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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차 유대-로마 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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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제1차 유대-로마 전쟁은 서기 66년부터 73년까지 유대 속주에서 일어난 유대인들의 로마 제국에 대한 반란이다. 헤롯 왕 사후 로마의 직접 통치를 받던 유대 지역은 로마의 종교적 관습 강요와 세금 수탈에 대한 불만이 고조되면서 봉기가 시작되었다. 66년 카이사레아에서 발생한 유대인과 그리스인 간의 충돌이 도화선이 되었고, 예루살렘 성전의 보물 약탈과 로마군의 강경 진압이 반란을 확산시켰다.

반란군은 임시 정부를 수립하고 로마에 대항했으나, 로마의 강력한 군사력에 밀려 예루살렘은 70년에 함락되고 성전이 파괴되었다. 이후 마사다 요새에서 저항이 이어졌으나 73년 함락되면서 전쟁은 종결되었다. 이 전쟁으로 유대인 사회는 큰 피해를 입었고, 유대교는 성전 중심에서 회당 중심으로 변화했다. 전쟁의 참상을 기록한 플라비우스 요세푸스의 '유대 전쟁사'는 중요한 사료로 평가받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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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차 유대-로마 전쟁 - [전쟁]에 관한 문서
분쟁 개요
분쟁 명칭제1차 유대-로마 전쟁
다른 명칭유대 독립 전쟁
대반란 (히브리어: המרד הגדול, ha-Mered Ha-Gadol)
Bellum Iudaicum (라틴어)
일부유대-로마 전쟁
1세기 유대아와 갈릴래아
1세기 유대아와 갈릴래아
시기66년 - 74년
장소유다이아 속주
결과로마의 완승
예루살렘성전 파괴
바리사이파에서 랍비 유대교 발달
유대인 인구 상당수 사망, 노예화, 이주 및 많은 도시와 마을 파괴
유대인 엘리트 붕괴 및 사두개파, 에세네파 소멸
로마 군사 캠프 및 콜로니아 건설
로마의 플라비우스 통치 강화
교전 세력
교전 1로마 제국
교전 2유대 임시 정부
지원 세력사두개파
바리새파
아디아베네 자원병
농민 세력
에돔인 (69–70년)
교전 3급진 세력
급진 세력 종류열심당
에돔 (68년)
시카리
지휘관 및 지도자
로마 제국게시우스 플로루스 (66년)
케스티우스 갈루스 (사망) (66년)
베스파시아누스 (부상) (67–69년)
티투스 (67–71년)
섹스투스 루킬리우스 바수스 (71–72년)
루키우스 실바 (72–73년)
헤로데 아그리파 2세 (부상)
유대 임시 정부아나누스 벤 아나누스 (전사)
요세프 벤 구리온 (처형)
여호수아 벤 가믈라 (처형)
엘레아자르 벤 하나니아 (전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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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레아자르 벤 시몬 (전사)
에돔 지도자요한
야곱 벤 소사 (68년)
시몬 벤 카틀라스
피네아스 벤 클루소투스
시카리 지도자메나헴 벤 예후다 (처형)
엘레아자르 벤 야이르 (전사)
병력 규모
로마 제국로마 수비대 3,000명 (66년 봄)
시리아 군단 30,000–36,000명 (66년 여름)
5개 군단 60,000–80,000명 (67–70년)
프레텐시스 제10군단 6,000명 (70–73년)
유대 임시 정부군20,000명 (66–67년)
10,000명 (68년)
파라심 경비대 3,000명
아디아베네 전사 500명
기타 유대 세력농민:
40,000명 (69년)
15,000명 (70년)
3,000명 (71년)
에돔인 5,000명 (69–70년)
급진 세력 규모요하난 휘하 열심당 6,000명
엘레아자르 휘하 열심당 2,400명
에돔인 20,000명 (68년)
시카리 규모수천 명 (67년)
수십/수백 명 (73년)
사상자 및 피해
로마 제국10,000명 이상의 병사 사망
유대인25,000–30,000명 사망
열심당 및 에돔인10,000–20,000명 사망
시카리수천 명 사망
민간인 피해요세푸스에 따르면 예루살렘에서 110만 명, 갈릴리에서 10만 명의 비전투원이 사망하고 97,000명이 노예가 됨.
매슈 화이트는 제1차 및 제3차 유대-로마 전쟁의 총 사망자 수를 약 350,000명으로 추정.
관련 링크
관련 전투 목록예루살렘 (66년)
알렉산드리아 폭동
1차 세포리스
1차 야파
게바
베트-호론
엔게디
북부 반란
2차 세포리스
가바라
요드파트
타리케아
감라
타보르 산
기슈할라
열심당 성전
예루살렘 (70년)
헤로디움
마케루스
야르데스
마사다
관련 서적유대 전쟁사

2. 배경

헤롯 대왕 사후, 유대 속주는 로마 총독에 의해 직접 통치되었지만, 헤롯 대왕의 손자 아그리파 1세는 친로마 노선을 통해 41년에 유대 통치를 위임받았다. 44년 아그리파 1세가 병사하자, 유대 속주는 다시 로마의 직할지가 되었다. 로마 제국은 기본적으로 피지배 민족의 문화를 존중하는 통치 정책을 펼쳤지만, 다신교 문화권인 지중해 세계에서 일신교를 믿는 유대 지역은 특수한 문화를 지녔기에, 로마에 대한 유대인들의 반감은 커져만 갔다.

