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8년 쌀 소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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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1918년 쌀 소동은 제1차 세계 대전 이후 일본의 산업화와 도시화로 인한 쌀 부족, 쌀값 폭등에 대한 불만으로 시작된 대규모 민중 봉기이다. 1918년 7월 도야마현에서 시작되어 전국으로 확산되었으며, 쌀 도매상과 정부의 미흡한 대처, 경찰력 증강 등이 사태를 악화시켰다. 이 소동은 데라우치 내각의 총사퇴와 하라 내각의 탄생, 쌀값 안정을 위한 정부의 정책 변화를 가져왔으며, 일본의 식민지였던 조선에서의 산미증식계획 시행에도 영향을 미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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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8년 쌀 소동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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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건 개요 | |
명칭 | 1918년 쌀 소동 |
로마자 표기 | Kome Sōdō |
발생 장소 | 일본 도야마현 시모니카와군 우오즈정 (현재의 우오즈시) 우오즈항 및 도야마현 동부 지역 |
날짜 | 1918년 7월 22일 - 1918년 9월 12일 |
원인 | 발생 섹션 참고 |
요구 | 쌀의 반출 중단 및 저가 판매 요구 |
진압 | 경찰 (지역에 따라 군대)이 출동하여 진압 |
영향 | |
전국적 파급 | 전국에의 파급 섹션 참고 |
2. 배경
1918년 쌀 소동의 배경에는 여러 요인이 복합적으로 작용했다. 제1차 세계 대전 승전국 일본은 산업 혁명으로 농촌 인구가 도시로 이동하면서 쌀 생산량이 감소했다. 쌀 도매상들의 담합으로 쌀값이 폭등하여 민중들의 불만이 커졌다.[1]
시베리아 출병은 일본 정부가 해외 파병 군대를 지원하기 위해 쌀 재고를 매입하면서 쌀값 상승을 더욱 악화시켰다. 테라우치 마사타케 내각의 시베리아 출병 선언은 전쟁 특수에 따른 가격 폭등을 예상한 유통업자와 투기 세력의 매점매석을 가속화시켰다.
쌀값 폭등은 일반 시민들의 생활을 어렵게 했고, 신문의 보도는 사회 불안을 증대시켰다. 이에 테라우치 내각은 경찰력을 늘려 사회 불안을 억누르는 방침을 채택, 순사 채용 수를 늘렸다.[10]
2. 1. 일본의 산업화와 도시화
제1차 세계 대전 승전 후 일본에서는 산업 혁명이 진행되면서 농촌 인구가 도시로 이동하여 쌀 생산량이 감소하였다. 제1차 세계 대전의 영향으로 인한 호황은 쌀 소비량 증가를 가져왔고, 공업 노동자의 증가와 농촌에서 도시로의 인구 유출은 쌀 생산량 정체를 야기했다. 1917년(다이쇼 6년) 시베리아 출병과 대전의 영향으로 쌀 수입량이 감소한 것도 쌀값 상승의 원인이 되었다.[6]1914년 (다이쇼 3년) 제1차 세계 대전 개전 직후 폭락했던 쌀값은 약 3년 반 동안 거의 변동 없이 유지되었지만, 1918년 (다이쇼 7년) 중반부터 상승하기 시작했다. 쌀 가격 폭등을 보고, 점차 쌀 작지주나 쌀 취급 업자들의 매점매석과 미곡 투기가 발생하기 시작했다.
오사카도지마의 쌀 시장 기록에 따르면, 1918년 (다이쇼 7년) 1월에 1석 15엔이었던 쌀값은 6월에는 20엔, 7월 17일에는 30엔을 넘어, 8월 1일에는 1석 35엔, 같은 달 5일에는 40엔, 9일에는 50엔을 넘어섰다. 각지의 거래소에서 거래 중단이 잇따르는 이상 사태가 발생했고, 소매 가격도 급등했다.[7][8]
테라우치 마사타케 내각은 1918년 (다이쇼 7년) 8월 2일, 시베리아 출병을 선언했는데, 이는 전쟁 특수에 따른 가격 폭등을 예상한 유통업자나 투기 세력 등의 투기나 매점매석을 가속화시켰다.
