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블로 이글레시아스
"오늘의AI위키"의 AI를 통해 더욱 풍부하고 폭넓은 지식 경험을 누리세요.
1. 개요
파블로 이글레시아스는 스페인의 사회주의 지도자이자 정치인으로, 스페인 사회주의 노동자당(PSOE) 창당을 주도하고 스페인 일반 노동 연합(UGT)을 창립하는 등 스페인 노동 운동과 민주주의 발전에 기여했다. 그는 인쇄공으로 일하며 노동 운동에 투신하여, 1870년 국제 노동자 협회에 참여하고 1879년 PSOE를 창당했다. 정치 활동으로 여러 차례 투옥되었지만, 언론 활동을 통해 사회주의 사상을 전파하고 노동자들의 권익을 대변했다. 1905년 마드리드 시의회 의원, 1910년 스페인 의회 최초의 사회주의 의원이 되었으며, 2천 편이 넘는 신문 기사를 통해 사회주의 사상을 널리 알렸다. 그의 사상은 갱생과 희망을 강조하며, 호세 오르테가 이 가세트와 어네스트 헤밍웨이 등으로부터 존경과 영향을 받았다.
더 읽어볼만한 페이지
- 스페인 사회주의노동자당의 정치인 - 프란시스코 라르고 카바예로
프란시스코 라르고 카바예로는 스페인 사회노동당과 스페인노동총동맹의 지도자로서 스페인 제2공화국 시기에 노동부 장관과 총리를 역임했으며, 급진 좌파로 전환 후 스페인 내전 중에는 총리 겸 국방장관을 지냈으나 나치에 체포되어 강제 수용소에 수감 후 파리에서 사망한 스페인의 정치인이자 노동 운동가이다. - 스페인 사회주의노동자당의 정치인 - 호르헤 셈프룬
스페인 내전 후 망명하여 레지스탕스 활동과 부헨발트 강제 수용소 수감 경험을 바탕으로 자전적 소설을 발표한 작가이자, 스페인 공산당 비밀 공작원 및 사회노동당 정부의 문화부 장관을 역임한 스페인 태생의 정치인, 영화 각본가이다. - 스페인의 사회주의자 - 발타사르 가르손
발타사르 가르손은 스페인 판사로, 국립고등법원 판사 임명 후 ETA 추적, 피노체트 체포영장 발부 등 국제 범죄 수사로 명성을 얻었으나 프랑코 정권 범죄 수사 시도와 불법 도청 혐의로 판사 자격이 박탈되었으며 현재는 어산지 변호사로 활동한다. - 스페인의 사회주의자 - 하비에르 바르뎀
스페인의 배우 하비에르 바르뎀은 배우 가문 출신으로 다양한 영화에서 뛰어난 연기를 선보이며 국제적인 명성을 얻고 여러 영화제에서 수상 및 후보 지명된 진보적인 정치적 성향을 가진 배우이다. - 페롤 출신 - 프란시스코 프랑코
프란시스코 프랑코는 스페인 내전에서 승리 후 1939년부터 1975년 사망할 때까지 스페인을 독재 통치한 군인이자 정치가이다. - 페롤 출신 - 마벨 리베라
마벨 리베라는 스페인의 배우로, 영화 《씨 인사이드》를 비롯해 《고야의 유령들》, 《오퍼나지: 비밀의 계단》 등 다양한 영화와 TV 시리즈에서 활동하며 폭넓은 연기 스펙트럼을 보여주고 있다.
파블로 이글레시아스 | |
---|---|
기본 정보 | |
![]() | |
이름 | 파블로 이글레시아스 |
본명 | 파울리노 이글레시아스 포세 |
국적 | 스페인 |
출생일 | 1850년 10월 18일 |
출생지 | 페롤, 갈리시아, 스페인 |
사망일 | 1925년 12월 9일 |
사망지 | 마드리드, 스페인 |
안장 장소 | 마드리드 시민 공동묘지, 마드리드, 스페인 |
배우자 | 암파로 멜리아 (1921년 결혼) |
자녀 | 후안 알멜라 멜리아 (의붓아들) |
직업 | 조판공, 노동 조합 활동가 |
![]() | |
웹사이트 | 파블로 이글레시아스 재단 |
정치 경력 | |
소속 정당 | 스페인 사회노동당 |
이전 소속 정당 | 누에바 페데라시온 마드릴레냐 콘훈시온 레푸블리카노-소시알리스타 |
의회 경력 | |
직위 | 스페인 사회노동당 대표 |
임기 시작 | 1888년 8월 25일 |
임기 종료 | 1925년 12월 9일 |
후임 | 훌리안 베스테이로 |
직위 | 국회의원 |
임기 시작 | 1910년 6월 10일 |
임기 종료 | 1923년 9월 15일 |
선거구 | 마드리드 |
직위 | 마드리드 시의회 의원 |
임기 시작 | 1906년 |
임기 종료 | 1910년 |
2. 생애
파블로 이글레시아스는 페롤에서 태어나 어려운 어린 시절을 보냈다. 아버지의 사망 후 마드리드로 이주하여 산 페르난도 호스피시오에서 인쇄 기술을 배웠고, 12세부터 인쇄공으로 일했다. 어려운 환경 속에서도 야간 수업을 통해 프랑스어를 익히고 노동 운동에 관심을 가졌다.