2. 1. 로마와 유대 관계 악화

헤롯 대왕 사후, 유대 속주는 로마 총독에 의해 직접 지배를 받았다. 하지만 헤롯 왕의 손자 아그리파 1세가 친로마 노선을 취해 41년에 유대 왕으로 임명되어 유대를 통치하게 되었다. 그러나 44년 아그리파 1세가 병사하자 유대 속주는 다시 로마의 직할지가 되었다.[71] 로마 제국은 기본적으로 피지배 민족의 문화를 존중했지만, 유대 속주는 일신교라는 독특한 문화를 지녔기에 로마와 끊임없이 마찰을 일으켰다.

당시 유대 속주 원주민 세리들이 세금을 거두는 과정에서 폭리를 취했고, 이교도인 로마인예루살렘 성전에서 제사를 주관하는 대제사장을 지명하자 유대인들의 불만이 커졌다.[71] 39년경에는 칼리굴라 황제가 스스로 신을 자처하며 제국 전역의 성전에 자신의 조각상을 세우게 한 사건을 계기로 유대인들의 불만이 폭발했다. 야훼 외에는 신이 없다고 여기는 유대인들은 로마 제국의 황제를 우상화하는 종교 정책을 거부하고 무장 봉기를 준비했다.

로마 행정관인 게시우스 플로루스와 로마 제국이 임명한 제사장들의 예루살렘 성전에서의 비리도 열심당의 세력이 커져 가게 했다.[72] 로마 가톨릭 신학자 존 도미니크 크로산에 따르면, 유대 독립 전쟁 당시 열심당원들은 대제사장들을 집단 학살하고, 성전세로 민중들을 수탈한[73] 죄의 증거인 채무 문서를 불태워버림으로써[74] 예루살렘 성전의 착취와 그 배후인 로마 제국에 대한 분노를 드러내었다.

3. 전쟁의 발발

요세푸스에 따르면, 66년 카이사레아의 지역 시나고그 앞에서 제사를 드리는 그리스인들과의 다툼이 전쟁 발발의 시작이었다.[75] 로마 주둔군은 그리스어를 할 줄 알아 중재할 수 있었으나 중재하지 않았다. 이에 분노한 대제사장의 아들이 성전에서 로마 황제를 위한 기도와 희생을 금지하고, 예루살렘 주둔 로마군을 급습했다.

유대 속주 장관 플로루스는 체납된 속주세 대신 예루살렘 성전 보물창고에서 17탈렌트의 금화[76]를 몰수하고, 항의하는 유대인들을 강경 진압했다. 이로 인해 66년 6월, 유대에서 로마 세력이 완전히 축출되는 폭동이 일어났다. 로마 수비대는 폭도들을 피해 왕궁으로 피신했고, 투항하면 목숨을 살려주겠다는 약속에 항복했지만 모두 학살당했다. 유대 내부 온건파의 중심이었던 대제사장도 동생과 함께 살해되었다. 유대 북부를 다스리던 유대 왕 아그리파 2세의 설득에도 불구하고, 여름에서 가을로 예루살렘에서 일어난 폭동은 유대 서부와 남부로 확산되었다. 카이사레아를 비롯한 유대의 항구도시, 시리아의 다마스쿠스, 이집트의 알렉산드리아에서도 평소 유대에 감정이 좋지 않던 그리스계 주민과 유대계 주민 간의 충돌이 발생했다.

시리아 속주 총독이자 군단장이었던 케스티우스 갈루스는 진압을 위해 안티오키아에 주둔하고 있던 제12군단과 유대 왕 아그리파 2세의 지원군을 이끌고 남하했다. 반란자 편에 선 도시를 차례로 공략하며 예루살렘으로 향했으나, 신전 언덕 공략에 실패하고 11월이 되자 안티오키아의 총독 관저로 돌아왔고 그 직후 병으로 사망했다.[77][78]

4. 유대 임시 정부 수립과 내분

갈루스(Gallus)의 패배 이후, 예루살렘에서 산헤드린과 함께 민중 회의가 소집되어 임시 정부가 수립되었다. 요세푸스(Josephus)에 따르면, 임시 정부는 진정한 반란보다는 로마와의 협상을 통한 해결을 원했다.[19] 전 대제사장 아나누스 벤 아나누스(Hanan ben Hanan|하난 벤 하난he)가 정부 수반 중 한 명으로 임명되어 요셉 벤 구리온과 함께 도시 요새화를 시작했다.[19] 조슈아 벤 감라도 지도자 역할을 맡았다.

