식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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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식민지는 한 국가가 다른 지역을 정치적, 경제적으로 지배하고 자국의 이익을 위해 통치하는 것을 의미한다. 어원은 고대 로마의 '콜로니아'에서 유래되었으며, 고대 그리스와 로마는 식민지를 건설하여 통치했다. 대항해 시대 이후 포르투갈, 스페인 등 유럽 국가들이 식민지 경쟁을 벌였고, 산업 혁명 이후 영국, 프랑스 등은 제국주의 정책을 통해 전 세계를 식민지화했다. 20세기 초 아프리카 대륙은 유럽 열강에 의해 분할되었고, 식민지 독립 운동을 거쳐 대부분의 식민지들이 독립했다. 현재는 해외 영토나 속령 형태로 남아있으며, 경제적, 문화적 지배를 의미하는 신식민주의 개념도 존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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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민지 | |
---|---|
기본 정보 | |
로마자 표기 | sikminji |
다른 이름 | 콜로니아(라틴어), ἀποικία(그리스어) |
개요 | |
정의 | 다른 나라의 지배를 받는 영토 또는 지역 |
특징 | 지배국으로부터 파견된 사람들에 의해 통치됨 |
어원 | '집에서 떨어진 곳'을 의미하는 그리스어 'ἀποικία'(apoikia)에서 유래 |
역사 | |
고대 | 고대 그리스의 식민 도시 건설 로마 제국의 콜로니아 |
근대 | 유럽 제국주의 시대의 식민지 확장 식민 통치와 지배 |
현대 | 식민지 해방과 독립 신식민주의 논쟁 |
관련 개념 | 제국주의 식민주의 반식민주의 탈식민주의 신식민주의 종속 이론 |
유형 | |
거주지 식민지 | 식민지 개척자의 이주와 정착 원주민 사회의 해체 및 대체 |
무역 식민지 | 지배국의 상업적 이익 추구 자원 수탈과 교역로 확보 |
플랜테이션 식민지 | 대규모 농업 생산 중심 노예 노동 및 강제 노동 활용 |
전략적 식민지 | 군사적, 정치적 목적을 위한 확보 해상 요충지 및 기지 건설 |
종교적 식민지 | 종교 확산 및 선교 활동 중심 원주민 종교 및 문화 탄압 |
자치령 | 일부 자치권 인정 모국과의 관계 유지 |
반식민지 | 다른 나라의 영향력을 받는 지역 경제적, 정치적 종속 관계 |
관련 용어 | |
해외 영토 | 해외 영토 |
자치령 | 자치령 |
반식민지 | 반식민지 |
종속국 | 종속국 |
2. 어원
'식민지'라는 단어는 고대 로마의 전초 기지이자 후에 도시를 일컫던 라틴어 colōniala에서 유래했다. 이는 다시 로마의 소작농을 가리키던 colōnusla라는 단어에서 파생되었다.[4]
영어 "colony"의 어근 "col-"은 라틴어 "colere"에서 유래하며 "경작하다"라는 의미이다. "cult-"도 같은 의미이며, "cultura"는 "경작", "교양"을 의미한다.
3. 고대의 식민 통치
고대 그리스는 상호 독립적인 도시국가들로 이루어져 있었다. 그리스의 도시국가들은 자원과 무역로 등을 확보하기 위해 지중해 연안에 많은 도시들을 세웠고, 이 도시들은 모국과 정치, 경제, 종교적인 유대 관계에 있었다.
고대 로마는 본국의 직할 부대를 식민지에 파견하여 식민지를 직접 통치하였다. 파견된 부대의 식량을 공급하기 위해 경작지를 마련하였는데, 이를 colonia (농민을 뜻하는 라틴어 colonus에서 파생된 말)라 불렀다. colonia는 영어 colony의 어원이 되었다. "식민지"라는 단어는 고대 로마의 전초기지이자 후에 도시를 일컫던 라틴어 colōniala에서 유래했으며, 이는 다시 로마의 소작농을 가리키던 colōnusla라는 단어에서 파생되었다.
로마의 coloniaela로 시작된 정착지는 쾰른(이름에 그 역사가 남아있다)에서 벨그라드, 요크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도시들을 포함한다. 로마의 영향권 안에 있던 정착지가 로마 식민지였음을 보여주는 특징적인 징후는 격자 모양의 도시 중심부이다.[4]
3. 1. 주요 사례
4. 근대의 식민지
대항해 시대에 이르러 포르투갈과 에스파냐를 시작으로 유럽 열강들의 식민지 경쟁이 본격화되었다. 이들은 서아프리카와 남아메리카에 식민지를 건설했다. 특히 남미의 에스파냐 식민지에서 유입된 막대한 양의 은은 유럽에 유례없는 인플레이션을 야기했다.
산업혁명 이후, 영국과 프랑스를 필두로 한 유럽 강대국들은 전 세계를 대상으로 식민지 쟁탈전을 벌였다. 이 시기 유럽 강대국들의 식민지 확보 정책은 제국주의로 불린다.
5. 아프리카 분할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 서유럽 열강들은 아프리카 대륙을 식민지로 삼았다. 영국의 종단 정책과 프랑스의 횡단 정책이 충돌하고, 독일, 이탈리아, 벨기에 등이 가세하면서 아프리카 분할은 더욱 격화되었다. 1910년, 아프리카의 독립국은 에티오피아와 라이베리아뿐이었다. 원주민들의 저항은 남아프리카 전쟁으로 이어졌고, 제국주의 국가 간의 충돌은 파쇼다 사건, 모로코 사건 등으로 나타났다.
아프리카 식민지 분할은 다음과 같다.
6. 식민지 독립 운동
제1차 세계 대전을 전후로 민족주의와 사회주의 이념이 확산되면서 전 세계적으로 식민지 독립 운동이 본격화되었다.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거의 대부분의 식민지들이 독립을 쟁취하였다.
식민지 본국이 식민지 출신 인사를 고위직에 등용하는 경우가 없었던 것은 아니나, 이는 제한적이었다. 프랑스나 일본 제국의 식민지에서 이러한 경향이 비교적 강하게 나타났다.
- 프랑스: 1789년 생도맹(현 아이티) 대표가 최초로 국민의회에 참여, 1791년 법률로 모든 식민지에 본국과 동등한 권리 인정 (국민의회 대표 파견 및 최고법원 판사 임명 권한 부여). 펠릭스 에부에는 프랑스령 기아나에서 흑인 노예의 아들로 태어났지만, 여러 식민지 총독을 거쳐 1941년 프랑스령 적도 아프리카 총독에 임명. 펠릭스 우푸에-보아니는 샤를 드 골 정권 하에서 프랑스 공중보건·인구부 장관(대한민국의 보건복지부 장관에 상당)에 임명.
