케임브리지 공녀 아우구스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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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케임브리지 공녀 아우구스타는 1822년에 태어나 1916년에 사망한 인물로, 조지 3세의 손녀이자 케임브리지 공작 아돌푸스의 딸이다. 그녀는 메클렌부르크슈트렐리츠 대공 프리드리히 빌헬름과 결혼하여 메클렌부르크슈트렐리츠 대공비가 되었으며, 영국 왕실과의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며 독일에서 생활했다. 아우구스타는 94세의 나이로 사망하여 조지 3세의 손녀 중 가장 오래 살았으며, 제1차 세계 대전 중에는 영국 정부로부터 연금 지급이 중단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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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케임브리지 공녀 아우구스타 - [인물]에 관한 문서 | |
|---|---|
| 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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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위 | 메클렌부르크슈트렐리츠 대공비 |
| 전체 이름 | 오거스타 캐롤라인 샬럿 엘리자베스 메리 소피아 루이즈 |
| 출생일 | 1822년 7월 19일 |
| 출생지 | 하노버 왕국 하노버 몬브릴란트 궁전 |
| 사망일 | 1916년 12월 5일 |
| 사망지 | 메클렌부르크슈트렐리츠 대공국 노이슈트렐리츠 |
| 배우자 | 프리드리히 빌헬름, 메클렌부르크슈트렐리츠 대공 |
| 결혼일 | 1843년 6월 28일 |
| 자녀 | 프리드리히 빌헬름 공자 아돌프 프리드리히 5세 |
| 가문 | 하노버 왕가 |
| 아버지 | 케임브리지 공작 아돌푸스 |
| 어머니 | 헤센카셀의 아우구스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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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통치 | |
| 재위 시작 | 1860년 9월 6일 |
| 재위 종료 | 1904년 5월 30일 |
| 매장 | |
| 매장지 | 메클렌부르크슈트렐리츠 대공국 미로 |
2. 유년 시절
케임브리지 공녀 아우구스타는 1822년 7월 19일 하노버 몽브릴란 궁전에서 태어났다. 그녀의 아버지는 조지 3세와 샬럿 왕비의 일곱 번째 아들인 케임브리지 공작 아돌푸스였고, 어머니는 헤세-카셀의 아우구스타 공주였다. 영국의 군주의 남계 손녀로서 아우구스타는 ''전하'' 칭호와 함께 영국 공주 작위를 받았다. 어린 공주는 1822년 8월 16일 같은 궁전에서 에드워드 커티스 켐프 목사(베를린 주재 영국 대사의 채플린, 경 조지 로즈 경)에 의해 세례를 받았다.
그녀의 대부모 중 세 명은 세례식에 직접 참석했다.
- 헤세-카셀의 프리데리케 공주 (외할머니)
- 나사우-우징겐의 루이제 헨리에테 공주 (외증고모)
- 폰 데어 데켄 백작부인 루이제 폰 데르 데켄 공주 (이모)
나머지 대부모들은 참석하지 못하고 대리인을 통해 대표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 요크와 올버니 공작 (아버지의 삼촌)
- 그녀의 다섯 명의 살아있는 아버지 쪽 고모들(혈연 관계)
- 뷔르템베르크 왕대비 샬럿
- 영국의 아우구스타 소피아 공주
- 헤세-홈부르크의 영지백작부인 엘리자베스
- 글로스터와 에든버러의 공작부인 메리
- 영국의 소피아 공주
- 헤세의 선제후 (빌헬름 2세의 아내, 그녀의 어머니의 사촌)
- 메클렌부르크-슈트렐리츠의 마리 대공녀 (이모)
- 헤세-카셀의 샤를 공주 (외삼촌의 아내)
아우구스타 공주는 아버지인 조지 4세의 대리인으로서 아버지가 총독으로 있던 하노버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
아우구스타 공주에게는 오빠 케임브리지 공작 조지 (후에 케임브리지 제2대 공작)와 여동생 케임브리지의 메리 아델라이드 공주 (후에 테크 공작부인)가 있었다. 아우구스타 공주는 조지 5세의 부인인 메리 오브 테크의 이모였으며, 아버지 쪽으로는 빅토리아 여왕의 사촌이었고, 어머니 쪽으로는 덴마크의 크리스티안 9세의 아내인 헤세-카셀의 루이즈 공주의 사촌이었다.