Yosef ben Mattityahu|요세프 벤 마티탸후he로 알려진 요세푸스는 갈릴리와 골라니티스의 사령관으로, 요셉 벤 시몬(Yosef ben Shimon)은 예리코에 배정되었다.[19] 에세네파 요한(John the Essene)은 야파, 리다, 엠마우스, 탐나를, 엘리에제르 벤 하나니야(Eliezer ben Hananiya)와 조슈아 벤 자피아(Joshua ben Zafia)는 이두매아를 공동 지휘했으며, 니제르 더 페레안이 그들을 지휘했다. 므나세(Menasseh)는 페레아를, 요하난 벤 하나니야(Yohanan ben Hananiya)는 고프나와 아크라베타를 맡았다.[19]

''시카리''의 지도자 메나헴 벤 예후다는 예루살렘 장악에 실패하고 처형당했으며, ''시카리''는 예루살렘에서 추방되어 마사다로 후퇴했다.

기스칼라의 요한(John of Giscala|영어)은 갈릴리에서 요세푸스의 권위에 도전했지만 실패했다. 시몬 바르 기오라는 유대 북부 부유층을 상대로 캠페인을 벌이다 예루살렘 지도자들에 의해 추방되어 마사다로 도망갔다.

예루살렘 성전 사제단은 "거룩한 예루살렘"과 "시온의 자유를 위하여"라는 문구가 새겨진 고대 히브리 문자로 된 동전을 주조했다. 이 동전은 로마로부터의 독립을 상징하는 새로운 달력으로 날짜가 매겨졌고, "이스라엘의 세겔" 등으로 세겔로 지정되었다. 이는 고대 유대인의 주권을 불러일으키는 것이었다.

로마가 진격하는 동안, 예루살렘은 혼란에 빠졌다. 엘르아자르 벤 하나니아가 시작한 운동을 이어받은 열심당원들은 온건파 정부에 반대했다. 엘르아자르 벤 시몬 등의 열심당원 지도자들은 온건파 정부를 전복시키려 했고, 요한 오브 기스칼라를 동맹으로 삼았다. 열심당원들은 성전을 장악하고, 제비뽑기로 대제사장 파니아스 벤 사무엘을 선택했다.

온건파 지도자 아나누스 벤 아나누스는 열심당원들을 진압하려 했으나, 열심당원들은 이두매인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기원 68년 초, 이두매인들은 예루살렘에 들어가 도시 방어자들을 공격했고, 아나누스 벤 아나누스와 요슈아 벤 감라, 페레아의 니게르, 요셉 벤 구리온 등이 살해되었다. 열심당원들은 특별 재판소를 설치했고, 이두매인들은 대부분 예루살렘을 떠났다.

엔게디는 마사다에서 온 시카리들에 의해 약탈되고 파괴되었다.


유월절 축제 동안, ''시카리''는 엔게디를 습격하여 700명의 여성과 아이들을 죽이고 약탈했다. 인근 마을에 대한 유사한 습격은 이 지역을 황폐하게 만들었다.

5. 로마의 반격과 예루살렘 포위

케스티우스 갈루스가 이끌던 제12군단은 반란 진압에 실패하고, 안티오키아로 돌아온 직후 갈루스는 병으로 사망했다.[77][78] 이후 네로 황제는 베스파시아누스를 새로운 지휘관으로 임명하여 유대 반란 진압을 맡겼다.

베스파시아누스의 군대는 다음과 같이 구성되었다.

군단주둔지 및 출신특징
제5군단도나우강 연안 (발칸 반도 출신)
제10군단시리아 주둔군 (소아시아, 그리스 출신 보조병)
제15군단제5군단과 동일



이 외에도 유대 북동부의 로마 동맹 세력인 아그리파 2세가 이끄는 유대인 병사, 나바테아와 아라비아 병사들이 포함되어 있었다. 베스파시아누스는 각지에서 오는 군단과 동맹군을 기다리느라 사령관 임명 후 반년이 지난 67년 5월에야 군사 행동을 개시했다.

로마군은 유대 전역을 융단폭격하듯 공략하며 북쪽 해안에서 남쪽 예루살렘으로 접근했다. 67년 7월 20일, 갈릴리의 요타파타 요새가 47일간의 공방 끝에 함락되었는데, 이때 사망자는 4만 명, 포로는 1,200명에 달했다.[22][23] 대부분의 유대 장병들은 로마군에 항복하기보다는 자결을 택했고, 요세푸스 등 두 명만이 항복했다.

68년까지 북부 유대 지방의 반란은 거의 진압되었고, 로마군은 예루살렘을 동쪽, 서쪽, 북쪽에서 포위했다. 그러나 네로 황제의 죽음으로 유대 전쟁은 1년 반 동안 중단되었다. 유대인들은 방어 대책에 전념하면서도 유월절에 예루살렘 방문을 장려하며, '유일신' 여호와가 예루살렘을 지켜줄 것이라고 믿었다.

