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단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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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군단병은 로마 군대의 핵심 보병 병사였다. 마리우스의 군제개혁 이후 로마 시민이라면 누구나 군단병이 될 수 있었으며, 원수정 시대에는 25년의 복무 기간, 표준화된 봉급, 전역 후 혜택을 통해 전문화되었다. 군단병은 전투, 치안 유지, 로마 문화 전파, 사회 기반 시설 건설 등 다양한 기능을 수행했으며, 이무네스라고 불리는 특수병도 존재했다. 군단병은 훈련과 규율을 통해 강한 전우애를 형성하고, 전투에서 효율적인 대형과 무기를 사용했다. 봉급과 조건은 시대에 따라 변동되었으며, 식단과 위생 관리에도 신경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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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단병 | |
---|---|
기본 정보 | |
![]() | |
복무 기간 | 25년 |
역할 | 중보병 |
크기 | 약 5,000명 (공화정); 5,200명 (제정) |
파르티아인, 게르만인, 브리튼인 | 파르티아인 게르만인 브리튼인 |
창설 | 기원전 3세기 |
해체 | 서기 5세기 |
역사 | |
역할 | |
주 역할 | 중보병 |
보조 역할 | 건설, 공병, 포병 |
장비 | |
무기 | 글라디우스 (칼) 필룸 (투창) 스쿠툼 (방패) 플룸바타 (다트) |
갑옷 | 로리카 세그멘타타 (분절 갑옷) 로리카 하마타 (사슬 갑옷) 로리카 스 Squamata (비늘 갑옷) 카시스 (헬멧) 갈레아 (헬멧) |
급여 | |
일일 급여 | 10 아스 (기원전 2세기); 225 데나리우스 연간 (서기 1세기); 500 데나리우스 연간 (서기 3세기) |
기타 | |
다른 용어 | Gregarius miles, Miles legionis |
2. 역사
로마 군단병의 역사는 로마의 성장과 함께 변화하고 발전했다.
가이우스 마리우스는 기원전 108년 집정관 시절 군제개혁을 단행하여, 재산에 상관없이 로마 시민이라면 누구나 군단병이 될 수 있도록 하였다.[29] 이를 통해 누미디아의 왕 유구르타와의 전쟁에서 필요한 병력을 확보할 수 있었다. 또한, 군단병의 훈련 수준을 높이고 장비를 통일하여 전문화와 표준화에 힘썼다.[30] 그러나 군단병들이 지휘관에게 혜택과 보상을 의존하게 되면서, 점차 로마 공화정 정부보다 지휘관에게 충성하게 되는 경향을 보였다.[31]
기원전 27년, 아우구스투스는 원수정을 수립하고 군단병을 더욱 전문화했다. 복무 기간을 25년으로 늘리고 봉급을 표준화했으며, 전역 후 토지나 금전 보상을 보장하여 지휘관에 대한 의존을 줄였다. 또한, 군사 선서를 개정하여 병사들이 황제에게만 충성하도록 하였다.[28] 군단병들은 아우구스투스와 후대 황제들의 원정을 통해 로마의 국경을 확장하는데 기여했다.[47]
셉티미우스 세베루스 시기부터 군단병은 점차 위상을 잃어갔다. 그는 군단병에게 기부금과 봉급 인상 등의 혜택을 제공했지만, 이는 군단병들이 황제에게 더 많은 보상을 바라게 하여 규율을 악화시키는 결과를 초래했다.[32] 카라칼라 시기에는 로마 제국 내 모든 자유민에게 시민권이 부여되면서 보조군과의 구분이 사라졌고, 이는 군단병의 질적 저하를 야기했다.[33]
