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육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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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육군은 나폴레옹 1세 시기 프랑스 제1제국의 주력 육군으로, 1803년 영국 침공을 위해 불로뉴에 집결한 병력에서 시작되었다. 여러 군단으로 구성되었으며, 각 군단은 보병, 기병, 포병을 갖춘 독립적인 작전 수행 능력을 갖추었다. 나폴레옹은 유연한 전술과 다양한 대형을 활용하여 유럽 각지에서 승리를 거두었지만, 러시아 원정의 실패와 이후 연이은 전투에서 패배하며 결국 해체되었다. 대육군은 뛰어난 조직력, 훈련, 병참 시스템, 그리고 혁신적인 전술을 통해 나폴레옹 전쟁 시기 유럽을 지배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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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육군 - [군대/부대]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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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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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칭 | 그랑드 아르메 (Grande Armée) |
별칭 | 대육군 (The Great Army) |
표어 | Valeur et Discipline (용기와 규율) |
군가 | La Victoire est à nous (승리는 우리의 것) |
군사 정보 | |
복무 기간 | 1804년–1808년 |
소속 국가 | 프랑스 제1제국 |
충성 | 나폴레옹 1세 |
병과 | 프랑스 제국군 |
종류 | 야전군 |
규모 | 1812년 러시아 침공 직전 최대 60만 명 (1805년부터 1813년까지 프랑스 제국군 전체 2,175,335명 징집) |
지휘관 | 나폴레옹 1세 |
주둔지 | 해당사항 없음 |
기원 | 해당사항 없음 |
해체 | 1815년 |
전투 | 제3차 대프랑스 동맹 제4차 대프랑스 동맹 러시아 원정 제6차 대프랑스 동맹 제7차 대프랑스 동맹 |
지휘관 | |
최고 사령관 | 나폴레옹 1세 |
주요 지휘관 | 피에르 오주로 장바티스트 베르나도트 루이-알렉상드르 베르티에 장바티스트 베시에르 기욤 브륀 루이-니콜라 다부 에마뉘엘 드 그루시 장바티스트 주르당 장 란 프랑수아 조제프 르페브르 에티엔 맥도날드 오귀스트 드 마르몽 앙드레 마세나 본-아드리앵 자노 드 몽세 프랑수아 크리스토프 드 켈레르만 에두아르 모르티에 조아킴 뮈라 미셸 네 니콜라 우디노 카트린-도미니크 드 페리뇽 유제프 안토니 포니아토프스키 로랑 드 구비옹 생-시르 장-마티외-필리베르 세뤼리에 장드듀 술트 루이-가브리엘 쉬셰 클로드 빅토르 페랭 |
전투 목록 |
2. 조직
대육군의 성공 요인은 뛰어난 조직의 유연성에 있었다. 대육군은 몇 개의 군단(통상 5~7개)으로 나뉘었고, 한 군단은 10,000명에서 50,000명(평균 20,000~30,000명)으로 구성되었다. 각 군단(''Corps d'Armée프랑스어'')은 여러 전투 병력과 지원 부대를 갖춘 작은 군대였다. 군단은 단독 작전이 가능하면서도 서로 하루 정도 거리 내에서 긴밀하게 협동했다. 군단은 전력과 임무 중요도에 따라 원수, 군단 육군 대장(''Général en chef프랑스어'', 상장), 사단 육군 대장(''Général de division프랑스어'', 중장) 중 한 명이 지휘했다.[8]
나폴레옹은 군단 지휘관을 신뢰하여 전략 목표 내에서 행동하고 협력하여 목표를 달성하면 넓은 범위의 행동 자유를 주었다. 그러나 실패하면 질책하거나 해임했고, 직접 군단 지휘를 맡기도 했다.[8] 1800년 장 빅토르 마리 모로가 라인 방면군을 4개 군단으로 나눈 것이 군단의 시작이었으며, 1804년 나폴레옹이 항구적인 조직으로 만들었다. 나폴레옹은 군단에 기병을 배치하여 보병 때문에 둔해지지 않고 빠르게 이합집산하도록 했다.[8]
군단의 기본 구성은 다음과 같다.
'''군단 - 사단 - 여단 - 연대 - 대대 - 중대'''
2. 1. 주요 편성
대육군의 주요 전술적 단위는 사단이며, 보통 4,000~6,000명의 보병과 기병으로 구성되었다. 1개 사단은 2~3개 여단(旅團)으로 구성되었고, 1개 여단은 2개 연대로 구성되어 3~4개 포병대대(大隊)로 이루어진 포병여단의 지원을 받았다. 포병대대에는 4문의 야포(野砲)와 2문의 유탄포(榴弾砲)가 배치되어 1개 포병여단에는 18~24문의 대포가 배치되었다. 여단 또한 항구적인 관리부문과 실전부대가 있어 여단장군(소장)에 의해 지휘되어 군단과 같은 단독 작전행동이 가능했다.[8]군단은 1812년에 기병 예비 집단이 분할되어 기병 군단이 생기면서, 기존의 군단은 보병 군단으로 불리게 되었다. 보병 군단은 일반적으로 "3개의 보병 사단 + 1개의 경 기병 사단 + 군단 포병"으로 구성되었다. 기병 군단은 일반적으로 "1개의 중 기병 사단 + 1개의 경 기병 사단"으로 구성되었다. 군단 포병은 1개 보병 포병 중대 + 1개 기마 포병 중대가 표준이었다.
보병 사단(4000~6000명)은 일반적으로 "3~6개의 보병 연대 + 사단 포병"으로 구성되었다. 기병 사단은 일반적으로 "2~4개의 기병 연대 + 사단 포병"으로 구성되었다. 보병 사단 포병은 1개 보병 포병 중대, 기병 사단 포병은 1개 기마 포병 중대가 표준이었다. 보병 연대는 2~6개 대대로 구성되었다. 기병 연대는 1~4개 대대로 구성되었다. 전장에서의 기본 행동 단위는 대대이다. 보병 대대는 평균 500명 정도였고, 기병 대대는 평균 150기 정도였다. 연대는 통상적인 대대 관리 조직이었고, 여단은 전장에서의 대대 지휘 조직이었다.
여단은 실질적으로 사단장 휘하의 여단장과 부관 몇 명으로 구성되었고, 여단장은 미리 할당된 연대의 각 대대의 전장 지휘를 맡는 직책이었다. 사단은 0~3개의 여단을 가졌다. 예를 들어 보병 사단 하 연대의 모든 대대는 전장에서 좌익 여단과 우익 여단으로 편성되었다. 여단장이 각 대대를 움직일 경우의 연대장은 자 연대의 제1대대를 이끌었다. 여단을 갖지 않은 사단에서는 연대장이 휘하 대대를 전장 지휘했다. 기병 연대의 각 대대는 종군 시 소모에 따른 인마의 수 변동이 심했으므로, 회전 시에는 기병 여단이라는 단위로 재편성이 필요했다. 기병 대대는 2개 중대였다. 보병 대대는 1807년까지 9개 중대였고, 1808년부터 6개 중대가 되었다. 중대는 100명 정도였다.
2. 2. 부대 구성
보병 연대는 2~6개 대대로, 기병 연대는 1~4개 대대로 구성되었다. 전장에서 주로 활약하는 기본 단위는 대대였으며, 보병 대대는 평균 500명, 기병 대대는 평균 150명 정도였다. 여단은 사단장 휘하의 여단장과 몇몇 부관으로 구성되었고, 미리 배정된 연대의 각 대대를 전장에서 지휘하는 역할을 맡았다.[67]3. 대육군의 전력
대육군의 전력은 크게 제국친위대, 기병(Cavalerie), 보병(Infanterie), 포병(Artillerie), 지원 부대로 나뉜다.
- '''기병(Cavalerie)'''
황제의 칙령에 따라, 기병대는 대육군의 5분의 1에서 6분의 1 사이를 차지했다. 기병연대는 800~1,200명 정도의 인원으로 약 3~4개 대대로 이루어졌고, 대대는 2개 중대로 나뉘었으며, 지원부대가 이를 지원했다. 역할에 따라 중기병과 경기병으로 나뉘었다.
- * 중기병
: 흉갑기병(Cuirassiers), 용기병(Dragons), 카빈총 기병(Carabiniers-à-Cheval)
- * 경기병
: 후사르(Hussards), 추격기병(Chasseurs-à-Cheval), 창기병(Lanciers)
- '''보병(Infanterie)'''
보병은 크게 전열 보병(Infanterie de Ligne프랑스어)과 경보병(Infanterie Légère프랑스어)의 두 가지 유형으로 나뉘었다.[8]
- * 전열보병연대(Infanterie de ligne)
: 소총병(fusilier), 척탄병, 특별병(Voltigeurs)
- * 경보병(Infanterie Légère)
: 추격병(Chasseurs), 기총병(Carabiniers), 특별병(Voltigeurs)
- '''포병(Artillerie)'''
나폴레옹은 포병 장교 출신으로, "포병이 좋으면 신이 돕는다"라고 말할 정도로 포병의 중요성을 강조했다.[75] 프랑스 포병은 대육군의 핵심으로, 보병 및 기병과 융합되어 운용되거나 때로는 단독으로 작전을 수행하며 막강한 화력을 통해 짧은 시간에 적에게 큰 타격을 주었다.
- * 도보포병대(Artillerie à pied)
- * 기마포병대(Artillerie à cheval)
- * 견인포병마차(Train d'artillerie)
- '''지원부대(Services de support)'''
- * 공병(Ingénieurs)
- * 병참술(Logistique)
- * 의료 종사자(Medical)
- * 통신(Communications)
3. 1. 제국친위대(Garde impériale)
Garde impériale프랑스어는 당대 가장 정예 군사 조직 중 하나였으며, 집정 근위대(Garde consulaire)에서 발전했다.[26] 근위대는 보병, 기병, 포병 부대로 구성된 단일 군단을 형성했지만, 고유한 정체성과 제복을 갖추었다. 나폴레옹은 근위대가 전군의 모범이 되기를 바랐으며, 여러 전역에서 그와 함께 싸웠기에 완전히 충성하는 부대로 만들고자 했다. 보병은 대규모로 투입되는 경우는 드물었지만, 근위대 기병은 종종 결정적인 일격을 가하기 위해 전투에 투입되었고, 포병은 공격 전에 적을 맹렬하게 공격하는 데 사용되었다.연도 | 병력 수 |
---|---|
1800년 | 3,000명 |
1804년 | 8,000명 |
1805년 | 12,000명 |
1810년 | 56,000명 |
1812년 | 112,000명 |
1813년 | 85,000명 (대부분 신규 근위대) |
1815년 | 28,000명 |
; 구 근위대, 중견 근위대, 신규 근위대
1804년 나폴레옹 황제 즉위와 함께 발족한 근위대는 1809년 신규 근위대 창설과 함께 구 근위대로 불리게 되었고,[59] 1810년에는 중견 근위대가 신설되었다.[60] 근위 보병은 연대별로, 근위 기병은 대대별로 나뉘어, 구 근위대, 중견 근위대, 신규 근위대 중 하나에 소속되었다.