- 영국: 다다바이 나오로지를 비롯한 몇몇 영국령 인도 출신자가 영국 하원의원으로 선출. 바 모는 1937년 영국령 버마 식민지 정부의 초대 총리로 선출. 영국령 인도 식민지 정부의 고위직 공무원인 인도 고등 문관(ICS) 채용 시험은 19세기 후반에 인도인에게도 개방되어 인도 독립 당시 인도인 ICS가 전체의 31%를 차지. 무함마드 악바르 칸은 영국령 남아시아 출신의 무슬림(이슬람교도)으로서, 처음으로 영국령 인도군 장관으로 진급. 압둘 라힘은 1908년 마드라스 고등법원 판사로 임명되어 후에 동 법원장이 됨.
- 필리핀: 1937년 미국에 직접 통치되는 식민지에서 독립을 염두에 둔 자치 식민지(코먼웰스)로 이행, 마누엘 케손이 독립 준비 정부의 초대 대통령으로 국민투표에 의해 선출.
- 일제강점기 조선: 도지사의 대략 절반 정도는 조선인이었음. 대한민국 국회 의원으로 조선인 박춘금이 선출, 13명의 식민지 출신자가 일본 귀족원 의원으로 임명. 홍사익을 비롯한 조선인 육군 장교들이 장성으로 진급.[30]
그러나 이러한 사례에도 불구하고 식민지배 체제 하에서 식민지인들은 여전히 차별과 억압을 받았다.
6. 1. 주요 사례
유럽의 식민지 건설은 유럽 이외 지역의 인류에게는 분명 재앙이었다. 제1차 세계대전을 전후로 민족주의와 사회주의 이념이 확산되면서 전 세계적으로 식민지의 독립운동이 본격화되었다.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거의 대부분의 식민지들은 정치적으로 독립을 쟁취하였다.
- '''란세오메도즈''': 서기 1025년경 존재했던 바이킹 식민지이다.
- '''앙골라''': 16세기부터 1975년 독립할 때까지 포르투갈의 식민지였다.
- '''오스트레일리아'''는 1788년부터 1829년 사이에 건설된 6개의 서로 다른 영국 식민지의 연방으로 1901년 영국령 자치령으로 성립되었다.
- '''바베이도스''': 대서양 노예 무역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던 대영제국의 식민지였다. 1966년 독립하였다.
- '''브라질''': 16세기부터 포르투갈의 식민지였다. 1822년 독립하였다.
- '''캐나다''': 처음에는 프랑스에 의해 누벨프랑스(1534~1763)로, 그리고 잉글랜드(1582년 뉴펀들랜드)에 의해 식민지화된 후 영국 통치하(1763~1867)에 있었으며, 자치령 지위를 얻고 "식민지" 지정을 상실하기 전까지였다.
- '''콩고 민주 공화국''': 1908년부터 1960년까지 벨기에의 식민지였으며, 그 이전에는 개인 소유였고 국왕 레오폴드 2세가 소유하고 있었다.
- '''프랑스령 인도차이나'''는 1887년 10월 안남, 통킹, 코친차이나(현재 베트남을 구성하는 지역)와 캄보디아 왕국으로 구성되었고, 1893년 프랑스-시아메스 분쟁 후 라오스가 추가되었다. 이 연합은 1954년까지 지속되었다. 네 개의 보호령에서 프랑스는 공식적으로 베트남 황제, 캄보디아 국왕, 루앙프라방 국왕 등 현지 통치자들의 권력을 유지했지만, 모든 권력을 장악했고 현지 통치자들은 명목상의 지도자 역할만 수행했다.
- '''가나''': 유럽과 가나(당시 골드코스트로 알려짐) 사이의 접촉은 15세기에 포르투갈의 도착과 함께 시작되었다. 이는 곧 유럽 열강들에 의한 여러 식민지의 수립으로 이어졌다: 포르투갈 골드코스트(1482~1642), 네덜란드 골드코스트(1598~1872), 스웨덴 골드코스트(1650~1663), 덴마크 골드코스트(1658~1850), 브란덴부르크 및 프로이센 골드코스트(1685~1721), 영국 골드코스트(1821~1957). 1957년 가나는 사하라 사막 이남 아프리카 최초로 독립한 식민지가 되었다.
- '''그린란드'''는 1721년부터 덴마크-노르웨이의 식민지였고, 1814년부터 1953년까지 덴마크의 식민지였다. 1953년 그린란드는 덴마크 왕국의 동등한 일부가 되었다. 1979년에 자치권이 부여되었고 2009년에 자치가 확대되었다. 아메리카의 덴마크 식민지도 참조하라.
- '''기니비사우''': 15세기부터 포르투갈의 식민지였다. 1974년 독립하였다.
- '''홍콩'''은 1841년부터 1997년까지 영국의 식민지(1983년부터 영국 속령)였다. 현재는 중국의 특별행정구이다.
- '''인도'''는 현재 인도, 방글라데시, 파키스탄을 포함하는 제국 정치체로, 1858년부터 1947년까지 영국의 영국 정부의 직접 통제 하에 있었다. 15세기부터 1961년까지 포르투갈령 인도(고아)는 포르투갈의 식민지였다. 펀디체리와 찬데르나고르는 1759년부터 1954년까지 프랑스령 인도의 일부였다. 1620년부터 1869년까지 타랑감바디, 세람포르, 니코바르 제도의 작은 덴마크 식민지는 덴마크령 인도로 알려져 있었다.
- '''인도네시아'''는 네덜란드령 동인도의 네덜란드 식민지였으며 1949년에 완전한 독립을 획득했다.[5]
- '''자메이카'''는 16세기와 17세기에 스페인령 서인도 제도의 일부였다. 1655년 잉글랜드의 식민지가 되었고, 1962년에 독립하였다.
- '''라이베리아'''는 1821년 아프리카계 미국인 흑인 노예들의 이주를 위해 미국 시민들이 세운 식민지이다. 1847년 7월 26일 미국 식민지화 협회로부터의 라이베리아 독립 선언. 아이티 다음으로 세계에서 두 번째로 오래된 흑인 공화국이다.
- '''마카오'''는 1557년부터 1999년까지 포르투갈의 식민지(1976년부터 "포르투갈 행정하의 중국 영토")였다. 1999년 홍콩 2년 후 중국의 특별행정구가 되었다.
- '''말레이시아'''는 1511년 말라카를 점령한 후 처음으로 포르투갈 제국에 의해 식민지화되었다.[6] 1511년 이후 영국은 말레이 반도에 식민지와 무역항을 설립했으며, 피낭은 영국 동인도 회사에 임대되었다. 네덜란드 제국은 무역할 향신료를 찾으면서 말레이시아를 만났다.[7]
- '''몰타'''는 1800년 프랑스 혁명 전쟁부터 1964년 독립할 때까지 영국의 보호령이었다가 나중에는 식민지가 되었다.
