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머스 필립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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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토머스 필립스는 영국의 해군 제독으로, 제2차 세계 대전 중 Z 함대의 사령관으로 활동했다. 1888년 글래스고에서 태어나 1903년 해군 사관 후보생으로 입대하여 경력을 시작했으며, 제1차 세계 대전과 제2차 세계 대전에 참전했다. 1941년 12월, 말레이 해전에서 일본 해군의 공격으로 기함 HMS 프린스 오브 웨일스가 침몰하면서 전사했다. 그는 HMS Hood 침몰에 대한 조사에 기여했으며, Z 함대를 이끌고 일본군의 말레이 반도 상륙을 저지하려 했지만, 항공 엄호 부족으로 인해 큰 피해를 입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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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머스 필립스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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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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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명 | 톰 스펜서 본 필립스 |
별명 | 엄지손가락 톰 |
출생일 | 1888년 2월 19일 |
출생지 | 펜데니스 성, 팰머스, 콘월 주 |
사망일 | 1941년 12월 10일 |
사망 장소 | 남중국해, 콴탄 앞바다, 말라야 |
소속 | 영국 |
군종 | 영국 해군 |
복무 기간 | 1903년 – 1941년 |
최종 계급 | 해군 대장 |
서훈 | 바스 훈장 KCB |
지휘 | |
Z 부대 | 1941년 |
동양함대 | 1941년 |
중국 함대 | 1941년 |
본토 함대 구축함 전대 | 1938년–1939년 |
HMS 호킨스 | 1932년–1935년 |
제6 구축함 전대 | 1928년–1929년 |
HMS 캠벨 | 1928년–1929년 |
HMS 버베나 | 1924년–1925년 |
참전 | |
프린스 오브 웨일스 침몰 및 리펄스 침몰 | 전사 |
2. 생애 및 경력
1888년 2월 19일 글래스고에서 태어난 필립스는 1903년 영국 해군에 사관후보생으로 입대하여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했다. 제1차 세계 대전 당시 지중해와 극동에서 구축함에서 복무하며 중령으로 진급했다.[2]
전후 필립스는 영국 해군 참모대학에서 공부하고 국제 연맹에서 군사 고문으로 활동했다. 1938년 준장으로 진급, 홈 함대 구축함 기동 부대를 지휘했으며, 1939년 소장으로 진급하여 영국 해군 참모차장과 영국 해군 부참모총장을 역임했다.[2]
1941년 11월 25일 해군 대장으로 승진, 11월 29일 항공기로 싱가포르에 부임하여 12월 2일 동양 함대 사령관에 취임했다.[16]
1941년 12월 8일 태평양 전쟁 발발과 함께 일본군은 말레이 작전을 개시, 말레이 반도 코타바루와 송클라에 상륙했다. 필립스 제독은 전함 프린스 오브 웨일스를 기함으로, 순양전함 레펄스와 구축함들을 이끌고 일본군 상륙 선단을 격퇴하기 위해 싱가포르 해군 기지를 출격했다.[18] 그러나 일러스트리어스급 항공모함 인도미터블이 훈련 중 좌초되어 수리가 필요했기에, Z 부대는 항공모함 엄호 없이 출격해야 했다.[17]
항해 중이던 Z 부대는 일본 해군 잠수함에 탐지되었다. 12월 10일 사이공, 투더우못에서 출격한 일본 해군 항공대는 Z 부대를 공격, 레펄스가 오후 2시 3분에, 프린스 오브 웨일스는 오후 2시 50분에 침몰했다.[19] 필립스 제독과 존 리치 함장은 전사했다.
일본 측 기록에 따르면, 익스프레스가 웨일스에 접근, 필립스 제독에게 하선을 권했으나, "No thank you." (노 땡큐)라고 대답하고 함과 운명을 함께 했다고 한다.
