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폴 카가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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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폴 카가메는 1957년 르완다에서 태어나, 1979년 우간다 내전에 참전하며 군사 경력을 시작했다. 1990년 르완다 애국전선(RPF)의 최고 사령관이 되었고, 1994년 르완다 집단학살 이후 부통령 겸 국방장관을 역임하며 사실상 르완다를 통치했다. 2000년 대통령 권한 대행을 거쳐 대통령으로 선출되었으며, 2003년, 2010년, 2017년, 2024년 선거에서 압도적인 지지율로 재선되었다. 그의 통치 기간 동안 르완다 경제는 급성장했으나, 권위주의적 통치와 인권 탄압에 대한 비판도 존재한다. 그는 교육, 건강, 외교 정책 등 다양한 분야에서 정책을 추진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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폴 카가메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2023년의 카가메
2023년의 카가메
이름폴 카가메
로마자 표기Paul Kagame
출생일1957년 10월 23일
출생지루안다-우룬디, 기타라마 주, 탐브웨 (현재 르완다, 니아루토부)
국적르완다
배우자제넷 니라몽기 (1989년 결혼)
자녀4명
소속 정당르완다 애국 전선
웹사이트공식 웹사이트
직책
직책제4대 르완다의 대통령
임기 시작2000년 4월 22일
총리베르나르 마쿠자
피에르 하부무레미
아나스타스 무레케지
에두아르 은기렌테
전임 대통령파스퇴르 비지뭉구
커먼웰스 의장 임기 시작2022년 6월 24일
커먼웰스 의장 임기 종료2024년 10월 25일
전임 커먼웰스 의장보리스 존슨
후임 커먼웰스 의장피아메 나오미 마타아파
아프리카 연합 의장 임기 시작2018년 1월 28일
아프리카 연합 의장 임기 종료2019년 2월 10일
전임 아프리카 연합 의장알파 콩데
후임 아프리카 연합 의장압델 파타 엘시시
부통령 임기 시작1994년 7월 19일
부통령 임기 종료2000년 4월 22일
대통령파스퇴르 비지뭉구
전임 부통령직책 신설
후임 부통령직책 폐지
국방부 장관 임기 시작1994년 7월 19일
국방부 장관 임기 종료2000년 4월 22일
전임 국방부 장관오귀스탱 비지마나
후임 국방부 장관에마뉘엘 하비야리마나
군사 경력
복무 기간1979년–2000년
소속국민 저항군 (1979년–1990년)
르완다 애국 전선 (1990년 이후)
(1994년 이후)
주요 전투우간다 부시 전쟁
르완다 내전
학력
모교지휘참모대학교
기타

2. 어린 시절

폴 카가메는 1957년 10월 23일, 당시 벨기에의 유엔 신탁통치령이었던 루안다-우룬디 남부 지방(현재 르완다 남부주)의 탐웨 마을에서 여섯 자녀 중 막내로 태어났다.[25] 그의 아버지는 투치족 왕족인 베가 가문 출신의 데오그라티아스 루타감바였고, 어머니 아스테리아 비신다는 마지막 르완다 여왕 로잘리 기칸다와 같은 니기냐 가문 헤베라 분파 출신이었다. 아버지 데오그라티아스는 무타라 3세 국왕과 친척 관계였으나, 왕실과의 관계에 기대기보다 독립적인 사업가로 활동했다.

카가메가 태어날 당시 르완다는 소수의 투치족이 전통적인 지배 계층을 이루고 있었고, 벨기에 식민 정부는 오랫동안 투치족 우월 정책을 펼쳐왔다. 반면 다수를 차지하는 후투족은 주로 농업에 종사했으며, 초기 르완다 주민의 후예인 트와족은 인구의 1% 미만을 차지하는 숲에 사는 피그미족이었다. 1950년대 들어 투치족과 후투족 간의 긴장이 고조되었고, 결국 1959년 르완다 혁명이 발발했다. 이 과정에서 후투족 활동가들이 투치족을 학살하기 시작하자, 10만 명이 넘는 투치족이 주변 국가로 피난길에 올랐다.

카가메의 가족 역시 집을 버리고 르완다 북동부에서 2년간 숨어 지내다 국경을 넘어 우간다로 피신했다. 그들은 점차 북쪽으로 이동하여 1962년 우간다 서부 토로 소지역의 농쉐레지 난민 캠프에 정착했다.[26] 카가메는 이곳에서 훗날 르완다 애국 전선(RPF)의 지도자가 되는 프레드 루위기에마를 처음 만났다.

카가메는 난민 캠프 근처 학교에서 초등 교육을 받으며 다른 르완다 난민들과 함께 영어를 배우고 우간다 문화에 적응하기 시작했다. 9살 때는 약 16km 떨어진 명문 르웬고로 초등학교로 옮겼고, 이후 우간다 최고의 학교 중 하나이자 훗날 우간다 대통령이 되는 요웨리 무세베니의 모교이기도 한 Ntare School에 진학했다. 그러나 1970년대 초 아버지가 사망하고 친구 루위기에마마저 행방불명되면서 카가메의 학업 성적은 떨어졌고, 르완다인을 멸시하는 이들과 자주 다투는 등 반항적인 모습을 보였다고 한다. 결국 그는 Ntare 학교에서 정학 처분을 받고 올드 캄팔라 중등학교에서 학업을 마쳤다.

학업을 마친 후, 카가메는 1977년과 1978년 두 차례 르완다를 방문했다. 그는 잘 알려진 투치족 망명자 신분 때문에 체포될 위험을 감수하고 조용히 활동했다. 특히 두 번째 방문 때는 의심을 피하기 위해 우간다가 아닌 자이르(현 콩고 민주 공화국)를 통해 입국했다. 이 기간 동안 그는 르완다 곳곳을 돌아다니며 정치 및 사회 상황을 파악하고 미래 활동에 도움이 될 인맥을 구축했다.

3. 군사 경력

벨기에령 르완다-우룬디 기타라마현 루한고 출신이다.[25] 소수파 투치족권력을 장악하고 있던 르완다에서 투치족과 벨기에 당국과의 관계가 악화되자, 1960년 다수파 후투족이 봉기를 일으켰다. 이 사건으로 카가메는 가족과 함께 우간다 서부 토로의 카훈게 난민 캠프에서 생활하며 교육을 받았다.[26]

1979년 요웨리 무세베니가 이끄는 국민저항운동/군(NRM/A)에 합류하여, 당시 우간다의 밀턴 오보테 독재정권 타도를 목표로 한 게릴라 투쟁에 참여했다. 1986년 무세베니가 티토 오켈로 정권을 축출하고 집권하자, 카가메는 국민저항군(승리 후 사실상 우간다군이 됨)의 정보부 장관으로 임명되어 한때 무세베니 대통령의 측근으로 활동했다. (''자세한 내용은 #우간다 내전 문단 참고'')

1990년 10월, 우간다에 거점을 둔 반정부 게릴라 조직 르완다 애국전선(RPF)이 르완다 북부를 공격하며 내전이 시작되었다. 당시 카가메는 미국 레븐워스 요새에 위치한 미국 육군 지휘참모대학교에서 군사 훈련을 받고 있었으나, 이후 귀국하여 RPF 최고 사령관직을 맡아 주베날 하비아리마나 정권과 맞서 싸웠다. (''자세한 내용은 #르완다 내전 문단 참고'') 프랑스, 벨기에 등의 지원을 받은 르완다 정부군과의 전투는 교착 상태에 빠졌고, 1993년 평화 협상이 타결되었다.

그러나 1994년 하비아리마나 대통령과 부룬디의 시프리앙 은타랴미라 대통령이 탑승한 항공기가 격추되어 사망하는 사건(하비아리마나와 은타랴미라 암살 사건)이 발생하자, 정부군 및 후투족 강경파 민병대 인테라함웨에 의한 투치족 대상의 르완다 집단학살이 시작되어 약 80만 명(추산)이 희생되었다. 이에 카가메가 이끄는 RPF는 투치족 보호를 명분으로 군사 작전을 재개하여 르완다 전국을 장악하고 집단학살을 종식시켰다. (''자세한 내용은 #르완다 집단학살 문단 참고'') 이후 후투족 출신 파스퇴르 비지무궁을 대통령으로 하는 신정부를 수립하였으며, 카가메는 부통령 겸 국방장관에 취임하여 강력한 군사적 영향력을 바탕으로 사실상 정권을 장악했다.

3. 1. 우간다 내전

1987년 미국 레이건 대통령 방문 중 요웨리 무세베니의 프로필 사진
카가메는 우간다 부시 전쟁에서 요웨리 무세베니(사진) 휘하에서 복무했다.


