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크 드 라 팔리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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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자크 드 라 팔리스는 프랑스 군인으로, 15세에 샤를 8세 휘하에서 군 복무를 시작하여 이탈리아 전쟁과 캉브레 동맹 전쟁 등에 참전했다. 그는 여러 전투에서 활약했으나, 1513년 스퍼스 전투에서 포로로 잡히기도 했다. 프랑수아 1세 치세에 프랑스 원수로 복귀했으며, 마리냐노 전투에 참여했다. 이후 파비아 전투에서 포로로 잡혀 처형되었다. 라 팔리스는 또한 그의 묘비명에서 유래된 '라팔리사드'라는 우스운 문구로도 알려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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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크 드 라 팔리스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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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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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 정보 | |
이름 | 자크 드 라 팔리스 |
출생 연도 | 1470년 |
사망 날짜 및 장소 | 파비아 전투, 1525년 2월 24일 |
국적 | 프랑스 |
직업 | 프랑스 원수 |
활동 기간 | |
활동 기간 | 알려지지 않음 |
업적 | |
업적 | 프랑스 원수 |
2. 생애
자크 드 라 팔리스는 오베르뉴의 라팔리스에서 태어나, 샤를 8세, 루이 12세, 프랑수아 1세를 섬기며 여러 전투에 참여했다. 15세에 샤를 8세를 섬기기 시작하여 생토뱅뒤코르미에 전투(1488년)에 참전했고, 이후 이탈리아 전쟁 등에서 활약했다. 루이 12세 치하에서는 아브루초 부왕을 지내기도 했으나, 루보 전투에서 패배하여 포로가 되기도 했다.
프랑수아 1세 즉위 후에는 프랑스 대원수와 프랑스 육군원수 직함을 받으며 마리냐노 전투 등에서 활약했다. 카를 5세와의 평화 협상에 참여하기도 했으나 결렬되었고, 이후 비코카 전투, 마르세유 포위전, 파비아 전투 등에 참전했다. 파비아 전투에서 란츠크네흐트에게 포로로 잡혀 처형되면서 생을 마감했다.
2. 1. 초기 경력 (샤를 8세 ~ 루이 12세)
오베르뉴의 라팔리스에서 태어난 자크 드 라 팔리스는 15세에 동갑인 샤를 8세 휘하에서 복무를 시작했다. 그의 첫 전투는 생토뱅뒤코르미에 전투(1488년)였다. 4년 뒤, 그는 외스타슈 드 몽베롱의 딸 잔 드 몽베롱과 결혼했다. 1494년, 나폴리 왕국과의 전쟁에 왕을 따라 참전했고, 1495년 나폴리 함락과 포르노보 전투에서 프랑스군이 본국으로 퇴각하는데 기여했다.샤를 8세 사후, 라 팔리스는 루이 12세를 따라 밀라노와의 전쟁에 참전했다. 그는 아브루치와 풀리아의 일부를 정복했고, 1502년 아브루치 부왕으로 임명되었다. 그러나 루보 전투(1503년)에서 패배하여 곤살로 페르난데스 데 코르도바에게 포로로 잡혔다가 1504년에 석방되었고, 같은 해 아내가 사망했다.
1507년, 라 팔리스는 제노바 공성전에서 프랑스 선봉대를 이끌다 심각한 부상을 입었다. 1509년 캉브레 동맹 전쟁이 발발하자, 트레빌리오 공성전과 아냐델로 전투에 참여했다. 이후 롬바르디아의 프랑스군 총사령관이 되어 막시밀리안 1세를 도우러 파견되었으나, 1509년 파도바 공성전은 실패했다. 1511년 샤를 당부아즈 사후, 이탈리아 내 프랑스군 총사령관 및 프랑스의 그랑 메트르로 임명되었다.
가스통 드 푸아가 이탈리아에 도착한 후, 라 팔리스는 그의 휘하에서 볼로냐를 구원하고 라벤나 전투 (1512년)에 참전했다. 드 푸아의 사망으로 총사령관직을 이어받았으나, 늦은 행동으로 프랑스군은 롬바르디아에서 쫓겨났다.
프랑스로 돌아온 라 팔리스는 나바라의 후안 3세를 구출하러 피레네로 파견되었지만, 아르투아의 테루안으로 이동하여 잉글랜드군에 대항했다. 1513년 8월 6일 긴가트 전투에서 패배하여 포로로 잡혔고, 후안 3세도 패배하면서 루이 12세의 확장주의는 종말을 맞았다. 라 팔리스는 해임되어 은퇴 후, 1514년 마리 드 믈룅과 결혼하여 4명의 자녀를 두었다.
2. 2. 캉브레 동맹 전쟁과 이탈리아 전쟁 (1509년 ~ 1522년)
자크 드 라 팔리스는 오베르뉴의 라팔리스에서 태어났다. 15세에 동갑인 샤를 8세 휘하에서 근무하며 생토뱅뒤코르미에 전투 (1488년)에 처음 참전했다. 1494년에는 나폴리 왕국과의 전쟁에서 왕을 따라 포르노보 전투 (1498년)에 참여했다. 샤를 8세 사후 루이 12세를 따라 밀라노와의 전쟁에 참전, 아브루치와 풀리아 일부를 정복하고 1502년 아브루치 부왕이 되었으나 루보 전투 (1503년)에서 패배, 곤살로 페르난데스 데 코르도바에게 포로로 잡혔다가 1504년에 석방되었다.1509년 캉브레 동맹 전쟁이 발발하자 트레빌리오 공성전과 아냐델로 전투에 참여, 롬바르디아의 프랑스군 총사령관이 되어 막시밀리안 1세를 도왔으나 파도바 공성전에는 실패했다. 1511년 샤를 당부아즈 사후 이탈리아 내 프랑스군 총사령관, 프랑스의 그랑 메트르가 되었다.
