국"이라는 불만이 확산되었다.[102] 영유하지 못한 피우메를 점령하려는 실력 행사(칼나로-이탈리아 정부)에 나선 것이 애국 시인 단눈치오였지만, 강화 회의의 결정을 뒤집을 수 없었고, 이탈리아 정부는 단눈치오 정부를 축출했으며, 그 후 피우메는 자유 도시가 되었다.
제1차 세계 대전을 치른 것은 이탈리아 경제에 너무 큰 부담이었다. 전후 찾아온 인플레이션은 빈민층의 불만을 야기했고, 북부의 토리노, 밀라노와 같은 공업 도시에서 노동자들의 공장 점거 등이 발생했다. 남부에서도 농촌 노동자, 소작농 등의 폭동이 잇따랐다. 이러한 움직임은 유산 계급의 위기감을 강화시켰다.
이러한 불안한 정세 속에서 베니토 무솔리니는 파시스트당의 전신인 이탈리아 전투원 파시를 조직했다. 그 주장은 사회 정책의 충실을 내세우면서 민족주의를 옹호하고 기존 정당을 비판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밀라노에서 선거에 출마했으나 완패하고, 무솔리니가 일시 체포되는 등 초기 활동은 난항을 겪었다.
도시와 농촌 모두에서 자본가, 지주와 노동자, 소작인 사이의 대립 구도가 계속되었다. 빈민 편에 서는 사회당 정부에 불만을 품은 지주 계급은 파시스트 세력과 결탁하여 농촌 지역의 사회당, 노동조합의 거점 등을 잇달아 습격했다. 이를 "징벌 원정"이라고도 한다. 초기에는 농촌 각지에서 라스라고 불리는 지역별 지도자가 권력을 장악했지만, 무솔리니는 점차 지방 세력을 묶어 중앙 집권화를 추진했다. 이러한 의회 활동에 의존하지 않는 직접 행동을 통해 이탈리아 전투 파시는 보수층의 지지를 얻어 1921년까지 당원을 10만 명 정도로 확대하고, 같은 해 전국 파시스트당으로 개편했다.
1922년, 무솔리니는 직접적인 무력 행사에 의한 정권 장악을 도모하여 로마 진군을 일으켰다. 루이지 파크타 수상은 계엄령을 선포하여 대응하려 했지만,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3세는 서명을 거부하고 무솔리니에게 조각을 명령했기 때문에 무솔리니 내각이 성립했다. 1924년에는 로마 조약에 의해 피우메(Fiume)(리에카)를 병합하고, 1926년에는 알바니아를 보호국으로 삼았다. 같은 해, 의회에서 파시스트당 이외의 모든 정당을 해산시켜 일당 독재 체제를 구축하고, 1928년에는 파시스트당 최고 의결 기관이었던 파시즘 대평의회를 공식적인 국가 최고 기관으로 정했다. 이로써 일당 독재 체제가 완성되었다.
2. 4. 파시스트 정권 (1922년~1943년)
베니토 무솔리니는 1919년 파시 디 콤바티멘토it(전투 동맹)를 창설했다. 초기 파시스트 운동은 좌익 성향의 강령을 가지고 사회 혁명, 선거에서의 비례 대표제, 여성 참정권(1925년 부분적으로 실현), 대농장이 소유한 시골 사유지 분할을 약속했다.[103][104] 또한 후기 파시즘과는 달리 검열, 군국주의, 독재에 반대했다.[105]
제1차 세계 대전의 전승국이었음에도, 이탈리아는 파리 강화 회의에서 영토 확대 요구의 대부분을 거부당했다. 이탈리아 국민들 사이에서는 ‘강화 회의의 패전국’이라는 비난이 쏟아졌다. 트리에스테, 이스트리아 병합은 완수했지만, 전후 민족자결주의의 영향으로 달마티아를 포기해야 했고, 정부의 소극적인 자세에 대한 불만이 커졌다. (달마티아는 유고슬라비아가 인수)
제1차 세계 대전은 이탈리아 경제에 큰 부담을 주었다. 전후 발생한 인플레이션은 빈민층의 불만을 야기했고, 북부 토리노와 밀라노같은 공업 도시에서는 사회주의의 영향을 받은 노동자들의 공장 점거 등이 일어났다. 남부에서도 농민, 소작농 등의 폭동이 연이어 발생했다. 이러한 계급 갈등은 러시아 혁명의 영향으로, 유산 계급에게는 무산계급에 대한 두려움을 안겨주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베니토 무솔리니는 파시스트당의 전신인 이탈리아 전투원 파시를 조직했다. 사회 정책의 실행을 주장하며 내셔널리즘을 옹호하고 기존 정당을 비판했다. 그러나 밀라노에서 선거에 출마하여 완패하고, 무솔리니가 일시 체포되는 등 초기 활동은 어려움을 겪었다.
도시와 농촌 모두에서 자본가, 지주와 노동자, 소작인 사이의 대립이 계속되었다. 빈민층을 옹호하는 사회당 정부에 불만을 품은 지주 계급은 파시스트 세력과 결탁하여 농촌 지역의 사회당, 노동조합의 거점 등을 연달아 습격했다. 이를 "징벌 원정"이라고도 한다. 초기에는 농촌 각지에서 라스라고 불리는 지역별 지도자가 권력을 잡았지만, 무솔리니는 점차 지방 세력을 묶어 중앙 집권화를 추진했다. 이러한 의회 활동에 의존하지 않는 직접 행동을 통해 "이탈리아 전투원 파시"는 보수층의 지지를 얻어 1921년까지 당원을 10만 명 정도로 확대하고, 같은 해 국가 파시스트당으로 개편했다.
1922년 10월, 무솔리니는 로마 진군이라 불리는 쿠데타에 성공한 후 이탈리아의 총리에 부임했다.
무솔리니는 민족주의자와 자유주의자들과 연정을 구성했고, 1923년에는 투표의 25% 이상을 획득한 정당에 의석의 3분의 2를 배정하는 선거법인 아체르보 법을 통과시켰다. 파시스트당은 1924년 이탈리아 총선에서 이 문턱을 넘기 위해 폭력과 협박을 사용했다. 사회당 의원 자코모 마테오티는 투표 무효화를 요구한 후 암살되었다.
의회 야당은 마테오티 암살에 아벤티노 분리로 대응했다.
그 후 4년 동안 무솔리니는 자신의 권력에 대한 거의 모든 견제와 균형을 제거했다. 1925년 12월 24일, 그는 국왕에게만 책임이 있다고 선포하는 법률을 통과시켜 의회 의제를 결정할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 되었다. 지방 정부는 해산되었고, 임명된 관리(포데스타it)가 선출된 시장과 의회를 대체했다. 1928년에는 모든 정당이 금지되었고, 의회 선거는 파시즘 대평의회가 400명의 후보를 단일 명단으로 지명하는 국민투표로 대체되었다.
1925년부터 1943년까지 이탈리아는 헌법이 공식적으로 변경 없이 유효하게 유지되는 동안 군주제가 파시스트 정책과 제도를 공식적으로 수용하면서 사실상의 ''법률상'' 파시스트 독재 국가였다. 1928년에는 파시즘 대평의회가 정부 행정을 장악했고, 1939년에는 파시스트·기업 의회가 하원을 대체했다.
1924년에는 로마 조약에 의해 피우메(리에카)를 병합하고, 1926년에는 알바니아를 보호국으로 삼았다. 같은 해, 의회에서 파시스트당 이외의 모든 정당을 해산시켜 일당 독재 체제를 구축하고, 1928년에는 파시스트당 최고 의결 기관이었던 파시즘 대평의회를 공식적인 국가 최고 기관으로 정했다. 이로써 일당 독재 체제가 완성되었다.
무솔리니 체제의 이탈리아 왕국은 1929년 바티칸과의 라테라노 조약 체결로 교황령 탈취 이후 바티칸과의 관계 개선에 성공했다.
한편, 나치 독일과의 관계는 무솔리니가 친분을 맺고 있던 오스트리아 제1공화국 총리 엥겔베르트 돌푸스의 암살로 인해 악화되었다.
그러나 1935년에는 제2차 이탈리아-에티오피아 전쟁을 일으켜 국제 사회의 강한 반발을 받게 되었다. 1936년에는 에티오피아를 병합하여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3세를 황제로 선포했다. 국제적으로 고립된 이탈리아는 마찬가지로 국제 사회에서 고립되어 있던 독일에 접근하여, 안슐루스를 승인했다. 1937년에는 반코민테른 조약에 참가하여 12월 11일 국제 연맹을 탈퇴했다. 1939년에는 알바니아 왕국에 침공하여 조그 1세를 축출하고 알바니아를 보호령으로 삼았다.