1870년 국제 노동자 협회(AIT)에 가입하며 노동 운동을 시작했다. 1879년 스페인 사회주의 노동자당(PSOE)을 창당하고, 1888년 스페인 일반 노동 연합(UGT)을 창립하여 스페인 노동 운동의 기틀을 마련했다.
정치 활동으로 여러 차례 투옥되었지만, ''엘 소시알리스타''를 창간하여 사회주의 사상을 전파하고 노동자들의 권익을 옹호했다. 1910년 스페인 최초의 사회주의 국회의원으로 당선되어 의정 활동을 펼쳤다.
1925년 사망 당시, 그의 사무실 서랍에는 ''엘 소시알리스타''에 남긴 1,000 페세타의 작별 선물이 있었다. 그의 장례식에는 15만 명이 넘는 노동자들이 참여하여 그의 죽음을 애도했다.[1]
2. 1. 어린 시절과 교육
파블로 이글레시아스는 페롤에서 아버지 페드로 이글레시아스와 어머니 후아나 사이에서 태어났으며, 파울리노라고 불렸다. 아버지 페드로 이글레시아스는 시립 노동자였는데, 그가 사망하면서 파블로는 6세에서 9세까지만 학교에 다닐 수 있었다.[1] 그의 남동생 마누엘과 어머니는 소지품을 작은 수레에 싣고 마드리드로 이사했다. 어머니는 구걸로 생계를 유지했고, 두 소년은 산 페르난도 호스피시오에 입학하여 초등학교를 마쳤다. 파블로는 그곳에서 인쇄 기술을 배웠다.[1]12세가 되자 파블로는 호스피시오를 떠나 일을 하며 어머니를 돕기 시작했다. 인쇄공으로 일하며 점차 임금을 올렸으나, 파업으로 실업자가 되었을 때 그의 형제는 결핵으로 사망했다.[1]
그는 야간 수업에 다니며 프랑스어를 배웠다. 이를 통해 프랑스 정치학 고전 작품을 읽고, 프랑스 사회주의자들의 작품을 번역했으며, 국제 회의에 참여할 수 있었다.[1]
2. 2. 노동 운동 투신
페롤 출신의 파블로 이글레시아스는 어린 시절 아버지의 사망 후 마드리드로 이주하여 어려운 환경 속에서 성장했다. 산 페르난도 호스피시오에서 인쇄 기술을 배운 그는 12세부터 인쇄공으로 일하며 생계를 유지해야 했다. 어려운 환경 속에서도 그는 야간 수업을 통해 프랑스어를 익혔고, 이를 통해 프랑스 정치학 고전과 사회주의자들의 저작을 접하며 노동 운동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1]1869년, 국제 노동자 협회(AIT)의 스페인 지부가 마드리드에서 회의를 열었고, 이글레시아스는 여기에 참석하여 1870년 인쇄공 부서에 가입했다. 그는 AIT의 기관지인 ''연대''에 글을 기고하며 본격적인 저널리스트 활동을 시작했다.[1]
1873년, 이글레시아스는 미술 인쇄공 협회에 가입했고, 이듬해 회장으로 선출되었다. 그는 이 직책을 바탕으로 비밀리에 노동자 정당 창당을 준비했고, 1879년 5월 22일, 스페인 사회주의 노동자당(PSOE) 창당을 주도했다.[1]
2. 3. PSOE와 UGT 창당
1879년 5월 22일, 마드리드에서 열린 비밀 연회에서 파블로 이글레시아스를 주도로 25명이 스페인 사회주의 노동자당(PSOE)을 창당했다.[1] 1888년 8월 12일에는 바르셀로나에서 스페인 일반 노동 연합(UGT)이 창립되었으며, 이 연합의 이름은 이글레시아스가 제안했다.[1]2. 4. 정치 활동과 투옥
1873년 이글레시아스는 미술 인쇄공 협회에 가입을 신청했고 다음 해에 회장으로 선출되었다. 이 직책을 통해 그는 세계 두 번째 노동자 정당을 시작하기 위해 여러 해 동안 비밀리에 활동을 시작했다. 1879년 5월 22일, 마드리드에서 열린 국제적인 형제애를 기리는 비밀 연회에서 25명(이글레시아스 주도)이 스페인 사회주의 노동자당(PSOE)을 창당했다.[1]정치 활동으로 이글레시아스는 반복적으로 투옥되었는데, 처음에는 파업 이후인 1882년에, 마지막은 60세였던 1910년에 투옥되었다. 그는 항상 사면 제안을 거부했고, 전과자로서 일부 고용주들은 그에게 일자리를 주지 않으려 했다. 1886년 3월 12일, 그가 창간한 신문인 ''사회주의자''와 인쇄공, 편집자, 그리고 그의 급여만이 그를 굶주림으로부터 구했다.[1]
