투치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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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투치족은 르완다와 부룬디, 콩고민주공화국 등 아프리카 대호수 지역에 거주하는 민족이다. 벨기에 식민지 시대에 신체적 특징, 부의 정도를 기준으로 투치족을 분류했으며, 역사적으로는 후투족과 갈등을 겪었다. 1994년 르완다 학살 당시 다수의 투치족이 희생되었으며, 현재는 르완다에서 소수 민족으로 대통령을 배출하기도 한다. 투치족은 전통적으로 목축을 주로 하며, 후투족과 유사한 문화를 공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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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치족 | |
---|---|
기본 정보 | |
민족 | 투치족 아바투치, 임푸레, 와후마, 와히마, 와투치 |
거주 지역 | 르완다, 부룬디 |
인구 | 약 300만 명 |
언어 | 키냐르완다어, 키룬디어 |
종교 | 기독교(80%), 이슬람교(5%) |
관련 민족 | 후투족, 트와족 |
명칭 | |
로마자 표기 | Tutsi |
현지어 표기 | Abatutsi |
IPA(키냐르완다어) | /ɑ.βɑ.tuː.t͡si/ |
인구 분포 | |
부룬디 | 170만 명 (전체 인구의 14%) |
르완다 | 100만~200만 명 (전체 인구의 9%~15%) |
기타 | 벨기에, 프랑스 등 |
관련 정보 | |
관련 민족 | 기타 르완다-룬디 민족 |
2. 기원 및 분류
르완다와 부룬디에서 후투족은 인구의 약 85%를 차지하며, 투치족은 약 14% 정도이다. 15세기 무렵, 용맹한 전사로 유명한 투치족이 이 지역으로 남하해 온 이후 투치족은 귀족 집단으로 군림하게 되었고, 다수의 후투족은 소수의 투치족에게 통치를 받게 되었다.
투치족의 정의는 시간과 장소에 따라 변화해 왔다. 벨기에 통치 아래 식민지 시대에도 르완다의 사회 구조는 안정적이지 않았다. 투치족 귀족 또는 엘리트는 일반 투치족과 구별되었다. 벨기에 식민 당국은 인구 조사를 실시하면서 소 열 마리 이상을 소유하거나, 특정 신체적 특징을 가진 사람을 투치족으로 정의했다.[6]
2. 1. 신체적 특징
벨기에 식민 당국은 인구 조사를 실시하면서 소 열 마리 이상을 소유하거나, 긴 얇은 코, 높은 광대뼈, 그리고 180cm가 넘는 키 등 투치족과 관련된 일반적인 신체적 특징을 가진 사람을 투치족으로 정의했다.[6][7]식민 시대에 투치족은 대호수 지역에 아프리카의 뿔에서 온 것으로 추정되었다.[6][7]
투치족은 일부 사람들에 의해 쿠시트 계통으로 여겨졌지만, 쿠시트어를 사용하지 않으며, 현재 거주하는 지역에서 최소 400년 동안 거주해 왔고, 이로 인해 지역 내 후투족과 상당한 혼혈이 이루어졌다. 후투족과 투치족의 혼혈과 혼인의 역사 때문에 일부 민족학자와 역사학자들은 후투족과 투치족을 별개의 민족으로 부를 수 없다는 견해를 가지고 있다.[8][9]
유럽인들은 존 해닝 스피크를 시작으로 햄족 가설을 주장하며, 15세기에 에티오피아에서 목축을 하는 투치족이 이 지역에 와서 18세기까지 후투족과 트와족을 정복했다고 보았고, 이들을 나일계 반햄족으로 여겼다. 그러나 실제로는 후투족과 투치족은 원래 경계가 명확하지 않은 반투족 집단이었고, 식민지화를 진행한 독일과 벨기에가 식민 통치를 위해 투치족을 중간 지배자로 이용했다고 여겨진다.[31][32] 특히 벨기에 당국은 소를 10마리 이상 소유하거나 코가 높은 사람을 투치족으로 규정하여 지배 계층에 두었다. Y염색체 유전자 분석 결과, 투치족이 에티오피아계 유전자를 가진다는 근거는 발견되지 않았다.[33]
3. 역사
르완다와 부룬디에서 후투족은 인구의 약 85%를 차지하는 다수이고, 투치족은 약 14%를 차지하는 소수이다. 하지만 용맹한 전사로 알려진 투치족은 15세기 무렵 이 지역으로 남하하여 귀족 집단으로 군림하게 되었고, 다수의 후투족은 소수의 투치족에게 통치를 받게 되었다.
