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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오르크 폰 프룬츠베르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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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게오르크 폰 프룬츠베르크는 1473년 민델하임에서 태어난 용병대장이자 군사 지휘관이다. 그는 슈바벤 전쟁, 란츠후트 계승 전쟁, 캉브레 동맹 전쟁 등 다양한 전쟁에 참여했으며, 란츠크네히트 부대를 이끌고 혁신적인 전술을 선보였다. 그는 1504년 벤첸바흐 전투에서 활약하여 기사 작위를 받았으며, 1525년 파비아 전투에서 프랑수아 1세를 포로로 잡는 데 기여했다. 1527년 로마 약탈 직전 뇌졸중으로 쓰러져 사망했지만, 그의 란츠크네히트들은 로마 약탈에 참여했다. 그는 "란츠크네히트의 아버지"로 불리며, 독일 민델하임에서는 그를 기리는 축제가 열리고, 발할라 신전에 흉상이 있으며, 여러 작품과 단체에서 그의 이름을 사용하며 기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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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오르크 폰 프룬츠베르크

2. 초기 생애

프룬츠베르크는 슈바벤 동맹 군대의 대위였던 울리히 폰 프룬츠베르크와 그의 아내 바르바라 폰 레흐베르크 사이에서 민델하임에서 태어났다. 티롤 백작 가문 출신 기사 가문으로, 상부 슈바벤에 정착했던 그는 아홉 아들 중 막내였기에 아버지의 영지를 상속받을 기회가 없었다. 그는 어릴 때부터 전사의 길을 준비했으며, 아버지 게오르크가 외삼촌인 레흐베르크의 베르(베로) 2세로부터 사들인 민델하임의 성에서 자랐다.

독일 남부 알고이 지방의 민델하임(바이에른-슈바벤 지방) 귀족 자제로 태어났지만, 형이 가문을 잇고 자신에게 주어진 영토가 적었기 때문에 군인의 길을 걸었다.

3. 군사 경력

프룬츠베르크는 강직하고 엄격한 성품을 지녔으며, 레겐스부르크 전투에서 세운 공으로 신성 로마 제국 황제 막시밀리안 1세 (카를 5세의 조부)에게서 정식 기사 작위를 받았다. 그의 군대는 다른 란츠크네흐트와 달리 약탈을 금지하고 무기 품질에 신경 썼으며, 리베이트를 거부하여 용맹하고 강력했다.

전투에서 프룬츠베르크는 전황을 판단하여 무익한 추격을 피하고, 불리할 때는 즉시 퇴각을 지시해 군대의 불필요한 손실을 막았다. 1519년에는 슈바벤 동맹의 보병을 이끌고 울리히를 그의 공국에서 몰아내는 데 기여했다.

1521년 보름스 국회에서 프룬츠베르크는 "어린 수도사" 마르틴 루터에게 격려의 말을 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4]

3. 1. 초기 활동 (1492년 ~ 1509년)

1492년, 프룬츠베르크는 아버지와 함께 호엔촐레른 가문의 브란덴부르크안스바흐 변경백 프리드리히 1세의 군사 작전에 참여하여, 바이에른 공작 알브레히트 4세에 대한 황제의 금지령 집행 권한을 받았다. 알브레히트가 굴복하면서 원정은 취소되었다. 1499년 슈바벤 전쟁에서 프룬츠베르크는 스위스 연방에 맞서 합스부르크 황제 막시밀리안 1세를 위해 싸웠는데, 이때 그는 중장갑 기사 시대가 끝났음을 깨달았다. 같은 해, 그는 밀라노 공작에서 폐위된 루도비코 스포르차를 지원하기 위해 파견된 신성 로마 제국 군대에 합류했다. 그의 임무는 프랑스 왕 루이 12세였다. 막시밀리안이 그를 티롤 군사 대장으로 임명했을 때, 그는 스위스의 사례를 따라 장창병 대형 보병 부대를 강력하게 모집했다.

