앤드루 커닝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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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앤드루 커닝엄(1883–1963)은 영국의 해군 군인으로, 제2차 세계 대전 중 지중해 함대 사령관을 역임하며 타란토 공습, 마타판 곶 해전, 크레타 전투 등에서 활약했다. 그는 제1차 세계 대전에도 참전하여 욱수훈장을 받았으며, 제2차 세계 대전 중 탁월한 지휘로 대영 제국 훈장 기사 십자장, 대제독으로 승진했다. 전쟁 후에는 제1해군경 및 해군참모총장을 역임했고, 에든버러 대학교 총장을 지냈다. 1945년 남작 작위를 받았으며, 1963년 사망 후 런던 트라팔가 광장에 흉상이 세워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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앤드루 커닝엄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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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이름 | 하인드호프의 초대 커닝엄 자작 앤드루 커닝엄 |
원어 이름 | Andrew Cunningham, 1st Viscount Cunningham of Hyndhope |
별명 | ABC |
출생일 | 1883년 1월 7일 |
출생지 | 아일랜드 더블린 주 라스마인스 |
사망일 | 1963년 6월 12일 (향년 80세) |
사망지 | 영국 런던 |
매장지 | 포츠머스 앞바다 해상 매장 |
국적 | 영국 |
군 경력 | |
소속 | 왕립 해군 |
복무 기간 | 1897년 ~ 1946년 |
최종 계급 | 해군 원수 |
지휘 | HMS 스콜피언 HMS 로드니 순양전함 편대 지중해 함대 제1해군경 |
주요 참전 전투/전쟁 | 제2차 보어 전쟁 제1차 세계 대전 고벤과 브레슬라우의 추격전 다르다넬스 해협 전투 러시아 내전 레드 트랙 작전 제2차 세계 대전 메르스엘케비르 공격 칼라브리아 전투 타란토 전투 몰타 공방전 마타판 해전 횃불 작전 연합군의 시칠리아 침공 이탈리아 전역 |
훈장 및 서훈 | |
훈장 | 시슬 훈장 바스 훈장 메리트 훈장 distinguished Service Order & 두 개의 바 |
서훈 | 하인드호프 자작 작위 |
가족 관계 | |
형제 | 앨런 커닝엄 경 (형) |
기타 이력 | |
기타 이력 | 스코틀랜드 교회 총회 고등 판무관 왕실 집사장 |
이미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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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유년 시절과 해군 입대
커닝햄은 1883년 1월 7일 더블린주(County Dublin) 래스민스(Rathmines)에서 태어났다.[3] 그는 다니엘 존 커닝햄(Daniel John Cunningham) 교수와 엘리자베스 커밍 브라운(Elizabeth Cumming Browne) 사이에서 태어난 다섯 자녀 중 셋째였으며, 부모 모두 스코틀랜드계였다.[4] 그의 남동생은 앨런 커닝햄 장군이었다.[5] 부모는 "강한 지적 및 성직 전통"을 가지고 있었으며, 양쪽 할아버지 모두 성직자였다. 그의 아버지는 트리니티 칼리지 더블린의 해부학 교수였고,[1] 어머니는 집에 있었다. 엘리자베스 브라운은 하녀와 가정교사의 도움을 받아 그의 양육을 많이 담당했으며, 그 결과 그는 어머니와 "따뜻하고 친밀한" 관계를 맺었다고 한다.[6]
더블린에서 잠시 학교에 다닌 후 그는 에든버러 아카데미로 보내졌고, 이곳에서 이모인 두들스와 코니 메이와 함께 지냈다.[6] 열 살 때 그는 아버지로부터 "해군에 들어가고 싶니?"라는 내용의 전보를 받았다. 당시 그의 가족은 해군과 관련이 없었고, 커닝햄은 바다에 대해 막연한 관심만 가지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네, 제독이 되고 싶습니다"라고 답했다.[7] 그 후 그는 입학 시험을 통과시키는 데 특화된 해군 예비학교인 스터빙턴 하우스(Stubbington House)로 보내졌다.[8] 커닝햄은 시험을 통과했고, 특히 수학에서 뛰어난 실력을 보였다.[10]
2. 1. 더블린에서 보낸 유년시절