르완다에서는 투치족의 지배에 반발한 후투족이 사회적, 문화적, 군사적으로 충돌을 일으켰다. 1960년대 이후 르완다의 정권이 투치족에서 후투족으로 넘어가면서 후투족에 의해 많은 투치족이 희생되었다. 1994년 르완다 학살도 이러한 갈등의 연장선상에서 발생했다.
부룬디에서는 독립 이후 투치족이 정권을 장악했으며, 1972년에는 투치족에 의한 학살로 20만 명의 후투족이 희생되었다. 1993년 부룬디 최초의 민주 선거에서 후투족 출신 대통령이 당선되었으나, 투치족 군 장교들이 그를 암살하면서 후투족과 투치족 간의 내전이 발발하여 많은 사상자가 발생했다.
3. 1. 식민지 시대
식민지 개척자들이 도착하기 전, 르완다는 15세기부터 투치족이 지배하는 군주제 국가였다. 1897년, 독일은 르완다 왕과 동맹을 맺으면서 르완다에 세력을 확장하여 식민 시대가 시작되었다.[13] 이후 제1차 세계 대전 중인 1916년, 벨기에가 르완다를 장악했다. 두 유럽 국가 모두 르완다 왕을 통해 통치하며 투치족 우대 정책을 유지했다.부룬디에서는 '간와'로 알려진 지배 세력이 등장하여 국가 행정부를 효과적으로 장악했다. 후투족과 투치족 모두의 지지를 받아 통치한 간와는 부룬디 내에서 후투족도 투치족도 아닌 것으로 여겨졌다.[14]
르완다는 독일(1897년~1916년)과 벨기에(1922년~1961년)의 식민 지배를 받았다. 투치족과 후투족 모두 전통적인 지배 엘리트였지만, 두 식민 지배국 모두 투치족에게만 교육을 받고 식민 정부에 참여할 수 있도록 허용했다. 이러한 차별 정책은 불만을 낳았다.
벨기에가 르완다를 장악했을 때, 그들은 서로 다른 인구 집단을 계속 구분하면 르완다를 더 잘 통치할 수 있다고 믿었다. 1920년대에 그들은 사람들에게 특정 민족 집단에 소속되도록 요구했고, 인구 조사에서 이에 따라 분류했다.
1959년, 벨기에는 입장을 바꿔 독립 후 보편적 선거를 통해 다수인 후투족이 정부를 장악하도록 허용했다. 이는 부분적으로 벨기에 국내 정치를 반영한 것으로, 후투족 다수에 대한 차별이 플랑드르-왈롱 갈등에서 비롯된 벨기에 내부의 억압과 유사하게 여겨졌고, 후투족의 민주화와 권한 부여는 투치족 지배에 대한 정당한 대응으로 여겨졌다. 부룬디의 독립과 르완다로 이어지는 기간 동안 벨기에의 정책은 상당히 주저하고 왔다갔다했다.
존 해닝 스피크(John Hanning Speke)를 시작으로 하는 햄족 가설 계열의 주장에서는 15세기에 에티오피아에서 목축을 생업으로 하는 투시족이 이 지역에 와서 18세기까지 후투족과 트와족을 정복했다고 하며, 나일계 반햄족으로 여겨졌다. 그러나 실제로는 후투족과 투시족은 원래 서로 경계가 명확하지 않은 반투족 집단이었고, 식민지화를 진행한 독일(독일 제국)과 벨기에(벨기에 식민지 제국)가 식민지 정책을 위해 투시족을 중간 지배자로 이용했다고 여겨진다.[31][32] 투시족은 목축민이자 전사였고, 후투족은 농민이 많았다. 특히 벨기에 당국은 소를 10마리 이상 소유한 자, 코가 높은 자를 투시족으로 규정하여 지배 계층에 두었다. Y염색체 유전자 분석 결과, 투시족이 에티오피아계 유전자를 가진다는 근거는 발견되지 않았다.[33]
3. 2. 독립 이후

르완다는 독일(1897년~1916년)과 벨기에(1922년~1961년)의 식민 지배를 받았다. 투치족과 후투족 모두 전통적인 지배 엘리트였지만, 두 식민 지배국은 투치족에게만 교육과 식민 정부 참여를 허용했다. 이러한 차별 정책은 불만을 낳았다. 1959년 벨기에는 입장을 바꿔 독립 후 다수였던 후투족이 정부를 장악하도록 허용했다.
