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라뇨 옐라치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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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프란츠 옐라치치는 1746년 크로아티아 왕국에서 태어나, 오스트리아 군대에서 복무한 군인이다. 그는 1799년 펠트키르히 전투에서 프랑스군을 상대로 승리하여 야전원수로 진급하고, 마리아 테레지아 군사 훈장을 수여받았으며, 남작 칭호를 받았다. 옐라치치는 나폴레옹 전쟁에도 참전했으나, 1805년 도른비른에서 항복하고, 1809년 장크트 미하엘 전투에서 패배하는 등 불운을 겪었다. 그는 1810년 잘라아파티에서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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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프라뇨 옐라치치 - [인물]에 관한 문서 | |
|---|---|
| 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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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존칭 접두사 | 남작 |
| 이름 | 프라뇨 옐라치치 부짐스키 |
| 원어 이름 (영어) | Franz Jellacic / Francis Yellachich of Buzhim |
| 원어 이름 (독일어) | Franz Jellačić von Buzim |
| 원어 이름 (헝가리어) | Ferenc Jellacsics de Buzim |
| 출생일 | 1746년 4월 14일 |
| 출생지 | 페트리냐, 크로아티아 왕국, 합스부르크 군주국 |
| 사망일 | 1810년 2월 4일 |
| 사망지 | 잘라파티, 헝가리 왕국, 오스트리아 제국 |
| 별칭 | (없음) |
| 매장지 | (알 수 없음) |
| 소속 | |
| 군 종류 | 육군 |
| 복무 기간 | 1763년–1810년 |
| 최종 계급 | 야전원수 |
| 수훈 | 마리아 테레지아 군사 훈장 (1799년) |
| 가족 관계 | 요시프 옐라치치, 아들 아나 포르트너 폰 회플라인, 아내 |
| 이후 직책 | 보병 연대 Nr. 62 소유주 |
| 전투 | |
| 전투 목록 | 오스트리아-튀르크 전쟁 (1788년-1791년) 체틴그라드 구원 프랑스 혁명 전쟁 뷔르츠부르크 전투 펠트키르히 전투 나폴레옹 전쟁 울름 전역 도른비른 항복 장크트미하엘 전투 라브 전투 바그람 전투 |
2. 초기 경력
프라뇨 옐라치치는 1746년 크로아티아 왕국 페트리냐에서 태어났다. 군인 가문 출신으로, 1763년부터 군 생활을 시작하여 여러 전투에서 공을 세웠다. 1799년 펠트키르히 전투에서는 5,500명의 병력으로 12,000명의 프랑스군을 격파하는 큰 승리를 거두었다. 이 공로로 마리아 테레지아 군사 훈장을 받고 남작 작위를 받았으며, 야전원수로 승진했다. 1801년에는 아들 요시프 옐라치치가 태어났는데, 아들 역시 훗날 장군이 되어 1848년 헝가리 혁명에서 활약했다.
2. 1. 군 경력 시작