1888년 8월 12일, 스페인 일반 노동 연합(UGT)이 바르셀로나에서 창립되었으며, 그 이름은 이글레시아스가 제안했다. 1889년 의회에서 그는 전국 위원회의 회장으로 임명되었고, 죽을 때까지 36년 동안 그 직책을 유지했다. 1890년 5월 1일, 마드리드에서 투쟁의 날이 처음으로 기념되었을 때, 그는 시위를 이끌었다. 그는 8시간 노동제와 같은 입법 개혁을 요구하는 대표단을 정부에 이끌었다. 1905년에 그는 처음으로 마드리드 시의회에 합류했다.[1]
공화주의자들은 이글레시아스에 반대했지만, 공화주의-사회주의 동맹은 1910년 선거에서 그를 스페인 의회의 최초 사회주의 의원으로 만들었다. 건강 악화로 인해 그는 1914년 이후 많은 의회 회의에 참석할 수 없었고, 그의 의원 경력은 제한되었다. 1923년 그는 마지막으로 의원으로 선출되었다.[1]
2. 5. 언론 활동
1869년 스페인 헌법에 의해 보호받은 국제 노동자 협회(AIT)의 스페인 지부는 마드리드에서 일련의 회의를 조직했고, 이글레시아스는 여기에 참석했다. 1870년에는 인쇄공 부서에 들어오라는 초대를 받았다. 국제 기관의 신문인 ''연대''의 등장은 그의 남은 생애를 채운 강렬한 저널리스트 경력을 시작하게 했다.[1]1886년 3월 12일, 이글레시아스는 그가 창간한 신문인 ''엘 소시알리스타''를 통해 사회주의 사상을 전파하고 노동자들의 의식을 고취하는 데 힘썼다. 그는 이론적 배경이 부족했음에도 불구하고, 스페인과 국제적으로 많은 훌륭한 지적 작품을 썼다. 1870년 12월 5일 ''연대''에서 발표한 그의 첫 번째 작품인 ''전쟁''부터 1925년 12월 5일 ''자유''에서 발표한 마지막 작품인 ''노동 계급은 승리할 것이다''까지 2천 편이 넘는 신문 기사를 스페인에서 출판했다.[1]
이글레시아스는 스페인 사회주의 이상주의자들 중에서 최고의 선전가 중 한 명이었으며, 그의 작품은 갱생과 희망을 위한 윤리적으로 일관된 외침을 담고 있었다.[1]
2. 6. 국회의원 당선과 의정 활동
1910년 선거에서 공화주의-사회주의 동맹을 통해 스페인 의회 최초의 사회주의 의원이 되었다.[1] 그러나 건강 악화로 1914년 이후 많은 의회 회의에 참석하지 못했고, 의원 경력은 제한적이었다.[1] 1923년에 마지막으로 의원에 선출되었다.[1]2. 7. 사망과 유산
1925년 12월 9일 이글레시아스는 사망했다. 사망 당시 그의 사무실 서랍에는 그가 창간 때부터 관계를 맺어온 ''사회주의자''에게 남긴 1,000 페세타의 작별 선물이 있었다.[1] 사후 그에 대한 광범위한 찬사가 쏟아졌다. 정부의 허가 하에 15만 명 이상의 노동자들이 그의 장례 행렬을 마드리드의 시민 묘지까지 동행했다.스페인의 자유주의 철학자 호세 오르테가 이 가세트는 그를 "세속적인 성자"라고 칭송했다.[1] 어네스트 헤밍웨이는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에서 "신의 자비가 스페인 국민에게 임하기를. 그들이 가진 어떤 지도자도 그들을 망칠 것이다. 2천 년 만에 한 사람, 파블로 이글레시아스...." (제35장)라고 썼다.
