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버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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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코르부스는 고대 로마가 해상 전투에서 사용한 탑승 다리 장치이다. 기원전 3세기에 로마는 해군력이 약했기에, 코르부스를 활용하여 적 함선에 병력을 신속하게 투입하여 해상 전투에서 승리했다. 하지만, 거친 바다에서는 사용하기 어렵고, 선박의 안정성을 저해하는 등의 단점으로 인해 제1차 포에니 전쟁 이후에는 사용되지 않았다. 코르부스에 대한 다양한 해석이 존재하며, 20세기에는 H.T. 왈린가의 모델이 널리 받아들여졌으나, 윌리엄 W. 턴은 코르부스의 존재 자체를 부정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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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구조 및 작동 방식
폴리비우스는 저서 『역사』에서 코르부스를 양쪽에 작은 난간이 달린 폭 1.2m, 길이 10.9m의 다리 형태로 묘사했다. 이 장치는 배의 선수에 설치되어 기둥과 도르래를 이용해 다리를 올리고 내렸다. 코르부스 하단에는 새 부리 모양의 무거운 가시가 있어 적함 갑판을 뚫고 배를 고정시켜 군단병이 적선으로 넘어가 전투를 벌일 수 있게 했다.[1]
기원전 3세기, 로마는 해전 경험이 거의 없었지만, 코르부스를 활용하여 밀레 해전, 술치 해전, 틴다리스 해전, 에크노무스 해전 등에서 승리했다.[1] 그러나 코르부스는 거친 바다에서는 사용하기 어렵고 배의 안정성을 해칠 수 있다는 단점이 있었다.[1] 반면 코르부스의 무게가 배의 안정성에 큰 영향을 미치지 않았다는 분석도 있다.[1]
로마는 제1차 포에니 전쟁 이후 코르부스 사용을 중단한 것으로 보이며, 이후 해군 전술이 발전하면서 코르부스의 유용성은 감소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2. 1. 주요 특징
폴리비우스는 저서 『역사』에서 코르부스를 양쪽에 작은 난간이 있는 폭 1.2m, 길이 10.9m의 다리로 묘사하고 있다. 이 장치는 배의 선수에 사용되었으며, 기둥과 도르래 시스템을 사용하여 다리를 올리고 내렸다. 장치 하단에는 새의 부리 모양의 무거운 가시가 있었는데, 이것은 다리를 내릴 때 적군의 배 갑판을 관통하여 고정하도록 설계되었다. 이것은 로마의 군단병이 적의 배로 건너가 점령할 수 있는 경로를 제공했다.[1]기원전 3세기 로마는 해상 전투 경험이 거의 없었다. 로마 공화국의 군사력은 육상전에 있었고, 주요 자산은 로마 군인들의 규율과 용기였다. 코르부스는 로마인들이 해상에서 보병의 이점을 활용할 수 있게 해주었고, 밀레 해전, 술치 해전, 틴다리스 해전, 에크노무스 해전에서 승리하는 데 기여했다.[1]
코르부스는 장점에도 불구하고 거친 바다에서는 사용할 수 없다는 단점이 있었다. 두 척의 흔들리는 배를 안정적으로 연결하는 것은 위험했다. 거친 조건에서 작동할 때 이 장치는 쓸모가 없었다.[1] 선수에 추가된 무게는 배의 항해성을 저해했을 수 있으며, 이러한 불안정성으로 인해 로마는 기원전 255년과 기원전 249년의 폭풍 속에서 거의 두 개의 함대를 잃게 되었다고 추정된다.[1] 이러한 손실은 로마가 선박 설계에서 코르부스를 포기하는 데 기여했을 수 있다.
그러나 다른 분석에 따르면 추가된 무게가 선박의 안정성을 위협하지 않았다고 한다. 델프트 공과대학교의 전 해군 건축학 교수인 JW 본바커는 추정된 코르부스의 무게 1톤을 사용하여 다리가 올라갔을 때 약 250m3의 배수량을 가진 오단노선의 안정성이 심각하게 손상되지 *않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고 결론지었다.[1]
로마는 제1차 포에니 전쟁 말에 더 이상 코르부스를 사용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로마의 선박 승무원들의 경험이 쌓이면서 로마의 해군 전술도 향상되었고, 이에 따라 코르부스를 무기로 사용하는 상대적인 유용성이 감소했을 수 있다. 에크노무스 해전 이후 시대적 자료에는 이 장치에 대한 언급이 없으며, 기원전 241년 에게테스 제도 해전에서 이 장치 없이 전쟁에서 승리한 것으로 보인다.