69년 7월, 베스파시아누스가 동방 군단에 의해 황제로 추대된 후 예루살렘 공략이 재개되었다. 시리아 총독 무키아누스는 서방으로 가고, 베스파시아누스는 이집트알렉산드리아에서 대기했다. 베스파시아누스의 아들 티투스가 유대 전쟁의 지휘를 맡았고, 이집트 장관 율리우스 알렉산드로스(유대계)가 그를 도왔다. 기존의 3개 군단에 제12군단이 추가되었고, 아그리파 2세도 직접 참전했다.

5. 1. 예루살렘 내전

베스파시아누스가 황제로 추대된 후, 예루살렘 공략이 재개되면서 예루살렘은 혼란과 폭력에 휩싸였다. 열심당원들은 온건파 정부에 반대하며 권력 투쟁을 벌였다. 이들은 로마와의 협력을 주장하는 사람들을 암살하고, 주요 지도자들을 살해했다.[3]

엘르아자르 벤 시몬 등의 인물을 중심으로 한 열심당원들은 온건파 정부를 전복시키려 했다. 이들은 요한 오브 기스칼라와 동맹을 맺고, 도시의 유력 인사들을 체포하고 처형했다.[3] 또한 성전을 장악하고 전통적인 대제사장 선출 방식을 폐지, 파니아스 벤 사무엘을 제비뽑기로 선출했다.[3] 요세푸스에 따르면, 파니아스는 대제사장 계통도 아니었고 관련 지식도 부족했다.[3]

온건파 지도자 아나누스 벤 아나누스는 열심당원 진압을 시도했다. 그는 열심당원들이 도시를 노예로 만들고 성전을 더럽혔다고 비난하며 사람들을 결집시켰다.[3] 그러나 열심당원들은 반격을 시작했고, 결국 성전 내부 성소로 후퇴하여 요새화했다.[3]

요한 오브 기스칼라는 열심당원들에게 아나누스가 베스파시아누스에게 도시를 항복시키려 한다고 거짓 정보를 흘리고, 외부 지원을 요청하도록 조언했다.[3] 열심당원들은 이두매인에게 도움을 요청했고, 이두매인들은 예루살렘으로 들어와 열심당원들과 함께 도시 방어자들을 공격했다.[3]

이두매인들은 아나누스 벤 아나누스와 요슈아 벤 감라를 포함한 많은 사람들을 살해하고, 시신을 매장하지 않은 채 남겨두는 등 잔혹한 행위를 저질렀다.[3] 페레아의 니게르, 요셉 벤 구리온 등도 살해되었다.[3] 열심당원들은 반역 혐의자를 기소하기 위한 특별 재판소를 설치하기도 했다.[3] 이두매인들은 결국 예루살렘을 떠났다.[3]

유월절 축제 기간 동안, 시카리파는 마사다에서 내려와 엔게디를 습격하여 700명의 여성과 아이들을 죽이고 약탈을 자행했다.[3]

6. 예루살렘 함락과 성전 파괴

로마군은 공격에 앞서 항복을 권고했지만, 유대인은 듣지 않았다. 베스파시아누스의 아들 티투스가 예루살렘 공략을 지휘했고, 로마군은 도시 주위에 영구 진지를 구축하고 성벽 높이의 벽을 쌓고 참호를 팠다.[79]

도시 안에서는 평화 협상을 막고 결사항전 의지를 높이기 위해 식량을 모두 불태웠다. 그 결과 많은 도시 거주민과 군인들이 굶어 죽었다. 도시를 탈출하려는 사람들은 십자가형에 처해졌는데, 공성전이 끝날 때까지 만 명이 십자가에 매달렸다고 한다.[79]

70년 8월 10일, 예루살렘 성전이 로마군에 의해 불탔고, 9월 8일에 시내 저항이 수그러들었으며, 20일에 모든 저항이 끝났다. 로마군은 도시를 철저히 파괴하고 불태웠으며, 예루살렘 성전도 철저히 약탈당했다.[79] 요세푸스에 따르면 예루살렘 공방전 당시 성 안에는 약 270만 명이 있었지만, 포로로 잡힌 유대인은 9만 7천 명, 사망자는 110만 명이었다고 한다.[80]

티투스


로렌스 알마-타데마가 그린 티투스의 개선 (1885년)


티투스의 개선문에는 당시 성전에서 메노라와 같은 성물을 약탈하는 로마군의 모습이 새겨져 있다.[79]

68년 4월, 갈리아 루그두넨시스 속주 총독 가이우스 율리우스 빈덱스의 반란으로 네로가 자살했다. 69년에는 4명의 로마 황제가 즉위하고, 로마는 대혼란에 빠졌다. 베스파시아누스는 로마로 향했고, 유대 전쟁은 교착 상태에 들어갔다.[62]

