합스부르크 군주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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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합스부르크 군주국은 현재의 스위스에 기원을 둔 합스부르크 가문이 지배한 영토를 통칭한다. 1279년 오스트리아를 획득한 이후, 결혼과 입양을 통해 유럽에서 가장 강력한 가문 중 하나로 성장했다. 신성 로마 황제 막시밀리안 1세의 정책으로 부르고뉴 네덜란드, 스페인, 오스트리아 등을 상속받아 광대한 영토를 지배했다. 17세기까지 각 지역을 분할 통치하다가, 18세기 마리아 테레지아 시대 이후 중앙 집권화를 시도했지만, 요제프 2세의 개혁 실패로 어려움을 겪었다. 1848년 혁명 이후 오스트리아 제국은 빈을 중심으로 관료제 국가로 변화했고, 헝가리와의 타협을 통해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을 형성했다. 제1차 세계 대전 패배 후 민족주의의 발흥과 함께 붕괴되었으며, 제국의 영토는 주변 국가로 분할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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합스부르크 군주국 - [옛 나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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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통칭 | 합스부르크 군주국 |
고유 명칭 | 라틴어: Monarchia Austriaca 독일어: Habsburgermonarchie |
링크 명칭 | 합스부르크 군주국 |
존속 기간 | 1282년 – 1918년 |
이전 국가 | 합스부르크 세습 영지 스페인령 네덜란드 만토바 공국 보헤미아 왕관령 헝가리 왕관령 크로아티아 왕국 (헝가리와 동군연합) 폴란드-리투아니아 연합 스메데레보 산자크 |
계승 국가 | 오스트리아 제국 독일-오스트리아 공화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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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도 | 빈 |
종교 | 로마 가톨릭교회 (국교) |
정치 체제 | 군주제 |
통치자 | |
군주 칭호 | 군주 |
초대 군주 | 루돌프 1세 |
초대 군주 재임 기간 | 1282년–1291년 |
최초의 신성 로마 황제 | 프리드리히 3세 |
최초의 신성 로마 황제 재임 기간 | 1452년–1493년 |
유명 군주 | 막시밀리안 1세 |
유명 군주 재임 기간 | 1508년–1519년 |
마지막 통일 합스부르크 군주 | 카를 5세 |
마지막 통일 합스부르크 군주 재임 기간 | 1519년–1556년 |
스페인 분가의 초대 군주 | 펠리페 2세 |
스페인 분가의 초대 군주 재임 기간 | 1556년–1598년 |
오스트리아 분가의 초대 군주 | 페르디난트 1세 |
오스트리아 분가의 초대 군주 재임 기간 | 1556년–1564년 |
스페인 분가의 마지막 군주 | 카를로스 2세 |
스페인 분가의 마지막 군주 재임 기간 | 1665년–1700년 |
중요 군주 | 마리아 테레지아 |
중요 군주 재임 기간 | 1740년–1780년 |
중요 군주 | 요제프 2세 |
중요 군주 재임 기간 | 1780년–1790년 |
마지막 신성 로마 황제 | 프란츠 2세 |
마지막 신성 로마 황제 재임 기간 | 1792년–1835년 |
중요 군주 | 프란츠 요제프 1세 |
중요 군주 재임 기간 | 1848년–1916년 |
마지막 군주 | 카를 1세 |
마지막 군주 재임 기간 | 1916년–1918년 |
시대 | |
기타 | |
통화 | 마리아 테레지아 탈러 |
2. 기원
합스부르크 가는 현재 스위스에 있는 합스부르크성을 지배하는 백작가였다. 1279년 루돌프 1세가 오스트리아 영지를 획득한 후, 오스트리아는 합스부르크 가의 지배령이 되었다.[6] 역사적으로 신뢰할 수 있는 최초의 합스부르크 가문은 10세기 후반에 태어난 클레트가우의 라드보트이며, 가문의 이름은 그가 건설한 합스부르크 성에서 유래되었다.
2. 1. 오스트리아계 합스부르크 가문의 발전

합스부르크 가는 현재의 스위스에 위치한 합스부르크성을 지배하는 백작가였다. 1279년 루돌프 1세가 오스트리아 영지를 획득한 이후, 오스트리아는 합스부르크 가의 지배령이 되었다. 이후 합스부르크 왕가는 결혼과 입양을 통해 유럽에서 가장 강력한 가문 가운데 하나로 떠올랐다.[6]

1279년 이후 합스부르크 가는 신성 로마 제국 내에서 선출직인 독일 왕국의 일부인 오스트리아 공국을 통치하게 되었다. 합스부르크 가문의 독일의 루돌프 1세는 아우크스부르크 제국회의(1282년)에서 자신의 아들들에게 오스트리아 공국을 할당하여 "오스트리아 세습령"을 설립했다. 이 시점부터 합스부르크 왕조는 오스트리아 가문으로도 알려지게 되었다. 1438년부터 1806년까지, 몇몇 예외를 제외하고 합스부르크 오스트리아 대공이 신성 로마 황제로 선출되었다.