1978년, 프레드 루위게마는 우간다 서부로 돌아와 카가메와 재회했다. 당시 루위게마는 탄자니아에 기반을 두고 이디 아민 정권 전복을 목표로 하던 요웨리 무세베니의 반군 부대 국민구원전선(FRONASA)에 합류한 상태였다. 루위게마는 1979년 전쟁에 참전했고, 이 전쟁에서 FRONASA는 탄자니아군 및 다른 우간다 망명 세력과 연합하여 아민 정권을 무너뜨렸다. 아민 정권 붕괴 후, 카가메를 포함한 르완다 난민들은 과도 정부의 일원이 된 무세베니에게 충성을 맹세했다. 카가메는 이후 미국 육군 사령부 및 참모 대학이 있는 캔자스주 포트 리븐워스에서 훈련을 받았다.

1980년 우간다 총선에서 전 대통령 밀턴 오보테가 승리하자, 무세베니는 선거 결과에 이의를 제기하며 추종자들과 함께 새 정부 참여를 거부하고 무장 투쟁 준비에 들어갔다. 1981년, 무세베니는 반군 조직인 인민저항군(PRA)을 결성했으며, 카가메는 루위게마와 함께 38명의 우간다인들과 더불어 창설 멤버로 참여했다. PRA의 목표는 오보테 정부를 전복하는 것이었고, 이는 우간다 부시 전쟁의 시작이었다. 카가메는 1981년 2월 PRA의 첫 군사 작전이었던 카밤바 전투에도 참여했다.

카가메와 루위게마가 PRA에 합류한 주된 동기 중 하나는 오보테 정권 하에서 박해받던 르완다 난민들의 상황을 개선하는 것이었다. 또한, 그들은 다른 투치족 난민들과 함께 언젠가 르완다로 돌아가 후투족 중심의 르완다군에 맞서 싸울 수 있도록 군사적 경험을 쌓으려는 장기적인 목표를 가지고 있었다. PRA는 1981년 6월 다른 반군 단체들과 통합하여 국가저항군(NRA)으로 확대되었다. NRA 내에서 카가메는 정보 수집 분야를 전문적으로 담당하며 무세베니의 신임을 얻고 측근으로 부상했다.

루웨로 삼각지대를 근거지로 삼은 NRA는 5년 동안 우간다 정부군과 게릴라전을 벌였다. 오보테가 1985년 쿠데타로 축출된 이후에도 NRA는 전투를 계속했고, 마침내 1986년 캄팔라를 점령하여 새로운 정부를 수립했다. 당시 NRA 병력 약 1만 4천 명 중에는 500명의 르완다인도 포함되어 있었다. 무세베니가 대통령으로 취임한 후, 그는 카가메와 루위게마를 새롭게 창설된 우간다 인민방위군(UPDF)의 고위 장교로 임명했다. 특히 카가메는 군 정보국장이라는 중요한 직책을 맡게 되었다.

군 복무와 병행하여 카가메와 루위게마는 우간다군 내부에 르완다 투치족 난민들로 구성된 비밀 네트워크를 구축하기 시작했는데, 이는 장차 르완다 침공을 위한 핵심 기반으로 활용될 예정이었다. 그러나 1989년, 르완다의 하비아리마나 대통령과 우간다군 내부의 일부 인사들이 외국인 난민 출신인 카가메와 루위게마가 고위직에 임명된 것에 대해 무세베니 대통령에게 비판적인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이러한 압박 속에서 무세베니는 카가메와 루위게마를 다른 보직으로 강등시켰다. 비록 실질적인 영향력은 유지했지만, 이 조치는 카가메와 루위게마로 하여금 르완다 침공 계획을 더욱 서두르게 만드는 계기가 되었다. 그들은 르완다 애국전선(RPF)에 합류했는데, 이 조직은 1979년부터 여러 이름으로 활동해 온 르완다 난민들의 정치 및 군사 조직이었다. 루위게마가 RPF의 지도자가 되었고, 카가메와 함께 우간다군에 복무하면서 르완다 침공 계획을 구체화해 나갔다.

3. 2. 르완다 내전

비룽가산맥, 1990년부터 1991년까지 카가메의 RPF 기지


1990년 10월, 프레드 르위제마가 이끄는 4,000명 이상의 RPF 반군은[14] 카기툼바 국경 초소를 통해 르완다로 진입하여 남쪽으로 60km 떨어진 가비로 마을까지 진격했다.[15] 당시 카가메는 미국 캔자스주 포트 레번워스에 있는 미국 육군지휘참모대학교에서 유학 중이었기 때문에 이 초기 공격에는 참여하지 않았다. 공격 이틀째, 르위제마는 머리에 총을 맞고 사망했는데,[16] 그의 사망 경위에 대해서는 유탄에 맞았다는 르완다 정부의 공식 발표[17]와 다른 주장들이 있어 논란의 여지가 있다.[18]

카가메는 아프리카로 돌아와 2,000명 미만으로 줄어든 RPF 군대의 지휘를 맡았다.[19] 그는 병력을 이끌고 우간다를 거쳐 서쪽의 험준한 고지대인 비룽가산맥으로 이동하여 지형적 이점을 활용했다.[20] 이곳에서 카가메는 군대를 재정비하고 해외 투치족 사회로부터 자금을 지원받고 병력을 모집했다.[21] 1991년 1월, 카가메는 북부 도시 루헹게리를 기습 공격하며 전투를 재개했다. RPF는 도시를 하루 동안 점령한 뒤 다시 산악 지역으로 후퇴했다.[22]

이후 1년간 RPF는 기습 후 빠지는 방식의 게릴라전을 펼치며 일부 국경 지역을 장악했지만, 르완다 정부군을 상대로 큰 성과를 거두지는 못했다. 이 과정에서 전투 지역의 약 30만 명의 후투족 주민들이 집을 떠나 피난했다.[23] 일부에서는 RPF가 후투족 농민들의 지지를 얻지 못했다고 평가했지만,[24] RPF의 지뢰 매설이나 민간인 대상 공격으로 인해 피난이 불가피했다는 목격자 증언도 있다. RPF의 전쟁 범죄 가능성을 시사하는 다른 증거들도 제시되었다.[25]

1992년 6월, 키갈리에 여러 정당이 참여하는 연립 정부가 구성되자 카가메는 휴전을 선언하고 탄자니아아루샤에서 르완다 정부와 협상을 시작했다.[26] 그러나 1993년 초, 후투족 극단주의 세력이 투치족을 겨냥한 대규모 폭력 사태를 조직적으로 일으키자,[27] 카가메는 평화 회담을 중단하고 대규모 공세를 감행하여 북부 지역의 넓은 영토를 장악하는 것으로 대응했다.[28]

1994년 4월 6일, 르완다 대통령 주베날 하비야리마나와 부룬디 대통령 시프리앵 нтарямира가 탑승한 비행기가 키갈리 공항 근처에서 격추되어 탑승자 전원이 사망하는 사건이 발생했다.[29][30] 이 사건의 배후는 아직 명확히 밝혀지지 않았다. 일각에서는 아루샤 협정 이행을 우려한 후투족 극단주의자들이 대량학살 계획의 일부로 벌인 쿠데타라는 주장이 제기되었으나,[31] 2006년 프랑스 판사 장-루이 브뤼기에르와 2008년 스페인 판사 페르난도 안드레우는[32] 카가메와 RPF에게 책임이 있다고 주장하기도 했다.[33][34] 하지만 이러한 주장은 카가메와 적대적인 인물들의 증언에 의존했다는 점에서 신뢰성에 의문이 제기되기도 한다.[35] 후투 극단주의자들이 이전부터 하비야리마나 살해 위협을 해왔고, 비행기 격추 직후 키갈리에 도로 차단선이 설치되고 살해가 시작되었다는 점은 격추가 계획된 대량학살의 시작이었음을 시사한다는 반론도 있다.[36]

하비야리마나 사망 직후, 테오네스트 바고소라 대령이 이끄는 군사위원회가 권력을 장악했다.[37] 이들의 지휘 아래 후투족 민병대인 인테라함웨와 대통령 경호대는 반대파 정치인들과 저명한 투치족 인사들을 살해하기 시작했으며,[38] 곧이어 온건 후투족을 포함한 전체 투치족을 대상으로 한 르완다 대량학살이 시작되었다.[39][40] 약 100일 동안 20만 6천 명에서 80만 명에 이르는 투치족과 온건 후투족이 살해된 것으로 추정된다.[41][42] 4월 7일, 카가메는 학살이 멈추지 않으면 내전을 재개할 것이라고 군사위원회와 유엔 르완다 지원단(UNAMIR)에 경고했다.[43]

다음 날, 르완다 정부군이 국회의사당을 공격했지만 주둔 중이던 RPF 부대는 이를 성공적으로 방어했다.[44] 카가메는 키갈리의 고립된 부대와 합류하기 위해 북쪽에서 세 방향으로 공격을 개시했다. 그는 임시 정부와의 대화를 거부하고, 키갈리 북동쪽 가비로와 주변 농촌 지역을 점령하며 남쪽으로 꾸준히 진격했다. 키갈리와 뷔욤바를 직접 공격하기보다는 도시를 포위하고 보급로를 차단하는 전략을 사용했다.