앤드루 커닝엄은 1883년 1월 7일 더블린 래스민스에서 태어났다.[3] 그는 스코틀랜드계인 다니엘 존 커닝엄 교수와 엘리자베스 커밍 브라운 사이에서 태어난 다섯 자녀 중 셋째였다.[4] 그의 남동생은 앨런 커닝햄 장군이었다.[5] 그의 아버지와 할아버지 모두 성직자였으며, 아버지는 트리니티 칼리지 더블린의 해부학 교수였다.[1] 어머니는 가정주부였으며, 하녀와 가정교사의 도움을 받아 커닝엄을 양육하였다.[6]커닝엄은 더블린에서 잠시 학교에 다닌 후 에든버러 아카데미로 보내져 이모들과 함께 지냈다.[6] 10살 때, 해군과 관련이 없던 가족 배경에도 불구하고, 그는 아버지로부터 해군 입대 제안을 받고 제독이 되고 싶다는 의사를 밝혔다.[7] 이후 해군 예비학교인 스터빙턴 하우스에 입학하여 수학 과목에서 뛰어난 실력을 보이며 입학 시험을 통과했다.[8][10]
2. 2. 해군과의 인연
앤드루 커닝엄은 1883년 1월 7일 더블린 주 래스민스에서 태어났다.[3] 아버지 다니엘 존 커닝엄은 트리니티 칼리지 더블린의 해부학 교수였고,[1] 어머니 엘리자베스 커밍 브라운은 스코틀랜드계였다.[4] 커닝엄은 더블린에서 잠시 학교를 다닌 후 에든버러 아카데미로 보내졌고, 그곳에서 이모들과 함께 지냈다.[6] 10살 때, 커닝엄은 아버지로부터 해군에 입대할 것을 권유하는 전보를 받았다.[7] 가족 중 해군과 관련된 사람은 없었지만, 커닝엄은 제독이 되고 싶다는 의사를 밝혔다.[7] 이후 해군 예비학교인 스터빙턴 하우스에 입학하여 수학 과목에서 뛰어난 성적을 보이며 입학 시험을 통과했다.[8][10]3. 초기 해군 경력
커닝엄은 1897년 1월 15일, 다른 64명의 소년들과 함께 훈련함 '''브리타니아'''호에 탑승하여 데번주 다트머스에서 해군 사관후보생으로서 영국 해군에 입대했다.[11] 그의 동기 중 한 명은 미래의 함대 제독 제임스 섬머빌 경이었다.[12] 커닝엄은 야외 스포츠에 대한 열정이 부족하기로 알려져 있었지만, 골프를 즐겼고 여가 시간 대부분을 "배에서 시간을 보내는 것"으로 보냈다.[11] 그는 회고록에서 과정이 끝날 무렵 "바다에서 모험을 찾고 싶어했다"고 밝혔다. 그는 여러 건의 사소한 위반 행위를 저질렀지만, 여전히 행실에 대해 "매우 좋음" 등급을 받았다.[11] 그는 1898년 4월 수학과 항해술에서 1등급을 받고 10위로 졸업했다.[12]
그의 첫 번째 복무는 1899년 호에서 소위로 복무하는 것이었으며, 보어 전쟁이 시작될 때 희망봉 기지에서 복무했다.[13] 1900년 2월까지 그는 "이것이 행동에서 용기와 명예를 얻을 기회를 약속한다고 믿었기 때문에" 해군 여단으로 전속되었다. 커닝엄은 해군 여단의 일원으로 프레토리아와 다이아몬드 힐에서 전투를 경험했다. 그 후 그는 1901년 12월 호에서 소위로 다시 바다로 나갔다. 그 이듬해 11월 그는 보호 순양함 호에 합류했다. 1902년부터 컨닝엄은 포츠머스의 HMNB 포츠머스와 그리니치에서 소위 과정을 수료했고, 1903년 6개월 동안 지중해에서 전함 호에서 소위로 복무했다.[13] 1903년 9월 그는 호로 전속되어 부사령관으로 복무했다. 그는 1904년 중위로 승진했고, 다음 4년 동안 여러 척의 함선에서 복무했다. 1908년 그는 그의 첫 번째 지휘관직인 HM 어뢰정 14호를 받았다.[13]
3. 1. 다트머스 해군 사관학교
앤드루 커닝엄은 1897년 1월 15일, 64명의 사관후보생들과 함께 훈련함 브리타니아호에 탑승하여 영국 해군에 입대했다.[11] 그의 동기 중 한 명은 미래의 함대 제독 제임스 섬머빌 경이었다.[12] 커닝엄은 야외 스포츠에는 큰 관심이 없었지만, 골프를 즐겼고 여가 시간 대부분을 배에서 보냈다.[11] 그는 회고록에서 과정이 끝날 무렵 "바다에서 모험을 찾고 싶어했다"고 밝혔다.[11] 여러 건의 사소한 위반 행위에도 불구하고, 그는 행실에 대해 "매우 좋음" 등급을 받았다.[11] 1898년 4월, 커닝엄은 수학과 항해술에서 1등급을 받고 10위로 졸업했다.[12]3. 2. 남아프리카에서의 복무와 보어전쟁 참전
앤드루 커닝엄은 1899년 HMS 도리스(HMS Doris)호에서 소위로 복무하며 희망봉 기지에 배속되었다.[13] 그는 보어 전쟁이 발발하자 "행동에서 용기와 명예를 얻을 기회"라 믿고 해군 여단으로 전속되었다.[13] 커닝엄은 해군 여단의 일원으로 프레토리아와 다이아몬드 힐에서 전투를 치렀다.[13] 이후 1901년 12월 HMS Hannibal호에서 소위로 복귀하였고, 1902년 11월에는 보호 순양함 HMS Diadem호에 합류했다.[13]3. 3. 소위 시절
앤드루 커닝엄은 1899년 HMS 도리스(HMS Doris)호에서 소위로 복무를 시작했으며, 보어 전쟁이 발발하자 희망봉 기지에서 근무했다.[13] 1900년 2월, 그는 해군 여단으로 전속되어 프레토리아와 다이아몬드 힐 전투에 참전했다.[13] 1901년 12월, HMS 한니발(HMS Hannibal)호에서 소위로 복무했으며,[13] 이듬해 11월에는 보호 순양함 HMS 다이아뎀(HMS Diadem)호에 합류했다.[13]1902년부터 커닝엄은 포츠머스의 HMNB 포츠머스와 그리니치 왕립 해군 대학에서 소위 과정을 수료했다.[13] 1903년에는 6개월 동안 지중해에서 전함 HMS 임플래커블(HMS Implacable)호에서 소위로 복무했다.[13]