합스부르크 가는 신성 로마 황제 막시밀리안 1세가 추진한 왕조 정책의 결과로 유럽에서 두각을 나타내게 되었다. 막시밀리안은 부르고뉴의 마리와 결혼하여 부르고뉴 네덜란드를 합스부르크 영지로 편입시켰다. 그들의 아들 미남왕 필리프는 스페인의 광녀 후아나(아라곤의 페르난도 2세와 카스티야의 이사벨 1세의 딸)와 결혼했다. 필리프와 후아나의 아들인 신성 로마 황제 카를 5세는 1506년 합스부르크 네덜란드, 1516년 합스부르크 스페인과 그 영토, 1519년 합스부르크 오스트리아를 상속받았다.
신성 로마 제국 황제 카를 5세의 동생 오스트리아 대공 페르디난트는 헝가리-보헤미아의 왕 러요시 2세가 죽은 후 헝가리와 보헤미아의 왕이 되었다. 헝가리는 이후 합스부르크 왕가의 영지가 되었다. 1521년 보름스 제국회의에서 카를 5세는 동생 페르디난트 1세와 합의를 보았다. 보름스(1521년)의 합스부르크 ''협약''에 따라, 1년 후 브뤼셀에서 확인된 이 협약에 따라 페르디난트는 오스트리아 세습령에서 카를 5세의 섭정으로서 대공이 되었다.[7][8]
오스만 제국과의 모하치 전투에서 헝가리의 러요시 2세가 사망한 후, 페르디난트 대공(막시밀리안과 헝가리의 블라디슬라우스 2세 사이에서 체결된 입양 조약에 의해 매형이 됨)은 1526년 보헤미아와 헝가리의 다음 왕으로 선출되었다.[9][10] 보헤미아와 헝가리는 17세기에 이르러서야 합스부르크 가문의 세습 영지가 되었다. 백산 전투(1620년)에서 보헤미아 반군을 상대로 승리한 후 페르디난트 2세는 보헤미아에 세습 상속을 확립하는 ''개정된 토지 조례''(1627/1628)를 공포했다. 모하치 전투 (1687년)에서 레오폴트 1세가 튀르크로부터 거의 모든 오스만 헝가리를 재정복한 후, 황제는 프레스부르크에서 헝가리 제국회의를 열어 헝가리 왕국에 세습 상속을 확립했다.
1556년 카를 5세는 오스트리아와 제국 왕관을 페르디난트에게(제국 선거, 1531년에서 결정), 스페인 제국을 그의 아들 스페인의 펠리페 2세에게 양도함으로써 가문을 분할했다. 스페인 지부(1580년과 1640년 사이에는 네덜란드, 포르투갈 왕국, 이탈리아의 메조조르노를 포함)는 1700년에 단절되었다. 오스트리아 지부(신성 로마 제국, 헝가리, 보헤미아를 통치)는 1564년부터 1665년까지 가문의 서로 다른 분파로 분할되었지만, 그 후 단일 개인 연합을 유지했다. 1740년 남성 혈통이 단절되었지만 마리아 테레지아 여왕이 프란츠 1세와 결혼함으로써 왕조는 합스부르크로트링겐 가로 이어졌다.
13세기의 루돌프 1세 이후, 합스부르크 가는 신성 로마 제국 내의 일개 영방으로서, 현재의 오스트리아와 슬로베니아를 중심으로 한 지역을 영지로 삼았다. 오스트리아는 제국의 변방백령의 일부로, 오스트리아 공국(오스트마르크)을 이루고 있었지만, 루돌프 4세는 "대공"을 자칭했고, 후에 신성 로마 황제프리드리히 3세가 제국법으로 "대공"을 정식 칭호로 정하여 오스트리아 대공국이 출현했다. 이후, 제국에서의 오스트리아의 지위는 상승했다.