1746년 크로아티아 왕국 합스부르크 왕가의 페트리냐에서 태어난 옐라치치는 1763년 제1 바날 그렌츠 보병 연대의 장교 생도가 되었다.[1] 그는 1772년에 대위로, 1783년에 소령으로 임명되었다.[1] 오스트리아-튀르크 전쟁 (1787-1791)에 참여하여 중령으로 진급했으며,[1] 합스부르크 군주국 군대의 그렌츠 보병에서 계속 복무하며 1794년 대령으로 진급했다.[1] 그는 라인강 상류에서 벌어진 제1차 대프랑스 동맹 전쟁, 뷔르츠부르크 전투 등 여러 전투에서 싸웠고, 1797년 3월 소장으로 승진했다.[1]1799년 3월 23일 포어아를베르크의 펠트키르히 전투에서 옐라치치는 5,500명의 병사를 이끌고 12,000명의 프랑스군을 물리쳤다.[2] 오스트리아군은 900명의 사상자를 냈고, 프랑스군은 3,000명의 사상자를 냈다.[2] 그의 부대는 제20 카우니츠 보병 연대 3대대, 제38 드뱅 보병 연대, 제9 페터바드다이너 그렌츠 보병연대, 제6 성조지 그렌츠 보병연대 2대대, 제7 브로더 그렌츠 보병연대 1대대로 구성되었다.[2] 프랑스군은 앙드레 마세나와 니콜라 우디노 등 훗날 원수가 되는 두 명이 이끌었다.[3] 이 공적으로 옐라치치는 야전원수로 진급하고[4] 마리아 테레지아 군사 훈장 기사 십자훈장을 받았으며,[5] 세습 남작 작위를 받았다.[5] 1802년 프란츠 2세 황제는 그를 새로운 헝가리 복장을 갖춘 제62 프란츠 옐라치치 보병 연대의 연대장으로 임명했는데, 이 부대는 제53 요한 옐라치치 보병 연대와는 다른 부대이다.[5] 1801년 그의 아내 아나 포르트너 폰 회플라인은 아들 요시프 옐라치치를 낳았고, 요시프 옐라치치도 훗날 장군이 되어 1848년 헝가리 혁명에서 오스트리아 정권을 지원했다.[1]
2. 2. 승진과 참전
옐라치치는 1763년 제1 바날 그렌츠 보병 연대의 장교 생도가 되었다. 1772년에 대위로, 1783년에 소령으로 임명되었다. 그는 오스트리아-튀르크 전쟁 (1787-1791)에 참여하여 중령으로 진급했다. 1794년에는 대령 계급으로 진급했다.[1] 그는 라인강 상류에서 벌어진 제1차 대프랑스 동맹 전쟁, 뷔르츠부르크 전투 등에서 싸웠고, 1797년 3월에 소장으로 승진했다.[1]1799년 3월 23일 포어아를베르크의 펠트키르히 전투에서 옐라치치는 5,500명의 병사를 이끌고 12,000명의 프랑스군을 상대로 승리했다. 오스트리아군은 900명의 사상자를 냈고, 프랑스군에게는 3,000명의 사상자를 입혔다. 당시 그의 지휘 하에는 다음과 같은 부대들이 있었다:[2]
| 부대 |
|---|
| 제20 카우니츠 보병 연대 3대대 |
| 제38 드뱅 보병 연대 |
| 제9 페터바드다이너 그렌츠 보병연대 |
| 제6 성조지 그렌츠 보병연대 제2대대 |
| 제7 브로더 그렌츠 보병연대 제1대대 |
프라뇨 옐라치치는 제1차 대프랑스 동맹 전쟁 당시 라인강 상류 지역과 뷔르츠부르크 전투 등 여러 전투에서 활약했다. 1797년 3월에는 소장으로 진급했다.[1] 1799년에는 펠트키르히 전투에서 큰 승리를 거두었다.
프랑스군은 앙드레 마세나와 니콜라 우디노가 이끌었는데, 이들은 훗날 원수가 되었다.[3] 옐라치치는 이 공적으로 야전원수로 승진[4]하고 마리아 테레지아 군사 훈장 기사 십자 훈장을 받았다. 또한 세습 남작 칭호도 받았다. 1802년 프란츠 2세 황제는 그를 헝가리 부대인 ''Franz Jellačić'' 보병 연대 제62연대의 연대장으로 임명했다. (이 부대는 ''Johann Jellačić'' 보병 연대 제53연대와는 별개의 조직이다.)[5] 1801년 그의 아내 아나 포트너 폰 횔라인은 아들 요시프 옐라치치를 낳았는데, 요시프 옐라치치 역시 훗날 장군이 되어 1848년 헝가리 혁명에서 오스트리아 정권을 지지했다.[1]
3. 프랑스 혁명 전쟁
3. 1. 펠트키르히 전투 (1799년)
1799년 3월 23일 포어아를베르크의 펠트키르히 전투에서 옐라치치는 5,500명의 병사를 이끌고 12,000명의 프랑스군을 상대로 승리했다. 오스트리아군은 900명의 사상자를 내고 적에게 3,000명의 사상자를 입혔다.[2] 옐라치치의 지휘 하에 있던 부대는 다음과 같다.
