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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레더릭 바틀릿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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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프레더릭 바틀릿은 1886년 영국에서 태어나 1969년 사망한 영국의 심리학자이다. 기억, 지각, 사고에 대한 실험 연구로 알려져 있으며, 사회심리학적 관점에서 일상적 맥락에서의 연구를 지향했다. 1932년 저서 『기억』을 통해 스키마 이론을 제창하며 현대 인지심리학 연구에 영향을 미쳤다. 케임브리지 대학교 실험 심리학 교수를 역임했으며, 응용 심리학 연구 유닛 설립에 참여하여 제2차 세계 대전 중 군사적 연구에도 기여했다. 왕립학회 회원, 로열 메달, 기사 작위 등을 수여받았다.

2. 생애

제1차 세계 대전 이후 스승 찰스 사무엘 마이어스(Charles Samuel Myers)가 케임브리지 대학교를 떠나자, 바틀릿은 케임브리지 심리학 연구소 소장 겸 실험 심리학 강사직을 이어받았다.[6] 1931년부터 1951년까지 동 대학에서 실험심리학 교수를 지냈으며, 이후 심리학 선임강사(Senior Lecturer in Psychology) 직책을 맡아 1969년 82세의 나이로 사망할 때까지 유지했다.[6]

제2차 세계 대전 중인 1944년에는 케네스 크레이크(Kenneth Craik)와 함께 의학연구위원회(MRC: Medical Research Council) 산하 응용심리연구부(APU: Applied Psychology Research Unit) 설립에 참여했다. 1945년 크레이크가 사망하자 그 뒤를 이어 부서 책임자가 되었다. 이러한 활동과 영국 공군에 대한 공헌을 인정받아 1948년 기사 작위를 받았다.

1932년 왕립학회 회원으로 선출되었고[23], 학회로부터 1952년 로열 메달(Royal Medal)과 1956년 크루니언 메달(Croonian Medal)을 수상했다.

바틀릿은 기억, 지각, 사고에 대한 실험 연구로 잘 알려져 있지만, 사회심리학적 관점에서 일상생활 맥락 속 연구를 지향했다. 특히 헤르만 에빙하우스(Hermann Ebbinghaus)가 무의미 철자를 사용한 것과 달리, 의미 있는 실제 자료를 사용해 기억 변화를 실험했다. 이를 통해 인간 기억이 단순 복제가 아니라 기존 지식 구조인 스키마(schema)에 의해 재구성된다는 이론을 제시했으며, 이는 현대 인지심리학 발전에 큰 영향을 미쳤다.

2. 1. 유년 시절과 교육

프레더릭 바틀릿은 1886년 10월 20일 중산층 가정에서 태어나 영국 글로스터셔에서 자랐다. 어릴 적 흉막염을 앓아 중등 교육 기간 동안 가정 교육을 받았다.[6] 그럼에도 불구하고 골프, 테니스, 크리켓과 같은 스포츠를 즐겼다.[7]

1909년, 바틀릿은 대학 통신 대학(The University Correspondence College)에서 철학 학사 학위를 1등급 우등으로 졸업했다. 그는 런던 대학교에서 윤리학과 사회학 모두에서 우수한 성적으로 석사 학위를 받았다. 케임브리지 대학교 세인트 존스 칼리지에서 계속 공부하며 도덕 과학에서 우수한 성적을 거두었다.[8] 이곳에서 그는 케임브리지 심리학 연구소 소장인 찰스 사무엘 마이어스(Charles Samuel Myers)를 만났다. 어린 시절 질병의 영향으로 제1차 세계 대전에 참전하지 못했다. 1914년 마이어스가 군의관으로 전쟁에 참전하자 케임브리지 심리학 연구소 부소장이 되었다.[7]

이 당시 바틀릿의 실험 연구는 지각과 이미지에 초점을 맞추었는데, 이는 그가 1917년 연구원(Fellow)으로 임명되는 데 기여했다. 전쟁이 끝난 직후, 마이어스는 케임브리지의 직위를 떠나 부서 강의직을 위한 많은 기부금을 남겼다. 바틀릿은 연구소 소장 겸 실험 심리학 강사가 되었다.[6]