쌀값 폭등은 일반 시민들의 생활을 어렵게 했고, 신문이 연일 쌀값 폭등을 크게 보도한 것도 있어, 사회 불안을 증대시켰다. 나카코지 렌농상무 대신은, 1917년 (다이쇼 6년) 9월 1일에 「폭리 단속령」을 발령하여[9], 쌀 등 각 물자의 매점매석을 금지했지만, 효과는 없었다. 1918년 (다이쇼 7년) 4월에는 「외국 쌀 관리령」이 공포되어, 미쓰이 물산과 스즈키 상사 등 지정 7개사에 의한 외국 쌀 대량 수입이 실시되었지만, 쌀값은 하락하지 않았다.
2. 2. 쌀값 폭등과 유통 문제
제1차 세계 대전에서 승전국이 된 일본에서는 산업 혁명이 진행되었다. 산업 혁명의 영향으로 젊은 농업 인구들이 도시로 몰려 농사를 짓는 인구가 줄어들었고, 지주들에게 쌀을 공급받아서 파는 쌀 도매상들이 가격을 담합하면서 일본 내 쌀값은 폭등하였다. 일본 민중들의 불만은 커졌고, 1918년 도야마현에서 어부의 아내들이 쌀값을 내리라고 요구하며 쌀가게를 습격하여 불태운 사건을 시작으로 쌀 소동이 번져나갔다.[1]시베리아 출병은 일본 정부가 해외 파병 군대를 지원하기 위해 기존의 쌀 재고를 매입하면서 상황을 더욱 악화시켰고, 이는 쌀 가격을 더욱 상승시켰다. 경제 문제에 대한 정부의 개입 (낮은 규제 쌀 가격)은 농촌의 항의 시위를 도시로 확산시켰다. 1917년(다이쇼 6년) 시베리아 출병과 대전의 영향으로 쌀 수입량이 감소한 것도 쌀값 상승의 원인이 되었다.[6]
쌀 가격 폭등을 보고, 점차 쌀 지주나 쌀 취급 업자들의 매점매석과 미곡 투기가 발생하기 시작했다. 테라우치 마사타케 내각은 1918년 (다이쇼 7년) 8월 2일, 시베리아 출병을 선언했다. 이는 전쟁 특수에 따른 가격 폭등을 예상한 유통업자나 투기 세력 등의 투기나 매점매석을 가속화시켰다.
오사카 도지마의 쌀 시장 기록에 따르면, 1918년 (다이쇼 7년) 1월에 1석 15엔이었던 쌀값은 6월에는 20엔, 7월 17일에는 30엔을 넘었으며, 8월 1일에는 1석 35엔, 같은 달 5일에는 40엔, 9일에는 50엔을 넘어 각지의 거래소에서 거래 중단이 잇따르는 이상 사태가 발생했다. 한편 소매 가격도 7월 2일에 1되 34전 3리였던 시세가, 8월 1일에는 40전 5리, 8월 9일에는 60전 8리로 급등하여[7][8] (당시 노동자의 월수입이 18엔 - 25엔) 세간은 소란스러워졌다.
쌀값 폭등은 일반 시민들의 생활을 어렵게 했고, 신문이 연일 쌀값 폭등을 크게 보도한 것도 있어 사회 불안을 증대시켰다. 나카코지 렌 농상무 대신은 1917년 (다이쇼 6년) 9월 1일에 「폭리 단속령」을 발령하여[9] 쌀 등 각 물자의 매점매석을 금지했지만, 효과는 없었다. 1918년 (다이쇼 7년) 4월에는 「외국 쌀 관리령」이 공포되어, 미쓰이 물산과 스즈키 상사 등 지정 7개사에 의한 외국 쌀 대량 수입이 실시되었지만, 쌀값은 하락하지 않았다.
이에 테라우치 내각은 경찰력 증가를 통해 사회 정세의 불안을 억누르는 방침을 채택하여, 순사 채용 수가 증원되었다.[10] 생활고와 가혹한 억압에 시달리는 서민들의 분노는 점차 자본가, 특히 쌀 도매상, 상사 등 유통업자에게 향하게 되었다.
2. 3. 정부의 미흡한 대처
데라우치 마사타케 내각은 쌀값 폭등에 대해 여러 대책을 마련했지만, 실질적인 효과는 거두지 못했다. 1917년 9월 1일 폭리 단속령을 발령하여[9] 쌀 등의 매점매석을 금지했지만, 쌀값은 잡히지 않았다. 1918년 4월 외국 쌀 관리령을 공포하고 미쓰이 물산 등 7개사를 통해 외국 쌀을 대량 수입했지만, 이 역시 쌀값 하락으로 이어지지는 않았다.결국 데라우치 내각은 경찰력을 늘려 사회 불안을 억누르는 방식을 택했고, 순사 채용 인원을 늘렸다.[10] 그러나 이러한 억압적인 정책은 오히려 생활고에 시달리던 서민들의 분노를 자본가와 쌀 도매상 등에게 돌리게 만드는 결과를 초래했다.