4월 내내 UNAMIR은 휴전을 중재하려 했으나, 카가메는 학살이 중단되지 않는 한 전투를 멈추지 않겠다는 입장을 고수했다. RPF는 탄자니아 국경 지역 전체를 확보하고 키갈리 남쪽 키붕고에서 서쪽으로 진격하기 시작했다. 키갈리와 루헹게리 주변을 제외하고는 거의 저항을 받지 않았다. 5월 16일에는 키갈리와 임시 정부의 거점인 기타라마 사이의 도로를 차단했고, 6월 13일에는 기타라마를 점령했다. 임시 정부는 북서쪽 끝의 기세니로 밀려났다. 카가메는 전쟁 수행과 동시에 대량학살 생존 투치족, 부룬디 난민 등을 포함한 대규모 병력 모집을 통해 군대를 확장했는데, 새로 모집된 병력은 초기 병력보다 훈련과 규율이 부족했다.

키갈리 포위를 완료한 카가메는 6월 후반부터 도시 점령 작전을 벌였다. 정부군이 수적으로나 무기 면에서 우세했지만, RPF는 꾸준히 영토를 확보하고 적진 후방의 민간인을 구출하는 작전도 수행했다. 당시 UNAMIR 사령관 로메오 달레르는 카가메가 정부군이 학살에 집중하는 상황과 사기 저하를 이용한 "심리전의 대가"였기에 이러한 성공이 가능했다고 평가했다. RPF는 마침내 7월 4일 키갈리에서 정부군을 격퇴했고, 7월 18일에는 기세니와 북서부 지역을 점령하여 임시 정부를 자이르(현 콩고 민주 공화국)로 몰아내고 대량학살을 종식시켰다. 1994년 7월 말, 카가메의 군대는 프랑스군이 투르쿠아 작전의 일환으로 점령한 남서부 지역을 제외한 르완다 전역을 장악했다.

그러나 대량학살 기간 동안 카가메와 RPF의 행동에 대해서는 논란이 있다. 달레르 사령관이나 벨기에 평화유지군 장교 뤼크 마르샬 등 서방 관측자들은 RPF가 인명 구조나 학살 저지보다는 권력 장악을 우선시했다고 비판했다. 또한 학자들은 RPF가 대량학살 기간과 그 이후 몇 달 동안 주로 후투족인 수만에서 수십만 명의 르완다 민간인을 살해했다고 보고 있다. 휴먼 라이츠 워치의 앨리슨 데스 포지는 RPF가 많은 생명을 구했지만, 학살 책임자로 간주되는 사람들을 집요하게 추적했으며, 군사적 승리와 학살 중단 과정에서 비전투원을 포함한 수천 명을 살해했다고 지적했다.

RPF의 인권 침해는 2000년 아프리카 통일 기구 보고서와 제라드 프루니에르의 저서에서도 기록되었다. 카가메는 인터뷰에서 살해 사건이 있었음을 인정하면서도, 통제 불능 상태의 일부 불량 군인들에 의해 저질러진 것이라고 해명했다. RPF의 살해 행위는 대량학살 종식 후에도 이어졌으며, 1995년 키베호 학살 사건으로 국제적인 주목을 받았다. 이 사건은 군인들이 부타레 주의 국내 실향민 캠프에 발포한 것으로, 호주 군인들은 최소 4,000명이 사망했다고 추산했고, 르완다 정부는 사망자 수를 338명으로 발표했다.

3. 3. 르완다 집단학살

1994년 4월 6일, 르완다 대통령 쥐베날 하브자리마나부룬디 대통령 시프리앵 은타랴미라 등이 탑승한 비행기가 키갈리 국제공항 근처에서 격추되어 탑승자 전원이 사망했다. 이 사건의 배후는 아직 명확히 밝혀지지 않았으나, 하브자리마나 정부 내 후투족 극단주의자들이 아루샤 협정 이행을 막기 위해 일으킨 쿠데타의 일부라는 주장과 폴 카가메가 이끄는 르완다 애국전선(RPF)이 혼란을 일으켜 정권 장악의 발판을 마련하려 했다는 주장이 대립하고 있다. 프랑스와 스페인 판사는 RPF의 소행이라고 주장했으나, 이후 후투 극단주의자들이 사전에 하브자리마나 살해 위협을 가했으며 비행기 격추 직후 학살이 시작되었다는 증거들이 제시되기도 했다.

하브자리마나 사망 직후, 테오네스트 바고소라 대령이 이끄는 군사위원회가 권력을 장악했다. 위원회의 지휘 아래 후투족 민병대인 인테라함웨와 대통령 경호대는 투치족과 온건파 후투족 정치인, 저명인사들을 살해하기 시작했으며, 곧 학살은 투치족 전체와 온건 후투족으로 확대되어 르완다 집단학살이 시작되었다. 약 100일 동안 20만 명에서 80만 명에 이르는 사람들이 학살된 것으로 추정된다. 4월 7일, 카가메는 군사위원회와 유엔 르완다 지원단(UNAMIR)에 학살이 중단되지 않으면 내전을 재개할 것이라고 경고했다.

다음 날, 르완다 정부군이 국회의사당을 공격했으나 RPF 부대는 이를 성공적으로 방어했다. 카가메는 키갈리에 고립된 부대와 합류하기 위해 북쪽에서 세 방향으로 공격을 개시했다. 임시 정부가 수립되었으나 카가메는 이를 바고소라의 꼭두각시 정권으로 간주하고 대화를 거부했다. RPF는 키갈리 북동쪽 가비로와 주변 농촌 지역을 점령하며 남쪽으로 꾸준히 진격했고, 키갈리를 직접 공격하는 대신 도시를 포위하고 보급로를 차단하는 전략을 사용했다.

UNAMIR의 휴전 시도는 번번이 무산되었는데, 카가메는 학살이 멈추지 않는 한 전투를 중단할 수 없다는 입장을 고수했다. 4월 말, RPF는 탄자니아 국경 지역 전체를 장악하고 키갈리 남쪽 키붕고에서 서쪽으로 진격하기 시작했다. 키갈리와 루헨게리 주변을 제외하면 정부군의 저항은 미미했다. 5월 16일, RPF는 키갈리와 임시 정부의 거점인 기타라마 사이의 도로를 차단했고, 6월 13일에는 기타라마를 점령했다. 임시 정부는 북서쪽 끝의 기세니로 밀려났다. 카가메는 전쟁 수행과 동시에 대규모 병력 모집을 통해 군사력을 확장했으며, 새로 모집된 병력에는 학살 생존 투치족과 부룬디 난민도 포함되었다.

6월 후반, 카가메는 키갈리 점령 작전을 개시했다. 정부군이 수적으로 우세했음에도 RPF는 꾸준히 영토를 확보했으며, 적진 후방의 민간인을 구출하는 작전도 수행했다. 당시 UNAMIR 사령관 로메오 달레르는 카가메가 정부군이 학살에 집중하느라 전선에 소홀한 점과 정부군의 사기 저하를 이용한 "심리전의 귀재"였다고 평가했다. RPF는 마침내 7월 4일 키갈리를 점령했고, 7월 18일에는 기세니와 북서부 지역을 장악하여 임시 정부를 자이르(현 콩고 민주 공화국)로 몰아내고 집단학살을 종식시켰다. 7월 말, RPF는 프랑스군이 점령한 남서부 지역(투르쿠아 작전)을 제외한 르완다 전역을 통제하게 되었다.

그러나 집단학살 기간 동안 카가메와 RPF의 행동에 대해서는 논란이 있다. 달레르를 비롯한 서구 관찰자들은 RPF가 인명 구조나 학살 중단보다는 권력 장악을 우선시했다고 비판했다. 또한 RPF가 학살 기간과 그 이후 수개월 동안 주로 후투족 민간인을 대상으로 보복 살해를 자행했다는 주장도 제기되며, 사망자 수는 수만에서 수십만 명에 이를 것으로 추정된다. 휴먼 라이츠 워치의 앨리슨 데스 포지는 RPF가 많은 생명을 구했지만, 학살 책임자로 간주되는 사람들을 끈질기게 추적했으며 군사 작전 과정에서 비전투원을 포함한 수천 명을 살해했다고 지적했다. 카가메 자신도 일부 살인이 있었음을 인정했으나, 통제 불가능했던 일부 불량 군인들의 소행이라고 주장했다. RPF의 인권 침해는 1995년 키베호 학살 사건으로 국제적인 주목을 받기도 했다. 당시 RPF 군인들이 부타레 주의 국내 실향민 캠프에 발포하여 최소 4,000명(UNAMIR 추산) 또는 338명(르완다 정부 발표)이 사망한 것으로 알려졌다.