2. 5. 제2차 세계 대전과 몰락 (1940년~1945년)
1940년 6월 10일, 나치 독일의 프랑스 침공으로 패배가 임박한 프랑스에 참전을 선언하고 코트다쥐르로 진군을 시작했다.[166]
1940년 9월 12일, 리비아에 주둔하던 이탈리아군은 국경을 넘어 이집트를 침공, 이집트 주둔 영국군과 포격전을 시작했다. 당초 이집트와 주변 지역을 세 방향에서 휩쓸 계획이었으나 곧 좌절되었다.[167]
1940년 10월 28일, 알바니아에 주둔하던 10개 사단이 그리스 왕국을 침공하며 그리스-이탈리아 전쟁이 발발했다.[168] 그러나 그리스군의 강력한 저항과 이탈리아군의 훈련 부족으로 전선은 교착되었고, 오히려 알바니아 쪽으로 역공을 당하기도 했다. 1941년 4월 6일, 동맹국 독일 국방군이 불가리아군과 함께 그리스를 침공하면서[169] (세 나라에 의한) 점령이 이루어졌다.
이처럼 1940년에 시작된 군사 작전들은 장비 노후화와 물자 부족으로 제대로 진행되지 못했고, 무솔리니의 위신은 크게 실추되었다.
1943년 북아프리카 상실 후, 연합국의 이탈리아 상륙이 임박했다. 국왕과 파시스트당 내 평화파는 쿠데타를 일으켜 7월 25일 무솔리니를 해임 및 체포했다. 바돌리오 정권은 9월 8일 연합국과 휴전 조약을 발표했고, 이는 무조건 항복으로 간주되었다. 그러나 독일군은 이탈리아 북부를 점령하고 무솔리니를 수반으로 하는 이탈리아 사회 공화국을 세웠지만, 이는 독일의 꼭두각시에 불과했다. 이탈리아 왕국 역시 연합국의 점령하에 놓였고, 공동 참전국으로서 독일군 및 사회 공화국과 싸워야 했다. 1945년 4월, 주둔 독일군의 항복 움직임과 함께 이탈리아 사회 공화국은 붕괴되었고, 스위스로 가려던 무솔리니는 파르티잔에게 처형되었다. 이탈리아 반도에서의 전쟁은 5월에 종식되었다.
2. 6. 왕정 폐지와 공화국 수립 (1946년)
일본과 독일과 마찬가지로,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이탈리아는 파괴된 경제, 분열된 사회, 그리고 전례 없는 20년 동안 파시스트 정권을 지지한 왕정에 대한 분노에 직면했다.
파시스트의 부상 이전에도 왕정은 부유한 북부와 가난한 남부 사이에 사회가 극도로 분열되어 있었기에, 제대로 기능하지 못했다는 비판을 받았다. 1차 세계 대전에서 이탈리아는 거의 이득을 얻지 못했고, 이는 파시즘의 부상을 촉진한 것으로 여겨졌다. 이러한 좌절감은 이탈리아 공화주의 운동의 부활에 기여했다.[154] 1944년 봄까지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3세는 무솔리니에 대한 이전 지지로 인해 더 이상 어떤 역할도 할 수 없다는 것이 분명해졌다. 그는 헌법상의 권한을 왕세자 움베르토에게 이양하고 그를 왕국 섭정이자 사실상의 섭정으로 임명했다.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3세는 1946년 이탈리아 제헌 국민투표(왕정 유지 여부를 묻는 국민투표) 직전까지 명목상 국왕으로 남아 있었다. 1946년 5월 9일, 그는 왕세자에게 퇴위하고, 왕세자는 움베르토 2세로 즉위했다. 그러나 1946년 6월 2일, 공화파가 54%의 득표율을 기록하며 승리했고, 이탈리아는 공식적으로 공화국이 되었다. 이 날은 그 이후로 Festa della Repubblica|공화국의 날it로 기념되고 있다. 이는 이탈리아 여성이 국가 차원에서 투표한 최초의 사례이며, 몇 달 전 일부 도시에서 실시된 지방 선거를 고려할 때 두 번째 사례이다.[155][156]
결과표는 이탈리아의 여러 지역에서 상당한 차이를 보여준다. 이탈리아 반도는 마치 두 개의 서로 다른 동질적인 국가가 있는 것처럼 극적으로 두 부분으로 나뉘었다. 북부는 공화국(66.2%)을, 남부는 왕정(63.8%)을 지지했다. 일부 왕당파는 북부 공화파, 사회주의자, 공산주의자들의 조작이 있었다고 주장했다. 다른 이들은 1946년 이탈리아가 여전히 너무 혼란스러워 정확한 국민투표를 실시할 수 없었다고 주장했다.
움베르토 2세는 이미 여러 이탈리아 도시에서 유혈 사태로 나타난 왕당파와 공화파 간의 충돌을 우려하여 전국으로 확산될 가능성을 우려하여 6월 13일 이탈리아를 떠나기로 결정했다. 그는 포르투갈로 망명했다.[157] 1948년 1월 1일, 이탈리아 공화국 헌법이 발효되면서 움베르토 2세 사보이아의 남성 후손들은 이탈리아에 입국하는 것이 금지되었으며, 이 조항은 2002년에 폐지되었다.[158]
로마 진군 이후 무솔리니의 독재를 뒷받침한 사보이아 왕가는 국민의 신뢰를 잃어가고 있었다. 전통적으로 왕국 시대가 길었던 남이탈리아에서는 왕실에 대한 강력한 지지가 있었지만, 도시 국가의 전통이 있는 북부는 왕가를 신뢰하지 않았고, 왕실의 강력한 지지 기반이었던 가톨릭 교회가 국민 투표에서 중립을 선언한 것도 배경이었다.
1946년 5월 9일, 에마누엘레 3세가 퇴위하고 움베르토 2세가 즉위했지만[170], 같은 해 6월 2일 실시된 왕정 폐지 여부를 묻는 국민 투표에서는 찬성 54%의 근소한 차이로 왕정 폐지가 결정되었다. 움베르토 2세는 폐위되었고, 공화제를 채택하여 '''이탈리아 공화국'''이 성립되었다.
3. 외교 및 군사
이탈리아 왕국은 에리트레아, 이탈리아 소말리아, 리비아, 에티오피아(1936-1941), 알바니아, 영국령 소말릴란드, 그리스 일부, 코르시카, 모나코를 포함한 남부 프랑스, 튀니지, 코소보, 몬테네그로, 크로아티아, 톈진의 이탈리아 조계 등 식민지, 보호령, 군사 점령지, 괴뢰 국가를 설립하고 유지했다.[4]
새로운 이탈리아 왕국은 7개 주요 지역의 정치 및 행정 시스템을 통합해야 했다. 각 지역은 고유한 전통을 가지고 있었고, 카보우르는 통합을 계획했지만, 완료되기 전에 사망했다. 지역 행정 관료제는 나폴레옹 시대의 전례를 따랐고, 의회 입법 시스템은 영국 시스템을 모델로 삼았다.
이탈리아 왕립 육군과 해군(Regia Marina)을 통합하는 것은 복잡했다. 병사 모집, 장교 선발 및 승진 시스템이 달랐고, 계승 조항에 따른 예외가 지속되었기 때문이다. 이는 1866년 전쟁에서 이탈리아 해군의 부진을 설명하는 데 도움이 된다. 다양한 교육 시스템을 통일하는 것도 복잡했고, 프란체스코 데 산티스가 교육부 장관으로 임명되었다. 1866년 베네토 합병과 1870년 로마 합병은 관료 조정의 과제를 더욱 복잡하게 만들었다.[22]
프란체스코 크리스피는 1887년부터 1891년까지, 그리고 1893년부터 1896년까지 총리로 재임했다. 그는 공격적인 대외 정책을 추구했고, 군비 지출을 늘렸으며, 프랑스와의 무역에 파괴적인 정책을 펼쳤다. 또한 아도와 전투에서 에티오피아 군대에 패배하면서 동아프리카 식민지 야망에 타격을 입었다.[67] 크리스피는 영국을 존경했지만, 독일로 눈을 돌려 삼국 동맹에 가입했다.[68]
19세기 후반과 20세기 초, 이탈리아는 아프리카에서 식민지를 획득하려 했다. 이탈리아는 군사력과 경제력이 약했지만, 영국은 프랑스의 영향력을 차단하기 위해 이탈리아를 지원했다.[69] 이탈리아는 알렉산드리아, 카이로, 튀니스에 대규모 정착지를 가지고 있었고, 식민지 양보를 얻으려 했지만 실패했다. 이탈리아 선교사들은 1830년대에 마사와(오늘날 에리트레아에 위치)에 교두보를 확보했다.[70]
1885년, 이탈리아는 마사와에 군인들을 상륙시키며 식민지 확장을 시작했다. 1888년, 마사와를 합병하여 이탈리아 에리트레아를 건설했다. 마사와와 아사브의 에리트레아 항구는 이탈리아와 에티오피아 간의 무역을 처리했다. 이탈리아는 공산품을 수출하고 커피, 밀랍, 가죽을 수입했다.[71] 이탈리아는 아프리카 뿔의 남쪽에 이탈리아 소말릴란드를 형성했다.