3세기의 위기 동안, 로마 제국의 국경을 따라 위협이 발생하면서, 좀 더 기동성 있는 군대가 필요하게 되었다. 이에 따라 기병의 중요성이 커졌고, 중장보병인 군단병의 역할은 축소되었다. 4세기 무렵에는, 로마 보병은 고전적인 군단병의 갑옷 대부분을 착용하지 않았고, 이전의 필룸 대신 다트를 사용했다.[47]
2. 1. 시초: 마리우스의 군제개혁
가이우스 마리우스는 기원전 108년 집정관 시절, 로마가 누미디아의 왕 유구르타와 전쟁을 벌이던 중 더 많은 병력이 필요하게 되자, 군 입대 시 적용되던 재산 요건을 없애고 로마 시민이라면 누구나 군단병이 될 수 있도록 하였다.[29] 유구르타 전쟁이 끝난 후, 마리우스는 로마 군단병의 전문화와 표준화에 힘썼다. 그는 병사들의 훈련 수준을 높이고 장비를 통일하여, 새로운 전쟁이 벌어질 때마다 군대를 새로 만들 필요가 없도록 하였다.[30] 또한, 병사들에게 토지나 금전 등의 보상을 제공하여 전역 후 혜택을 보장하였다. 그러나 군단병들이 이러한 혜택과 보상을 지휘관에게 의존하게 되면서, 이들은 점차 로마 공화정 정부보다 지휘관에게 충성하게 되었다.[31]2. 2. 원수정 시기
기원전 27년, 아우구스투스가 권력을 장악하고 원수정을 수립하면서, 군단병을 더욱 전문화하고 지휘관에 대한 의존을 끊으려 했다. 그의 집권기에 군단병의 복무 기간은 25년으로 늘어났고(이전에는 평균 10년 정도였다), 봉급도 모든 군단에서 표준화되었다. 군단병들은 복무가 끝날 때 토지나 금전 보상을 보장받았으며, 이는 전역 후 지휘관에게 덜 의존하게 하였다. 아우구스투스는 군사 선서도 개정하여 병사들이 지휘관이 아닌 황제에게만 충성하도록 하였다. 이에 따라, 아우구스투스는 로마 공화정 말기의 내전을 종식시키고 황제에게만 충성하는 군대를 만들어냈다.[28]군단병들은 아우구스투스와 후대 황제들의 원정을 통해 로마의 국경을 브리타니아 남부, 다키아, 북아프리카 등으로 넓혔다.[47]
2. 3. 쇠퇴
셉티미우스 세베루스 시기부터 군단병은 점차 그 위상을 잃어갔다. 셉티미우스 세베루스는 군단병에게 기부금과 봉급 인상 등의 혜택을 제공했지만, 이는 군단병들이 황제에게 더 많은 보상을 바라게 하여 규율을 악화시키는 결과를 초래했다.[32] 그의 후임자인 카라칼라 시기에는 로마 제국 내 모든 자유민에게 시민권이 부여되면서 보조군과의 구분이 사라졌고, 이는 이전보다 낮은 기준의 신병들이 군단에 입대하게 하여 군단병의 질적 저하를 야기했다.[33]3세기의 위기 동안, 로마 제국의 국경을 따라 위협이 발생하면서, 좀 더 기동성 있는 군대가 필요하게 되었다. 이에 따라 기병의 중요성이 커졌고, 중장보병인 군단병의 역할은 축소되었다. 4세기 무렵에는, 로마 보병은 고전적인 군단병의 갑옷 대부분을 착용하지 않았고, 이전의 필룸 대신 다트를 사용했다.[47]
3. 기능
군단병은 군인이었지만, 그 외에도 여러 중요한 기능을 수행했다. 총독들은 전문 경찰력이 부족했기 때문에 군단병을 치안 유지와 중요 시설 방범에 사용했다.[34] 로마 제국은 대규모 민간 행정 기관이 부족하여, 로마군에 많은 행정 직위가 주어졌다. 고위직 군인들은 지역민들 간의 분쟁에서 재판관 역할을 했고, 로마군은 중요한 세금 징수 요소였다.[35]
군단병은 로마 문화를 속주에 전파하는 역할도 했다. 군단병이 속주에 정착하면서 이들을 중심으로 도시가 생겨났고, 자주 커다란 도시로 발전했다. 군단병이 토착민들과 어울리고 통혼하면서, 이들은 자신들이 보호하는 속주를 로마화하는 데 기여했다.