2. 1. 초기 생애
필립스는 육군 대령 토머스 본 윈 필립스와 해군 제독 앨저논 드 호르시의 딸 루이자 메리 아델린 드 호르시 필립스의 아들로 태어났다. 필립스는 콘월 부드의 레이디 필립스와 결혼했다.[15] 필립스의 키는 162cm였다. 53세의 나이로 사망했을 당시 그는 영국 해군의 최연소 제독 중 한 명이자 최연소 사령관 중 한 명이었다.[1]2. 2. 해군 경력
필립스는 스터빙턴 하우스 스쿨에서 교육을 받은 후 1903년 영국 해군에 해군 사관 후보생으로 입대했다. 1904년 사관후보생이 되었고 브리타니아에서 훈련을 받았다. 1908년 4월 9일 소위, 1909년 7월 20일 중위로 진급했다.[2]제1차 세계 대전에서 필립스는 지중해와 극동에서 구축함에서 복무했다. 1916년 7월 15일 중령으로 진급했다.[2]
필립스는 1919년 6월부터 1920년 5월까지 영국 해군 참모대학에서 공부했다. 1920년부터 1922년까지 국제 연맹의 해군, 육군 및 공군 문제에 관한 영구 자문 위원회의 군사 고문이었다.[2]
필립스는 1921년 6월 대령, 1927년 6월 대령으로 진급했다. 1928년 9월 4일부터 1929년 8월까지 캠벨 구축함의 지휘를 맡았다.[2]
1930년 4월 24일부터 1932년 9월까지 필립스는 해군성의 계획부 부국장으로 복무했다. 그 후 3년 동안 순양함의 기함장으로 극동에서 복무했다. 1935년 그는 계획부를 이끌기 위해 해군성으로 돌아왔다.[2]
1938년, 필립스는 준장으로 진급하여 홈 함대의 구축함 기동 부대를 지휘했다.[2]
1939년 1월 10일, 필립스는 조지 6세의 부관으로 복무한 후 소장이 되었다. 1939년 6월 1일부터 1941년 10월 21일까지, 필립스는 영국 해군 참모차장과 영국 해군 부참모총장을 역임했다.[2]
필립스는 윈스턴 처칠의 신임을 얻어 1940년 2월 임시 중장으로 임명되었다.[2]
1941년 7월, 필립스는 후드 침몰에 대한 첫 번째 조사가 미흡하다고 판단하여, 증거 부족과 증인 심문 누락을 지적하며 추가 조사를 제안했다. 그의 제안에 따라 1941년 9월에 두 번째 조사가 소집되었고, 176명의 증인으로부터 증언을 받았다.[3][4]
1941년 11월 25일, 해군 대장으로 승진한 필립스는 11월 29일 항공기로 싱가포르에 부임했고, 12월 2일 동양 함대 사령관에 취임했다.
12월 8일 태평양 전쟁 발발과 함께 일본군은 말레이 작전을 발동하여 코타바루와 송클라에 상륙했다. 필립스 제독은 함대를 이끌고 일본군 상륙 선단을 격퇴하기 위해 출격했다.
항해 중이던 Z 부대는 일본 해군 잠수함에 탐지되었다. 12월 10일, 일본 해군 항공대는 Z 부대를 공격했다. 먼저 레펄스가 오후 2시 3분에 침몰했고, 프린스 오브 웨일스도 어뢰 공격을 받고 오후 2시 50분에 침몰했다. 필립스 제독과 존 리치 함장은 전사했다.
일본 측 기록에 따르면, 익스프레스가 웨일스에 접근하여 필립스 제독에게 배에서 내릴 것을 권했으나, "No thank you." (노 땡큐)라고 대답하고 함과 운명을 함께 했다고 한다.
2. 3. HMS 후드 침몰 조사
1941년 7월, 필립스는 순양전함 HMS 후드 침몰에 대한 첫 번째 조사가 미흡하다고 판단하여 신뢰성에 의문을 제기했다. 그는 첫 번째 조사 위원회의 조사 결과에 대해 증거 부족과 증인 인터뷰 누락을 지적했다. 필립스는 당시 조사 위원들이 보관했던 간략한 메모를 바탕으로 증거 요약본이 작성되었다고 설명했다. 그는 "HOOD" 폭발 문제는 해군에게 매우 중요하며, 선박 설계에 대한 중요한 결정은 조사 결과에 따라 달라져야 하므로, 폭발 원인에 대해 가능한 모든 증거를 확보하기 위해 철저한 조사가 필요하다고 강조했다.[3]필립스는 특히 사건의 여러 목격자 증언이 기록되지 않은 점과 "HOOD" 생존자 세 명 중 한 명만 인터뷰했다는 점을 강하게 비판했다. 그는 시간이 흐른 뒤 후임자들이 "HOOD"의 손실 기록을 검토할 때, 위원회의 결론보다는 사건을 직접 목격한 사람들의 증언을 통해 진실을 찾을 가능성이 높다고 예상했다. 이러한 이유로 필립스는 추가 조사 위원회를 열어 폭발을 목격한 모든 사람을 심문해야 한다고 주장했다.[3]
이러한 필립스의 문제 제기와 세부 사항에 대한 관심, 그리고 전시 재앙에 대한 철저한 조사를 요구하는 그의 태도는 윈스턴 처칠의 존경과 신뢰를 얻는 계기가 되었다.