1889년 우찰레 조약은 이탈리아어 버전과 에티오피아 암하라어 버전의 내용이 달랐다. 이탈리아어 버전에서는 에티오피아가 이탈리아의 보호령이 된다고 명시했지만, 암하라어 버전에서는 에티오피아 황제 메넬리크 2세가 외교를 위해 이탈리아를 거칠 수 있다고 명시했다.[72] 1895년, 두 버전의 차이가 드러나자 메넬리크 2세는 조약을 폐기했고, 이탈리아는 에티오피아를 군사적으로 점령하려 했다. 이로 인해 제1차 이탈리아-에티오피아 전쟁이 발발했다.[73][74] 이탈리아군은 아두아 전투에서 패배했고, 1896년 아디스아바바 조약을 통해 에티오피아의 독립을 인정해야 했다.[75]
1899년부터 1901년까지 이탈리아는 팔국 연합군의 일원으로 중국에서 의화단 운동 진압에 참여했다. 1901년, 톈진의 조계가 이탈리아에 할양되었고, 1902년부터 이탈리아 영사에 의해 관리되었다.
1911년, 이탈리아는 오스만 제국에 선전포고하고 침략하여 트리폴리타니아, 페잔, 키레나이카를 점령했다. 이 지역들은 리비아로 알려지게 되었다.[76][77]
이탈리아는 1915년 국가 통일을 완성한다는 목표로 제1차 세계 대전에 참전했다. 제1차 세계 대전에서 이탈리아의 개입은 이탈리아 통일의 완성으로 간주되는 제4차 이탈리아 독립 전쟁으로 여겨지기도 한다.[83] [84][85]
이탈리아는 삼국 동맹이 방어 목적에만 해당되었기 때문에 6개월 동안 중립을 유지했다. 1915년 봄에 전쟁에 참전하는 주도권을 잡았다. 이탈리아는 정치 체제가 혼란스럽고 재정이 긴박했으며 군대는 부실하게 준비된 국가였다.[86] 안토니오 살란드라 총리와 시드니 소니노 외무장관은 양측과 비밀리에 협상을 벌였고, 협상국으로부터 티롤과 트리에스테를 포함한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많은 영토를 약속받았다. 영국은 이탈리아를 새로운 동맹국으로 확보하기 위해 보조금과 대출을 제공했다.[87]
1915년 5월 런던 조약이 발표되었을 때 반전 세력의 격렬한 반발이 있었다. 시골 사람들은 전쟁을 재앙으로 여겼고, 사업가들은 정부 통제와 세금, 해외 시장 손실을 우려하여 반대했다. 친전쟁 지지자들이 거리를 점령했고, 전쟁에 대한 열정은 정치와 지배 계급의 실패에 대한 반발을 나타냈다.[88][89] 베니토 무솔리니는 신문 Il Popolo d'Italia|일 포폴로 디탈리아it를 만들었고, 연합국은 이 신문에 자금을 지원했다.[90][91]
이탈리아는 87만 명의 군대를 가지고 전쟁에 참전했지만, 군대는 지휘가 부실했고 중포와 기관총이 부족했다. 이손초 강을 따라 3년 동안 전투가 벌어졌고, 이탈리아는 전쟁을 효과적으로 수행할 수 없음을 증명했다. 1916년 이탈리아는 독일에 선전포고했다. 약 65만 명의 이탈리아 군인이 사망하고 95만 명이 부상을 입었으며, 경제는 연합군 자금 지원이 필요했다.[92][93]
전쟁 전 정부는 노동 문제를 무시했지만, 전시 생산을 동원하기 위해 개입해야 했다. 파업이 빈번했고 협력은 최소화되었으며, 정부는 높은 임금 규모와 함께 단체 협상과 보험 제도를 도입했다.[94] 많은 대기업이 확장되었고, 인플레이션으로 생활비가 증가했다. 산업 노동자의 임금은 따라갔지만 농업 노동자의 임금은 그렇지 않았고, 시골 지역의 불만은 높았다.[95]
Bollettino della Vittoria|볼레티노 델라 비토리아it와 Bollettino della Vittoria Navale|볼레티노 델라 비토리아 나발레it가 발표한 이탈리아의 승리[96][97][98]는 이탈리아 전선에서의 전쟁 종식을 알렸고,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해체를 확보했으며, 독일과의 휴전 즉 제1차 세계 대전 종식에 주요한 역할을 했다. 65만 명이 넘는 이탈리아 군인들이 사망했고,[99] 민간인 사망자는 58만 9,000명으로 추산된다.[100] 1918년 11월 오스트리아-헝가리의 항복 후 이탈리아는 군사적으로 트렌티노 알토 아디제, 줄리안 마르케, 이스트리아, 크바르네르 만 및 달마티아를 점령했다. 달마티아 총독부가 설립되었고, 행정 수도는 자라였다. 달마티아 총독부는 라팔로 조약 (1920)으로 철수했다.
전쟁이 끝나갈 무렵, 이탈리아 총리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오를란도는 영국 총리 데이비드 로이드 조지, 프랑스 총리 조르주 클레망소 및 미국 대통령 우드로 윌슨과 베르사유에서 만나 유럽의 국경을 재정의하는 방법을 논의했다. 이 회담은 이탈리아에 거의 영토 이익을 가져다주지 못했다. 베르사유 조약은 런던 조약에서 약속했던 달마티아와 알바니아를 이탈리아에 할당하지 않았다. 영국과 프랑스는 독일의 해외 식민지를 분할하여 이탈리아에게는 아무것도 주지 않았다. 이탈리아는 오스만 제국의 분열로 인해 영토를 얻지 못했다. 오를란도는 베르사유 조약에 서명했지만, 그의 정부에 대한 격렬한 반발이 일어났다. 생제르맹 조약 (1919)과 라팔로 조약 (1920)에 따라 트렌티노 알토 아디제, 줄리안 마르케, 이스트리아, 크바르네르와 달마티아 도시인 자라가 합병되었다.
평화 협정에 분노한 이탈리아 민족주의 시인 가브리엘레 단눈치오는 피우메 자유국을 건설했다. 그의 인기는 그를 Il Duce|일 두체it("지도자")라고 불리게 했고, 그는 피우메 공격에 흑셔츠를 입은 준군사 조직을 사용했다. Duceit라는 지도자 직함과 흑셔츠 준군사복은 베니토 무솔리니의 파시스트 운동에서 채택되었다. 피우메의 이탈리아 합병 요구는 정치 스펙트럼의 모든 측면으로 확산되었다.[101]
로마 조약(1924)에 따라 피우메시가 이탈리아에 합병되었다. 이탈리아의 영토 확장 부족으로 인해 결과는 "불완전한 승리"로 규탄되었다. "불완전한 승리"라는 수사법은 무솔리니에 의해 채택되어 파시스트 이탈리아의 부상을 가져왔고 파시스트 이탈리아의 선전의 핵심이 되었다. 역사가들은 "불완전한 승리"를 파시스트들이 이탈리아 제국주의를 부추기고 제1차 세계 대전 이후 자유주의 이탈리아의 성공을 가리는 데 사용한 "정치적 신화"로 간주한다.[102] 이탈리아는 국제 연맹 집행위원회의 상임 이사국이 되었다.