- '''구 근위대'''(Vieille Garde)
- '''중견 근위대''' (Moyenne Garde)
- '''신규 근위대''' (Jeune Garde프랑스어)
3. 1. 1. 친위보병(Infantrie de la garde)
제국친위대(Garde Impériale)는 당시 엘리트 군인부대로써 집정친위대(또는 통령친위대)(Garde des Consuls 및 Garde Consulaire)에서 발전했다. 이것은 그 자체가 군단(Corps d'Armée)으로 보병, 기병 및 포병부대를 가지고 있었다. 친위보병에는 경험에 따라 3개의 부분이 있었다.- '''선임친위대(Vieille Garde)''': 나폴레옹 군대 중에서도 초일류에 속한다. 선임친위대는 종군기간이 가장 긴 고참병(3~5개 원정작전에 참가)으로 구성된 2개 연대가 있다.
- * '''제국친위척탄병 제1연대(Grenadiers à Pied de la Garde Impériale)''':[104][105] 제국친위척탄병 제1연대는 대육군 중에서도 최상급의 연대이다. 1807년 폴란드 방면작전에서 나폴레옹 자신에 의해 "불평쟁이(les grognards)"라는 별명을 부여받았다. 구성원은 친위병 중에서도 가장 경험을 많이 쌓은 용감한 보병들로 이루어져 있고, 고참병 중에는 20번 이상 전투에 참가한 사람들도 있었다. 이 연대에 들어갈 수 있는 사람은 적어도 10년간 연대 깃발 아래에 있었으며, 용맹함으로 표창도 받고, 읽고 쓸 수 있으며, 거기에 키가 178cm 이상이어야 한다는 조건이 있었다. 제국친위척탄병 제1연대는 중견친위병 및 청년친위병보다 전투에 참가할 기회는 적었지만, 1번 참가할 때는 극찬을 받을 정도로 전과를 올렸다. 1815년 제국친위척탄병 연대는 4개 연대로 확장되었다. 새로운 연대는 곧이어 제2, 제3, 제4연대로써, 즉시 제국친위척탄병이란 칭호가 부여되었다. 이 시점에서 제1연대 정도의 역량을 바라지 않은 것은 사실이었다. 실제로는 이 군대는 중견친위보병이라고 불리고 있다. 워털루 전투에서 영국 근위병에게 패배한 이들도 바로 이들 연대였다. 제1연대는 프랑스노아에서 프로이센군과 전투를 벌였다. 제국친위척탄병 연대의 병사는 빨간색의 줄이 들어있는 진청색의 헤비 롱(habit long;꼬리가 긴 상의)을 입고, 빨간색의 견장과 흰색의 금장(襟章)을 달았다. 가장 눈에 띄는 특징은 높은 곰털모자로써 조각된 금판과 빨간색 꼬리털, 하얀색 줄로 장식되어 있다.
- * '''제국친위추격병연대(Chasseurs à Pied de la Garde Impériale)''':[106] 제국친위추격병 연대는 대육군 중에서 2번째 상급연대였다. 추격병연대는 제국친위척탄병 제1연대의 자매부대였다. 이 부대에 들어가는 기준은 같지만 다만 키는 172cm 이상이었다. 추격병연대는 제국친위보병 제1연대와 마찬가지로 몇 차례 격렬한 전투에 참가하여 전과를 올렸다. 1815년 나폴레옹의 귀환에서 추격병연대도 4개 연대로 확장되었으나, 제2, 제3, 제4연대는 전투 경험햇수가 4년인 병사들로 구성되었다. 이들 연대는 보병연대인 중견친위병연대와 함께 워털루 전투의 최종단계에서 친위병 돌격에 가담했다. 제국친위척탄병 제1연대와 마찬가지로 추격병연대도 프랑스노아 전투에 참가했다. 제국친위추격병 연대의 병사도 빨간색 줄이 들어있는 진청색 헤비 롱을 착용하고, 녹색과 빨간색의 견장과 흰색 금장을 달았다. 전투시에는 진청색의 바지를 벗었다. 그래도 친위보병과 마찬가지로 추격병연대의 두드러진 특징은 높은 곰털모자에 있었고, 녹색에 풍부한 빨간색 꼬리털과 하얀 줄로 장식되어 있었다.[107]
- '''중견친위병(Moyenne Garde)''':[108] 2~3회 원정작전에 참가한 고참병들로 구성되었다.
- * '''수발총추격병연대(Fusiliers-Chasseurs) 혹은 퓨질리어추격병연대''': 수발총 추격병연대는 1806년 중견친위보병 연대로써 창설되었다. 중견친위병의 모든 병사는 2~3번 원정작전에 참가한 고참병이었고, 전열연대의 부사관으로 임명되었다. 모든 친위병 중에서도 문제가 없는 우수한 병사였던 수발총 추격병연대는 많은 장소에서 자매연대인 수발총 척탄병연대와 함께 친위 수발총연대의 일부로써 전투에 참가했다. 수발총 추격병연대는 광범위한 작전행동에 참가해 여러 번 그 존재가치를 나타냈으나, 나폴레옹의 퇴위로 인해 1814년 해산되었고, 1815년 워털루 전역을 위해 재구성되지는 못했다. 제복은 빨간색 줄이 들어가 있는 진청색의 헤비 롱(상의)을 착용하고, 빨간과 녹색이 섞인 녹색의 견장과 흰색의 금장을 달았다. 상의의 아래에는 하얀 조끼와 푸른색과 갈색의 바지를 입었다. 모자는 원통형으로 흰색 줄이 달려있고, 녹색에 풍성한 빨간색의 꼬리털이 달려 있었다. 무기는 샤르빌1777형 머스켓총과 총검 및 짧은 사벨이 있다.
- * '''수발총척탄병연대(Fusiliers-Grenadiers)''':[109] 수발총 척탄병연대는 1807년 결성된 중견친위보병연대였다. 수발총 추격병연대와 같은 기준으로 조직화되었으나 규모가 더 컸다. 수발총 척탄병연대는 많은 장소에서 자매연대였던 수발총 추격병연대와 함께 친위 수발총연대의 일부로써 전투에 참가했다. 수발총 추격병연대와 거의 비슷한 활동이력을 남기고, 1814년 해산되어 1815년 역시 재결성되지 않았다. 제복은 빨간색 줄이 들어간 헤비 롱, 빨간 견장과 흰색 금장, 하얀 조끼, 하얀 바지로 이루어져 있다. 모자는 원통형으로 하얀 줄과 긴 빨간색 꼬리털이 달려 있었다. 무기는 샤르빌1777형 머스켓 총과 총검 및 짧은 사벨이 있다.
- * '''친위해병대대(Marins de la Garde)''':[110] 친위해병대대는 1803년 결성되었다. 원래 목적은 영국 본토에 대한 침공에 앞서 영국 해협을 건널 때 황제를 탑승시킨 선박의 조종을 맡기로 되어 있었다. 대대는 실질상 5개 중대로 되어 있다. 영국 침공이 중지된 후, 친위대의 일부로 남아, 전투원으로써 활동하는 동시에 나폴레옹이 사용하는 보트 및 바지선 혹은 그 외 기타 선박을 조종했다. 제복은 금색의 레이스로 장식된 네이비 블루의 후사르 스타일의 돌만 자킷(경기병 자켓)과 역시 금색 레이스로 장식된 네이비 블루의 헝가리 스타일의 바지였다. 모자는 Gold Guard라고 새겨진 원통형이었다.[110] 무기는 보병과 마찬가지로 샤르빌1777형 머스켓 총과 총검이 있고, 다수의 선원은 작업 중에 영향을 주지 않는한 권총도 가지고 있었다.
- '''청년친위대(Jeune Garde)''':[111] 원래는 적어도 1번의 원정작전에 참가한 고참병과 두뇌가 명석한 젊은 사관 및 징집병 중에서도 수입이 좋은 사람들을 모아 창설했다. 후에는 거의 전원이 선택된 징집병과 지원병으로 채워지게 되었다. 전투능력보다는 열정적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
- * '''저격척탄병연대(Tirailleurs-Grenadiers)''': 1808년 나폴레옹의 주문으로 만들어진 연대로써 가장 지성이 뛰어나고 강인한 신병을 청년친위병의 제1연대에 편입시킨 것이 이것이다. 신병 중에서도 키가 큰 사람이 편입되었다. 부사관은 거의 중견친위병으로 편성되어 있다. 이 연대를 서서히 단련시켜 고참병으로 만들었기에 사기와 전투능력이 높았다. 제복은 진청색 줄이 들어있는 진청색 헤비 롱(상의)과 빨간색 견장, 흰색 관장금장이 달려 있었다. 모자는 빨간 줄과 빨간색 긴 꼬리털이 달려있는 원통형 모자였다.
- * '''저격추격병연대(Tirailleurs-Chasseurs)''': 청년친위대 중에서 키가 작은 신병이 이 연대에 편입되었다. 구성은 저격척탄병연대와 같지만 장교는 선임친위병으로, 부사관은 중견친위병으로 편성되어 있다. 제복은 빨간색 줄이 들어 있는 진청색 상의와 흰색 관이 있는 진청색 금장이 달려있다. 거기에 빨간과 녹색이 섞인 녹색의 견장이 달려있다. 모자는 원통형으로 녹색으로 되어있고, 빨간색의 커다란 꼬리털로 장식되어 있다.

