폴 오닐 (야구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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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폴 오닐은 1985년부터 2001년까지 메이저 리그 베이스볼에서 활약한 야구 선수이다. 신시내티 레즈와 뉴욕 양키스에서 뛰었으며, 통산 타율 .288, 2105안타, 281홈런, 1269타점을 기록했다. 1994년에는 .359의 타율로 아메리칸 리그 타격왕을 차지했고, 올스타전에 5회 선정되었다. 뉴욕 양키스 소속으로 1996, 1998, 1999, 2000년 월드 시리즈 우승을 이끌었다. 은퇴 후에는 YES 네트워크에서 해설자로 활동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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폴 오닐 (야구인)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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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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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수명 | 폴 오닐 |
원어명 | Paul Andrew O'Neill |
소속 구단 | 뉴욕 양키스 |
등번호 | 21 (영구 결번) |
국적 | 미국 |
출생지 | 오하이오주 콜럼버스 |
생년월일 | 1963년 2월 25일 |
신장 | 193cm |
체중 | 91kg |
수비 위치 | 외야수 (우익수) |
투구 | 좌 |
타석 | 좌 |
프로 입단 연도 | 1981년 |
드래프트 순위 | 4라운드 |
첫 출장 | 1985년 9월 3일 (신시내티 레즈) |
마지막 경기 | 2001년 10월 7일 (뉴욕 양키스) |
선수 경력 | |
경력 | 신시내티 레즈 (1985년 ~ 1992년) 뉴욕 양키스 (1993년 ~ 2001년) |
기타 정보 |
2. 어린 시절
오하이오주 콜럼버스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 찰스 "칙" 오닐은 야구에 대한 열정이 깊었고, 전 마이너 리그 투수였다. 찰스는 자신의 자식들에게 야구에 대한 지식과 애정을 가르쳤다.[1] 오닐은 5세 때 임시 야구 경기장을 만들 수 있는 큰 집으로 이사하여 형제들과 함께 야구를 즐겼다.[1]
오닐은 대학에 진학하는 대신 야구를 선택하여 마이너 리그에서 뛰게 되었다. 그의 고향 팀인 신시내티 레즈는 1981년 아마추어 드래프트 4라운드에서 오닐을 지명하였다. 레즈는 그를 루키 팀인 빌링스 무스탱스로 보냈다. 18세의 오닐은 66경기에서 29개의 타점과 37득점, 7개의 2루타, 2개의 3루타, 3개의 홈런을 기록했다. 무스탱스는 30승 40패의 기록으로 시즌을 마감했다.
폴 오닐은 1985년 9월 3일 세인트루이스 카디널스와의 경기에서 8회초 데이브 밴고더의 대타로 출전하며 메이저 리그에 데뷔하여 우익수 앞 1루타를 기록했다.[1] 1987년에는 주로 대타로 출전하다 시즌 후반 피트 로즈 감독에 의해 출전 시간이 늘어나면서 성장 가능성을 보였다.