군단병은 노동력과 전문 기술의 원천이었다. 로마 제국을 연결했던 많은 사회 기반 시설은 군단병이 건설했다. 도로, 송수로, 교량, 요새, 성벽 등 많은 방어 시설물도 군단병이 건설했다.[47] 고대 로마의 공학의 기념적인 예시인 하드리아누스 장벽은 그곳에 주둔한 세 개 군단이 건설했다.[36] 군단병은 대규모 공학 계획뿐만 아니라, 측량사, 의사, 예술가, 공학자 등 군대 내 다양한 인력들은 일반적인 군사 업무와 함께 다양한 행정 업무에도 투입되었다.[35]
4. 이무네스
일반 군단병(밀리테스) 외에 특수 기술을 보유한 군단병을 '이무네스'라고 불렀다. 이무네스는 공학자, 공성 병기 조종수, 훈련 교관, 무기 제작자, 목수, 의무병 등 다양한 역할을 수행했다. 이들은 일반 군단병과 동일한 훈련을 받았으며, 필요시 전투에 투입되었다. 추가적인 업무를 수행하는 대가로 더 나은 봉급을 받았다.[37]
5. 모집
군단병은 주로 시민권자 지원병으로 구성되었지만, 징집을 통한 인원 충원은 공화정 시대부터 원수정 시대까지, 특히 위기 시기에 지속적으로 이루어졌다. 이는 로마 군단병의 상당수가 징집병이었다는 것을 의미한다.[38] 국가가 모집병에게 장비를 제공하고 재산 요건도 사라지면서, 극빈곤층 로마 시민도 군단에 입대할 수 있었다. 군대는 영예롭고 가치 있는 직업으로 여겨졌다. 정기적인 봉급, 훌륭한 전역 혜택, 특정한 법적 이점까지 있어서, 군단병은 일반적인 시민이 바라는 많은 특전이 있었다. 빈곤한 시민도 군대에 입대할 수 있었지만, 플레브스 계층 사람들도 군단병에서 발견되었다. 실제로 군대는 로마 사회에서 몇 안 되는 신분 상승 이동 방법 중 하나였다.[39]
로마군은 대장장이, 목수, 도축업자 등 유용한 기술을 지닌 신병을 적극적으로 모집하려 했다. 글을 읽고 쓰는 능력은 켄투리오 같은 고위직으로 진급하는 데 필요했기에 유용하였다.[40] 공화정 말 군단병은 주로 로마시 주변 지역 출신이었으나, 로마가 확장함에 따라 이탈리아 다른 지역에서도 신병이 등장하기 시작하였다. 점차 이탈리아 지역보다는 군단이 주둔했던 지역에서 신병이 생겨났다. 트라야누스 시기 무렵엔, 이탈리아 출신 군단병에 속주 출신 군단병 4-5명이 있었다.[38]
6. 장비
군단병은 전투에 필요한 다양한 장비를 휴대했다. 갑옷으로는 로리카 하마타, 로리카 스콰마타, 혹은 1~3세기의 로리카 세그멘타타를 착용했다. 방어구로는 스쿠툼 방패, 갈레아 투구를 사용했다. 무기로는 투창인 필룸과 베루툼, 검인 글라디우스, 단검인 푸기오를 휴대했다. 그 외에도 혁대, 칼리가이 군화, 정강이받이, 마니카 팔 보호대를 착용했다.[41]
행군 시에는 사르키나라고 불리는 군장을 휴대했는데, 여기에는 14일치 식량, 포스카를 담는 가죽 수통, 요리 기구, 팰리세이드 구축을 위한 말뚝 두 개, 삽, 고리버들 바구니 등이 포함되었다.[41]
클라우디우스 황제의 군제개혁(서기 41년경) 이후, 각 군단은 발리스타와 카로발리스타 같은 공성 장비를 보유하게 되었다. 각 코호르트는 발리스타 1대, 각 켄투리아는 카로발리스타 1대를 지급받았다.[42] 따라서 10개의 코호르트와 60개의 켄투리아로 구성된 표준 군단은 총 10대의 발리스타와 60대의 카로발리스타를 보유했다.