3. 4. 그리니치 왕립 해군 대학 수료
커닝엄은 1902년에 포츠머스의 HMNB 포츠머스와 그리니치에서 소위 과정을 수료했다.[13] 1903년에는 6개월 동안 지중해에서 전함 호에서 소위로 복무했다.[13]
3. 5. 중위 시절
컨닝엄은 1904년 중위로 승진했고, 이후 4년 동안 여러 함선에서 복무했다.[13] 1902년부터 포츠머스의 HMNB 포츠머스와 그리니치에서 소위 과정을 수료했고, 1903년 6개월 동안 지중해에서 전함 호에서 소위로 복무했다.[13] 1903년 9월에는 호에서 부사령관으로 복무했다.[13]3. 6. 첫 지휘
앤드루 커닝엄은 1898년 4월 수학과 항해술에서 1등급을 받고 10위로 해군 사관후보생 과정을 졸업했다.[13] 1899년 HMS 도리스(HMS Doris)호에서 소위로 복무하며 보어 전쟁에 참전, 해군 여단으로 전속되어 프레토리아와 다이아몬드 힐에서 전투를 경험했다.[13] 1901년 12월 HMS 한니발(HMS Hannibal)호에서 소위로 복귀, 1902년 11월 보호 순양함 HMS 다이아뎀(HMS Diadem)호에 합류했다.[13] 1902년부터 포츠머스와 그리니치에서 소위 과정을 수료, 1903년 6개월간 지중해에서 전함 HMS 임플래커블(HMS Implacable)호에서 소위로 복무했다.[13] 1903년 9월 HMS 로커스트(HMS Locust)호의 부사령관으로 부임, 1904년 중위로 승진했다.[13] 1908년, 그는 첫 지휘함인 HM 어뢰정 14호를 맡게 되었다.[13]4. 제1차 세계 대전
커닝햄은 제1차 세계 대전 당시 욱수훈장(Distinguished Service Order, DSO)과 2개의 훈장 추가 장식(Medal bar)을 받는 등 매우 많은 훈장을 받은 장교였다. 1911년 그는 구축함 HMS 스콜피온(1910년 진수)의 함장이 되었고, 전쟁 내내 그 임무를 수행했다. 1914년, HMS 스콜피온은 독일 전함과 순양함인 고벤호(Goeben)와 브레스라우호(Breslau)의 추적 작전에 참여했다. 이 작전은 고벤호와 브레스라우호를 탐색하고 격침시키는 것을 목표로 했지만, 독일 군함들은 영국 함대의 추격을 따돌리고 다르다넬스 해협을 통과하여 콘스탄티노플에 도착했다. 이들의 도착은 1914년 11월 오스만 제국이 중앙 동맹국에 가입하는 데 기여했다.[1] 무혈 전투였지만, 영국의 추격 실패는 엄청난 정치적, 군사적 파장을 불러왔다. 윈스턴 처칠의 말에 따르면, 그것은 "전에 그 어떤 함선이 겪었던 것보다 더 많은 살상, 고통, 파괴를 가져왔다."[15]
커닝햄은 지중해에 남아 있었고, 1915년 HMS 스콜피온은 다르다넬스 해전에 참전했다. 그의 공로로 1915년 7월 대령으로 승진했다.[16] 또한 1916년 3월 욱수훈장을 수여받았다.[17][18] 커닝햄은 1916년 대부분의 시간을 정기 순찰에 보냈다. 1916년 말에는 호송 임무에 종사했는데, 그는 이를 지루한 일이라고 생각했다.[19] 그는 그 기간 동안 독일 잠수함과 접촉하지 않았으며, 이에 대해 "내 호송의 안전은 아마도 순전히 운이 좋았던 덕분일 것이다"라고 말했다. 지중해에서 공세적인 가능성이 거의 없다고 확신한 그는 귀국을 요청했다. HMS 스콜피온은 1918년 1월 21일 임무를 종료했다. 7년 동안 HMS 스콜피온 함장으로 재직하면서 커닝햄은 일급 항해술 실력으로 명성을 쌓았다.[20] 그는 1918년 4월 로저 키스 제1대 남작(Roger Keyes, 1st Baron Keyes) 부제독에 의해 키스의 도버 해협 순찰대(Dover Patrol) 소속인 HMS 테르마간트(1915년 진수)로 전속되었다.[21] 도버 해협 순찰대에서의 활약으로 그는 이듬해 욱수훈장 추가 장식을 받았다.[22][23]
4. 1. 고벤호와 브레스라우호 추격 작전
1914년, 앤드루 커닝엄이 함장으로 있던 HMS 스콜피온은 독일 순양전함 고벤호와 경순양함 브레스라우호를 추격하는 작전에 참여했다.[1] 이 작전은 독일 군함들을 탐색하고 격침하는 것이 목표였지만, 고벤호와 브레스라우호는 영국 함대의 추격을 따돌리고 다르다넬스 해협을 통과하여 콘스탄티노플에 도착했다.[1] 이들의 도착은 1914년 11월 오스만 제국이 중앙 동맹국에 가입하는 데 기여했다.[1] 비록 무혈 전투였지만, 영국의 추격 실패는 엄청난 정치적, 군사적 파장을 불러왔다. 윈스턴 처칠은 이 사건이 "전에 그 어떤 함선이 겪었던 것보다 더 많은 살상, 고통, 파괴를 가져왔다"고 평가했다.[15]4. 2. 다르다넬스 해전
