케스티우스 갈루스
1. 개요
케스티우스 갈루스는 63년 혹은 65년부터 시리아 속주의 레가투스였다. 66년 유대에서 일어난 제1차 유대-로마 전쟁 발발 당시, 갈루스는 30,000명의 병력을 이끌고 유대 지역으로 진격했다. 예루살렘 공방전에서 성전산 점령에 실패하고 후퇴하는 과정에서, 반란군에게 기습을 받아 큰 피해를 입었다. 시리아로 돌아온 후 얼마 지나지 않아 사망했으며, 그의 뒤를 리키니우스 무키아누스가 이었다.
| 이름 | 가이우스 케스티우스 갈루스 |
|---|---|
| 로마자 표기 | Gaius Cestius Gallus |
| 출생 | 기원전 1세기 |
| 활동 시기 | 1세기 |
|---|---|
| 직업 | 정치가, 군인 |
| 직책 | 집정관, 시리아 총독 |
| 임기 시작 | 63년 |
| 임기 종료 | 67년 |
| 사망 연도 | 67년 |
|---|---|
| 사망 장소 | 로마 |
| 가족 관계 | 푸블리우스 페트로니우스의 의붓아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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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 로마의 레가투스 -
트라야누스
트라야누스는 로마 황제로서 다키아 정복과 파르티아 원정으로 영토를 확장하고 원로원과 협력하여 '최고의 황제'로 칭송받았으며, 대규모 건축 사업과 사회복지 정책을 통해 로마 제국의 발전과 사회 시스템 개선에 기여했다. -
고대 로마의 레가투스 -
하드리아누스
하드리아누스는 76년에 태어나 117년부터 138년까지 로마 황제로 재위하며 제국 방어와 통합을 위해 노력했고, 하드리아누스 방벽 건설, 판테온 재건 등의 업적을 남겼지만, 유대인 반란과 독단적인 면모로 비판받기도 했다. -
로마 제국의 장군 -
트라야누스
트라야누스는 로마 황제로서 다키아 정복과 파르티아 원정으로 영토를 확장하고 원로원과 협력하여 '최고의 황제'로 칭송받았으며, 대규모 건축 사업과 사회복지 정책을 통해 로마 제국의 발전과 사회 시스템 개선에 기여했다. -
로마 제국의 장군 -
아리아노스
아리아노스는 로마 제국의 역사가이자 철학자, 군인으로, 스토아 철학자 에픽테토스의 제자였으며, 《알렉산드로스 원정기》를 저술했고, 로마 제국의 총독을 역임하며 군사적 능력을 발휘했다. -
로마 제국의 집정관 -
트라야누스
트라야누스는 로마 황제로서 다키아 정복과 파르티아 원정으로 영토를 확장하고 원로원과 협력하여 '최고의 황제'로 칭송받았으며, 대규모 건축 사업과 사회복지 정책을 통해 로마 제국의 발전과 사회 시스템 개선에 기여했다. -
로마 제국의 집정관 -
타키투스
타키투스는 로마 제정 초기 역사를 다룬 저서를 남긴 역사가이자 정치가로, 황제와 원로원 간의 권력 관계, 지배층의 부패, 언론 자유의 중요성 등을 다루며 후대 역사가들에게 큰 영향을 미쳤다.
2. 시리아 총독
갈루스는 63년 혹은 65년부터 시리아 속주의 레가투스였다. 66년 9월, 제1차 유대-로마 전쟁이 시작되자 질서를 회복하기 위해 3만 명이 넘는 병력을 이끌고 유대로 진격했다. 안티오크에 집결한 갈루스의 군대는 제12군단 풀미나타와 시리아에 주둔한 다른 세 군단의 파견대, 6개 대대 규모의 보조 보병, 4개 알라 규모의 기병대로 구성되었다. 이러한 정규군은 아그리파 2세와 다른 속국 통치자들이 제공한 14,000명의 동맹군에 의해 지원받았다.
3. 유대 반란
갈루스는 63년 혹은 65년부터 시리아 속주의 레가투스였다. 제1차 유대-로마 전쟁이 발발하던 66년 9월, 질서를 회복하기 위해 30,000명의 병력을 이끌고 유대로 진격했다.
3.1. 로마군의 구성
안티오키아에서 집결한 갈루스의 군대는 풀미나타 제12군단과 시리아를 근거지로 하는 다른 세 개 군단의 파견부대, 보조군 보병 6개 코호르스, 알라이 기병대로 구성되었다. 이 정규군 부대들은 아그리파 2세와 다른 종속국의 지배자들이 보낸 동맹군 14,000명의 지원을 받았다.
3.2. 예루살렘 공방전과 베트 호론 전투
갈루스는 갈릴리와 유대 해안 지역 점령을 위해 파견된 분견대로 인해 병력이 줄어든 채로, 예루살렘 점령을 위해 내륙으로 향했다. 부대의 짐 행렬과 후방부대에 손실을 입은 후, 스코푸스산에 도착해 도시 외곽을 통과했으나, 성전산을 점령하지는 못했다. 9일 간의 공성전 후, 갈루스는 해안가로 물러나기로 결정했다. 이는 기습 공격으로 공성 장비를 잃고 10월부터 비가 내려 보급선이 끊길 것을 우려했기 때문으로 보인다.
시몬 바르 기오라가 이끄는 예루살렘의 주전파는 로마군에 맞서 봉기했고, 베트 호론을 거쳐 안티파트리스까지 추격했다.
요세푸스는 처음엔 로마군 사망자를 515명이라 했지만, 이후 후퇴 과정에서 전사한 로마군 보병은 5,300명, 기병은 380명이라고 기록했다. 이 사건은 네로 집권기 12년 말케스월에 로마군에게 일어났고, 로마와의 전쟁 시작을 알렸다.
3.3. 베트 호론 전투의 결과
갈루스는 병력이 줄어든 채로 예루살렘을 점령하기 위해 내륙으로 향했다. 부대의 짐 행렬과 후방부대를 잃는 손실을 겪은 후에, 갈루스는 스코푸스산에 도착했고 도시 외곽을 통과했으나, 성전산을 명백하게 점령할 수가 없었다. 9일 간의 공성전 후, 갈루스는 해안가로 물러나기로 결정했는데, 기습 공격으로 공성 장비가 없어지고 10월부터 비가 내리기 시작하여 보급선이 끊길 것을 우려했기 때문으로 보인다.
시몬 바르 기오라가 이끄는 예루살렘의 주전파는 로마군에 맞서 들고 일어났고, 베트 호론을 통해서, 멀리는 안티파트리스까지 추격했다.
요세푸스는 초기엔 로마군의 사망자를 515명이라 했지만, 이어지는 후퇴 과정에서 전사한 로마군의 수를 보병 5,300명, 기병 380명이라 했다. 이 사태는 네로 집권기 12년 말케스월에 로마군에게 일어났고, 로마와의 전쟁 시작을 나타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