69년 12월, 아울루스 비텔리우스가 살해되고 베스파시아누스가 로마 황제가 되었다. 베스파시아누스는 티투스를 예루살렘 공략에 보냈다. 70년, 유대인들은 완강히 저항했지만, 로마군에 패배하여 예루살렘 신전은 불탔고, 예루살렘은 함락되었다. 티투스는 로마로 개선했고, 이때 포로 로마노에 티투스 개선문이 만들어졌다.[62]

7. 마사다 항전과 전쟁의 종결

71년 티투스가 로마로 돌아간 후, 루실리우스 바수스가 사후 수습을 위해 파견되었다. 그는 남은 유대인 저항군의 요새들을 점령하고 사해까지 진출했으나, 임무를 완수하지 못하고 병사하였다. 그의 후임으로 플라비우스 실바가 부임했다.[37] 73년 마사다 요새에서 마지막까지 농성하던 이들이 거의 다 자살함으로써 요새가 함락되고 유대 전쟁은 막을 내렸다.[63]

마사다


마사다사해 근처에 위치한 요새로, 73년 또는 74년에 공방전 끝에 루키우스 플라비우스 실바에게 함락되면서 반란의 마지막 거점이 되었다. 71년 봄, 티투스는 로마로 떠났고, 유대 사막에 있는 헤로디움과 마사다, 페레아에 있는 마케루스 세 곳이 유대인의 통제하에 남겨졌다. 새로 임명된 유대 속주의 사절 섹스투스 루킬리우스 바수스는 이러한 마지막 저항 중심지를 점령하는 임무를 맡았다. 바수스는 먼저 헤로디움을 점령한 다음 요르단강을 건너 사해 근처의 요새인 마케루스를 점령했다. 그 후 바수스는 사해 근처의 자르두스 숲에서 유다 벤 아리가 이끄는 약 3,000명의 반란군을 격파했으나, 작전을 완료하기 전에 사망했다.[37]

루키우스 플라비우스 실바는 바수스의 뒤를 이어 72–73년 또는 73–74년에 마사다 공방전을 지휘했으며, 제10군단 프레텐시스와 보조 부대를 투입하여 총 8,000명에 달하는 병력을 동원했다. 실바는 요새 주변에 포위 야영지와 환호선을 설치했고, 공격 경사로도 건설했다. 요세푸스에 따르면, 로마군이 성벽을 돌파했을 때, 967명의 수비대원 중 960명이 집단 자살을 했다는 것을 발견했다. 단 두 명의 여성과 다섯 명의 아이만이 물 저장소에 숨어 살아남았다.[38]

마사다는 깎아지른 듯한 암산 위에 위치해 있었고, 로마 군단의 지휘관 루키우스 플라비우스 실바는 힘으로 공격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판단하여, 주변의 절벽을 메워 진입로를 건설하는 작전을 세웠다. 3년이 걸려 요새의 절벽이 메워지고, 완성 직전의 진입로를 본 유대인 집단은 로마 군의 돌입 전날 밤에 스스로 집단 자결했다.[63]

8. 전후 처리와 유대인 사회의 변화

로마의 유대에 대한 관용 정책은 율리우스 카이사르 때부터 시작되었으나, 이 전쟁을 기점으로 크게 바뀌었다. 예루살렘에서 잡힌 포로 중 일부는 로마 개선식에 동원되었고, 17세 이상 남자는 이집트 노역에 보내지거나 노예로 팔려 각 속주에 보내지거나 검투사가 되거나 야수의 먹이가 되었다.[81] 16세 이하 남녀는 병사들에게 전리품으로 분배되었다. 유대인의 자치 의회였던 산헤드린 의회와 예루살렘에만 존재했던 대제사장 제도도 폐지되었다.[81] 예루살렘에는 1개 군단과 보조병을 합쳐 1만 명의 병력이 상주하게 되었다.

예루살렘 성전 파괴 이후, 성전 중심의 사두가이파는 몰락하고, 유대인들이 매년 성전에 바치던 2드라크마는 '유대인세'라는 이름으로 로마의 유피테르 신전에 바쳐졌다. 로마는 유대 지역을 다음과 같이 통치했다.


  • 유대 북동부: 이전과 같이 유대 왕가의 아그리파 2세가 통치 (일종의 유대인 자치구)
  • 유대 서부의 카이사레아를 비롯한 항구 도시: 그리스계 주민과 유대계 주민 사이의 중재자 역할만 수행[82]
  • 예루살렘 및 내륙 지역: 유대 속주 총독이 파견되어 통치


그러나 로마는 반항하지 않은 해외 거주 유대인에게는 신앙을 강요하지 않았다. 마사다 요새 함락 후인 기원후 73년, 베스파시아누스 황제는 얌니아에 유대문화 연구소(랍비 학원) 설립을 허가했다.[83] 티투스안티오키아에서 그리스계 주민들의 유대계 주민 추방 요구와 로마에서 유대계 주민의 권리가 새겨진 청동판 철거 요구를 모두 거절했다.

