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광 (명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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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한광은 명나라 만력제, 태창제, 천계제, 숭정제 시기의 문신이다. 1592년 진사에 급제하여 서길사, 소첨사, 동궁 강관 등을 역임하고 예부상서와 동각대학사를 거쳤다. 위충현의 횡포에 맞서다가 파직당하고 재산을 몰수당했으나, 숭정제 즉위 후 수보대학사로 복직하여 웅정필의 신원을 돕고 서광계 등과 교류했다. 이자성의 난 때 손자를 인질로 잡혀 굴욕을 겪은 후 사망했으며, 향년 80세였다.

한광 (명나라)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이름한광
직책내각대학사 수보
임기1624년 ~ 1624년
1628년 ~ 1630년
국가명나라
타이틀소사겸태자태사건극전대학사이부상서
출생일가정(嘉靖) 44년(1565)
사망일숭정(崇禎) 17년(1644)
학력만력(萬曆) 16년(1588) 무자과(戊子科) 거인(擧人)
만력(萬曆) 20년(1592) 임진과(壬辰科) 진사(進士)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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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생애

한광은 만력 20년(1592) 진사에 급제하며 관직 생활을 시작했다. 이후 서길사, 소첨사, 동궁 강관 등 여러 관직을 거쳐 만력 45년(1617) 예부우시랑에 올랐고, 태창 원년(1620)에는 예부상서 겸 동각대학사에 임명되었다. 그러나 천계 연간에 들어서 환관 위충현이 권력을 남용하자 그와 대립했다. 위충현의 죄를 탄핵한 양련을 지지하고 위충현의 회유를 거절하면서 정치적 탄압을 받게 되었다. 결국 천계 5년(1625) 위충현 세력의 탄핵으로 파직되었고, 뇌물 수수라는 무고를 당해 재산을 몰수당하는 등 큰 시련을 겪었다.

숭정제가 즉위한 후인 숭정 원년(1628) 12월, 한광은 다시 부름을 받아 수보대학사로 복직하였다. 그는 억울하게 죽은 웅정필의 누명을 벗겨주기 위해 노력했으며, 서광계, 탕약망 등 천주교 인사들과 교류하기도 했다. 또한 역참 제도를 축소하려는 유무의 주장에 반대하는 등 소신 있는 행보를 보였다. 하지만 숭정 3년(1630), 그의 문생이었던 원숭환모문룡을 처형한 사건에 연루되어 다시 파직되고 관직에서 물러났다.

말년인 숭정 17년(1644) 봄, 이자성이 이끄는 농민 반란군이 그의 고향인 포주(蒲州)를 함락했다. 이자성은 한광의 손자를 인질로 삼아 만남을 강요했고, 한광은 어쩔 수 없이 이에 응했다. 이 일로 인해 크게 분개한 한광은 얼마 지나지 않아 향년 80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2.1. 초기 관직 생활

만력 20년(1592) 임진과(壬辰科) 진사에 급제하였다. 이후 서길사, 소첨사, 동궁 강관을 역임하였다. 만력 45년(1617)에는 예부우시랑에 임명되었다.

2.2. 위충현과의 갈등

태창(泰昌) 원년(1620)에 예부상서겸동각대학사(禮部尙書兼東閣大學士)가 되었다. 천계(天啓) 4년(1624), 환관 위충현(魏忠賢)이 왕문언(汪文言)을 빌미로 옥사(獄事)를 일으키자, 양련(楊漣)은 이에 분개하여 위충현의 24가지 큰 죄를 열거하며 탄핵했다. 권력을 휘두르던 위충현은 크게 놀라 한광에게 도움을 요청했지만, 한광은 이를 단호히 거절했다.

천계 5년(1625) 7월 26일, 양련과 좌광두(左光斗)는 같은 날 옥중에서 사망했다. 같은 해, 위충현의 세력인 위당(魏黨) 소속 이로생(李魯生)이 한광을 탄핵하자 결국 파직되었다. 이후 위충현 세력은 한광이 은 2천 냥의 뇌물을 받았다는 거짓 죄목을 씌워 그의 재산을 모두 빼앗았다. 이로 인해 한광은 조상의 묘지 근처에서 어려운 생활을 할 수밖에 없었다.

2.3. 숭정제 시기

숭정제가 즉위한 숭정 원년(1628) 12월, 한광은 다시 부름을 받아 수보대학사에 임명되었다. 그는 억울하게 죽은 웅정필의 누명을 벗겨주기 위해 노력했다. 또한, 당시 중국에 들어와 있던 천주교 인사 서광계, 탕약망 등과 교류하였으며, 그의 집안에도 영세를 받은 천주교인이 있었다. 병과(兵科) 급사중(給事中) 유무(劉懋)가 역참 제도를 축소하려 하자 이를 반대하기도 했다.

그러나 숭정 3년(1630), 그의 문하생이었던 원숭환모문룡을 처형한 사건에 연루되어 파직되었다. 결국 같은 해 정월 15일, 상소를 올려 관직에서 물러날 것을 청했다. 그 후 고향에서 지내던 중, 숭정 17년(1644) 봄 이자성이 이끄는 농민 반란군이 포주(蒲州)를 점령했다. 이자성은 한광의 손자를 인질로 삼아 그를 협박하여 만남을 강요했고, 한광은 마지못해 응할 수밖에 없었다. 이 일로 인해 크게 분개한 한광은 얼마 지나지 않아 세상을 떠났으며, 이때 그의 나이는 80세였다.

2.4. 사망

숭정 17년(1644) 봄, 이자성(李自成)이 포주(蒲州)를 함락한 후 한광의 손자를 붙잡아 인질로 삼고 접견을 강요했다. 한광은 어쩔 수 없이 이자성을 만났으나, 이 일로 인해 크게 분개하여 얼마 지나지 않아 세상을 떠났다. 향년 80세였다.

3. 가족

증조부는 한홍(韓霐)으로 의관(義官)을 지냈다. 조부 한파(韓玻)는 사후 공과우급사중(工科右給事中)에 추증되었다. 부친 한즙(韓楫)은 가정 44년(1565)에 진사가 되었고, 이과도급사중(吏科都給事中)의 관직에 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