4. 부통령 겸 국방장관 (1994-2000)

1994년 7월, 르완다 애국전선(RPF)이 군사적 승리를 거두고 르완다 대량학살을 종식시키면서, 키갈리에 새로운 과도 정부가 수립되었다. 이 정부는 아루샤 협정을 기반으로 구성되었으나, 주베날 하비아리마나 전 대통령의 정당인 MRND는 불법화되었고 RPF가 그 자리를 차지했다. RPF의 군사 조직은 르완다 애국군(RPA)으로 개명되어 국가 군대가 되었다.

후투족 출신으로 망명 중 RPF에 합류했던 파스퇴르 비지뭉구가 대통령으로 임명되었고, 폴 카가메는 르완다 부통령 겸 국방장관직을 맡았다. 비록 비지뭉구가 대통령이었지만, 군 최고사령관이었던 카가메가 군사력을 바탕으로 사실상 국가의 통치자 역할을 수행했다. 도이체 벨레는 "비지뭉구는 일반적으로 카가메를 위한 자리 채우기로 여겨졌다"고 평가하기도 했다.

가죽 의자에 앉은 카가메와 페리의 항공 촬영 사진. 큰 마이크와 배경에 다른 군인이 보임
폴 카가메 부통령과 미합중국 국방장관 윌리엄 J. 페리, 1994년 7월


르완다 대량학살로 인해 국가의 기반 시설과 경제는 심각하게 파괴되었으며, 인구의 약 40%가 사망하거나 난민이 되었다. 카가메는 군대를 통제하며 정부의 권력 유지를 책임졌고, 다른 정부 관리들은 국가 재건 작업에 착수했다. 비정부기구(NGO)들이 활동을 재개했으며, 국제사회는 인도적 지원을 제공했다. 카가메는 정부가 투치족 중심으로 보이지 않도록 노력하며, 시민 신분증에서 민족 구분을 삭제하도록 지시하고 후투족, 투치족, 트와족 간의 민족적 차이를 강조하지 않는 정책을 추진했다.

그러나 이러한 통합 노력에도 불구하고 1995년 정부 내 갈등이 표면화되었다. 지속적인 폭력 사태와 RPF 투치족 중심의 지방 정부 관리 임명 문제 등으로 인해 카가메와 파스탱 트와기라뭉구 총리, 세스 센다숑가 내무장관 등 후투족 출신 고위 각료들 사이에 심각한 불화가 발생했다. 결국 트와기라뭉구는 8월에 사임했고, 카가메는 다음 날 센다숑가를 포함한 다른 세 명의 장관을 해임했다. 비지뭉구는 대통령직을 유지했지만, 정부 내 권력은 카가메에게 충성하는 RPF 투치족 중심으로 더욱 공고해졌다. 센다숑가는 정부를 떠난 후 RPF 병사들의 불법 살인 처벌 필요성을 주장하다 케냐로 망명했으며, 1996년 암살 시도에서 살아남았으나 1998년 5월 나이로비에서 암살당했다. 많은 관측통들은 카가메가 이 암살을 지시했다고 의심하지만, RPF는 관련성을 부인했다.

또한 1995년에는 키베호 학살이 발생하여 국제적인 비난을 받았다. RPA 군인들이 부타레 주의 국내 실향민(IDP) 캠프에 발포한 사건으로, UNAMIR 소속 호주군은 최소 4,000명이 사망했다고 추산했으나, 르완다 정부는 공식적으로 사망자 수를 338명이라고 발표했다.

1990년대 후반으로 접어들면서 카가메와 비지뭉구 대통령 간의 갈등은 더욱 심화되었다. 카가메는 비지뭉구를 부패와 경영 부실 혐의로 공개적으로 비난했고, 비지뭉구는 자신이 내각 임명에 대한 실질적인 권한이 없으며 과도 국회가 카가메의 의도대로 움직이는 꼭두각시에 불과하다고 불만을 토로했다.

결국 비지뭉구는 2000년 3월 대통령직에서 사임했다. 많은 역사학자들은 비지뭉구가 국회를 비난하고 RPF 내 분열을 조장하려다 카가메에 의해 강제로 사임당했다고 분석한다. 하지만 카가메 자신은 이 상황에 대해 놀랐다고 주장했다. 비지뭉구의 사임 후, 르완다 대법원은 후임 대통령이 선출될 때까지 카가메가 대통령 권한대행을 맡아야 한다고 결정했다. 1994년부터 실질적인 권력을 행사해왔던 카가메는 국경 지역의 반군 위협이 감소하고 비지뭉구가 물러나자 직접 대통령직을 맡기로 결심하게 된다.

5. 대통령직 (2000-현재)

1994년 르완다 대학살 이후 실질적인 권력을 행사해 온 폴 카가메는 2000년 4월 22일 정식으로 대통령에 취임했다. 그는 1994년부터 부통령 겸 국방장관으로서 군사, 외교, 국가 안보 분야를 장악하고 있었으나, 2000년 당시 대통령이었던 파스퇴르 비지뭉구가 사임하면서 직접 대통령직을 맡게 되었다. 비지뭉구는 카가메가 르완다 애국전선(RPF)을 통해 국정을 좌우한다고 비판하다가 결국 사임했는데, 많은 분석가들은 카가메가 비지뭉구의 사임을 압박했다고 본다.[39] 비지뭉구 사임 후 과도 헌법에 따라 정부 장관과 과도 국회는 카가메를 대통령으로 선출했다.

카가메는 대통령 취임 이후 권력 기반을 강화하는 데 주력했다. 비지뭉구는 2001년 새로운 정당 창당을 시도했으나 카가메 정부에 의해 금지되었고, 이듬해 부패 및 인종 폭력 선동 혐의로 체포되어 투옥되었다.[39] 국제 인권 단체들은 이 사건이 정치적 동기에 의한 것이라고 비판했다. 또한 일부 후투족 정치인들이 정부를 떠나면서 내각은 카가메에게 충성하는 인사들로 채워졌다.

2003년 새 헌법이 제정된 후 치러진 첫 대통령 선거에서 카가메는 95%가 넘는 압도적인 득표율로 당선되었다. 이후 2010년, 2017년, 2024년 대선에서도 90% 이상의 득표율로 연이어 승리하며 장기 집권 체제를 구축했다.[33][35] 특히 2015년에는 국민투표를 통해 헌법을 개정하여 자신이 2034년까지 대통령직을 유지할 수 있도록 길을 열었다.[27] 이러한 선거 과정과 결과에 대해 야당 및 국제 사회는 경쟁 후보 탄압, 부정 선거 의혹 등을 제기하며 비판해왔다. 특히 2024년 대선에서는 카가메를 비판하는 후보 8명이 입후보 단계에서 실격 처리되기도 했다.[35]

카가메의 통치 하에 르완다는 르완다 대학살의 상처를 딛고 정치적 안정과 경제 성장을 이루었다는 평가를 받는다. 적극적인 외자 유치와 개발 정책을 통해 "아프리카의 싱가포르",[31] "아프리카의 기적"[32]이라 불릴 정도의 경제 발전을 이룩했으며, 2018년에는 아프리카 연합 의장을 맡아 아프리카 대륙 자유무역협정 설립을 주도하는 등 국제 사회에서의 위상도 높아졌다.[34]

그러나 이러한 성과 이면에는 강력한 통제와 권위주의적 통치 방식에 대한 비판이 꾸준히 제기된다. 반체제 인사들에 대한 탄압, 언론 및 표현의 자유 제한, 인권 문제 등은 카가메 정권의 어두운 단면으로 지적되며, 그를 독재자로 규정하는 시각도 존재한다.[36]

5. 1. 대통령 취임

1994년 르완다 대학살 이후 르완다 애국전선(RPF)이 전국을 장악했을 때, 후투족인 파스퇴르 비지무궁대통령으로 하는 신정부가 발족되었다. 이때 폴 카가메는 부통령국방장관에 취임하여 사실상 정권을 장악했다. 1998년 2월, 카가메는 공식적으로 RPF 대표가 되었다. 2000년 비지무궁 대통령이 사임함에 따라, 부통령이었던 카가메는 같은 해 3월 24일 잠정 정부 대통령에 취임했으며, 4월 22일 정식 대통령으로 취임했다.

5. 2. 신헌법

1994년부터 2003년까지 르완다는 쥐베날 하브자리마나 대통령 시절의 1991년 헌법, 아루샤 협정, 그리고 과도 정부가 도입한 추가 의정서를 통합한 문서에 의해 통치되었다. 아루샤 협정에 따라, 카가메는 새로운 영구 헌법 초안 작성을 위해 헌법 위원회를 설립했다. 이 헌법은 공평한 권력 분점과 민주주의 등 기본적인 원칙들을 준수해야 했다.

위원회는 헌법 초안이 르완다의 특수한 상황에 맞게 "자체적으로 개발"되도록 했으며, 전 국민의 의견을 반영하기 위해 노력했다. 이를 위해 전국의 시민 단체에 설문지를 배포했고, 재정 지원을 제외한 국제 사회의 도움 제안은 거절했다.

