클로도베쿠스 2세
"오늘의AI위키"의 AI를 통해 더욱 풍부하고 폭넓은 지식 경험을 누리세요.
1. 개요
클로도베쿠스 2세는 다고베르 1세의 아들로, 639년 아버지의 사망 이후 네우스트리아와 부르군트의 왕이 되었다. 그는 미성년 시절을 보냈으며, 어머니 난틸드와 궁재들의 섭정을 받았다. 앵글로색슨족 출신 발틸다와 결혼하여 클로타르 3세, 힐데리크 2세, 테우데리크 3세 세 아들을 두었으며, 이들은 모두 왕위에 올랐다. 클로도베쿠스 2세는 종종 "게으른 왕"으로 묘사되며, 657년 또는 658년에 사망하여 생드니 대성당에 묻혔다. 그의 사후, 발틸다가 섭정을 맡았으나, 중앙 집권 정책으로 인해 갈등을 겪었고, 결국 쉘 수도원으로 추방되었다.
더 읽어볼만한 페이지
- 639년 출생 - 연남산
연남산은 연개소문의 아들로, 639년에 태어나 701년에 사망했으며, 아들로 천광부를 두었다. - 657년 사망 - 교황 에우제니오 1세
에우제니오 1세는 온화한 성품으로 동로마 황제의 지지하에 교황으로 선출되었으나, 단성론 반대와 콘스탄티노폴리스 총대주교 불인정으로 황제와 갈등을 겪었으며, 이후 성인으로 시성되어 기념되고 있다. - 657년 사망 - 임성태자
임성태자는 6세기 말 일본으로 건너가 오우치 씨의 시조로 여겨지는 백제 왕족 출신 인물로, 일본에서 린쇼 태자라고도 불리며 쇼토쿠 태자로부터 영지를 받아 정착했다는 설이 있지만 실존 여부와 백제계 후예설에 대한 비판도 존재한다. - 프랑크인의 왕 - 위그 카페
위그 카페는 987년부터 996년까지 프랑크 왕국의 왕으로 재위하며 카페 왕조의 시조가 되었고, 왕위 계승을 위해 아들 로베르 2세를 공동 왕으로 임명하여 카페 왕조 세습의 기반을 다졌다. - 프랑크인의 왕 - 루도비쿠스 2세 이우니오르
루도비쿠스 2세 이우니오르는 로타르 1세의 아들로 이탈리아를 수호하려 노력했으나 동생과의 갈등, 포로로 잡히는 등의 어려움을 겪고 사망했으며, 그의 사후 서프랑크의 카를 2세가 황제관을 차지했다.
| 클로도베쿠스 2세 - [인물]에 관한 문서 | |
|---|---|
| 기본 정보 | |
| 이름 | 클로비스 2세 |
| 원래 이름 | Chlodovechus II (라틴어) |
| 재위 | 639년 - 657년/658년 |
| 직함 | 네우스트리아 프랑크인의 왕 부르군트 프랑크인의 왕 |
| 출생 | 633년 또는 634년경 |
| 사망 | 657년 또는 658년 11월 27일 |
| 매장지 | 생드니 대성당, 파리 |
| 가문 | |
| 왕조 | 메로베우스 왕조 |
| 아버지 | 다고베르투스 1세 |
| 어머니 | 난틸다 |
| 배우자 | 발틸드 |
| 자녀 | 클로타르 3세 킬데리크 2세 테우데리크 3세 클로비스 3세? (추정) |
| 기타 | |
![]() | |
![]() | |
2. 생애
다고베르 1세와 왕비 난틸드의 아들로, 이복 형으로는 아우스트라시아 왕 시게베르트 3세가 있었다. 639년 아버지가 사망하면서 네우스트리아와 부르군트의 왕으로 즉위했다. 너무 어렸기 때문에, 어머니 난틸드가 642년 사망할 때까지 섭정으로서 궁재 아에가와 함께 통치했다.[3][4] 아에가가 사망한 후에는 다고베르 1세의 어머니 베르트루드의 친척인 에르키노알드가 궁재가 되었다.[4]
발틸다와 결혼했는데, 발틸다는 골에서 노예로 팔린 앵글로색슨족 출신으로 에르키노알드 소유였다가 왕의 눈에 띄게 되었다.[1] 에르키노알드는 발틸다가 왕비가 된 후에도 궁정에서 15년 동안 강한 영향력을 유지했다.[5] 클로도베쿠스 2세와 발틸다 사이에서 태어난 세 아들 클로타르, 힐데리크, 테우데리크는 모두 왕이 되었다.