커닝햄은 지중해에 남아 있었고, 1915년 HMS 스콜피온은 다르다넬스 해전에 참전했다. 그의 공로로 1915년 7월 대령으로 승진했다.[16] 또한 1916년 3월 욱수훈장(Distinguished Service Order, DSO)을 수여받았다.[17][18]4. 3. 도버 해협 순찰대
커닝햄은 제1차 세계 대전 당시 욱수훈장(Distinguished Service Order, DSO)과 2개의 훈장 추가 장식(Medal bar)을 받는 등 매우 많은 훈장을 받은 장교였다.[1] 1918년 4월, 로저 키스 제1대 남작(Roger Keyes, 1st Baron Keyes) 부제독에 의해 키스의 도버 해협 순찰대(Dover Patrol) 소속인 HMS 테르마간트(1915년 진수)로 전속되었다.[21] 1911년 그는 구축함 HMS 스콜피온(1910년 진수)의 함장이 되었고, 전쟁 내내 그 임무를 수행했다. 1914년, 스콜피온은 독일 전함과 순양함인 고벤호(Goeben)와 브레스라우호(Breslau)의 추적 작전에 참여했다. 이 작전은 고벤호와 브레스라우호를 탐색하고 격침시키는 것을 목표로 했지만, 독일 군함들은 영국 함대의 추격을 따돌리고 다르다넬스 해협을 통과하여 콘스탄티노플에 도착했다. 이들의 도착은 1914년 11월 오스만 제국이 중앙 연합국에 가입하는 데 기여했다.[1] 무혈 전투였지만, 영국의 추격 실패는 엄청난 정치적, 군사적 파장을 불러왔다. 윈스턴 처칠의 말에 따르면, 그것은 "전에 그 어떤 함선이 겪었던 것보다 더 많은 살상, 고통, 파괴를 가져왔다."[15]커닝햄은 지중해에 남아 있었고, 1915년 스콜피온은 다르다넬스 해전에 참전했다. 그의 공로로 1915년 7월 대령으로 승진했다.[16] 또한 1916년 3월 욱수훈장을 수여받았다.[17][18] 커닝햄은 1916년 대부분의 시간을 정기 순찰에 보냈다. 1916년 말에는 호송 임무에 종사했는데, 그는 이를 지루한 일이라고 생각했다.[19] 그는 그 기간 동안 독일 잠수함과 접촉하지 않았으며, 이에 대해 "내 호송의 안전은 아마도 순전히 운이 좋았던 덕분일 것이다"라고 말했다. 지중해에서 공세적인 가능성이 거의 없다고 확신한 그는 귀국을 요청했다. 스콜피온은 1918년 1월 21일 임무를 종료했다. 7년 동안 스콜피온 함장으로 재직하면서 커닝햄은 일급 항해술 실력으로 명성을 쌓았다.[20] 도버 해협 순찰대에서의 활약으로 그는 이듬해 욱수훈장 추가 장식을 받았다.[22][23]
5. 전간기
5. 1. 발트해에서의 활동
1919년, 커닝햄은 S급 구축함 HMS 시파이어(1918)를 지휘하며 발트해에서 근무했다.[24] 당시 공산주의자들, 백러시아인들, 여러 종류의 라트비아 민족주의자들 그리고 독일인들은 라트비아를 장악하려 했고, 영국 정부는 브레스트-리토프스크 조약 이후 라트비아의 독립을 인정했다.[24] 이 항해에서 커닝햄은 처음으로 제독 월터 코완을 만났으며, 코완의 항해 능력에 깊은 인상을 받았다.[24] 특히 짙은 안개와 기뢰밭으로 위험한 바다를 항해하는 그의 능력에 깊은 인상을 받았다.라트비아 독립 운동을 훼손하려는 독일군과의 여러 차례의 잠재적으로 문제가 될 수 있는 충돌에서 커닝햄은 "훌륭한 자제력과 판단력"을 보였다.[25] 코완은 "커닝햄 함장은 여러 차례 끊임없는 신속성과 결단력으로 행동했으며, 탁월한 용기와 확실한 결의를 가진 장교임을 증명했습니다."라고 말했다.[25]
그는 1919년 12월 31일부로 함장으로 승진했으며,[26] 발트해에서의 활동으로 1920년 3월에 DSO 훈장에 두 번째 장식을 받았다.[27][13] 1926년부터 1928년까지 커닝햄은 북아메리카 및 서인도 제도 함대에서 코완의 기함 함장 겸 참모장으로 다시 만나 근무했다.[28] 커닝햄은 코완에 대한 "높은 존경심"과[29] 두 번의 공동 근무 기간 동안 그에게서 배운 많은 교훈들을 회고록에서 밝혔다.[29]
5. 2. 구축함 전대 지휘
5. 3. 포트 에드거 기지 근무
5. 4. 북아메리카 및 서인도 제도 함대 근무
커닝햄은 1926년부터 1928년까지 북아메리카 및 서인도 제도 함대에서 월터 코완 부제독의 기함 함장 겸 참모장으로 근무했으며, 버뮤다의 영국 해군 조선소에 주둔하고 제독관저에 지상 본부를 두고 있었다.[29] 커닝햄은 코완에 대한 "높은 존경심"과 두 번의 공동 근무 기간 동안 그에게서 배운 많은 교훈들을 회고록에서 밝혔다.[29]5. 5. 고급 장교 학교 및 국방대학교 수학
5. 6. 결혼
5. 7. 전함 로드니 함장
영국 국방대학교 졸업 후, 커닝햄은 그의 첫 번째 대형 함선인 전함 로드니 함장을 맡았다.[34] 커닝햄은 이전에 소형 함정에서 오랜 기간 근무하였기 때문에 로드니호 보다 더 규모가 큰 후드(HMS Hood)호의 숙소를 거의 호화롭다고 여겼다.[33]5. 8. 준장 진급과 채텀 왕립 해군 병영 근무
