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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오 바로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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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피오 바로하는 스페인의 소설가로, 기푸스코아 산 세바스티안에서 태어났다. 그는 의학을 공부하고 박사 학위를 받았지만, 작가로서 경력을 쌓았다. 바로하는 아나키즘과 니체의 영향을 받았으며, 가톨릭교도와 전통주의자들의 비판을 받기도 했다. 그의 대표작으로는 『지식의 나무』가 있으며, 『삶의 투쟁』 3부작으로 국제적인 명성을 얻었다. 어니스트 헤밍웨이는 바로하의 영향을 받았다고 언급했으며, 바로하는 1956년에 사망했다. 그의 작품은 다양한 주제와 스타일을 아우르며, 9개의 3부작과 1개의 4부작으로 묶여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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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오 바로하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출생 이름피오 바로하 이 네시
출생일1872년 12월 28일
출생지산세바스티안, 스페인
사망일1956년 10월 30일
사망지마드리드, 스페인
안장 장소마드리드, 스페인
국적스페인
가족세라핀 바로하 (아버지), 카르멘 네시 이 고니 (어머니)
직업
직업작가
소설가
전기 작가
의사
문학
사조98세대
수상
소속 기관스페인 왕립 학술원
임기 시작1935년 5월 12일
임기 종료1956년 10월 30일
이전레오폴도 카노
이후후안 안토니오 데 순수네기

2. 생애

피오 바로하는 작가이자 오페라 대본 작가인 아버지 세라핀 바로하의 영향을 받아 13세부터 글을 쓰기 시작했다. 그의 초기작들은 스페인 소설의 쇄신에 중요한 이정표로 평가받으며, 특히 마드리드 빈민가의 삶을 묘사한 『삶의 투쟁』 3부작은 국제적인 명성을 안겨주었다. 대표작으로는 지식과 인생의 무용함을 그린 비관적인 교양소설 『지식의 나무』가 있다.

바로하는 아나키즘을 신봉했던 자유주의적 급진주의자였으며, 스페인 내전 동안 위험에 처하기도 했다. 어니스트 헤밍웨이는 바로하에게 큰 영향을 받았다고 밝혔으며, 바로하는 1956년 사망하여 마드리드에 묻혔다.

2. 1. 초기 생애

피오 바로하는 기푸스코아 산세바스티안에서 태어났으며, 저명한 작가이자 오페라 대본 작가인 세라핀 바로하의 아들이었다.[1][2][3]

젊은 시절 바로하는 발렌시아 대학교에서 의학을 공부했고, 21세에 마드리드 콤플루텐세 대학교에서 박사 학위를 받았다. 의사였지만, 바스크 지방의 체스토나에서 잠시 의사로 활동했다.[4] 학생 시절의 기억은 소설 『지식의 나무』의 소재가 되었다.[5] 그는 또한 가족 빵집을 잠시 운영했으며, 코르테스 헤네랄레스(스페인 의회)에서 급진 공화당 후보로 두 번 출마했지만 낙선했다. 그러나 바로하의 진정한 소명은 항상 글쓰기였으며, 13세에 본격적으로 글을 쓰기 시작했다.

호아킨 소로야의 초상화 (1914)

2. 2. 작가로서의 삶



피오 바로하는 기푸스코아 산세바스티안에서 태어났으며, 저명한 작가이자 오페라 대본 작가인 세라핀 바로하의 아들이었다.[1][2][3]

젊은 시절 바로하는 발렌시아 대학교에서 의학을 공부했고, 21세에 마드리드 콤플루텐세 대학교에서 박사 학위를 받았다. 의사로 교육받았지만, 바스크 지방의 체스토나에서 짧게 의사로 활동했다.[4] 학생 시절의 기억은 소설 『지식의 나무』의 소재가 되었다.[5] 그는 또한 가족 빵집을 잠시 운영했으며, 코르테스 헤네랄레스(스페인 의회)에서 급진 공화당 후보로 두 번 출마했지만 낙선했다. 그러나 바로하의 진정한 소명은 항상 글쓰기였으며, 13세에 본격적으로 글을 쓰기 시작했다.