- '''모잠비크''': 15세기부터 포르투갈의 식민지였다. 1975년 독립하였다.
- '''필리핀''', 이전에는 1565년부터 1898년까지 스페인의 식민지였으며 스페인령 동인도의 일부였고, 1898년부터 1946년까지 미국의 식민지였다.[8] 1935년 자치 연방 지위를 달성했고, 1946년에 독립하였다.
- '''푸에르토리코'''는 1493년부터 1898년까지 스페인의 식민지였으며, 이후 미국의 식민지가 되었고,[9][10][11] 미국은 이를 "미편입 영토"로 분류하였다.[12] 1914년 푸에르토리코 하원은 미국으로부터의 독립을 만장일치로 찬성했지만, 이는 미국 의회에 의해 "위헌적"이며 1900년 미국의 포레이커 법을 위반한 것으로 거부되었다.[13] 1952년 미국 의회가 푸에르토리코의 헌법을 승인한 후 공식 명칭은 "푸에르토리코 연방"이 되었지만, 새로운 명칭은 "푸에르토리코와 미국의 정치적, 사회적, 경제적 관계를 바꾸지 않았다."[14][15] 같은 해 미국은 유엔에 이 섬이 자치 영토라고 알렸다.[16] 미국은 "공개적으로 제국주의적 역할을 하려 하지 않았고... 공개적으로 식민 지배의 모순을 인정하려 하지 않았다."[19] 이 섬은 많은 사람들,[20] 미국 연방 판사,[21] 미국 의원들,[22][23] 푸에르토리코 대법원장,[24] 그리고 많은 학자들에 의해 식민지라고 불려왔다.[25]
- '''남아프리카 공화국'''는 네덜란드와 영국을 포함한 다양한 아프리카와 유럽 열강과 응구니족에 의해 영토와 식민지로 구성되었다. 현대 국가를 구성하는 영토는 1806년부터 1910년까지 영국이 직접 통치했으며, 1910년 남아프리카 연방의 자치령이 되었다.
- '''스리랑카''': 1815년부터 1948년까지 영국의 식민지였다. 실론으로 알려져 있었다. 1972년까지 영국령 자치령이었다. 16세기~17세기에는 포르투갈 식민지, 17세기~18세기에는 네덜란드 식민지이기도 했다.
- '''대한민국'''은 1910년부터 1945년까지 일본의 식민지였다. 남한과 북한은 1948년에 설립되었다.
- '''타이완'''은 네덜란드(1624~1662), 스페인(1626~1642), 중국(1683~1895), 일본(1895~1945) 등 여러 세력의 복잡한 식민 통치 역사를 가지고 있다.[30] 식민지 이전(1624년 이전) 타이완의 주민들은 대부분 현재 타이완 사람들과는 다른 언어를 사용하는 오스트로네시아계 타이완 원주민이었고, 대부분은 한족이다. 역사적으로 타이완은 두 차례 중국 정부의 잔여 국가 역할을 했는데, 첫 번째는 명나라 충신 동닝 왕국(1662~1683)이고, 두 번째는 현재의 중화민국(ROC)으로, 연속성이나 계승을 주장하며 중국 내전(1927~1949)의 마지막 해인 1949년 중국 본토에서 타이완으로 후퇴했다. 타이완 섬과 소규모 위성 섬으로 구성된 사실상의 영토를 가진 ROC는 마치 중화인민공화국(중국 본토, 홍콩, 마카오)와 별개의 국가인 것처럼 타이완을 계속 통치하고 있다.
- '''미국'''은 13개의 영국 식민지의 연합으로 형성되었다. 버지니아 식민지가 13개 식민지 중 첫 번째였다. 13개 식민지는 모두 1776년 7월 독립을 선언하고 영국 총독들을 축출했다.
그러나 식민지인이 본국인과 동등한 공직에 취임하는 것이 반드시 불가능했던 것은 아니었으며, 관공청이나 군대에서 고위직에 등용되거나 본국 의회에 선출되는 경우도 있었다. 이러한 경향은 동화주의를 표면적으로 내세운 일본이나 프랑스의 식민지에서 특히 강했다.
영국의 해외 영토와 미국의 해외 영토 주민들은 현재도 본국의 공직(대통령, 국회의원) 선거 투표가 허용되지 않는다. 해외 영토 출신이라도 본국으로 이주하면 가능하다. 이와 달리 프랑스의 해외 주민들은 프랑스 본토 주민과 마찬가지로 공직 선거 참여가 가능하다. 이는 자치주의, 분리주의와 동화주의, 내지 연장주의라는 식민지 통치 사상의 차이에서 비롯된 것으로 볼 수 있다.
- 프랑스에서는 1789년에 생도맹(현 아이티)의 대표가 최초로 국민의회에 참여했고, 1791년 법률에서 모든 식민지에 본국과 동등한 권리를 인정하여 국민의회에 대표를 파견하고, 최고법원 판사를 임명할 권리를 부여했다.
- 펠릭스 에부에는 프랑스령 기아나에서 흑인 노예의 아들로 태어났지만, 여러 식민지 총독을 거쳐 1941년 프랑스령 적도 아프리카 총독에 임명되었다.
- 후에 코트디부아르 초대 대통령이 된 펠릭스 우푸에-보아니는 샤를 드 골 정권 하에서 프랑스 공중보건·인구부 장관(대한민국의 보건복지부 장관에 상당)에 임명되었다.
- 다다바이 나오로지를 비롯한 몇몇 영국령 인도 출신자가 영국 하원의원으로 선출되었다.
- 후에 제2차 세계 대전기 일본군 점령하에 건국된 미얀마의 국가원수가 된 바 모는 1937년 영국령 버마 식민지 정부의 초대 총리로 선출되었다.
- 영국령 인도 식민지 정부의 고위직 공무원인 인도 고등 문관(ICS) 채용 시험은 19세기 후반에 인도인에게도 개방되었다. 결과적으로 인도 독립 당시 인도인 ICS가 전체의 31%를 차지하게 되었다.
- 무함마드 악바르 칸은 영국령 남아시아 출신의 무슬림(이슬람교도)으로서, 처음으로 영국령 인도군 장관으로 진급했다.
- 압둘 라힘은 1908년 마드라스 고등법원 판사로 임명되어 후에 동 법원장이 되었다.
- 필리핀은 1937년 미국에 직접 통치되는 식민지에서 독립을 염두에 둔 자치 식민지(코먼웰스)로 이행했고, 독립 준비 정부의 초대 대통령으로 마누엘 케손이 국민투표에 의해 선출되었다.
- 일제강점기 조선의 도지사의 대략 절반 정도는 조선인이었다.
- 대한민국 국회 의원으로 조선인 박춘금이 선출된 외에도 13명의 식민지 출신자가 일본 귀족원 의원으로 임명되었다.