1932년 9월, 커닝햄은 장군 계급으로 진급하였고, 조지 5세 국왕의 측근 참모가 되었다.[32]6. 제2차 세계 대전
커닝햄은 제2차 세계 대전 발발 직전인 1939년 6월 6일, HMS 워스파이트에 기를 게양하며 지중해 함대 사령관에 임명되었다.[36] 그는 지중해 함대 사령부를 두고 "영국 해군이 제공할 수 있는 최고의 사령부"라고 묘사했으며,[36] 자신의 세대 해군 장교 중 지중해를 가장 잘 아는 사람이라고 회고했다.[36]
사령관으로서 커닝햄의 주요 관심사는 이집트와 몰타로 향하는 호송대의 안전이었다. 몰타는 작은 영국 식민지이자 해군 기지로, 전쟁 중 몰타를 유지하는 데 매우 중요했으며 전략적으로 중요한 요충지였다.[9] 커닝햄은 지중해에서 영국 해군력에 대한 주요 위협은 이탈리아 해군에서 올 것이라고 믿었다.[37] 따라서 커닝햄은 이탈리아가 적대 행위에 돌입할 때 영국 함대가 준비될 수 있도록 함대의 준비 태세를 높였다.[38]
6. 1. 지중해 함대 사령관 임명
1939년 6월, 커닝햄은 지중해 함대 사령관(Commander-in-Chief, Mediterranean)에 임명되어 다음 날 HMS 워스파이트에 승선했다.[36] 그는 지중해 함대 사령부를 두고 "영국 해군이 제공할 수 있는 최고의 사령부"라고 묘사했다.[36] 커닝햄은 자신의 세대 해군 장교 중 지중해를 가장 잘 아는 사람이라고 회고했다.[36]사령관으로서 커닝햄의 주요 관심사는 이집트와 몰타로 향하는 호송대의 안전이었다. 몰타는 작은 영국 식민지이자 해군 기지로, 전쟁 중 몰타를 유지하는 데 매우 중요했으며 전략적으로 중요한 요충지였다.[9] 커닝햄은 지중해에서 영국 해군력에 대한 주요 위협은 이탈리아 해군에서 올 것이라고 믿었다.[37] 따라서 커닝햄은 이탈리아가 적대 행위에 돌입할 때 영국 함대가 준비될 수 있도록 함대의 준비 태세를 높였다.[38]
6. 2. 프랑스 함대 무장 해제
지중해 사령관으로서 앤드루 커닝엄은 1940년 6월 프랑스 항복(프랑스의 함락) 이후 알렉산드리아에 있던 프랑스 해군 X 함대의 무장 해제 및 억류를 위해 프랑스 해군 제독 르네-에밀 고드프루아와 협상해야 했다.[39] 처칠은 커닝엄에게 프랑스 군함이 항구를 떠나는 것을 막고 프랑스 군함이 적의 손에 넘어가지 않도록 하라는 명령을 내렸다.[39]당시 알렉산드리아에는 X 함대 소속 전함 로렌, 순양함 4척, 구축함 3척, 잠수함 1척이 주둔하고 있었다.[39] 해군본부는 7월 3일까지 협상을 완료하라는 명령을 내렸으나,[39] 메르스엘케비르에서 영국이 프랑스군을 공격했다는 소식이 전해지면서 협상은 난항을 겪었다.[40] 커닝엄은 알렉산드리아 항 안에서 프랑스와 영국 군함 간의 전투를 우려했지만, 개인적인 차원의 협상과 영국 함선들의 호소를 통해 협상을 타결지었다.[40]
협상 결과, 프랑스 측은 연료 벙커를 비우고 함포의 발사 장치를 제거했으며, 커닝엄은 그 대가로 함선 승무원들을 본국으로 송환할 것을 약속했다.[41]
6. 3. 타란토 공습
프랑스 함대의 위협이 사라졌음에도 불구하고, 커닝엄은 이탈리아 함대가 이집트를 근거지로 한 영국의 북아프리카 작전에 가하는 위협을 여전히 인지하고 있었다.[1] 존재하는 함대 이론을 따르던 이탈리아는 함선들을 항구에 남겨두었고, 당시 타란토 항구에는 6척의 전함(그중 5척은 전투 가능), 7척의 중순양함, 2척의 경순양함, 그리고 8척의 구축함이 있었다.[1] 해군본부는 타란토 항구에 대한 기습 공격 작전인 '심판 작전(Operation Judgement)'을 세웠고, 럼리 라이스터가 지휘하는 를 투입했다.[42]1940년 11월 11일 21시, 페어리 소드피시 어뢰 폭격기를 이용한 두 차례의 공격이 ''일러스트리어스''에서 시작되어 이탈리아 함대에 큰 타격을 입혔다.[1] 이 공격으로 이탈리아 함대는 하룻밤 사이에 전력의 절반을 잃었고, 지중해에서 영국 해군의 지배력에 대한 위협은 상당히 줄었다.[1] 커닝엄은 "타란토와 1940년 11월 11일부터 12일까지의 밤은 해군이 가장 파괴적인 무기를 함대 항공대에 가지고 있음을 만천하에 보여준 사건으로 영원히 기억되어야 한다."라고 말했다.[1]
영국 해군은 역사상 최초로 항공모함 함재기만으로 전함대 항공 공격을 감행했으며, 이 사건은 1941년 일본의 진주만 공습 계획에 중요한 영향을 미쳤다.[1] 공격 이후, ''일러스트리어스''는 "심판 작전 실행"이라는 신호를 보냈고, 컨닝엄은 "작전 성공"을 의미하는 2글자 코드 그룹으로 회신했다.[43]
6. 4. 마타판곶 해전