| 부대 |
|---|
| 제20 카우니츠 보병 연대 3대대 |
| 제38 드뱅 보병 연대 |
| 제9 페터바드다이너 그렌츠 보병연대 |
| 제6 성조지 그렌츠 보병연대 제2대대 |
| 제7 브로더 그렌츠 보병연대 제1대대 |
[2]
프랑스군은 훗날 원수가 되는 앙드레 마세나와 니콜라 우디노가 이끌었다.[3] 이 공적으로 옐라치치는 야전원수로 진급[4]하고 마리아 테레지아 군사 훈장 기사 십자 훈장을 받았다. 또한 세습 남작 칭호도 받았다.[5]
3. 2. 전후
Franjo Jelačićhr는 제1차 대프랑스 동맹 전쟁, 뷔르츠부르크 전투 등 여러 전투에서 활약했으며, 1799년 3월 23일 포어아를베르크의 펠트키르히 전투에서 5,500명의 병력을 이끌고 12,000명의 프랑스군을 상대로 승리했다.[1] 이 전투에서 오스트리아군은 900명의 사상자를 냈지만, 프랑스군에게는 3,000명의 사상자를 안겨주었다. 그의 부대는 제20 카우니츠 보병 연대 3개 대대, 제38 드뱅 보병 연대, 제9 페터바드다이너 그렌츠 보병연대, 제6 성조지 그렌츠 보병연대 제2대대, 제7 브로더 그렌츠 보병연대 1개 대대로 구성되었다.[2] 프랑스군은 훗날 원수가 되는 앙드레 마세나와 니콜라 우디노가 지휘했다.[3]이러한 공적을 인정받아 옐라치치는 야전원수로 진급하고, 마리아 테레지아 군사 훈장 기사 십자 훈장을 받았다.[4] 또한 세습 남작 작위도 받았다. 1802년 프란츠 2세 황제는 그를 새로운 헝가리 부대인 ''Franz Jellačić'' 보병 연대 제62연대의 연대장으로 임명했다. (이 부대는 ''Johann Jellačić'' 보병 연대 제53연대와는 다른 부대이다.)[5] 1801년에는 그의 아내 아나 포트너 폰 횔라인이 아들 요시프 옐라치치를 낳았는데, 아들 요시프 역시 훗날 장군이 되어 1848년 헝가리 혁명에서 오스트리아 정권을 지지했다.[1]
4. 나폴레옹 전쟁
옐라치치는 1805년 울름 작전에서 오스트리아 대공 페르디난트 카를 요제프와 카를 막 폰 라이베리히 휘하의 군단을 지휘했다. 그의 부대는 비버라흐 안 데어 리스를 방어했고,[6] 10월에는 울름으로 이동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당시 옐라치치는 15,000명의 병력을 지휘했다. 나폴레옹 1세와 그의 대육군은 오스트리아군을 포위하기 시작했고,[7] 베르팅겐 전투, 귄츠부르크 전투, 하슬라흐-융닝겐 전투에서 오스트리아군을 압박했다.[8] 옐라치치는 옥센하우젠을 경유하여 티롤로 남쪽으로 행군하라는 명령을 받았다.[9]
left
옐라치치의 부대는 울름 항복에서 탈출하여 콘스탄스 호수 근처 포어아를베르크까지 도달했지만,[10] 피에르 오제르 원수의 추격을 받았다. 결국 옐라치치는 1805년 11월 13일 도른비른 항복에서 남은 4,000명의 병력과 함께 항복했다.[11] 항복 조건에 따라 오스트리아군은 1년 동안 프랑스에 대항하여 싸우지 않겠다는 약속과 함께 보헤미아로 귀환했다.[12]
right
제5차 대프랑스 동맹 전쟁을 위해 은퇴에서 복귀한 옐라치치는 요한 폰 힐러의 제6군단에서 보병 사단을 지휘했다.[14] 전쟁 초반, 옐라치치의 사단은 뮌헨을 점령하라는 명령을 받았고, 오스트리아군이 아벤스베르크 전투, 란츠후트 전투, 에크뮐 전투에서 패배한 후 잘츠부르크로 돌아가라는 명령을 받았다.[16]
옐라치치의 사단은 오스트리아 대공 요한의 군대에 배속되었다.[17] 4월 29일 바이에른군이 잘츠부르크를 점령하자 옐라치치는 남쪽으로 빠져나갔다.[18] 5월 1일과 4~5일 골링 안 데어 잘차흐 근처 루에그 고개를 성공적으로 방어했다.[19] 요한 대공은 옐라치치가 합류하기를 원했지만, 명령이 모호하게 표현되어 옐라치치는 고립된 위치에 머물렀다. 5월 19일까지 그 자리에 머물렀다가 그라츠로 철수했지만 너무 늦었다.