1504년 막시밀리안 1세와 체코 우트라비스트 군대 간의 벤첸바흐 전투


1504년, 프룬츠베르크는 란츠후트 계승 전쟁에 참여하여 팔라티네 백작 팔라티네의 루프레히트와 그의 아버지 선제후 팔라티네 필리프와 싸웠다. 그는 란츠크네히트 연대를 이끌고 벤첸바흐 전투에서 두각을 나타냈고, 막시밀리안 1세는 그에게 친히 기사 작위를 수여했다. 머스킷과 컬버린으로 무장한 프룬츠베르크 연대는 마차 벽을 부수고 보헤미아 왕국 용병(300대 이상의 마차로 구성)을 격파했다. 프룬츠베르크는 훈련된 토착 보병의 필요성을 확신하고 막시밀리안이 란츠크네히트 군대를 조직하는 데 협력했다. 1년 후, 그는 합스부르크 네덜란드에서 란츠크네히트의 사령관이 되었다.

그 후 프룬츠베르크는 제국과 합스부르크를 위해 계속 전쟁에 참여했다. 1509년, 그는 란츠크네히트 연대(점령군)의 "최고 야전 대장"으로 임명되어 캉브레 동맹 전쟁에 참여, 베네치아 공화국과 싸웠고, 베로나를 여러 차례 공격으로부터 방어하면서 명성을 얻었다.[1]

3. 2. 이탈리아 전쟁 (1509년 ~ 1527년)

1509년, 그는 란츠크네히트 연대(점령군)의 "최고 야전 대장"으로 임명되어 캉브레 동맹 전쟁에 참여하여 베네치아 공화국과 싸웠고, 베로나를 여러 차례 공격으로부터 방어하면서 자신과 그의 부하들에게 명성을 얻었다.[4] 1512년에는 야코프 폰 엠스와 함께 가스통 드 푸아를 지원하기 위해 파견된 제국 파견대를 이끌고 브레시아를 탈환했다.

독일을 잠시 방문한 후, 그는 이탈리아 반도로 돌아와 베네치아인과 프랑스인에 맞선 그의 사업으로 새로운 영예를 얻었다.[4] 그는 스페인 사령관 페르난도 다발로스와 함께 1513년 라 모타 전투에서 란츠크네히트를 이끌며 프룬츠베르크의 좌우명 "Viel Feind', viel Ehr'" ("많은 적, 많은 명예")에 따라 압도적으로 많은 베네치아 군대를 격파했다.

1521년 보름스 국회에서 그는 "어린 수도사" 마르틴 루터에게 격려의 말을 했다고 전해지며,[4] 이탈리아 전쟁 (1521년~1526년) 동안 프룬츠베르크는 제국군이 피카르디로 진군하도록 도왔다. 프랑스 왕 프랑수아 1세가 약 4만 명의 병력으로 전장에 나타났을 때, 카를 5세의 영리한 철수는 그들의 생존을 구했다. 프룬츠베르크는 발랑시엔에서의 철수를 "전쟁 중 가장 큰 행운이자 가장 적절한 조치"라고 생각했다.

1522년 프랑스 원정이 끝나고 프룬츠베르크가 란츠크네히트 지휘에서 물러난 후, 그는 6,000명의 병력을 이끌고 이탈리아 북부로 진군했다. 눈이 많이 쌓인 험난한 알프스 횡단은 4월 밀라노 근처 비코카 전투로 이어졌다. 프룬츠베르크는 앞에서 이끌고 싸웠고, 보병인 스위스 국민들과 함께 싸웠다. 비코카에서의 황제의 승리는 과두제 제노바 공화국밀라노 공국의 이전 통치자들이 복귀하게 하고 롬바르디아의 대부분이 카를 5세의 영향력 아래 놓이게 했다.