헌법 초안은 2003년에 발표되어 의회의 승인을 받았고, 같은 해 5월 국민투표에 부쳐졌다. 정부는 국민투표 참여를 적극 독려했으며, 유권자의 95%가 투표에 등록했고 투표 당일 투표율은 87%에 달했다. 헌법은 투표자의 93% 찬성이라는 압도적인 지지로 통과되었다. 새 헌법은 양원제 의회, 임기 7년의 선출직 대통령, 다당제 정치를 골자로 했다.

또한, 헌법은 후투족이나 투치족 어느 한쪽이 정치 권력을 독점하는 것을 막기 위한 조항을 포함했다. 제54조는 "정치 조직은 인종, 민족, 부족, 씨족, 지역, 성별, 종교 또는 차별을 야기할 수 있는 다른 어떤 분열 요인에 근거해서는 안 된다"고 명시했다. 그러나 국제 인권 단체인 휴먼 라이츠 워치는 이 조항과 이후 제정된 법률들이 사실상 르완다를 일당 독재 국가로 만들었다고 비판했다. 이들은 정부가 "또 다른 대량 학살을 막는다는 명분 아래 가장 기본적인 형태의 반대 의견조차 용납하지 않는 극심한 편협함"을 보인다고 지적했다.

5. 3. 선거 및 국민투표

2000년 파스퇴르 비지무궁 대통령 사임 후, 르완다 애국전선(RPF)은 카가메를 대통령 후보로 지명했고, 정부 장관과 과도 국민의회는 간접 선거를 통해 카가메를 대통령으로 선출했다. 카가메는 2000년 4월 정식으로 대통령에 취임했다.

카가메는 대통령 취임 이후 2003년, 2010년, 2017년, 2024년 네 차례의 대통령 선거에 출마하여 매번 90% 이상의 압도적인 득표율로 당선되었다.

'''주요 선거 및 국민투표 결과'''

연도종류카가메 득표율주요 내용 및 논란
2003년대통령 선거95.1%새 헌법 채택 후 첫 대선. 주요 야당 MDR 해산 논란 속 치러짐. 경쟁자 파스퇴르 트와기라문구는 결과 불복 후 망명. 유럽 연합(EU) 관찰단은 야당 지지자 협박 및 부정행위 우려 제기.
2010년대통령 선거93.08%
2010년 카가메
유력 경쟁자 빅토르 잉가비레 체포 및 출마 금지. 국제앰네스티 등은 이를 선거 전 탄압으로 비판. 야당 및 인권 단체는 탄압, 살해, 신뢰할 수 있는 경쟁 부족 문제를 제기했으나 카가메는 부인.
2015년국민투표98% (찬성)카가메의 3선 및 추가 임기 수행을 가능하게 하는 헌법 개정안 통과. 르완다 민주 녹색당 등 반대파는 선거 운동 방해 주장. 휴먼 라이츠 워치, EU, 미국 등은 자유롭고 공정한 투표 환경 부족 및 민주주의 후퇴 가능성에 대해 비판.
2017년대통령 선거98.79%
개정 헌법 하 첫 대선. 유력 비판 후보 디안 르위가라 출마 금지. 이전 선거들과 마찬가지로 부정행위 및 위협에 대한 비판 제기됨.
2024년대통령 선거99.18%카가메를 비판하는 후보 8명이 입후보 신청 단계에서 실격 처리된 가운데 실시되어 4선 달성.[35]



국제 선거 감시 기관, 인권 단체, 언론인들은 카가메 집권 이후 치러진 선거들이 전반적으로 자유롭고 공정하지 못하며, 르완다 정부가 카가메의 승리를 보장하기 위해 개입하고 있다고 비판한다. 중앙아프리카인권감시국의 아이다 소여 국장은 정부에 비판적인 목소리를 내는 이들이 체포, 강제 실종, 살해 위협을 받는 현실을 지적하며 시민 사회와 언론의 자유가 억압받고 있다고 주장했다. 휴먼 라이츠 워치2017년 대선 당시 유권자에게 특정 후보 투표 강요, 부재자 투표 조작 등 선거 관리들의 부정행위 증거를 공개하기도 했다. 미국 국무부 역시 투표 과정의 부정행위와 개표 과정의 투명성 부족에 대한 우려를 표명한 바 있다. 이러한 비판에도 불구하고 카가메와 르완다 정부는 선거가 공정하게 치러졌으며 외부의 비판은 근거 없거나 정치적 동기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반박해왔다.

5. 4. 국내 정책



르완다 대량학살 기간 동안 국가의 기반 시설과 경제는 심각한 피해를 보았다. 많은 건물이 파괴되었고, 이전 정권은 도주하며 통화와 이동 가능한 자산을 모두 가져갔다. 인적 자원 역시 크게 고갈되어 인구의 40% 이상이 사망하거나 국외로 피난했다. 생존자 다수는 정신적 충격을 겪었으며, 친척을 잃거나 학살을 목격하거나 가담한 경우가 많았다. 당시 부통령이자 국방장관이었던 카가메는 국가 군대를 통제하고 정부의 권력을 유지하는 데 주력했으며, 다른 관리들은 국가 재건 작업에 착수했다.

비정부기구(NGO)들이 르완다로 복귀하기 시작했고, 국제사회는 1994년 7월부터 12월까지 15억달러의 인도적 지원을 제공했으나, 이는 실제적인 경제적 필요와는 거리가 멀다는 지적도 있었다. 카가메는 정부가 포용적이며 투치족 중심이 아니라는 인상을 주려 노력했다. 그는 시민 신분증에서 민족 구분을 삭제하도록 지시했고, 정부는 후투족, 투치족, 트와족 간의 차이를 강조하지 않는 정책을 추진했다.

그러나 통합 정부는 1995년 내부 갈등으로 인해 부분적으로 붕괴되었다. 지속적인 폭력 사태와 지방 정부 관리직에 르완다 애국전선(RPF) 소속 투치족이 주로 임명되면서, 카가메와 파스탱 트와기라문구 총리, 세스 센다숑가 내무장관 등 후투족 출신 고위 관리들 사이에 심각한 의견 충돌이 발생했다. 트와기라문구는 8월에 사임했고, 카가메는 다음 날 센다숑가를 포함한 세 명의 장관을 해임했다. 파스퇴르 비짐운구는 대통령직을 유지했지만, 새 정부는 주로 카가메에게 충성하는 RPF 투치족 인사들로 채워졌다.

정부를 떠난 트와기라문구와 센다숑가는 해외에서 새로운 야당 결성을 모색했다. 특히 RPF 병사들의 불법 살인에 대한 처벌을 주장했던 센다숑가는 케냐로 망명했다. 그는 1996년 암살 시도에서 살아남았으나, 1998년 5월 나이로비에서 유엔 차량을 타고 이동하던 중 공격을 받아 암살되었다. 많은 관측통들은 이 암살의 배후에 카가메가 있다고 보았으나, RPF는 관련성을 부인했다.

1994년부터 2003년까지 르완다는 하비아리마나 정권의 1991년 헌법, 아루샤 협정, 그리고 과도 정부가 도입한 추가 의정서들을 혼합한 문서들에 의해 통치되었다. 아루샤 협정에 따라 카가메는 새로운 영구 헌법 초안 작성을 위한 헌법 위원회를 설립했다. 위원회는 공정한 권력 분배와 민주주의 원칙을 준수하며, 르완다의 특수한 상황에 맞는 "토착적인" 헌법을 만드는 것을 목표로 삼았다. 이를 위해 전국 시민 단체에 설문지를 배포하고, 재정 지원을 제외한 국제 사회의 개입 제안은 거절했다.

헌법 초안은 2003년에 완성되어 의회 승인을 거쳐 같은 해 5월 국민투표에 부쳐졌다. 정부의 광범위한 홍보 결과, 유권자의 95%가 등록했고 투표율은 87%에 달했다. 헌법은 93%의 압도적인 찬성으로 채택되었다. 새 헌법은 양원제 의회, 임기 7년의 선출직 대통령, 다당제를 규정했다.

또한 헌법은 특정 민족 집단(후투족 또는 투치족)의 정치 권력 독점을 방지하려는 조항을 포함했다. 헌법 54조는 "정치 조직은 인종, 민족, 부족, 씨족, 지역, 성별, 종교 또는 기타 분열을 야기할 수 있는 차별에 기반하는 것을 금지한다"고 명시했다. 그러나 휴먼 라이츠 워치와 같은 인권 단체들은 이 조항과 후속 법률들이 "또 다른 대량 학살을 방지한다는 명분 아래 정부가 가장 기본적인 반대 의견조차 용납하지 않게 만들어" 르완다를 사실상 일당 국가로 만들었다고 비판했다.