바로하의 첫 소설 『아이츠고리 가(La casa de Aizgorri)』(1900)는 『바스크 땅(Tierra vasca)』(1900–1909)이라는 제목의 3부작 중 일부이다. 이 3부작에는 『라브라즈의 영주(El mayorazgo de Labraz)』(1903)도 포함되어 있으며, 이는 스페인에서 그의 가장 인기 있는 소설 중 하나가 되었다. 이 시기에 그는 1902년의 소설이라고 불리는 일련의 작품 중 하나인 『완벽으로 가는 길(Camino de perfección)』(1902)을 출판했다. 이 텍스트 그룹은 특히 사실주의와 모더니즘 사이의 전환점에서 스페인 소설의 쇄신에 있어 중요한 이정표로 여겨진다.[6]

바로하는 다른 3부작 『삶의 투쟁(La lucha por la vida)』(1922–1924)으로 국제적으로 가장 잘 알려져 있으며, 이는 마드리드의 빈민가 생활을 생생하게 묘사하고 있다. 존 도스 파소스는 이 작품들을 매우 존경하며 이에 대해 글을 썼다.

또 다른 주요 작품인 『행동하는 남자의 회고록(Memorias de un hombre de acción)』(1913–1931)은 19세기 카를리스타 봉기 동안 바스크 지역에 살았던 그의 조상 중 한 명을 묘사하고 있다.

바로하의 4부작 중 하나는 『바다(La mar)』이며, 『샨티 안디아의 불안(Las inquietudes de Shanti Andía)』(1911), 『사이렌의 미로(El laberinto de las sirenas)』(1923), 『고도 조종사(Los pilotos de altura)』(1929), 『치미스타 선장의 별(La estrella del capitán Chimista)』(1930)로 구성되어 있다. 바로하는 또한 스페인 군사 모험가인 후안 반 할렌의 전기를 썼다.

바로하의 대표작은 『지식의 나무』(1911)로 여겨지는데, 이는 지식과 인생 전반의 무용함을 묘사하는 비관적인 교양소설이다. 이 제목은 상징적인데, 주인공 안드레스 우르타도가 삶에 대해 배우고 경험할수록 더욱 비관적으로 느끼고 그의 삶이 더욱 무의미하게 느껴지기 때문이다.

스페인 문학 전통에 따라, 바로하는 종종 비관적이고 악인 소설 스타일로 글을 썼다. 그의 능숙한 인물 묘사와 배경 묘사는 바스크 지방 (자치 공동체)에 생명력을 불어넣었으며, 이는 베니토 페레스 갈도스의 작품이 마드리드를 보여주는 방식과 유사했다. 바로하의 작품은 종종 생생했지만 줄거리가 부족할 수 있었다. 그것들은 갑작스럽고 생생하지만 비개성적인 스타일로 쓰여졌다. 그는 문법 오류로 비난을 받았는데, 그는 결코 부인하지 않았다.

젊은 시절 바로하는 '98 세대'의 다른 사람들처럼 아나키즘을 느슨하게 믿었다. 그는 나중에 니체의 초인과 유사한 행동하는 사람들을 존경했다. 가톨릭교도와 전통주의자들은 그를 비난했고, 그의 삶은 스페인 내전 (1936–1939) 동안 위험에 처했다. 『청춘과 자아 숭배(Youth And Egolatry)』(1917)에서 바로하는 그의 신념을 다음과 같이 묘사했다.