3. 1. 2. 친위기병연대(Cavalerie de la Garde)


친위기병연대는 1804년에 창설되어, 추격기병연대(Chasseurs à Cheval)와 기병척탄병연대(Grenadiers à Cheval)라는 두 개의 연대, 그리고 정예 젱다르맹(Gendarmes)과 맘루크 대대로 구성되었다.[112] 1806년에는 제국친위용기병연대(Regiment de Dragons de la Garde Impériale, 이후 황제비 용기병)가, 1807년 폴란드 원정 이후에는 폴란드 창기병연대(Régiment de Chevau-Légers de la Garde Impériale Polonais)가 추가되었다.[112] 1810년, 프랑스와 네덜란드 신병으로 제국친위 제2창기병연대(2e Régiment de Chevau-Légers Lanciers de la Garde Impériale), 일명 붉은 창기병연대가 창설되었다.[112] 친위기병연대는 수많은 전투에 참가하여 그 막강한 전투력을 과시했다.[112]
- '''친위척탄기병연대(Grenadiers à Cheval de la Garde Impériale)''': '신(Gods)' 혹은 '거인(Giants)'으로 불린 이 연대는 나폴레옹 친위기병연대 중 엘리트 집단이었다.[112] 높은 곰털모자, 진청색 상의와 하얀 금장 옷깃, 긴 장화를 착용하고 커다란 검은 말을 탔다.[112] 신병은 키 176cm 이상, 10년 이상 군 경력, 4번 이상 원정작전 참가 및 용맹성을 인정받아야 했다.[112] 아우스터리츠 전투에서 러시아 친위기병대를 격파했고, 아일라우 전투에서는 러시아 포격에 노출되었으나 뮈라의 공격에 가담해 러시아군 전선에 돌격했다.[112] 척탄기병연대는 폴란드 창기병연대와 더불어 한 번도 패배하지 않은 친위기병연대였다.[112]
- '''친위추격기병연대(Chasseurs à cheval de la Garde Impériale)''': '편애 받는 아이들(Favoured Children)'(혹은 '응석쟁이 꼬마녀석(Spoiled Brats)')로 불린 경장친위기병으로, 대육군 중 나폴레옹의 편애를 받았다.[113] 1796년 이탈리아 원정 중 오스트리아 경장기병대의 습격을 받은 경험을 바탕으로 호위 기병대 창설을 명했고,[113] 200명의 호위대가 추격기병연대의 전신이 되었다.[113] 나폴레옹은 연대 대령 제복을 자주 입을 정도로 부대와 밀접한 관계를 유지했다.[113] 화려한 녹색, 빨간색, 금색 기마복을 착용했으며, 훈련 부족이나 불복종의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113] 아우스터리츠 전투에서 러시아 친위기병대를 격파했고, 반도 전역에서는 영국 기병대에 패배했으나, 워털루 전투에서 용감하게 전투를 벌였다.[113]
- '''엘리트 젱다르맹(Elite Gendarmes (Gendarmerie d’Elite))''': '불사신'이라는 별명을 가진 대육군의 헌병으로, 작전본부 근처에서 안전과 질서를 유지하고 포로 심문, 손님 호위, 황제의 개인 물건 경호 등의 역할을 맡았다.[112] 진청색 상의와 빨간색 금장, 긴 장화, 척탄기병보다 조금 작은 곰털모자를 착용했다.[112] 1807년 이후 전투에 참가할 기회가 많아졌고, 1809년 아스펜-에슬링 전투에서 도나우다리 방어에 공을 세웠다.[112]
- '''맘루크 대대(Escadron de Mamelukes)''': 이집트 원정에서 얻은 사막 전사들로, 뛰어난 기마술과 검술, 광신적인 용기를 겸비했다.[112] '정지 정명한 사막의 아들' 혹은 '머리를 사냥하는 부족'으로 불렸으며, 장교는 프랑스인, 부사관은 이집트인, 투르크인, 그리스인, 조지아인, 시리아인, 키프로스인 등으로 구성되었다.[112] 원래 기마 저격병연대 소속 중대(또는 반(半)대대)였으나, 1805년 아우스터리츠 전투에서 두각을 나타내 대대로 승격되었다.[112] 워털루 전투에서 황제 직속부대로 활약했고, 1813년 제2 맘루크 중대가 창설되어 청년친위병에 소속되었다.[112] 녹색(후에 빨간색) 모자, 하얀 터번, 풍만한 셔츠와 조끼, 빨간색 바지, 노란색/빨간색/황갈색 장화를 착용하고, 길고 굽은 반월도, 권총, 단도를 휴대했다.[112] 모자와 무기에는 반달과 별 기장이 새겨져 있었다.[112]
- '''친위창기병연대(Chevau-Légers-Lanciers de la Garde Impériale)''':[114]
- '''제1연대(폴란드)''': 1807년 창설된 폴란드 경장기병 친위연대로, 프랑스인 교관에게 훈련받았다.[114] 소모시에라 전투에서 스페인 포병진지를 공격하여 4개 포병중대를 격파하고 20문 이상의 대포를 포획하는 전설적인 위업을 달성했다.[114] 나폴레옹은 "폴란드인이여! 그대들은 나의 선임친위병과 똑같은 가치가 있다. 그대들은 나의 가장 용감한 기병대라고 선언한다"라고 칭찬하며 선임친위병연대로 승격시켰다.[114] 워털루 전투에서 황제 측근에 있으면서 적 기병대에게 패배하지 않았다.[114] 제1연대는 정규군 중 제1 비스츠라 울란스(Vistula Uhlans)라는 폴란드인 기병대가 되었으며, 프랑스 및 대육군의 다른 창기병에 대한 모범이 되었다.[114]
- '''제2연대(프랑스-네덜란드)''': 1810년 창설된 붉은 창기병으로 불리는 부대로, 러시아에서 코사크 공격과 동장군으로 큰 피해를 입었다.[114] 1813년 재조직되어 선임친위병 4개 대대와 청년병 6개 대대로 구성되었고, 워털루 전투에 출격했다.[114]
- '''제3연대(폴란드)''': 1812년 청년친위대의 일부로 조직되었으나, 훈련 부족 상태에서 러시아 원정에 투입되어 1812년 말 슬로님(Slonim)에서 붕괴되었다.[114]
- '''황제비용기병(Dragons de l’Impératice)''': 1806년 황제친위용기병연대로 창설되어 1807년 황후 조세핀을 기리기 위해 개칭되었다.[114] 입대 조건은 최소 6년(후에 10년) 군대경력, 2번 이상 원정작전 참가 및 용맹 표창, 키 173cm 이상이었다.[114] 전투용보다는 의례용이었기에 전투 참가 기회는 적었지만, 입대 경쟁이 치열했다.[114] 붉은 창기병과 마찬가지로 선임친위대와 청년친위대 대대가 있었고, 황제와 함께했다.[114]
- '''제국친위정찰기병(Eclaireurs de la Garde Impériale)''': 러시아 원정 실패 후 1813년 12월 창설된 기병여단으로, 코사크 연대를 모델로 했다.[114] 3개 연대(각 1,000명)가 창설되어 기존 연대에 배속되었다.[114]
- 제1연대(정찰척탄병): 클로드 테스트 페리 상급대령 지휘[114]
- 제2연대(정찰용기병): 호프마이어 대령 지휘[114]
- 제3연대(정찰창기병): 장 코지에투스키 지휘[114]
정찰기병은 1814년 프랑스 전역에서만 활동하고 해산되었지만, 루이 18세에 의해 다시 부활했다.[114]
3. 2. 기병(Cavalerie)
황제의 칙령에 따라, 기병대는 대육군의 5분의 1에서 6분의 1 사이를 차지했다. 기병연대는 800~1,200명 정도의 인원으로 약 3~4개 대대로 이루어졌고, 대대는 2개 중대로 나뉘었으며, 지원부대가 이를 지원했다. 각 연대의 제1대대, 제1중대는 항상 '엘리트'로 칭해져 최고의 병사와 말이 준비되었다. 프랑스 혁명의 흐름 속에서 구체제인 왕실에 충성과 경험을 쌓았던 귀족 출신 기마장교 및 부사관을 다수 잃어, 프랑스군 기병대는 그 자질이 심각하게 떨어졌다. 나폴레옹은 이 부문을 재건하여 세계 최고의 부대로 변화시켰다. 1812년까지 연대 간의 대규모 전투에서는 절대 지지 않았다. 역할에 따라 중기병과 경기병으로 나뉘었다.
3. 2. 1. 중기병 혹은 중장기병(Cavalerie lourde)
황제의 칙령에 따라, 기병대는 일반적으로 대육군의 5분의 1에서 6분의 1 사이를 차지했다. 800~1,200명으로 구성된 기병 연대는 각 2개 중대로 구성된 3~4개 소대와 지원 부대로 구성되었다.[68] 경기병과 용기병 연대에서 각 연대 첫 번째 소대의 첫 번째 중대는 항상 '엘리트'로 지정되었으며, 아마도 최고의 병력과 말을 보유했을 것이다. 프랑스 혁명 이후, 기병대는 앙시앵 레짐에 충성하는 경험이 풍부한 귀족 장교와 부사관의 상실로 가장 큰 피해를 입었다. 그 결과, 프랑스 기병대의 질은 급격히 하락했다. 나폴레옹은 이 병과를 재건하여 세계 최고 수준으로 만들었다. 1812년까지 연대 규모 이상의 어떤 대규모 교전에서도 패배하지 않았다. 역할에 따라 중기병과 경기병으로 나뉘었다.
; 흉갑기병(Cuirassiers)
: 흉갑기병은 중세의 기사와 같이 무거운 황동이나 철제 투구에 몸통을 감싸는 흉갑과 등받이의 조합으로 된 갑옷(흉갑)을 착용했으며, 참격도 가능했지만, 찌르기에 더 적합했으며, 통제된 돌격에서는 칼끝을 사용하여 찌르는 경우가 많았던 길고 무거운 직도형 검(검은 기병의 주요 무기였으며, 그 모양은 병과에 따라 다양했으며, 중기병은 길고 무거운 직도형 검을 선호했고, 경기병은 경량의 곡도형 검을 선호했다[69])과 한 쌍의 권총, 카빈총으로 무장했지만, 대부분의 흉갑기병은 곧 기총을 갖지 않게 되었다. 프랑스 흉갑기병은 나폴레옹 시대의 최강의 중기병이었으며[70], 전장에서 거의 무적이었으며, 아일라우 전투와 보로디노 전투에서 그 진가를 보여주었다. 전장에서는 거의 격돌 공격에만 사용되었으며, 돌격 임무에서 특별한 능력을 가지고 있었지만[71], 자체 권총을 사용한 산병전도 어느 정도는 수행할 수 있었다. 1812년 장비 개정에서 흉갑기병도 카빈총을 장비하게 되었다.[71] 투구와 흉갑은 총탄과 검, 기병창에 대한 충분한 방어 효과를 가지고 있었다. 또한, 그들은 적의 전진에 대한 효과적인 반격 부대로 사용할 수 있었으며, 만약 그들이 종대나 연대 보병을 발견하여 측면이나 후방을 습격할 수 있다면, 중기병이 대열에 돌진하여 보병을 베고, 말의 발굽으로 짓밟는 공격으로 적을 궤멸시킬 수 있었다.[69] 당초 25개 연대였으며 나중에 18개 연대가 되었다.
: 기사와 마찬가지로 이 부대는 기병의 돌격 부대였다. 그들이 착용한 갑옷과 무기의 무게 때문에, 기수와 말 모두 크고 강할 필요가 있었으며, 그 결과 전투 시 큰 효과를 낳았다. 흉갑기병은 정예[72]로서의 자각을 가지고, 다수의 용기병을 포함한 기병 예비 부대의 핵심을 이루었으며, 예비 기병은 승패를 결정하는 결정적인 시기에만, 숙고 끝에 투입되어, 대집단으로 운용되었다.[72] 중기병은 전장에서 그 능력을 증명했으며, 적에게 강한 인상을 남겼다. 특히 영국군은 흉갑기병이 나폴레옹의 근위 기병이라고 오해하여, 그 특징적인 흉갑과 투구를 자군([http://www.london-tower.info/Horse-Guards/horse-guard.jpg Horse Guards])에도 채용하려고 했다.