2. 2. 작동 메커니즘
폴리비우스는 저서 『역사』 1.22-4-11장에서 코르부스를 양쪽에 작은 난간이 있는 폭 1.2m, 길이 10.9m의 다리로 묘사하고 있다. 이 장치는 배의 선수에 사용되었으며, 기둥과 도르래 시스템을 사용하여 다리를 올리고 내릴 수 있었다. 장치 하단에는 새의 부리 모양의 무거운 가시가 있었는데, 이것은 탑승 다리를 내릴 때 적군의 배 갑판을 관통하여 고정하도록 설계되었다. 이것은 선박 사이에 확고한 접착력을 제공하고 로마의 군단병 (''마리누스''라고 불리는 전문 해군 보병으로 복무)이 적의 배로 건너가 점령할 수 있는 경로를 제공했다.[1]기원전 3세기에 로마는 해군 강국이 아니었으며 해상 전투 경험이 거의 없었다. 기원전 264년에 시작된 제1차 포에니 전쟁 이전에 로마 공화국은 이탈리아 반도 밖에서 원정을 벌인 적이 없었다. 공화국의 군사력은 육상 기반의 전쟁에 있었고, 주요 자산은 로마 군인들의 규율과 용기였다. 탑승 다리는 로마인들이 해상에서 보병의 이점을 활용할 수 있게 해주었고, 따라서 카르타고인들의 우수한 해군 경험과 기술을 극복하는 데 도움이 되었다. 로마인들은 탑승 전술을 적용하여 밀레 해전, 술치 해전, 틴다리스 해전, 에크노무스 해전에서 승리했다.[1]
코르부스는 장점에도 불구하고 거친 바다에서는 사용할 수 없다는 심각한 단점이 있었다. 두 척의 흔들리는 배를 안정적으로 연결하는 것은 두 배의 구조를 위험하게 만들었다. 거친 조건에서 작동할 때, 이 장치는 전술 무기로서 쓸모가 없었다.[1] 선수에 추가된 무게는 또한 배의 항해성을 저해했을 수 있으며, 이러한 불안정성으로 인해 로마는 기원전 255년과 기원전 249년의 폭풍 속에서 거의 두 개의 함대를 잃게 되었다고 추정된다.[1] 이러한 손실은 시간이 지남에 따라 로마가 선박 설계에서 코르부스를 포기하는 데 기여했을 수 있다.
그러나 다른 분석에 따르면 추가된 무게가 선박의 안정성을 위협하지 않았다고 한다. 델프트 공과대학교의 전 해군 건축학 교수인 JW 본바커는 추정된 ''코르부스''의 무게 1톤을 사용하여 다리가 올라갔을 때 약 250m3의 배수량을 가진 오단노선의 안정성이 심각하게 손상되지 ''않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고 결론지었다.[1]
로마는 제1차 포에니 전쟁 말에 더 이상 코르부스를 사용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로마의 선박 승무원들의 경험이 쌓이면서, 로마의 해군 전술도 향상되었고, 이에 따라 코르부스를 무기로 사용하는 상대적인 유용성이 감소했을 수 있다. 에크노무스 해전 이후의 시대적 자료에는 이 장치에 대한 언급이 없으며, 기원전 241년에 에게테스 제도 해전이 이 장치 없이 전쟁을 결정하고 승리한 것으로 보인다. 기원전 36년 나울로쿠스 해전에서 로마 해군은 탑승 공격을 용이하게 하기 위해 ''하르팍스'' 또는 ''하르파고''로 알려진 작살과 윈치 시스템과 같은 다른 종류의 장치를 사용했다.