베니토 무솔리니의 대외 정책은 이전 자유주의 정권의 대외 정책 목표를 계승했다. 자유주의 이탈리아는 독일과 오스트리아와 동맹을 맺었고, 발칸 반도와 북아프리카에 큰 야망을 가지고 있었다. 1896년 에티오피아에서 참패한 이후로 그 나라를 장악하려는 강한 요구가 있었다. 제1차 세계 대전의 큰 손실 이후 깊은 환멸이 있었고, 오스트리아로부터 얻은 작은 영토적 이득은 보상하기에 충분하지 않았다. 무솔리니는 로마 제국의 자존심과 영광을 회복하겠다는 약속을 했다.[111]
이탈리아 파시즘은 이탈리아 민족주의에 기반을 두고 있으며, Risorgimento|리소르지멘토it의 미완성 프로젝트로 간주하는 것을 완성하여 Italia Irredenta|이탈리아 이레덴타it (미수복 이탈리아)를 이탈리아 국가에 통합하고자 한다.[112][113] 이탈리아 동쪽에서는 파시스트들이 달마티아가 이탈리아 문화의 땅이라고 주장했다.[114] 이탈리아 남쪽에서는 파시스트들이 영국령 몰타와 그리스령 코르푸를, 북쪽에서는 이탈리아어 사용 스위스, 서쪽에서는 프랑스령 코르시카, 니스, 사보이아를 주장했다.[115][116]
무솔리니는 "새로운 로마 제국"을 건설하고 지중해를 지배하면서 이탈리아를 유럽의 강대국으로 되돌리겠다고 약속했다. 선전에서 파시스트들은 고대 로마의 모토 "Mare Nostrum|마레 노스트룸la" (라틴어로 "우리의 바다")를 사용하여 지중해를 묘사했다. 1923년 그리스 영토에서 텔리니 장군이 암살된 후 그리스의 코르푸 섬이 잠시 이탈리아에 점령되었다. 1925년 티라나 조약에 따라 알바니아는 이탈리아의 강한 영향력 아래 놓였으며, 이탈리아는 발칸 반도에서 더 강력한 위치를 차지하게 되었다.[117] 프랑스와의 관계는 엇갈렸다. 파시스트 정권은 프랑스의 이탈리아인 거주 지역을 회복할 계획을 세웠다.[118] 나치즘의 부상과 함께 독일이 이탈리아에 대한 잠재적 위협이 될 가능성에 대한 우려가 커졌다. 독일의 팽창주의에 대한 우려로 이탈리아는 1935년부터 1936년까지 존재했던 프랑스와 영국과 함께 스트레사 전선에 가입했다. 파시스트 정권은 달마티아를 계속해서 주장하면서 유고슬라비아와 부정적인 관계를 유지했다.
스페인 내전 동안 이탈리아는 프란시스코 프랑코가 이끄는 국민파를 지원하기 위해 무기와 6만 명이 넘는 병력을 파병했다. 이로써 이탈리아는 스페인 항구에 대한 해군 접근권을 확보하고 지중해에서 이탈리아의 영향력을 증가시켰다.[118] 1930년대 이탈리아는 해군 재무장 정책을 강력하게 추진했고, 1940년까지 Regia Marina|레지아 마리나it는 세계에서 네 번째로 큰 해군이 되었다.체임벌린, 달라디에, 히틀러, 무솔리니, 그리고 이탈리아 외무장관 치아노 백작이 뮌헨 협정에 서명하기 위해 준비하는 모습]">
무솔리니와 아돌프 히틀러는 1934년 6월 처음 만났는데, 무솔리니는 독일의 오스트리아 합병 계획에 반대했다. 공개적인 모습과 선전은 무솔리니와 히틀러의 친밀함과 이탈리아 파시즘과 독일 국가 사회주의의 유사성을 끊임없이 보여주었다. 두 이데올로기 모두 상당한 유사점을 가지고 있었지만, 두 세력은 서로를 의심했고, 두 지도자 모두 세계적인 영향력을 두고 경쟁했다.
1935년 무솔리니는 에티오피아 침공을 결정했고, 이탈리아인 2,313명과 에티오피아인 27만 5천 명이 사망했다.[119] 제2차 이탈리아-에티오피아 전쟁은 이탈리아의 국제적 고립으로 이어졌으며, 이탈리아의 공격을 지지한 유일한 국가는 나치 독일이었다. 국제 연맹의 비난을 받은 이탈리아는 1937년 12월 11일 국제 연맹을 탈퇴하기로 결정했다.[120] 무솔리니는 히틀러에 합류할 수밖에 없었고, 오스트리아 독립에 대한 지지를 포기했고, 히틀러는 1938년 오스트리아 합병인 Anschluss|안슐루스de를 진행했다. 무솔리니는 뮌헨 회의에서 독일의 수데텐 지역에 대한 주장을 지지했다. 1938년 히틀러의 영향 아래 무솔리니는 이탈리아에서 반유대주의적 인종법의 채택을 지지했다. 1939년 3월 독일이 체코슬로바키아를 합병한 후 이탈리아는 알바니아를 침공하여 이탈리아 보호령으로 만들었다.
1939년 전쟁이 임박하자 파시스트 정권은 프랑스에 대한 공격적인 언론 캠페인을 강화했다. 독일은 독일인 거주 지역인 알자스-로렌에, 이탈리아는 이탈리아와 프랑스 혼합 거주 지역인 니스와 코르시카에 대한 주장이 있었다. 1939년 5월, 강철 조약으로 알려진 독일과의 공식 동맹이 체결되었다. 무솔리니는 이탈리아가 가까운 미래에 전쟁을 치를 수 없다는 자신의 우려에도 불구하고 조약에 서명해야 한다고 느꼈다. 무솔리니는 독일과 소비에트 연방이 폴란드 제2공화국을 분할하기로 합의한 몰로토프-리벤트로프 조약에 혐오감을 느꼈다. 파시스트 정부는 이를 반코민테른 조약의 배신으로 간주했지만 공식적으로 침묵하기로 결정했다.
1939년 9월 1일 독일이 폴란드를 침공하여 제2차 세계 대전이 시작되었을 때, 무솔리니는 히틀러에 대한 지지를 선언했지만 비전투 상태를 유지하기로 선택했다. 전쟁 계획을 세우면서 무솔리니와 파시스트 정권은 이탈리아가 아프리카와 중동의 광대한 지역을 합병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고 결정했다. 그러나 국왕과 피에트로 바돌리오 사령관은 이탈리아가 장기전을 수행할 수 있는 충분한 탱크, 장갑차 및 항공기가 부족하다고 경고하며 무솔리니에게 주저했다. 바돌리오는 무솔리니에게 이탈리아가 유럽 분쟁(제2차 세계 대전 유럽 전선)에 개입하는 것은 "자살 행위"라고 말했다. 따라서 무솔리니와 파시스트 정권은 1940년 6월 독일이 프랑스를 침공(프랑스 전투)할 때까지 기다렸다가 개입하기로 결정했다.
이탈리아는 1940년 6월 10일 강철 조약에 대한 의무를 이행하며 전쟁에 참전했다. 무솔리니는 6월 21일 이탈리아가 프랑스로부터 사보이아, 니스, 코르시카, 그리고 튀니지와 알제리의 아프리카 식민지를 신속하게 점령하기를 희망했다. 이탈리아는 프랑스를 침공(프랑스 이탈리아 침공)했지만 1940년 6월 24일 프랑스-이탈리아 휴전으로 인해 소규모의 성과만 거두었다. 그러나 독일은 6월 22일 필리프 페탱 원수와 휴전(콩피에뉴 제2차 휴전)을 체결하여 남부 프랑스와 식민지에 대한 통제권을 유지한 비시 프랑스를 수립했다. 이 결정은 파시스트 정권을 분노하게 만들었다. 1940년 여름, 무솔리니는 제2차 세계 대전 중 위임 통치령 팔레스타인 폭격과 영국 소말릴란드 이탈리아 정복을 명령했다. 9월에는 이집트 이탈리아 침공을 명령했다. 초기 성공에도 불구하고 이탈리아군은 영국군에 의해 곧 격퇴되었다(컴퍼스 작전 참조). 히틀러는 에르빈 롬멜 장군의 아프리카 군단을 파견하여 개입해야 했다.
10월 28일, 무솔리니는 그리스를 공격(그리스-이탈리아 전쟁)했다. 그러나 그리스인들은 초기 공격을 성공적으로 격퇴했을 뿐만 아니라 이탈리아군을 알바니아로 밀어붙이는 더욱 유능한 상대임을 증명했다. 히틀러는 발칸 반도를 통해 그리스를 공격하여 무솔리니를 지원했다. 발칸 전역의 결과로 유고슬라비아가 해체되고 그리스가 패했다. 이탈리아는 남 슬로베니아, 달마티아, 몬테네그로를 얻었고, 크로아티아와 헬레닉 국가의 괴뢰 국가를 수립했다. 1942년까지 이탈리아 경제는 전쟁 상황에 적응하지 못했고 이탈리아 도시들은 연합군의 맹렬한 폭격을 받으면서 이탈리아는 약화되기 시작했다. 엘 알라메인에서 결정적인 패배 후 완전히 붕괴되었다.