: 나폴레옹의 흉갑기병 운용 사상은, 적을 총붕괴시킬 수 있는 지점을 전장에서 찾아, 기병 돌격의 압도적인 위력을 투입하는 것이었다.[72] 이론상으로는 기병 돌격 시작 전에 포병이 준비 포격을 실시해두고, 포격으로 약화된 적에게 속도를 서서히 올린 기병이 돌입하게 되어 있었다.[72] 속보로 시작하는 흉갑기병의 돌격은, 이윽고 구보로 속도를 높이고, 적진에서 150m 위치에 접근했을 때 습보로 이행하기 시작하며, 마지막 50m는 전속력으로 질주하게 된다.[72] 하지만, 현실에서는 프랑스군 사령관은 흉갑기병에게 밀집 대형을 취하게 하는 것을 선호했기 때문에, 이론대로 급격한 속도 변경은 어려웠다.[72] 사령관들은 흉갑기병에게 대군으로 긴밀한 대형을 갖추도록 명령하여, 병사의 부츠끼리 닿을 정도로 하였지만, 밀집 진형을 유지하는 것은 어려웠고, 실제로는 속도를 올리는 것은 불가능했으며, 당연하지만, 개개의 기병이 자주성을 발휘할 기회는 빼앗겼다.[72] 그러나, 이러한 운용으로, 흉갑기병 부대의 전진을 저지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게 되었으며, 적 기병의 대열을 무너뜨리고, 긴밀한 진형을 갖추지 못하는 보병을 발굽과 검으로 분쇄할 수 있게 되었다.[72] 하지만, 그럼에도 흉갑기병은, 총검을 장착한 보병의 긴밀한 방진(예: 워털루 전투에서 볼 수 있었던 것)을 돌파할 전술을 가지고 있지 않았으며, 밀집 대형에서의 돌격은 조준을 정확하게 하는 적 포병에 대해 취약성을 드러내기도 했다.[72] 카트르 브라 전투와 워털루 전투에서, 프랑스 흉갑기병의 돌격을 견뎌낸 강인한 영국 방진의 이미지는 모든 보병 대대가 방진을 짜야 하며, 방진은 기병 공격에 견딜 수 있다는 잘못된 인상을 주지만, 이것은 잘못된 생각이다. 나폴레옹 전쟁 당시의 영국 보병은, 당시 최강의 보병이었으며, 그들의 사기와 훈련은 다른 데 비할 데가 없었다. 실제로 나폴레옹 전쟁에서는 프랑스 기병과 동맹국 측 기병 모두 보병의 방진을 무너뜨렸으며, 단지 어떤 대형을 갖추는 것만으로는 기병 돌격을 격퇴할 수 없다. 굳건한 정신, 비범한 훈련, 침착한 용기가 없이는 몰려오는 중기병의 공격 앞에서 보병 방진을 단호하게 견뎌낼 수 없다.[69] 영국 보병이 카트르 브라와 워털루에서 이룩한 것은 엄청난 위업이다.[69]
: 이 시대의 많은 국가들은 각각 무시할 수 없는 기병 부대를 보유하고 있었으며, 프랑스 혁명 전쟁에서는 열강의 기병은 거의 대등했지만, 나폴레옹이 1805년 정복 전쟁에서 대륙군을 창설하자, 프랑스 기병은 세계 최강의 존재가 되었다. 그중에서도 흉갑기병은 나폴레옹 전쟁에서 지배적인 부대였으며, 영국의 스코츠 그레이즈(제2 용기병 연대)나 러시아의 근위 기병 등 유사한 역량을 가진 정예 부대는 다른 국가에도 있었지만, 전체적으로 보면 1800년부터 1812년까지의 프랑스 중기병은 비할 데 없는 존재였다. 그러나, 러시아 원정에서 프랑스 기병 부대가 붕괴되었고, 그 후의 1813년과 1814년의 전쟁에서는 프랑스 기병은 이전처럼 교전 상대를 지배할 수 없었다. 오스트리아군, 러시아군, 프로이센군에도 흉갑기병 연대는 있었지만, 그들은 프랑스 흉갑기병의 기량과 담대함에는 도저히 따라갈 수 없었고, 항상 패했다. 사실상, 동맹군의 많은 기병은 무게와 안장 위에서의 움직임에 문제가 있다는 이유로 흉갑을 폐지하기까지 했다. 1809년까지 오스트리아군은 몸통의 앞면만 덮여 있고, 옆구리와 등은 그대로인 반 흉갑을 흉갑기병에게 지급하기 시작했으며, 이 반 흉갑은 흉갑기병을 경량화하고, 전쟁에서의 말의 부담을 줄였지만, 프랑스 중기병과의 혼전에서는 공격받기 쉬워지기도 했다. 나폴레옹은 흉갑기병에 대해 "흉갑기병은 다른 모든 기병보다 훨씬 쓸모가 있다. 이 병과는…… 충분히 교육할 필요가 있다. 흉갑기병이야말로, 말 타는 병사의 지식이 최고도에 달해야 하는 것이다."라고 말했다.[69]
: 중기병이든 경기병이든 중점이 둔 것은 격돌 전술이며, 화기는 검이나 창에 이은 보조적인 무기였다. 대부분의 기병은 권총을 휴대하고 있었으며, 그중에는 기총을 가진 자도 있었다. 중기병은 적의 방진을 공격할 때 자주 권총을 사용했으며, 그것은 결착을 짓는 무기가 아니라, 적에게 짜증을 일으키는 무기였다.[69] 공격하는 기병은 항상 움직이고 있기 때문에, 한 번 권총을 발사하면 습보로 달리고 있는 기병이 재장전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했다. 권총은 기병끼리의 혼전에서도 사용할 수 있었지만, 접전에서는 항상 오사할 가능성이 높고 정밀도가 낮은 단발의 권총보다 검이 선호되었다. 또한, 나폴레옹 전쟁이 진행됨에 따라, 기총은 기병의 무기 중에서 중요도를 더해갔다.
; 용기병(Dragons)
: 중기병이라고 생각되기도 했지만, 용기병과 창기병(오스트리아군과 프로이센군의 울란)은 중기병과 경기병의 혼합이었다.[69] 용기병은 흉갑기병과 같은 방어구를 착용하지 않았기 때문에, 총탄을 피하면서 돌격하는 임무에는 적합하지 않았지만, 대신 경무장으로 기동성이 우수했으며, 적을 견제하여 대열을 무너뜨리고, 정찰을 수행하는 등 흉갑기병과는 다른 분야에서 활약했다. 프랑스 기병 중에서 가장 수가 많았던 것이 용기병이었으며, 나폴레옹 전쟁 초기에, 용기병이 흉갑기병과 함께 전과를 올리는 경우가 많았고, 중기병의 일종의 보조 병력으로 기능했다.[72]
: 그들은 고도로 융통성이 있는 존재였으며, 전통적인 직도형 검(톨레도 강철로 만들어진 잘 드는 3날짜리 검)뿐만 아니라, 권총이나 머스킷총(승마 시에는 안장에 부착했다)으로 무장했으며, 기승뿐만 아니라 보병처럼 도보로도 싸울 수 있게 되었다. 그 융통성은 보병으로서의 능력에 의한 것이었으며, 칼 솜씨는 다른 기병의 수준에 미치지 못하는 경우가 있었으므로, 냉소와 조롱의 대상이 되었다. 이 파트타임 기병에 적합한 말을 찾는 것도 매우 어려웠다. 기병마 부족 시에는 종종 보병 장교의 승용마가 제공되었으므로, 스테이터스인 기승을 포기하게 된 보병 장교 중에는 용기병에게 반감을 가진 자도 있었던 것 같다.
: 당초 25개 연대, 후에 30개 연대가 있었지만, 1815년 백일천하 때는 불과 15개 연대밖에 되지 못했다.
; 카빈총 기병(Carabiniers-à-Cheval)
: 그 전신은, 프랑스 국왕군의 정예 기병대이다. 카빈총 기병은, 흉갑의 방어에 의존하지 않는 빠른 검술 기술과, 마상 사격 기술의 전통 부대였다. 무엇보다 당시 유럽 여러 나라의 중기병 대다수가 중량 흉갑을 착용하지 않았었기 때문에, 이쪽이 표준이다. 나폴레옹군 특유의 흉갑기병이 무모한 돌격을 다용하고 있었던 것에 반해서, 카빈총 기병은 마상 사격과 분별 있는 백병전을 전문으로 하고 있었다.
: 1812년에 나폴레옹은 그들에게도 철 흉갑을 착용하도록 명령했다. 흉갑을 착용하지 않는 것을 자랑으로 여겼던 그들은 크게 억울해했지만, 로마 제국풍의 금색 흉갑을 착용한 카라비니에는, 프랑스 제국식의 은색 흉갑을 착용하는 퀴라시에와 패션의 대상이 되었다. 프랑스 흉갑기병과 기마 기총병이라는 장갑 기병은 유럽의 전장을 지배하는 무대가 되었고, 동맹군의 고민거리가 되었다. 중기병으로서 나폴레옹 자신이 산병 임무를 수행하지 않도록 엄명했지만, 기마 기총병도 필요에 따라 산병전을 수행했다.[71]
3. 2. 2. 경기병 혹은 경장기병(Cavalerie légère)
- '''후사르(Hussards)''' : 후사르는 빠른 속도와 뛰어난 기마술을 자랑하는 경장 기병대였다. 이들은 주로 정찰, 추격, 측면 공격 등의 임무를 수행했다.[41]
- '''추격기병(Chasseurs-à-Cheval)''' : 추격기병은 후사르와 유사한 역할을 수행했지만, 후사르만큼 정예 부대로 여겨지지는 않았다.
- '''창기병(Lanciers)''' : 창기병은 창, 사브르, 권총으로 무장한 기병대였다. 이들은 보병을 정면으로 공격할 때 효과적이었다.[42]
3. 3. 보병(Infanterie)
보병은 대육군에서 가장 화려한 병과는 아니었지만, 대부분의 전투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수행했으며, 그들의 활약은 승패를 좌우했다. 보병은 크게 전열 보병(Infanterie de Ligne프랑스어)과 경보병(Infanterie Légère프랑스어)의 두 가지 유형으로 나뉘었다.[8]3. 3. 1. 전열보병연대(Infanterie de ligne)

전열보병은 대육군의 대부분을 차지했다. 1803년 나폴레옹은 연대라는 단어를 다시 사용하게 했다. 프랑스 혁명 시기의 반여단(demi-brigade프랑스어, 2개로 1개 여단이 되어 왕립이라는 의미가 없었던 것에 기인)은 임시 부대나 보조 부대에만 사용되었다. 대육군 창설 당시 89개 전열보병연대(Régiments de Ligne프랑스어)가 있었는데, 이 수는 프랑스 현의 수와 같았다. 최종적으로는 156개 연대가 되었다.
전열보병연대는 나폴레옹 전쟁 중에 그 규모가 바뀌었지만, 기본적인 구성 요소는 대대였다. 1개 보병대대는 약 840명으로 이루어져 있었으며, 이것이 대대의 정원이 되었고, 대부분의 부대가 바뀌지 않았다. 그 외에 400명에서 600명의 대대도 있었다. 1800년부터 1803년까지 전열보병대대에는 8개 소총병 중대와 1개 척탄병 중대가 소속되어 있었다. 1804년부터 1807년까지는 7개 퓨질리에 중대와 1개 척탄병 중대, 1개 특별병(Voltigeurs) 중대가 소속되어 있었다. 1808년부터는 4개 퓨질리에 중대, 1개 척탄병 중대, 1개 특별병 중대로 구성되었다.
- '''소총병(fusilier)'''
: 퓨질리에(소총병)는 보병대대의 대부분을 차지했으며, 대육군의 전형적인 보병이었다. 무기는 샤를빌 1777년형 소총과 총검이었다. 훈련은 행군 속도와 지속시간에 중점을 두었으며, 근접전이나 백병전에서의 개별 조준 사격이 이어졌다. 이는 유럽의 적국 다수와 다른 점으로, 타국에서는 제대로 된 대형으로 움직여 일제사격을 하는 것에 중점을 두었다.
: 나폴레옹 전쟁 초기의 프랑스군의 승리는 먼 거리를 빠르게 이동할 수 있는 능력에 달려 있었으며, 그 능력은 보병에게 부과된 훈련의 결과였다. 1803년부터 1개 대대는 8개 퓨질리에 중대가 되었으며, 1개 중대는 약 120명이었다. 1805년 퓨질리에 중대 중 하나를 개조하여 1개 특별병 중대를 창설했다. 1808년 나폴레옹은 보병대대를 9개 중대에서 6개 중대로 변경했다. 새로운 중대는 구성원의 수가 140명이 되었으며, 이 중 4개는 퓨질리에 중대, 1개는 척탄병 중대, 나머지 1개는 특별병 중대였다.