2. 2. 제1차 세계 대전과 케임브리지 연구소

바틀릿은 케임브리지대학교 세인트 존스 칼리지(St John's College, Cambridge)에서 도덕 과학을 공부하며 우수한 성적을 거두었다.[8] 이곳에서 그는 당시 케임브리지 심리학 연구소 소장이었던 찰스 사무엘 마이어스(Charles Samuel Myers)를 만났다. 어린 시절 앓았던 흉막염의 영향으로 제1차 세계 대전에는 직접 참전하지 못했다.[7] 1914년, 마이어스가 군의관으로 전쟁에 참여하게 되자 바틀릿은 케임브리지 심리학 연구소의 부소장직을 맡게 되었다.[7]

전쟁 기간 동안 바틀릿의 실험 연구는 주로 지각과 이미지에 초점을 맞추었으며, 이러한 연구는 그가 1917년 연구원(Fellow)으로 임명되는 데 기여했다. 전쟁이 끝난 직후, 마이어스는 케임브리지에서의 직위를 떠나면서 부서의 강의직을 위한 상당한 기부금을 남겼다. 이후 바틀릿은 연구소 소장이자 실험 심리학 강사로 임명되었다.

3. 주요 연구 업적

프레더릭 바틀릿은 기억, 지각, 사고 등 인지 과정에 대한 실험 연구와 사회심리학적 관점을 통합하여 인간 정신을 탐구한 심리학자이다. 그는 특히 일상적인 맥락 속에서 이루어지는 정신 활동에 주목했으며, 이는 헤르만 에빙하우스 이후 주류를 이루던, 무의미한 자료를 이용한 실험실 중심의 기억 연구와는 다른 접근 방식이었다.

바틀릿의 가장 중요한 공헌 중 하나는 스키마(schema) 개념의 제시다. 그는 그의 대표 저서인 『기억(Remembering)』(1932)에서 기억이 단순히 과거 정보를 그대로 저장하고 인출하는 과정이 아니라, 개인이 가진 기존의 지식 구조, 즉 스키마에 의해 능동적으로 재구성되는 과정임을 실험적으로 증명했다. 그의 유명한 "유령의 전쟁" 실험은 문화적으로 생소한 이야기를 기억할 때 사람들이 어떻게 자신의 문화적 배경과 스키마에 맞춰 내용을 변형시키는지를 보여주었다.[13][14] 이는 기억이 사회문화적 맥락 속에서 형성되고 변화함을 강조한 중요한 연구 결과이다.

초기 연구인 『심리학과 원시 문화(Psychology and Primitive Culture)』(1923)에서는 문화 인류학적 접근을 통해 문화가 인간 심리에 미치는 영향을 탐구했으며,[2] 이후 연구에서도 사회적 요인에 대한 관심을 꾸준히 유지했다.

제2차 세계 대전을 계기로 바틀릿은 응용 심리학 분야에도 큰 기여를 했다. 그는 케네스 크레이크와 함께 영국 의학 연구 위원회 산하 응용 심리학 연구 유닛(Applied Psychology Research Unit, APU) 설립(1944)을 주도했으며,[15] 전쟁 이후 책임자로서 군사 훈련, 장비 설계 등 현실 문제 해결에 심리학적 지식을 적용하는 데 힘썼다.[16] 이러한 공로로 1948년 기사 작위를 받기도 했다.

말년에는 『사고(Thinking: An Experimental and Social Study)』(1958)를 통해 인간의 문제 해결 및 사고 과정을 탐구하며 스키마 이론을 더욱 발전시켰다.[6] 바틀릿의 연구는 실험 심리학과 사회심리학을 연결하고, 인지 과정을 사회문화적 맥락 속에서 이해하려는 시도로 평가받으며, 그의 스키마 이론은 현대 인지심리학 발전에 지속적인 영향을 주고 있다.