3. 역사적 배경 및 의의
기원전 3세기, 로마 공화국은 해군 강국이 아니었고 해상 전투 경험이 거의 없었다. 제1차 포에니 전쟁 이전에는 이탈리아 반도 밖에서 원정을 벌인 적도 없었다. 로마군의 주요 강점은 육상전에서의 규율과 용기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코르부스는 로마가 해상에서 보병의 이점을 활용하여 카르타고의 우수한 해군력을 극복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코르부스는 로마 군함에 설치된 특수한 탑승교로, 적함에 접근하여 병사들을 투입하는 데 사용되었다. 코르부스의 도입으로 로마는 해전을 육상전과 유사하게 만들 수 있었다. 이는 해전 경험이 부족했던 로마에게 큰 이점을 제공했다.
코르부스는 밀레 해전, 술치 해전, 틴다리스 해전, 에크노무스 해전 등 주요 해전에서 로마군의 승리에 기여했다. 그러나 거친 바다에서는 사용하기 어렵고 배의 안정성을 해칠 수 있다는 단점도 있었다.
결과적으로 로마는 제1차 포에니 전쟁 이후 코르부스 사용을 중단하고, 해군 전술을 발전시키는 방향으로 전환했다. 에크노무스 해전 이후 사료에는 코르부스에 대한 언급이 없으며, 기원전 241년 에게테스 제도 해전에서 코르부스 없이 승리했다. 기원전 36년 나울로쿠스 해전에서 로마 해군은 하르팍스와 같은 다른 종류의 장치를 사용했다.
3. 1. 로마 해군의 혁신
폴리비우스는 저서 『역사』에서 코르부스를 폭 1.2m, 길이 10.9m의 다리로 묘사했다. 이 장치는 배의 선수에 사용되었으며, 도르래 시스템을 사용하여 다리를 올리고 내렸다. 장치 하단에는 새의 부리 모양의 가시가 있어 적군의 배 갑판을 관통하여 고정하도록 설계되었다. 이것은 로마 군단병이 적의 배로 건너가 점령할 수 있는 경로를 제공했다.[1]기원전 3세기 로마는 해군 경험이 거의 없었다. 로마 공화국은 이탈리아 반도 밖에서 원정을 벌인 적이 없었고, 군사력은 육상전에 집중되어 있었다. 코르부스는 로마인들이 해상에서 보병의 이점을 활용하여 카르타고의 우수한 해군력을 극복하는 데 도움을 주었다. 로마인들은 탑승 전술을 적용하여 밀레 해전, 술치 해전, 틴다리스 해전, 에크노무스 해전에서 승리했다.
코르부스는 장점에도 불구하고 거친 바다에서는 사용할 수 없다는 단점이 있었다. 두 척의 배를 안정적으로 연결하는 것은 배의 구조를 위험하게 만들었다. 선수에 추가된 무게는 배의 항해성을 저해했을 수 있으며, 이러한 불안정성으로 인해 로마는 기원전 255년과 기원전 249년의 폭풍 속에서 거의 두 개의 함대를 잃게 되었다고 추정된다.[1]
그러나 다른 분석에 따르면 추가된 무게가 선박의 안정성을 위협하지 않았다고 한다. 델프트 공과대학교의 JW 본바커 교수는 코르부스의 무게 1톤을 사용하여 계산했을 때, 250m3의 배수량을 가진 오단노선의 안정성이 심각하게 손상되지 않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고 결론지었다.[1]
로마는 제1차 포에니 전쟁 말에 더 이상 코르부스를 사용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로마 선박 승무원들의 경험이 쌓이면서 해군 전술도 향상되었고, 코르부스의 유용성이 감소했을 수 있다. 에크노무스 해전 이후 자료에는 이 장치에 대한 언급이 없으며, 기원전 241년 에게테스 제도 해전에서 코르부스 없이 승리했다. 기원전 36년 나울로쿠스 해전에서 로마 해군은 ''하르팍스''와 같은 다른 종류의 장치를 사용했다.