3. 발생
1918년 쌀 소동은 규모, 크기, 폭력 면에서 현대 일본 역사상 유례가 없었다. 평화적인 청원으로 시작되었지만, 곧 폭동, 파업, 약탈, 경찰서 및 정부 청사에 대한 방화 폭탄 투척, 무장 충돌로 격화되었다.[1]
학자들은 당시 일본의 생산 능력을 초과한 쌀 수요를 완화하기 위해 대만과 한반도에서의 식민지 쌀 생산이 강화되었다고 주장하며, 일본 제국주의와의 연관성에 대해 논쟁을 벌이고 있다.[3]
쌀 소동은 도야마현에서 시작되어 전국으로 확산되었으며, 자세한 내용은 하위 섹션에서 다룬다.
3. 1. 도야마현에서의 시작
1918년 7월 23일, 도야마현 우오즈시의 작은 어촌 마을에서 최초의 시위가 발생했다.[1] 초기에는 평화적인 청원 형태로 시작되었으나, 곧 폭동, 파업, 약탈, 경찰서 및 정부 청사에 대한 방화 폭탄 투척, 무장 충돌 등으로 격화되었다.[1]
소동의 발단이 된 도야마현에서는 1918년(다이쇼 7년) 7월 상순부터 나카니이카와군히가시미즈하시정(현 도야마시)에서 25~6명의 여자 (부두 노동자)들이 쌀 반출 상인 다카마쓰에게 적재 중지 요구를 위해 날마다 찾아가는 행동이 시작되었다.[11]
마침 우오즈항에는 홋카이도로 쌀을 실어 나르기 위해 이부키마루가 기항하고 있었다. 당시 신문에 따르면 "우오즈정에서는 쌀 적재를 위해 객월 18일 기선 이부키마루 기항에 즈음하여 빈민 부녀들의 봉기가 일어나 봉화를 올렸다"고 하며, 우오즈정(현 우오즈시)에서 봉기 발생은 7월 18일 이후라고 한다.[12] 20일 새벽(아마 19일 야간)에는 동해안에서 부녀 46명이 집합하여 시청으로 몰려가려 하자, 우오즈 경찰서에서 탐지하여 해산시켰다는 보도도 있었다.[13]
7월 22일 낮에는 도야마시 니시산반초의 부호 아사다 가문에 쌀을 구걸하려던 나카마정, 나카나가라정 등 시내 각지의 빈민 200명이 시청으로 몰려갔다. 이때는 경찰의 설득으로 해산되었지만, 주민들은 쌀 가게를 방문하는 등 궁핍함을 호소했다.
그 무렵, 히가시미즈하시정, 도야마시, 우오즈시 외에도 히가시이와세정(28일), 나메리카와정, 토마리정(31일) 등 도야마현 내에서 구호 요청과 쌀 염가 판매를 요구하는 인원은 더욱 증가했으며, 각지에서 움직임이 일어났다.[15]
8월 3일에는 당시 나카니이카와군니시미즈하시정(현 도야마시)에서 200명 남짓한 마을 사람들이 집결하여 쌀 도매상과 자산가들에게 쌀 반출을 중지하고 판매해 줄 것을 간청했다. 8월 6일에는 이 운동이 더욱 격화되어, 히가시미즈하시정, 나메리카와정 주민들까지 끌어들여 1,000명이 넘는 사태가 되었다. 주민들은 쌀 반출을 실력 행사로 저지하고, 당시 1되 40전에서 50전 하던 쌀을 35전에 판매하게 했다.