: 모자는 쌍각모였으며, 1807년에 원통형 모자로 바뀌었다. 제복은 흰 바지, 흰 외투와 짙은 청색 상의(1812년까지는 하비 롱, 그 후는 하비 베스트)에 흰 옷깃을 달고, 붉은 옷깃과 소매였다. 모자에는 색깔이 있는 폼폼을 달았다. 이 폼폼의 색깔은 중대마다 달랐다. 1808년 이후의 편성에 따르면, 제1중대는 짙은 녹색 폼폼, 제2중대는 하늘색, 제3중대는 주황색, 제4중대는 보라색 폼폼이었다.
- '''척탄병'''
: 척탄병은 나폴레옹 전열보병의 정예였으며, 숙련된 병사들로 채워졌다. 새로 만들어진 대대에는 척탄병 중대가 없었다. 나폴레옹은 두 번의 작전에 참가시킨 후, 가장 강력하고 용감하며 키가 큰 퓨질리에를 척탄병 중대로 승진시켰으며, 대대 중에는 2개 이상의 척탄병 중대가 있는 경우도 있었다.
: 척탄병 신병의 조건은 연대 내에서도 키가 크고 무서운 외모에, 콧수염을 기르고 있어야 했다. 이에 더해 모자는 곰털 모자가 되고, 상의에는 붉은 견장을 달았다. 1807년 이후 곰털 모자는 붉은 선과 붉은 깃털이 달린 원통형 모자로 바뀌었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곰털 모자를 선호했다. 표준 샤를빌 1777년형 소총과 총검 외에도 척탄병은 짧은 검을 찼다. 이는 근접전에서 사용하기 위한 것이었지만, 모닥불 나무를 자르는 도구가 되었다.
: 척탄병 중대는 일반적으로 가장 전통적이고 영예로운 위치인 열의 오른쪽 끝에 위치했다. 작전 행동 중, 척탄병 중대는 척탄병 대대를 형성하거나, 때로는 연대나 여단을 형성하기도 했다. 이 배치는 더 큰 전투 대형의 선봉에 놓였다.
- '''특별병(Voltigeurs)'''
: 특별병은 전열연대의 엘리트 경보병이었다. 1805년 나폴레옹은 전열대대 중에서 키는 작지만 민첩한 자를 골라 특별병 중대를 만들도록 명령했다. 이 중대는 대대의 계층에서는 척탄병 중대에 다음으로 높은 위치에 있었다. 그 이름은 원래의 사명에서 기인한다. 특별병 중대는 적의 기병에 대해 말에 뛰어올라 싸우는 것이었는데, 기발한 아이디어였지만 전투에서는 잘 되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특별병은 중요한 임무를 수행했으며, 산병전이나 각 대대의 정찰 등을 수행했다. 그 훈련에서는 사격 기술과 빠른 움직임에 중점을 두었다.
: 모자는 쌍각모로 노란색과 녹색 또는 노란색과 붉은색의 큰 깃털이 달려 있었다. 1807년 이후, 원통형 모자로 바뀌어 노란색 선과 유사한 깃털이 달렸다. 상의에는 녹색 선이 있는 노란색 견장과 노란색 옷깃이 달렸다. 원래의 무기는 짧은 용기병용 소총이었지만, 실제로는 샤를빌 1777년형 소총과 총검을 장비했다. 척탄병과 마찬가지로, 근접전을 위해 짧은 검을 찼지만 역시 별로 사용되지 않았다. 각 특별병 중대는 묶여, 경보병 연대나 여단을 만들기도 했다. 1808년 이후 전열의 왼쪽 끝에 위치했다. 이 위치는 전통적으로 전열 전투에서 두 번째로 영예로운 것이었다.
3. 3. 2. 경장보병(Infanterie légère)
경장보병(Infanterie Légère) 부대는 전열보병 부대에 비해 사격술과 빠른 기동성에 중점을 두고 훈련받았다. 그 결과, 경보병은 전열보병보다 정확한 사격과 신속한 행동을 할 수 있었다. 경보병 연대는 대규모 작전의 초계 임무에 자주 투입되었고, 지휘관들은 전열보병보다 경보병에게 더 많은 임무를 맡겼다. 이로 인해 경보병 부대는 단결심이 높았고, 화려한 제복과 태도로 유명했다. 경보병은 숲을 빠르게 통과하고 산병전에서 몸을 숨길 수 있도록 전열보병보다 키가 작아야 했다.[8]경장보병대대의 구성은 전열보병대대와 비슷했지만, 척탄병, 수발총병, 특별병과는 다른 종류의 부대가 존재했다.
- '''추격병(Chasseurs)''': 추격병은 경장보병대대의 수발총병으로, 대대의 대부분을 차지했다. 이들은 샤를르빌 1777년식 머스켓총과 총검, 그리고 접근전용 짧은 검을 휴대했다. 1806년까지 추격병의 제복은 원통형 모자에 진녹색의 커다란 깃털과 하얀색 끈이 있었고, 제복은 전열보병보다 어두운 청색으로 위장 효과를 냈다. 상의는 전열보병과 같았지만 진청색과 빨간색의 견장이 있었다. 바지는 진청색이었고, 장화는 기병의 것보다 길었다. 1807년 이후 원통형 모자는 표준형으로 바뀌었으나 하얀 끈 장식은 유지되었다. 전열의 수발총병과 마찬가지로 모자에는 색깔이 있는 방울이 달렸지만, 연대마다 색이 달랐다.[8]
- '''기총병(Carabiniers)''': 기총병은 경장보병대대의 척탄병이었다. 2번의 원정 작전에 참가한 경험이 있고 키가 큰 용감한 추격병 중에서 선발되었으며, 대대의 엘리트 부대였다. 척탄병처럼 콧수염을 기르도록 했다. 무기는 샤를르빌 1777년형 머스켓 총과 총검, 짧은 사벨이었다. 모자는 높은 곰털 모자였으나 1807년에 빨간색과 녹색이 들어간 원통형 모자에 빨간 깃털이 부착된 것으로 바뀌었다. 제복은 추격병과 같았으나 빨간 견장이 있었다. 기총병 중대는 더 큰 기총병 부대를 구성하여 돌격 작전에 사용되기도 했다.[8]
- '''특별병(Voltigeurs)''': 특별병은 전열보병대대의 특별병과 같은 임무를 맡았지만, 민첩성과 사격술이 더 요구되었다. 제복은 수발총병과 같았으나 황색과 녹색의 견장이 있었고, 1806년부터는 모피제 높은 모자(colpack) 대신 원통형 모자를 착용했다. 모피제 높은 모자에는 빨강 위에 황색의 커다란 깃털모와 녹색의 끈이 있었다. 1807년 이후 원통형 모자에는 변형된 황색의 커다란 깃털모와 황색의 끈이 있었다. 특별병 중대도 필요에 따라 큰 부대를 구성하기도 했다.[8]

3. 4. 포병(Artillerie)
나폴레옹은 포병 장교 출신으로, "포병이 좋으면 신이 돕는다"라고 말할 정도로 포병의 중요성을 강조했다.[75] 프랑스 포병은 대육군의 핵심으로, 보병 및 기병과 융합되어 운용되거나 때로는 단독으로 작전을 수행하며 막강한 화력을 통해 짧은 시간에 적에게 큰 타격을 주었다. 프랑스 포병은 종종 대규모 포대(포병 대대)를 이루어 집중 포화를 퍼부어 보병이나 기병의 근접 공격 전에 적의 전열을 약화시켰다. 숙련된 포병 부대의 훈련 덕분에 나폴레옹은 포병 전력을 빠르게 이동시켜 약화된 방어선을 지원하거나 적 전열에 돌파구를 만들 수 있었다.[115]뛰어난 훈련 외에도, 나폴레옹의 포병대는 장바티스트 그리보발이 설계한 프랑스 포의 여러 기술적 개량 덕분에 전력이 강화되었다. 그리보발 시스템은 대포를 더 가볍고 빠르게 이동시키며 조준하기 쉽게 만들었고, 포차를 강화하고 구경을 표준화했다. 일반적인 야전포는 4파운드, 8파운드, 12파운드 카논포와 6인치 유탄포였으나, 전쟁 후기에는 4파운드 포와 8파운드 포는 오귀스트 마르몽이 설계한 공화력 11년식 6파운드 포로 교체되었다. 포신은 황동(놋쇠)으로 제작되었고,[76] 포가, 바퀴, 전차는 올리브 그린(연녹색) 페인트로 칠해졌다. 포병대는 크게 도보포병대(''Artillerie a Pied'')와 기마포병대(''Artillerie a Cheval'')로 나뉘었다.[115]
3. 4. 1. 도보포병대(Artillerie à pied)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포병들은 대포와 함께 행군했으며, 대포는 물론 말이 끌었다. 이 때문에 행군 속도는 보병보다 느렸다.[115] 1805년에는 8개 연대, 나중에는 10개 연대가 있었고, 친위 연대에는 2개 연대가 더 있었다. 그러나 기병이나 보병 연대와는 달리, 이들은 군정적인 후방 관리 조직이었다. 전선에서의 행동 단위는 120명으로 구성된 중대였다. 종군 시(원정 시)에는 중대별로 각 사단이나 각 군단에 편입되었으며, 전자는 사단 포병으로 사단장의 지휘 하에, 후자는 군단 포병으로 군단장의 지휘 하에 들어갔다.[115]- 사단 포병: 보병 사단의 사단 포병은 1개 보병 포병 중대가 표준으로 정해졌다. 1개 중대에는 일반적으로 카논포 6문과 유탄포 2문, 총 8문이 배치되었다.[115]
- 군단 포병: 군단 포병은 1개 보병 포병 중대와 1개 기병 포병 중대의 페어가 표준으로 정해졌다. 군단 포병에는 종종 중포가 배치되었다.[115]
포병 중대는 포차 견인 중대와 페어를 이루어 종군하는 것이 일반적이었으며, 이 페어는 포병 분단(''division d’artillerie'')이라고 불렸다. 당시 ''division''에는 "사단"과 "중대 페어"의 두 가지 의미가 있어서 혼란을 초래했다. 후자는 대대의 분할 포메이션 용어로 사용되었다. 포병 분단에는 포병, 부사관, 장교 외에도 금속 가공, 목공, 모피 등 가공 작업자도 함께 했다. 그들은 예비품을 만들거나 대포, 대차, 탄약 상자, 마차의 유지 및 수리를 담당했으며 말 관리와 군수품 보관도 수행했다.[115]
3. 4. 2. 기마포병대(Artillerie à cheval)
기병 포병대(Artillerie à Cheval)는 기병의 빠른 기동력에 맞춰 신속하게 포격을 지원하기 위해 만들어진 부대이다. 기병과 포병을 조합한 부대로, 말이나 포차에 탑승하여 전투에 참가했다. 전선에 매우 가까이 배치되었기 때문에 장교와 포병은 근접전에 대비한 훈련도 받았다.[115]기병 포병대는 배치 장소에 도착하면 재빨리 말에서 내려 대포를 설치하고 적에게 조준하여 집중 포화를 퍼부었다. 이후 대포를 다시 대차에 싣고 새로운 장소로 빠르게 이동할 수 있었다. 이러한 일련의 과정을 완벽하게 수행하기 위해 훈련을 거듭했기 때문에, 포병 중에서도 엘리트 부대로 여겨졌다. 친위 기마 포병대는 전속력으로 달려가 1분 안에 첫 포탄을 발사할 수 있었다. 이러한 능력에 경악한 웰링턴 장군은 "그들은 권총을 쏘듯이 대포를 쏴댄다"라고 묘사했다.[45]
기병 포병대는 관리상 6개 연대와 친위대에 1개 연대가 있었다. 나폴레옹은 각 군단에 최소 1개, 가능하다면 각 사단에도 1개의 기병 포병 중대를 배치하려 했다. 뛰어난 능력을 발휘했지만, 창설과 유지에 상당한 비용이 필요했다. 따라서 기병 포병대의 수는 보병 포병대에 비해 적었고, 구성 비율은 5분의 1 정도였다. 황제가 기병 포병대 병사들의 이름을 모두 기억한다고 자신만만하게 이야기할 정도였다. 훈련, 말, 무기, 장비뿐만 아니라 많은 군수품을 사용했기 때문에 기병 포병대는 보병 포병대의 2배, 친위 포병대의 3배의 비용이 들었다.[75]

3. 4. 3. 견인포병마차(Train d'artillerie)
나폴레옹은 1800년 1월에 견인포병마차(Train d'artillerie)를 창설했다. 견인포병마차의 주된 역할은 포차를 끄는 말을 관리하고 제어하는 마꾼을 제공하는 것이었다.[116] 이전까지 프랑스군은 민간 마꾼을 고용했으나, 이들은 전투 중에 대포를 버리고 자신과 말의 목숨을 구하는 경우가 많았다.[117]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견인포병마차 요원은 민간인과 달리 무장과 훈련을 받고, 정규군과 동일한 제복을 지급받았다.견인포병마차는 초기에 5개 중대로 구성되었다. 제1중대는 정예 부대로 기마포병대대에 배속되었고, 중간 3개 중대는 도보포병대대에 배속되어 예비 부품 상자, 물자용 마차 관리, 야외 대장간 일을 담당했다. 마지막 1개 중대는 예비대로 신병과 말 훈련을 담당했다. 1800년 원정 이후 견인포병마차는 8개 대대로 재편성되었고, 각 대대는 7개 중대를 관리했다. 나폴레옹의 포병대 증강에 따라 대대 수가 추가되어 1810년에는 14개 대대에 달했다. 1809년, 1812년, 1813년에는 기존 13개 대대가 두 배로 증가하여 총 27개 대대가 되었다. 1809년부터는 일부 대대에 보병 여단의 대포를 담당하는 중대가 추가로 창설되어 보병대에 배속되었다.