- 홍사익을 비롯한 조선인 육군 장교들이 장성으로 진급했다.
입법권은 본국 정부가 임명한 총독 등 행정장관이 장악하는 경우가 많았다. 많은 경우, 식민지 의회는 설치되더라도 자문 기관에 그치고, 입법권이 부여되더라도 총독 등의 거부권이 수반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또한, 본국의 법령의 효력은 원칙적으로 식민지에는 미치지 않는다고 규정된 경우가 많아, 식민지에 본국법을 적용하기 위해서는 식민지 정부가 별도로 그 취지의 법령을 제정할 필요가 있었다.
7. 현재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거의 대부분의 식민지들은 정치적으로 독립하였다. 그러나 신생 독립국들은 경제 및 문화 영역에서 이전의 식민 모국으로부터 완전히 자유롭지 못하다. 또한 내부의 인종 갈등이나 식민지 시절 위도, 경도 등을 기준으로 인위적으로 나뉜 국경에 의한 분쟁 등의 복잡한 갈등을 겪고 있다. 비록 정치적으로는 독립되어 있어도 경제적으로나 문화적으로 타국의 지배하에 놓여 있는 상태는 '''경제 식민지''', '''문화 식민지'''라고 부른다.
7. 1. 또 다른 식민지
미국의 하와이, 중국의 티베트 및 신장 위구르 자치구(동투르키스탄), 내몽골, 프랑스의 누벨칼레도니, 러시아의 크림자치공화국(투표를 통해 우크라이나에서 러시아로 합병되지만 절대다수 러시아계만 투표에 참여하여 일부 민족의 의견은 무시된 채 행해짐)과 같이 타 국가나 민족의 영토를 강제로 본국에 합병한 곳을 식민지로 볼 수도 있다.7. 2. 현존하는 식민지 (유엔 비자치영토 목록)
탈식민화 특별위원회는 유엔이 식민지로 간주하는 지역을 식별하는 유엔 비자치영토 목록을 유지한다. 속령은 지배 국가에 대한 자치권과 정치적 권력 수준이 다양하기 때문에 '식민지' 분류에 대한 의견이 일치하지 않는다.현대에도 사실상 식민지를 보유한 국가는 많지만,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각지 식민지에서 독립운동이 활발해졌고, 1960년 유엔총회의 식민지 독립 부여 선언 결의로 식민지라는 존재 자체가 국제적으로 부정되었다. 따라서 객관적으로 식민지라고 할 수 있는 지역이라도, 원주민에게 본국민과 동등한 권리를 주고 해외 영토나 자치령 등으로 바꿔 부르는 경우가 많다.
반대로, 객관적으로 식민지라고 하기 어려운 지역이라도, 주민이 영유국의 통치에 불만을 가지는 경우, 영유국을 공격하기 위한 정치적 슬로건으로 '식민지'라는 표현이 사용되기도 한다.
8. 식민지 통치 형태
고대 그리스는 상호 독립적인 도시국가들로 이루어져 있었다. 그리스의 도시국가들은 자원과 무역로 등을 확보하기 위해 지중해 연안에 많은 도시들을 세웠고 이 도시들은 모국과 정치, 경제, 종교적인 유대 관계에 있었다.
고대 로마는 본국의 직할 부대를 식민지에 파견하여 식민지를 직접 통치하였다. 파견된 부대의 식량을 공급하기 위해 경작지를 마련하여 이를 colonia (농민을 뜻하는 라틴어 colonus에서 파생된 말)라 불렀으며, 이는 영어 colony의 어원이다.[4]
형식적으로는 독립국으로 취급되더라도, 내정·군사 양면에서 외국의 압도적인 영향 하에 놓인 국가는 식민지 또는 식민지와 다름없다고 묘사되는 경우가 많다. 일본에게 있어서 구 만주국(현재의 중국 동북부)이나 구 소련의 위성국(현재의 몽골, 동유럽 국가들) 등이 이러한 전형적인 사례이다.
9. 식민지 법적 지위
고대 그리스는 상호 독립적인 도시국가들로 이루어져 있었다. 그리스의 도시국가들은 자원과 무역로 등을 확보하기 위해 지중해 연안에 많은 도시들을 세웠고, 이 도시들은 모국과 정치, 경제, 종교적인 유대 관계를 맺었다.
고대 로마는 본국의 직할 부대를 식민지에 파견하여 식민지를 직접 통치하였다. 파견된 부대의 식량을 공급하기 위해 경작지를 마련하였고, 이를 colonia (농민을 뜻하는 라틴어 colonus에서 파생된 말)라 불렀다. colonia는 영어 colony의 어원이다.
과거에는 식민지배가 법적으로나 도덕적으로 문제가 없다는 것이 상식이었다. 1960년 국제연합 총회에서 결의된 식민지 독립 부여 선언 이후로는, 선언 등에서 볼 수 있듯이, 식민 지배는 피해와 착취의 시대였으며 부정적으로 평가되는 것이 세계적인 추세이다.
구 종주국 측에서는 근대화라는 혜택을 후진 지역에 가져다준 선행이라는 평가가 내려지는 경우도 있다. 한편, “외부인에 의한 발전”보다 “민족의 독립” 그 자체에 무게를 두는 가치관에서, 이러한 “혜택론”에 대한 반발도 존재한다. 또한, 식민 지배의 편의를 위한 공동체 해체와 문화 파괴, 언어의 공백화를 중시하는 사조도 있다(포스트콜로니얼리즘 참조).
10. 식민지 입법 및 행정
입법권은 본국 정부가 임명한 행정 장관이 장악하는 경우가 많았고, 식민지 의회는 자문 기관에 그치는 경우가 일반적이었다. 행정 직원에 현지인을 채용하는 정도는 식민지마다 달랐지만, 현지인과의 직접 접촉이 필요한 업무에는 현지인이 배치되는 경우가 많았다.
11. 식민지주의
고대 그리스는 상호 독립적인 도시국가들로 이루어져 있었다. 그리스의 도시국가들은 자원과 무역로 등을 확보하기 위해 지중해 연안에 많은 도시들을 세웠고 이 도시들은 모국과 정치, 경제, 종교적인 유대관계에 있었다.
고대 로마는 본국의 직할 부대를 식민지에 파견하여 식민지를 직접 통치하였다. 파견된 부대의 식량을 공급하기 위해 경작지를 마련하여 이를 colonia (농민을 뜻하는 라틴어 colonus에서 파생된 말)라 불렀다. colonia는 영어 colony의 어원이다.
근대의 식민지는 대항해 시대에 이르러 본격화되었다. 초기 식민지 경쟁은 포르투갈과 에스파냐가 주도하여 서아프리카와 남아메리카에 이들의 식민지가 만들어졌다. 특히 남미의 에스파냐 식민지에서 유입된 막대한 양의 은으로 인해 유럽은 유례 없는 인플레이션을 겪을 정도였다.