3. 1. 『심리학과 원시 문화』 (1923)

바틀릿의 심리학 분야 첫 저서인 『심리학과 원시 문화』 (Psychology and Primitive Culture)는 문화적 맥락에서 인간 행동을 이해하기 위한 틀을 제시한다. 그의 가장 유명한 실험 연구와는 달리, 이 책에서는 민족지 자료에 대한 그의 연구를 통해 주장을 전개한다. 사실 바틀릿은 원래 인류학자가 되고 싶었지만, 그의 스승인 W.H.R. 리버스(W.H.R. Rivers)의 권유로 심리학을 먼저 전공하게 되었다.[2] 『심리학과 원시 문화』에서 그는 특히 집단 간의 접촉이 일어날 때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그리고 집단 간의 문화 교류와 수용을 좌우하는 요인이 무엇인지를 탐구한다. 이 책은 또한 뤼시앵 르브륀(Lucien Lévy-Bruhl)의 '원시적 사고' 개념에 대한 반박으로도 주목할 만하다.

3. 2. 『기억』 (1932)과 스키마 이론

바틀릿은 케임브리지 대학교 실험심리학과장으로 재직 중이던 1932년에 그의 가장 유명한 저서인 『기억(Remembering)』을 출판했다. 이 책은 바틀릿이 이전에 제시했던 '관습화(conventionalization)' 개념을 심리학적으로 탐구한 결과물이다.[9][6] 책에는 그림, 사진, 이야기를 활용해 기억 능력을 시험했던 과거 실험 연구들이 종합적으로 담겨 있다.[10] 구체적으로 『기억』은 기억, 이미지화, 지각에 대한 실험 연구뿐만 아니라 "사회심리학적 관점에서 본 기억"이라는 주제도 다루었다. 그의 기억 이론은 기억에 영향을 미치는 사회적 조건들을 분석하고, 일상적인 "자유로운 기억"과 특수한 상황에서의 기억을 비교하는 내용을 포함한다. 특히 이 책은 바틀릿의 스키마 이론을 깊이 있게 분석하여, 오늘날에도 관련 연구자들에게 많은 영감을 주고 있다.[11]

바틀릿은 또한 전달 연쇄 방법(transmission chain method)이라는 연구 방법을 고안한 것으로도 알려져 있으며, 이 방법에 기반한 연구 결과가 『기억』에 설명되어 있다.[12]

『기억』(1932)에 소개된 "유령의 전쟁" 실험은 바틀릿의 가장 유명한 연구 중 하나이다. 이 실험은 기억이 단순히 저장된 정보를 꺼내는 것이 아니라, 개인이 가진 스키마(도식)에 의해 재구성되는 특성이 있음을 명확히 보여주었다. 즉, 기억은 개인이 과거 경험, 지식, 기대 등을 바탕으로 자신만의 방식으로 재구성하여 표현하는 과정이라는 것이다.[13]

실험 과정은 다음과 같다. 바틀릿은 에드워드 시대 영국인 참가자들에게 "유령의 전쟁"이라는 제목의 북미 원주민 민담을 읽게 했다. 그리고 시간이 흐른 뒤 여러 차례에 걸쳐 이야기를 다시 떠올려 말하도록 요청했다. 바틀릿은 이야기를 읽고 회상하는 사이의 시간이 길어질수록 참가자들의 기억 정확도가 떨어지고 이야기 속 많은 정보를 잊어버린다는 사실을 발견했다.[13] 더 중요한 발견은, 이야기 내용 중 참가자 자신의 스키마와 맞지 않는 생소한 부분들은 회상 과정에서 빠지거나, 자신이 이해하기 쉬운 친숙한 형태로 바뀌어 기억된다는 점이었다.[14] 예를 들어, 참가자들은 이야기 속 '카누'라는 단어를 자신들에게 더 익숙한 '보트'로 바꾸어 기억하는 경향을 보였다. 이는 각 참가자의 기억이 자신이 속한 문화(이 경우 에드워드 시대 영국 문화)의 영향을 받아 재구성됨을 보여주는 사례이다.[13]

