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광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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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서광계는 중국 명나라 말기의 학자이자 관료로, 본래 이름은 서광계이며, 자는 자선, 호는 선호이다. 그는 상하이 출신으로, 마테오 리치와 교류하며 서양 학문을 받아들여 《기하원본》을 번역하고, 천주교에 귀의했다. 또한, 그는 농업, 천문학, 군사 등 다양한 분야에서 업적을 남겼으며, 특히 농업서인 《농정전서》를 편찬하여 중국 농학 발전에 기여했다. 서광계는 숭정제의 명으로 역법 개혁을 주도했으며, '부국강병'의 개념을 제시하기도 했다. 그의 저서와 학문은 조선의 실학자들에게도 영향을 미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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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명나라의 로마 가톨릭교도 - 이지조
이지조는 명나라 관료이자 학자로서, 마테오 리치와의 교류를 통해 서양 과학 서적을 번역 및 편찬하고 『천학초함』과 같은 총서를 편찬하여 서양 과학기술과 사상을 중국에 전파하는 데 기여했으며, 그의 업적은 일본에도 영향을 미쳤다. - 명나라의 로마 가톨릭교도 - 정지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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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광계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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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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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칭 접두사 | 하느님의 종 |
본명 | 서광계 |
로마자 표기 | Xú Guāngqǐ |
자 | 자선(子先) |
호 | 현호(玄扈) |
시호 | 문정(文定) |
세례명 | 바오로(Paulus) |
국적 | 중국인 |
출생일 | 1562년 4월 24일 |
출생지 | 명나라 남직례 송강부 상하이현 |
사망일 | 1633년 11월 8일 |
사망지 | 명나라 북직례 순천부 베이징 |
묘소 위치 | 중국 상하이시 쉬후이구 쉬자후이 광치공원 |
종교 | 로마 가톨릭교회 |
학력 | |
학위 | 진사 (1604년) |
경력 | |
직업 | 예부상서, 대학사, 농업학자, 천문학자, 수학자, 작가 |
주요 업적 | 중국 가톨릭교회의 세 기둥 유클리드 『기하학 원본』 중국어 번역 숭정력 농정전서 |
가족 | |
배우자 | 오씨 |
자녀 | 서기 (徐驥) |
부모 | 서사성 (徐思誠), 아버지 |
친척 | 간디다 쉬 (손녀) (쉬준) (쉬마허) |
관직 | |
관직 | 예부 우시랑 |
임기 시작 | 1629년 |
임기 종료 | 1630년 |
이전 | 마지기 |
이후 | 이순신 |
관직 2 | 문연각대학사 |
임기 시작 2 | 1632년 |
임기 종료 2 | 1633년 |
수석 대학사 | 주정유 문체인 |
2. 이름
서광계(徐光啓)는 서씨의 중국 이름을 중국어 발음으로 표기한 병음이다. 웨이드-자일스 표기법으로는 '''Hsü Kuang-ch‘i'''로 표기된다. 그의 자는 '''자선(子先)'''이며, 호는 '''선호(宣湖)'''이다. 예수회 기록에는 그의 중국 이름으로 '''"Siù Hsven Hú"'''가 사용되었다.[6]
서광계는 상하이 칭푸 출신으로, 박학다재하여 학문에 전념하였다. 1597년 향시에 수석으로 합격하였고, 1599년 난징에서 마테오 리치의 가르침을 받았다. 1603년 세례를 받고 가톨릭 신자가 되었다. 이후 진사에 급제하여 한림원 서길사가 되었고, 리치와 교류하며 서양 학문 지식을 넓혔다. 천문학, 지리학, 물리학, 수리학, 역법 등에 관한 리치의 구술을 번역, 필사, 간행하였는데, 특히 『유클리드 원론』을 번역한 『기하원본』 6권이 가장 먼저 완성되었다. 또한 디에고 데 판토하의 『칠극』 7권 저술을 도왔다.[1]
개종 당시 그는 세례명으로 바오로 (Paulusla)를 채택했다. 중국어로는 이를 음역하여 일종의 자(字)로 사용했는데 (즉, 서보로(徐保羅)), 예수회는 그를 때때로 '''"Siù Pao Lò"'''[6] 또는 '''Ciù Paulus'''라고 불렀다.[7] 하지만 더 자주 그들은 그를 "바오로 박사" (Doctor Paulusla;[13][6] Doutor Paulopt), "우리 바오로" (noster Paulusla), 또는 "바오로 시우"[18] 또는 "시우"[7][6][8] 라고 칭했다.