1960년대와 1970년대 초반, 오하이오 주에서 자란 오닐은 자연스럽게 신시내티 레즈의 팬이 되었다.[1] 1970년 여름, 찰스는 오닐을 신시내티의 크로슬리 필드에서 열린 레즈와 피츠버그 파이리츠의 경기에 데려갔다. 어린 오닐은 우익수이자 4번의 타격 챔피언, 12번의 골드 글러브 수상자인 로베르토 클레멘테를 좋아하게 되었다.[1] 찰스는 아들들의 리틀 리그 코치를 맡았고, 지방 구장의 잔디를 깎아 아들들이 좋은 환경에서 야구를 할 수 있도록 도왔다.[1] 오닐은 어릴 때부터 경쟁심이 강했고, 초등학교와 중학교를 거치며 야구에 대한 목표를 갖게 되었다.[1]
14세 때 오닐은 콜럼버스에 있는 브룩헤이븐 고등학교에 입학하여 야구, 농구, 미식축구를 했다.[1] 오닐은 투수와 타자 모두 뛰어났으며, 3학년 때는 콜럼버스 시립 선수권 대회에서 무안타 경기를 펼쳤다.[1] 졸업반 때는 야구와 농구 모두에서 대학 장학금 제의를 받았고, 프로 야구 스카우트들의 관심도 끌었다.[1]
3. 마이너 리그 경력
오닐은 1982년 시즌에 레즈의 클래스 A 팀인 세다래피즈 레즈에서 뛰었다. 이때 로스앤젤레스 출신의 20세 외야수 에릭 데이비스와 함께 뛰었는데, 몇 년 후 메이저 리그에서도 함께 활약하게 된다. 오닐은 세다래피즈에서 116경기에 출전하여 8개의 홈런과 71개의 타점, .272의 타율을 기록했다. 팀은 61승 71패로 리그 사우스 디비전 최하위를 기록했다.
1983년 시즌, 오닐은 클래스 A 플로리다 리그의 탬파 타폰스에서 시작했다. 에릭 데이비스가 AA로 승격된 반면, 오닐은 훗날 동료가 되는 23세의 왼손잡이 투수 톰 브라우닝을 만났다. 오닐은 8개의 홈런, 51개의 타점, .278의 타율을 기록했다. 그는 시즌 나머지를 AA 이스턴 리그의 워터버리 레즈에서 보냈다.
오닐은 1984년 시즌을 이스턴 리그의 버몬트 레즈에서 뛰었다. 훗날 신시내티 레즈에서 함께 뛰게 될 크리스 사보와 캘 대니얼스가 버몬트 팀의 동료였다. 오닐은 31개의 2루타, 5개의 3루타, 16개의 홈런, 76개의 타점, 29개의 도루, .265의 타율을 기록했다. 버몬트 레즈는 75승 65패로 이스턴 리그 4위를 기록했다.
그해 12월 29일, 21세의 오닐은 고향에서 네벌리 데이비스와 결혼했다.
1985년, 신시내티 레즈는 오닐을 콜로라도주의 AAA 덴버 제퍼스로 승격시켰다. 그 해는 오닐에게 최고의 시즌이었다. 137경기에 출전한 오닐은 .305의 타율로 안타(155개)와 2루타(32개) 부문에서 리그 1위를 차지했다. 그는 또한 7개의 홈런을 치고 74타점을 기록했다.
4. 메이저 리그 경력
1988년부터 신시내티 레즈의 주전 선수로 자리 잡았고, 1989년 시즌에는 루 피니엘라 감독 부임과 함께 팀이 91승을 거두며 10년 만에 첫 페넌트 우승을 차지했다. 1990년 시즌에는 뛰어난 수비 활약으로 우익수 부문 수비율과 외야 보조에서 내셔널 리그 1위를 차지했다. 1991년에는 28개의 홈런과 91개의 타점을 기록하며 커리어 하이 시즌을 보냈다.
1992년 11월 3일, 뉴욕 양키스는 로베르토 켈리를 상대로 폴 오닐을 트레이드했다. 오닐은 돈 매팅글리에게 멘토링을 받으며 성장했다. 1994년에는 .359의 타율로 아메리칸 리그 타격왕을 차지했고, 이후 양키스와 4년 1천 9백만 달러에 계약을 맺었다. 1995년 선수노조 파업으로 시즌이 단축되었음에도 불구하고, 22개의 홈런과 96개의 타점을 기록하며 팀의 와일드카드 획득에 기여했다.
1996년, 1998년, 1999년, 2000년 뉴욕 양키스의 월드 시리즈 우승에 핵심적인 역할을 했다. 2001년 시즌을 끝으로 은퇴했다.