> 나는 항상 자유주의적 급진주의자, 개인주의자이자 아나키스트였다. 첫째로, 나는 교회의 적이고, 둘째로, 나는 국가의 적이다. 이러한 강대국이 충돌할 때 나는 교회에 대항하여 국가의 편을 들지만, 국가가 승리하는 날에는 국가의 적이 될 것이다. 만약 내가 프랑스 혁명 시대에 살았다면, 나는 아나카르시스 클루츠 학파의 국제주의자였을 것이고, 자유를 위한 투쟁 동안에는 카르보나리의 일원이었을 것이다.[7]

어니스트 헤밍웨이는 바로하의 영향을 많이 받았고, 1956년 10월 그를 방문했을 때, "우리가 젊었을 때 작가가 되기를 원했던 우리에게 많은 것을 가르쳐준 당신에게 작은 경의를 표하고자 합니다. 저는 당신이 아직 노벨상을 받지 못한 것을 안타깝게 생각합니다. 특히 저처럼 모험가일 뿐이고, 그보다 덜 자격이 있는 많은 사람들에게 그것이 수여되었을 때 더욱 그렇습니다."라고 말했다.[8]

바로하는 이 방문 직후인 1956년 10월 30일에 사망하여[9] 마드리드의 구 시민 묘지에 묻혔다.[10]

이베리아 항공 에어버스 A340-642, EC-JPU (2006년~2020년 운항)는 그의 이름을 따서 명명되었다.[11]

2. 3. 정치적 성향과 말년

바로하는 젊은 시절 아나키즘을 느슨하게 믿었다. 그는 나중에 니체의 초인과 유사한 행동하는 사람들을 존경했다. 가톨릭교도와 전통주의자들은 그를 비난했고, 그의 삶은 스페인 내전 (1936–1939) 동안 위험에 처했다.[7]

『청춘과 자아 숭배(Youth And Egolatry)』(1917)에서 바로하는 자신의 신념을 다음과 같이 묘사했다.

> 나는 항상 자유주의적 급진주의자, 개인주의자이자 아나키스트였다. 첫째로, 나는 교회의 적이고, 둘째로, 나는 국가의 적이다. 이러한 강대국이 충돌할 때 나는 교회에 대항하여 국가의 편을 들지만, 국가가 승리하는 날에는 국가의 적이 될 것이다. 만약 내가 프랑스 혁명 시대에 살았다면, 나는 아나카르시스 클루츠 학파의 국제주의자였을 것이고, 자유를 위한 투쟁 동안에는 카르보나리의 일원이었을 것이다.[7]

어니스트 헤밍웨이는 바로하의 영향을 많이 받았고, 1956년 10월 그를 방문했을 때, "우리가 젊었을 때 작가가 되기를 원했던 우리에게 많은 것을 가르쳐준 당신에게 작은 경의를 표하고자 합니다. 저는 당신이 아직 노벨상을 받지 못한 것을 안타깝게 생각합니다. 특히 저처럼 모험가일 뿐이고, 그보다 덜 자격이 있는 많은 사람들에게 그것이 수여되었을 때 더욱 그렇습니다."라고 말했다.[8]

바로하는 이 방문 직후인 1956년 10월 30일에 사망하여[9] 마드리드의 구 시민 묘지에 묻혔다.[10]

이베리아 항공 에어버스 A340-642, EC-JPU (2006년~2020년 운항)는 그의 이름을 따서 명명되었다.[11]

3. 작품 세계

피오 바로하는 기푸스코아 산 세바스티안에서 태어났으며, 저명한 작가이자 오페라 대본 작가인 세라핀 바로하의 아들이었다.[1][2][3]

젊은 시절 바로하는 발렌시아 대학교에서 의학을 공부했고, 21세에 마드리드 콤플루텐세 대학교에서 박사 학위를 받았다. 의사로 교육받았지만, 바스크 지방의 체스토나에서 짧게 의사로 활동했다.[4] 그의 학생 시절 기억은 소설 『지식의 나무』의 소재가 되었다.[5] 그는 또한 가족 빵집을 잠시 운영했으며, 코르테스 헤네랄레스(스페인 의회)에서 급진 공화당 후보로 두 번 출마했지만 낙선했다. 그러나 바로하의 진정한 소명은 글쓰기였으며, 13세에 본격적으로 글을 쓰기 시작했다.