르완다의 후투족은 투치족에 대항하여 반란을 일으켜 권력을 장악했다. 투치족은 르완다를 떠나 우간다와 탄자니아 등지에 망명 공동체를 형성했다.[15][16][17][18][19] 식민지 시대부터 이어진 투치족과 후투족을 구분하는 신분증 제도는 르완다와 부룬디의 여러 정부에 의해 계속되었다.
한편 부룬디에서는 '간와'로 알려진 지배 세력이 등장하여 국가 행정부를 효과적으로 장악했다. 후투족과 투치족 모두의 지지를 받아 통치한 간와는 부룬디 내에서 후투족도 투치족도 아닌 것으로 여겨졌다.[14]
부룬디에서는 독립 이후 줄곧 투치족이 정권을 장악하였으며, 1972년에는 투치족의 학살로 20만 명의 후투족이 희생당했다. 1993년 부룬디의 첫 번째 민주 선거로 당선된 멜키오르 니다야예 대통령은 후투족이었으나, 헌법상 유고시 대통령직을 대신하게 되어 있던 투치족 군 장교들이 그를 암살했다. 이는 후투족과 투치족 사이의 내전을 불러일으켜 80만 명의 부룬디인들이 목숨을 잃었다. 먼저 투치족에 의한 무차별 학살이 있었고, 이에 대한 반발로 후투족에 의한 학살이 일어났다. 2000년 아루샤 평화 프로세스 이후, 현재 부룬디에서는 투치족 소수 민족이 후투족 다수 민족과 다소 공정한 방식으로 권력을 공유하고 있다. 전통적으로 투치족은 더 많은 경제적 권력을 가지고 군대를 장악했다.[24]
역사적 경위로 인해 르완다 내정에서는 후투족과의 정면 충돌은 피하고 있다. 투치족과 후투족은 같은 언어와 종교를 공유하며, 문화 또한 대체로 유사하여 투치족과 후투족 간의 결혼도 흔하다(후투족 남성과 투치족 여성의 결혼이 많고 그 반대는 드물다). 현대에는 표면적으로 후투족인지 투치족인지를 의식하는 경우가 줄어들고 있으며, 문맥에 따라서는 단순히 지배 계층을 가리켜 투치라는 단어를 사용하는 경우도 늘고 있다. 그러나 최근까지 지속된 내전과 투치족 게릴라에 의한 후투족 주민 습격으로 인한 난민 발생 등으로 인해, 개별 주민들은 여전히 자신이 어느 쪽에 속하는지를 내면적으로 자각하고 있다고 여겨진다.
3. 2. 1. 르완다 학살 (1994)
1960년대 이후 르완다의 정권이 투치족에서 후투족으로 넘어가면서, 후투족이 투치족 50만~100만 명을 살해했다.[25][26][27] 1994년 르완다 학살도 이러한 맥락에서 일어났다.1959년에서 1961년 사이에 일어난 반투치 폭력 이후, 많은 투치족이 망명했다. 주로 우간다에 거주하는 망명 투치족으로 구성된 르완다 애국전선(RPF)은 1990년 권력을 되찾기 위해 르완다를 공격했다. RPF는 우간다 부시 전쟁에서 조직적인 비정규전 경험을 갖고 있었고, 우간다 정부로부터 많은 지원을 받았다. 프랑스가 르완다 정부에 무기를 제공하면서 초기 RPF의 공세는 중단되었다. 평화를 위한 시도는 아루샤 협정으로 이어졌다.
르완다와 부룬디 대통령의 암살 이후 협정은 결렬되었고, 적대 행위가 재개되면서 1994년 르완다 대량학살이 시작되었다. 당시 권력을 잡고 있던 후투족은 투치족 출신으로 추정되는 약 50만~60만 명을 살해했다.[25][26][27] 대량학살 이후 승리한 투치족이 지배하는 RPF가 1994년 7월에 권력을 잡았다.
휴먼 라이츠 워치에 따르면, 1994년 르완다 대학살에도 불구하고 투치족 인구의 약 77%[30]가 르완다에 거주하고 있으며, 소수 민족이지만 대통령을 배출하기도 했다.