3. 3. 전달 연쇄 방법

바틀릿은 또한 전달 연쇄 방법을 고안한 것으로 인정받고 있다. 이 방법에 기반한 연구는 그의 저서 『기억』에 설명되어 있다.[12]

3. 4. 응용 실험 심리학과 전쟁 연구

1932년 『Rememberingeng』 출판 이후, 프레더릭 바틀릿은 사회심리학 방법론에 관심을 기울였으며, 심리학, 인류학, 사회학 분야 동료들과 협력하였다.[6] 이후 그의 관심은 응용 실험 심리학, 특히 군사 관련 연구로 확장되었다. 이는 케임브리지 산업 연구소(Cambridge Laboratory of Industrial Research)에 응용 심리학 유닛(Applied Psychology Unit)이 설립되면서 더욱 구체화되었다.[6]

제2차 세계 대전 중이던 1944년, 바틀릿은 케네스 크레이크와 함께 영국 의학 연구 위원회 산하에 응용 심리학 연구 유닛(Applied Psychology Research Unit, APU)을 공동으로 설립했다.[15] 이 연구소는 실험 심리학자 마가달렌 도로테아 번 등과 함께 정부 기관의 요청에 따라 훈련 및 실험 설계 등 군사적 목적을 지원하는 응용 연구를 수행했다.[15] 1945년 크레이크가 갑작스럽게 사망하자 바틀릿은 APU의 책임자 자리를 이어받았다.[16]

바틀릿은 군사적 필요에 부응하는 연구를 성공적으로 이끌었다. 특히 크레이크가 이전에 연구했던 "body skillseng" 분야를 확장했는데, 이는 바틀릿 개인의 스포츠에 대한 관심과도 연관이 있을 수 있다.[6] 그는 인간이 새로운 상황에 직면했을 때 나타내는 운동 능력의 적응적 종합에 대한 연구로 영국과 미국의 여러 기관으로부터 상을 받았다.[6] 이러한 공로를 인정받아 1948년에는 영국 공군에 대한 기여로 기사 작위를 받았다.

3. 5. 『사고』 (1958)

1958년, 바틀릿은 ''사고: 실험적 및 사회적 연구''(Thinking: An Experimental and Social Study)를 출판했다.[6] 그는 이 책에서 인간이 사용하는 다양한 사고 과정을 탐구했는데, 이는 1932년에 출판된 ''기억''(Remembering)에서 사용했던 이야기 회상과 같은 방법과 관련이 있다.[6] 그는 참가자들에게 끝맺음이 없는 이야기를 제시하고 현실적으로 완성하도록 하는 '완성 실험'을 수행했다.[6] 연구 결과, 바틀릿은 "완성은 무의식적으로도 나타나며, 과거 경험을 구성하는 방식으로서의 스키마가 어떻게 구성적이고 예측적인 과정으로 이어지는지에 대한 통찰력을 제공한다"고 결론지었다.[6]

4. 학문적 영향과 평가

바틀릿은 1922년 케임브리지 대학교 심리학 연구소 소장으로 선출되었고, 1931년에는 실험 심리학 교수가 되었다. 같은 해 그는 『Remembering영어』(1932년 출판)을 출판했으며, 왕립 학회 회원이 되었다.[23] 그는 기억, 지각, 사고의 실험 연구로 알려져 있지만, 사회심리학적 관점에서 일상적 맥락 속에서의 연구를 지향했다. 특히 헤르만 에빙하우스 이후의 무의미한 자료를 사용한 기억 연구와 달리, 의미 있는 자료를 사용한 기억 변화 실험을 통해 스키마(schema) 개념을 제창하여 현대 인지심리학 연구에 큰 영향을 주었다.