1941년 3월 말, 히틀러는 그리스 주둔 영국 원정군에 대한 보급선 차단을 이탈리아 해군에게 압박했고, 이탈리아 함대는 영국 함대를 공격할 계획을 세웠다.[1] 이탈리아 해군 사령관 안젤로 이아키노 제독은 집게형 공격을 실시하려 했으나,[45] 커닝햄은 이탈리아 에니그마 암호 메시지 도청을 통해 이를 파악하고 있었다.[46]커닝햄은 적의 첩보원들을 속이기 위해 골프 경기와 허구의 저녁 모임을 계획하는 등 위장 활동을 펼쳤고, 일몰 후 HMS ''워스파이트''에 승선하여 알렉산드리아를 떠났다.[46] 의 앨버코어 어뢰 폭격기 공격을 명령하여 ''비토리오 베네토''에 피해를 입혔고, 이아키노는 함대의 후퇴를 명령했다.[47][45] 커닝햄은 이탈리아 함대를 추격했다.[1]
''포미더블''의 공습으로 순양함 가 무력화되었고, 이아키노는 순양함과 구축함 전대를 보내 ''폴라''를 보호하도록 명령했다. 레이더를 장착한 영국 전함 함대는 밤이 되자 이탈리아 함대를 탐지했고, , , ''워스파이트'' 전함이 3.5km 거리에서 이탈리아 순양함에 사격을 개시하여 5분 만에 격침시켰다.[1]
마타판곶 해전에서 이탈리아 해군은 3척의 중순양함과 2척의 구축함 등 5척의 함선이 침몰하고, 약 2,400명의 사상자가 발생했다.[48] 반면 영국은 어뢰 폭격기 1대가 격추되어 3명의 항공대원을 잃었을 뿐이다.[48][45] 이 해전의 승리로 커닝햄은 지중해 전쟁에서 전략적 승리를 거머쥐었고,레지아 마리나는 전쟁이 끝날 때까지 동지중해를 연합군 함대에 양보하고 항구를 떠나지 않았다.[45][1]
6. 5. 크레타 전투
1941년 5월 20일 아침, 나치 독일은 ''운터네멘 메르쿠르''(작전명 머큐리)라는 코드네임 하에 크레타 섬에 대한 공수 작전을 개시했다.[49] 초기 큰 사상자에도 불구하고,[49] 크레타 서부의 말레메 비행장은 독일군에게 함락되었고, 이를 통해 독일군은 대규모 증원병력을 공수하여 연합군을 압도할 수 있었다.[1]일주일간의 격렬한 전투 후, 영국군 사령관들은 상황이 절망적이라고 판단하고 스파키아에서 철수 명령을 내렸다.[1] 그 후 4일 밤 동안 1만 6천 명의 병력이 함선으로 이집트로 후송되었다. (라플라타 강 전투에서 명성을 떨친 HMS 아약스도 포함).[1] 알렉산드리아로 후송되는 부상당한 영국군 병사들의 모습은 당시 상황을 잘 보여준다.

커닝햄 제독은 "해군은 육군을 실망시켜서는 안 된다"는 확고한 의지를 가지고 있었고, "함선을 건조하는 데는 3년이 걸립니다. 새로운 전통을 세우는 데는 300년이 걸릴 것입니다. 철수 작전은 계속됩니다."[50]라고 언급했다. 커닝햄 제독과 그의 부하들의 노력 덕분에 크레타 섬에 있던 2만 2천 명의 병력 중 1만 6천 5백 명이 구출되었지만, 3척의 순양함과 6척의 구축함을 잃었고,[51] 다른 주요 군함 15척도 손상을 입었다.[51]
6. 6. 연합 원정군 해군 사령관
커닝햄은 1941년 3월 "중동에서의 최근 성공적인 연합 작전을 인정하여" 대영 제국 훈장 기사 십자장이 되었으며,[52] 1942년 7월 사우스햄프턴 주 비숍스 월섬 남작에 서임되었다.[53] 1942년 후반부터 1943년 초까지 드와이트 D. 아이젠하워 장군 휘하에서 연합 원정군 해군 사령관으로 복무했다. 이 직책에서 커닝햄은 북아프리카 상륙 작전(토치 작전)에서 영국-미국군 상륙을 지원한 대규모 함대를 지휘했다. 아이젠하워 장군은 자신의 일기에서 "앤드류 브라운 커닝햄 제독. 그는 절대적인 사심 없음, 활력, 임무에 대한 헌신, 그의 임무에 대한 지식, 그리고 연합 작전의 요구 사항에 대한 이해에서 제 부하들 중 최고라고 생각합니다. 그의 뛰어난 자질에 대한 저의 의견은 한 순간도 흔들린 적이 없습니다."라고 평가했다.[54]

1943년 1월 21일, 커닝햄은 대제독으로 승진했다.[55] 1943년 2월 그는 지중해 함대 사령관직으로 복귀했다. 석 달 후, 북아프리카의 추축군이 항복 직전에 이르자 그는 추축군의 탈출을 허용하지 말 것을 명령했다.[56] 그는 함대에 "침몰시키고, 불태우고, 파괴하라. 아무것도 통과시키지 마라"라는 신호를 보냈다.[56] 그는 시칠리아 연합군 상륙 작전, 베이타운 작전 및 이탈리아 연합군 상륙 작전 중 해군 병력을 감독했다. 1943년 9월 11일 아침, 커닝햄은 이탈리아 함대가 항복할 때 몰타에 있었다. 커닝햄은 "그들의 경하에 이탈리아 전투 함대가 현재 몰타 요새의 포격 사정권 내에 정박해 있다는 것을 알려주십시오."라는 전보로 해군성에 알렸다.[57]
6. 7. 지중해 함대 사령관 복귀 및 이탈리아 항복
7. 제1해군경 및 해군참모총장
1943년 10월, 퍼시 쿤닝엄 경은 더들리 파운드 경의 사망 후 제1해군경 겸 해군참모총장에 임명되었다.[58] 이 승진으로 인해 그는 지중해 사령관(Commander-in-Chief, Mediterranean)이라는 그토록 원했던 자리를 내놓아야 했고, 후임으로 존 H. D. 커닝엄 제독을 추천했다.[58] 제1해군경으로서, 그리고 참모총장 위원회의 일원으로서 쿤닝엄은 전쟁이 끝날 때까지 해군의 전반적인 전략적 방향을 책임졌다. 그는 카이로 회담, 테헤란 회담, 얄타 회담, 그리고 포츠담 회담[56]에 참석하여 연합군이 노르망디 상륙 작전과 태평양으로의 영국 함대 파병을 포함한 미래 전략을 논의했다.[56]