7. 전투 및 교전
로마 군단병은 전투에 돌입하기 전 충분한 식사와 휴식을 취했다.[24] 지휘관은 연설을 통해 군단병의 사기를 고취시켰으며, 특히 전투 승리 시 얻게 될 약탈품과 부를 강조하여 전투 동기를 부여했다.[12] 본격적인 전투에 앞서 기병 및 보조군이 척후전과 정찰을 실시하여 적의 대열을 살폈다.[41]
군단병의 주요 무기는 필룸(투창), 스쿠툼(방패), 글라디우스(단검)였다. 이들은 적에게 접근하면서 필룸을 던져 공격했다. 필룸은 적의 방패를 관통하거나, 방패에 꽂혀 움직임을 방해하여 군단병의 돌격을 도왔다.[47] 스쿠툼은 방어뿐만 아니라 공격용으로도 사용되었다. 방패 중앙의 금속 쇠붙이로 적을 밀어내고, 글라디우스로 찌르거나 베는 공격을 가했다.[46] 잘 훈련된 군단병은 이러한 장비를 효율적으로 사용하여 고대 세계에서 강력한 전투력을 발휘했다.[47]
군단병은 촘촘한 간격을 유지하며 질서 있는 대형으로 전투를 수행했다. 부대 간 틈은 예비 부대 투입이나 척후병의 퇴각 경로로 활용되었고, 전투 중 소강 상태일 때는 부상병을 후방으로 후송하는 통로가 되었다.[41]
7. 1. 사기 유지
로마 군단병들은 8명으로 구성된 콘투베르니움이라는 기본 단위로 함께 생활하며 강한 전우애를 형성했다.[43] 이들은 함께 싸우고, 먹고, 훈련하며 서로에게 자부심을 주고 전투 의지를 북돋았다. 군기수는 군기를 지키고 군단병들을 결집시키는 중요한 역할을 했다. 군기를 잃는 것은 켄투리아에 큰 불명예였기 때문에, 군기수는 군단병들이 단결하여 싸울 수 있도록 독려했다.[14]전투 대형 후방의 옵티오는 평시에도 여러 역할을 수행했지만, 전투 중에는 군단병의 탈영을 막는 임무를 맡았다. 이들은 끝이 둥근 막대기로 도망치는 병사들을 대열로 복귀시켰다. 선두의 켄투리오는 솔선수범하여 전투에 임하며 군단병들의 모범이 되었다.[41]
로마군은 상벌 제도를 통해 군단병의 사기를 관리했다. 전투에서 전우를 구한 군단병에게는 시민관 등의 훈장이 수여되었다.[44] 반면, 비겁 행위나 직무 유기를 한 병사는 투석형에 처해졌다.[47] 드물게 부대 전체가 비겁 행위를 한 경우에는 십분의 일형이 시행되어 10명 중 1명이 처형되기도 했다. 이 외에도 강등, 식량 배급 변경, 군장 박탈 등의 가벼운 처벌도 있었다.[18]
7. 2. 전투 준비
군단병은 전투에 돌입하기 전에 최대한 효율적으로 작전을 수행할 수 있도록 여러 조치를 받았다. 우선 충분한 식사를 제공받고 휴식을 취했다.[24] 지휘관은 연설을 통해 군단병의 사기를 고취시켰다. 이때 약탈물은 군단병의 주요 전투 동기 중 하나였기에, 연설에서는 전투 승리 시 얻게 될 약탈품과 부를 강조했다.[12]본격적인 회전(會戰)에 앞서, 기병 및 보조군이 적의 대열을 살피는 척후전과 정찰을 실시했다.[41]
7. 3. 전투 방식