가스통 드 푸아 휘하에서 볼로냐를 구원하고 라벤나 전투 (1512년)에 참전, 드 푸아 사후 총사령관직을 이었으나 롬바르디아에서 프랑스군이 축출되었다.
프랑스로 돌아온 후 피레네로 파견되었다가 아르투아에 있는 테루안으로 변경, 긴가트 전투에서 패배하여 포로가 되었다. 이후 은퇴하였다가 프랑수아 1세에 의해 복직, 프랑스 육군원수가 되었다. 육군원수 오비니 지휘 하에 피에몬테 침공, 빌라프란카를 함락시키고, 마리냐노 전투에 참전, 누아용 조약 체결 후 프랑스로 돌아왔다.
카를 5세와의 평화 협상을 위해 칼레에 파견되었으나 실패, 오데 드 푸아 휘하로 이탈리아에 돌아와 비코카 전투 (1522년)에서 패배했다. 다시 피레네로 파견되었다가 마르세유 포위를 풀고 아비뇽 정복 후 밀라노로 이동, 1524년 파비아 공성전을 시작, 파비아 전투에서 란츠크네흐트에게 붙잡혀 처형당했다.
2. 3. 프랑수아 1세 치세와 죽음 (1515년 ~ 1525년)
프랑수아 1세는 라 팔리스에게 프랑스 대원수 직함을 돌려주었고, 1515년 1월 2일에는 프랑스 육군원수 직함까지 추가했다. 라 팔리스는 육군원수 오비니의 지휘하에 피에몬테 침공에 참여하여, 프로스페로 콜론나에 맞서 빌라프란카를 함락시키고, 마리냐노 전투에서 프랑수아 1세의 휘하 장교 중 한 명이었다. 누아용 조약 서명 후, 전쟁이 끝나자 프랑스로 돌아갔다.라 팔리스는 신성 로마 제국의 카를 5세와의 평화 협상을 위해 칼레에 파견되었다. 협상 참가자들이 합의에 이르지 못하자, 그는 육군원수 오데 드 푸아 휘하 장교로 이탈리아에 돌아와, 비코카 전투 (1522년)에서 프랑스군 주력 부대를 지휘했지만 콜론나에게 패배했다. 라 팔리스는 다시 피레네 산맥으로 파견되었고, 이후 부르봉 공작이 이끄는 마르세유 포위를 풀어내는 데 성공했다. 아비뇽 정복 후, 그는 스페인으로부터 버림받았던 밀라노로 이동했다. 1524년 10월 28일, 라 팔리스는 안토니오 데 레이바가 지키는 파비아 공성전을 시작했다. 황제-스페인군이 도착하자 파비아 전투 (1525년 2월 24일)가 벌어졌다. 라 팔리스는 교전 중에 독일인 란츠크네흐트에게 붙잡혀 처형당했다.
3. 라팔리사드
라 팔리스는 우스운 문구 라팔리사드에 그의 이름을 주었다. 이 신조어는 라 팔리스의 묘비명에서 생겼는데, 다음과 같다[3][4]:
:"''Ci-gît le Seigneur de La Palice: s'il n'était pas mort, il ferait encore envie.''"
:("이곳에 라 팔리스 영주가 누웠다: 만약 그가 죽지 않았더라면, 그는 여전히 부러움을 받았을 것이다.")
이 문장들은 긴 s가 혼동을 일으켰던 "...il ſerait [serait] encore en vie" ("...그는 여전히 살아있을 것이다")라고 잘못 읽혔다(사고였든 간에 고의였든 간에). 16세기에 이 오독은 민중들의 풍자 노래로 흡수되었고, 여러 시기에 다양하게 발전하였다. 18세기 초 베르나르 드 라 몽누아는 우스운 라 팔리스의 4행 연구집 50개가 넘는 것을 수집했고 라 팔리스의 노래라는 희과곡으로 출판했다. 이 노래에서 나온 프랑스어 단어 라팔리사드 (Lapalissade)는 전적으로 명백한 사실을 의미한다.
4. 한국 정치 관점에서 본 라팔리스
자크 드 라 팔리스에 대한 한국 정치적 관점을 다루는 것은 주어진 정보가 없으므로 불가능합니다. 추가적인 정보가 제공되어야 합니다.
참조
[1]
웹사이트
Encyclopédie des Expressions: Une vérité de La Palice / Une lapalissade
http://www.mon-expre[...]
2007-06-14
[2]
서적
2500 noms propres devenus communs
https://books.google[...]
[3]
웹사이트
Encyclopédie des Expressions: Une vérité de La Palice / Une lapalissade
http://www.mon-expre[...]
2007-06-14
[4]
서적
2500 noms propres devenus communs
https://books.goog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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