3. 2. 주요 해전에서의 역할
폴리비우스는 저서 『역사』에서 코르부스를 양쪽에 작은 난간이 있는 폭 1.2m, 길이 10.9m의 다리로 묘사하고 있다. 이 장치는 배의 선수에 사용되었으며, 기둥과 도르래 시스템을 사용하여 다리를 올리고 내릴 수 있었다. 장치 하단에는 새의 부리 모양의 무거운 가시가 있어 적군의 배 갑판을 관통하여 고정하도록 설계되었다. 이것은 로마의 군단병이 적의 배로 건너가 점령할 수 있는 경로를 제공했다.[1]기원전 3세기에 로마는 해상 전투 경험이 거의 없었다. 제1차 포에니 전쟁 이전 로마 공화국은 이탈리아 반도 밖에서 원정을 벌인 적이 없었다. 로마군의 주요 자산은 육상 기반의 전쟁에서의 규율과 용기였다. 탑승 다리는 로마인들이 해상에서 보병의 이점을 활용하여 카르타고인들의 우수한 해군 경험과 기술을 극복하는 데 도움을 주었다. 로마인들은 탑승 전술을 적용하여 밀레 해전, 술치 해전, 틴다리스 해전, 에크노무스 해전에서 승리했다.[1]
탑승 다리는 장점에도 불구하고 거친 바다에서는 사용할 수 없다는 단점이 있었다. 두 척의 흔들리는 배를 안정적으로 연결하는 것은 위험했다. 거친 조건에서 작동할 때, 이 장치는 쓸모가 없었다.[1] 선수에 추가된 무게는 배의 항해성을 저해했을 수 있으며, 이러한 불안정성으로 인해 로마는 기원전 255년과 기원전 249년의 폭풍 속에서 거의 두 개의 함대를 잃게 되었다고 추정된다.[1]
그러나 다른 분석에 따르면 추가된 무게가 선박의 안정성을 위협하지 않았다고 한다. 델프트 공과대학교의 전 해군 건축학 교수인 JW 본바커는 추정된 코르부스의 무게 1톤을 사용하여 다리가 올라갔을 때 약 250m3의 배수량을 가진 오단노선의 안정성이 심각하게 손상되지 ''않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고 결론지었다.[1]
로마는 제1차 포에니 전쟁 말에 더 이상 코르부스를 사용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로마의 선박 승무원들의 경험이 쌓이면서, 로마의 해군 전술도 향상되었고, 이에 따라 코르부스를 무기로 사용하는 상대적인 유용성이 감소했을 수 있다. 에크노무스 해전 이후의 시대적 자료에는 이 장치에 대한 언급이 없으며, 기원전 241년에 에게테스 제도 해전이 이 장치 없이 전쟁을 결정하고 승리한 것으로 보인다.
4. 한계 및 쇠퇴
코르부스는 몇 가지 한계점을 가지고 있었다. 우선, 거친 바다에서는 사용할 수 없다는 점이 치명적이었다. 두 척의 배가 흔들리는 상황에서 코르부스를 안정적으로 연결하는 것은 매우 위험했으며, 이는 전술 무기로서의 효용성을 떨어뜨렸다.[1] 또한, 선수에 추가된 무게는 배의 항해성을 저해했을 가능성이 있다.[1] 이러한 불안정성 때문에 로마는 기원전 255년과 기원전 249년의 폭풍 속에서 거의 두 개의 함대를 잃었다고 추정된다.[1]
하지만, 코르부스의 무게가 선박의 안정성을 심각하게 위협하지 않았다는 분석도 있다. 델프트 공과대학교의 한 교수는 코르부스의 무게를 1톤으로 추정했을 때, 오단노선의 안정성이 크게 손상되지 않았을 것이라고 결론 내렸다.[1]
결과적으로 로마는 제1차 포에니 전쟁 말기에 코르부스 사용을 중단한 것으로 보인다. 로마 해군이 성장하고 경험을 축적하면서 해군 전술 또한 발전했고, 이에 따라 코르부스의 상대적인 유용성은 감소했을 것이다. 에크노무스 해전 이후의 기록에는 코르부스에 대한 언급이 없으며, 기원전 241년 에게테스 제도 해전에서는 코르부스 없이 전투에서 승리했다. 이후 기원전 36년 나울로쿠스 해전에서 로마 해군은 하르팍스와 같은 다른 종류의 장치를 사용했다.
4. 1. 안정성 문제
폴리비우스의 저서 《역사》에 따르면, 코르부스는 폭 1.2m, 길이 10.9m의 다리 양쪽에 작은 난간이 있는 구조였다. 선수에 설치되어 도르래 시스템으로 작동했으며, 하단에는 새 부리 모양의 가시가 있어 적 배 갑판을 관통해 고정했다. 이는 로마 군단병이 적 배로 건너가 싸울 수 있게 했다.[1]기원전 3세기 로마는 해군 경험이 부족했지만, 코르부스를 통해 해상에서 보병의 이점을 활용, 카르타고의 해군력을 극복하고 밀레 해전, 술치 해전, 틴다리스 해전, 에크노무스 해전에서 승리했다.