산업혁명 이후 유럽의 강대국들은 세계 전체를 대상으로 식민지 쟁탈전을 벌였다. 이 시기를 경기에 비유해보자면, 식민지 쟁탈전의 선두 주자는 영국과 프랑스였다. 유럽 강대국들의 식민지 확보 정책은 흔히 제국주의로 표현된다.
유럽의 식민지 건설은 유럽 이외 지역의 인류에게는 분명 재앙이었다. 제1차 세계대전을 전후로 민족주의와 사회주의 이념이 확산되면서 전 세계적으로 식민지의 독립운동이 본격화되었다.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거의 대부분의 식민지들은 정치적으로 독립을 쟁취하였다.
현재 해외 영토, 또는 속령이라 불리는 협소한 지역 외에 근대적인 의미의 식민지는 거의 대부분 독립하였다. 그러나, 신생 독립국인 이들은 경제 및 문화의 영역에서 이전의 식민 모국으로부터 완전히 자유롭지는 않다. 또한 내부의 인종 갈등이나 식민지 시절 위도, 경도 등을 기준으로 인위적으로 나뉜 국경에 의한 분쟁 등의 복잡한 갈등을 겪고 있다. 비록 정치적으로는 독립되어 있어도 경제적으로나 문화적으로 타국의 지배하에 놓여 있는 상태는 일컬어 '''경제 식민지''', '''문화 식민지'''라고 부른다.
"식민지"라는 단어는 고대 로마의 전초기지이자 후에 도시를 일컫던 라틴어 콜로니아|colōniala에서 유래했다. 이는 다시 로마의 소작농을 가리키던 콜로누스|colōnusla라는 단어에서 파생되었다.
로마의 coloniaela로 시작된 정착지는 쾰른(이름에 그 역사가 남아있다)에서 벨그라드 그리고 요크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도시들을 포함한다. 로마의 영향권 안에 있던 정착지가 로마 식민지였음을 보여주는 특징적인 징후는 격자 모양의 도시 중심부이다.[4]
포르투갈과 스페인은 이베리아 반도에서 이슬람 세력에 대한 국토 회복 운동인 레콩키스타를 완수한 후, 대항해 시대를 선도하며 해외로 진출했다. 스페인은 콜럼버스의 신대륙 발견 후, 중앙아메리카의 멕시코, 남아메리카의 페루를 중심으로 한 광대한 영토를 획득했고, 태평양을 횡단하여 필리핀 제도의 지배에도 성공했다.
포르투갈 해양 제국과 스페인 제국의 영역을 구분한 것은 1494년에 로마 교황알렉산더 6세가 정한 토르데시야스 조약이다. 대서양에 서경 46도의 자오선을 긋고, 동쪽을 포르투갈, 서쪽을 스페인의 영토로 했다. 이 때문에 남아메리카 대륙에서는 브라질만이 포르투갈 영토가 되었다. 1529년의 사라고사 조약에서는 현재 인도네시아에 해당하는 몰루카 제도의 동경 144도 30분(뉴기니 섬 중앙부에 해당)을 경계로 동쪽을 스페인, 서쪽을 포르투갈의 영토로 했다. 이 두 조약의 결과, 세계는 포르투갈과 스페인에 의해 분할되었다.
포르투갈은 1418년부터 엔리케 항해왕자의 지휘 아래 아프리카 서해안 탐험을 계속했지만, 1488년에 희망봉을 발견하자 동양의 향료 무역 독점을 목표로 인도양으로 진출했다. 1500년에는 카브랄이 브라질을 발견했다. 1511년 말라카를 지배한 후에는 마카오, 나가사키까지 무역권을 확장했고, 한때 일본의 기독교 전파에도 성공했다. 그러나 1580년에 아비스 가문이 단절되자 스페인 왕 펠리페 2세가 포르투갈 왕이 되어 사실상 스페인의 지배하에 놓였다. 17세기에 들어서 1640년에 독립을 회복했지만 (포르투갈 왕정 복고 전쟁), 아시아에 새로 진출한 네덜란드와 영국과의 경쟁에서 패배하자 남미 브라질 식민에 주력했다. 그 후, 나폴레옹 전쟁을 계기로 브라질 제국으로서 식민지에서 벗어났고, 또한 제2차 세계 대전 후 포르투갈은 인도의 고아에 있던 식민지에서 인도의 독립 후 철수했으며, 아프리카의 앙골라와 모잠비크 등의 식민지도 1970년대에 독립했다. 1999년에는 마카오를 중화인민공화국에 반환했다.
스페인은 1521년 코르테스의 아즈텍 제국 정복, 1533년 피사로의 잉카 제국 정복에 의해 16세기부터 19세기 초까지 북미 남서부에서 브라질을 제외한 남아메리카 전역에 걸쳐 대규모 식민지를 유지했지만 (위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1580년부터 1640년까지는 포르투갈과 그 식민지조차 스페인 왕의 지배하에 있었다), 영국 제국의 흥기와 왕조 교체에 따라 그 지배력은 약화되었다. 1810년에 이르러 현지 출생의 크리오요는 나폴레옹의 스페인 침공을 틈타 식민지 당국에 대해 독립을 시도하고, 그 후 15년에 걸친 공방 끝에 독립을 쟁취했다. 그 결과 스페인이 남북 아메리카 대륙에 유지할 수 있었던 식민지는 카리브해의 쿠바와 푸에르토리코뿐이었다. 또한 스페인은 1898년의 미국-스페인 전쟁에서 쿠바와 필리핀을 잃었다. 1975년에는 아프리카에 남아 있던 서사하라에서도 철수했다. 현재 아프리카 대륙에 세우타와 멜리야를 가지고 있지만, 자치권과 국정 참여권은 본토와 동등하며, 스페인 정부는 식민지가 아니라 외지 영토로 규정하고 있다.