친위대는 자체적인 견인대를 보유했으며, 친위포병대가 증강됨에 따라 견인대 역시 대대에서 연대 규모로 확장되었다. 1813년부터 1814년까지 친위선임병대는 12개 견인 중대, 친위청년포병대는 16개 견인 중대의 지원을 받았으며, 각 포병대대에 1개 견인 중대가 배치되었다.[118]
3. 5. 지원부대(Services de support)
; 근위 보병 포병 (Artillerie a Pied de la Garde impériale프랑스어)황제 직속 포병 연대 입대 자격은 키가 크고 용맹함을 인정받은 경력이 있으며 교양을 갖춘 3회 이상 종군 경험자였다. 각 포병 연대에서 2명이 채용되었으며, 1806년에는 35세 이하, 10년 이상 근무 조건이 추가되어 각 연대에서 15명이 채용되었다. 프랑스 보병 포병 최정예인 이 연대는 처음 3개 대대로 구성되었으며, 제1, 제2 대대는 구참 근위대에, 제3 대대는 신규 근위대에 소속되었다. 각 대대는 3개 중대를 보유, 중대 병력은 약 120명으로 중포 4문 또는 경포 8문을 보유했다. 1809년 제3 대대는 스페인 원정으로 연대에서 분리, 이후 제3 대대를 중핵으로 근위 보병 포병 제2 연대가 신편성되어 신규 근위대 지원 포병이 되었고, 1813년에는 16개 중대까지 늘어났다. 제1, 제2 대대의 총 6개 중대는 근위 보병 포병 제1 연대를 형성하여 구참 근위대 지원 포병 및 황제 직속 예비 포병이 되었다.
; 근위 기마 포병 (Artillerie a Cheval de la Garde impériale프랑스어)
근위 기마 포병 채용에는 엄격한 기준이 적용되어 제국 전역에서 우수 인재를 선발했다. 이들은 전장을 신출귀몰하게 누비며, 전속력으로 달려와 마차에서 대포를 내려놓고 첫 포탄을 발사하는 데 1분도 걸리지 않았다고 한다. 근위 기마 포병 연대는 보병과 기병을 포함한 프랑스 전체 포병 중 최상급 부대였다. 사용 군마도 거대하고 힘이 센 초일류였으며, 말 부족 시 황제 명령으로 전 기병 최상급 부대인 근위 기마 척탄병 연대에서 군마를 융통받을 수 있었다. 이는 근위 기마 포병이 전 군대 정점에 서는 전력으로 간주되었음을 보여준다. 3개 대대 구성으로 각 대대는 2개 중대, 각 중대 병력은 약 100명으로 대포 6문을 보유했다.
3. 5. 1. 공병(Ingénieurs)


기병, 보병, 포병이 전투에서 각광을 받을 때, 군대에는 여러 유형의 군사 공병이 있었다.
대육군의 교량기사(Pontonniers프랑스어)는 나폴레옹의 군대유지기구에서 중요한 역할을 맡았다. 특히 부교를 건설하여 물이라는 장애물을 넘을 수 있게 한 공헌이 제일 크다. 교량기사의 기술 덕분에 적이 위치하지 않은 강을 넘어 적의 허를 찔렀고, 이후 모스크바에서 철수할 때 베레지나 강에서 전멸 위기에 빠진 아군을 구하기도 했다.[1]
나폴레옹은 교량기사의 가치를 잘 알고 인정했으며, 자신의 군대에 14개 대대를 배치하고, 그 지휘를 빛나는 경력을 가진 공병 장바티스트 에블레 장군에게 맡겼다. 그의 도구 및 장치를 사용한 훈련을 통해 재빨리 다리의 여러 가지 부품을 만들어 조립한 후 재이용하였다. 필요한 재료, 공구, 부품은 중대의 마차로 운반했다. 만약 부품 등이 부족한 상황에는 즉시 마차에 실어놓은 대장간 등으로 장치를 제작했다. 1개 기사중대는 80개의 부교(길이 약 120m에서 150m)를 7시간 이내에 조립해 만들 수 있었다. 이것은 오늘날의 기준으로 보더라도 경이적이었다.[1]
교량 외에도, 적의 방어시설에 대응하기 위해 토목공병 중대도 있었다. 교량기사보다는 의도가 있는 역할을 맡았기에 사용빈도는 적었다. 황제가 아크레 포위전 (1799년) 등 초기 원정작전의 경험을 토대로 고정된 방어시설에 정면 공격할 때도 가능한 회피하고 고립시키는 방법을 생각해내자, 토목공병 중대는 통상 기타 임무로 돌려졌다.[1]
조니라고 불리는 색다른 타입의 기사중대가 대대 및 연대 내에 만들어졌다. 조니는 대육군 내부에서 통하는 말로써 기사를 가리키는 것이지만 원래 의미는 오늘날에도 사용되는 '''Génie''' militaire라고 불리는 정령(Genie)을 의미한다.[1]
3. 5. 2. 병참술(Logistique)
나폴레옹은 "군대는 밥으로 행진하는 살아있는 생물"이라며 병참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대육군의 병사들은 각자 4일 분량의 식량을 지급받았다. 이들을 따라가는 보급 마차에는 8일 분량의 식량이 실려 있었지만, 이는 비상시에만 소비하도록 했다. 나폴레옹은 병사들에게 식량 징발과 징발(약탈, ''라 마로드'')을 통해 현지에서 식량을 조달하도록 장려했다.[54]보급 물자는 작전 개시 전에 건설된 전방 기지와 보급 기지에 비축되었다. 이들은 군대가 전진함에 따라 앞으로 이동했다. 대육군의 보급 기지는 군단 및 사단 보급 기지를 보충하고, 이는 다시 여단 및 연대 보급 열차를 보충하여 병사들에게 식량과 탄약을 분배했다. 식량 징발에 대한 의존은 때때로 정치적 압력에 의해 결정되었다. 우호적인 영토를 행군할 때는 "국가가 제공할 수 있는 것으로 생활하라"는 지시를 받았지만, 중립 영토를 행군할 때는 보급품을 받았다.
이러한 계획적이고 즉흥적인 병참 시스템 덕분에 대육군은 최대 5주 동안 하루 24km까지의 빠른 행군을 지속할 수 있었다. 병참 시스템은 니콜라 아페르가 발명한 식품 보존 기술 형태의 기술 혁신으로 도움을 받았으며, 이는 현대적인 통조림 방법으로 이어졌다.
3. 5. 3. 의료 종사자(Medical)

의료 관계자는 영광이나 권위와는 거리가 멀었지만, 전투 후의 끔찍한 광경을 처리해야 했다. 모든 여단, 사단, 군단에는 각각 의료 관계자가 있었고, 위생병은 부상자를 찾아 옮겼으며, 간호병은 간호와 간호를 행하고, 그 외에 약제사와 의사, 외과 의사가 있었다. 이러한 의료 관계자 중에는 종종 훈련이 부족하거나 부적절한 자가 있어 다른 일을 담당하는 부대도 있었다. 대육군의 의료 상태는 당시 모든 군대와 마찬가지로 원시적이었다. 전투보다 부상이나 질병으로 죽는 자가 더 많았다.[55] 위생이나 항생 물질에 대한 지식도 없었다. 외과 시술은 대부분 절단이었다. 마취는 독한 술을 마시게 하거나, 때로는 환자를 때려 의식을 잃게 하는 것이었다. 대체로 수술을 받은 환자의 3분의 1밖에 살아남지 못했다.
나폴레옹 전쟁 동안, 군대의 의료 기술과 시술 기술은 큰 진보를 이루지 못했지만, 대육군에서는 의료 관계자의 조직화에서 개선의 혜택을 받았다. 외과 장군 Dominique-Jean Larrey|도미니크장 라레프랑스어 남작이 제창한 이른바 '날으는 구급' 시스템이다. 전장에서 프랑스군 '날으는 포병대'가 행하고 있는 그 이동 속도를 관찰한 라레 장군은, 이것을 부상자를 신속하게 수송하고, 훈련된 마부와 위생병과 들것 운반 요원이 있는 마차로 바꾸는 시스템으로 대체했다. 이것은 현대 군사 구급 시스템의 선구이며, 수십 년 동안 전 세계의 군대에 의해 채택되었다. 라레는 이동력을 높이고 야전 병원의 조직을 개선함으로써, 현대의 이동 육군 외과 병원의 원형을 만들었다.