3. 생애
1610년 리치가 사망한 후, 1623년 예부우시랑에 임명되었으나 위충현파의 모함으로 물러났다. 1628년 다시 예부좌시랑에 임명되고 예부상서로 승진하였다. 당시 숭정제가 일식 관측 오류로 천문대 관리를 벌하려 하자, 서광계는 곽수경 역법의 잘못을 지적하며 역법 수정을 주장했다. 황제는 이를 받아들여 니콜로 롱고발디와 요한 슈렉에게 역법 계산을, 서광계에게 감독을 명하였다. 1632년 많은 역서를 헌상하고, 이듬해 5월 동각대학사를 겸하여 추기경에 참여하였다. 태자태보의 지위를 더하고 문연각에 참여하였다. 경제에 재능이 풍부하여 세상을 위해 사용하고자 했으나, 주연유·온체인 등의 전횡으로 인해 뜻을 펼치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다.[1]
3. 1. 초기 생애
서광계는 1562년 4월 24일 명나라 송강부 상하이(지금의 상하이시)에서 태어났다.[9] 당시 상하이는 상하이 유원 주변 구시가지(上海老城)에 위치한 작은 성곽 도시였다.[10] 그의 가족은 도시 남쪽 끝에 있는 태청(太清) 지역에 거주했다. 서광계 가문은 과거에 합격하여 상하이 지역의 사대부가 된 가문은 아니었다.[11] 그의 아버지 서사성(徐思誠)은 상속 재산을 잃고 농업과 소규모 무역으로 생계를 유지했다.[11]
서광계가 6세가 되었을 때, 가족은 그를 지역 학교에 보냈다. 그는 급우들에게 "스스로를 확립하고 도(道)를 따르는 것이어야 합니다. 국가와 백성에게 질서를 가져오고, 정통을 존중하고 이단을 드러내십시오."라고 충고했다고 한다.[10] 1569년부터 1573년까지, 가족은 그를 룽화사(龍華寺)의 불교 사찰 학교에 보냈다.[9]
1592년 5월 8일, 어머니가 사망하자 그는 상복 기간을 가졌다.[12]
3. 2. 관직 생활과 학문 연구
1596년 광시에서 현감 조풍유를 도왔다.[12] 1597년 봄, 베이징에서 향시에 합격하여 주인(舉人)이 되었다.[12] 1600년 3월 또는 4월에 난징에서 마테오 리치를 처음 만났다.[12] 1603년 세례를 받고 가톨릭으로 개종했다.[12] 그는 마테오 리치와 함께 유클리드의 《기하원본》, 중국 유교 경전 등을 번역했다.
1607년부터 1610년까지 관직에서 물러나 서양식 관개 방법, 고구마, 목화 재배 등을 실험했다. 1613년부터 1620년까지 천진에서 군사촌 조직을 도왔다.
1623년 예부우시랑(禮部右侍郎)이 되었으나 책모로 물러났다. 1627년 예부좌시랑(禮部左侍郎)으로 다시 기용되었다. 1630년 예부상서(禮部尙書)로 발탁되었으며, 1632년 예부상서 겸 동각대학사(東閣大學士)에 올랐다. 1629년에는 숭정제에게 상소를 올려 역법 개혁의 필요성을 주장했고, 1632년에는 많은 역서를 편찬하였다.