12. 각국의 식민지
고대 그리스는 상호 독립적인 도시국가들로 이루어져 있었다. 그리스의 도시국가들은 자원과 무역로 등을 확보하기 위해 지중해 연안에 많은 도시들을 세웠고 이 도시들은 모국과 정치, 경제, 종교적인 유대관계에 있었다.[45]
고대 로마는 본국의 직할 부대를 식민지에 파견하여 식민지를 직접 통치하였다. 파견된 부대의 식량을 공급하기 위해 경작지를 마련하여 이를 colonia (농민을 뜻하는 라틴어 colonus에서 파생된 말)라 불렀다. colonia는 영어 colony의 어원이다.[45]
근대의 식민지는 대항해 시대에 이르러 본격화되었다. 초기 식민지 경쟁은 포르투갈과 에스파냐가 주도하여 서아프리카와 남아메리카에 이들의 식민지가 만들어졌다. 특히 남미의 에스파냐 식민지에서 유입된 막대한 양의 은으로 인해 유럽은 유례 없는 인플레이션을 겪을 정도였다.[45]
산업혁명이후 유럽의 강대국들은 세계 전체를 대상으로 식민지 쟁탈전을 벌였다. 이 시기를 경기에 비유해보자면, 식민지 쟁탈전의 선두 주자는 영국과 프랑스였다. 유럽 강대국들의 식민지 확보 정책은 흔히 제국주의로 표현된다.[45]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에 걸쳐 서유럽 열강에 의하여 아프리카 대륙은 식민지화 과정을 겪었다. 영국의 종단 정책과 프랑스의 횡단 정책이 교차되고 다시 독일, 이탈리아, 벨기에 등이 가담하여 더욱 격화되었다. 1910년에 아프리카의 독립국은 에티오피아와 라이베리아 두 나라뿐 이었다. 이들 원주민의 저항은 남아프리카 전쟁으로 발전하였고, 제국주의 국가 간의 충돌은 파쇼다 사건, 모로코 사건 따위로 표면화되었다.[45]
일본 제국은 1910년부터 한국을 식민지로 강제 병합하여 지배했다. 또한 타이완(1895~1945)을 식민 통치했다.
오만은 17세기부터 19세기 중반까지 서인도양 해양 제국을 건설하여 잔지바르(현 탄자니아령), 몬바사(현 케냐령), 모가디슈(현 소말리아령), 파키스탄 연안의 과다르 등을 지배하였다.
이스라엘 건국은 제1차 세계 대전에서 오스만 제국이 패배한 후, 영국 위임통치령으로 관리되던 팔레스타인 지역에 유대인들이 이주하면서 시작되었다. 제2차 세계 대전 전후 혼란기에 이주민이 증가했고, 국제연합의 결의에 따라 팔레스타인을 유대 국가와 아랍 국가로 분할하려 했으나, 중동 전쟁 발발과 이스라엘 독립으로 이어졌다. 제3차 중동 전쟁 이후 이스라엘은 요르단 강 서안 지구 등에 유대인 정착촌을 건설하여 팔레스타인 문제를 심화시키고 있다.
미국은 13개의 영국 식민지 연합으로 형성되었으며, 버지니아 식민지가 그 첫 번째였다. 13개 식민지는 1776년 7월 모두 독립을 선언하고 영국 총독들을 축출했다. 이후 서부로 영토를 확장하며 새로운 주를 추가했기에 식민지와 주의 경계는 모호했다. 태평양의 알래스카를 러시아로부터 매입하고, 하와이를 병합하여 자국 영토에 완전히 통합했다. 스페인-미국 전쟁에서 승리하여 카리브해의 쿠바, 푸에르토리코, 동남아시아의 필리핀, 괌을 식민지로 만들었다. 쿠바는 곧 독립했지만, 쿠바 혁명 이전까지 미국의 영향력 아래 있었다.
미국은 아메리카 원주민과 흑인 노예의 주권을 인정하지 않았다. 프런티어 개척 과정에서 원주민들을 축출하고, 미국-멕시코 전쟁을 통한 무력 병합으로 광대한 토지를 획득했다. 스페인-미국 전쟁으로 필리핀, 괌, 쿠바 등으로 영토가 확장되었고, 하와이 왕국을 병합하기도 했다.
"미국인의 생명, 자유 및 재산의 안전 확보"를 명분으로 미국 군대 개입을 요청하는 방식은 미국 제국주의 확장의 기본 구조였으며, 황제나 국왕의 이름을 필요로 하지 않는 19세기형 제국주의의 전형이었다. 스페인-미국 전쟁 승리로 중앙아메리카 국가들을 독립시키고 정치적, 경제적 영향력 아래 두었지만, 이들 국가는 바나나 공화국으로 불리며 미국 자본의 민간 기업들이 자본주의의 선봉에서 수탈 경영과 정치 개입을 자행했다. 쿠바 등 카리브 제도에 친미 정권을 지원하고, 도미니카 공화국, 그레나다 침공, 파나마 침공 등에는 군사 개입도 서슴지 않았다. 중앙아메리카의 푸에르토리코는 현재도 자치령으로 남아있으며, 북마리아나 제도 역시 미국의 지배하에 있다.
12. 1. 유럽 국가
포르투갈과 스페인은 이베리아 반도에서 이슬람 세력에 대한 국토 회복 운동인 레콩키스타를 완수한 후, 대항해 시대를 선도하며 해외로 진출했다.[45] 스페인은 콜럼버스의 신대륙 발견 후, 중앙아메리카의 멕시코, 남아메리카의 페루를 중심으로 한 광대한 영토를 획득했고, 태평양을 횡단하여 필리핀 제도의 지배에도 성공했다.
포르투갈 해양 제국과 스페인 제국의 영역을 구분한 것은 1494년 로마 교황 알렉산더 6세가 정한 토르데시야스 조약이다. 대서양에 서경 46도의 자오선을 긋고, 동쪽을 포르투갈, 서쪽을 스페인의 영토로 했다. 이 때문에 남아메리카 대륙에서는 브라질만이 포르투갈 영토가 되었다. 1529년 사라고사 조약에서는 현재 인도네시아에 해당하는 몰루카 제도의 동경 144도 30분(뉴기니 섬 중앙부에 해당)을 경계로 동쪽을 스페인, 서쪽을 포르투갈의 영토로 했다. 이 두 조약으로 세계는 포르투갈과 스페인에 의해 분할되었다.
포르투갈은 1418년부터 엔리케 항해왕자의 지휘 아래 아프리카 서해안 탐험을 계속했지만, 1488년 희망봉을 발견하자 동양의 향료 무역 독점을 목표로 인도양으로 진출했다. 1500년 카브랄이 브라질을 발견했고, 1511년 말라카를 지배한 후에는 마카오, 나가사키까지 무역권을 확장했으며, 한때 일본의 기독교 전파에도 성공했다. 그러나 1580년 아비스 가문이 단절되자 스페인 왕 펠리페 2세가 포르투갈 왕이 되어 사실상 스페인의 지배를 받았다. 17세기 들어 1640년 독립을 회복했지만(포르투갈 왕정 복고 전쟁), 아시아에 새로 진출한 네덜란드와 영국과의 경쟁에서 패배하여 남미 브라질 식민에 주력했다. 이후 나폴레옹 전쟁을 계기로 브라질은 브라질 제국으로 독립했고, 제2차 세계 대전 후 포르투갈은 인도의 고아 등 식민지에서 철수했으며, 아프리카의 앙골라와 모잠비크 등도 1970년대 독립했다. 1999년 마카오를 중화인민공화국에 반환했다.