1526년, 헝가리 왕 러요시 2세가 모하치 전투에서 전사하자, 황제 카를 5세의 동생, 오스트리아 대공 페르디난트(후의 황제 페르디난트 1세)가 헝가리와 보헤미아의 왕위를 계승하게 되었다. 보헤미아는 제국 내의 왕국으로 보헤미아 왕은 선제후 중 한 사람이었지만 자립성이 강했고, 또한 헝가리는 제국의 영역 밖에 있었기에, 합스부르크 가는 황제로서가 아니라 보헤미아 왕 및 헝가리 왕으로서 각각을 통치했다. 한편, 합스부르크 가는 신성 로마 황제위를 사실상 세습했고, 형식상으로는 현재의 독일을 중심으로 하는 제국의 영역의 군주였지만, 실질적으로 그 통치는 합스부르크 가문의 영지 밖으로 미치지 않았다.
3. 특징
합스부르크 군주국은 여러 영지가 단일 국가로 통합된 적이 없었으며, 각 지방은 고유의 관습에 따라 통치되었다. 17세기 중반까지는 가문의 다른 구성원이 각 지역을 다스리는 경우도 많았다.[15] 18세기 중후반, 마리아 테레지아와 요제프 2세는 중앙집권화를 시도했지만, 요제프 2세의 급진적인 개혁은 실패했다.
1848년 혁명 이후, 오스트리아 제국은 빈 중심의 중앙집권적 관료 국가로 변화했다. 헝가리 왕국은 여러 지역으로 분할되어 제국에 편입되었으나, 이탈리아 독립전쟁과 프로이센-오스트리아 전쟁에서 패배한 후, 대타협을 통해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이 탄생했다.[16]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은 제1차 세계 대전 패배 이후 민족 갈등으로 붕괴되었고, 제국의 영토는 주변국에 흡수되었다.
합스부르크 군주국은 다양한 명칭으로 불렸다.
명칭 | 설명 |
---|---|
합스부르크 군주국 (독일어: Habsburgermonarchie) | 비공식적인 포괄적 용어 |
오스트리아 군주국 (monarchia austriacala) | 1700년경 합스부르크 영토를 지칭하는 편의상 용어[5] |
다뉴브 군주국 (Donaumonarchiede) | 동시대에 사용된 비공식적인 명칭 |
이중 군주국 (Doppel-Monarchiede) | 치슬라이타니아와 트란스라이타니아의 연합 |
오스트리아 제국 (Kaisertum Österreichde) | 1804년 창설된 새로운 합스부르크 제국의 공식 명칭 |
오스트리아-헝가리 (Österreich-Ungarnde) | 국제 관계에서 일반적으로 사용된 명칭 (1867–1918) |
왕관령 (Kronländer) | 오스트리아 제국(1849–1867) 및 오스트리아-헝가리(1867-1918)의 모든 개별 지역 명칭 |
3. 1. 중앙집권화 시도와 좌절
합스부르크 왕가의 여러 영지는 단일 국가로 통합된 적이 없었다. 각 지방은 고유의 관습에 따라 통치되었으며, 17세기 중반까지는 가문의 다른 구성원이 각 지역을 다스리는 경우도 많았다. 18세기 중후반, 마리아 테레지아와 그의 아들 요제프 2세는 중앙집권화를 시도했으나, 요제프 2세의 급진적인 개혁은 반발을 불러일으켜 실패했다.[15]1848년 혁명 이후, 오스트리아 제국은 빈을 중심으로 하는 중앙집권적 관료 국가로 변화하기 시작했다. 헝가리 왕국은 여러 지역으로 분할되어 제국에 편입되었다. 그러나 이탈리아 독립전쟁과 프로이센-오스트리아 전쟁에서 패배한 후, 이러한 정책은 폐기되고 헝가리와의 대타협이 이루어졌다. 그 결과, 오스트리아와 헝가리가 자치권을 갖고 외교 및 군사 정책에서만 협력하는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이 탄생했다.[16]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은 1차 대전 패배 이후 민족 갈등으로 붕괴되었다. 제국의 일부는 오스트리아 공화국과 헝가리 공화국으로 이어졌고, 상당한 영토는 주변국에 흡수되었다.