군단병의 주요 무기는 필룸(투창), 스쿠툼(방패), 글라디우스(단검)였다. 군단병은 적에게 접근하면서 먼저 필룸을 던졌다. 필룸은 적의 방패를 관통하여 뒤에 있는 적을 타격할 수 있었다.[50] 필룸이 방패를 관통하지 못하더라도, 투사체 목 부분이 구부러져 방패를 무용지물로 만들 수 있었다. 필룸으로 인한 혼란과 피해는 군단병의 돌격으로 이어졌다.[47]스쿠툼은 여러 형태가 있었지만, 모두 방패 가운데에 커다란 금속 쇠붙이가 달려 있다는 점은 같았다. 이 쇠붙이는 군단병이 스쿠툼을 방어용만이 아닌 공격용 무기로도 사용할 수 있게 하였다. 군단병은 이 쇠붙이로 적을 강타하고 밀어냈다.[46] 스쿠툼과 함께 주로 찌르는 데 사용했지만 베는 용도로도 쓸 수 있는 글라디우스를 사용했다. 인상적인 훈련과 함께 이 꽤나 단순한 장비는 군단병을 고대 세계의 아주 효율적인 병사로 만들었다.[47]
군단병은 다양한 대형으로 싸웠으나, 부대 간 간격을 촘촘히 두고 질서 있게 대형을 유지하는 경향이 있었다. 이 틈은 예비 부대가 전투에 투입되거나 척후병이 군단병 뒤로 퇴각하는 경로 역할을 하였다. 전투 중 소강 상태일 때, 부상병은 이 틈을 통해 전선 후방으로 후송될 수 있었다.[41]
8. 봉급과 조건
팍스 로마나 시기, 군단병은 연 225 데나리우스를 받았다. 도미티아누스 황제는 이를 300 데나리우스로 인상했다. 그러나 3세기 위기 동안 인플레이션으로 봉급 체계가 혼란스러워졌고, 황제들은 군단병이 민간인에게서 물품을 강탈하는 것을 방치했다.[47]
군단병은 황제가 충성심을 확보하거나 군사 작전 성공 후 주는 기여금, 약탈물 등으로 수입을 보충했다. 복무 후에는 토지나 금전을 받았다.[48] 군단 요새에는 목욕탕, 타번, 원형극장 등 편의 시설이 있었다. 셉티미우스 세베루스 때부터 군단병의 법적 결혼이 허용되었다.[49]
로마는 스키타이나 그리스처럼 무력을 중시하고 용병을 고용하지 않았다. 공화정 초기, 5만 아시스 이상 재산의 로마 시민권자는 군단 참여가 의무였다. 이들은 무기를 자비로 조달했고, 긴급 시 병사로 활동하는 것이 당연했다. 당시 병역은 로마 시민의 의무이자 권리(노블레스 오블리주)였다.[26]
마리우스의 군제 개혁 이후 군단병은 직업 군인화되어 연봉을 받았다. 군단병 연봉은 로마 역사상 4번 인상되었다.
시기 | 황제 | 연봉 변화 | 비고 |
---|---|---|---|
기원전 45년 | 카이사르 | 70 → 140 데나리우스 (560 세스테르티우스) | 갈리아 전쟁 승리 후 병사들에게 상금 지급 (일반 병사 5천, 백인대장 1만, 대대장 2만 데나리우스) |
기원전 30년 | 아우구스투스 | 140 → 225 데나리우스 (900 세스테르티우스) | |
기원후 82년 | 도미티아누스 | 225 → 300 데나리우스 (1200 세스테르티우스) | |
기원후 197년 | 셉티미우스 세베루스 | 300 → 375 데나리우스 (1500 세스테르티우스) |
제대 후 군무에 복귀하는 자는 에보카투스로 불리며 우대되었다.