3. 3. 사망
1633년, 병으로 사망하였다. 요한 아담 샬 폰 벨이 그의 시신을 상하이로 운구했다.[1] 주연유·온체인 등의 전횡으로 인해 자신의 경세제민의 재능을 펼치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다.[1]
4. 천주교와의 관계
1600년 마테오 리치를 만나 서양 학문과 천주교를 접했다.[6] 1603년 세례를 받고 천주교 신자가 되었으며, 세례명은 바오로였다.[6] 예수회 선교사들과 협력하여 포교서와 서양 역서 등을 번역했는데, 디에고 데 판토하를 도와 로마 가톨릭 교의 해설서 《칠극진훈(七克眞訓)》을 저술하였고, 서양의 천문학 책을 번역하여 《숭정 역서(崇禎曆書)》를 만들기도 하였다.[20][21][22][23] 상하이에 교회, 병원, 고아원, 학교 등을 설립하는 데 기여했다. 서광계는 천주교 교리가 유교를 보완한다고 생각했다.
5. 학문적 업적
상하이 칭푸 출신인 서광계는 박학다재하여 학문에 전념하였으며, 1597년 향시에 수석으로 합격하였다. 1599년 마테오 리치의 이름을 듣고 난징으로 가서 가르침을 받았으며, 1603년 세례를 받고 기독교도가 되었다. 진사에 급제하여 한림원 서길사가 된 후 서양 학문의 지식도 넓혔다. 천문학, 지리학, 물리학, 수리학, 역법 등에 관한 리치의 구술을 번역, 필사, 간행하였다.
1610년 리치가 사망하고, 1623년 예부우시랑에 임명되었으나, 위충현파에게 탄핵되어 야인으로 내려갔다. 1628년 다시 불려 좌시랑에 임명되고, 상서로 승진하였다. 1632년에는 동각대학사를 겸하여 추기경에 참여하였고, 태자태보의 지위와 문연각이 열렸다. 경제에 재능이 있었으나, 주연유·온체인 등의 전횡으로 인해 좌절되었다.
서광계는 마테오 리치와 함께 유클리드의 《기하원본》을 번역하고, 디에고 데 판토하의 『칠극』 저술을 돕는 등 서양 과학을 수입하는 데 많은 공헌을 했다. 한편으로는 열렬한 가톨릭 신자로서 리치와 니콜로 롱고발디의 전도 사업을 지원했으며, 가톨릭 교리가 유교를 보완한다고 생각하여 박해를 받지 않고 고위에 오를 수 있었다.
일본에 큰 영향을 준 농업 서적 『농정전서』를 저술하였다.
5. 1. 수학
1607년, 마테오 리치와 함께 유클리드의 《기하원본》 일부를 중국어로 번역하였다. 일부 중국 학자들은 서광계가 "중국의 계몽을 시작했다"고 평가한다.[20][21][22][23]5. 2. 천문학
1629년 서광계와 마테오 리치의 추종자들이 일식을 공개적으로 예측한 후, 서광계는 황제에 의해 중국 역법 개혁을 위한 노력의 지도자로 임명되었다. 유럽과 극동의 과학자들 간의 최초의 주요 협력을 구성한 이 개혁은 그의 사후에 완료되었고 숭정력(崇禎曆)으로 알려지게 되었다.[16][17] 이는 유클리드의 원론과 니콜라우스 코페르니쿠스, 요하네스 케플러, 갈릴레오 갈릴레이, 티코 브라헤의 업적을 포함하여 유럽의 수학과 천문학의 개념과 발전을 중국에 체계적으로 도입한 것으로 유명하며, 티코 브라헤의 우주 체계가 주요 이론적 기반으로 사용되었다.[16][17]당시 숭정제가 일식 관측을 잘못했다 하여 천문대 관리를 벌하려고 하자, 서광계는 "이는 곽수경의 역법에 의한 잘못이다. 원나라 시대에도 이미 일식이 있어야 할 때 일식이 없었던 적이 있었다. 오늘 천문대의 관측이 잘못되었다고 해서 의심할 만한 일이 아니다. 역법을 수정해야 한다."라고 말했다. 황제는 이 말을 따라 선교사 니콜로 롱고발디와 요한 슈렉을 불러 역법을 계산하게 하고, 서광계에게 감독을 명하였다.