그녀는 1838년 어머니와 함께 빅토리아 여왕의 대관식에 왕실 일원으로 참석했다.
2. 1. 출생과 가족 배경
케임브리지 공녀 아우구스타는 1822년 7월 19일 하노버 몽브릴란 궁전에서 태어났다. 그녀의 아버지는 조지 3세와 샬럿 왕비의 일곱 번째 아들인 케임브리지 공작 아돌푸스였고, 어머니는 헤세-카셀의 아우구스타 공주였다. 영국의 군주의 남계 손녀로서 아우구스타는 ''전하'' 칭호와 함께 영국 공주 작위를 받았다. 어린 공주는 1822년 8월 16일 같은 궁전에서 세례를 받았다.그녀의 대부모 중 세 명은 세례식에 직접 참석했다.
- 헤세-카셀의 프리데리케 공주 (외할머니)
- 나사우-우징겐의 루이제 헨리에테 공주 (외증고모)
- 폰 데어 데켄 백작부인 루이제 폰 데르 데켄 공주 (이모)
나머지 대부모들은 참석하지 못하고 대리인을 통해 대표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 요크와 올버니 공작 (아버지의 삼촌)
- 그녀의 다섯 명의 살아있는 아버지 쪽 고모들(혈연 관계)
- 뷔르템베르크 왕대비 샬럿
- 영국의 아우구스타 소피아 공주
- 헤세-홈부르크의 영지백작부인 엘리자베스
- 글로스터와 에든버러의 공작부인 메리
- 영국의 소피아 공주
- 헤세의 선제후 (빌헬름 2세의 아내, 그녀의 어머니의 사촌)
- 메클렌부르크-슈트렐리츠의 마리 대공녀 (이모)
- 헤세-카셀의 샤를 공주 (외삼촌의 아내)
아우구스타 공주는 아버지인 조지 4세의 대리인으로서 아버지가 총독으로 있던 하노버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
아우구스타 공주에게는 오빠 케임브리지 공작 조지 (후에 케임브리지 제2대 공작)와 여동생 케임브리지의 메리 아델라이드 공주 (후에 테크 공작부인)가 있었다. 아우구스타 공주는 조지 5세의 부인인 메리 오브 테크의 이모였으며, 아버지 쪽으로는 빅토리아 여왕의 사촌이었고, 어머니 쪽으로는 덴마크의 크리스티안 9세의 아내인 헤세-카셀의 루이즈 공주의 사촌이었다.
그녀는 1838년 어머니와 함께 빅토리아 여왕의 대관식에 왕실 일원으로 참석했다.
2. 2. 하노버에서의 성장
아우구스타는 1822년 7월 19일 하노버 몽브릴란 궁전에서 케임브리지 공녀 아우구스타로 태어났다. 그녀의 아버지는 조지 3세와 샬럿 왕비의 일곱 번째 아들인 케임브리지 공작 아돌푸스였고, 어머니는 헤세-카셀의 아우구스타 공주였다. 영국의 군주의 남계 손녀로서 그녀는 ''전하''의 칭호와 함께 영국 공주의 작위를 받았다. 어린 공주는 1822년 8월 16일 같은 궁전에서 세례를 받았다.아우구스타 공주는 아버지인 조지 4세의 대리인으로서 아버지가 총독으로 있던 하노버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
그녀는 어머니와 함께 1838년 빅토리아 여왕의 대관식에 왕실 일원으로 참석했다.
3. 결혼과 메클렌부르크슈트렐리츠 대공비
1843년 6월 28일, 아우구스타 공녀는 새로 지어진 런던의 버킹엄 궁전 사적 예배당에서 그녀의 사촌이자 메클렌부르크-슈트렐리츠의 프리드리히 빌헬름과 결혼했다. (두 사람은 아버지 쪽으로는 2촌 간이기도 했다.) 결혼과 함께 아우구스타는 메클렌부르크슈트렐리츠의 세습 대공비가 되었으며, 1860년 9월 6일 시아버지의 사망 이후에는 메클렌부르크슈트렐리츠의 대공비가 되었다.
대공과 대공비의 결혼 생활에서는 두 자녀가 태어났다.
