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라 내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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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하라 내각은 1918년 9월 29일부터 1921년 11월 13일까지 1142일 동안 재임했다. 하라 다카시가 총리대신과 사법대신을 겸임했으며, 우치다 고사이가 하라 총리 암살 후 총리대신 직무대행을 수행했다. 주요 정책으로 시베리아 출병, 파리 강화 회의 참여, 선거권 확대 등이 있었으며, 다이쇼 천황의 건강 악화에 따른 섭정 문제와 궁중 모 중대 사건을 겪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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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재직 기간
1918년 9월 29일부터 1921년 11월 13일까지 총 1,142일 동안 재직하였다.
하라 내각은 입헌정우회를 중심으로 구성되었으며, 일부 군부 및 무소속 인사가 포함되었다. 내각의 주요 직책과 임기는 다음과 같다.[1]
3. 내각 구성
하라 다카시 총리가 1921년 11월 4일에 암살된 후, 우치다 고사이 외무대신이 1921년 11월 4일부터 11월 13일까지 총리대신 직무대행을 수행했다.[1]
내각서기관장은 입헌정우회 소속 다카하시 미쓰타케, 내각법제국 장관은 입헌정우회 소속 요코타 센노스케가 맡았다.[1]
3. 1. 국무대신
하라 다카시가 1921년 11월 4일 암살된 후, 백작 우치다 고사이가 1921년 11월 4일부터 13일까지 내각총리대신 직무대행을 수행했다.[1]
3. 2. 우치다 고사이 내각총리대신 임시대리
하라 다카시가 1921년 11월 4일 암살된 후, 백작 우치다 고사이가 내각총리대신 임시대리를 맡았다.[1] 그는 외무대신을 겸임하였다. 우치다 고사이 내각총리대신 임시대리의 재직일수는 10일이다.[9]
3. 3. 내각서기관장·법제국 장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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