4. 1. 신시내티 레즈
1985년 9월 3일 세인트루이스 카디널스와의 경기에서 8회초 데이브 밴고더의 대타로 출전하며 메이저 리그에 데뷔했다. 이 경기에서 오닐은 우익수 앞 1루타를 기록했다.[1]
1987년에는 주로 대타로 출전하다가 시즌 후반 피트 로즈 감독에 의해 출전 시간이 늘어나면서 12개의 2루타, 5개의 홈런, 22개의 타점을 기록하며 .297의 타율로 성장 가능성을 보였다.
1988년부터 신시내티 레즈의 주전 선수로 자리 잡았다. 1989년 시즌에는 루 피니엘라 감독 부임과 함께 팀이 91승을 거두며 10년 만에 첫 페넌트 우승을 차지했다.
1990년 시즌에는 16개의 홈런과 78개의 타점을 기록하며 .270의 타율을 기록했다. 특히, 수비에서도 뛰어난 활약을 펼쳐 우익수 부문 수비율(.993)과 외야 보조(13개)에서 내셔널 리그 1위를 차지했다. 같은 해 내셔널 리그 챔피언십 시리즈에서는 3개의 2루타, 1개의 홈런, 4개의 타점을 기록하며 .417의 타율로 활약하며 팀의 월드 시리즈 진출에 크게 기여했다. 비록 롭 디블과 랜디 마이어스에게 밀려 NLCS MVP 수상에는 실패했지만, 시리즈 최고의 타자 중 한 명이었다. 그러나 월드 시리즈에서는 12타수 1안타(.083)로 부진했다.
1991년에는 .256의 타율을 기록했지만, 28개의 홈런과 91개의 타점을 기록하며 커리어 하이 시즌을 보냈다.
4. 2. 뉴욕 양키스
1992년 11월 3일, 뉴욕 양키스는 로베르토 켈리를 상대로 폴 오닐을 트레이드했다. 오닐은 돈 매팅글리에게 멘토링을 받으며 성장했다. 1994년에는 .359의 타율로 아메리칸 리그 타격왕을 차지했고, 출루율(.461) 2위, 장타율(.603)과 OPS(1.064)에서 4위를 기록했으며, MVP 투표에서는 5위에 올랐다. 이후 오닐은 양키스와 4년 1천 9백만 달러에 계약을 맺었다.
1995년 선수노조 파업으로 시즌이 단축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오닐은 22개의 홈런과 96개의 타점을 기록하며 팀의 와일드카드 획득에 기여했다.
4. 2. 1. 4개의 월드 시리즈 우승
1996년, 1998년, 1999년, 2000년 뉴욕 양키스의 월드 시리즈 우승에 핵심적인 역할을 했다.
1998년 아메리칸 리그 챔피언십 시리즈에서는 4차전 1회 선제 솔로 홈런, 5차전 2루타 및 타점 추가 등 뛰어난 활약으로 팀을 월드 시리즈로 이끌었다. 월드 시리즈에서는 홈런은 없었으나 4안타 3득점을 기록했다.
1999년에는 갈비뼈 부상과 부친상에도 불구하고 월드 시리즈에 출전, 1차전에서 3:1로 앞서는 2타점 적시타를 치는 등 팀의 우승에 공헌했다.
2000년 월드 시리즈에서는 4차전 3루타 및 득점 등 2개의 2루타와 3루타를 기록하며 맹활약했다.
2001년 시즌을 끝으로 은퇴했다.
5. 은퇴 이후
2001년 시즌 후, 오닐은 계약이 만료되고 37세의 나이로 은퇴를 고려하기도 했다. 하지만 2000년 11월 16일, 그는 725만달러에 1년 계약을 맺었다. 그는 시즌 후 은퇴할 계획이었지만, 팀에 혼란을 주지 않기 위해 시즌 후까지 공식 발표를 미뤘다.
9월 2일 펜웨이 파크에서 열린 경기에서, 양키스의 선발 투수 마이크 무시나는 8⅔이닝 동안 레드삭스를 완벽하게 막아냈지만, 마지막 타자 칼 에버렛에게 안타를 허용하며 완벽한 경기가 무산되었다.