- 메클렌부르크-슈트렐리츠 공작 프리드리히 빌헬름 (1845년 1월 13일 런던 출생, 사망)
- 메클렌부르크-슈트렐리츠 공작 아돌푸스 프리드리히 (1848년 7월 22일 – 1914년 6월 11일); 1904년 5월 아버지의 뒤를 이어 아돌푸스 프리드리히 5세가 되었다.
3. 1. 결혼
1843년 6월 28일, 아우구스타 공녀는 새로 지어진 런던의 버킹엄 궁전 사적 예배당에서 그녀의 사촌이자 메클렌부르크슈트렐리츠의 프리드리히 빌헬름과 결혼했다. (두 사람은 아버지 쪽으로는 2촌 간이기도 했다.) 결혼과 함께 아우구스타는 메클렌부르크슈트렐리츠의 세습 대공비가 되었으며, 1860년 9월 6일 시아버지의 사망 이후에는 메클렌부르크슈트렐리츠의 대공비가 되었다.3. 2. 자녀
케임브리지 공녀 아우구스타는 프리드리히 빌헬름과의 사이에서 두 자녀를 두었다. 그러나 성인이 된 자녀는 아돌프 프리드리히 5세(1848~1914)뿐이었다. 1845년 1월 13일에 태어난 남자아이는 출생 당일 사망했다.4. 독일에서의 삶과 영국 왕실과의 관계
케임브리지 공녀 아우구스타는 성년의 대부분을 독일에서 보냈지만, 영국 왕실과 긴밀한 개인적 관계를 유지했다. 그녀는 종종 켄싱턴 궁전에 있는 어머니 케임브리지 공작 부인을 방문했다.
1889년 어머니가 사망한 후, 대공녀는 런던 버킹엄 게이트 16번지에 메클렌부르크 하우스로 알려진 집을 구입하여 노년기에 해외 여행이 불가능해질 때까지 일 년의 일부를 그곳에서 보냈다.
1901년 에드워드 7세와 알렉산드라의 대관식 준비를 하면서 헨리 피츠앨런-하워드, 제15대 노퍽 공작은 예절과 복장 문제에 대해 그녀와 상의했다. 이는 그녀가 71년 전 윌리엄 4세와 아델라이드 여왕의 대관식에 참석했기 때문이다. 당시 그녀는 9세였고 여왕의 손에 입을 맞췄다. 그녀는 또한 빅토리아 여왕의 대관식에 대한 세부 사항을 제공할 수 있었다.
메클렌부르크-슈트렐리츠 대공녀는 조카이자 미래의 메리 여왕과 특히 가까웠다. 그러나 노령으로 인해 1911년 6월 22일에 열린 조지 5세와 메리 여왕의 대관식에는 참석하지 못했다.
제1차 세계 대전 발발 이후, 영국 정부는 그녀가 1843년 메클렌부르크-슈트렐리츠 공작 부인 연금법(Annuity, Duchess of Mecklenburgh Strelitz Act 1843)에 따라 영국 왕실 구성원으로서 받고 있던 연금을 중단했다.[2] 전쟁 중, 스웨덴 대사관은 여왕이 여전히 독일에 살고 있는 그녀의 이모에게 보낸 편지를 전달했다.
노부인으로서 그녀는 성격이 괴팍한 것으로 알려졌다. 그녀는 또한 매우 영리하고 지적인 것으로 알려졌다. 그의 저서인 『메리 여왕』(런던, 1959)에서 여왕의 공식 전기 작가인 제임스 포프-헤네시는 여왕의 이모 아우구스타가 사진이라는 새로운 과학을 좋아하지 않았으며, 사진이 왕족의 사생활을 깊이 침해할 것이라고 두려워했다고 보고하고 있다.