2000년대 이전까지는 쌀 소동의 시작을 "7월 22일 밤, 도야마현 시모니카와군 우오즈시의 어민의 아내 등이, 우물가에서 쌀값이 비싸지는 것은 동 지방의 쌀을 현외로 반출하기 때문"이라며, 쌀의 반출을 중지해 달라고 상담했고, "23일 오전 8시경, 경찰 조사에 따르면 46명이 해안에 모였다. 이것이 전국을 뒤덮은 쌀 소동의 발단이었다"라는 설이 정설이었다.[46]
그러나 2000년대 이후 쌀 소동에 직접 참가한 여성 육중사나 어부, 군인 등 쌀 소동 목격자나 수행자에 대한 인터뷰를 문자로 옮기고, 새로운 시각으로 분석을 더한 학술서가 잇따라 간행되면서, 쌀 소동이 언제 어디서 어떻게 시작되었는지에 대해서는 적어도 "도야마만 연안 지대"에서 시작되었으며, "어촌에서 시작된 것은 아니다", 그 주체는 "해운·하역 노동자의 가족", "도시 어민"의 전기 프롤레타리아 등과 같이 기존의 정설을 대폭 수정하게 되었다.[47]
3. 2. 전국으로 확산
1918년 쌀 소동은 규모, 크기, 폭력 면에서 현대 일본 역사상 유례가 없었다. 최초의 시위는 1918년 7월 23일 도야마현 우오즈시의 작은 어촌 마을에서 발생했다. 평화적인 청원으로 시작되었지만, 곧 폭동, 파업, 약탈, 경찰서 및 정부 청사에 대한 방화 폭탄 투척, 무장 충돌로 격화되었다.[1] 1918년에는 66,000명 이상의 노동자가 관련된 417건의 분쟁이 발생했다.[2] 약 25,000명이 체포되었으며, 이 중 8,200명이 다양한 범죄로 유죄 판결을 받아 경미한 벌금에서 사형에 이르기까지 처벌을 받았다.[2]약 50일간 이어진 쌀 소동은 1도 3부 37현의 총 369곳에 달했으며, 참가자는 수백만 명에 달했고, 3부 23현에 걸쳐 10만 명 이상의 군대가 투입되었다.[41] 육군 외에도[28][32] 구레시에서는 해군 육전대가 출동하여 민중과 대치하는 가운데 총검에 찔려 최소 2명이 사망했다는 보고가 있다. 한편, 수병이 소동에 참가하여 검거되었고, 일부 지역에서는 경찰이 폭동을 묵인하기도 했다.
2만 5,000명 이상이 검거되었고, 8,253명이 검사 처분을 받았다. 7,786명이 기소되었으며, 제1심에서 무기징역 12명, 10년 이상의 유기형이 59명에 달했다. 쌀 소동에는 통일적인 지도자는 없었지만, 와카야마현에서 일부 민중을 선동한 혐의로 2명이 사형 판결을 받았다.
1918년 쌀 소동으로 형사 처분을 받은 사람은 8,185명에 달했으며, 피차별 부락에서 그 중 10%가 넘는 처분자가 나왔다. 이는 인구 비율에 비해 유난히 많은 수치였다. 교토부, 오사카부, 효고현, 나라현에서는 피차별 부락민이 30~40%를 차지했으며, 여성 검거자 35명 중 34명이 부락민이었다.[43] 이는 피차별 부락민이 쌀 상인의 투기 매입으로 인한 최대 피해자였기 때문이다. 교토시의 쌀 소동도 시내 최대 부락인 야나기하라(현 스고인 지구)에서 시작되었으며, 이 지구에서 50명 이상의 부락민이 체포되었다.[44] 처분은 사형을 포함하여 매우 무거웠다. 와카야마현 이토군 기시가미 촌(현 하시모토시)의 나카니시 이와시로(당시 19세)와 도우라 이와마쓰(도우라 마쓰키치로 하는 자료도 있음. 당시 45세)도 피차별 부락민이었다. 사태를 중시한 하라 내각은 1920년 부락 개선비 5만 엔을 계상하여 부락 개선을 위한 최초의 국고 지출을 했다. 같은 해, 내무성은 성내에 사회국을 설치하고, 부현 등의 지방청에도 사회과를 설치했다.
3. 3. 탄광으로 번짐
쌀 소동은 야마구치현, 후쿠오카현, 구마모토현 등 탄광 지역으로 번져 노동 쟁의로 이어졌다. 탄광 노동자들은 임금 인상과 쌀값 인하를 요구하며 파업과 폭동을 일으켰다. 다이너마이트를 사용한 폭력 시위가 발생하기도 했으며, 군대가 출동하여 진압하는 과정에서 사상자가 발생했다.[41]4. 전개
1918년 쌀 소동은 규모, 크기, 폭력 면에서 현대 일본 역사상 유례가 없었다. 최초의 시위는 1918년 7월 23일 도야마현 우오즈시의 작은 어촌 마을에서 발생했다. 평화적인 청원으로 시작되었지만, 곧 폭동, 파업, 약탈, 경찰서 및 정부 청사에 대한 방화 폭탄 투척, 무장 충돌로 격화되었다.[1]
학자들은 당시 일본의 생산 능력을 초과한 쌀 수요를 완화하기 위해, 대만과 한반도에서의 식민지 쌀 생산이 강화되었다고 주장하며, 이는 일본 제국주의와의 연관성에 대한 논쟁으로 이어진다.[3]
쌀 소동으로 검거된 인원은 2만 5,000명을 넘었으며, 8,253명이 검사 처분을 받았다. 7,786명이 기소되었고, 제1심에서 무기징역 12명, 10년 이상의 유기형이 59명에 달했다. 쌀 소동에는 통일적인 지도자는 없었지만, 와카야마현에서 2명이 민중 선동 혐의로 사형 판결을 받았다.