바로하의 첫 소설 『아이츠고리 가(La casa de Aizgorri)』(1900)는 『바스크 땅(Tierra vasca)』(1900–1909)이라는 제목의 3부작 중 일부이다. 이 3부작에는 『라브라즈의 영주(El mayorazgo de Labraz)』(1903)도 포함되어 있으며, 이는 스페인에서 그의 가장 인기 있는 소설 중 하나가 되었다. 이 시기에 그는 『완벽으로 가는 길(Camino de perfección)』(1902)을 출판했는데, 이 작품은 사실주의와 모더니즘 사이의 전환점에서 스페인 소설의 쇄신에 있어 중요한 이정표로 여겨진다.[6]

바로하는 3부작 『삶의 투쟁(La lucha por la vida)』(1922–1924)으로 국제적으로 가장 잘 알려져 있으며, 이는 마드리드의 빈민가 생활을 생생하게 묘사하고 있다. 존 도스 파소스는 이 작품들을 매우 존경하며 이에 대해 글을 썼다.

또 다른 주요 작품인 『행동하는 남자의 회고록(Memorias de un hombre de acción)』(1913–1931)은 19세기 카를리스타 봉기 동안 바스크 지역에 살았던 그의 조상 중 한 명을 묘사하고 있다.

바로하는 4부작 『바다(La mar)』를 썼는데, 『샨티 안디아의 불안(Las inquietudes de Shanti Andía)』(1911), 『사이렌의 미로(El laberinto de las sirenas)』(1923), 『고도 조종사(Los pilotos de altura)』(1929), 『치미스타 선장의 별(La estrella del capitán Chimista)』(1930)로 구성되어 있다. 바로하는 또한 스페인 군사 모험가인 후안 반 할렌의 전기를 썼다.

바로하의 대표작은 『지식의 나무』(1911)로 여겨지는데, 이는 지식과 인생 전반의 무용함을 묘사하는 비관적인 교양소설이다. 이 제목은 상징적인데, 주인공 안드레스 우르타도가 삶에 대해 배우고 경험할수록 더욱 비관적으로 느끼고 그의 삶이 더욱 무의미하게 느껴지기 때문이다.

3. 1. 주제와 스타일

바로하는 종종 비관적이고 악인 소설 스타일로 글을 썼다. 그의 능숙한 인물 묘사와 배경 묘사는 바스크 지방 (자치 공동체)에 생명력을 불어넣었으며, 이는 베니토 페레스 갈도스의 작품이 마드리드를 보여주는 방식과 유사했다. 바로하의 작품은 종종 생생했지만 줄거리가 부족할 수 있었다. 그것들은 갑작스럽고 생생하지만 비개성적인 스타일로 쓰여졌다. 그는 문법 오류로 비난을 받았는데, 그는 결코 부인하지 않았다.[7]

젊은 시절 바로하는 '98 세대'의 다른 사람들처럼 아나키즘을 느슨하게 믿었다. 그는 나중에 니체의 초인과 유사한 행동하는 사람들을 존경했다. 가톨릭교도와 전통주의자들은 그를 비난했고, 그의 삶은 스페인 내전 (1936–1939) 동안 위험에 처했다. 『청춘과 자아 숭배(Youth And Egolatry)』(1917)에서 바로하는 그의 신념을 다음과 같이 묘사했다.