폴 카가메의 통치는 권위주의적이라는 비판을 자주 받으며, 여러 인권 단체들은 그의 통치 방식을 정치적 탄압으로 규정하고 있다. 외국 관찰자들의 평가는 엇갈리지만, 그가 대통령으로서 국가 발전을 최우선 과제로 삼아 여러 프로그램을 추진한 결과, 의료, 교육, 경제 성장 등 주요 지표에서 상당한 발전을 이룬 것은 사실이다.

5. 4. 1. 경제

2018년 키갈리의 지평선


르완다의 경제는 카가메 대통령 재임 기간 동안 빠르게 성장하여, 1인당 국내총생산(구매력 평가 기준)은 2000년 631USD에서 2020년 2214USD로 크게 증가했다. 2000년부터 2020년까지 연평균 성장률은 7%에 달했다. 카가메의 경제 정책은 경제 자유화, 기업에 대한 규제 완화, 농업 중심 경제에서 지식경제로의 전환을 핵심으로 한다. 카가메는 르완다가 1960년대 이후 싱가포르의 경제 발전 모델을 따를 수 있다고 보았다. 그는 국가 발전 계획인 '비전 2050'을 통해 르완다가 2035년까지 중상위 소득 국가, 2050년까지 고소득 국가가 될 수 있다는 목표를 설정했다.[40]

카가메의 경제 정책은 빌 클린턴 전 미국 대통령이나 스타벅스 회장 하워드 슐츠와 같은 많은 외국 기부자 및 투자자들로부터 긍정적인 평가를 받았다. 또한 효과적인 제도 운영과 낮은 부패 수준으로 국제적인 인정을 받기도 했다.

그러나 르완다는 경제 성장의 중요한 부분으로 이웃 나라인 콩고 민주 공화국의 광물을 불법적으로 착취했다는 비판을 받는다. 정치경제학 연구원 스테판 메리세스는 1999년 르완다 GDP의 6.1%가 콩고 민주 공화국에서의 불법 자원 채굴에서 비롯된 것으로 추정했다.[37] 2013년 기준으로 외국 원조가 GDP의 20% 이상, 국가 예산의 거의 절반을 차지할 정도로 의존도가 높았다. 경제 성장의 혜택이 수도 키갈리의 엘리트 계층에게 집중되고 농촌 지역은 소외되는 불균형 문제도 지적된다. 정부는 공식적으로 민영화 정책을 추진했지만, 실제로는 국가 및 여당과 밀접한 관계를 맺은 기업들을 통해 경제에 대한 국가 통제력을 강화했다는 비판도 있다.

르완다는 천연자원이 부족하여 경제의 상당 부분을 자급 농업에 의존하며, 노동 인구의 약 90%가 농업에 종사한다. 하지만 카가메 집권 하에서 서비스 부문이 크게 성장하여 2010년에는 GDP의 43.6%를 차지하며 최대 경제 부문으로 부상했다. 주요 서비스 분야로는 은행 및 금융, 도소매업, 호텔 및 레스토랑, 운송, 통신, 보험, 부동산, 비즈니스 서비스, 교육, 보건 등이 있다.[38] 정보통신기술(ICT)은 '비전 2020'의 핵심 우선 과제였으며, 르완다를 "아프리카의 ICT 허브"로 만들겠다는 목표 아래 정부는 광대역 서비스 제공과 전자상거래 활성화를 위해 2300km에 달하는 광섬유 통신망을 구축했다. 관광업 역시 빠르게 성장하는 경제 분야 중 하나로, 2011년에는 르완다의 가장 큰 외화 수입원이 되었다.

카가메는 1990년대 후반부터 국가 발전을 위한 계획을 세우기 시작했다. 전국적인 협의 과정을 거치고 중국, 싱가포르, 태국 등 신흥국 전문가들의 조언을 구해 '비전 2020'이라는 국가 발전 프로그램을 시작했다. 이 프로그램은 르완다 국민을 통합하고 국가를 최빈국에서 중간 소득 국가로 발전시키는 것을 주요 목표로 삼았으며, 재건, 인프라 및 교통 개선, 좋은 통치, 농업 생산성 향상, 민간 부문 개발, 보건 및 교육 개선 등을 세부 목표로 설정했다. 2011년 재정경제계획부 (MINECOFIN) 보고서에 따르면, 44개 목표 중 66%가 순조롭게 진행 중이었으나 인구, 빈곤, 환경 관련 목표는 뒤처지고 있었다. 2012년 검토에서는 원래 목표의 26%가 이미 달성되었으며, 1인당 GDP 목표를 900USD에서 1240USD로 상향 조정하기도 했다.[7][8] 한편, 벨기에 학자들의 독립적인 검토에서는 교육 및 보건 분야의 발전과 우호적인 사업 환경 조성을 긍정적으로 평가하면서도,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최대 성장"을 추구하는 정책이 부유층에게는 혜택을 주지만 농촌 빈곤층에게는 거의 이익이 돌아가지 않는 불균형을 심화시킨다는 우려를 제기했다.

2020년 12월 비전 2020 프로그램이 완료된 후, 카가메는 '비전 2050'을 발표하며 "비전 2020이 생존과 존엄 회복에 관한 것이었다면, 비전 2050은 우리가 할 수 있고 자격이 있기에 선택하는 미래에 관한 것"이라고 말했다.[9] 비전 2050은 경제 성장과 번영, 그리고 국민의 높은 삶의 질과 생활 수준이라는 두 가지 주요 목표를 중심으로 하며, 2035년까지 중상위 소득 국가, 2050년까지 고소득 국가가 되겠다는 목표를 구체화했다.[9][10]

5. 4. 2. 교육 및 건강

카가메는 르완다 청소년 교육을 최우선 과제로 삼아 연간 예산의 17%를 교육 부문에 할당했다. 르완다 정부는 국영 학교에서 초등학교 6년과 중등학교 6년, 총 12년 동안 무상 교육을 제공한다. 마지막 3년의 무상 교육은 2010년 카가메의 재선 운동 공약에 따라 2012년에 도입되었다. 카가메 정부 하에서 고등 교육 부문은 개선되었다는 평가를 받는다. 대학 수는 1994년 1개에서 2010년 29개로 증가했고, 고등 교육 총등록률은 2008년 4%에서 2011년 7%로 증가했다. 1994년부터 2009년까지 중등 교육은 프랑스어 또는 영어로 제공되었으나, 2009년부터 동아프리카 공동체영연방과의 관계 강화로 인해 초등학교 4학년부터 공립학교의 유일한 교육 언어가 영어가 되었다. 15세 이상 인구의 문해율은 1978년 38%, 1991년 58%에서 2009년 71%로 증가했다.

르완다의 건강 프로필은 말라리아, 폐렴, HIV/AIDS 등 전염병이 주를 이룬다. 지난 10년간 유병률과 사망률은 급격히 감소했지만, 특정 약품 부족은 여전히 질병 관리에 어려움을 주고 있다. 카가메 정부는 비전 2020의 우선 순위 중 하나로 이러한 상황 개선을 추진하고 있다. 정부는 건강 예산을 1996년 국가 지출의 3.2%에서 2008년 9.7%로 증액했다. 또한 키갈리 보건 연구소(KHI)를 포함한 교육 기관을 설립했고, 2008년에는 모든 개인에게 건강 보험을 의무화하는 법률을 제정하여 2010년까지 인구의 90% 이상이 건강 보험에 가입했다. 이러한 정책은 카가메 재임 기간 동안 의료 서비스의 질적 향상과 주요 지표 개선에 기여했다. 2010년에는 1,000명당 5세 미만 영아 사망자 수가 91명으로, 1990년의 163명보다 감소했다. 산모와 신생아 파상풍이 근절되고 말라리아 이환율, 사망률, 특정 치사율이 급격히 감소하는 등 일부 질병 유병률이 줄어들고 있다. 자격을 갖춘 의료 인력 부족에 대응하여 2011년 르완다 정부는 의료 전문가 양성을 위한 8년간 1.518억달러 규모의 계획을 시작했다.

카가메 대통령은 코로나19 범유행에 대한 르완다의 대응으로 칭찬을 받았다. 르완다는 상대적으로 부족한 의료 시스템에도 불구하고 세계적으로 낮은 감염률과 사망률을 기록하며 성공 사례로 평가받았다. 당시 르완다는 아프리카에서 비필수 여행 목적으로 솅겐 지역 입국이 허용된 유일한 국가였다. 그러나 이러한 대응 과정에서 시민의 자유와 개인의 자유를 억압했다는 비판도 제기되었다. 2022년 4월까지 르완다는 아프리카에서 인구의 60% 이상이 코로나19 백신 접종을 완료한 소수의 국가 중 하나였다.[12]

5. 5. 외교 정책

2012년 11월 북키부의 고마 주도 점령 당시 르완다의 지원을 받았다고 널리 여겨지는 3월 23일 운동(M23) 반정부 반군


2019년 10월 소치에서 열린 러시아-아프리카 정상회의에서 카가메, 콩고 민주 공화국 대통령 펠릭스 치세케디 및 기타 아프리카 지도자들


2024년 4월 7일 이스라엘의 이삭 헤르초그 대통령과 함께 있는 카가메


2018년 카가메와 인도의 나렌드라 모디 총리


카가메 집권 이후 르완다의 외교 정책은 주변국과의 복잡한 관계, 서방 국가와의 협력 및 긴장, 그리고 국제 사회에서의 역할 확대 등으로 특징지어진다. 특히 콩고 민주 공화국(DRC)과의 관계는 르완다 외교의 핵심적인 부분을 차지해왔다.