클로도베쿠스는 통치 기간 거의 전부를 미성년자로 보냈으며, 때때로 656년에서 657년 사이 아우스트라시아의 왕으로 여겨지기도 한다. 아우스트라시아 궁재인 그리모알드 1세는 657년 클로도비스 2세에 의해 파리에서 체포되어 처형되었다. 그는 종종 초기 ''게으른 왕''으로 여겨지며, 벨기에 역사가 앙리 피렌은 클로도비스에 대해 "미쳐서 죽었다"고 언급했다.[2]
657년 또는 658년에 사망하여 생드니 대성당에 매장되었다.[4] 클로비스 2세 사망 후, 아들 클로테르 3세가 즉위했고, 왕비 발틸드가 섭정이 되었다.[6] 발틸드는 네우스트리아 중심의 중앙 정권 정책을 시도하여 부르군트 왕국의 자립을 꾀한 주교를 암살했다는 의혹을 받았다.[6] 세속 귀족과 다를 바 없는 생활을 하는 주교에게 압력을 가하고, 주교 권력 하에 있던 수도원을 보호, 중시하는 정책이, 이후 수도원의 대영주화의 제도적 기원이 되었다.[6] 발틸드는 클로테르 3세가 성년이 된 662년에 궁재 에브로인에 의해 자신이 세운 쉘 수도원으로 추방되어[4] 그곳에서 사망했다.[7]
2. 1. 초기 생애와 즉위
클로도베쿠스 2세는 다고베르 1세와 왕비 난틸드의 아들이며, 이복 형으로는 아우스트라시아 왕 시게베르트 3세가 있었다.[3][4] 아버지가 639년에 사망하면서 네우스트리아와 부르군트의 왕으로 즉위했다.어머니 난틸드는 642년 사망할 때까지 섭정으로서 궁재 아에가와 함께 통치했다.[3] 아에가가 사망한 후에는 다고베르 1세의 어머니 베르트루드의 친척인 에르키노알드가 궁재가 되었다.[4] 클로도베쿠스 2세는 발틸다와 결혼했는데, 발틸다는 골에서 노예로 팔린 앵글로색슨족 출신으로 에르키노알드의 소유였다가 왕의 관심을 끌게 되었다.[1][5]
클로도베쿠스는 통치 기간 거의 전부를 미성년자로 보냈다. 그는 종종 초기 ''게으른 왕''으로 여겨지며, 벨기에 역사가 앙리 피렌은 클로도비스에 대해 "미쳐서 죽었다"고 언급했다.[2] 657년 또는 658년에 사망하여 파리의 생드니 대성당에 매장되었다.[6]
2. 2. 섭정과 통치
클로도베쿠스 2세는 다고베르 1세와 왕비 난틸드의 아들로, 이복 형으로는 아우스트라시아 왕 시게베르트 3세가 있었다. 639년 아버지가 사망하면서 네우스트리아와 부르군트의 왕으로 즉위했다. 너무 어렸기 때문에, 어머니 난틸드가 642년 사망할 때까지 섭정으로서 궁재 아에가와 함께 통치했다.[3][4] 아에가가 사망한 후에는 다고베르 1세의 어머니 베르트루드의 친척인 에르키노알드가 궁재가 되었다.[4]클로도베쿠스 2세는 발틸다와 결혼했는데, 발틸다는 골에서 노예로 팔린 앵글로-색슨인으로 에르키노알드 소유였다가 왕의 눈에 띄게 되었다.[1] 에르키노알드는 발틸다가 왕비가 된 후에도 궁정에서 15년 동안 강한 영향력을 유지했다.[5] 클로도베쿠스 2세와 발틸다 사이에서 태어난 세 아들 클로타르, 힐데리크, 테우데리크는 모두 왕이 되었다.
클로도베쿠스는 통치 기간 거의 전부를 미성년자로 보냈으며, 때때로 656년에서 657년 사이 아우스트라시아의 왕으로 여겨지기도 한다. 아우스트라시아 궁재인 그리모알드 1세는 657년 클로도비스 2세에 의해 파리에서 체포되어 처형되었다. 그는 종종 초기 ''게으른 왕''으로 여겨지며, 벨기에 역사가 앙리 피렌은 클로도비스에 대해 "미쳐서 죽었다"고 언급했다.[2]
657년 또는 658년에 사망하여 생드니 대성당에 매장되었다.[4] 클로비스 2세 사망 후, 아들 클로테르 3세가 즉위했고, 왕비 발틸드가 섭정이 되었다.[6] 발틸드는 네우스트리아 중심의 중앙 정권 정책을 시도하여 부르군트 왕국의 자립을 꾀한 주교를 암살했다는 의혹을 받았다.[6] 세속 귀족과 다를 바 없는 생활을 하는 주교에게 압력을 가하고, 주교 권력 하에 있던 수도원을 보호, 중시하는 정책이, 이후 수도원의 대영주화의 제도적 기원이 되었다.[6] 발틸드는 클로테르 3세가 성년이 된 662년에 궁재 에브로인에 의해 자신이 세운 쉘 수도원으로 추방되어[4] 그곳에서 사망했다.[7]
2. 3. 아우스트라시아와의 관계
2. 4. 죽음과 유산
클로도베쿠스 2세는 파리의 생 드니 대성당에 묻혔다. 657년 또는 658년에 사망하여, 생드니 대성당에 매장되었다.벨기에 역사가 앙리 피렌은 클로도비스에 대해 "미쳐서 죽었다"고 언급했다.
