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라 내각
1. 개요
하라 내각은 1918년 9월 29일부터 1921년 11월 13일까지 1142일 동안 재임했다. 하라 다카시가 총리대신과 사법대신을 겸임했으며, 우치다 고사이가 하라 총리 암살 후 총리대신 직무대행을 수행했다. 주요 정책으로 시베리아 출병, 파리 강화 회의 참여, 선거권 확대 등이 있었으며, 다이쇼 천황의 건강 악화에 따른 섭정 문제와 궁중 모 중대 사건을 겪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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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라 다카시 -
다이쇼 데모크라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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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라 다카시 -
일본 철도성
일본 철도성은 메이지 시대에 설립되어 교통통신부로 통합되기 전까지 일본의 철도 administration을 담당했던 행정 기관으로, 철도망 정비, 전기화 추진, 육상 교통 부문 관할 등의 사업을 수행했다. -
1918년 일본 -
데라우치 내각
데라우치 내각은 데라우치 마사타케가 총리, 외무대신, 대장대신을 겸임하며 시베리아 출병 결정, 대중국 외교, 이시이·랜싱 협정 체결 등의 정책을 추진했으나, 쌀 소동과 총리의 건강 악화로 총사퇴한 일본 제국의 내각이다. -
1918년 일본 -
1918년 쌀 소동
1918년 쌀 소동은 제1차 세계 대전 중 일본에서 쌀값 폭등으로 인해 발생한 전국적인 폭동 사건으로, 데라우치 마사타케 내각의 총사퇴와 하라 다카시 내각의 출범, 그리고 산미증식계획과 같은 식민지 정책에 영향을 미치는 등 일본 사회 전반에 걸쳐 다양한 결과를 초래했다. -
1921년 일본 -
워싱턴 회담
워싱턴 회담은 제1차 세계 대전 후 미국 주도로 1921년부터 1922년까지 워싱턴 D.C.에서 개최된 9개국 국제 회의로, 해군 군비 제한, 태평양 지역 질서 재편, 중국 문제 등을 논의하여 워싱턴 해군 군축 조약 등 일련의 조약을 체결하고 만주사변 이전까지 동아시아 국제 질서를 규정하는 워싱턴 체제를 성립시켰다. -
1921년 일본 -
다카라즈카 가극단 10기생
다카라즈카 가극단 10기생은 1921년 다카라즈카 가극단에서 데뷔한 15명의 단원들을 지칭하며, 예명이 《백인일수》에서 유래했다는 특징을 가지고 있고, 1922년 데뷔한 아지로기 와타루와 와타세 시모코 또한 함께 다룬다.
3. 내각 구성
하라 내각은 입헌정우회를 중심으로 구성되었으며, 일부 군부 및 무소속 인사가 포함되었다. 내각의 주요 직책과 임기는 다음과 같다.
| 직위 | 대신 | 정당 | 임기 |
|---|---|---|---|
| 내각총리대신 | 하라 다카시 | 입헌정우회 | 1918년 9월 29일 ~ 1921년 11월 4일 |
| 외무대신 | 백작 우치다 고사이 | 무소속 | 1918년 9월 29일 ~ 1921년 11월 13일 |
| 내무대신 | 도코나미 다케지로 | 입헌정우회 | 1918년 9월 29일 ~ 1921년 11월 13일 |
| 대장대신 | 자작 다카하시 고레키요 | 입헌정우회 | 1918년 9월 29일 ~ 1921년 11월 13일 |
| 육군대신 | 다나카 기이치 (1918년 9월 29일 ~ 1921년 6월 9일) 야마나시 한조 (1921년 6월 9일 ~ 1921년 11월 13일) | 군 (육군) | |
| 해군대신 | 남작 가토 도모사부로 | 군 (해군) | 1918년 9월 29일 ~ 1921년 11월 13일 |
| 사법대신 | 하라 다카시 (1918년 9월 29일 ~ 1920년 5월 15일) 오키 엔키치 (1920년 5월 15일 ~ 1921년 11월 13일) | 입헌정우회 | |
| 문부대신 | 나카하시 도쿠고로 | 입헌정우회 | 1918년 9월 29일 ~ 1921년 11월 13일 |
| 농상대신 | 남작 야마모토 다쓰오 | 입헌정우회 | 1918년 9월 29일 ~ 1921년 11월 13일 |
| 통신대신 | 노다 우타로 | 입헌정우회 | 1918년 9월 29일 ~ 1921년 11월 13일 |
| 철도대신 | 모토다 하지메 | 입헌정우회 | 1920년 5월 15일 ~ 1921년 11월 13일 |
하라 다카시 총리가 1921년 11월 4일에 암살된 후, 우치다 고사이 외무대신이 1921년 11월 4일부터 11월 13일까지 총리대신 직무대행을 수행했다.