4. 1. 독일에서의 생활
케임브리지 공녀 아우구스타는 성년의 대부분을 독일에서 보냈지만, 영국 왕실과 긴밀한 개인적 관계를 유지했다.[2] 그녀는 종종 켄싱턴 궁전에 있는 어머니 케임브리지 공작 부인을 방문했다.[2] 1889년 어머니가 사망한 후, 대공녀는 런던 버킹엄 게이트 16번지에 메클렌부르크 하우스로 알려진 집을 구입하여 노년기에 해외 여행이 불가능해질 때까지 일 년의 일부를 그곳에서 보냈다.[2]1901년 에드워드 7세와 알렉산드라의 대관식 준비를 하면서 헨리 피츠앨런-하워드, 제15대 노퍽 공작은 예절과 복장 문제에 대해 그녀와 상의했다.[2] 이는 그녀가 71년 전 윌리엄 4세와 아델라이드 왕비의 대관식에 참석했기 때문이다.[2] 당시 그녀는 9세였고 여왕의 손에 입을 맞췄다. 그녀는 또한 빅토리아 여왕의 대관식에 대한 세부 사항을 제공할 수 있었다.[2]
메클렌부르크-슈트렐리츠 대공녀는 조카이자 미래의 메리 여왕과 특히 가까웠다.[2] 그러나 노령으로 인해 1911년 6월 22일에 열린 조지 5세와 메리 여왕의 대관식에는 참석하지 못했다.[2]
제1차 세계 대전 발발 이후, 영국 정부는 그녀가 1843년 메클렌부르크-슈트렐리츠 공작 부인 연금법(Annuity, Duchess of Mecklenburgh Strelitz Act 1843)에 따라 영국 왕실 구성원으로서 받고 있던 연금을 중단했다.[2] 전쟁 중, 스웨덴 대사관은 여왕이 여전히 독일에 살고 있는 그녀의 이모에게 보낸 편지를 전달했다.[2]
노부인으로서 그녀는 성격이 괴팍한 것으로 알려졌다.[2] 그녀는 또한 매우 영리하고 지적인 것으로 알려졌다.[2] 그의 저서인 『메리 여왕』(런던, 1959)에서 여왕의 공식 전기 작가인 제임스 포프-헤네시는 여왕의 이모 아우구스타가 사진이라는 새로운 과학을 좋아하지 않았으며, 사진이 왕족의 사생활을 깊이 침해할 것이라고 두려워했다고 보고하고 있다.[2]
4. 2. 영국 방문과 교류
케임브리지 공녀 아우구스타는 성년의 대부분을 독일에서 보냈지만, 영국 왕실과 긴밀한 개인적 관계를 유지했다.[2] 그녀는 켄싱턴 궁전에 있는 어머니 케임브리지 공작 부인을 자주 방문했다.1889년 어머니가 사망한 후, 아우구스타는 런던 버킹엄 게이트 16번지에 메클렌부르크 하우스라는 집을 구입하여 노년기에 해외 여행이 불가능해질 때까지 일 년의 일부를 그곳에서 보냈다. 1901년 에드워드 7세와 알렉산드라 여왕의 대관식 준비를 하면서 헨리 피츠앨런-하워드, 제15대 노퍽 공작은 예절과 복장 문제에 대해 그녀와 상의했는데, 이는 그녀가 71년 전 윌리엄 4세와 아델라이드의 대관식에 참석했기 때문이다. 당시 그녀는 9세였고 여왕의 손에 입을 맞췄다. 그녀는 또한 빅토리아 여왕의 대관식에 대한 세부 사항을 제공할 수 있었다.
4. 3. 영국 왕실 행사 참여
케임브리지 공녀 아우구스타는 영국 왕실과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며 왕실 행사에 참여했다.[2] 1901년 에드워드 7세와 알렉산드라 여왕의 대관식 준비 과정에서 헨리 피츠앨런-하워드, 제15대 노퍽 공작은 아우구스타에게 예법과 복장에 대한 조언을 구했다. 이는 그녀가 윌리엄 4세와 빅토리아 여왕의 대관식에 참석한 경험이 있었기 때문이다.아우구스타는 조카 메리 오브 테크와 매우 가까운 사이였으나, 노령으로 인해 1911년 조지 5세와 메리 여왕의 대관식에는 참석하지 못했다.
5. 제1차 세계 대전과 말년
제1차 세계 대전 발발 이후, 영국 정부는 그녀가 1843년 메클렌부르크-슈트렐리츠 공작 부인 연금법(Annuity, Duchess of Mecklenburgh Strelitz Act 1843)에 따라 영국 왕실 구성원으로서 받고 있던 연금을 중단했다.[2] 전쟁 중, 스웨덴 대사관은 메리 왕비가 여전히 독일에 살고 있는 그녀의 이모에게 보낸 편지를 전달했다.