카가메가 대통령으로 취임한 2000년 당시에도 제2차 콩고 전쟁은 계속되고 있었으며, 르완다는 콩고 민주주의를 위한 집회-고마(RCD-Goma) 등 콩고 반군을 지원하며 전쟁에 깊숙이 개입했다.[2][3] 루사카 휴전 협정 체결 이후에도 르완다군은 콩고 동부에 주둔하며 자원을 불법적으로 착취한다는 유엔 전문가 패널의 비판을 받았다.[2][3] 조셉 카빌라가 콩고 대통령으로 취임한 후 평화 협정이 체결되어 르완다군은 공식적으로 철수했지만, 양국 관계는 르완다 해방 민주 세력(FDLR) 문제와 르완다의 지속적인 콩고 내정 개입 의혹으로 인해 긴장 상태를 유지했다.[2][3] 카가메 정부는 로랑 늅쿤다가 이끄는 반란과 M23 반란 등 콩고 동부의 주요 반란을 지원했다는 비난을 받았으며, 2012년 유출된 유엔 보고서는 당시 르완다 국방장관이었던 제임스 카바레베를 M23의 실질적인 지휘관으로 지목하기도 했다.[2][3] 펠릭스 치세케디가 콩고 대통령으로 당선된 이후 양국 관계 개선의 움직임이 있었으나, 르완다군의 콩고 동부 활동에 대한 의혹은 계속 제기되고 있다.[2][3]

카가메는 어린 시절을 보낸 우간다와 초기에는 긴밀한 관계를 유지했으나, 제2차 콩고 전쟁 중 양국 군대가 키산가니에서 충돌하는 등 갈등을 겪기도 했다. 이후 관계는 회복되었으나 2019년 다시 긴장이 고조되어 국경이 폐쇄되었다가 2022년에 재개방되었다.[2][3] 르완다는 2007년 동아프리카 공동체(EAC)에 가입하여 역내 경제 및 정치 통합 노력에 참여하고 있다.[2][3]

과거 쥐베날 하비아리마나 정권을 지원했던 프랑스와는 르완다 집단학살 당시 프랑스의 역할과 Opération Turquoise|오페라시옹 튀르쿠아즈fra 등으로 인해 관계가 악화되어 2006년에는 외교 관계가 단절되기도 했다. 이후 양국은 관계 개선을 위해 노력하여 2010년 니콜라 사르코지 프랑스 대통령이 르완다를 방문하고, 2011년 카가메가 프랑스를 방문하며 관계가 회복되었다.[2][3]

미국영국 등 영어권 서방 국가들과는 집단학살 이후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며 상당한 원조를 받아왔다. 특히 빌 클린턴 전 미국 대통령과 토니 블레어 전 영국 총리는 카가메 정권의 발전을 높이 평가하며 지지를 보냈다. 이러한 관계를 바탕으로 르완다는 2009년 영연방에 가입했다.[2][3] 그러나 2010년대 초 르완다의 M23 반군 지원 의혹이 제기되면서 서방 국가들과의 관계에 긴장이 발생했고, 일부 국가는 원조를 중단하거나 축소하기도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국은 여전히 르완다의 주요 원조국으로 남아있다.[2][3]

이 외에도 카가메는 이스라엘, 인도, 중국 등 다양한 국가들과 관계를 맺고 있으며, 2018년에는 아프리카 연합 의장을 맡아 아프리카 대륙 자유무역협정 설립을 주도하는 등 아프리카 내에서의 영향력 확대를 추구하고 있다.[34]

5. 5. 1. 우간다 및 동아프리카 공동체

야외에서 햇살 아래 빨간 카펫이 깔린 곳에 의자에 앉아 있는 5명의 대통령: 우간다의 요웨리 무세베니, 케냐의 음와이 키바키, 르완다의 폴 카가메, 탄자니아의 자카야 키크웨테, 부룬디의 피에르 은쿠룬지자
2009년 4월 다른 4개국 동아프리카 공동체 국가 수반들과 함께 있는 카가메


카가메는 어린 시절과 젊은 시절 대부분을 우간다에서 보냈으며, 1970년대 후반부터 요웨리 무세베니 대통령과 개인적인 관계를 맺었다. 둘은 우간다 내전에서 함께 싸웠고, 1986년 국민저항군(NRA)의 승리 후 카가메는 무세베니 군대에서 군사 정보 책임자로 임명되었다. 1990년 르완다 애국전선(RPF) 군인들이 우간다 군대를 이탈하여 르완다를 침공했을 때, 무세베니는 이들을 명시적으로 지원하지는 않았지만, 제라드 프루니에에 따르면 사전에 계획을 알고 있었을 가능성이 높다고 한다. 또한 무세베니는 RPF가 전쟁 초기 패배 후 우간다 영토를 통해 비룽가산맥으로 안전하게 이동할 수 있도록 허용했으며, 1998년 국가 정상 회의에서는 우간다가 르완다 내전 동안 RPF를 실질적으로 도왔다고 인정했다. RPF의 승리 이후 양국은 긴밀한 정치 및 무역 관계를 유지했다.

2007년 르완다는 우간다, 케냐, 탄자니아, 부룬디와 함께 동아프리카 공동체(EAC)에 가입했다. 이 가입을 위해서는 국방 정보 공유 협정, 관세 동맹, 마약 밀매 단속 조치 등 다른 회원국들과 여러 협정을 체결해야 했다. EAC 회원국들은 2011년 공동 시장을 설립했으며, 정치 연맹으로 나아가는 것을 포함한 추가적인 통합을 계획하고 있다. 또한 EAC는 2024년까지 단일 통화를 도입하는 것을 목표로 동아프리카 통화 연구소를 설립했다.

5. 5. 2. 미국, 영국 및 영연방

미셸 오바마, 폴 카가메, 버락 오바마. 커튼 앞에서 서서 미소짓고 있다
2009년 9월 폴 카가메와 미국의 버락 오바마 대통령, 미셸 오바마 여사


2022년 미국-아프리카 정상회담 만찬에서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과 폴 카가메 르완다 대통령
2022년 미국-아프리카 정상회담에서 카가메와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


1994년 르완다 집단학살 이후 르완다는 영어권 국가, 특히 미국영국과 긴밀한 관계를 유지해왔다. 두 국가는 르완다 애국전선(RPF)의 안정화 및 재건 프로그램을 적극적으로 지지했으며, 영국은 매년 상당한 예산 지원을 제공했고 미국은 군사 원조와 개발 프로젝트를 지원했다. 대통령으로서 카가메는 집단학살 당시 서방 국가들의 소극적인 대응을 비판해왔다. 이에 대해 영국과 미국은 책임을 인정했으며, 당시 미국 대통령이었던 빌 클린턴은 미국의 대응 실패를 "개인적인 실패"라고 표현하기도 했다. 2000년대 들어 클린턴과 토니 블레어 영국 총리는 카가메 정권 하 르완다의 발전을 높이 평가하며 국제 개발 기금의 모범적인 수혜국으로 언급했다. 클린턴은 카가메를 "우리 시대의 가장 위대한 지도자 중 한 명"이라고 칭찬했다. 클린턴과 블레어는 퇴임 후에도 각각 클린턴 글로벌 이니셔티브와 르완다 정부의 무급 고문 활동을 통해 르완다에 대한 지지를 이어갔다.

영어권 국가들과의 관계 강화를 위한 노력의 일환으로, 카가메는 2009년 영연방 가입을 신청하여 승인받았다. 이로써 르완다는 모잠비크에 이어 대영 제국과 식민 관계를 맺은 적이 없는 두 번째 영연방 회원국이 되었다. 이후 카가메는 오스트레일리아 퍼스에서 열린 영연방 정상회의(CHOGM)에 참석하여 비즈니스 포럼에서 연설했다. 또한 르완다는 2012년 유엔 안전 보장 이사회의 비상임 이사국으로 선출되어 2013년 4월에는 의장국을 맡기도 했다.