9월 7일 오닐은 왼쪽 발에 스트레스 골절을 입어 부상자 명단에 올랐다. 4일 후, 뉴욕은 9.11 테러의 공격을 받았다. 오닐을 포함한 양키스 선수들은 그라운드 제로와 아모리를 방문하여 피해자들을 위로했다.
9월 18일 야구가 재개되었지만, 오닐은 10월 3일까지 부상자 명단에 머물렀다. 복귀 후, 그는 2타수 2안타(2홈런)를 기록하며 플레이오프 로스터에 포함되었다.
25경기를 결장했음에도 불구하고, 38세의 오닐은 33개의 2루타, 21개의 홈런, 70개의 타점, 그리고 22개의 도루를 기록하며 .267의 타율을 기록했다. 그는 한 시즌에 최소 20홈런과 20도루를 기록한 역대 최고령 선수가 되었다. 양키스는 4년 연속 디비전 챔피언십을 차지했다.
아메리칸 리그 디비전 시리즈에서 양키스는 애슬레틱스에게 첫 두 경기를 패했지만, 오닐은 4차전에서 2루타를 치며 팀의 9-2 승리에 기여했다.
아메리칸 리그 챔피언십 시리즈에서 양키스는 116승을 거둔 매리너스를 상대했다. 오닐은 1차전에서 2개의 홈런을 쳤고, 양키스는 시리즈에서 4승 1패로 승리하며 4년 연속 아메리칸 리그 페넌트를 차지했다. 오닐은 시리즈 동안 2개의 홈런과 3개의 타점을 기록하며 .417의 타율을 기록했다.
애리조나 다이아몬드백스와의 월드 시리즈에서, 오닐의 은퇴 계획이 언론에 알려지면서 양키 스타디움은 그가 마지막 경기를 치르는 것에 대한 기대감으로 가득 찼다.
4차전에서 양키스는 8회까지 커트 실링에게 막혀 1-3으로 뒤지고 있었지만, 9회말 오닐의 1루타와 티노 마르티네스의 극적인 동점 홈런으로 경기를 연장으로 이끌었다. 이후 데릭 지터가 끝내기 홈런을 쳐 시리즈를 원점으로 돌렸다.
5차전은 4차전과 비슷하게 진행되었다. 양키스는 9회초까지 2-0으로 앞서고 있었고, 팬들은 오닐의 마지막 경기를 응원했다. 9회말 스콧 브로셔스가 동점 투런 홈런을 쳤고, 양키스는 연장전에서 승리하며 시리즈 전적 3승 2패를 만들었다. 하지만 양키스는 6, 7차전을 내주며 월드 시리즈 우승에는 실패했고, 이는 오닐의 선수 경력에 아쉬운 마무리가 되었다.
6. 연도별 타격 성적
오닐은 선수 경력 동안 451개의 2루타, 21개의 3루타, 281개의 홈런과 함께 통산 .288의 타율을 기록했다. 1041 득점, 1269 타점을 기록했고, 6번이나 .300 이상의 타율을 기록했다. 그는 타격왕 타이틀을 한 번 획득했고, 5번 올스타 경기에 출전했다. 또한 6번의 페넌트 우승과 5번의 월드 시리즈 우승을 경험했다. 포스트 시즌에서는 11개의 홈런과 39개의 타점을 기록하며 .284의 타율을 기록했다.[1]
7. 수상 경력
참조
[1]
웹사이트
1988년 9월 16일 (금), Riverfront Stadium, vs LA 다저스
http://www.baseball-[...]
[2]
웹사이트
1998년 5월 17일 (일), Yankee Stadium, vs 미네소타 트윈스
http://www.baseball-[...]
[3]
웹사이트
1999년 7월 18일 (일), Yankee Stadium, vs 몬트리올 엑스포스
http://www.basebal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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