고베시에서 시작된 소동은 8월 11일 스즈키 상점 방화 사건으로 이어져, 나루오 구장에서 개최 예정이던 제4회 전국 중등 학교 우승 야구 대회 (현 전국 고등학교 야구 선수권 대회)가 연기되었다. 이후에도 치안 개선의 전망이 보이지 않아 8월 16일 대회는 중지되었다.
4. 1. 도시에서의 쌀 소동
주요 도시에서는 쌀 도매상 습격, 쌀 헐값 판매 강요, 기부 강요, 파괴 등의 형태로 쌀 소동이 나타났다. 히비야 공원에서 열린 야외 연설회는 경관과의 충돌로 이어져 폭동으로 발전했다.4. 2. 탄광에서의 소동
야마구치현 우베시에서는 탄광 노동자들이 임금 인상 교섭 결렬 후 폭동을 일으켰고, 이에 군대가 출동하여 진압했다.[41] 후쿠오카현 지쿠호 지방에서는 쌀값 폭등과 임금 동결에 불만을 품은 탄광 노동자들이 폭동을 일으켰다.[41] 구마모토현 미이케 탄광에서도 임금 인상 등을 요구하는 폭동이 발생하여 군대가 출동, 진압했다.[41]4. 3. 소동의 발생 지역 및 규모
1918년 쌀 소동은 규모, 크기, 폭력 면에서 현대 일본 역사상 유례가 없었다. 1918년에는 66,000명 이상의 노동자가 관련된 417건의 분쟁이 발생했다.[1] 약 25,000명이 체포되었으며, 이 중 8,200명이 다양한 범죄로 유죄 판결을 받아 경미한 벌금에서 사형에 이르기까지 처벌을 받았다.[2]쌀 소동은 약 50일간 지속되었으며, 1도 3부 37현의 총 369곳에서 발생했다. 참가자 수는 수백만 명에 달했고, 3부 23현에 걸쳐 10만 명 이상의 군대가 투입되었다.[41] 구레시에서는 해군 육전대가 출동하여 민중과 대치하는 과정에서 총검에 찔려 최소 2명이 사망했다. 또한, 수병이 소동에 참가하여 검거되었고, 일부 지역에서는 경찰이 폭동을 묵인하기도 했다.
5. 결과
1918년 쌀 소동은 일본 사회에 큰 영향을 미쳤다.
1918년 9월 21일, 데라우치 내각은 쌀 소동으로 인한 공공 질서 붕괴에 대한 책임을 지고 사임했다. 여론은 데라우치 내각의 퇴진을 요구했고, 데라우치는 건강 악화까지 겹쳐 8월 31일 야마가타 아리토모에게 사임 의사를 밝혔다.[4] 이후 하라 내각이 들어섰는데, 이는 일본 최초의 본격적인 정당 내각이었다. 하라는 작위가 없는 중의원 의원 출신 첫 내각총리대신으로, "평민 재상"으로 불리며 민중의 지지를 받았다.[1]
정부는 쌀값 안정을 위해 1921년에 쌀법을 제정했다. 이 법은 수입 관세를 설정하고 일본 제국 외부로부터의 쌀 수입을 제한하여, 정부가 200억엔의 재정적 한도 내에서 쌀을 구매, 판매, 보관 및 가공할 수 있게 하였다.[4][5]
한편, 1918년 쌀 소동은 전국 중등 학교 우승 야구 대회(현 전국 고등학교 야구 선수권 대회)에도 영향을 미쳤다. 8월 11일 고베시에서 시작된 소동으로 나루오 구장 근처의 스즈키 상점 방화 사건이 발생했고, 주변 치안이 악화되어 8월 14일 개최 예정이던 제4회 전국 중등 학교 우승 야구 대회는 연기되었다. 이후에도 치안 개선의 전망이 보이지 않아 8월 16일 대회는 중지되었다.[1]
5. 1. 데라우치 내각 총사퇴
1918년 9월 21일, 데라우치 일본 내각은 쌀 소동으로 인한 공공 질서 붕괴에 대한 책임을 지고 사임했다.[4] 쌀 소동의 영향으로 여론은 데라우치 마사타케 내각의 퇴진을 요구했다.[4] 데라우치는 건강 악화도 있어 8월 31일에 원로: 야마가타 아리토모에게 사임 의사를 밝히고, 9월 20일에 내각 총사직을 결정했다.[4]5. 2. 하라 내각 탄생