로마의 반란 진압은 유대인 인구에 큰 영향을 미쳤다. 많은 사람이 전투와 포위로 사망하고, 여러 도시와 마을이 파괴되었다. 특히 유대 산지 지역이 가장 큰 피해를 보았고, 예루살렘은 완전히 파괴되어 인구의 90% 이상이 사망한 것으로 추정된다.[39] 모셰 다비드 헤르는 유대인 인구의 3분의 1이 반란 중 사망했다고 추정한다.

생존자 중 상당수는 포로로 잡혀 비극적인 운명을 맞았다. 건장한 젊은이들은 검투사로 로마 원형 극장과 로마 서커스에서 복무해야 했고, 다른 이들은 매춘 업소나 노예로 팔려갔다.[39]

타키투스는 예루살렘 포위 당시 모든 연령대와 남녀를 합쳐 60만 명이 포위되었다고 기록했다.[41] 요세푸스는 110만 명이 사망했다고 주장했지만, 현대 학자들은 이 수치에 이의를 제기한다. 세스 슈워츠는 유대 지역 인구를 약 100만 명으로 추정하고, 전쟁 후에도 상당한 유대인 공동체가 생존했다는 점을 들어 이 수치가 믿기 어렵다고 주장한다. 가이 맥린 로저스는 사망자 수를 수만 명(20,000~30,000명)으로 추정한다. 요세푸스는 또한 97,000명의 포로가 잡혔다고 보고하는데, 많은 학자들은 이 수치를 신뢰할 만하다고 본다.

전쟁은 사회적으로도 큰 영향을 미쳤다. 특히 예루살렘과 성전에 밀접하게 연관된 대제사장 가문과 그들의 관련자로 구성된 귀족 과두정치는 완전히 붕괴되었다.[39] 그러나 로마 통치에 대한 불만은 바르 코흐바의 난(132~136년)으로 이어졌다.

모세 아베르바흐와 데이비드 아베르바흐는 이 반란 진압 이후 유대인들이 "정치적 기반이 아닌 문화적, 도덕적 힘에 그들의 정체성과 생존에 대한 희망을 두어야" 했다고 주장했다. 제2성전은 1세기에 거대한 경제로 발전했지만, 도시와 성전의 파괴로 종식되었다. 로마인들은 봉기에 참여한 모든 유대인의 토지를 몰수하여 경매에 부쳤다.

예루살렘과 마사다 공성전에 참여하고, 그 후 도시의 폐허에 주둔하여 거의 2세기 동안 머물렀던 군단인 ''제10 파에텐시스 군단''(Legio X Fretensis)을 언급하는 비문.


예루살렘 폐허에는 거의 2세기 동안 제10 파에텐시스 군단이 주둔했다. 로마 시민들은 유대에 정착했다. 베스파시아누스는 800명의 로마 퇴역 군인을 모차에 정착시켰고, 이곳은 콜로니아 아모사la (Colonia Amosa) 또는 콜로니아 엠마우스la (Colonia Emmaus)로 알려진 로마 정착지가 되었다. 그는 카이사레아에 식민지 지위를 부여하고 네아폴리스 (Neapolis)에 도시 지위를 부여했다.

예루살렘 성전 파괴 이후, 로마는 제국 전역의 모든 유대인에게 Fiscus Judaicusla(유대세)를 부과했다. 이 세금은 유대인들이 성전에 기부하던 반 세겔 대신 매년 2드라크마를 유피테르 카피톨리누스 신전 재건 및 유지 보수에 사용하도록 했다. 도미티아누스 치세 아래, 이 세금의 시행은 더욱 가혹해졌다. Fiscus Judaicusla(유대세)에 대한 증거는 이집트에서 발견된 영수증에 보존되어 있으며, 서기 70년부터 116년까지의 기록이 남아있다.

성전 파괴는 유대교의 전환점으로, 희생 제사를 종식시키고 대제사장의 계보를 끊었다.[70] 사두개파는 붕괴되었고, 쿰란과 같은 공동체가 파괴된 에세네파 역시 사라졌다. 반면, 바리새파는 살아남아 토라 연구에 중점을 두고 유대교를 재구성했다.