제2차 세계 대전 중이던 1944년, 케네스 크레이크(Kenneth Craik)와 함께 의학연구협의회(MRC: Medical Research Council)의 응용심리학 연구부(APU: Applied Psychology Research Unit) 설립에 참여했으며, 1945년 크레이크가 사망하자 그 뒤를 이어 책임자가 되었다.[17] 전쟁 중 그의 공헌으로 1941년 대영 제국 훈장(C.B.E.)을 받았고, 1943년에는 왕립 학회로부터 메달을 수여받았다. 1948년에는 영국 공군(Royal Air Force)에 대한 공헌으로 기사 작위를 받았다.[20]

바틀릿은 국제적으로도 인정받아 1945년 미국철학회 회원,[18] 1947년 미국 국립 과학 아카데미 회원,[19] 1958년 미국 예술 과학 아카데미 회원으로 선출되었다.[21] 또한 아테네 대학교(1937), 프린스턴 대학교(1947), 런던 대학교(1949), 뢰번 가톨릭 대학교(1949) 등 여러 대학에서 명예 박사 학위를 받았다.[6] 1950년에는 영국 심리학회 회장으로 선출되었다.[6]

1951년 은퇴 후에도 그의 학문적 영향력은 계속되었다. 1952년 왕립 메달과 항공 의학 협회(Aeromedical Association)의 롱에이커 상(Longacre Award)을 수상했으며, 1956년에는 왕립 학회로부터 크루니언 메달(Croonian Medal)을 받았다. 1952년부터 1963년 사이 스페인, 스웨덴, 이탈리아, 터키, 스위스의 국가 심리학회에서 명예 회원으로 추대되었다. 1958년 국제 실험 심리학회(International Experimental Psychology Society)에서 공로를 인정받았고, 1959년에는 북미 국립 과학 아카데미(North American National Academy of Science)와 북미 예술 아카데미(North American Academy of Arts)의 외국 준회원으로 선출되었다.[6]

오늘날 영국 인간공학회(Ergonomics Society)는 그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바틀릿 메달(Bartlett Medal)을 수여하고 있으며, 실험 심리학회(Experimental Psychology Society)는 매년 바틀릿 강연(Bartlett Lecture)을 개최하고 있다.[22]

5. 수상 경력


  • 1932년 왕립학회 회원으로 선출되었다.[23]
  • 1937년 아테네 대학교에서 명예 박사 학위를 받았다.[6]
  • 1941년 제2차 세계 대전 중의 공헌을 인정받아 대영 제국 훈장 3등급(CBE)을 수훈했다.[24][18]
  • 1943년 왕립학회로부터 메달을 수여받았다.[18]
  • 1945년 미국철학회 회원으로 선출되었다.[18]
  • 1947년 미국 국립 과학 아카데미 회원이 되었다.[18][19]
  • 1947년 프린스턴 대학교에서 명예 박사 학위를 받았다.[6]
  • 1948년 응용 심리학 분야에서의 전시 활동과 왕립 공군(Royal Air Force)에 대한 공로로 기사작위(Knight Bachelor)를 서임받았다.[25][20]
  • 1949년 런던 대학교루뱅 가톨릭 대학교에서 명예 박사 학위를 받았다.[6]
  • 1950년 영국 심리학회(British Psychological Society) 회장으로 선출되었다.[6]
  • 1952년 왕립학회로부터 로열 메달을 수상했다.[23]
  • 1952년 항공 의학 협회(Aeromedical Association)로부터 롱에이커 상(Longacre Award)을 수상했다.[6]
  • 1956년 왕립학회로부터 크루니언 메달(Croonian Medal)을 수상했다.[23]
  • 1958년 미국 예술 과학 아카데미(American Academy of Arts and Sciences) 회원으로 선출되었다.[21]
  • 1958년 국제 실험 심리학회(International Experimental Psychology Society)로부터 인정을 받았다.[6]
  • 1959년 북미 국립 과학 아카데미(North American National Academy of Science)와 북미 예술 아카데미(North American Academy of Arts)의 외국 준회원으로 선출되었다.[6]
  • 1952년부터 1963년 사이에 스페인, 스웨덴, 이탈리아, 터키, 스위스의 국가 심리학회에서 명예 회원으로 추대되었다.[6]