필립스의 제안으로 1941년 9월, 해럴드 워커 소장의 지휘 하에 두 번째 조사가 소집되었다.[3] 이 조사는 첫 번째 조사보다 훨씬 더 철저하게 진행되었으며, 총 176명의 증인으로부터 증언을 확보했다.[4]
3. 제2차 세계 대전과 Z 함대
필립스는 1941년 말 중국 함대 사령관으로 임명되어 임시 제독 계급으로 1941년 10월 25일 싱가포르로 향했다. 그는 기함인 프린스 오브 웨일스를 포함한 포스 G 부대와 함께 이동했다. 이 부대는 제1차 세계 대전 참전 순양전함 리펄스와 4척의 구축함 (일렉트라, 익스프레스, 인카운터, 주피터)으로 구성되었다.
항공모함 인도미터블도 합류할 예정이었으나, 좌초로 인해 1941년 12월 2일 싱가포르에 도착한 필립스의 주력함은 포스 Z로 재지정되었다.
1941년 12월 8일 일본군이 말라야에 상륙하자, 필립스는 일본군의 상륙을 저지하기 위해 포스 Z를 이끌고 출격했다. 하지만, 해상 공중 엄호를 받지 못하는 상황에서, 필립스는 공중 엄호 없이 일본군을 요격하려 했다.
1941년 12월 10일, 사이공 주둔 일본 제국 해군 제22 항공대의 86대 폭격기와 뇌격기가 포스 Z를 공격했다. 윌리엄 테넌트 함장은 RAAF에 도움을 요청했지만, RAAF 비행대는 영국 주력함 2척(프린스 오브 웨일스, 리펄스)이 침몰된 후에야 도착했다.
CBS 기자 세실 브라운은 전투를 다음과 같이 묘사했다.
> "포격에 대비하라"는 소리가 배의 통신 시스템을 통해 들려온다. (중략) 누군가가 말한다. "이것이 우리를 잡았다." (중략) 거의 즉시, 통신 시스템에서 차분하게 "구명 조끼를 불어라"고 발표했다. (중략) 통신 시스템은 "배를 버릴 준비를 하세요. 신이 당신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라고 발표했다.
구축함은 침몰한 주력함 승무원 2,921명 중 2,081명을 구조했지만, 840명의 해군이 사망했다. 필립스와 존 리치 함장은 배와 함께 가라앉았다. 일본 측 기록에 따르면, 필립스 제독은 구조를 위해 접근한 구축함에 "No thank you." (노 땡큐)라고 답하며 함교에서 거수경례를 하고 함과 운명을 함께했다고 한다.
3. 1. Z 함대 사령관 임명
필립스는 1941년 말 중국 함대 사령관으로 임명되었는데, 이는 그가 "책상물림 제독"으로 여겨졌던 영국 해군 고위 지휘부에서 다소 논란을 불러일으켰다.[1] 그는 임시 제독으로 임명되었으며, 1941년 10월 25일 싱가포르에 있는 본부로 향했다. 그는 당시 포스 G로 지정된 해군 부대와 함께 이동했는데, 여기에는 그의 기함인 신형 전함 프린스 오브 웨일스, 제1차 세계 대전 시대의 순양전함 리펄스, 4척의 구축함 (일렉트라, 익스프레스, 인카운터, 주피터)이 포함되어 있었다.
항공모함 인도미터블도 싱가포르로 항해할 예정이었지만, 서인도 제도에서 처녀 항해 중 좌초되어 다른 선박과 함께 영국에서 출항할 준비가 되지 않았다. 필립스와 함선들은 1941년 12월 2일 싱가포르에 도착했고, 그곳에서 포스 Z로 재지정되었다.[7]
3. 2. 말레이 해전

1941년 12월 8일, 일본군이 말라야에 상륙하면서 태평양 전쟁이 시작되었다. 필립스는 일본군의 상륙을 저지하기 위해 포스 Z를 이끌고 출격했다. 하지만, 항공모함의 좌초로 인해 해상 공중 엄호를 받지 못하는 상황이었다. 필립스는 항공기가 수상함에 큰 위협이 되지 않는다고 오랫동안 생각해 왔기 때문에, 공중 엄호 없이 HMS ''프린스 오브 웨일스'', HMS ''리펄스'' 및 4척의 구축함(HMS 일렉트라, HMS 익스프레스, HMS 인카운터, HMS 주피터)으로 구성된 포스 Z를 이끌고 일본군을 요격하려 했다.[7]
필립스는 무선 침묵을 유지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판단하여 로열 오스트레일리아 공군(RAAF)에 공중 엄호를 요청하지 않았다.[8] 1941년 12월 9일, 일본 잠수함 I-65가 포스 Z를 발견하고 추적했지만, 갑작스러운 강풍으로 영국 함선이 가려져 추적에 실패했다.[9]

1941년 12월 10일, 사이공에 주둔한 일본 제국 해군 제22 항공대의 86대의 일본 폭격기 및 뇌격기가 포스 Z를 공격했다. 윌리엄 테넌트 함장은 RAAF에 도움을 요청하는 무전을 보냈지만, RAAF 비행대는 영국 군함 두 척 (''프린스 오브 웨일스''와 ''리펄스'')이 침몰된 후에야 뒤늦게 도착했다.[1]
CBS 기자 세실 브라운은 전투를 다음과 같이 묘사했다.[8]
> "포격에 대비하라"는 소리가 배의 통신 시스템을 통해 들려온다. (중략) 누군가가 말한다. "이것이 우리를 잡았다." (중략) 거의 즉시, 통신 시스템에서 차분하게 "구명 조끼를 불어라"고 발표했다. (중략) 통신 시스템은 "배를 버릴 준비를 하세요. 신이 당신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라고 발표했다.