1809년 5월 25일, 폴 그르니에가 이끄는 프랑코-이탈리아 군단이 레오벤 근처 장크트 미하엘 전투에서 옐라치치의 사단을 따라잡았다. 옐라치치는 전투 이전에 대부분의 포병을 보냈고, 단 4문의 대포만 남겨두었다. 결국 옐라치치가 이끄는 9,000명의 병력은 압도적인 전력 차이로 인해 큰 피해를 입었다.[21]
이후 옐라치치와 생존자들은 헝가리를 가로지르는 오스트리아 대공 요한의 후퇴에 합류했다. 라아브 전투에서 그는 우익 사단의 보병을 지휘하여 첫 번째 프랑코-이탈리아 공격을 격퇴했지만, 전투는 오스트리아의 패배로 끝났다.[24] 그는 바그람 전투에서 그의 사단을 지휘했지만, 요한 대공의 군대는 전투 결과에 영향을 미치기에는 너무 늦게 도착했다.[25]
4. 1. 울름 전역 (1805년)
1805년, 옐라치치는 오스트리아 대공 페르디난트 카를 요제프와 카를 막 폰 라이베리히의 군대에서 울름 작전 동안 군단을 지휘했다. 처음에는 그의 부대가 비버라흐 안 데어 리스를 방어했다.[6] 10월 6일경, 막은 옐라치치에게 울름으로 이동하라고 명령했다. 당시 옐라치치는 16개 보병대대, 6개 예거 중대, 6개 기병 대대로 구성된 15,000명의 병력을 지휘했다. 황제 나폴레옹 1세와 그의 대육군은 오스트리아군을 포위하기 시작했다.[7] 10월 8일 베르팅겐 전투, 10월 9일 귄츠부르크 전투, 10월 11일 하슬라흐-융닝겐 전투 동안 대육군은 오스트리아군에게 접근해왔다.[8] 12일에 막은 옐라치치를 요한 지기스문트 리에슈, 프란츠 폰 베르네크, 카를 필리프, 슈바르첸베르크 공과 함께 군단장으로 임명하여 자신의 군대를 재편성했다. 그는 옐라치치에게 옥센하우젠을 경유하여 티롤로 남쪽으로 행군하라고 명령했다.[9]left
옐라치치의 부대는 울름 항복에서 탈출하여 콘스탄스 호수 근처 포어아를베르크까지 도달했다.[10] 나폴레옹은 원수 피에르 오제르와 그의 12,000명 규모의 군단에게 옐라치치를 추적하도록 배정했다.[11] 일련의 소규모 작전에서 오제르는 오스트리아군을 꾸준히 뒤로 밀어내고 그들의 병력을 분열시켰다.[12] 옐라치치는 11월 13일 도른비른 항복에서 남은 4,000명의 병력과 함께 오제르에게 항복했다.[11] 항복 조건에 따라 오스트리아군은 1년 동안 프랑스에 대항하여 싸우지 않겠다는 약속과 함께 보헤미아로 귀환했다. 크리스티안 볼프스켈 폰 라이헨베르크 소장과 바르텐슬레벤 및 킨스키 대령 휘하의 기병 1,000명은 바이에른을 거쳐 보헤미아에 무사히 도달했다.[12] 로한 공작 휘하의 포어아를베르크 병력의 또 다른 부분은 베네치아에 도달하려 했지만 목표에서 40km 떨어진 곳에서 붙잡혔다. 로한은 로랑 구비옹 생 시르와 장 레니에에게 카스텔프란코 베네토에서 항복했다.[13]
4. 2. 도른비른 항복 (1805년)
1805년 11월 13일, 옐라치치는 콘스탄스 호수 근처 포어아를베르크까지 후퇴하였으나, 나폴레옹은 원수 피에르 오제르와 그의 12,000명 규모의 군단을 보내 옐라치치를 추적하게 하였다.[10][11] 오제르는 일련의 소규모 작전에서 오스트리아군을 꾸준히 뒤로 밀어내고 그들의 병력을 분열시켰다.[12] 결국 옐라치치는 남은 4,000명의 병력과 함께 오제르에게 항복했다.[11] 항복 조건에 따라 오스트리아군은 1년 동안 프랑스에 대항하여 싸우지 않겠다는 약속과 함께 보헤미아로 돌아갔다.[12]left
크리스티안 볼프스켈 폰 라이헨베르크 소장과 바르텐슬레벤 및 킨스키 대령 휘하의 기병 1,000명은 바이에른을 거쳐 보헤미아에 무사히 도달했다.[12] 로한 공작 휘하의 포어아를베르크 병력의 또 다른 부분은 베네치아에 도달하려 했지만, 목표에서 40km 떨어진 곳에서 붙잡혔다. 로한은 로랑 구비옹 생 시르와 장 레니에에게 카스텔프란코 베네토에서 항복했다.[13]
4. 3. 제5차 대프랑스 동맹 전쟁 (1809년)