1943년까지 이탈리아는 모든 전선에서 패하고 있었다. 소련에서 싸우고 있던 이탈리아군의 절반이 궤멸되었고, 아프리카 전역은 실패했고, 발칸 반도는 불안정했으며, 이탈리아 국민들은 전쟁의 종식을 원했다. 1943년 7월, 연합국은 시칠리아 연합군 침공을 감행했다. 7월 25일, 무솔리니는 파시즘 대평의회에 의해 축출되었고,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3세 국왕의 명령에 따라 체포되었으며, 국왕은 피에트로 바돌리오 장군을 새로운 총리로 임명했다. 바돌리오는 국가 파시스트당을 금지했고, 9월 29일 카시빌레 휴전 및 항복 문서에 서명했다.
도널드 데트윌러는 "이탈리아의 전쟁 참여는 이탈리아의 군사력이 허울뿐이라는 것을 매우 일찍 보여주었습니다. 프랑스, 그리스, 유고슬라비아 및 아프리카 전쟁에서의 이탈리아의 군사적 실패는 이탈리아의 새로운 명성을 크게 흔들었습니다."라고 지적한다.[121] 역사가들은 이탈리아 군대와 파시스트 정권이 왜 그렇게 놀라울 정도로 무능했는지에 대해 오랫동안 논쟁해 왔다. 맥그리거 녹스는 그 이유가 "무엇보다도 이탈리아의 군사 문화와 군사 제도의 실패"였다고 말한다.[122] 노먼 폴마와 토마스 B. 앨런은 "Regia Aeronautica|레지아 아에로나우티카it가 현대전에서 효과적으로 작전을 수행하지 못했습니다."라고 주장한다.[123] 제임스 사드코비치는 이탈리아의 실패에 대해 가장 관대한 해석을 제시하며 열악한 장비, 과도한 확장 및 부서 간의 경쟁을 비난한다. 이탈리아 군대는 "장애물이 많았습니다."[124]
3. 1. 외교 관계
이탈리아는 통일 직후부터 식민지 경영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1882년에 튀니지를 식민지로 만들려고 했으나 프랑스가 먼저 점령하여 뜻을 이루지 못했다. 1883년, 에리트레아와 소말리아를 점령함으로써 식민지 경영이 시작되었다.[4] 청나라가 중국 대륙을 통치하고 있었을 때 영국, 프랑스, 독일과 함께 조계를 설치했고 군 병력을 주둔시켰다. 조계는 1942년 없어진다.[4] 1911년 이탈리아-튀르크 전쟁으로 오스만 제국에 승리하여 리비아를 식민지로 삼았다.[4]
제1차 세계대전이 시작되었을 때, 이탈리아는 영토 문제로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과 대립하고 있었기 때문에 삼국 동맹을 맺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1911년 프랑스-이탈리아 협상을 이유로 중립을 선언했다. 1915년 런던 비밀 조약을 맺어 달마티아와 남티롤을 이탈리아에 할양한다는 조건으로 연합군 측에 가담하여 전승국이 되었다.[2] 대전 기간 동안 이탈리아 전역, 중동 전역 (제1차 세계 대전)에 군 병력이 파견되었고 이 중에서 65만 명이 전사했다.
1884년에 조선과 외교 관계를 수립했다. 이는 1905년 을사늑약 체결로 대한제국의 외교권이 일본 제국에 넘어갈 때까지 계속되었다.
19세기 후반과 20세기 초, 이탈리아는 아프리카 분할 경쟁에서 다른 강대국들을 따라 식민지를 획득하려 했다. 이탈리아는 영국, 프랑스, 독일에 비해 군사력과 경제력이 약했지만, 여러 식민지 프로젝트를 수행했다. 이는 로마 제국을 재건하고자 했던 이탈리아 민족주의자들과 제국주의자들의 지지를 얻기 위함이었다.[69][70]
1885년, 이탈리아는 동아프리카 마사와에 군인들을 상륙시키면서 식민지 확장을 시작했다. 1888년, 마사와를 무력으로 합병하여 이탈리아령 에리트레아 식민지를 건설했다.[71] 1889년에 체결된 우찰레 조약은 이탈리아어 버전과 에티오피아 암하라어 버전의 내용이 달랐다. 이탈리아어 버전에서는 에티오피아가 이탈리아의 보호령이 된다고 명시했지만, 암하라어 버전에서는 에티오피아 황제 메넬리크 2세가 외교를 위해 이탈리아를 거칠 수 있다고 명시했다. 1895년, 두 버전의 차이가 드러나자 메넬리크 2세는 조약을 폐기했고, 이탈리아는 에티오피아를 군사적으로 점령하려 했다. 이로 인해 제1차 이탈리아-에티오피아 전쟁이 발발했다.[72][73][74]
이탈리아군은 아두아 전투에서 에티오피아군에게 패배했고, 1896년 아디스아바바 조약을 통해 에티오피아의 독립을 인정해야 했다.[75]
1899년부터 1901년까지 이탈리아는 팔국 연합군의 일원으로 중국에서 의화단 운동 진압에 참여했다. 1901년, 톈진의 조계가 이탈리아에 할양되었고, 1902년부터 이탈리아 영사에 의해 관리되었다.[4]
1911년, 이탈리아는 오스만 제국에 선전포고하고 침략하여 트리폴리타니아, 페잔, 키레나이카를 점령했다. 이 지역들은 이탈리아령 리비아로 알려지게 되었다.[76][77]
무솔리니는 로마 제국의 영광을 회복하고 이탈리아를 유럽의 강대국으로 되돌리겠다고 약속했다. 선전에서 파시스트들은 고대 로마의 모토 "Mare Nostrumla" (라틴어로 "우리의 바다")를 사용하여 지중해를 묘사했다.[111] 1923년 그리스 영토에서 텔리니 장군이 암살된 후 그리스의 코르푸 섬이 잠시 이탈리아에 점령되었다. 1925년 티라나 조약에 따라 알바니아는 이탈리아의 영향력 아래 놓였다.[117]
스페인 내전 동안 이탈리아는 프란시스코 프랑코가 이끄는 국민파를 지원하기 위해 무기와 6만 명이 넘는 병력을 파병했다. 이로써 이탈리아는 스페인 항구에 대한 해군 접근권을 확보하고 지중해에서 이탈리아의 영향력을 증가시켰다.[118]
1935년 무솔리니는 에티오피아 침공을 결정했고, 제2차 이탈리아-에티오피아 전쟁은 이탈리아의 국제적 고립으로 이어졌다. 국제 연맹의 비난을 받은 이탈리아는 1937년 국제 연맹을 탈퇴했다.[119][120] 1939년 이탈리아는 알바니아를 침공하여 이탈리아 보호령으로 만들었다.
3. 2. 군사
이탈리아는 통일 직후, 군대 해체로 인한 실업난과 사회 불안에 직면했다. 해체된 군인들 중 일부는 비적이 되어 왕국에 반기를 들었으며, 이들은 지주로부터 재산을 약탈하고 민중의 지지를 받기도 했다. 그러나 1863년 피카 법 제정으로 비적에 대한 압력이 높아지면서 민중의 지지를 잃고 1864년에 진압되었다.[2]
1866년, 제3차 이탈리아 독립전쟁에서 프로이센 편으로 참전하여 오스트리아 제국으로부터 베네치아를 병합했다. 1870년 프로이센-프랑스 전쟁으로 프랑스군이 철수하자 교황령을 점령하고, 다음 해 로마로 수도를 천도했다.[2]
이탈리아는 통일 직후부터 식민지 경영에 관심을 가졌다. 1882년 튀니지를 식민지로 만들려 했으나 실패했고, 1883년 에리트레아와 소말리아를 점령하며 식민지 경영을 시작했다. 청나라에는 영국, 프랑스, 독일과 함께 조계를 설치하고 군 병력을 주둔시켰다. 1911년 이탈리아-튀르크 전쟁에서 승리하여 리비아를 식민지로 삼았다.[2]
제1차 세계대전 초기에는 삼국 동맹에도 불구하고 중립을 선언했다. 그러나 1915년 런던 비밀 조약을 통해 달마티아와 남티롤을 할양받는 조건으로 연합군 측에 가담하여 전승국이 되었다. 전쟁 기간 동안 이탈리아 전역, 중동 전역 (제1차 세계 대전)에 군 병력이 파견되었고, 65만 명이 전사했다.[2]
이탈리아 왕국의 군사 조직은 다음과 같았다:
제2차 세계 대전에서 이탈리아는 추축국의 일원으로 참전했으나, 군사력 부족과 전략 실패로 인해 연합군에 패배했다. 1943년 무솔리니가 실각하고 카시빌레 휴전이 체결되면서 이탈리아는 연합군에 항복했다.