스페인은 1521년 코르테스의 아즈텍 제국 정복, 1533년 피사로의 잉카 제국 정복으로 16세기부터 19세기 초까지 북미 남서부에서 브라질을 제외한 남아메리카 전역에 걸쳐 대규모 식민지를 유지했다. (1580년부터 1640년까지는 포르투갈과 그 식민지조차 스페인 왕의 지배를 받았다) 그러나 영국 제국의 흥기와 왕조 교체로 지배력이 약화되었다. 1810년 현지 출생 크리오요는 나폴레옹의 스페인 침공을 틈타 독립을 시도, 15년간의 공방 끝에 독립을 쟁취했다. 그 결과 스페인이 남북 아메리카 대륙에 유지할 수 있었던 식민지는 카리브해의 쿠바와 푸에르토리코뿐이었다. 1898년 미국-스페인 전쟁에서 쿠바와 필리핀을 잃었고, 1975년 서사하라에서도 철수했다. 현재 아프리카 대륙에 세우타와 멜리야를 보유하고 있지만, 자치권과 국정 참여권은 본토와 동등하며, 스페인 정부는 식민지가 아닌 외지 영토로 규정한다.
영국의 최초 식민지는 중세부터 이주해 온 아일랜드였다. 대항해 시대에 북아메리카 대륙으로 진출, 17세기부터 18세기에 걸쳐 뉴잉글랜드 식민지(13개 식민지)를 형성했고, 동인도회사를 통해 인도를 정복했다. 7년 전쟁에서 프랑스에 승리하여 캐나다를 획득하고 인도에서 프랑스 세력을 몰아냈다.
19세기 초 나폴레옹 전쟁에서 승리한 영국은 해상 패권을 장악하고 대영 제국을 건설, 동남아시아의 버마와 해협 식민지(후의 말레이시아), 홍콩, 오스트레일리아, 뉴질랜드, 아프리카의 나이지리아, 남아프리카(현재의 남아프리카 공화국), 남아메리카 대륙의 포클랜드 제도 등을 식민지로 삼았다. 제2차 세계 대전 후 민족 자결로 식민지들이 독립했고, 1997년 홍콩섬과 구룡반도를 중화인민공화국에 반환했다.(일국양제 참조)
1949년 인도 공화국을 비롯한 대영 제국의 옛 자치령·식민지·지역 중 일부는 영국 연방으로서 느슨한 관계를 유지하거나 재정의했다.[38] 현재도 케이맨 제도, 버진 제도, 버뮤다 등 카리브해 및 대서양의 여러 섬, 포클랜드 제도, 지브롤터 등을 해외 영토로 보유하고 있다.
프랑스는 캐나다의 퀘벡과 카리브해의 마르티니크섬, 과들루프섬에 이주했지만, 7년 전쟁에서 영국에 패배하여 캐나다를 포기했다. 서아프리카의 세네갈도 오래된 프랑스 식민지였다. 19세기에 알제리와 프랑스령 인도차이나, 프랑스령 폴리네시아의 타히티와 뉴칼레도니아 등을 식민지화했다.
이러한 식민지들도 제2차 세계 대전 후 독립해 나갔다. 타히티에서는 1990년대 프랑스 정부의 핵실험에 반발한 지역 주민들의 독립 운동이 있었으나, 자크 시라크 대통령은 "타히티는 프랑스의 일부"라며 핵실험을 실행했고, 현재도 독립 투쟁이 계속되고 있다.

네덜란드는 17세기부터 18세기에 걸쳐 네덜란드 해상 제국으로 불리는 식민지 대국이었다. 특히 17세기 전반은 네덜란드의 황금기였다. 20세기에도 네덜란드령 동인도(인도네시아)와 수리남을 지배했지만, 영국-네덜란드 전쟁으로 북미 식민지를 빼앗기고, 남아프리카 공화국 식민지도 영국 제국에 패배하여 잃는 등 국제적 지위가 쇠퇴했다.
20세기에는 인도네시아, 수리남이 독립하여 대부분의 영토를 상실했지만, 카리브해에 퀴라소와 아루바 두 개의 해외 영토를 가지고 있다.
러시아 제국은 16세기 모스크바 대공국이 킵차크 칸국(조치 울루스)으로부터 독립하여 주변 슬라브족 국가들을 병합하며 영토를 확장했다. 16세기 러시아 평원을 통일하여 러시아 제국을 건설한 후 동쪽으로 정복을 확장, 18세기 무렵 시베리아를 거의 정복했다. 시베리아 정복 후 남쪽으로 진출하여 중앙아시아의 칸국들을 식민지화했다. 청과 충돌하여 넬친스크 조약과 캬프타 조약으로 국경을 설정했지만, 19세기 청이 약화되자 아편전쟁과 아로호 사건을 이용하여 만주의 아무르 강 이북과 연해주(외만주)를 병합하고 식민지화했다.
중앙아시아를 무력 병합하고 발칸 반도로 진출하여 오스만 제국과 충돌했다(남하 정책, 범슬라브주의). 러일 전쟁과 제1차 세계 대전을 통해 일본, 독일 등과 충돌했지만, 제1차 세계 대전 중 러시아 혁명으로 러시아 제국은 멸망했다. 확장된 영토는 소비에트 연방에 계승되었고, 중앙아시아, 남코카서스, 비러시아 슬라브 지역은 구성 공화국으로 연방에 가입, 그 외 지역은 러시아 소비에트 연방 사회주의 공화국(러시아 SFSR) 영토가 되었다. 1941년 발트 3국을 병합했다.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동유럽 국가들은 소련의 위성국으로 식민지적 측면도 보였다. 냉전 종식과 소련 붕괴로 발트 3국(에스토니아, 라트비아, 리투아니아)을 제외한 구 소련 구성국들은 독립국가연합(CIS)을 결성하여 독립했고, 러시아 연방에 남은 시베리아, 극동 러시아에서도 많은 지역이 공화국을 구성하여 자치가 이루어지고 있다. 동유럽 국가들에서도 소련의 일당 독재 체제가 붕괴되고 그 세력권에서 이탈하게 되었다.
독일 제국은 탕가니카(현 탄자니아), 토고, 남서아프리카(현 나미비아) 등 아프리카 식민지와 남양 제도를 소유했지만 제1차 세계 대전 패배로 상실했다.
이탈리아 왕국은 이탈리아령 소말리아·리비아를, 짧은 기간 동안 에티오피아(이탈리아령 동아프리카)를 지배했지만, 제2차 세계 대전 중 에티오피아를 잃었다. 리비아는 1951년에 리비아 왕국으로, 소말리아는 이탈리아의 신탁통치를 거쳐 소말리아로 독립했다.
벨기에 국왕 레오폴드 2세는 베를린 회의 결의에 따라 콩고 일부(현재 콩고 민주 공화국 영토)를 사유지인 콩고 자유국으로 유지했다. 그러나 이 체제의 압정이 국제 사회로부터 비난받아 1908년 벨기에 정부의 식민지(벨기에령 콩고)로 이관되었다.