그러나 코르부스는 거친 바다에서는 사용이 불가능했고, 선수에 추가된 무게는 배의 항해성을 저해했다.[1] 이로 인해 로마는 기원전 255년과 기원전 249년의 폭풍 속에서 거의 두 개의 함대를 잃었다고 추정된다.[1] 이러한 손실은 로마가 선박 설계에서 코르부스를 포기하는 데 영향을 미쳤을 수 있다.
하지만 다른 분석에 따르면 코르부스의 무게(약 1톤)가 오단노선의 안정성을 심각하게 손상시키지 않았을 가능성이 높다고 한다.[1]
로마는 제1차 포에니 전쟁 말에 코르부스 사용을 중단한 것으로 보인다. 로마 선원들의 경험과 해군 전술이 향상되면서 코르부스의 유용성이 감소했을 수 있다. 에크노무스 해전 이후 자료에는 코르부스에 대한 언급이 없으며, 기원전 241년 에게테스 제도 해전은 코르부스 없이 치러졌다. 기원전 36년 나울로쿠스 해전에서 로마 해군은 ''하르팍스'' 같은 다른 장치를 사용했다.
4. 2. 기술 발전과 쇠퇴
폴리비우스는 저서 『역사』에서 코르부스를 양쪽에 작은 난간이 있는 폭 1.2m, 길이 10.9m의 다리로 묘사한다. 이 장치는 배의 선수에서 사용되었으며, 기둥과 도르래 시스템을 사용하여 다리를 올리고 내릴 수 있었다. 장치 하단에는 새의 부리 모양의 무거운 가시가 있어, 적군의 배 갑판을 관통하여 고정하도록 설계되었다. 이것은 로마의 군단병이 적의 배로 건너가 점령할 수 있는 경로를 제공했다.기원전 3세기 로마는 해상 전투 경험이 거의 없었다. 로마 공화국은 이탈리아 반도 밖에서 원정을 벌인 적이 없었고, 군사력은 육상전에 집중되어 있었다. 코르부스는 로마인들이 해상에서 보병의 이점을 활용하여 카르타고인들의 우수한 해군 기술을 극복하는 데 도움을 주었다. 로마인들은 탑승 전술을 적용하여 밀레 해전, 술치 해전, 틴다리스 해전, 에크노무스 해전에서 승리했다.
코르부스는 장점에도 불구하고 거친 바다에서는 사용할 수 없다는 단점이 있었다. 두 척의 흔들리는 배를 안정적으로 연결하는 것은 위험했고,[1] 선수에 추가된 무게는 배의 항해성을 저해했을 수 있다.[1] 이러한 불안정성으로 인해 로마는 기원전 255년과 기원전 249년의 폭풍 속에서 거의 두 개의 함대를 잃게 되었다고 추정된다.[1] 이러한 손실은 로마가 선박 설계에서 코르부스를 포기하는 데 기여했을 수 있다.
하지만 다른 분석에 따르면 추가된 무게가 선박의 안정성을 위협하지 않았다고 한다. 델프트 공과대학교의 전 해군 건축학 교수인 JW 본바커는 코르부스의 추정 무게 1톤을 사용하여 계산했을 때, 다리가 올라갔을 때 약 250m3의 배수량을 가진 오단노선의 안정성이 심각하게 손상되지 않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고 결론지었다.[1]
로마는 제1차 포에니 전쟁 말에 더 이상 코르부스를 사용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로마 선박 승무원들의 경험과 해군 전술이 향상되면서 코르부스의 유용성이 감소했을 수 있다. 에크노무스 해전 이후의 자료에는 이 장치에 대한 언급이 없으며, 기원전 241년 에게테스 제도 해전은 이 장치 없이 승리했다. 기원전 36년 나울로쿠스 해전에서 로마 해군은 탑승 공격을 위해 ''하르팍스''와 같은 다른 장치를 사용했다.