4. 경제
이탈리아는 통일 이전 여러 국가들의 통화 체계가 혼란스러웠는데, 사르데냐 왕국을 비롯한 주요 유럽 국가들이 채택한 금본위제와 달리 대부분 은본위제에 기반을 두고 있었다.[23]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프랑스 프랑 모델을 기반으로 한 금은 복본위제를 채택했다. 그러나 은화 교환 제한과 은화 순도 차이 등 프랑스 체계와는 다른 두 가지 특징을 보였다.[24] 이탈리아 왕국 선포 4개월 후, 정부는 이탈리아 리라를 새로운 국가 통화로 도입했다. 1861년 7월 17일 왕령에 따라 새로운 통화의 법정 통화가 설정되었고, 통일 이전 화폐는 리라로 교환되었으며 지역 화폐는 해당 지역에서 계속 법정 통화로 사용되었다.[25]
1861년부터 1940년까지 이탈리아는 여러 경제 위기와 제1차 세계 대전을 겪었음에도 불구하고 상당한 경제 성장을 이루었다. 다른 현대 국가들과는 달리, 이탈리아의 산업 성장은 주로 중소 가족 기업들에 의해 주도되었다.
정치적 통일은 지역 간의 문화, 정치, 경제적 차이로 인해 자동적인 경제 통합으로 이어지지 않았다. 이탈리아는 여러 단계에 걸쳐 산업화에 성공했지만, 강대국 중에서는 가장 낙후된 경제를 가지고 있었으며, 특히 석탄 수입과 곡물 수출을 하는 외국 무역에 크게 의존했다.
통일 후 이탈리아는 노동력의 60%가 농업에 종사하는 주로 농업 사회였다. 1880년대 위기 이후 기술 발전으로 이탈리아 농산물 수출 기회가 증가했다. 산업화와 함께 농업 종사 비율은 20세기 초에 50% 미만으로 감소했다. 그러나 남부 농업은 건조한 기후로 어려움을 겪었고, 북부에서는 말라리아가 아드리아 연안 저지대 경작을 방해하는 등 모든 지역이 발전의 혜택을 받은 것은 아니었다.
초기 국가의 외교 및 군사 정책 집중은 1873년 이후 쇠퇴한 농업을 소홀히 하는 결과를 초래했다. 1877년 이탈리아 의회는 8년간의 조사를 통해 기계화와 현대 농업 기술 부족, 지주들의 토지 개발 실패를 지적했다. 또한 대부분의 농업 노동자는 경험이 없는 단기 계약직(bracciantiit)이었다. 안정적인 소득이 없는 농부들은 빈약한 음식으로 연명해야 했고, 질병이 빠르게 확산되었으며, 주요 콜레라 유행으로 최소 5만 5천 명이 사망했다. 대지주들의 강력한 정치적, 경제적 반대로 인해 정부의 조치는 제한적이었다. 1910년 또 다른 조사 위원회에서도 유사한 문제점을 발견했다.
1890년경에는 농업에서 거의 유일하게 성공적인 분야였던 이탈리아 와인 산업에서도 과잉 생산 위기가 발생했다. 1870년대와 1880년대에 프랑스 포도 재배가 곤충 피해로 어려움을 겪으면서 이탈리아는 유럽 최대 와인 수출국이 되었지만, 1888년 프랑스가 회복되면서 이탈리아 와인 수출은 붕괴되어 실업과 파산이 발생했다.
1860년대부터 이탈리아는 철도 개발에 많은 투자를 했다. 1861년부터 1872년 사이에 철도망이 3배 이상 증가했고, 1890년까지 다시 두 배로 증가했다. 사르데냐 왕국 출신의 Gio. Ansaldo & C.는 FS 113형 기관차와 FS 650형 기관차를 통해 최초의 이탈리아산 기관차를 제공했다. 시칠리아 섬의 첫 철도 구간은 1863년 4월 28일 팔레르모-바게리아 노선이었다. 1914년까지 이탈리아 철도는 약 17,000km의 철도를 보유했다.
파시스트 독재 시대에는 군사 기술 분야를 중심으로 새로운 기술적 성과에 막대한 자금이 투입되었다. 그러나 1933년 4일 만에 대서양 횡단 해상 여행 기록을 세운 렉스 건조와 1933년 세계에서 가장 빠른 수상 비행기였던 Macchi-Castoldi M.C.72 개발과 같은 명성 프로젝트에도 많은 돈이 지출되었다. 1933년 이탈로 발보는 시카고의 세계 박람회에 수상 비행기를 타고 대서양 횡단 비행을 완료했는데, 이는 파시스트 지도부의 힘과 파시스트 정권하에서 국가가 이룬 산업 및 기술 발전을 상징했다.
지표 | 1861 | 1870 | 1880 | 1890 | 1900 | 1910 | 1920 | 1930 | 1940 | 1945 |
---|---|---|---|---|---|---|---|---|---|---|
GDP (10억 달러) | 37.995 | 41.814 | 46.690 | 52.863 | 60.114 | 85.285 | 96.757 | 119.014 | 155.424 | 114.422 |
1860년대와 1870년대 이탈리아 제조업은 후진적이고 소규모였으며, 농업 부문이 국가 경제의 중심이었다. 이탈리아는 대규모 석탄 및 철광석 매장량이 부족했다.[28] 1880년대 농업 위기로 인해 포 강 유역(Po Valley)에서 더욱 현대적인 농업 기술이 도입되었고,[29] 1878년부터 1887년까지 중공업 기반 구축을 위해 보호무역주의(protectionist) 정책이 도입되었다.[30]
1880년대 산업화는 빠르게 진행되어 1912/13년까지 지속되었고, 조리티 정부 하에서 정점에 달했다. 산업 시설들은 수력(hydropower) 에너지 지역에 집중되었다.[31] 1887년부터 1911년까지 수력발전(hydroelectricity)이 주요 에너지원이 되었으며, 60개가 넘는 발전소가 건설되었다.[32] 1881년부터 1887년까지 이탈리아의 섬유, 기계, 철강, 철, 화학 산업은 연평균 4.6% 성장했다.[33] 산업 호황의 중심에는 밀라노 공과대학교와 토리노 공과대학교와 같은 고등 교육 기관이 있었다.
크레디토 모빌리아레(Credito Mobiliare)의 국영 및 민간 자본으로 제철소가 설립되었다. 특히 1884년 테르니(Terni)와 1897년 엘바(Elba)의 철광석을 사용하는 피옴비노(Piombino)에 설립되었다. 남부의 상대적 낙후성은 국가의 중심적인 문제로 남아 있었다. 프란체스코 사베리오 니티(Francesco Saverio Nitti), 가에타노 살베미니(Gaetano Salvemini), 시드니 소니노(Sidney Sonnino) 등이 "남부 문제(Southern question)"에 대한 다양한 해결책을 제시했지만, 정부는 나폴리(Naples)와 같은 특정 문제 지역에서만 조치를 취했다.[34] 제노아(Genoa)의 ILVA 그룹은 이탈리아 정부의 지원을 받아 바뇨리(Bagnoli) 제철소를 건설했다. 1898년, 나폴리 엔지니어 에르네스토 스타사노(Ernesto Stassano)는 최초의 간접 아크 전기로인 스타사노 로(Stassano furnace)를 발명했다. 1917년까지 이탈리아 철강 공장은 스타사노, 바사네세, 안젤리니가 제조한 88개의 간접 아크로를 운영했다.[35]
1899년 조반니 아넬리(Giovanni Agnelli)가 체이라노 형제의 설계와 특허를 사들여 피아트 자동차 공장을 설립하면서 자동차 산업이 시작되었다. 1906년 시칠리아(Sicily) 산악 지대에서 타르가 플로리오(Targa Florio)가 시작되었다.
금융 부문에서 조리티 총리는 연금(pensions)을 증가시키고 국가 예산(state budget)을 재구조화했다. 정부는 대기업과 은행의 지원을 확보했다. 1900년부터 연간 수입이 약 5천만 리라였던 국가 예산은 철도의 국유화(nationalization)를 통해 더욱 강화될 예정이었다.