8. 1. 훈련 및 규율
신병(티로)은 실제 무기보다 두 배 무거운 목검과 방패로 훈련받았다. 이를 통해 신병들은 나무로 된 무기로 훈련하면서 근력을 기르게 되었다. 전투술 외에도 수영, 야영 설치 등 다양한 기술을 습득했다.[50] 신병들은 규율을 교육받았으며, 훈련 기간에 하루 두 차례 훈련을 받았다. 최대 6개월까지 지속될 수 있는 훈련 기간이 끝나면, 신병들은 밀리테스가 되어 각자의 군단에 배치되었다.[47]로마 군단병은 군 생활 내내 엄격한 훈련과 규율을 받았다. 규율은 로마군 성공의 근간이었고, 병사들은 끊임없이 무기와 제식 훈련을 받았으며, 완전 무장을 하고 촘촘한 대형으로 행군하는 것도 빈번하였다. 규율 위반 사항은 켄투리오들이 가혹하게 처벌하였다. 처벌에는 요새화된 주둔지의 보호 범위 밖에서 하룻밤을 보내는 것부터 몽둥이로 두드려 맞는 푸스투아리움(장기간 행군 중 졸면서 걷는 것에 대한 가장 흔한 처벌), 소수 인원에 대한 투석형 및 십분의 일형을 포함한 부대 단위 처벌까지 있었다. 그럼에도 전투에서 뛰어난 모습 및 모범적인 행동을 한 군단병에게는 승진, 보상, 영예 등이 자주 주어졌다.[47]
견고한 규율 훈련의 목적 중 하나는 병사들의 두려움을 쫓아내기 위함이었다. 공포, 그리고 이에 뒤따르는 공황은 전장에 있는 군대에 대단히 파괴적인 위력이었다. 로마군은 엄격한 육체 및 정신 훈련을 통해 두려움을 제거하려 했다.[51] 그러나 전장의 두려움에도 불구하고 다른 종류의 두려움이 병사들에게 동기를 주는 용도로 사용되었는데, 그것은 지휘관들의 가혹한 처벌에 대한 두려움이었다. 요세푸스의 말에 따르면 "그들은 두려움을 통해 전쟁에 더 강인해진다, 병사들이 대열에서 이탈하는 것뿐만 아니라 게으름과 나태함에 대해서도 이들의 규칙이 사형을 선고하기 때문이다."[52]
8. 2. 식단
군단병은 아침(prandium)과 저녁(cena)에 하루 두 번 식사를 했다. 군단병의 주된 배급 식량은 밀이었으며, 이는 전체 배급량의 60-70%를 차지했다.[53] 밀은 빵이나 포리지 형태로 섭취했다. 전시에는 밀 배급품을 하드택으로 만들어 오랫동안 보관했다.[47]곡물 외의 보충 식량을 키바리아(cibaria)라고 불렀다. 키바리아에는 포도주, 식초, 채소(주로 콩이나 렌틸), 소금, 염장 돼지고기, 치즈, 올리브유 등이 포함되었으나, 과일은 없었다. 군단병은 채집, 교역, 징발, 약탈 등을 통해 추가적인 식량을 확보하기도 했다.[53]
군기를 위반한 군단병은 벌로 보리를 먹어야 했다. 보리는 군마의 사료로 여겨졌기 때문에 이는 군단병에게 큰 굴욕이었다.
8. 3. 위생 관리
영구적인 로마 요새에는 병원이 설치되어 있어, 의사(메디키)가 부상병과 환자를 치료했다.[54] 의료진은 전염병 확산을 막기 위해 환자를 격리했다. 로마 요새와 주둔지는 수인성 질병의 전파를 최소화하기 위해 신선한 물을 주둔지에 공급하고 오물들을 하류로 배출하는 데에 특별히 신경 썼다.[48] 중상자나 영구적인 부상을 입은 군단병은 의병 제대(missio causaria)되었으며, 세금 및 공공 업무 면제 등의 혜택을 받았다.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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