4. 영토
합스부르크 군주국이 통치했던 영토는 수세기에 걸쳐 변동했지만, 핵심은 항상 오스트리아 세습령, 보헤미아 왕관령, 헝가리 왕국의 세 블록으로 구성되었다.[2]
신성 로마 황제 막시밀리안 1세는 왕조 정책을 통해 부르고뉴 네덜란드를 합스부르크 영지로 편입시켰다. 그의 아들 미남왕 필리프는 스페인의 광녀 후아나와 결혼했고, 그 아들인 신성 로마 황제 카를 5세는 1506년 합스부르크 네덜란드, 1516년 합스부르크 스페인과 그 영토, 1519년 합스부르크 오스트리아를 상속받았다.[6]
1556년 카를 5세는 오스트리아와 제국 왕관을 동생 페르디난트 1세에게, 스페인 제국을 아들 스페인의 펠리페 2세에게 양도하며 가문을 분할했다. 스페인계 합스부르크 가문은 1700년에 단절되었고, 오스트리아계 합스부르크 가문은 1740년에 남성 혈통이 단절되었지만, 마리아 테레지아가 프란츠 1세와 결혼하여 합스부르크-로트링겐 가문으로 이어졌다.[7][8]
오스만 제국과의 모하치 전투에서 헝가리의 라요시 2세가 사망한 후, 페르디난트 1세는 1526년 보헤미아와 헝가리의 왕으로 선출되었다.[9][10] 보헤미아와 헝가리는 17세기에 이르러서야 합스부르크 가문의 세습 영지가 되었다.
4. 1. 주요 영토
합스부르크 군주국의 주요 영토는 다음과 같이 구성되었다.- 세습 영지: 현재의 오스트리아와 슬로베니아 대부분, 북동부 이탈리아 및 (1797년 이전) 남서부 독일의 영토를 포함한다. 1779년 바이에른의 인피어텔과 1803년 트렌토 주교령 및 브릭센 주교령이 추가되었다. 나폴레옹 전쟁으로 인해 세습 영토의 많은 부분이 손실되었지만, 1805년과 1809년 사이에 일시적으로 합병되었던 구 잘츠부르크 대주교령과 함께 이 모든 영토는 빈 회의 (1815년)에서 회복되었다. 단, 전 오스트리아는 제외되었다.
- 오스트리아 대공국
- 오스트리아 상부
- 오스트리아 하부
- 내부 오스트리아
- 슈타이어마르크 공국
- 케른텐 공국
- 크라인 공국
- 트리에스테 자유 제국 도시
- 이스트리아 변경백령 (하지만 이스트리아 대부분은 1797년까지 베네치아 공화국 영토였다.)
- 고리차 및 그라디스카 공작령
- 티롤 백국 (하지만 1803년 이전에는 트렌토와 브릭센의 주교령이 남티롤이 될 지역을 지배했다.)
- 잘츠부르크 공국
- 전 오스트리아, 주로 티롤과 공동 통치했다.
- 포어알베르크 (실제로는 19세기에 통합된 여러 지역의 집합체)
- 포어란데, 1801년에 상실된 브라이스가우와 독일 남서부의 여러 영토 (하지만 그 일부였던 알자스 영토(순트가우)는 이미 1648년에 상실되었다.)
- 잘츠부르크 대공국 (1805년 이후)
- 보헤미아 왕관령: 1526년 보헤미아 의회는 페르디난트를 왕으로 선출했다. 이들은 이후 신성 로마 황제 페르디난트 1세가 되었다.
- 보헤미아 왕국
- 모라바 변경백국
- 실레지아 공국, 실레지아의 대부분은 1740~1742년에 프로이센 왕국에 의해 정복되었고, 합스부르크의 주권을 유지한 잔여 영토는 오스트리아령 상·하 실레지아 공국으로 통치되었다.
- 루사티아 (1635년에 작센 선제후국에 할양)
- 상 루사티아
- 하 루사티아
- 헝가리 왕국: 중세 헝가리 왕국 영토의 3분의 2는 오스만 제국과 오스만의 봉신인 트란실바니아 공국에 의해 정복되었다. 합스부르크는 구 왕국의 서부 및 북부 영토를 헝가리 왕국으로 유지했다. 1699년 오스만-합스부르크 전쟁 이후 중세 헝가리 왕국 영토 일부가 합스부르크령이 되었고, 1718년에는 다른 지역이 추가되었다. (단, 사바 강과 다뉴브 강 남쪽 지역은 오스만 통치하에 남았다.)