예수회 선교사 아담 샬의 협력으로 간행한 역서 『숭정역서』에는 중국에 사실상 처음으로 삼각함수법(팔각법)을 도입한 Giacomo Rho(羅雅谷)의 1631년 저서 『측량전의』(測量全義)[20]와 요한 슈렉의 『대측』(大測)과 『할원팔전표』(割圓八銭表)가 수록되었다.[21][22][23]
5. 3. 농학
農政全書중국어는 서광계가 편찬한 책으로, 중국 농학 발전에 큰 영향을 끼쳤다. 이 책은 농본(農本), 전제(田制), 농사(農事), 수리(水利), 농기(農器), 수예(樹藝), 잠상(蠶桑) 등 12개 분야를 다루고 있다.[25] 특히, 고구마 재배법을 연구하고 구황작물로서의 가치를 강조했다.[27][28][29] 고구마를 홍저(紅著), 첨저(甛著), 주저(朱著), 번저(番著) 등으로 표기하며, 백성들에게 재배를 장려하였다.서광계는 왕진, 가사협 등의 전통을 계승하여 농업 논문인 農政全書중국어를 저술하였다.[25] 그는 혼란스러운 시대에 살면서도 애국심을 가지고 중국 농민들을 돕고자 하였다. 주요 관심사는 관개, 비료, 기근 구제, 경제 작물 등이었다. 약 70만 자의 한자로 이루어진 방대한 저술로, 가사협과 왕진의 저술보다 7배나 더 길다. 1639년 진자룡에 의해 출판되었다.
農政全書중국어에서 다루는 주제는 다음과 같다.
- 농업의 기본 (Nong Ben): 농업 장려의 중요성에 대한 고전에서 인용
- 토지 제도 (Tian Zhi): 토지 분배, 경작지 관리
- 농업 작업 (Nong Shi): 개간, 경작; 정착 계획에 대한 자세한 설명도 포함
- 수리 (Shui Li): 다양한 관개 방법, 관개 장비의 종류, 그리고 마지막 두 장은 새로운 서양식 관개 장비에 전념
- 농기구 그림 설명 (Nong Chi Tu Pu): 주로 1313년 왕진의 책을 기반으로 함
- 원예 (Shi Yi): 채소와 과일
- 양잠 (Can Sang): 비단 생산
- 기타 섬유 작물 (Can Sang Guang Lei): 목화, 삼 등
- 임업 (Chong Chi): 산림 보존
- 축산 (Mu Yang)
- 요리법 (Zhi Zao)
- 기근 방지 (Huang Zheng): 행정적 조치, 기근 식물
農政全書중국어는 조선시대의 농서 간행에도 많은 영향을 주었으며, 특히 박지원이 過農小抄중국어를 지을 때 많이 인용하였다.[26]
5. 4. 군사학
서광계는 군사 문제에 대한 비판에 대응하여 《서씨의 아마추어 관찰(徐氏amateur observations)》이라는 군사 기술 및 전략에 관한 책을 저술했다.[15] 그는 순자와 관자를 자주 인용했고, 법가의 방식에 따라 상벌을 활용했다.[15]서광계는 부국강병(富國强兵)이라는 개념을 제시했는데, 이는 19세기 말 일본이 부국강병(富國强兵)이라는 이름으로 근대화를 추진하는 과정에서 채택되었다.
6. 조선에 끼친 영향
서광계의 저서 다수는 조선에 전해져 실학자들에게 많은 영향을 주었다.