란츠크네히트 용병 ( 파비아 전투의 태피스트리 (베르나르트 판 오를레이 작품, 1528년에서 1531년 사이))


1525년, 프룬츠베르크는 독일 전체의 "최고 야전 대장"(병력 12,000명과 29명의 기수)으로 민델하임에 잠시 머문 후, 파비아를 구하고 제국의 밀라노 공국을 구하기 위해 다시 이탈리아 북부로 이동했다. 6,000명의 추가 병력, 그 중 일부는 스페인 병력이었지만, 적은 매우 강력했고, 프룬츠베르크는 프랑스 왕을 사로잡는 그의 가장 유명한 파비아에서의 승리를 거두었다.

1526년, 이탈리아에서 전쟁이 재개되었을 때 프룬츠베르크는 전쟁을 결정하는 데 도움을 주기 위해 롬바르디아에 있는 황제 군대로부터 도움 요청을 받았다. 충분하지는 않았지만, 그는 새로운 군대를 조직하기 위해 36,000 독일 탈러를 확보했다. 프룬츠베르크는 민델하임에 주둔하는 동안 돈을 빌리고 은 식기와 아내의 보석을 팔아 남은 자금을 모아 군대를 일으켰다. 3주도 채 안 되어 프룬츠베르크는 12,000명 이상의 병력을 조직하고 11월 중순에 알프스를 건넜다. 그는 부르봉 공작 샤를 3세와 피아첸차 근처에서 합류하여 로마로 진군했다. 그러나 이탈리아에서 몇 달 동안의 작전 후 결정적인 전투가 벌어지지 않으면서 1527년 3월 13일 모데나 근처에서 질서와 규율이 무너졌다. 용병에 대한 지불이 연체되었고, 결국 프룬츠베르크조차도 란츠크네히트를 집결시키고 질서를 회복할 수 없었다. 이 문제는 늙은 지휘관을 매우 흔들어서 뇌졸중을 앓게 되었다.

3. 3. 로마 약탈과 죽음 (1527년 ~ 1528년)

1525년, 롬바르디아주 (이탈리아 북동부) 파비아 전투에서 프랑수아 1세를 포로로 잡으며 영웅이 되었다.

그러나 카를 5세가 분전한 란츠크네흐트에 대한 보수를 제대로 지급하지 않아 불만이 커졌고, 결국 1527년 5월 6일 반란이 일어났다.[4] 병으로 누워있던 프룬츠베르크는 이 소식을 듣고 급히 달려가 "로마에서 그대들은 부와 명예를 얻을 것이다"라고 설득했지만, 분노한 란츠크네흐트는 프룬츠베르크에게 반항했다. 그때 프룬츠베르크는 갑자기 쓰러졌고, 란츠크네흐트는 이를 외면한 채 "로마에는 재보가 있다. 돈, 돈이다!"라고 외치며 로마로 쳐들어가 살육과 약탈을 자행했다. 이것이 유명한 로마 약탈이다.

1528년 프룬츠베르크는 뇌졸중으로 고향 민델하임에서 사망했다. 향년 54세였다.

4. 가족

프룬츠베르크는 합스부르크 왕가에 헌신적인 충신이자 유능하고 기사도적인 군인으로 알려져 있다.[5] 그의 아들 중 한 명은 1524년 파비아 전투 직전 이탈리아에서 전사했다. 또 다른 아들 카스파르 폰 프룬츠베르크(1500년~1536년)와 그의 손자 게오르크 폰 프룬츠베르크 2세(?~1586년) 모두 뛰어난 군인이었다. 게오르크 2세가 사망하면서 가문은 대가 끊어졌다.

5. 평가 및 유산

프룬츠베르크는 유능하고 기사도적인 군인이자 합스부르크 왕가의 헌신적인 충신으로 평가받았다. 그의 아들 카스파르(1500–1536)와 손자 게오르크(1586년 사망) 모두 뛰어난 군인이었다. 게오르크가 사망하면서 가문은 대가 끊어졌다.