3. 사상과 업적
파블로 이글레시아스는 프랑스어를 공부해 프랑스 정치학 고전을 읽고 프랑스 사회주의자들의 작품을 번역했으며, 국제 회의에도 참여했다.[1] 1870년 국제 노동자 협회 인쇄공 부서에 들어가 ''연대''라는 신문에서 활동하며 언론인 경력을 시작했다.[1]
이글레시아스는 스페인 사회주의 이상주의를 널리 알린 인물로, 2천 편이 넘는 신문 기사를 발표했다.[1] 그의 글은 갱생과 희망을 위한 윤리적 메시지를 담고 있다는 평가를 받는다.[1] 그는 1905년 마드리드 시의회 의원을 거쳐, 1910년 스페인 의회 최초의 사회주의 의원이 되었으나, 건강 문제로 1914년 이후 의회 활동이 제한되었다. 1923년 마지막으로 의원에 선출되었다.[1]
그가 사망했을 때, 사회주의자 신문사에 1,000 페세타를 기부했다. 그의 장례식에는 15만 명이 넘는 노동자들이 참여했다.[1] 호세 오르테가 이 가세트는 그를 "세속적인 성자"라고 불렀고,[1] 어네스트 헤밍웨이는 소설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에서 이글레시아스를 언급했다.
3. 1. 노동 운동 기여
파블로 이글레시아스는 1873년 미술 인쇄공 협회에 가입했고, 다음 해에 회장으로 선출되었다.[1] 그는 이 직책을 통해 세계 두 번째 노동자 정당을 시작하기 위해 여러 해 동안 비밀리에 활동했다. 1888년 8월 12일, 이글레시아스는 바르셀로나에서 스페인 일반 노동 연합(UGT)을 창립하였고, UGT라는 이름은 이글레시아스가 제안했다.[1]1890년 5월 1일, 마드리드에서 최초로 투쟁의 날 기념 시위가 열렸을 때, 이글레시아스는 이 시위를 이끌었다. 그는 8시간 노동제와 같은 입법 개혁을 요구하는 대표단을 이끌고 정부에 요구사항을 전달했다.[1]
3. 2. 민주주의 발전 기여
스페인 사회주의 노동자당(PSOE)과 스페인 일반 노동 연합(UGT)을 창립하여 스페인 민주주의 발전에 필요한 노동자들의 정치적, 사회적 권리 향상에 기여했다.[1]1879년 5월 22일, 마드리드에서 25명의 동지들과 함께 스페인 사회주의 노동자당(PSOE)을 창당했다.[1] 이는 세계에서 두 번째로 오래된 노동자 정당이었다. 1888년 8월 12일에는 바르셀로나에서 스페인 일반 노동 연합(UGT)을 창립했으며, 이글레시아스가 직접 이름을 제안했다.
1890년 5월 1일, 마드리드에서 최초로 '투쟁의 날' 시위를 주도하고, 정부에 8시간 노동제 등 입법 개혁을 요구하는 대표단을 이끌었다. 이러한 노력으로 1910년 선거에서 스페인 의회 최초의 사회주의 의원으로 당선되었다.
이글레시아스는 정치 활동으로 인해 여러 차례 투옥되었지만, 항상 사면 제안을 거부했다. 1886년에는 사회주의자 신문을 창간하여 노동자들의 목소리를 대변했다.
4. 평가
파블로 이글레시아스에 대한 평가는 다양하다. 호세 오르테가 이 가세트는 그를 "세속적인 성자"라고 칭찬했고,[1] 어니스트 헤밍웨이는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에서 긍정적으로 언급했다.
4. 1. 긍정적 평가
호세 오르테가 이 가세트는 파블로 이글레시아스를 "세속적인 성자"라고 칭찬했다.[1] 어니스트 헤밍웨이는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에서 "신의 자비가 스페인 국민에게 임하기를. 그들이 가진 어떤 지도자도 그들을 망칠 것이다. 2천 년 만에 한 사람, 파블로 이글레시아스...."라고 썼다.
본 사이트는 AI가 위키백과와 뉴스 기사,정부 간행물,학술 논문등을 바탕으로 정보를 가공하여 제공하는 백과사전형 서비스입니다.
모든 문서는 AI에 의해 자동 생성되며, CC BY-SA 4.0 라이선스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위키백과나 뉴스 기사 자체에 오류, 부정확한 정보, 또는 가짜 뉴스가 포함될 수 있으며, AI는 이러한 내용을 완벽하게 걸러내지 못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제공되는 정보에 일부 오류나 편향이 있을 수 있으므로, 중요한 정보는 반드시 다른 출처를 통해 교차 검증하시기 바랍니다.
문의하기 : help@durumi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