1809년 제5차 대프랑스 동맹 전쟁이 발발하자 옐라치치는 은퇴에서 복귀하여 요한 폰 힐러의 제6군단에서 보병 사단을 지휘했다. 원래 사단은 콘스탄틴 폰 에팅스하우젠과 요제프 호프마이스터 폰 호펜에크 휘하의 두 개의 정규 보병 여단으로 구성되었다.[14] 전쟁이 시작되자 호프마이스터의 여단은 카를 돌마이어 폰 프로벤체레스의 경여단과 교환되었다.[15] 옐라치치의 사단은 제6군단에서 분리되어 뮌헨을 점령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1809년 4월 20일부터 22일까지 아벤스베르크 전투, 란츠후트 전투, 에크뮐 전투에서 오스트리아군이 패배한 후, 힐러는 동쪽으로 급히 후퇴했고 옐라치치는 잘츠부르크로 돌아가라는 명령을 받았다.[16]옐라치치의 10,000명 규모의 사단은 오스트리아 대공 요한의 군대에 배속되었다.[17] 4월 29일 바이에른군은 잘츠부르크를 점령했고, 옐라치치는 남쪽으로 빠져나갔다.[18] 그는 5월 1일과 4~5일 골링 안 데어 잘차흐 근처 루에그 고개를 성공적으로 방어하여 바이에른 여단을 두 번 격파했다.[19] 그는 프로벤체레스와 그의 기병 거의 전부를 본대에 합류시켰다.[20] 요한 대공은 옐라치치가 그에게 합류하기를 원했지만, 그의 명령은 모호하게 표현되었다. 옐라치치는 고립된 위치를 유지해야 한다는 명령으로 잘못 해석하여 5월 19일까지 그 자리에 머물렀다. 옐라치치는 마침내 자신의 위험을 깨닫고 그라츠로 철수했을 때는 너무 늦었다. 그는 산에서 자신의 포병이 거의 쓸모가 없다고 믿고 그의 대열보다 먼저 포병 대부분을 보냈고, 대포 4문만 남겨두었다.
5월 25일, 폴 그르니에의 12,000~15,000명 규모의 프랑코-이탈리아 군단이 레오벤 근처 장크트 미하엘 전투에서 그의 사단을 따라잡았다. 충분한 포병과 기병 지원 없이 옐라치치의 9,000명의 병력은 압도당하여 423명이 사망하고 1,137명이 부상당했으며 4,963명이 포로로 잡혔다. 프랑스군의 손실은 670명에 불과했다.[21][22] 역사가 군터 E. 로텐베르크는 옐라치치를 "놀랍도록 불운하고 무능한 장군"이라고 불렀다.[23]
옐라치치와 그의 생존자들은 헝가리를 가로지르는 오스트리아 대공 요한의 후퇴에 합류했다. 라아브 전투에서 그는 우익 사단의 7,500명의 보병을 지휘했다. 육군 예비대의 도움으로 그의 병사들은 첫 번째 프랑코-이탈리아 공격을 격퇴했지만, 전투는 오스트리아의 패배로 끝났다.[24] 그는 바그람 전투에서 그의 사단을 지휘했지만, 요한 대공의 군대는 전투 결과에 영향을 미치기에는 너무 늦게 도착했다.[25]
4. 4. 장크트 미하엘 전투 (1809년)
1809년 5월 25일, 폴 그르니에가 이끄는 12,000~15,000명 규모의 프랑코-이탈리아 군단이 레오벤 근처 장크트 미하엘 전투에서 옐라치치의 사단을 따라잡았다.[21] 옐라치치는 산에서 포병이 거의 쓸모없다고 판단하여 전투 이전에 대부분의 포병을 보냈고, 단 4문의 대포만 남겨두었다. 이로 인해 옐라치치 부대는 충분한 포병과 기병 지원을 받지 못했다.[22] 결국 옐라치치가 이끄는 9,000명의 병력은 압도적인 전력 차이로 인해 423명이 사망하고 1,137명이 부상당했으며 4,963명이 포로로 잡히는 큰 피해를 입었다. 반면 프랑스군의 손실은 670명에 불과했다.[21]4. 5. 이후의 전투
1805년, 옐라치치는 울름 작전 동안 오스트리아 대공 페르디난트 카를 요제프와 카를 막 폰 라이베리히의 군대에서 군단을 지휘했다. 그의 부대는 비버라흐 안 데어 리스를 방어했고,[6] 10월에는 울름으로 이동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당시 옐라치치는 15,000명의 병력을 지휘했다. 황제 나폴레옹 1세와 그의 대육군은 오스트리아군을 포위하기 시작했고,[7] 베르팅겐 전투, 귄츠부르크 전투, 하슬라흐-융닝겐 전투에서 오스트리아군을 압박했다.[8] 옐라치치는 옥센하우젠을 경유하여 티롤로 남쪽으로 행군하라는 명령을 받았다.[9]left