부상자의 고통에 대한 증언을 읽으면 끔찍한 내용이 많다. 나폴레옹 자신도 "죽는 것보다 고통을 견디는 것이 용기가 필요하다"고 말한 적이 있었다. 그는 살아남은 사람들에게 프랑스 최고의 병원에서 요양할 수 있도록 보장했다. 또한 상이군인은 영웅으로 취급되어 훈장을 수여받고, 연금과 필요하다면 의지도 지급받았다. 부상자가 신속하게 간호를 받고, 영예를 얻고, 귀향 후의 뒷바라지를 받을 수 있다는 것이 알려지자, 대육군 안의 사기도 고조되고, 전투 능력을 높이는 데에도 기여했다.

3. 5. 4. 통신(Communications)
대육군의 통신 수단은 당시 일반적인 군대와 마찬가지로 말을 탄 전령이 명령을 전달하는 방식이었다. 후사르와 같은 기병은 용맹함과 뛰어난 기마술 덕분에 이 임무에 자주 선발되었다.[1] 단거리 전술 신호는 깃발을 이용한 시각적 신호나, 드럼, 군대 나팔, 트럼펫 등의 악기를 이용한 청각적 신호를 사용했다. 이러한 기수와 악기 연주자들은 상징적, 의례적, 사기 고취 기능 외에도 중요한 통신 역할을 담당했다.[1]장거리 통신에서는 클로드 샤프가 발명한 완목통신이 큰 발전을 가져왔다. 샤프의 시스템은 서로 볼 수 있는 거리에 설치된 작은 탑들의 네트워크였다. 각 탑에는 9m 높이의 기둥이 있었고, 꼭대기에는 3개의 움직이는 나무 막대(완목)가 있었다. 이 막대들은 도르래와 지렛대를 사용하여 조작되었으며, 막대의 위치 조합을 통해 196가지의 신호를 만들 수 있었다. 숙련된 조작원과 좋은 시야 조건 하에서는 파리에서 릴까지 193km 거리를 15개 탑을 경유하여 9분 만에 신호를 보낼 수 있었다. 36개 신호로 구성된 전문은 약 32분, 파리에서 베니스까지는 약 6시간 만에 전달 가능했다.[1]
샤프의 완목통신은 나폴레옹에게 매우 중요한 비밀병기였다. 그는 휴대용 완목통신 장치를 작전 본부와 함께 이동시키며, 장거리에서도 적보다 빠르게 병참 및 군대 전략을 조정할 수 있었다. 1812년에는 마차 탑재형 장치 연구가 시작되었으나, 실전 투입되지는 못했다.[1]
4. 대육군의 외인부대(Troupes étrangères de La Grande Armée)
많은 유럽 국가가 외국인 부대를 채용했으며, 나폴레옹의 프랑스도 예외는 아니었다. 나폴레옹 전쟁 중 대육군에서 외국인 부대는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고, 특징적인 전투 방식을 보였다. 거의 모든 유럽 국가가 다양한 단계에서 대육군의 일부가 되었다. 전쟁 말기에는 수만 명의 병사가 종군했다.[119]
연도 | 내용 |
---|---|
1805년 | 라인 동맹의 35,000명 부대가 정보 통신선과 본대 측면을 지키는 데 사용되었다. |
1806년 | 27,000명이 추가되어 같은 용도로 사용되었다. 또한 20,000명의 작센인 부대는 프로이센 소탕 작전에 사용되었다. |
1806년 ~ 1807년 | 동계 작전에서 독일, 폴란드, 스페인 부대가 대육군 좌익을 담당하여, 발트해에 면한 슈트랄준트와 단치히 항구 점령을 도왔다. |
1807년 | 프리틀란트 전투에서 장 란 원수 군단은 상당수가 폴란드, 작센 왕국, 네덜란드 병사로 채워졌다. 이때 외국인 부대가 처음으로 전투에서 주요한 역할을 수행하며 두드러진 활약을 했다. |
1809년 | 오스트리아 작전에서 대육군의 약 1/3이 라인 동맹 병사였다. 이탈리아 방면군 1/4은 이탈리아인이었다. |
1812년 | 대육군 정점 시기, 러시아 침공 부대의 절반 이상은 프랑스인이 아닌 오스트리아, 프로이센 등 20개국 이상 출신이었다. |
5. 대육군의 계급(Rangs de La Grande Armée)
대육군의 승진 제도는 사회적 계급이나 재력보다는 능력에 따라 이루어졌다. 나폴레옹은 자신의 군대가 실력사회가 되기를 원했고, 어떤 병사라도 출신에 관계없이 이룬 업적에 따라 지휘관의 최고 계급까지 빠르게 오를 수 있게 하였다. 대체로 이러한 목적은 달성되었다. 능력이 있는 사람은 수년 만에 정점에 도달할 수 있었는데, 이는 다른 군대였다면 수십 년이 걸렸을 것이다. 신분이 낮은 병사도 군대에서 최고위직인 원수가 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했다.
다음 표는 대육군의 계급과 현재 미 육군의 계급을 비교한 것이다.
대육군의 계급 | 미 육군의 계급 |
---|---|
장교 | |
원수[120] | 중장 |
사단장 | 소장 |
여단장 | 준장 |
대령 | 대령 |
중령[121] | 중령 |
소령[122] | 소령 |
대위 | 대위 |
중위 | 중위 |
소위 | 소위 |
colspan=2 | | |
준위 | 준위 |
위임 준위 | 특무 부사관 |
특무 상사[122] | 선임 부사관 |
상사[122] | 부사관 |
중사[122] | 대리 사관 |
하사 또는 포병 부사관[122] | 상병 |
사병 또는 기병(기병대) 또는 사수(포병대) | 이등병 |
제국 원수는 대육군의 계급은 아니었지만, 뛰어난 사단 장군에게 수여되는 칭호였으며, 더 높은 급여와 특권이 함께 제공되었다. 군단 사령관 및 군대 사령관도 마찬가지였다. 대육군에서 가장 높은 영구 계급은 사단장이었으며, 그보다 높은 계급은 동일한 계급이었지만 임명된 사람들을 위한 별도의 휘장이 있었다.[56]
1792년에서 1814년 사이에 190명 이상의 외국 출신 병사가 프랑스 육군 고위 장교로 진급했으며, 요제프 안토니 포니아토프스키는 라이프치히 전투 (1813)에서 제국 원수로 임명되었지만 48시간도 채 안 되어 사망했다.[57]
다음 표는 대육군 계급과 현대 미국, 영국, NATO의 해당 계급을 나타낸다.
대육군 계급 | 현대 미국/영국/NATO 동등 계급 |
---|---|
영예로운 칭호 | |
제국 원수 | 원수 |
연대 총사령관 (프랑스) (직책) | 군종 사령관 |
지휘 장교 | |
제네랄 앙 셰프 (이 계급은 1812년에 폐지됨) | 중장 |
사단장, 중장 (구체제 계급은 1814년에 부활) | 소장 |
여단장, 야전사령관 (구체제 계급은 1814년에 부활) | 준장 |
참모장 (직책, 계급 아님), 근위 소장 (직책, 계급 아님) | — |
부관 장군 (직책, 계급 아님) | — |
부관-사령관 (참모 전용 계급) | 참모 대령 |
선임 지휘 장교 | |
대령, 여단장 (1793-1803) | 대령 |
2등 대령 (1804년부터) | 선임 중령 |
소령 (1803년부터) | 중령 |
2등 소령 (1811년부터) | 선임 소령 |
중령 (1793년 이전), 대대장 또는 기병대장 (기병, 기마 포병, 헌병 및 수송부) | 소령 |
하급 지휘 장교 | |
주임 대위 | 참모 대위 |
대위 | 대위 |
중위 | 1등 중위 |
소위 | 2등 중위 |
사관 후보생 | 사관 후보생 |
부사관 | |
부관 (1791년 이전), 부관 하사 (1791년부터) | 준위 |
상사 또는 마레샬 데 로지 셰프 (기병, 기마 포병, 헌병 및 수송부) | 선임 상사 |
하사 또는 마레샬 데 로지 (기병, 기마 포병, 헌병 및 수송부) | 하사 |
병 | |
병장-포리에 또는 준병-포리에 (기병, 기마 포병, 헌병 및 수송부) | 중대 서기/군수 상사 |
병장 또는 준병 (기병, 기마 포병, 헌병 및 수송부) | 병장 |
병 또는 척탄병 또는 샤쇠르 또는 볼티제르 또는 티레르 등 (보병) 또는 드라군 또는 샤쇠르 또는 슈발레게 (기병) 또는 포병 또는 포수 또는 폰토니에 (포병) 또는 사페르 또는 광부 (공병) 또는 수송병 (수송부) | 이등병 |
병 또는 총검병 또는 샤쇠르 (보병) 또는 포병 또는 포수 또는 폰토니에 (포병) 또는 사페르 또는 광부 (공병) 또는 수송병 (수송부) | 이등병 |
군악병 또는 악대원 또는 클레롱 또는 음악가 | 군악대 |
6. 대육군의 역사
대육군은 원래 영국 침공을 위해 1804년 불로뉴 항구에서 "L'Armée des côtes de l'Ocean"(대서양 연안 군대)으로 결성되었다. 1804년 나폴레옹이 프랑스 황제로 즉위한 후, 제3차 대프랑스 동맹이 프랑스에 대항하여 결성되었고, 대육군은 1805년 동쪽으로 눈을 돌렸다. 8월 말 불로뉴를 떠난 이 군대는 빠른 행군을 통해 카를 폰 마크 장군의 고립된 오스트리아군을 울름 요새에서 포위했다. 울름 전투는 프랑스 군인 2,000명의 희생으로 오스트리아군 60,000명이 포로로 잡히는 결과를 가져왔다. 11월에는 빈이 함락되었지만 오스트리아는 항복을 거부하고 야전에 군대를 유지했다. 게다가 동맹국인 러시아는 아직 행동에 나서지 않았다. 전쟁은 한동안 더 계속될 것이었고 이 문제는 1805년 12월 2일 아우스터리츠 전투에서 결정적으로 해결되었는데, 수적으로 열세였던 대육군은 러시아 황제 알렉산드르 1세가 이끄는 연합 러시아-오스트리아군을 격파했다. 이 놀라운 승리는 1805년 12월 26일에 프레스부르크 조약으로 이어졌으며, 이듬해 신성 로마 제국이 해체되었다.[6]
프랑스의 중앙 유럽 내 세력 증가는 그 전 해에 중립을 유지했던 프로이센을 불안하게 만들었다. 많은 외교적 갈등 끝에 프로이센은 러시아의 군사 지원 약속을 받아내어 1806년에 대프랑스 동맹이 결성되었다. 대육군은 "바타이용-카레"(대대 광장) 시스템을 사용하여 프로이센 영토로 진격했는데, 이 시스템은 군단이 서로 가까운 거리를 유지하며 행진하여 상황에 따라 선봉, 후위 또는 측면 부대가 되었다. 이들은 1806년 10월 14일에 벌어진 예나와 아우어슈테트 전투에서 프로이센을 결정적으로 격파했다. 전설적인 추격전 끝에 프랑스는 14만 명의 포로를 잡았고, 약 2만 5천 명을 죽이거나 부상시켰다. 아우어슈테트 전투의 승리자인 루이 니콜라 다부 원수의 제3군단이 가장 먼저 베를린으로 진군하는 영예를 안았다. 프랑스는 또다시 동맹국이 도착하기 전에 적을 격파했지만, 이번에도 평화를 가져오지는 못했다.[7]