노부인으로서 그녀는 성격이 괴팍한 것으로 알려졌다. 그녀는 또한 매우 영리하고 지적인 것으로 알려졌다. 그의 저서인 『메리 여왕』(런던, 1959)에서 여왕의 공식 전기 작가인 제임스 포프-헤네시는 여왕의 이모 아우구스타가 사진이라는 새로운 과학을 좋아하지 않았으며, 사진이 왕족의 사생활을 깊이 침해할 것이라고 두려워했다고 보고하고 있다.
메클렌부르크-슈트렐리츠 태상 대공녀는 1916년 12월 5일 노이슈트렐리츠에서 사망하여 미로에 묻혔다.[3][4] 조지 3세의 가장 오래 산 손녀로서, 그녀는 하노버 왕가의 영국 분가와 마지막으로 연결된 인물이었다.[3][4]
그녀가 사망했을 때, 그녀는 94세 4개월 16일이었으며, 앨리스 공주, 빅토리아 여왕의 직계 손녀가 1977년에 그녀를 능가하기 전까지 가장 오래 산 혈통의 영국 공주였다. 그녀의 유언장은 봉인되었고, 1920년에 그녀의 재산은 57,282파운드(인플레이션을 감안하면 2022년에는 170만 파운드)로 평가되었다.[5]
5. 1. 제1차 세계 대전 중의 상황
제1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자 영국 정부는 1843년 메클렌부르크-슈트렐리츠 공작 부인 연금법(Annuity, Duchess of Mecklenburgh Strelitz Act 1843)에 따라 아우구스타에게 지급하던 연금을 중단했다.[2] 전쟁 중, 스웨덴 대사관을 통해 조카 메리 왕비와 서신을 교환했다.[2]5. 2. 성격과 평가
케임브리지 공녀 아우구스타는 노년에는 괴팍한 성격으로 알려졌지만,[2] 매우 영리하고 지적인 인물로 평가받았다.[3][4] 왕족의 사생활을 침해할 수 있다는 이유로 사진술에 대해 우려를 표명하기도 했다.[5]그녀는 성년의 대부분을 독일에서 보냈지만, 영국 왕실과 긴밀한 관계를 유지했다.[2] 특히 조카딸인 메리 오브 테크와 가까웠다. 1889년 어머니가 사망한 후에는 런던에 집을 마련하여 노년기까지 그곳에서 시간을 보내기도 했다.
에드워드 7세와 알렉산드라의 대관식 때는 복장과 예절 문제에 대한 자문을 맡기도 했다. 이는 그녀가 어린 시절 윌리엄 4세와 빅토리아 여왕의 대관식에 참석한 경험이 있었기 때문이다.
제1차 세계 대전 발발 이후 영국 정부는 그녀에게 지급되던 연금을 중단했다.[2] 전쟁 중에도 스웨덴 대사관을 통해 조카 메리 왕비와 서신을 주고받았다.
조지 3세의 손녀 중 가장 장수했으며, 94세 4개월 16일의 나이로 1916년 노이슈트렐리츠에서 사망하여 미로에 묻혔다.[3][4] 그녀의 사망으로 하노버 왕가의 영국 분가와 연결된 마지막 인물이 사라졌다.[3][4]
5. 3. 사망과 유산
케임브리지 공녀 아우구스타는 1916년 12월 5일 노이슈트렐리츠에서 사망하여 미로에 묻혔다.[3][4] 그녀는 조지 3세의 손녀 중 가장 장수했으며, 하노버 왕가의 영국 분가와 마지막으로 연결된 인물이었다.[3][4] 사망 당시 94세로, 1977년까지 가장 오래 산 혈통의 영국 공주였다.[5]아우구스타는 성년의 대부분을 독일에서 보냈지만, 영국 왕실과 긴밀한 개인적 관계를 유지했다.[2] 그녀는 종종 켄싱턴 궁전에 있는 어머니를 방문했고, 1889년 어머니가 사망한 후에는 런던 버킹엄 게이트에 집을 구입하여 노년기에 해외 여행이 불가능해질 때까지 그곳에서 시간을 보냈다.
1901년 에드워드 7세와 알렉산드라의 대관식 준비 과정에서 헨리 피츠앨런-하워드, 제15대 노퍽 공작은 예절과 복장 문제에 대해 그녀와 상의했는데, 이는 그녀가 71년 전 윌리엄 4세와 아델라이드 왕비의 대관식에 참석했기 때문이다. 그녀는 또한 빅토리아 여왕의 대관식에 대한 세부 사항도 제공할 수 있었다.