구축함은 침몰한 주력함의 승무원 2,921명 중 2,081명을 구조했지만, 840명의 해군이 사망했다. ''프린스 오브 웨일스''의 존 리치 함장과 필립스는 배와 함께 가라앉았다.[1]
3. 3. 최후
필립스 제독은 기함이 침몰할 때 함장 존 리치 대령과 함께 배와 운명을 같이했다.[1] 일본 측 기록에 따르면, 필립스 제독은 구조를 위해 접근한 구축함에 "No thank you." (노 땡큐)라고 답하며 함교에서 거수경례를 하고 함과 운명을 함께했다고 한다.[19] 참모가 퇴함을 권유했지만 "노 땡큐"라고 거절했다는 기록도 있다.[19]CBS 종군 기자 세실 브라운은 저서에서 필립스 제독과 리치 함장이 침몰하는 순간까지 함교에 머물며 탈출하는 장병들에게 손수건을 흔들었다고 묘사했다.[19]
4. 평가 및 유산
토머스 필립스에 대한 평가는 그의 결정과 그로 인한 결과에 집중된다. 특히 1941년 12월 10일 HMS ''프린스 오브 웨일스''와 HMS ''리펄스''를 이끌고 항공 엄호 없이 일본군을 요격하려 한 결정은 많은 논란을 불러일으켰다.[7]
해군 역사학자 새뮤얼 엘리엇 모리슨은 필립스가 어려운 상황에서 위험과 이득을 고려해야 했다고 평가했다. 영국군이 말라야에서 일본군과 싸우는 상황에서 해군이 아무런 행동도 하지 않는 것은 옳지 않다고 판단했다는 것이다.[7] 그러나 모리슨은 필립스가 "주력함은 육상 기반 항공력에 저항할 수 없다"는 당시의 전술적 원칙을 간과했다고 지적했다.[7]
미 해군 제독 토머스 하트는 포스 Z에 대한 항공 지원 부족을 비판했다. 그는 영국 공군 전투기가 가까운 거리에 있었음에도 필립스에게 도움을 주지 않은 이유를 모르겠다고 말했다.[14]
영국 플리머스에 있는 플리머스 해군 기념관에는 그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그의 이름이 새겨져 있다.[15]
4. 1. 비판
필립스가 항공 엄호 없이 작전을 강행한 결정은 많은 비판을 받았다. 필립스는 오랫동안 항공기가 수상함에 큰 위협이 되지 않는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1941년 12월 10일 HMS ''프린스 오브 웨일스'', HMS ''리펄스''와 4척의 구축함으로 구성된 포스 Z를 이끌고 일본군을 요격하러 나섰다. 하지만 이 결정은 그 후로도 계속 논란이 되고 있다.[7]해군 역사학자 새뮤얼 엘리엇 모리슨은 필립스가 위험과 이득을 저울질해야 하는 어려운 상황에 놓여 있었다고 평가했다. 영국 공군과 육군이 말라야에서 일본군과 싸우고 있는 상황에서, 영국 해군이 아무런 행동도 하지 않는 것은 옳지 않다고 판단한 것이다.[7]
그러나 모리슨은 "주력함은 육상 기반 항공력에 저항할 수 없다"는 명제가 당시 이미 전술적 원칙으로 자리 잡았음에도 불구하고, 필립스가 항공력의 중요성을 간과한 점을 지적했다. 이로 인해 일본군은 하와이 서쪽 태평양에 있던 연합군의 유일한 전함과 순양전함을 격침시켰고, 연합군은 동양에서 큰 타격을 입었다.[7]
필립스의 미국 측 대응자인 미 해군 제독 토머스 하트는 포스 Z에 대한 항공 지원이 부족했던 점을 비판했다. 그는 당시 필립스의 작전 변경과 무선 침묵 선호도를 알지 못했지만, 1942년 ''타임''지와의 인터뷰에서 영국 공군 전투기가 30분 거리에 있었음에도 필립스 제독에게 전혀 도움을 주지 않은 이유를 모르겠다고 말했다.[14]
4. 2. 기념
필립스의 이름은 영국 플리머스에 있는 플리머스 해군 기념관에 새겨져 있다.[15]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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