5. 현대의 해석
코르부스에 대한 현대적 해석은 다양하게 제시되어 왔다. 초기 해석 이후 여러 학자들이 다양한 설계를 제안했지만, 모든 학자가 코르부스의 존재 자체를 인정한 것은 아니다. 1907년 윌리엄 W. 턴은 코르부스가 실제로 존재하지 않았다고 주장하며, 그 무게로 인해 배가 뒤집힐 수 있다는 점을 지적했다.[8][9] 그는 코르부스가 기원전 413년경 그리스에서 사용되던 기존 갈고리 막대의 개선된 형태일 뿐이라고 보았다.[10]
5. 1. 초기 해석
코르부스의 설계는 역사적으로 많은 변형을 거쳤다. 가장 초기의 현대적 해석은 1649년 독일 고전학자 요한 프라인스하임이 제시하였다. 프라인스하임은 다리가 두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한 부분은 약 7.32m, 다른 부분은 약 3.66m라고 제안했다. 약 7.32m 부분은 뱃머리 돛대에 배치되었고, 경첩은 더 작은 약 3.66m 부분을 맨 위에 있는 돛대에 연결했다. 더 작은 부분은 위아래로 움직일 수 있었기 때문에 실제 통로가 되었고, 절구가 끝에 부착되었다.[2]고전학자이자 독일 정치가인 B.G. 니부어는 프라인스하임의 해석을 개선하고자, 코르부스의 두 부분을 단순히 바꿀 필요가 있다고 제안했다. 약 3.66m 쪽을 뱃머리 돛대에 적용함으로써, 약 7.32m 쪽을 도르래를 이용하여 적선에 내릴 수 있었다.[3]
독일 학자 K.F. 할타우스는 코르부스가 약 10.97m 길이의 다리였으며, 다리의 가까운 끝은 다리 안으로 약 3.66m 연장되는 작은 직사각형 노치를 통해 돛대에 고정되었다고 가정했다. 할타우스는 뱃머리 돛대에 있는 레버를 통해 승무원이 돛대를 돌려 코르부스를 돌릴 수 있었을 것이라고 제안했다. 도르래는 장치를 사용하기 위해 다리를 들어 올리는 약 7.32m 돛대의 맨 위에 배치되었다.[4]
독일 고전학자 빌헬름 이네는 프라인스하임의 기중기와 유사한 또 다른 코르부스 버전을 제안했으며, 다리 부분의 길이를 조정했다. 그의 설계는 코르부스를 갑판에서 약 3.66m 위에 배치했고, 코르부스가 돛대에서 약 10.97m 뻗어나오게 했으며, 가까운 끝의 기저부가 돛대에 연결되었다. 갑판의 해병들은 약 3.66m 사다리를 올라 코르부스에 접근해야 했다.[5]
프랑스 학자 에밀 드 생 드니는 코르부스가 약 10.97m 다리를 특징으로 하며, 돛대 구멍은 가까운 끝에서 약 3.66m 떨어져 있다고 제안했다. 그러나 드 생 드니가 제안한 설계에는 직사각형 구멍이 포함되지 않았고, 다리가 항상 갑판에 수직으로 돛대를 따라 위아래로 이동하도록 강제했다.[6]
1956년, 역사학자 H.T. 왈린가가 논문 "로마인의 승선교"를 발표했다. 이 논문은 코르부스에 대한 다른 전폭 설계를 제안했으며, 이는 20세기 나머지 기간 동안 학자들 사이에서 가장 널리 받아들여진 모델이 되었다. 왈린가의 설계는 돛대 꼭대기에 장착된 도르래를 통해 각도로 들어 올릴 수 있도록 다리의 갑판에 직사각형 노치를 포함했다.[7]
그러나 모든 사람이 로마인이 코르부스를 특별한 장치로 발명하고 사용했다는 생각을 받아들인 것은 아니다. 1907년, 윌리엄 W. 턴은 코르부스가 존재하지 않았다고 주장했다.[8] 턴은 다리의 무게가 로마 선박의 설계가 똑바로 유지하기에 너무 무거울 것이라고 믿었다. 그는 코르부스가 들어 올려지면 배가 코르부스의 무게로 인해 단순히 뒤집혀 침몰할 것이라고 제안했다.[9] 턴은 코르부스가 기원전 413년경 그리스에서 사용된 기존의 갈고리 막대의 개선된 버전일 뿐이라고 믿었다.[10]
5. 2. 다양한 학설