내각서기관장은 입헌정우회 소속 다카하시 미쓰타케, 내각법제국 장관은 입헌정우회 소속 요코타 센노스케가 맡았다.
3.1. 국무대신
| 직위 | 대신 | 정당 | 임기 시작 | 임기 종료 |
|---|---|---|---|---|
| 내각총리대신 | 하라 다카시 | 입헌정우회 | 1918년 9월 29일 | 1921년 11월 4일 |
| 외무대신 | 백작 우치다 고사이 | 무소속 | 1918년 9월 29일 | 1921년 11월 4일 |
| 내무대신 | 도코나미 다케지로 | 입헌정우회 | 1918년 9월 29일 | 1921년 11월 4일 |
| 대장대신 | 자작 다카하시 고레키요 | 입헌정우회 | 1918년 9월 29일 | 1921년 11월 4일 |
| 육군대신 | 다나카 기이치 | 군 (육군) | 1918년 9월 29일 | 1921년 6월 9일 |
| 야마나시 한조 | 군 (육군) | 1921년 6월 9일 | 1921년 11월 4일 | |
| 해군대신 | 남작 가토 도모사부로 | 군 (해군) | 1918년 9월 29일 | 1921년 11월 4일 |
| 사법대신 | 하라 다카시 | 입헌정우회 | 1918년 9월 29일 | 1920년 5월 15일 |
| 오키 엔키치 | 입헌정우회 | 1920년 5월 15일 | 1921년 11월 4일 | |
| 문부대신 | 나카하시 도쿠고로 | 입헌정우회 | 1918년 9월 29일 | 1921년 11월 4일 |
| 농상대신 | 남작 야마모토 다쓰오 | 입헌정우회 | 1918년 9월 29일 | 1921년 11월 4일 |
| 통신대신 | 노다 우타로 | 입헌정우회 | 1918년 9월 29일 | 1921년 11월 4일 |
| 철도대신 | 모토다 하지메 | 입헌정우회 | 1920년 5월 15일 | 1921년 11월 4일 |
| 내각서기관장 | 다카하시 미쓰타케 | 입헌정우회 | 1918년 9월 29일 | 1921년 11월 4일 |
| 내각법제국장관 | 요코타 센노스케 | 입헌정우회 | 1918년 9월 29일 | 1921년 11월 4일 |
하라 다카시가 1921년 11월 4일 암살된 후, 백작 우치다 고사이가 1921년 11월 4일부터 13일까지 내각총리대신 직무대행을 수행했다.
| 직위 | 대신 | 정당 | 임기 시작 | 임기 종료 |
|---|---|---|---|---|
| 내각총리대신 | 백작 우치다 고사이 (직무대행) | 무소속 | 1921년 11월 4일 | 1921년 11월 13일 |
| 외무대신 | 백작 우치다 고사이 | 무소속 | 1921년 11월 4일 | 1921년 11월 13일 |
| 내무대신 | 도코나미 다케지로 | 입헌정우회 | 1921년 11월 4일 | 1921년 11월 13일 |
| 대장대신 | 자작 다카하시 고레키요 | 입헌정우회 | 1921년 11월 4일 | 1921년 11월 13일 |
| 육군대신 | 야마나시 한조 | 군 (육군) | 1921년 11월 4일 | 1921년 11월 13일 |
| 해군대신 | 남작 가토 도모사부로 | 군 (해군) | 1921년 11월 4일 | 1921년 11월 13일 |
| 사법대신 | 오키 엔키치 | 입헌정우회 | 1921년 11월 4일 | 1921년 11월 13일 |
| 문부대신 | 나카하시 도쿠고로 | 입헌정우회 | 1921년 11월 4일 | 1921년 11월 13일 |
| 농상대신 | 남작 야마모토 다쓰오 | 입헌정우회 | 1921년 11월 4일 | 1921년 11월 13일 |
| 통신대신 | 노다 우타로 | 입헌정우회 | 1921년 11월 4일 | 1921년 11월 13일 |
| 철도대신 | 모토다 하지메 | 입헌정우회 | 1921년 11월 4일 | 1921년 11월 13일 |
| 내각서기관장 | 다카하시 미쓰타케 | 입헌정우회 | 1921년 11월 4일 | 1921년 11월 13일 |
| 내각법제국장관 | 요코타 센노스케 | 입헌정우회 | 1921년 11월 4일 | 1921년 11월 13일 |
3.2. 우치다 고사이 내각총리대신 임시대리
하라 다카시가 1921년 11월 4일 암살된 후, 백작 우치다 고사이가 내각총리대신 임시대리를 맡았다. 그는 외무대신을 겸임하였다. 우치다 고사이 내각총리대신 임시대리의 재직일수는 10일이다.