그러나 2010년대 초, 르완다가 콩고 민주 공화국 동부의 M23 반군을 지원한다는 의혹이 제기되면서 미국, 영국과의 관계에 긴장이 발생했다. 영국은 2012년 르완다에 대한 예산 지원 프로그램을 중단하고 2100만파운드의 지원금을 동결했다. 독일과 같은 다른 유럽 국가들도 2008년부터 일반 예산 지원을 중단했다. 이들 국가의 지원금은 2013년부터 점차 복원되었지만, 부문별 예산 지원 및 특정 프로그램 지원의 형태를 취했다. 미국 또한 2012년 르완다에 대한 군사 원조 프로그램 일부를 동결했지만, 원조를 완전히 중단하지는 않았다. 2020년까지 미국은 카가메 정부를 계속 지원했으며 르완다의 최대 양자 원조국이었다.

5. 5. 3. 프랑스

프랑스는 자국의 ''프랑사프리크'' 정책의 일환으로 하비아리마나 대통령 집권 기간 동안 그와 긴밀한 관계를 유지했다. 1990년 르완다 애국전선(RPF)이 르완다 내전을 시작하자, 하비아리마나 대통령은 프랑수아 미테랑 프랑스 대통령으로부터 즉각적인 지원을 받았다. 프랑스는 600명의 공수부대를 파병했고, 이 부대는 사실상 정부의 침략 대응을 지휘했으며 전쟁 초기에 RPF가 획득한 거의 모든 영토를 되찾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프랑스는 전쟁 내내 이러한 군사적 존재감을 유지했으며, 1993년 2월 RPF의 공세에서 다시 카가메의 RPF 부대와 교전했다. 1994년 르완다 집단학살 후반기에 프랑스는 유엔의 위임을 받아, 위험에 처한 실종자, 난민 및 민간인을 보호하기 위한 안전한 인도적 지역을 조성하기 위한 ''투르쿠아즈 작전(Opération Turquoisefra)''을 시작했다. 많은 르완다인들은 이것을 집단학살에 가담한 사람들을 포함한 후투족을 RPF로부터 보호하기 위한 임무로 해석했다. 프랑스는 RPF에 대해 적대적인 태도를 유지했고, 그들의 존재는 카가메의 르완다 남서부 진격을 일시적으로 중단시켰다.

프랑스는 집단학살 종식과 ''투르쿠아즈 작전'' 철수 후에도 새로운 RPF 정부를 외면했다. 1995년 1월에 외교 관계가 마침내 재개되었지만, 르완다가 프랑스를 '대량학살자'들을 지원했다고 비난하고 프랑스가 자신의 개입을 옹호하면서 긴장 상태가 지속되었다. 2006년, 프랑스의 장-루이 브뤼기에르 판사는 하비아리마나 대통령 암살에 관한 보고서를 발표했는데, 이 보고서에서는 카가메가 대통령 전용기 격추를 명령했다고 결론지었다. 브뤼기에르는 이후 카가메의 측근 9명에 대해 체포 영장을 발부했다. 카가메는 이러한 혐의를 부인하고 즉시 프랑스와의 외교 관계를 단절했다. 2008년 관계가 해빙되기 시작했고, 2009년 말 외교가 재개되었다. 2010년, 니콜라 사르코지는 집단학살 이후 처음으로 르완다를 방문한 프랑스 대통령이 되어 프랑스가 "중대한 판단 착오"를 저질렀다고 처음으로 인정했다. 카가메는 2011년 파리 공식 방문으로 화답했다.

6. 사생활

장네트 카가메, 폴 카가메의 부인


카가메는 1989년 6월 10일, 우간다에서 케냐 나이로비에 거주하는 투치족 망명자인 제넷 니라몽지와 결혼했다. 카가메는 친척들에게 적합한 배우자를 추천해 달라고 요청했고, 친척들은 니라몽지를 추천했다. 카가메는 나이로비로 가서 니라몽지를 만나 자신을 소개하고 그녀를 우간다로 초대했다. 니라몽지는 RPF와 난민을 르완다로 귀환시키려는 목표에 대해 잘 알고 있었으며 카가메를 존경했다. 두 사람 사이에는 네 명의 자녀가 있다.

그의 딸인 안제 카가메 넨게잉고마는 해외에서 교육을 마쳤으며, 안전과 사생활 보호를 위해 어린 시절 대부분을 대중의 눈에 띄지 않게 지냈다.[13] 그녀는 미국 매사추세츠주 웰즐리에 있는 사립 예비학교인 데이나 홀 스쿨에 다녔고, 스미스 대학교에서 정치학을 전공하고 아프리카 연구를 부전공했다. 또한 컬럼비아 대학교에서 국제 관계 석사 학위를 가지고 있다.

카가메는 영어, 르완다어, 프랑스어 3개 국어를 구사할 수 있으며,[14] 영국 프리미어리그 축구 클럽인 아스널 FC의 팬이다.[15] 그는 가톨릭 신자[16][17]이며 금주자이다.[18]

7. 역대 선거 결과

선거명직책명대수정당득표율득표수결과당락
2003년 선거르완다의 대통령4대르완다 애국전선95.05%3,544,777표1위당선
2010년 선거르완다의 대통령4대르완다 애국전선93.08%4,638,560표1위당선
2017년 선거르완다의 대통령4대르완다 애국전선98.79%6,675,472표1위당선


참조

[1] 뉴스 Former Rwandan pres arrested https://www.news24.c[...] 2021-08-18
[2] 웹사이트 Pre-election attacks on Rwandan politicians and journalists condemned https://www.amnesty.[...] 2021-08-12
[3] 웹사이트 Kagame kicks off re-election campaign https://www.rfi.fr/e[...] 2021-08-12
[4] 웹사이트 RPF-Inkotanyi nominates Kagame for President https://www.newtimes[...] 2021-08-18
[5] 웹사이트 Photos & Video: I will be your shock absorber, Kagame says at final rally https://www.newtimes[...] 2021-08-18
[6] 웹사이트 Rwanda Election 2017 Results https://www.ktpress.[...] 2021-08-18
[7] 논문 Vision 2020 (Revised 2012) https://www.greengro[...] 2022-02-04
[8] 논문 An Evaluation of Rwanda's Vision 2020 Achievements https://ju.se/downlo[...] 2022-02-04
[9] 논문 Vision 2050 https://www.minecofi[...] 2022-02-04
[10] 논문 Vision 2050 https://www.minecofi[...] 2022-02-04
[11] 웹사이트 Vision 2020 – 2050 – Rwanda Playbook https://web.archive.[...] 2021-12-17
[12] 웹사이트 Covid-19: Rwanda has vaccinated over 60% of its population https://www.africane[...] 2022-04-30
[13] 웹사이트 Ange Kagame Comes of Age https://web.archive.[...] 2015-01-19
[14] 뉴스 Mu kiganiro kirambuye, Ange Kagame yahishuye byinshi mu buzima bwe bwite http://igihe.com/ama[...] Igihe 2015-01-19
[15] 뉴스 Rwandan leader went to Arsenal game as country marked 30 years since genocide https://www.theguard[...] 2024-04-17
[16] 웹사이트 Rwanda president's threat to 'arrest' Catholic pilgrims stirs reaction amid church's silence https://www.detroitc[...] 2024-07-02
[17] 웹사이트 Rwanda President Kagame warns Catholic pilgrims who 'worship poverty' https://www.theeasta[...] 2024-07-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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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 웹사이트 President Kagame honoured in Burkina Faso, commends Pan-African FESPACO https://en.igihe.com[...] 2019-03-02
[20] 웹사이트 Perezida Kagame yambitswe umudari uruta indi muri Guinea Conakry https://www.kigalito[...]
[21] 웹사이트 RPF Chairman receives highest honour in Guinea-Bissau – FPR Inkotanyi https://rpfinkotanyi[...]
[22] 웹사이트 State Visit to Côte d'Ivoire | Abidjan, 19-20 December 2018 https://www.flickr.c[...]
[23] 웹사이트 King Mohammed VI Holds Talks with Pres. Paul Kagame https://www.morocco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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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 웹사이트 President attends Ntare School day http://www.statehous[...] State House, Repubric of Uganda 2004-09-18
[27] 웹사이트 Rwanda: Kagame Free to Rule Till 2034 http://allafrica.com[...] AllAfrica.com 2016-06-24
[28] 간행물 Rwanda, China strengthen ties 2013-05-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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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 웹사이트 大虐殺乗り越え「アフリカのシンガポール」へ、ルワンダの首都キガリ https://www.afpbb.co[...] AFPBB 2019-07-13
[32] 방송 アフリカンドリーム 第1回 “悲劇の国”が奇跡を起こす NHKスペシャル 2010-04-04
[33] 뉴스 ルワンダ大統領が圧勝 選挙暫定結果、98%超得票 https://web.archive.[...] 2017-08-07
[34] 웹사이트 The Largest Free Trade Deal in Nearly a Quarter-Century Seeks to Make Africa a Single Market https://fortune.com/[...] 포춘 2019-07-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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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8] 학술지 74. Nantaba, the Female Fetich of the King of Uganda. https://doi.org/10.2[...] 19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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