1905년 3월 철도 노동자들의 노동 불안으로 조리티는 사임하고, 알레산드로 포르티스(Alessandro Fortis)가 후임 총리가 되었다. 그는 1905년 4월 22일 137호 법으로 철도의 국유화를 승인했고, 전화(telephone) 시스템도 국유화되었다.[36] 포르티스 정부는 1906년 초까지 집권했고, 이후 시드니 소니노(Sidney Sonnino)의 단기 정부를 거쳐 조리티가 세 번째 임기를 시작했다. 조리티는 1906년 베수비오 화산(Vesuvius) 폭발과 1908년 대지진과 같은 자연 재해로 인한 남부 이탈리아의 경제 상황에 대처했다.
1906년 정부는 국가 이자세(interest tax)율을 5%에서 3.75%로 인하했다. 이 조치는 국가 재정에 필요한 부담을 줄이고, 중공업(heavy industry)의 성장을 촉진했다. 그 후의 예산 균형(budget balance)으로 실업(unemployment)을 크게 줄이는 주요 정부 공공사업을 재정할 수 있게 되었는데, 그 예로 1906년 심플론 터널(Simplon Tunnel) 완공을 들 수 있다. 고트하르트 (1872-1880), 심플론 (1898-1906), 뢰치베르크 (1907-1913) 철도 터널 건설을 통해 스위스(Switzerland)와 인접 유럽 국가에 중요한 3개의 주요 알프스(Alps) 횡단이 이루어졌다. 이러한 프로젝트의 노동력은 대부분 이탈리아인이었다.
철도 국유화 외에도 보험 국유화가 계획되었고, 프랑스와의 무역 전쟁이 끝났다. 조리티는 과일, 채소, 와인을 프랑스로 수출하고, 사탕무(sugar beet) 재배와 포 강 유역(Po Valley) 가공을 증진시켰으며, 중공업이 남부에도 발을 디딜 수 있도록 장려했다. 1908년 여성과 12세 미만 아동의 노동 시간을 제한하는 법률이 통과되었다.[36] 남부의 불우한 지역을 위한 특별 법이 뒤따랐지만, 대지주들의 저항으로 대부분 시행에 실패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소작농의 경제 상황은 상당히 개선되었다.
1911년 이탈리아 인구의 55.4%가 농업(agriculture)에, 26.9%가 산업에 종사했다.[37]
5. 사회
1898년부터 1901년 사이 이탈리아에는 심각한 사회적 긴장이 나타났다. 당시 이탈리아의 사회 법규는 유럽에서 최하위 수준이었다.[38] 사회주의자들은 사회 정책뿐만 아니라 식민지 확장에도 반대했다. 프란체스코 크리스피 총리는 세금 인상과 긴축 조치를 통해 식민지 정책에 자금을 조달했다. 1898년 5월 7일, 밀라노에서는 급등하는 빵값에 항의하는 대규모 시위가 발생했고, 피오렌초 바바-베카리스 장군은 군중에게 포병과 소총 사격을 가했다. 이를 바바 베카리스 학살이라고 한다. 이 학살로 인해 82명에서 300명 사이의 사망자가 발생했다.[40][41] 움베르토 1세 국왕은 전보로 장군을 축하하고 훈장을 수여했고, 이로 인해 1900년 몬차에서 무정부주의자 가에타노 브레시에게 암살당했다.
움베르토 1세의 후계자는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3세였지만, 1901년부터 1914년까지 총리직을 수행한 조반니 졸리티가 이탈리아 정치를 주도했다. 이 시기를 '졸리티 시대'라고 부른다. 졸리티는 개혁과 혁명 운동에 양보하고 산업화를 촉진했다. 1912년에는 독일 모델을 기반으로 국가 사회 보험을 도입했고, 재산 제한 없는 선거권을 개혁하여 투표권자 수를 800만 명으로 증가시켰다. 실업 보험은 독일보다 8년 빠른 1919년에 도입되었다.[43]
1880년대에는 심각한 노동 분쟁이 발생했고, 1889년경에는 노동당에 대한 탄압이 시작되었다. 시칠리아 파시는 "이탈리아 사회주의의 첫 행위"로 여겨졌으며, 프란체스코 크리스피 총리가 이끄는 가혹한 군사 작전 후 진압되었다. 산업 노동자들은 1892년에 이탈리아 노동자당을 결성했고, 1893년에 이탈리아 사회당으로 개명되었다. 1901년 졸리티는 이 당을 정부에 통합하려고 했지만, 거부당했다. 1912년 이탈리아-튀르크 전쟁에 동의한 이탈리아 개혁 사회당이 분열되었다.
측정값 | 1861년 | 1870년 | 1880년 | 1890년 | 1900년 | 1910년 | 1920년 | 1930년 | 1940년 | 1946년 |
---|---|---|---|---|---|---|---|---|---|---|
인구(백만 명) | 22.182 | 25.766 | 28.437 | 30.947 | 32.475 | 34.565 | 37.837 | 40.703 | 43.787 | 45.380 |
급격한 사회 변화에 대한 국가의 반응은 매우 늦었다. 남부의 지주와 북부의 산업가들로 이루어진 사회 엘리트들이 오랫동안 사회 변화를 거부했고, 중세 이후 사회 시스템을 지배해 온 교회의 활동에 의존하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이다. 이탈리아의 인구는 1800년 1,830만 명에서 1900년 3,380만 명으로 증가했지만,[45] 유럽 인구 비율은 계속 감소했다. 이는 이탈리아의 발전적 결함과 1852년경부터 시작된 대규모 이민 때문이었다. 1985년까지 약 2,900만 명이 이탈리아를 떠났다. 1876년부터 1890년경까지는 주로 북부 출신이었으나, 이후 남부 이탈리아인들의 이민이 증가했다. 1876년부터 1915년까지 1,400만 명이 넘는 사람들이 주로 남아메리카와 북아메리카로 이민을 갔다.[46] 주요 목적지는 미국이었고, 아르헨티나, 브라질, 우루과이 등에도 많은 이탈리아인들이 이민을 갔다.
이민의 주된 이유는 널리 퍼진 빈곤, 특히 농촌 지역의 빈곤이었다. 1950년대까지 이탈리아의 일부 지역은 농촌, 농업, 전근대 사회로 남아 있었다.[55] 농업의 쇠퇴와 격렬한 갈등, 급속히 성장하는 도시의 주저하는 산업화가 충분한 일자리를 제공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정부는 1878년부터 1887년까지 높은 관세 장벽을 설치하고 보호 무역 정책을 추진했다.
산업화가 촉진되고 인프라가 북부에서 확장되는 동안, 정부는 남부에서 대농장을 지원했다. 중부 이탈리아에서는 토지를 임대할 수 있었기 때문에 이 지역에서의 이주는 적었다. 나폴리는 600년 동안 나폴리 왕국과 두 시칠리아 왕국의 수도였으나, 1861년 통일된 이탈리아의 도시가 되면서 많은 관료직이 사라지고 실업이 많았다. 1880년대 콜레라 전염병으로 인해 많은 사람들이 도시를 떠났다. 남부에서는 통일이 중세 이후로 유지되어 온 봉건 제도를 폐지했지만, 농민들이 자신의 땅을 얻지는 못했다. 또 다른 이유는 과잉 인구, 특히 남부 이탈리아였다. 통일 후 남부 이탈리아는 처음으로 상수도와 병원 의료 서비스를 이용할 수 있게 되었고, 이는 유아 사망률 감소와 인구 증가로 이어져 20세기 초 많은 젊은 남부 이탈리아인들이 이민을 가게 되었다.
통화 정책은 심각한 문제를 야기했다. 금본위제가 시행되었고, 1865년에 설립된 라틴 통화 동맹과 이탈리아 리라를 금에 연결함으로써 정부는 이탈리아에 외국 투자 자본을 유치할 수 있었다.
이탈리아 인구는 특히 남부에서 부유한 엘리트와 빈곤한 노동자들 사이에 심각하게 양분되어 있었다. 1881년 인구 조사에 따르면 100만 명이 넘는 남부 일용직 노동자들이 만성적인 고용 부족에 시달렸다.[47] 19세기 후반 남부의 소작농과 소규모 지주, 소작인들은 종종 갈등과 반란 상태에 있었다.[48] 1870년대부터 지식인, 학자, 정치인들은 남부 이탈리아의 경제적, 사회적 상황을 조사했는데, 이 운동은 Meridionalismoit("남부주의")로 알려져 있다. "1910년 남부 조사 위원회"는 이탈리아 정부가 심각한 경제적 차이를 개선하는 데 실패했음을 지적했다. 부유한 지주들이 가난한 사람들을 착취할 수 있었다.[49] 이탈리아의 다른 지역, 특히 북부 이탈리아와 비교했을 때 남부 이탈리아 지역의 사회경제적 발전에서 지속적인 후진성을 나타내는 상황을 남부 문제라고 한다.