아우구스타는 조카 메리 오브 테크와 특히 가까웠지만, 노령으로 인해 1911년 조지 5세와 메리 여왕의 대관식에는 참석하지 못했다. 제1차 세계 대전 발발 이후, 영국 정부는 그녀가 1843년 메클렌부르크-슈트렐리츠 공작 부인 연금법(Annuity, Duchess of Mecklenburgh Strelitz Act 1843)에 따라 영국 왕실 구성원으로서 받고 있던 연금을 중단했다.[2] 전쟁 중, 스웨덴 대사관은 여왕이 독일에 살고 있는 이모에게 보낸 편지를 전달했다.
노년의 아우구스타는 괴팍한 성격으로 알려졌지만, 매우 영리하고 지적인 인물이기도 했다. 그녀의 유언장은 봉인되었고, 재산은 1920년에 57,282파운드(2022년 기준 170만 파운드)로 평가되었다.[5]
6. 칭호, 경칭 및 서훈
6. 1. 칭호 및 경칭
케임브리지 공녀 아우구스타는 생애 동안 여러 칭호와 경칭으로 불렸다. 1822년 7월 19일부터 1843년 6월 28일까지는 '케임브리지 공녀 아우구스타 전하(Her Royal Highness Princess Augusta of Cambridge)'로 불렸다.[6] 1843년 6월 28일 메클렌부르크슈트렐리츠 세습 대공과 결혼한 후부터 1860년 9월 6일까지는 '메클렌부르크슈트렐리츠 세습 대공비 전하(Her Royal Highness The Hereditary Grand Duchess of Mecklenburg-Strelitz)'라는 칭호를 사용했다.[7] 1860년 9월 6일 남편이 대공위에 오르면서 1904년 5월 30일까지 '메클렌부르크슈트렐리츠 대공비 전하(Her Royal Highness The Grand Duchess of Mecklenburg-Strelitz)'로 불렸다.[8] 1904년 5월 30일 남편이 사망한 후에는 '메클렌부르크슈트렐리츠 태상 대공비 전하(Her Royal Highness The Dowager Grand Duchess of Mecklenburg-Strelitz)'로 불렸으며, 이 칭호는 1916년 12월 5일 그녀가 사망할 때까지 유지되었다.[3]6. 2. 서훈
7. 가계
| 1. 케임브리지 공녀 아우구스타 |
|---|
| 2. 애돌퍼스 왕자, 케임브리지 공작 |
| 3. 헤센카셀의 아우구스타 공주 |
| 4. 영국 국왕 조지 3세 |
| 5. 메클렌부르크슈트렐리츠의 샬롯 공작부인 |
| 6. 헤센카셀의 프리드리히 공자 |
| 7. 나사우우징겐의 카롤리네 공주 |
| 8. 웨일스 공 프레데릭 루이스 |
| 9. 작센고타알텐부르크의 아우구스타 공녀 |
| 10. 메클렌부르크 공작 카를 루이 프리드리히 |
| 11. 작센힐트부르크하우젠의 엘리자베트 알베르틴 공주 |
| 12. 헤센카셀의 프리드리히 2세 |
| 13. 영국의 메리 공주 |
| 14. 나사우우징겐의 카를 빌헬름 공자 |
| 15. 라이닝겐다그스부르크팔켄부르크 백작부인 카롤리네 펠리치타스 |
참조
[1]
웹사이트
Key to Mr Leslie's picture of Queen Victoria receiving the Holy Sacrament at her Coronation
https://www.npg.org.[...]
[2]
뉴스
Princess loses pension
https://timesmachine[...]
1914-09-19
[3]
뉴스
Aged Princess's Death.
https://trove.nla.go[...]
1916-12-07
[4]
웹사이트
The London Gazette, Issue 32166, Page 12442
https://www.thegazet[...]
1920-12-17
[5]
웹사이트
£187m of Windsor family wealth hidden in secret royal wills
https://www.theguard[...]
2022-07-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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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London Gazette, Issue 21454, Page 18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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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53-07-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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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London Gazette, Issue 26947, Page 15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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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행물
Grossherzoglich Mecklenburg-Schwerinscher Staatskalendar
https://archive.org/[...]
1908
[10]
서적
Großherzoglich Hessische Ordensliste
Staatsverla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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