클로도베쿠스 2세는 발틸다와 결혼했는데, 발틸다는 골에서 노예로 팔린 앵글로-색슨인이었다. 그녀는 네우스트리아의 궁재인 에르키노알드 소유였으나, 이후 왕의 관심을 끌게 되었다. 그들은 세 아들을 두었고, 세 아들 모두 그가 죽은 후에 왕이 되었다. 장남인 클로타르가 그 뒤를 이었고, 차남인 힐데리크는 아우스트라시아 왕위에 올랐으며, 결국 네우스트리아에서도 계승했다. 막내인 테우데리크는 네우스트리아에서 힐데리크의 뒤를 이었고, 결국 프랑크 왕국의 유일한 왕이 되었다.
클로도베쿠스 2세 사망 후, 아들 클로테르 3세가 즉위했고, 왕비 발틸드가 섭정이 되었다. 발틸드는 네우스트리아 중심의 중앙 정권 정책을 시도하여, 부르군트 왕국의 자립을 꾀한 주교를 암살했다고 여겨진다. 세속 귀족과 다를 바 없는 생활을 하는 주교에게 압력을 가하고, 주교 권력 하에 있던 수도원을 보호, 중시하는 정책이, 이후 수도원의 대영주화의 제도적 기원이 되었다. 발틸드는 클로테르 3세가 성년에 달한 662년에, 궁재 에브로인에 의해, 자신이 세운 쉘 수도원으로 추방되어, 그곳에서 사망했다.
3. 가족 관계
649년에 앵글로색슨족 노예였던 발틸드를 아내로 맞아 3명의 아들을 낳았다.[8]
- 클로타르 3세 (652년 - 673년) - 네우스트리아와 부르군트의 왕
- 힐데리크 2세 (653년 - 675년) - 아우스트라시아의 왕
- 테오데리크 3세 (654년 - 691년) - 프랑크 왕
그 외에도 클로비스 3세가 자녀라고도 전해지지만, 클로비스 3세의 아버지에 대해서는 테오데리크 3세 또는 클로타르 3세라고 하는 등 여러 설이 있다. 이 경우 클로비스 2세에게 클로비스 3세는 친손자가 된다. 당시 아우스트라시아 귀족은 클로타르 3세의 적자라고 주장했다. 이처럼 클로비스 3세의 출생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알려져 있지 않으며, 메로빙거 왕조의 사람이 아니었을 가능성도 있다. 때문에 클로비스 3세는 정식 프랑크 왕으로 여겨지지 않는 경우도 많다.
3. 1. 자녀
클로도베쿠스 2세는 649년에 앵글로색슨족 노예였던 발틸드를 아내로 맞아 3명의 아들을 낳았다.[8]- 클로타르 3세 (652년 - 673년) - 네우스트리아와 부르군트의 왕
- 힐데리크 2세 (653년 - 675년) - 아우스트라시아의 왕
- 테오데리크 3세 (654년 - 691년) - 프랑크 왕
그 외에도 클로비스 3세가 자녀라고도 전해지지만, 클로비스 3세의 아버지에 대해서는 테오데리크 3세 또는 클로타르 3세라고 하는 등 여러 설이 있다. 클로비스 3세는 정식 프랑크 왕으로 여겨지지 않는 경우도 많다.[8]
4. 평가
참조
[1]
웹사이트
Saint Bathilde
http://www.newadvent[...]
2017-01-08
[2]
서적
Mohammad and Charlemagne
https://books.google[...]
Routledge
2017-01-08
[3]
문서
柴田 他、p. 148
[4]
문서
ル・ジャン、p. 31
[5]
문서
柴田 他、p. 148-149
[6]
문서
柴田 他、p. 149
[7]
문서
柴田 他、p. 150
[8]
문서
柴田 他、付録p. 81
본 사이트는 AI가 위키백과와 뉴스 기사,정부 간행물,학술 논문등을 바탕으로 정보를 가공하여 제공하는 백과사전형 서비스입니다.
모든 문서는 AI에 의해 자동 생성되며, CC BY-SA 4.0 라이선스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위키백과나 뉴스 기사 자체에 오류, 부정확한 정보, 또는 가짜 뉴스가 포함될 수 있으며, AI는 이러한 내용을 완벽하게 걸러내지 못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제공되는 정보에 일부 오류나 편향이 있을 수 있으므로, 중요한 정보는 반드시 다른 출처를 통해 교차 검증하시기 바랍니다.
문의하기 : help@durumis.com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