D-데이 이후 안트워프 항은 연합군에게 매우 중요했지만, 쿤닝엄 제독과 버트럼 램지 제독은 연합군 최고사령부(SHAEF)와 버나드 몽고메리에게 독일군이 접근로를 장악하고 있는 한 항구는 무용지물이라고 경고했다. 그러나 몽고메리는 셸트 강 전투를 연기했고, 항구 개항 지연은 겨울이 다가오기 전 연합군의 전력 증강에 큰 타격을 입혔다.[59]
7. 1. 연합군 회담 참석
앤드루 커닝엄은 제1해군대장이자 참모총장 위원회의 일원으로서, 제2차 세계 대전이 끝날 때까지 해군의 전반적인 전략적 방향을 책임졌다.[58] 그는 카이로 회담, 테헤란 회담, 얄타 회담, 포츠담 회담에 참석하여 연합군의 노르망디 상륙 작전과 영국 함대의 태평양 파병을 포함한 미래 전략을 논의했다.[56]D-데이 이후 안트워프 항구는 연합군에게 매우 중요했지만, 커닝엄과 버트럼 램지는 연합군 최고사령부(SHAEF)와 버나드 몽고메리에게 독일군이 접근로를 장악하고 있는 한 항구는 무용지물이라고 경고했다. 그러나 몽고메리는 셸트 강 전투를 연기했고, 항구 개항 지연은 겨울이 다가오기 전 연합군의 전력 증강에 큰 타격을 입혔다.[59]
7. 2. 안트워프 항구의 중요성 강조
커닝햄은 D-데이 이후 안트워프 항구가 연합군에게 매우 중요하지만, 독일군이 접근로를 장악하고 있는 한 항구는 무용지물이라고 연합군 최고사령부(SHAEF)와 버나드 몽고메리에게 경고했다.[59] 그러나 몽고메리는 셸트 강 전투를 연기했고, 항구 개항 지연은 겨울이 다가오기 전 연합군의 전력 증강에 큰 타격을 입혔다.[59]8. 은퇴 이후
1945년 1월, 커닝엄은 가시관 기사단에 임명되었고,[60] 셀커크 백작령 커크호프의 '''하인드호프의 커닝엄 남작'''으로 작위를 받았다.[61] 1945년 전쟁이 끝날 무렵 은퇴할 자격이 있었지만, 평화로의 이행 과정을 이끌고 나서 은퇴하기로 결심했다. 클레멘트 애틀리가 영국 수상으로 선출되고 그의 전후 합의가 시행되면서 방위 예산이 대폭 감소했다. 광범위한 재편성은 커닝엄에게 큰 과제였다. "우리는 전쟁을 하는 것보다 평화를 위해 재편성하는 것이 얼마나 더 어려운지 매우 빨리 깨달았습니다."[62] 세 가지 군 종류 모두 예산 압박을 받으면서 해군은 커닝엄이 예상했던 것보다 더 큰 감축 프로그램을 시작했다.[63]
1945년 10월, 그는 에든버러 대학교의 총장으로 선출되었다.[64] 1946년 신년 훈장에서 셀커크 백작령 커크호프의 '''하인드호프의 커닝엄 자작'''으로,[65] 같은 해 6월에는 공훈 훈장을 받았다.[66] 1946년 5월 말, 평화 시대로의 이행을 감독한 후, 커닝엄은 제1해군령장직에서 은퇴했다.[67] 커닝엄은 전쟁 전에 그와 커닝엄 부인이 얻었던 햄프셔주 비스숍스 월섬에 있는 "시골의 작은 집"인 '팰리스 하우스'로 은퇴했다. 그들은 모두 바쁜 은퇴 생활을 보냈다.[67] 그는 드물게 상원에 출석했고, 특히 1940년 지브롤터 사령관직에서 해임된 제독 더들리 노스와 관련된 것들을 포함하여, 종종 해군에 대한 언론 성명에 그의 이름을 빌려주었다. 커닝엄과 여러 명의 생존 해군 제독들은 노스를 위한 정의를 확보하기 위해 노력했고, 1957년 부분적인 옹호를 통해 성공했다.[67]
그는 여러 가지 임명으로 바쁜 시간을 보냈다. 1950년과 1952년에 스코틀랜드 교회 총회 고등판무관이었고,[68][69] 1953년에는 엘리자베스 2세 여왕 대관식에서 고등집사를 역임했다.[70] 이 기간 내내 커닝엄과 그의 아내는 그의 친조카 조크 슬레이터를 포함한 가족과 친구들을 광범위한 정원에서 접대했다. 커닝엄은 1963년 6월 12일 런던에서 사망했고,[67] 포츠머스 앞바다에 해상 매장되었다.[71] 그의 결혼 생활에서 자녀는 없었고, 따라서 그의 작위는 그의 사후에 폐지되었다.[72]
프란타 벨스키가 제작한 커닝엄의 흉상은 1967년 4월 2일 에든버러 공작 필립 왕자에 의해 런던 트라팔가 광장에서 공개되었다.[73]
2010년 4월, 2010년 아이슬란드 에이야프얄라요쿨 화산 폭발 이후 항공 여행 중단으로 유럽 대륙에 발이 묶인 영국 군인과 항공 승객들을 영국으로 수송하기 위한 영국 해군 작전은 그의 이름을 따서 커닝엄 작전으로 명명되었다.[74]
8. 1. 은퇴 결정과 평화 시대로의 전환