성전이 없어지면서 유대교는 토라의 계명에 더 집중하고, 회당을 유대교 생활의 중심으로 만들었다.[49] 랍비들은 유대 공동체의 지도자로서 대제사장의 자리를 대신했다. 70년 이후 랍비들의 지배 때문에, 이 시대는 "랍비 시대"로 알려져 있다.[49]

크네세트 메노라에 새겨진 부조로, 요하난 벤 자카이가 예루살렘의 파괴를 슬퍼하며 포위에서 살아남은 여러 현자들과 함께 있는 모습


랍비 자료에 따르면, 주요 바리새파 현자인 랍비 요하난 벤 자카이 (Ribazhe)는 제자들에 의해 예루살렘에서 관에 숨겨져 탈출했다. 그는 베스파시아누스 황제의 즉위를 예측한 후, 얌니아에 랍비 센터를 설립할 수 있는 허가를 받았다.[51]

벤 자카이의 지도 아래 야브네는 유대교 삶을 재구성하고 파괴 이후의 현실에 적응하기 위한 법령을 발표하는 주요 랍비 센터로 부상했다. 벤 자카이 이후, 지도력은 감리엘 2세에게 넘어갔다. 이 기간 동안, 미츠바he인 룰라브he를 사용하는 것을 수코트의 7일 전체로 확대하는 등 성전 관련 관행을 성전 밖에서 사용하도록 개조하는 법령이 제정되었다. 또한, 기도례가 공식화되었으며, 아미다가 제물 봉헌을 대체하여 매일 세 번 낭송하도록 제정되었다.

셰이 J. D. 코헨에 따르면, 야브네 랍비 센터는 종파적 분열을 일으키지 않으면서 상반된 의견을 용인하는 새로운 모델의 유대교 사회를 육성했다. 야브네에 센터가 설립되면서, 랍비 학문의 조직적이고 권위 있는 시스템이 발전할 수 있었고, 이는 이후 랍비 유대교가 유대교의 지배적인 형태로 부상하는 기반이 되었다.

이 전쟁을 "제1차 유대-로마 전쟁"이라고 하며, 하드리아누스 황제 치세 하의 132년부터 135년까지 다시 발발한 바르 코흐바를 지도자로 하는 반란(바르 코흐바의 난)은 "제2차 유대-로마 전쟁"으로 칭해진다.[64]

갈릴리 공략전에서 로마에 투항한 유대 측 장교인 플라비우스 요세푸스는 이 전쟁의 경과를 상세하게 기록했다. 이것이 "유대 전쟁사"이다. 전쟁 참가자가 직접 쓴 1차 사료로서 귀중한 기록이지만, 요세푸스의 주관이나 후대의 각색도 많이 포함되어 있는 것으로 여겨진다.[66]

9. 영향

제1차 유대-로마 전쟁은 유대 지역의 유대인들에게 큰 영향을 미쳤다. 많은 사람이 전투와 포위로 인해 사망했고, 여러 도시, 마을, 촌락이 파괴되었다.[39] 특히 유대 산지 지역이 가장 큰 피해를 입었으며, 예루살렘은 완전히 파괴되어 인구의 90% 이상이 사망한 것으로 추정된다.[39]

모셰 다비드 헤르의 추정에 따르면, 유대 지역 유대인 인구의 3분의 1이 반란 중에 사망했다. 여기에는 로마와의 전투, 유대인 간의 내전, 이방인에 의한 학살로 인한 사망자가 포함된다. 또한, 기근과 전염병, 특히 예루살렘의 오랜 포위 기간 동안 많은 사람이 희생되었다. 유대 지역 유대인 인구의 약 10분의 1은 로마군에 포로로 잡혔으며, 이들은 가혹한 대우, 처형, 강제 노동 등을 겪었다. 건장한 젊은이들은 검투사로 로마 원형 극장과 로마 서커스에서 복무해야 했고, 다른 사람들은 매춘 업소나 노예로 팔려갔다.[39]

타키투스는 예루살렘 포위 당시 모든 연령대와 남녀를 합쳐 포위된 사람의 총수가 60만 명이었다고 기록했다.[41] 그는 포위된 사람들이 이주될 것이라고 믿었기 때문에 죽음보다 삶을 더 두려워했다고 덧붙였다.[42] 플라비우스 요세푸스는 예루살렘 포위 중에 110만 명이 사망했다고 주장했지만, 현대 학자들은 이 수치에 대해 논쟁을 벌이고 있다.

반란 이후, 로마 당국은 유대인 디아스포라 공동체에서 잠재적인 봉기를 진압하기 위한 노력을 강화했다.[49] 서기 72년에는 레온토폴리스의 유대인 사원이 로마 당국에 의해 폐쇄되었다.[49]

글렌 바우어소크는 예루살렘 파괴 이후 아라비아 반도의 유대인 역사로 유대인들이 유입되었고, 그 결과 히자즈 북서부, 특히 야트리브(후일 메디나)에 정착하여 이슬람 이전 아라비아의 일신교의 주요 대표자가 되었다고 적고 있다.[49]

예루살렘 성전 파괴 이후, 로마는 제국 전역의 모든 유대인에게 Fiscus Judaicusla(유대세)를 부과했다.[49] 이 세금은 유대인들이 성전에 기부하던 반 세겔 대신, 매년 2드라크마를 납부하도록 했다. 이 자금은 로마의 유피테르 카피톨리누스 신전 재건 및 유지 보수에 사용되었다.[49]