1960년 콩고 공화국으로 독립했다. 콩고 동쪽 르완다-우룬디(르완다와 부룬디로 독립)는 베르사유 조약에 따라 독일로부터 위임 통치령으로 획득한 식민지이다.
12. 2. 아시아 국가
- '''일본'''은 1910년부터 1945년까지 한국을 식민지로 지배했다.[30] 1948년 남한과 북한이 설립되었다.
- '''일본'''은 네덜란드(1624~1662), 스페인(1626~1642), 중국(1683~1895)에 이어 타이완(1895~1945)을 식민 통치했다.[30]
- '''오만'''은 17세기부터 19세기 중반까지 서인도양 해양 제국을 건설하여 잔지바르(현 탄자니아령), 몬바사(현 케냐령), 모가디슈(현 소말리아령), 파키스탄 연안의 과다르 등을 지배하였다.
- '''이스라엘'''은 제1차 세계 대전에서 오스만 제국이 패배한 후, 영국 위임통치령으로 관리되던 팔레스타인 지역에 유대인들이 이주하면서 시작되었다. 제2차 세계 대전 전후 혼란기에 이주민이 증가했고, 국제연합의 결의에 따라 팔레스타인을 유대 국가와 아랍 국가로 분할하려 했으나, 중동 전쟁 발발과 이스라엘 독립으로 이어졌다. 제3차 중동 전쟁 이후 이스라엘은 요르단 강 서안 지구 등에 유대인 정착촌을 건설하여 팔레스타인 문제를 심화시키고 있다.
12. 3. 미국
미국은 13개의 영국 식민지 연합으로 형성되었다. 버지니아 식민지가 그 첫 번째였다. 13개 식민지는 1776년 7월 모두 독립을 선언하고 영국 총독들을 축출했다.영국으로부터 독립한 후, 미국은 영국, 프랑스, 스페인, 멕시코로부터 영토를 무력으로 병합하거나 매입하며 서쪽으로 확장했다. 이 과정에서 새로운 주를 신설했기에 식민지와 주의 경계는 모호해졌다. 단기간에 서해안에 도달한 미국은 태평양 건너편으로 눈을 돌려 알래스카를 러시아로부터 매입하고, 하와이를 병합하여 각각 주로 승격, 자국 영토에 완전히 통합했다. 나아가 스페인-미국 전쟁에서 승리하여 스페인의 지배하에 있던 카리브해의 쿠바, 푸에르토리코, 동남아시아의 필리핀, 괌을 식민지로 만들었다. 쿠바는 곧 독립을 허용했지만, 쿠바 혁명 이전까지 장기간 미국의 영향력 아래 있었다.
미국은 건국 초기부터 개인의 재산적 자유권을 중시했지만, 백인 식민자의 후손들로 구성된 미국 의회는 아메리카 원주민과 흑인 노예의 주권을 인정하지 않았다.[42][43] 프런티어 개척 과정에서 원주민과 조약을 맺고 일정 부분 주권을 인정하기도 했으나, 미국 및 주 정부, 이주민들은 조약을 무시하거나 원주민에게 권리 포기를 강요하는 경우가 많았다. 오레곤 준주나 남서부 준주, 서해안으로 이동한 백인 개척자들은 1763년 선언 등 원주민과의 합의를 위반했음에도 불구하고, 개척자나 상인들에 대한 공격에 미국 육군이 출동했다. 인디언 강제 이주법을 통해 미시시피 동쪽은 물론 서쪽 프런티어에서도 원주민들을 축출했으며, 원주민들은 소액의 보상금과 교환하여 미국 정부에 토지를 강제로 양도해야 했다. 오레곤 준주 협상과 미국-멕시코 전쟁을 통한 무력 병합으로 미국 정부는 광대한 토지를 획득, 개척자들에게 무상 또는 매우 저렴한 가격으로 매각했다. 1890년대 프런티어 소멸과 비슷한 시기에 발생한 스페인-미국 전쟁으로 필리핀, 괌, 쿠바 등으로 영토가 확장되었고, 하와이 이주민의 쿠데타에 미국 해병대가 개입하여 하와이 왕국을 병합하기도 했다.
"미국인의 생명, 자유 및 재산의 안전 확보"를 명분으로 의회에 미국 군대 개입을 요청하는 방식은 미국 제국주의 확장의 기본 구조였으며, 황제나 국왕의 이름을 필요로 하지 않는 19세기형 제국주의의 전형이었다. 스페인-미국 전쟁 승리로 중앙아메리카 국가들을 독립시키고 정치적, 경제적 영향력 아래 두었지만, 이들 국가는 바나나 공화국으로 불리며 유나이티드 프루트나 돌 후르츠 컴퍼니 등 미국 자본의 민간 기업들이 자본주의의 선봉에서 수탈 경영과 정치 개입을 자행했다. 쿠바 등 카리브 제도에 친미 정권을 지원하고, 도미니카 공화국, 그레나다 침공, 파나마 침공 등에는 군사 개입도 서슴지 않았다. 중앙아메리카의 푸에르토리코는 현재도 자치령으로 남아있으며, 북마리아나 제도 역시 미국의 지배하에 있다.
13. 신식민주의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독립한 구 식민지 국가들에 대한 선진국들의 경제적, 정치적 지배를 의미하는 '''신식민주의'''는, 비록 정치적으로는 독립되어 있어도 경제적으로나 문화적으로 타국의 지배하에 놓여 있는 상태를 말하며, '''경제 식민지''', '''문화 식민지'''라고도 불린다.[50]
1960년대 영국과 프랑스가 아프리카의 옛 식민지에 재정 지원을 실시하여 "신식민주의"라는 비판을 받고 중단한 적이 있다. 공산주의 진영에서는 1960년대에 세계적으로 신식민주의가 진전되고 있다는 인식이 있었고, 중화인민공화국의 중국공산당은 1963년 소련을 "신식민주의의 변호인"이라고 비판했다.
21세기 들어 중국 등 신흥국의 부상을 배경으로 한 해외 투자와 개발 원조 역시 "신식민주의"라는 비판을 받기도 한다. 일례로 중국의 대 아프리카 원조에 대해 일부 선진국과 아프리카 국가에서 비판이 제기되었으며, 원조를 담당하는 중국 기업이 현지 환경을 파괴하거나 오염을 일으킨 사례도 있었다.
2008년 마다가스카르에서는 대한민국의 대우그룹이 마다가스카르 공화국 경작 가능 토지의 약 절반을 99년간 무상 임대하는 계약을 맺자 민중 폭동이 발생하여 마크 라발로마나나 대통령이 사퇴하고 계약이 철회되는 사태가 벌어지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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