데라우치 마사타케 내각은 1918년 9월 21일 쌀 소동으로 인한 공공 질서 붕괴에 대한 책임을 지고 사임했다.[1] 여론은 데라우치 내각의 퇴진을 요구했고, 데라우치는 건강 악화까지 겹쳐 8월 31일 원로 야마가타 아리토모에게 사임 의사를 밝혔으며, 9월 20일 내각 총사직을 결정했다.[1] 야마가타는 전임 총리대신 사이온지 긴모치에게 총리 취임을 요청했으나, 사이온지는 이를 고사하고 헌정의 상도를 중시하여 입헌정우회 총재 하라 타카시를 추천했다.[1] 9월 27일 다이쇼 천황은 하라에게 조각의 대명을 내렸고, 이틀 뒤인 9월 29일 일본 최초의 본격적인 정당 내각인 하라 내각이 탄생했다.[1] 하라 타카시는 작위가 없는 중의원 의원 출신 첫 내각총리대신으로, "평민 재상"으로 불리며 민중의 지지를 받았다.[1]5. 3. 정부의 대응
정부는 쌀값 안정을 위해 1921년에 쌀법을 제정했다. 이 법은 수입 관세를 설정하고 일본 제국 외부로부터의 쌀 수입을 제한하여, 정부가 200억엔의 재정적 한도 내에서 쌀의 구매, 판매, 보관 및 가공을 통제할 수 있게 하였다.[4][5]5. 4. 사회적 영향
1918년 쌀 소동은 전국 중등 학교 우승 야구 대회(현 전국 고등학교 야구 선수권 대회)에도 영향을 미쳤다. 8월 11일 고베시에서 시작된 소동으로 나루오 구장 근처의 스즈키 상점 방화 사건이 발생했다. 주변 치안이 악화되어 8월 14일 개최 예정이던 제4회 전국 중등 학교 우승 야구 대회는 연기되었다. 이후에도 치안 개선의 전망이 보이지 않아 8월 16일 대회 중지가 결정되었다.[1]6. 일제강점기 조선과의 관계
제1차 세계 대전 이후 일본에서는 산업 혁명의 영향으로 농업 인구가 도시로 이동하면서 쌀 생산량이 감소하고, 쌀 도매상들의 담합으로 쌀값이 폭등했다. 1918년 도야마현에서 어부의 아내들이 쌀값 인하를 요구하며 쌀가게를 습격한 것을 시작으로 일본 전역에서 쌀 소동이 발생했다.
6. 1. 산미증식계획
제1차 세계 대전에서 승전국이 된 일본은 산업 혁명으로 농업 인구가 줄고 쌀값이 폭등하는 문제가 발생했다. 이에 일본 정부는 1918년 도야마현에서 시작된 쌀 소동 등 식량 공급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1920년대 조선에서 산미증식계획을 실시했다. 산미증식계획은 일본으로의 쌀 수출량을 늘렸지만, 조선 내 식량 부족 문제를 심화시켜 일제강점기 조선 민중들은 만주에서 잡곡을 수입해 식량을 충당해야 했다.[1]7. 쌀 소동을 소재로 한 작품
- 사쿠라이 세이카 『쌀 소동 그림 두루마리』 (도쿠가와 미술관 소장, 1950년)
- 야마모토 사쿠베에 「야마의 쌀 소동」 『지쿠호 탄광 그림 두루마리』 (다가와시 소장)
- 도에이 영화 『관동 야쿠자』(1965년)
- 도호 영화 『일본 협화전』(1973년)
- 닛카츠 영화 『다다미 넉 장 반 미닫이 문 뒤편』(1973년)
- 도호 영화 『청춘의 문』(1975년)
- 비주얼 포크로어 다큐멘터리 『백 년의 창고』(2018년)[52]
- 래빗 하우스, 엘리펀트 하우스 제작, 이노우에 마오 주연 영화 『대미 소동』(2021년)[53]
- 요코야마 미쓰테루 작 『늑대의 별자리』(1975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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