코르부스의 설계는 역사적으로 많은 변형을 거쳤다. 가장 초기의 현대적 해석은 1649년 독일 고전학자 요한 프라인스하임이 제시했다. 프라인스하임은 다리가 두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한 부분은 약 7.32m, 다른 부분은 약 3.66m라고 제안했다. 약 7.32m 부분은 뱃머리 돛대에 배치되었고, 경첩은 더 작은 약 3.66m 부분을 맨 위에 있는 돛대에 연결했다. 더 작은 부분은 위아래로 움직일 수 있었기 때문에 실제 통로가 되었고, 절구가 끝에 부착되었다.[2]독일 정치가 B.G. 니부어는 프라인스하임의 설계를 개선하여, 약 3.66m 쪽을 뱃머리 돛대에 적용하고 약 7.32m 쪽을 도르래를 이용하여 적선에 내릴 수 있다고 제안했다.[3]
독일 학자 K.F. 할타우스는 코르부스가 약 10.97m 길이의 다리이며, 다리의 가까운 끝은 다리 안으로 약 3.66m 연장되는 작은 직사각형 노치를 통해 돛대에 고정된다고 가정했다. 뱃머리 돛대에 있는 레버를 통해 승무원이 돛대를 돌려 코르부스를 돌릴 수 있었을 것이라고 제안했다. 도르래는 장치를 사용하기 위해 다리를 들어 올리는 약 7.32m 돛대의 맨 위에 배치되었다.[4]
독일 고전학자 빌헬름 이네는 프라인스하임의 기중기와 유사한 또 다른 코르부스 버전을 제안했으며, 다리 부분의 길이를 조정했다. 그의 설계는 코르부스를 갑판에서 약 3.66m 위에 배치했고, 코르부스가 돛대에서 약 10.97m 뻗어나오게 했으며, 가까운 끝의 기저부가 돛대에 연결되었다. 갑판의 해병들은 약 3.66m 사다리를 올라 코르부스에 접근해야 했다.[5]
프랑스 학자 에밀 드 생 드니는 코르부스가 약 10.97m 다리를 특징으로 하며, 돛대 구멍은 가까운 끝에서 약 3.66m 떨어져 있다고 제안했다. 그러나 드 생 드니가 제안한 설계에는 직사각형 구멍이 포함되지 않았고, 다리가 항상 갑판에 수직으로 돛대를 따라 위아래로 이동하도록 강제했다.[6]
1956년 역사학자 H.T. 왈린가가 논문 "로마인의 승선교"를 발표했다. 이 논문은 코르부스에 대한 다른 전폭 설계를 제안했으며, 이는 20세기 나머지 기간 동안 학자들 사이에서 가장 널리 받아들여진 모델이 되었다. 왈린가의 설계는 돛대 꼭대기에 장착된 도르래를 통해 각도로 들어 올릴 수 있도록 다리의 갑판에 직사각형 노치를 포함했다.[7]
그러나 모든 사람이 로마인이 코르부스를 특별한 장치로 발명하고 사용했다는 생각을 받아들인 것은 아니다. 1907년, 윌리엄 W. 턴은 코르부스가 존재하지 않았다고 주장했다.[8] 턴은 다리의 무게가 로마 선박의 설계가 똑바로 유지하기에 너무 무거울 것이라고 믿었다. 그는 코르부스가 들어 올려지면 배가 코르부스의 무게로 인해 단순히 뒤집혀 침몰할 것이라고 제안했다.[9] 턴은 코르부스가 기원전 413년경 그리스에서 사용된 기존의 갈고리 막대의 개선된 버전일 뿐이라고 믿었다.[10]
5. 3. 왈린가의 모델
코르부스의 설계는 역사적으로 많은 변형을 거쳤다. 가장 초기 현대적 해석은 1649년 독일 고전학자 요한 프라인스하임이 제시했다. 프라인스하임은 다리가 두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한 부분은 약 7.32m이고 다른 부분은 약 3.66m라고 제안했다. 약 7.32m 부분은 뱃머리 돛대에 배치되었고, 경첩은 더 작은 약 3.66m 부분을 맨 위에 있는 돛대에 연결했다. 더 작은 부분은 위아래로 움직일 수 있었기 때문에 실제 통로가 되었고, 절구가 끝에 부착되었다.[2]고전학자이자 독일 정치가인 B.G. 니부어는 코르부스 해석을 개선하고자 프라인스하임의 두 부분을 단순히 바꾸는 것을 제안했다. 약 3.66m 쪽을 뱃머리 돛대에 적용하고, 약 7.32m 쪽을 도르래를 이용하여 적선에 내릴 수 있었다.[3]
독일 학자 K.F. 할타우스는 코르부스가 약 10.97m 길이의 다리이며, 다리의 가까운 끝은 다리 안으로 약 3.66m 연장되는 작은 직사각형 노치를 통해 돛대에 고정된다고 가정했다. 할타우스는 뱃머리 돛대에 있는 레버를 통해 승무원이 돛대를 돌려 코르부스를 돌릴 수 있었을 것이라고 제안했다. 도르래는 장치를 사용하기 위해 다리를 들어 올리는 약 7.32m 돛대의 맨 위에 배치되었다.[4]