- 크로아티아 왕국
- 군사 변경지
4. 2. 기타 영토
역사적으로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 가문의 통치를 받은 다른 영토는 다음과 같다. 이들 영토 중 일부는 합스부르크 왕가의 다른 분가(세군도제니투라)에 의해 통치되기도 했다.- 세르비아 점령 (1686년–1691년)
- 슬라보니아 왕국 (1699년–1868년)
- 트란실바니아 대공국 - 1699년 (카를로비츠 조약)부터 1867년 (오스트리아-헝가리 타협)까지
- 밀라노 공국 (1706년–1797년)
- 만토바 공국 (1706년–1797년)
- 나폴리 왕국 (1707년–1735년)
- 사르데냐 왕국 (1707년–1720년)
- 프레시디 국가 (1707년–1733년)
- 오스트리아령 네덜란드 - 현재의 벨기에와 룩셈부르크 대부분을 포함 (1713년–1795년)
- 세르비아 왕국 (1718년–1739년)
- 테메슈바르 바나트 (1718년–1778년)
- 크라이오바 바나트 (1718년–1739년, 사실상 1716년–1737년)
- 시칠리아 왕국 (1720년–1735년)
- 파르마 및 피아첸차 공국 (1735년–1748년)
- 갈리치아-로도메리아 왕국 - 현재의 폴란드와 우크라이나에 위치 (1772년–1918년)
- 부코비나 공국 (1774년–1918년)
- 세르비아 점령 (1788년–1791년)
- 서부 갈리치아 - 크라쿠프를 포함한 폴란드 영토는 3차 분할에서 획득 (1795년–1809년)
- 베네치아 (1797년–1805년)
- 달마티아 왕국 (1797년–1805년, 1814년–1918년)
- 롬바르디아-베네치아 왕국 (1814년–1866년)
- 크라쿠프 대공국 - 갈리치아에 편입 (1846년–1918년)
- 세르비아 보이보디나 (1848년–1849년) 사실상, 공식적으로 인정되지 않음
- 세르비아 및 테메슈바르 바나트 보이보디나 (1849년–1860년)
- 크로아티아-슬라보니아 왕국 (1868년–1918년)
- 노비 파자르 산자크 점령 (1878년–1908년)
-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의 오스트리아-헝가리 통치 (1878년–1918년)
5. 합스부르크 제국 외의 영토
합스부르크 왕가의 일원들은 합스부르크 제국 외 다양한 영토를 다스렸지만, 이들 영토는 합스부르크 제국으로 간주되지 않는다.
스페인계 합스부르크 왕가는 1516년부터 1700년까지 스페인을 다스렸다. 다른 방계 가문은 1765년부터 1801년까지 토스카나 대공국을 다스렸고, 일시적으로 망명하여 잘츠부르크 및 뷔르츠부르크를 다스리다가 1814년부터 1859년까지 토스카나 대공으로 다시 재위했다.
1765년부터 1801년까지, 그리고 1814년부터 1859년까지 방계 가문이 토스카나 대공국을 통치했다. 토스카나에서 추방된 이 방계 가문은 1803년부터 1805년까지 잘츠부르크 선제후국을, 1805년부터 1814년까지 뷔르츠부르크 대공국을 통치했다. 오스트리아-에스테 가문은 1814년부터 1859년까지 모데나 공국을 통치했으며, 황후 마리 루이즈(나폴레옹의 두 번째 부인이자 오스트리아 황제 프란츠 1세의 딸)는 1814년부터 1847년까지 파르마와 피아첸차 공국을 통치했다. 또한, 1863년부터 1867년까지 제2 멕시코 제국은 오스트리아 황제 프란츠 요제프 1세의 동생인 막시밀리안 1세가 수장으로 있었다.
6.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성립과 붕괴
1848년 혁명 이후 오스트리아 제국은 수도 빈을 중심으로 한 중앙집권적 관료제 국가로 변화를 시도했다. 헝가리 왕국은 여러 지방으로 해체되어 제국에 편입되었으나, 이탈리아 독립전쟁과 프로이센-오스트리아 전쟁 패배 후 이 정책은 폐기되었다. 이후 헝가리와의 대타협을 통해 오스트리아와 헝가리가 각각 자치권을 갖고 외교 및 군사 정책에서만 협력하는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이 성립되었다.
1860년대 초, 1867년 오스트리아-헝가리 타협을 통해 오스트리아-헝가리 이중 군주국이 수립되었다. 헝가리 왕국("성 이슈트반 성관의 토지")은 다른 합스부르크 영지와 개인적인 연합, 공동 외교 및 군사 정책으로만 연결된 동등한 주권 국가였다. 헝가리인이 아닌 합스부르크 영지는 "오스트리아"로 불렸고, 제국 의회(Reichsrat)와 자체 부처를 가졌으며, 공식 명칭은 "제국 의회에 대표된 왕국 및 영지"였다.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는 점령 및 행정 30년 만에 병합되었으나, 군주국 어느 쪽에도 통합되지 않고 공동 재무부에서 통치했다.