6. 1. 조선감호론
1619년 사르후 전투에서 명-조선 연합군이 패배한 후, 명나라 한림원검토였던 서광계는 요동 방어책으로 '조선감호론'을 제기했다. 이는 조선이 후금의 위협에 굴복할 것을 우려하여, 주변 정세를 살펴 위기 발생 시 조선을 돕겠다는 의미였다.[24]서광계의 감호론은 명나라 조정 일부의 동조를 얻었으나, 실제 시행되지는 못했다. 명나라 내부 문제와 더불어, 조선이 감호론을 거부할 경우 명나라가 대응할 방법이 없었기 때문이다.[24]
한편, 진주사로 북경에 다녀온 이정구는 서광계의 감호론을 왜곡하여 조정에 보고했다. 그는 서광계가 '감(監)은 그 정형(政刑, 정치와 형벌)을 감독하는 것'이라고 설명했다며, 조선의 정치 및 사법 전반을 감독한다는 의미로 확대 해석했다. 이는 광해군의 외교 노선을 비판하기 위한 의도였다.[24]
사르후 전투 이후 후금은 조선에 명과의 관계를 끊고 연합할 것을 제의했다. 강홍립은 포로를 통해 광해군에게 후금과 화친할 것을 청했다. 광해군은 후금에 답신을 보내려 했으나, 비변사, 승정원, 사간원, 사헌부 등은 반대했다. 서인의 일원인 이정구는 서광계의 조선감호론을 왜곡하여 광해군의 외교 정책을 비판하려 했으며, 대북 계열조차도 이에 동조했다.[24]
7. 유산
서광계의 묘는 상하이시 광기공원의 중심부에 있으며, 서가회성당 바로 남쪽에 있다.
1983년 서거 350주년 기념행사는 상하이에서 열린 기념식과 ''베이징 리뷰''의 찬사 기사를 통해 대대적으로 기념되었다. 이러한 기념 행사에 대한 중국 공산당의 적극적인 지지는 덩샤오핑의 개방 및 중국 현대화 정책인 개혁 개방 정책을 지지한다는 신호로 해석되었다.[14] 그러나 서광계의 삶과 업적에 대한 대부분의 중국 측 논의는 과학, 기술, 정치적 진보에 대한 그의 열망과 그것이 중국 발전에 미친 영향에 초점을 맞추는 반면, 서구 측 논의는 거의 예외 없이 그의 기독교 개종과 정체성에 큰 중요성을 부여한다.[14]
서광계의 외동딸은 서간디다(1607~1680)였다. 독실한 기독교 신자였던 그녀는 청나라 초기 강남 지역에서 중요한 기독교 후원자로 인정받았다. 그녀와 긴밀히 협력했던 예수회 선교사 필립 꾸플레는 라틴어로 그녀의 전기를 저술했고, 이는 1688년 프랑스어로 ''중국 기독교 여성 칸디드 히우의 역사''라는 제목으로 출판되었다.[18]
8. 저서
는 마테오 리치와 함께 유클리드의 기하학을 번역하여 《기하원본(幾何原本)》(전6권)을 간행하였다.[20][21][22][23]
디에고 데 판토하를 도와 로마 가톨릭 교의 해설서 《칠극진훈(七克眞訓)》을 저술하였으며, 서양의 천문학 책을 번역하여 《숭정역서(崇禎曆書)》를 만들었다. 《농정전서(農政全書)》(전60권)를 만들어 중국에서 예전부터 전해오는 농학자의 주장을 모두 분류하는 등 중국 문화에 획기적인 공헌을 하였다.
아담 샬의 협력으로 간행한 역서 『숭정역서』에는 중국에 사실상 처음으로 삼각함수법(팔각법)을 도입한 Giacomo Rho(羅雅谷)의 1631년 저서 『측량전의』(測量全義)와 요한 슈렉의 『대측』(大測)과 『할원팔전표』(割圓八銭表)가 수록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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