나폴레옹은 이제 남은 프로이센 군대가 러시아 동맹군과 합류한 폴란드로 관심을 돌렸다. 어려운 겨울 작전은 아무런 성과를 내지 못하고 교착 상태에 빠졌으며, 1807년 2월 7일~8일에 벌어진 아일라우 전투로 상황은 더욱 악화되었다. 이 전투에서 러시아군과 프랑스군의 사상자는 큰 성과 없이 급증했다. 봄에 작전이 재개되었고, 레빈 아우구스트 폰 베니히센 장군의 러시아군이 1807년 6월 14일 프리드란트 전투에서 처참하게 패배했다. 이 승리로 7월에 프랑스, 러시아, 프로이센 사이에 틸지트 조약이 체결되었고, 나폴레옹은 유럽 대륙에 적을 남기지 않게 되었다.[8]
대육군은 1808년 10월에 해체되었고, 그 구성원들은 스페인군과 라인군으로 편성되었으며, 라인군은 1809년에 독일군으로 재편성되었다.[9]
스페인을 제외하고, 3년 동안의 소강 상태가 이어졌다. 그러나 러시아와의 외교적 긴장은 너무 심해져 결국 1812년에 전쟁으로 이어졌다. 나폴레옹은 이 위협에 대처하기 위해 그가 지휘했던 군대 중 가장 큰 야전군을 소집했다. 1812년 6월 24일, 침략 직전, 총 685,000명의 병력으로 구성된 소집된 부대는 다음과 같았다:[10]
구성 | 병력 |
---|---|
프랑스 제국(현재의 프랑스, 이탈리아, 저지대 국가 및 여러 독일 국가) 출신 | 410,000명 |
폴란드인 | 95,000명 |
오스트리아인 | 35,000명 |
이탈리아인 | 30,000명[11] |
바이에른인 | 24,000명 |
작센인 | 20,000명 |
프로이센인 | 20,000명 |
베스트팔렌인 | 17,000명 |
스위스인 | 15,000명 |
덴마크인 및 노르웨이인 | 10,000명[12][13] |
스페인인 | 4,000명 |
포르투갈인 | 4,000명 |
크로아티아인 | 3,500명 |
아일랜드인 | 2,000명 |
새로운 ''대육군''(Grande Armée)은 이전과는 다소 달랐다. 그 부대의 3분의 1 이상이 프랑스에 종속된 국가 또는 프랑스와 동맹을 맺은 국가 출신의 비프랑스 징집병으로 채워졌다. 거대한 군대는 1812년 6월 24일 니멘 강을 건넜고, 나폴레옹은 빠른 행군으로 자신의 병력을 바클레이 드 톨리와 바그라티온 장군이 지휘하는 두 개의 주요 러시아 군대 사이에 배치할 수 있기를 희망했다. 그러나 러시아 군이 나폴레옹의 포위 공격을 세 번이나 성공적으로 피하면서 이 원정은 많은 좌절로 특징지어졌다. 모스크바 방어를 위한 마지막 방어선이 1812년 9월 7일에 보로디노 전투를 초래했다. 그곳에서 ''대육군''은 피비린내 나는 전투에서 승리했지만 결정적이지 않았고, 아마도 피로스의 승리였다. 전투 일주일 후, ''대육군''은 마침내 모스크바에 입성했지만, 그 도시는 거의 비어 있었고 불타고 있었다. 그 병사들은 이제 방화범을 추적하고 도시의 역사 지구를 지키면서 화재를 처리해야 했다. 나폴레옹과 그의 군대는 모스크바에서 한 달 이상을 보냈지만, 러시아 황제가 프랑스의 평화 제안에 응답하기를 헛되이 희망했다. 이러한 노력이 실패한 후, 프랑스군은 10월 19일에 출발했고, 이제 그들은 이전의 모습의 그림자에 불과했다. 러시아 겨울 동안의 장대한 후퇴는 전쟁에 대한 대중의 인식에 지배적이지만, 여름 동안 ''대육군''의 절반 이상을 잃었다. 프랑스군은 수렴하는 러시아 군대, 미셸 네 원수가 자신의 병력과 러시아군 사이에 후방 경계를 치르면서 반복적으로 공격을 받았고, 베레지나 강에 도달할 때쯤 나폴레옹은 약 49,000명의 병력과 군사적 가치가 거의 없는 40,000명의 낙오병만 남았다. 그 결과 발생한 베레지나 전투와 장 바티스트 에블레 장군의 기념비적인 작업으로 ''대육군''의 잔해가 구원받았다. 나폴레옹은 파리에 도착하여 새로운 군사 및 정치적 문제를 처리하기 위해 자신의 부대를 떠났다. 최초 침공 부대를 구성했던 685,000명의 병력 중 93,000명만이 살아남았다.[14]
러시아에서의 파멸적인 상황은 독일 및 오스트리아의 대프랑스 감정을 높이는 결과를 낳았다. 이윽고 제6차 대프랑스 동맹이 결성되어 독일이 다음 원정작전의 중심이 되었다. 나폴레옹은 새로운 군대를 만들어 먼저 선수를 쳤고, 뤼첸 전투와 바우첸 전투에서 연승했다. 그러나 러시아 원정 때문에 프랑스군 기병의 질이 떨어진 것과 부하 장군의 계산착오로 인해 이러한 승리는 결정적으로 전쟁을 끝낼 수 없었고, 휴전으로만 그쳤다. 나폴레옹은 이 휴전을 이용하여 그의 군대의 질과 양을 높이려고 했으나, 오스트리아가 동맹에 참가하자 그의 전략적 입장이 어두워지게 되었다. 8월 다시 전쟁이 시작되어 2일간의 드레스덴 전투에서 프랑스는 의미 있는 승리를 거두었다. 그러나 나폴레옹과의 직접 대결을 피하고, 그의 부하에게 총구를 겨눈 동맹군 측의 전략 채용으로 인해 프랑스는 카츠바흐 전투, 쿨름 전투, 그로스베렌 전투, 데네비츠 전투에서 연패를 거듭했다.
동맹군의 숫자가 증가하여 프랑스군을 라이프치히에서 포위했다. 3일간의 라이프치히 전투가 벌어졌고, 다리가 생각보다 빨리 파괴되었기 때문에 에르스타강의 맞은편 연안에 3만 명의 프랑스병을 방치하게 되어 나폴레옹에게 큰 손실을 입혔다. 그러나 이 작전은 하나우 전투에서 프랑스군의 철수를 저지하려다 고립된 바이에른군을 프랑스군이 격파하며 승리의 의미도 합쳐서 종말을 고했다.[129]
"대제국은 이제 없다. 지키지 않으면 안 되는 프랑스 자체다."라고 나폴레옹은 1813년 말쯤 의회에 말했다. 나폴레옹은 다시 새로운 군대를 결성했으나, 전략적으로는 사실상 희망 없는 위치에까지 오게 되었다. 동맹군은 피레네산맥에서 북 이탈리아 평원을 가로질러왔고, 거기에 프랑스의 동부 국경을 넘어 침략했다. 이 작전은 나폴레옹이 라 로시에르 전투에서 패배를 당했을 때 시작되었고 그는 이전의 정신을 추스르게 되었다. 1814년 6일 전쟁에서 3만 명의 프랑스군이 게프하르트 레베레히트 폰 블뤼허가 산개시킨 군단에 2만 명의 피해를 주었다. 이때 프랑스군의 피해는 2,000명에 불과했다. 프랑스군은 남쪽으로 향해 카를 필리프 추 슈바르첸베르크를 몬테로 전투에서 격파했다. 그러나 이러한 승리는 사태를 개선하는 데까지는 이르지 못하고, 랑 전투와 아르시쉬르오브 전투에서 프랑스군의 패배가 사기를 떨어뜨렸다. 3월 말 파리 전투에서 동맹군에게 격파되었다. 나폴레옹은 전투를 지속하길 바랐으나, 그의 부하들은 이를 거부하고, 1814년 4월 6일 황제의 자리에서 퇴위하는 것을 강요하여 승낙 받았다.[130]
1815년 2월 엘바섬에서 귀환한 나폴레옹은 그의 제국을 지키기 위해 새로운 활동에 다망했다. 1812년 이래 처음으로 다가온 전투에서 그가 지휘를 맡은 북부군(L'Armee du Nord)은 직업군인 집단으로써 능력이 높았다. 나폴레옹은 러시아 및 오스트리아가 오기 전에 벨기에에 있던 웰링턴 및 블뤼허의 동맹군과 조우하여 이들을 격파하길 원했다. 1815년 6월 15일에 시작된 작전은 처음엔 성공했다. 6월 16일 리니 전투에서 프로이센군을 격파했다. 그러나 숙달되지 않은 부하의 작업 및 서투른 지휘로 인해 모든 작전을 통해서 프랑스군에게 많은 문제를 일으키게 되었다. 에마뉘엘 드 그루시가 대 프로이센 전투에서 뒤늦은 진군으로 인해 리니에서 패배했던 블뤼허의 부대가 회복하여 워털루 전투에서 웰링턴의 원군으로 달려가는 것을 허용하게 되었다. 이 전투는 나폴레옹과 그가 사랑하는 군대에 있어 최후로써 결정적인 패배였다.[131]
7. 전술 및 대형(Formations and tactics)
나폴레옹은 뛰어난 전략가이자 전술가였다. 그는 고전적인 진형과 전술에 새로운 전술을 결합하여 유연하고 유동적인 전술을 구사했다.
주요 전술 및 대형:
- 횡대(Ligne): 기본적인 3열 횡대 진형으로, 일제 사격에 적합하지만 기동성이 떨어지고 측면 공격에 약하다.
- 행군 종대(Colonne de Marche): 신속한 이동과 정면 공격에 유리하지만 화력이 약하고 측면 공격, 매복, 포격에 취약하다.
- V자형 대형(Colonne de Charge): 기병 돌격 대형으로, 적 전열을 돌파하는 데 효과적이지만 돌격이 저지되면 측면 공격에 취약하다.
- 공격 종대(Colonne d'Attaque): 보병 종대와 산병을 결합한 형태로, 얇은 전열에 효과적이지만 화력 집중도가 낮고 포격에 약하다.
- 혼성 진형(Ordre Mixte): 나폴레옹이 선호한 보병 대형으로, 전열과 종대를 결합하여 화력과 기동성을 모두 확보했다. 포병과 기병의 지원이 중요했다.
- 산병(Ordre Ouvert): 병력을 분산시켜 이동 속도를 높이고 적의 공격에 대한 방어력을 높이는 전술이다. 일제 사격이 불가능하고 기병에 약하다.
- 사각진(Carre): 고전적인 대기병 방어 진형으로, 방어에 유리하지만 기동성이 떨어지고 포격과 보병 사격에 취약하다.
- 비행 포병 대대(Batterie Volante): 포병의 기동성을 활용하여 화력을 집중하는 전술이다. 기마 포병대에 적합하며, 나폴레옹 초기 원정에서 큰 성과를 거두었다.
- 대포병 대대(Grande Batterie): 한 지점에 포병 화력을 집중하는 전술로, 적에게 큰 피해를 줄 수 있지만 반격에 취약하다.
- 멧돼지 머리(Tête du Sanglier): 보병, 기병, 포병을 결합한 복잡한 진형으로, 공격과 방어에 모두 사용되었다. 1830년대와 1840년대 북아프리카 제압에 효과적이었으며 1920년대까지 사용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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