6. 1.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붕괴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은 1차대전 패배 이후 불거진 민족 간 갈등으로 붕괴되었다. 이후 제국의 일부는 새로 생겨난 오스트리아 공화국 및 헝가리 공화국으로 이어졌고, 상당한 영토가 이탈리아, 루마니아, 폴란드, 세르비아, 체코 등의 주변국으로 흡수되었다.[18]
탈레랑은 나폴레옹에게 보낸 편지에서 합스부르크 제국을 붕괴시키는 것은 자유지만, 다민족을 통치하는 모델 국가이며 한번 부수면 다시 되돌릴 수 없을 것이고 뒤에는 혼란만이 남을 것이라고 경고했다.
제1차 세계 대전 전야에는 여러 민족에서 민족주의가 기세를 더했다.[18] 여전히 합스부르크 제국은 강대했지만, 전 시대적인 체제를 안고 제1차 세계 대전에 휘말렸다. 제1차 세계 대전은 역사상 최초로 국력을 일원화하는 총력전이었기 때문에, 여러 민족의 자립성을 존중했던 합스부르크 제국과는 모순되는 것이었고, 붕괴하게 되었다.[18]
오쓰루 아츠시는, 그 후 성립된 동유럽 제국은 민족자결을 기치로 내걸었기 때문에, 자립한 민족의 균형을 실현하려 했던 합스부르크 제국의 유산을 발전시키지 못하고, 화근을 남겼다고 말하고 있다.[18]
"붉은 대공"이라고 불린 빌헬름 대공은 제국의 말기를 이야기한다. 그는 폴란드 제2공화국의 국민으로서 여생을 보낸 카를 슈테판 대공의 아들이다. 제1차 세계 대전기에 제국 육군 장교를 지냈으며, 우크라이나 합스부르크의 창설을 시도했다. 1920년대에 파리로 도주, 후에 히틀러에게 기울어, 자세를 바꾸어 나치 독일과 소련에 대해 스파이 활동을 펼치고, 전후에 키예프의 옥중에서 죽었다. 그런 빌헬름이 1937년 12월, 친구 토카리에게 보낸 편지에서 오토 전 황태자를 비판하면서 "어떤 부흥도 '유대인과 프리메이슨 덕분'으로 이루어지는 것이고, 왕조 자체가 '유대인이 하는 사업'이 되어 버렸다"고 쓰고 있다.[20] 티모시 스나이더는 대공의 생각을 불확실하다고 쓰고 있지만, 특히 근거를 덧붙이지는 않았다.
궁정 유대인이 제국의 재정을 지탱한 것과, 프리메이슨인 샤를 드 몽테스키외가 제국의 배려로 『법의 정신』을 해금한 [21] 것은 사실이다. 게다가, 제국 우편을 담당하는 투른 운트 탁시스 가 출신의 황제 특별 수석 대리는 전원이 프리메이슨이었다.[22][23] 한편, 유대인이 신분에 따라 행동을 전혀 달리하는 것과, 프리메이슨이 각 소속 로지와 계급에 따라 조직과 정보를 공유하는 정도가 다르다고 말해지는 것도 고려해야 한다.
7. 역대 통치자
소위 "합스부르크 군주" 또는 "합스부르크 황제"는 여러 다른 칭호를 가졌으며, 인신 연합을 통해 각 왕국을 별도로 통치했다. 마리아 테레지아를 제외하고는 모두 신성 로마 황제 또는 오스트리아 황제로서의 칭호이다.
이름 | 재위 기간 |
---|---|
페르디난트 1세 | 1526년 - 1564년 |
막시밀리안 2세 | 1564년 - 1576년 |
루돌프 2세 | 1576년 - 1612년 |
마티아스 | 1612년 - 1619년 |
페르디난트 2세 | 1619년 - 1637년 |
페르디난트 3세 | 1637년 - 1657년 |
레오폴트 1세 | 1657년 - 1705년 |
요제프 1세 | 1705년 - 1711년 |
카를 6세 | 1711년 - 1740년 |
마리아 테레지아 | 1740년 - 1780년 |
요제프 2세 | 1780년 - 1790년 |
레오폴트 2세 | 1790년 - 1792년 |
프란츠 2세 | 1792년 - 1835년 |
페르디난트 1세 | 1835년 - 1848년 |
프란츠 요제프 1세 | 1848년 - 1916년 |
카를 1세 | 1916년 - 1918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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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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