3.3. 내각서기관장·법제국 장관
하라 내각의 내각서기관장은 입헌정우회 소속 중의원 의원인 다카하시 미쓰타케였다. 그는 1918년 9월 29일부터 1921년 11월 4일까지 재임하였다.
내각법제국 장관은 입헌정우회 소속 중의원 의원인 요코타 센노스케였다. 그는 내각 은급국장도 겸임하였다. 그는 1918년 9월 29일부터 1921년 11월 4일까지 재임하였다.
4. 주요 정책
하라 내각은 러시아 혁명에 대한 개입 시도였던 시베리아 출병을 미국의 방침에 따라 철수시키고, 제1차 세계 대전의 파리 강화 회의에 사이온지 긴모치를 파견하여 산둥 성과 남양 제도를 획득하는 외교적 성과를 거두었다. 국내적으로는 선거권 확대를 통해 납세 자격 요건을 완화했으나, 더 이상의 확대에는 소극적인 태도를 보였다. 또한 다이쇼 천황의 건강 악화로 인한 황태자의 섭정 문제와 궁중 모 중대 사건 등을 원만히 처리했다.
4.1. 시베리아 출병
러시아 혁명에 대한 개입을 목적으로 테라우치 내각은 영국, 프랑스 등 유럽 열강과 협조하여 시베리아 출병을 했지만, 하라 내각은 기본적으로 미국의 방침을 따르는 입장을 취했다. 1918년 10월 5일 바이칼 호 서쪽으로부터 철병을 각의에서 결정했다. 육군도 이에 따라 평시 편제로 대응하는 방침을 진언했고, 12월 19일에는 출병 수를 평시의 2만 명까지 삭감했다.
1920년 1월 미국이 완전 철병을 시작하자, 하라는 발맞춰 철병을 지시했다. 육군은 철병에 난색을 표했고, 6월에는 적군에 의한 일본군 포로 처형(니콜라예프스크 사건)이 밝혀져 여론은 강경론으로 기울었다. 그러나 하라는 철병을 추진하여 통수권을 보유한 육군 참모 본부(우에하라 유사쿠 참모 총장)를 굴복시키고, 7월 15일 정전 의정서에 조인했다. 하라 사망 후 1922년 10월에 완전 철병하여 혁명에 대한 개입은 실패로 끝났다.
4.2. 제1차 세계 대전과 파리 강화 회의
1918년 11월에 제1차 세계 대전이 끝나고, 이듬해 1919년 1월부터 열린 파리 강화 회의에는 사이온지 긴모치 전 총리를 수석 전권으로 파견하였다. 일본은 전쟁 중 이시이 키쿠지로 주미 대사의 주도로 런던 선언에 가입하여 세계 질서의 안정에 기여한 덕분에 전후 처리에 대한 발언권을 얻었고, 패전국 독일이 상실한 산둥 성, 남양 제도를 편입하게 되었다. 같은 해 6월 28일 조인되었다.
4.3. 선거권 확대
보통 선거 운동이 끓어오르자, 공직 선거법을 개정하여 직접 국세의 요건을 기존 10엔에서 3엔으로 인하했다(1919년 3월 25일 성립, 5월 23일 시행). 이듬해 1920년에도 더 확대를 요구하는 운동이 이어졌고, 야당도 개정안을 제출했지만, 하라는 더 이상의 확대에는 소극적이었고, 대립을 구실로 중의원 해산했다. 제14회 중의원 의원 총선거(5월 10일 투개표)에서 정우회가 승리함으로써, 기운은 꺾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