오늘날 영국 인간공학회(Ergonomics Society)는 그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바틀릿 메달(Bartlett Medal)을 수여하고 있으며, 실험 심리학회(Experimental Psychology Society)는 매년 바틀릿 강연(Bartlett Lecture)을 개최하고 있다.[22]

6. 저서


  • ''논리 연습'' (Exercises in logiceng) (Clive, London, 1922)
  • ''심리학과 원시 문화'' (Psychology and Primitive Cultureeng) (캠브리지 대학교 출판부, 캠브리지, 1923)
  • ''심리학과 군인'' (Psychology And The Soldiereng) (캠브리지 대학교 출판부, 캠브리지, 1927)
  • ''기억하기: 실험적 및 사회 심리학 연구'' (Remembering: A Study in Experimental and Social Psychologyeng) (캠브리지 대학교 출판부, 캠브리지, 1932)
  • ''소음 문제'' (The Problem of Noiseeng) (캠브리지 대학교 출판부, 캠브리지, 1934)
  • ''정치 선전'' (Political Propagandaeng) (캠브리지 대학교 출판부, 캠브리지, 1940)
  • ''종교: 경험, 신념 그리고 행동'' (Religion as Experience, Belief and Actioneng) (Cumberledge, London, 1950)
  • ''일과 놀이 속의 정신'' (The Mind at Work and Playeng) (Allen and Unwin, London, 1951)
  • ''사고: 실험적 및 사회적 연구'' (Thinking: An Experimental and Social Studyeng) (Allen and Unwin, 1958)

참조

[1] 저널 Frederic Bartlett. 1886-1969
[2] 서적 The Constructive Mind: Bartlett's Psychology in Reconstruction Cambridge University Press
[3] 저널 Frederic Charles Bartlett Kt., C.B.E., M. A. Cantab., F.R.S
[4] 저널 Frederic Charles Bartlett: 1886-1969
[5] 저널 Obituary Notices
[6] 웹사이트 Sir Frederick Bartlett (1886–1969), An Intellectual Biography http://www.bartlett.[...] 2013-10-08
[7] 웹사이트 Bartlett: The Person http://www.bartlett.[...] 2013-10-29
[8] 저널 The thinking person's emotion theorist: A comment on Bartlett's 'Feeling, imaging, and thinking' http://www.mrc-cbu.c[...] 2010-07-10
[9] 웹사이트 Conventionalization http://www.bartlett.[...]
[10] 웹사이트 Memory Distortions http://cranepsych.ed[...] 2013-10-29
[11] 웹사이트 Remembering: A Study in Experimental and Social Psychology http://www.bartlett.[...] 2013-10-29
[12] 저널 The multiple roles of cultural transmission experiments in understanding human cultural evolution 2008-11-12
[13] 서적 Cognitive Psychology: Connecting Mind, Research, And Everyday Experience Wadsworth, Cengage Learning
[14] 웹사이트 Recalling 'The War of the Ghosts' http://www.aber.ac.u[...] 1995-12
[15] 서적 The biographical dictionary of women in science: Pioneering lives from ancient times to the mid-20th century Routledge
[16] 웹사이트 Book of Members, 1780–2010: Chapter B http://www.amacad.or[...] American Academy of Arts and Sciences 2011-05-19
[17] 웹사이트 Bartlett Timeline http://www.bartlett.[...] 2013-10-08
[18] 웹사이트 APS Member History https://search.amphi[...] 2023-03-31
[19] 웹사이트 Frederick Bartlett http://www.nasonline[...] 2023-03-31
[20] 문서 Royal Institution Christmas Lectures
[21] 웹사이트 Frederic Charles Bartlett https://www.amacad.o[...] 2023-02-09
[22] 웹사이트 Sir Frederic Bartlett Lectureship https://eps.ac.uk/th[...] 2020-08-19
[23] 웹사이트 Bartlett; Sir; Frederic Charles (1886 - 1969) 2011-12-24
[24] 저널 https://www.thegazet[...] 2016-11-03
[25] 저널 https://www.thegazet[...] 2016-11-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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