> 나는 항상 자유주의적 급진주의자, 개인주의자이자 아나키스트였다. 첫째로, 나는 교회의 적이고, 둘째로, 나는 국가의 적이다. 이러한 강대국이 충돌할 때 나는 교회에 대항하여 국가의 편을 들지만, 국가가 승리하는 날에는 국가의 적이 될 것이다. 만약 내가 프랑스 혁명 시대에 살았다면, 나는 아나카르시스 클루츠 학파의 국제주의자였을 것이고, 자유를 위한 투쟁 동안에는 카르보나리의 일원이었을 것이다.[7]

어니스트 헤밍웨이는 바로하의 영향을 많이 받았고, 1956년 10월 그를 방문했을 때, "우리가 젊었을 때 작가가 되기를 원했던 우리에게 많은 것을 가르쳐준 당신에게 작은 경의를 표하고자 합니다. 저는 당신이 아직 노벨상을 받지 못한 것을 안타깝게 생각합니다. 특히 저처럼 모험가일 뿐이고, 그보다 덜 자격이 있는 많은 사람들에게 그것이 수여되었을 때 더욱 그렇습니다."라고 말했다.[8]

피오 바로하는 자신의 작품을 9개의 3부작, 하나의 4부작으로 묶었는데, 이들에는 공통적인 특징(테마)을 찾아내기 어려운 것도 많다.

3부작/4부작 이름구성 작품
바스크 지방아이츠고리 가문(1900년), 라브라스의 장자(1903년), 모험가 살라카인(Zalacaín el aventurero) (1909년)
삶을 위한 투쟁탐구(1904년), 잡초(Mala hierba) (1904년), 붉은 새벽(Aurora roja, 1904년)
라 라사과학의 나무(El árbol de la ciencia) (1911년), 방황하는 여인(La dama errante) (1908년), 안개의 도시(1909년)
과거신중한 사람들의 축제(1905년), 마지막 낭만주의자들(Los últimos románticos) (1906년), 그로테스크한 비극들(Las tragedias grotescas) (1907년)
환상적인 삶실베스트레 파라독스의 모험, 발명, 혼합(1901년), 완벽의 길(Camino de perfección) (1901년), 파라독스 왕(Paradox rey, 1906년)
도시들'카이사르 아니면 무(César o nada, 1910년), 세상은 그렇다(El mundo es ansí, 1912년), 타락한 관능: 순진한 남자의 사랑의 에세이, 쇠퇴의 시대(1920년)
바다(4부작)산티 안디아의 불안(1911년), 인어의 미로(1923년), 고도 조종사(1931년), 치미스타 선장의 별(1930년)
만년의 사랑세상의 거대한 소용돌이(1926년), 운명의 변덕(1927년), 만년의 사랑(1942년)
어두운 숲에로타초 가문(1932년), 폭풍의 곶(1932년), 선견자들(1932년)
잃어버린 청춘부에노 레티로의 밤들(1934년), 카니발의 광기(1937년), 몬레온의 신부(1936년)


3. 2. 주요 작품

피오 바로하의 주요 작품
제목구성 작품
바스크 지방아이츠고리 가문(1900년), 라브라스의 장자(1903년), 모험가 살라카인(1909년)
삶을 위한 투쟁탐구(1904년), 잡초(1904년), 붉은 새벽(1904년)
라 라사과학의 나무(1911년), 방황하는 여인(1908년), 안개의 도시(1909년)
과거신중한 사람들의 축제(1905년), 마지막 낭만주의자들(1906년), 그로테스크한 비극들(1907년)
환상적인 삶실베스트레 파라독스의 모험, 발명, 혼합(1901년), 완벽의 길(1901년), 파라독스 왕(1906년)
도시들카이사르 아니면 무(1910년), 세상은 그렇다(1912년), 타락한 관능: 순진한 남자의 사랑의 에세이, 쇠퇴의 시대(1920년)
바다산티 안디아의 불안(1911년), 인어의 미로(1923년), 고도 조종사(1931년), 치미스타 선장의 별(1930년)
만년의 사랑세상의 거대한 소용돌이(1926년), 운명의 변덕(1927년), 만년의 사랑(1942년)
어두운 숲에로타초 가문(1932년), 폭풍의 곶(1932년), 선견자들(1932년)
잃어버린 청춘부에노 레티로의 밤들(1934년), 카니발의 광기(1937년), 몬레온의 신부(1936년)

[1] 피오 바로하는 자신의 작품을 9개의 3부작과 1개의 4부작으로 묶었는데, 이들에는 공통적인 특징(테마)을 찾아내기 어려운 것도 많다.