1945년 1월, 커닝엄은 가시관 기사단에 임명되었고,[60] 셀커크 백작령 커크호프의 '''하인드호프의 커닝엄 남작'''으로 작위를 받았다.[61] 그는 1945년 전쟁이 끝날 무렵 은퇴할 자격이 있었지만, 평화로의 이행 과정을 이끌고 나서 은퇴하기로 결심했다. 클레멘트 애틀리가 영국 수상으로 선출되고 그의 전후 합의가 시행되면서 방위 예산이 대폭 감소했다. 커닝엄은 광범위한 재편성에 직면하며 "우리는 전쟁을 하는 것보다 평화를 위해 재편성하는 것이 얼마나 더 어려운지 매우 빨리 깨달았습니다."라고 회고했다.[62] 세 군 종류 모두 예산 압박을 받으면서 해군은 커닝엄이 예상했던 것보다 더 큰 감축 프로그램을 시작했다.[63]1945년 10월, 그는 에든버러 대학교의 총장으로 선출되었다.[64] 그는 1946년 신년 훈장에서 셀커크 백작령 커크호프의 '''하인드호프의 커닝엄 자작'''으로,[65] 같은 해 6월에는 공훈 훈장을 받았다.[66] 1946년 5월 말, 평화 시대로의 이행을 감독한 후, 커닝엄은 제1해군령장직에서 은퇴하고, 햄프셔주 비스숍스 월섬에 있는 '팰리스 하우스'로 돌아갔다.[67] 그는 상원에 드물게 출석했고, 더들리 노스 제독 관련 문제 등 해군 관련 언론 성명에 참여했다. 커닝엄과 여러 해군 제독들은 노스를 옹호했고, 1957년 부분적인 성과를 거두었다.[67]
그는 1950년과 1952년에 스코틀랜드 교회 총회 고등판무관을,[68][69] 1953년에는 엘리자베스 2세 여왕 대관식에서 고등집사를 역임했다.[70] 커닝엄은 1963년 6월 12일 런던에서 사망하여 포츠머스 앞바다에 해상 매장되었으며,[67][71] 그의 결혼 생활에서 자녀가 없어 작위는 폐지되었다.[72] 프란타 벨스키가 제작한 커닝엄의 흉상은 1967년 4월 2일 에든버러 공작 필립 왕자에 의해 런던 트라팔가 광장에서 공개되었다.[73]
2010년 4월, 2010년 아이슬란드 에이야프얄라요쿨 화산 폭발 이후 항공 여행 중단으로 유럽 대륙에 발이 묶인 영국 군인과 항공 승객들을 영국으로 수송하기 위한 영국 해군 작전은 그의 이름을 따서 커닝엄 작전으로 명명되었다.[74]
8. 2. 에든버러 대학교 총장
1945년 10월, 에든버러 대학교의 총장으로 선출되었다.[64]8. 3. 작위 수여
1945년 1월, 커닝엄은 가시관 기사단에 임명되었고,[60] 셀커크 백작령 커크호프의 '''하인드호프의 커닝엄 남작'''으로 작위를 받았다.[61] 1946년 신년 서훈에서는 하인드호프의 커닝엄 자작으로 승작되었으며,[65] 같은 해 6월에는 공훈 훈장을 받았다.[66]8. 4. 스코틀랜드 교회 총회 고등판무관
커닝엄은 1950년과 1952년에 스코틀랜드 교회 총회 고등판무관을 역임했다.[68][69]8. 5. 엘리자베스 2세 여왕 대관식 고등집사
1953년, 엘리자베스 2세 여왕 대관식에서 고등집사를 역임했다.[70] 커닝엄은 엘리자베스 2세의 대관식에서 고등 집사라는 직책을 맡아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다.8. 6. 사망과 유산
앤드루 커닝엄은 1963년 6월 12일 런던에서 사망하여[67] 포츠머스 앞바다에 해상 매장되었다.[71] 커닝엄에게는 자녀가 없었기에, 그의 작위는 사후에 소멸되었다.[72] 1945년 1월 커닝엄은 가시관 기사단에 임명되었고,[60] 셀커크 백작령 커크호프의 '''하인드호프의 커닝엄 남작''' 작위를 받았다.[61] 1946년 신년 훈장에서는 셀커크 백작령 커크호프의 '''하인드호프의 커닝엄 자작'''으로,[65] 같은 해 6월에는 공훈 훈장을 받았다.[66]프란타 벨스키가 제작한 커닝엄의 흉상은 1967년 4월 2일 에든버러 공작 필립 왕자에 의해 런던 트라팔가 광장에서 공개되었다.[73] 1945년 10월에는 에든버러 대학교의 총장으로 선출되기도 했다.[64]
2010년 4월, 2010년 아이슬란드 에이야프얄라요쿨 화산 폭발 이후 항공 여행 중단으로 유럽 대륙에 발이 묶인 영국 군인과 항공 승객들을 영국으로 수송하기 위한 영국 해군 작전은 그의 이름을 따서 커닝엄 작전으로 명명되었다.[74]
9. 문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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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닝햄 가문의 문장은 은색 방패에 검은색 쇠스랑이 있으며, 위쪽에는 녹색 별이 있고, 아래쪽에는 두 마리의 검은색 돌고래가 빨간색 입을 벌리고 서로 마주보고 있다. 문장 상단에는 녹색 해군관(Naval Crown)에서 나오는 흰 독각수 머리가 있는데, 금색 갈기와 술이 있으며 빨간색 혀를 내밀고 있다. 날개를 펼친 두 마리의 알바트로스가 문장 양쪽에 위치하고 있다. 문장 아래쪽에는 "Over Fork Over"라는 문구가 적혀 있다.[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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