4. 콩고민주공화국의 투치족
콩고민주공화국에는 크게 두 부류의 투치족이 있다. 하나는 남키부(South Kivu) 남쪽 끝에 거주하는 소수 민족인 바냐물렌게(Banyamulenge)이다. 이들은 벨기에 국왕이 식민지 행정 업무를 수행하도록 콩고민주공화국으로 데려온 르완다와 부룬디 출신 투치족의 후손들이다.
둘째, 북키부(North Kivu)와 남키부의 칼레헤(Kalehe)에는 바냐르완다(Banyarwanda) (후투족과 투치족) 공동체의 일부인 소수의 투치족이 있다. 이들은 바냐물렌게가 아니다. 대부분의 바냐르완다인들은 르완다의 대량학살을 피해 온 사람들이다. 콩고 반군 지도자 로랑-데지레 카빌라(Laurent-Désiré Kabila)와 RPF 군인 제임스 카바레베(James Kabarebe)가 이끄는 주로 투치족으로 구성된 아동병사 군대인 AFDL과 함께 온 사람들도 있다. 콩고민주공화국은 대량학살을 피해 도망친 후투족과 투치족 집단의 피난처였다. 투치족은 (왕정이 전복되었을 때) 르완다에서 콩고민주공화국과 우간다로도 도망쳤다. 부룬디의 후투족 대량학살 당시 많은 후투족이 콩고민주공화국으로 피난했고, 이들은 바냐르완다 공동체의 일부를 형성한다.
키부 지역에서 콩고인 대량학살의 책임이 있는 반군 집단인 M23의 일원 중 상당수는 성장한 아동병사들이다. M23의 지도자는 콩고민주공화국군(Armed Forces of the Democratic Republic of Congo)의 전직 장군이기도 한 투치족 로랑 은크룬다(Laurent Nkrunda)이다. 그는 아동병사와 어린이들을 이용하여 코발트를 채굴하는 르완다군과 함께 키부 지역의 코발트 광산을 관리하고 있다. 이것이 콩고민주공화국군과 르완다군(Rwandan armed forces)의 지원을 받는 M23 사이의 갈등의 원인이며, 모두 코발트 때문에 주권 영토에서 불법적으로 활동하고 있다.
5. 문화
전통적으로 투치족의 문화는 신성한 왕 아래에서 사법 및 통치를 중심으로 이루어졌다. 투치족은 가축을 소유했고, 자신들의 생산품으로 생계를 유지했다. 또한, 생활 방식은 많은 여가 시간을 제공했고, 시, 직조, 음악과 같은 고급 예술을 발전시키는 데 시간을 보냈다. 우세 소수 민족이었던 투치족과 후투족 농민 및 다른 지역 주민과의 관계는 봉건 시대 유럽의 영주와 농노 사이의 관계에 비유되기도 한다.[28]
Fage(2013)에 따르면, 투치족은 반투족과 닐로트 인구와 혈청학적으로 관련이 있다. 이는 호수 지역 왕국에서 투치-히마 지배 계급의 가능한 쿠시어족 기원을 배제한다. 그러나 후자 왕국의 왕실 장례 관습은 에티오피아 남부 기베 지역의 전 쿠시어족 시다마 국가에서 행해진 관습과 매우 유사하다. Fage는 투치족이 닐로트족 인구 중 하나에서 유래했을 가능성을 제시한다. 투치족의 닐로트족 조상들은 이전 시대에 인접한 쿠시어족 왕국으로부터 일부 군주제 전통을 채택하고, 그 후 그들이 대호수 지역의 반투족 원주민들 사이에 처음 정착했을 때 그 차용된 관습을 남쪽으로 가져왔을 것이다.[28]
오늘날 투치족과 후투족의 문화 사이에는 거의 차이가 없다. 두 집단 모두 같은 반투어를 사용한다. 두 집단 간의 혼인율은 전통적으로 매우 높았고, 20세기까지 관계는 우호적이었다. 많은 학자들은 투치족의 결정은 민족성이 아니라 계급이나 카스트의 표현이었다고 결론지었다. 르완다인들은 자신들의 언어인 키냐르완다어를 가지고 있다. 영어, 프랑스어, 스와힐리어는 다양한 역사적 이유로 추가적인 공용어 역할을 하며, 르완다인들이 제2언어로 널리 사용하고 있다.[29]
6. 주요 인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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