3. 3. 한국어 번역

한국어 번역 작품원제 (출판년도)출판사비고
지식의 나무El árbol de la cienciaes (1974)하워드 페르티그[3]
물레방앗간의 형제(1940)고분도 서방나가타 히로사다 역
바스크 목가조(2008)유마니 서방카사이 시즈오 역
지혜의 나무(2009)스이세이샤마에다 아케미 역
The Restlessness of Shanti Andia, and Other Writings영어(1959)미시간 대학교 출판부[2]
César o nadaes(1976)하워드 페르티그[4]
El Salacaín el aventureroes(1998)로스트 코스트 프레스[5]
Youth and Egolatry영어(2004)케싱거 출판[6]
The Quest영어(1922)A.A. 크노프[7]
The City of the Discreet영어(1917)A.A. 크노프[8]
The Way to Perfection영어(2008)옥스보우 북스[9]
Weeds영어(1923)A.A. 크노프[10]
Red Dawn영어(1924)A.A. 크노프[11]
El mayorazgo de Labrazes(1926)A.A. 크노프[1]


4. 영향

어니스트 헤밍웨이는 바로하에게 큰 영향을 받았다. 1956년 10월 헤밍웨이는 바로하를 방문하여 "젊은 시절 작가를 꿈꾸던 우리에게 많은 것을 가르쳐준 당신에게 경의를 표합니다. 당신이 아직 노벨 문학상을 받지 못한 것이 안타깝습니다. 특히 저처럼 모험가일 뿐이고, 그보다 자격이 덜한 많은 사람에게 상이 수여되었을 때는 더욱 그렇습니다."라고 말했다.[8]

바로하는 종종 비관적이고 악인 소설 스타일로 글을 썼다. 그의 능숙한 인물 및 배경 묘사는 바스크 지방 (자치 공동체)에 생명력을 불어넣었으며, 이는 베니토 페레스 갈도스의 작품이 마드리드를 묘사하는 방식과 유사했다. 바로하의 작품은 생생하지만 줄거리가 부족한 경우가 있었고, 갑작스럽고 생생하지만 비개성적인 스타일로 쓰였다. 그는 문법 오류로 비난받았지만, 이를 부인하지 않았다.[7]

존 도스 파소스는 『삶의 투쟁(La lucha por la vida)』(1922–1924) 3부작을 매우 존경하여 이 작품에 대해 글을 쓰기도 했다.

참조

[1] 서적 The city of the discreet 1917
[2] 서적 Initiation, satiation, resignation: the development of Baroja's... 1964
[3] 서적 Obituaries from the Times, 1951–1960 1979
[4] 논문 El doctor Pío Baroja (1872-1956) https://www.fundacio[...] Fundación Pfizer 2006
[5] 논문 La universidad y los estudios de medicina en El árbol de la ciencia, de Pío Baroja https://dx.doi.org/1[...] 2020
[6] 서적 Una novela de 1902 Espasa-Calpe 1958
[7] 서적 Youth and Egolatry https://archive.org/[...] A. A. Knopf 1920
[8] 잡지 People, Oct. 29, 1956 http://www.time.com/[...] 1956-10-29
[9] 뉴스 PIO BAROJA DIES; SPANISH NOVELIST; Noted and Much-Translated Realist, 83, Wrote of the Miseries of Humanity More Honored Than Read Disagreed With Franco https://www.nytimes.[...] 2022-05-24
[10] 웹사이트 El cementerio de los ateos ilustres https://www.lavangua[...] 2022-05-24
[11] 웹사이트 Aircraft Photo of EC-JPU. Airbus A340-642. Iberia https://www.airhisto[...] 2022-05-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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