성전 파괴는 유대교의 전환점을 기록하며, 희생 제사를 종식시키고[49] 대제사장의 계보를 끊었다.[49] 사두개파는 붕괴되었고,[49] 에세네파 역시 사라진 것으로 보인다. 반면, 바리새파는 살아남아 토라 연구에 중점을 두고 유대교를 재구성하고 통일할 수 있었다.[49] 성전이 부재하면서, 유대교는 회당을 유대교 생활의 중심으로 만들면서 이에 대응했다.[49] 랍비들은 유대 공동체의 지도자로서 대제사장의 자리를 대신했다.[49]

유대교 반란은 유대-로마 전쟁의 시작을 알렸으며, 이 전쟁은 동지중해를 근본적으로 변화시켰다. 유대인들의 전쟁 패배에도 불구하고, 이 지역의 긴장은 계속 고조되었다.

서기 115년, 디아스포라 반란으로 알려진 대규모 유대교 봉기가 여러 동부 속주에서 거의 동시에 발생했다. 이 봉기는 극심한 폭력으로 특징지어졌고 로마가 진압하는 데 2년이 걸렸으며, 그 결과 유대인 공동체가 거의 완전한 민족 청소를 겪었다.[49]

바르 코흐바의 난으로 알려진 세 번째이자 마지막 유대-로마 전쟁은 서기 132년 유대에서 발발했다. 시몬 바르 코흐바가 이끌었던 이 반란은 처음에는 성공적이었지만, 결국 로마군에 의해 진압되었다. 그 결과는 유대인에 대한 집단 학살로 묘사될 정도의 파괴와 죽음으로 이어졌다.[64] 하드리아누스의 처벌에는 유대인들의 예루살렘 및 주변 지역 출입 금지,[64] 안식일 준수 및 할례와 같은 유대교 관행을 박해하는 법률 시행, 유대 속주를 시리아 팔레스타이나로 개명하는 것이 포함되었다.[64]

권력이 부족했던 베스파시아누스는 유대인에 대한 승리를 로마의 영광을 확보하고 내부 갈등으로부터 관심을 돌리기 위한 주요 수단으로 활용했다.[49] 그가 창시한 플라비우스 왕조는 이 승리를 사용하여 제국의 통치에 대한 그들의 주장을 확고히 했다.[49]

서기 71년 여름, 로마에서 승리를 기념하기 위해 개선식이 열렸다.[49] 개선 행렬에는 수많은 보물과 예술 작품이 등장했다. 베스파시아누스와 티투스는 개선 전차를 탔고, 도미티아누스는 그들 옆에 따로 탔다.[49] 유대인 반군 지도자 시몬 바르 기오라는 행렬에서 거행되었고, 채찍질을 당한 후 마메르틴 감옥으로 끌려가 교수형에 처해졌다.[49]

플라비우스 왕조는 "유대아는 정복되었다"라는 제목의 광범위한 동전 시리즈를 발행했다.[49] 앞면에는 베스파시아누스 또는 티투스의 초상이 새겨져 있었고, 뒷면에는 유대 민족을 대표하는 애도하는 여성이 대추야자 아래에 앉아 있는 모습 등이 묘사되어 있었다.[49]

플라비우스 왕조 시대에 로마의 시내 중심가는 승리를 기념하는 기념물로 변모했다.[49] 여기에는 티투스 개선문과 또 다른 개선문 두 개의 개선문이 포함되었다.[49] 성전 메노라와 금 테이블 등 예루살렘 성전의 전리품은 평화 신전에 전시되었다.[49] 콜로세움은 전쟁의 전리품에서 자금을 지원받았다.[49]

이 전쟁은 "제1차 유대-로마 전쟁"이라고 하며, 132년부터 135년까지 다시 발발한 바르 코흐바를 지도자로 하는 반란(바르 코흐바의 난)은 "제2차 유대-로마 전쟁"으로 칭해진다.[64]

이 전쟁 이후, 예루살렘에 로마의 한 개 군단(제10군단)이 상주하게 되었다.[65](그 전까지는 카이사리아에 주둔하고 있었다).

갈릴리 공략전에서 로마에 투항한 유대 측 장교인 플라비우스 요세푸스는 이 전쟁의 경과를 상세하게 기록했다. 이것이 "유대 전쟁사"이다.[66]

10. 관련 작품


  • 영국 BBC 방송국의 다큐멘터리 '로마 제국의 탄생과 몰락' 제4화 '유대인 반란'에서 제1차 유대-로마 전쟁을 다루었다.[66]
  • 플라비우스 요세푸스가 저술한 유대 전쟁사는 이 전쟁에 대한 상세한 기록을 담고 있다. 전쟁 참가자가 직접 쓴 1차 사료로서 중요한 가치를 지니지만, 요세푸스의 주관이나 후대의 각색이 포함되었을 가능성도 고려해야 한다.[6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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