통일된 이탈리아로의 이행은 남부에게 순탄치 않았다. 통일과 근대화의 과정은 이탈리아 북부와 남부 사이의 격차를 만들었다. 사람들은 남부를 "후진적"이고 야만적이라고 비난했다.[50] 나폴리 남쪽 지역 전체는 수많은 심각한 경제적, 사회적 문제에 시달렸다.[51] 그러나 남부의 많은 정치적 문제와 "수동적"이라는 평판은 새로운 정부가 남부를 소외시켰기 때문이다. 교통이 어려웠고, 토양 비옥도가 낮았으며, 삼림 벌채가 심각했고, 많은 기업들이 높은 보호 관세 때문에만 영업을 유지할 수 있었고, 대농장은 종종 관리가 부실했고, 대부분의 농민들은 매우 작은 토지를 소유했으며, 만성적인 실업과 높은 범죄율이 있었다.[52]
카부르는 기본적인 문제가 정부의 무능이라고 판단하고, 피에몬테 법 체계를 엄격하게 적용함으로써 이를 해결할 수 있다고 믿었다. 주요 결과는 산적의 급증이었고, 이는 거의 10년 동안 지속된 피비린내 나는 내전으로 변했다. 반란은 주로 바질리카타와 북부 풀리아에서 산적 카르미네 크로코와 미켈레 카루소가 이끌었다.[53] 남부 폭동이 끝나면서 특히 미국과 남미로 수백만 명의 농민들이 대거 유출되는 이탈리아 이민이 발생했다. 다른 사람들은 제노바, 밀라노, 토리노와 같은 북부 산업 도시로 이주하여 고향으로 돈을 보냈다.[52]
첫 번째 이탈리아 이민은 리소르지멘토 20년 후인 1880년경에 시작되어 파시스트 이탈리아의 부상과 함께 1920년대부터 1940년대 초까지 끝났다.[54] 빈곤, 특히 토지 부족이 이민의 주요 원인이었다. 메짜드리아it 소작농이 이탈리아, 특히 남부에서 번성했고, 재산은 여러 세대에 걸쳐 세분화되었다. 특히 남부 이탈리아의 상황은 혹독했다.[54] 1860년대부터 1950년대까지 이탈리아 대부분은 농촌 사회였으며, 특히 남부와 북동부 이탈리아의 토지 관리 관행은 농민들을 땅에 머물게 하기 어려웠다.[55]
또 다른 요인은 이탈리아 통일 이후 사회경제적 여건이 개선됨에 따라 남부 이탈리아의 인구 과잉과 관련이 있다.[56] 이로 인해 인구 급증이 발생했고, 새로운 세대는 19세기 후반과 20세기 초에 대량으로, 대부분 아메리카로 이주해야 했다.[57]
이탈리아 통일은 특히 땅이 귀족이나 종교 단체 또는 왕의 불가침 재산이었던 중세 이후 남부에 남아 있던 봉건 토지 제도를 무너뜨렸다. 그러나 봉건제의 붕괴와 토지 재분배가 반드시 남부의 소농들이 자신의 토지를 소유하게 된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았다. 많은 사람들이 토지가 없었고, 토지는 상속인들 사이에 세분화됨에 따라 토지가 점점 더 작아지고 생산성이 떨어졌다.[55]
1860년부터 제1차 세계 대전 사이에 총 1,600만 명 중 900만 명의 이탈리아인들이 영구적으로 이탈리아를 떠났고, 그 대부분이 북미 또는 남미로 갔다.[59] 1876년부터 1914년까지 1,400만 명이 이탈리아를 떠났다. 1876년부터 1900년까지 연평균 이민자 수는 거의 22만 명이었고, 1901년부터 1915년까지는 거의 65만 명이었습니다. 1900년 이전에는 이탈리아 이민자의 대다수가 이탈리아 북부와 중부 출신이었습니다. 1870년부터 1914년까지 이탈리아를 떠난 이민자의 3분의 2는 전통적인 기술을 가진 남성이었습니다. 1896년 이전에는 이민자의 절반이 농민이었습니다.[57]
많은 이탈리아 이민자들은 알타레 델라 파트리아 건설에 기부했고, 이를 기념하여 이탈리아 무명용사의 묘 옆에 영구적으로 타오르는 두 개의 향로 옆에 있는 명판에는 Gli italiani all'estero alla Madre Patriait ("해외 이탈리아인들, 조국에")라고 적혀 있다.[60]
6. 문화
이탈리아에서는 1859년, Legge Casatiit (카사티 법)이 다가올 이탈리아 국가의 교육 책임을 명령하면서 국가 교육 제도가 생겨났다 (이탈리아 통일은 1861년에 이루어졌다).[62]
카사티 법은 초등 교육(scuola elementareit)을 의무화하고 문해율 향상을 목표로 했다. 이 법은 초등 교육을 개별 도시에, 중등 교육을 주에, 그리고 대학은 국가가 관리하도록 했다. 카사티 법과 의무 교육에도 불구하고, 농촌(및 남부) 지역에서는 어린이들이 학교에 가지 않는 경우가 많았고(초등 교육 등록률이 90%에 도달하는 데는 70년이 걸렸다), 1861년에 거의 80%에 달했던 문맹률이 절반으로 줄어드는 데는 50년 이상이 걸렸다.[62]
이탈리아 교육 제도와 관련된 다음 중요한 법은 Legge Gentileit (젠틸레 법)이다. 이 법은 1923년, 베니토 무솔리니와 그의 파시스트당이 집권했을 때 제정되었다. 실제로 조반니 젠틸레는 파시스트 체제에 적합한 교육 제도를 만드는 임무를 맡았다. 의무 교육 연령은 14세로 높아졌고, 어느 정도 사다리 체계를 기반으로 했다. 5년간의 초등 교육 후에는 scuola mediait를 선택하여 liceoit 및 기타 중등 교육에 진학하거나, 노동 계층에 빠르게 진입하기 위한 'avviamento al lavoro'(직업 훈련)를 선택할 수 있었다. 이 개혁은 1859년 카사티 법에 의해 만들어진 Liceo Classicoit (파시스트 시대에는 미래 상류층을 형성한다는 목표로 중등 교육의 정점으로 여겨졌다)의 역할을 강화했고, 기술, 상업 및 산업 연구소와 Liceo Scientificoit를 만들었다. 젠틸레의 이탈리아 관념론의 영향은 컸으며, 그는 가톨릭 종교를 교육의 "기초와 정점"으로 간주했다.[62]
7. 역대 국왕
국왕 이름 | 출생-사망 | 재위 시작 | 재위 종료 |
---|---|---|---|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2세 | 1820년–1878년 | 1861년 3월 17일 | 1878년 1월 9일 |
움베르토 1세 | 1844년–1900년 | 1878년 1월 9일 | 1900년 7월 29일[1] |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3세 | 1869년–1947년 | 1900년 7월 29일 | 1946년 5월 9일[2] |
움베르토 2세 | 1904년–1983년 | 1946년 5월 9일 | 1946년 6월 12일[3] |
이탈리아 국왕은 살리카 법에 따라 사보이 왕가의 남자에게 왕위가 상속되었다.[4] 국왕의 칭호는 "하느님의 은총으로 그리고 국민의 의지에 따라 이탈리아 국왕이자 알바니아 국왕(1939년부터 1943년까지), 에티오피아 황제(1936년부터 1943년까지)"였다.[5]
# | 이미지 | 이름 (생몰년도) | 통치 기간 | 휘장 | 문장 | |
---|---|---|---|---|---|---|
시작 | 종료 | |||||
1 | ![]() |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2세 (1820–1878) | 1861년 3월 17일 | 1878년 1월 9일 | ||
2 | ![]() | 움베르토 1세 (1844–1900) | 1878년 1월 9일 | 1900년 7월 29일 | -- | |
3 | ![]() |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3세 (1869–1947) | 1900년 7월 29일 | 1946년 5월 9일 | -- | |
4 | ![]() | 움베르토 2세 (1904–1983) | 1946년 5월 9일 | 1946년 6월 12일 | -- |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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