옐라치치의 부대는 울름 항복에서 탈출하여 콘스탄스 호수 근처 포어아를베르크까지 도달했지만,[10] 피에르 오제르 원수의 추격을 받았다.[11] 옐라치치는 11월 13일 도른비른 항복에서 남은 4,000명의 병력과 함께 항복했다.[11] 항복 조건에 따라 오스트리아군은 1년 동안 프랑스에 대항하여 싸우지 않겠다는 약속과 함께 보헤미아로 귀환했다.[12] 크리스티안 볼프스켈 폰 라이헨베르크 소장 휘하의 기병 1,000명은 보헤미아에 무사히 도달했다.[12] 로한 공작 휘하의 포어아를베르크 병력의 또 다른 부분은 베네치아에 도달하려 했지만 카스텔프란코 베네토에서 항복했다.[13] 옐라치치는 곧 군 복무에서 은퇴했다.[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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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차 대프랑스 동맹 전쟁을 위해 은퇴에서 복귀한 옐라치치는 요한 폰 힐러의 제6군단에서 보병 사단을 지휘했다.[14] 전쟁 초반, 옐라치치의 사단은 뮌헨을 점령하라는 명령을 받았고, 오스트리아군이 아벤스베르크 전투, 란츠후트 전투, 에크뮐 전투에서 패배한 후 잘츠부르크로 돌아가라는 명령을 받았다.[16]
옐라치치의 사단은 오스트리아 대공 요한의 군대에 배속되었다.[17] 4월 29일 바이에른군이 잘츠부르크를 점령하자 옐라치치는 남쪽으로 빠져나갔다.[18] 5월 1일과 4~5일 골링 안 데어 잘차흐 근처 루에그 고개를 성공적으로 방어했다.[19] 요한 대공은 옐라치치가 합류하기를 원했지만, 명령이 모호하게 표현되어 옐라치치는 고립된 위치에 머물렀다. 5월 19일까지 그 자리에 머물렀다가 그라츠로 철수했지만 너무 늦었다. 5월 25일, 폴 그르니에의 프랑코-이탈리아 군단이 레오벤 근처 장크트 미하엘 전투에서 옐라치치의 사단을 따라잡았다. 충분한 포병과 기병 지원 없이 옐라치치의 병력은 압도당했고, 많은 사상자와 포로가 발생했다.[21][22] 옐라치치는 "놀랍도록 불운하고 무능한 장군"으로 불렸다.[23]
옐라치치와 생존자들은 헝가리를 가로지르는 오스트리아 대공 요한의 후퇴에 합류했다. 라아브 전투에서 그는 우익 사단의 보병을 지휘하여 첫 번째 프랑코-이탈리아 공격을 격퇴했지만, 전투는 오스트리아의 패배로 끝났다.[24] 그는 바그람 전투에서 그의 사단을 지휘했지만, 요한 대공의 군대는 전투 결과에 영향을 미치기에는 너무 늦게 도착했다.[25] 옐라치치는 1810년 2월 4일 잘라아파티에서 사망했다.[1]
5. 죽음
6. 가족
프라뇨 옐라치치(Franjo Jelačić)의 아내 아나 포르트너 폰 회플라인은 1801년에 아들 요시프 옐라치치를 낳았으며, 요시프는 훗날 장군이 되어 1848년 헝가리 혁명 당시 오스트리아 정권을 지원했다.[1]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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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ustrian Generals of 1792-1815: Franz Jellaci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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