"란츠크네히트의 아버지"라는 칭호는 프룬츠베르크의 동시대인들이 그의 권위와 병사들의 이익에 대한 헌신을 묘사하며 그를 지칭할 때 사용했다.[5] 그는 신성 로마 제국 황제 막시밀리안 1세로부터 정식 기사로 서임될 정도로 강직하고 엄격한 성품을 지녔다. 그의 군대는 약탈을 금지하고 무구의 질에 신경 썼으며, 리베이트를 거부했기 때문에 용맹하고 강력했다. 또한 전황을 보고 판단하여 무익한 추격을 하지 않고, 전세가 불리할 때는 즉시 퇴각을 지시하여 군대의 무의미한 손해를 피했다.[5]

1525년 파비아 전투에서 프랑수아 1세를 포로로 잡은 일로 영웅이 되었으나, 1527년 로마 약탈 당시 란츠크네흐트의 반란을 진정시키려다 졸중으로 쓰러져 1528년 사망했다.

5. 1. 문화적 묘사

민델하임의 ''프룬츠베르크 축제''.


프룬츠베르크의 생애에 관해 많은 일화와 이야기가 전해 내려오며, 그에 대한 전설(''Mythos Frundsberg'')이 형성되었다. 이 ''Mythos''에 초기에 기여한 인물은 용병대장의 첫 번째 전기 작가이자 작가이며 신비주의자인 아담 라이스너였다. 그는 한때 프룬츠베르크의 비서였으며, 그가 묘사한 많은 사건의 증인이었다. 라인하르트 바우만은 라이스너가 프룬츠베르크를 미화했지만, 다른 작가가 다루거나 얼버무릴 수 있는 많은 현실적인 사건들을 묘사했다고 평가한다. 프룬츠베르크에 대한 또 다른 초기 직접적인 자료는 시인 오스발트 프라겐스타이너였는데, 그는 서기였을 뿐만 아니라 프룬츠베르크 휘하의 군인이기도 했다.[6]

발할라 신전: 상단 및 중간 행에는 프룬츠베르크와 그의 동시대 사람들의 흉상이 있다.

  • 독일에서 가장 큰 역사 축제 중 하나인 민델하임의 Frundsbergfest|프룬츠베르크 축제de는 게오르크 폰 프룬츠베르크를 기리고 있다.[6]
  • 게오르크 폰 프룬츠베르크는 미카 발타리의 역사 소설 ''모험가''(별칭 ''미카엘 카르바야카''(''Mikael Karvajalka''))의 등장인물이다.
  • 1841년, 막스 폰 비트만이 조각한 흉상이 발할라 신전에 추가되었다.
  • 오스트리아의 프란츠 요제프 1세는 1866년에 개관한 비엔나 군사사 박물관의 장군 홀(''Feldherrenhalle'')에 그의 명예를 기리는 동상을 세웠다.
  • 1873년에 진수된 오스트리아-헝가리 해군의 코르벳함 SMS 프룬츠베르크는 그의 이름을 따서 명명되었다.
  • 제2차 세계 대전 중, 1943년 10월 3일 명령에 따라 ''무장친위대''(Waffen-SS) 제10 기갑사단은 명예 칭호 ''프룬츠베르크''를 부여받았다.

참조

[1] 논문 Reinhard Baumann: Mythos Frundsberg. Familie, Weggefährten, Gegner des Vaters der Landsknechte (reviewed by Christof Paulus) https://www.recensio[...] Recensio 2021
[2] 서적 Maximilian I. und die Kriegsführung seiner Zeit https://www.academia[...] 2014
[3] 서적 The landsknechts: German militiamen from late XV and XVI century https://books.google[...] Soldiershop Publishing 2016-12-04
[4] 서적 Heroes of History Will Durant
[5] 웹사이트 Mythos Frundsberg (Buchbesprechung) https://www.portal-m[...] 2020-04-13
[6] 뉴스 Frundsbergfest 2023: Programm, Eintritt & Infos zum Fest in Mindelheim https://www.augsburg[...] 2023-06-14
[7] 문서 カール5世はこの酸鼻を極めたランツクネヒト略奪行為に対して「これは余の責任ではない」と述べ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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