독일 고전학자 빌헬름 이네는 프라인스하임의 기중기와 유사한 또 다른 코르부스 버전을 제안했으며, 다리 부분의 길이를 조정했다. 그의 설계는 코르부스를 갑판에서 12피트 위에 배치했고, 코르부스가 돛대에서 약 10.97m 뻗어나오게 했으며, 가까운 끝의 기저부가 돛대에 연결되었다. 갑판의 해병들은 약 3.66m 사다리를 올라 코르부스에 접근해야 했다.[5]
프랑스 학자 에밀 드 생 드니는 코르부스가 약 10.97m 다리를 특징으로 하며, 돛대 구멍은 가까운 끝에서 약 3.66m 떨어져 있다고 제안했다. 그러나 드 생 드니가 제안한 설계에는 직사각형 구멍이 포함되지 않았고, 다리가 항상 갑판에 수직으로 돛대를 따라 위아래로 이동하도록 강제했다.[6]
1956년, 역사학자 H.T. 왈린가가 논문 "로마인의 승선교"를 발표했다. 이 논문은 코르부스에 대한 다른 전폭 설계를 제안했으며, 이는 20세기 나머지 기간 동안 학자들 사이에서 가장 널리 받아들여진 모델이 되었다. 왈린가의 설계는 돛대 꼭대기에 장착된 도르래를 통해 각도로 들어 올릴 수 있도록 다리의 갑판에 직사각형 노치를 포함했다.[7]
5. 4. 코르부스 존재 부정론
모든 사람이 로마인이 코르부스를 특별한 장치로 발명하고 사용했다는 생각을 받아들인 것은 아니다. 1907년, 윌리엄 W. 턴은 코르부스가 존재하지 않았다고 주장했다.[8] 턴은 다리의 무게 때문에 로마 선박이 똑바로 유지되기 어려울 것이라고 보았다. 그는 코르부스를 들어 올리면 배가 그 무게로 인해 뒤집혀 침몰할 것이라고 추정했다.[9] 턴은 코르부스가 기원전 413년경 그리스에서 사용된 기존 갈고리 막대를 개선한 버전에 불과하다고 생각했다.[10]6. 한국의 관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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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조
[1]
문서
Wallinga p.77–90
[2]
서적
The History of Titus Livius with the entire Supplement of Johann Freinsheim Volume II
W. Green & T. Chaplin
[3]
서적
The History of Rome, Volume III
Taylor, Walton, and Maberly
[4]
서적
"The Boarding Bridge of the Romans"
J. B. Wolters
[5]
서적
The History of Rome
https://archive.org/[...]
Longmans, Green, and Co
[6]
논문
Une machine de guerre maritime: le corbeau de Duilius
1946
[7]
서적
The Boarding Bridge of the Romans
J. B. Wolters
[8]
논문
Fleets of the First Punic War
1907
[9]
서적
Hellenistic Military & Naval Developments
Cambridge UP
[10]
서적
A Companion to Latin Studies
Cambridge UP
[11]
서적
137億年の物語 宇宙が始まってから今日までの全歴史
文芸春秋
[12]
서적
The boarding-bridge of the Romans
J.B. Wolters Groningen, Djakarta
[13]
문서
デルトの造船工学教授
[14]
문서
Wallinga, Herman Tammo (1956) pp.77-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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