맨위로가기

호세 앙헬 베라온도

"오늘의AI위키"는 AI 기술로 일관성 있고 체계적인 최신 지식을 제공하는 혁신 플랫폼입니다.
"오늘의AI위키"의 AI를 통해 더욱 풍부하고 폭넓은 지식 경험을 누리세요.

1. 개요

호세 앙헬 베라온도는 스페인의 축구 선수, 감독, 심판, 언론인, 행정가였다. 잉글랜드 유학 시절 축구를 시작하여 브렌트포드에서 선수 생활을 했으며, 스페인으로 돌아와 레알 마드리드에서 선수 겸 주장을 맡아 코파 델 레이 4회 우승을 이끌었다. 이후 레알 소시에다드를 창단하여 선수, 주장, 코치로 활동했으며, 스페인 국가대표팀 코치와 감독, 레알 마드리드 감독을 역임했다. 심판으로 활동하며 판정 논란에 휩싸이기도 했으며, 스포츠 저널리즘에도 종사했다.

더 읽어볼만한 페이지

  • 산세바스티안 출신 - 피오 바로하
    피오 바로하는 스페인 소설가로, 의학 박사 학위를 받았으며 아나키즘과 니체의 영향을 받아 다양한 작품을 썼고, 대표작으로 『지식의 나무』가 있으며 『삶의 투쟁』 3부작으로 국제적인 명성을 얻었다.
  • 산세바스티안 출신 - 미켈 아르테타
    미켈 아르테타는 스페인 출신 축구 선수로, 선수 시절 미드필더로 활약하다 은퇴 후 맨체스터 시티 FC 수석 코치를 거쳐 2019년부터 아스널 FC 감독을 맡아 FA컵과 FA 커뮤니티 실드 우승을 이끌었다.
호세 앙헬 베라온도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호세 앙헬 베라온도
1905년의 베라온도
본명José Ángel Berraondo Insausti (호세 앙헬 베라온도 인사우스티)
출생일1878년 11월 4일
출생지스페인 산세바스티안
사망일1950년 4월 11일
사망지스페인 산세바스티안
포지션수비수 (은퇴)
선수 경력
클럽브렌트포드
레알 마드리드 (1904–1909)
레알 소시에다드 (1909–1913)
감독 경력
국가대표팀스페인 (비공식, 1913)
스페인 (1921, 1928)
클럽레알 소시에다드 (1916–1923)
레알 마드리드 (1927–1929)

2. 선수 경력

베라온도는 잉글랜드 유학 시절 축구를 처음 접하고 브렌트포드에서 뛰었다. 26세에 스페인으로 돌아와 마드리드 FC(현재의 레알 마드리드)에 입단, 1905년에 주장이 되어 선수 겸 코치 역할을 했다.[4] 그의 지휘 아래 마드리드는 1905년부터 1908년까지 4번의 코파 델 레이 우승과 지역 선수권 대회 우승을 차지했다.[6] 잉글랜드에서 얻은 축구 지식을 바탕으로 팀의 초창기 성공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4]

1909년 고향으로 돌아가 클루브 시클리스타에서 뛰며 1909년 코파 델 레이 우승에 기여했다.[7] 이후 레알 소시에다드를 창단, 초대 부회장을 맡았다. 1909년부터 1913년까지 레알 소시에다드에서 선수 겸 주장 겸 코치로 활동하며 1910 코파 델 레이(UECF)에 참가, 전 소속팀 마드리드를 꺾었으나 결승에서 아틀레틱 클럽에 패했다.[10] 1913 코파 델 레이 결승전에서 FC 바르셀로나에 패하고,[11] 아토차 스타디움 개장 경기에 참여한 후,[12] 35세에 은퇴했다. 베라온도는 호세 베론도와 혼동되어 마드리드 FC와 FC 바르셀로나에서 모두 뛴 선수라는 오해가 있었다.[13][14]

2. 1. 잉글랜드 유학 시절

베라온도는 잉글랜드 유학 시절 축구를 처음 접했다. 그는 이 시기에 브렌트포드 1군 팀에서 뛰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4] 26세에 베라온도는 스페인으로 돌아와 마드리드에 정착했고, 1904년 축구에 대한 열정을 이어가기로 결심하고 도시의 주요 클럽인 마드리드 FC(현재의 레알 마드리드)에 입단했다.

2. 2. 레알 마드리드

베라온도는 잉글랜드 유학 시절 축구를 처음 접했다. 그는 이 시기에 브렌트포드의 1군 팀에서 뛰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26세에 스페인으로 돌아와 마드리드에 정착했고, 1904년에 마드리드 FC(현재의 레알 마드리드)에 입단했다. 야르자, 프라스트, 파라게스, 아르만도 지랄트와 같은 선수들이 있었음에도, 베라온도는 팀에 합류한 지 1년 만인 1905년에 마드리드 FC의 주장이 되었다. 당시 주장은 전술 지시와 선수 구성을 해야 했고, 스페인 축구에는 아직 전문 코치가 없었기 때문에 선수 겸 코치 역할을 했다.[4] 그의 주장 하에 마드리드는 1905년부터 1908년까지 4번의 코파 델 레이 우승을 차지했고, 지역 선수권 대회에서도 여러 차례 우승했다.[6] 베라온도는 잉글랜드에서 배운 축구 지식을 동료들에게 전달했기 때문에 레알 마드리드 역사상 최초의 위대한 팀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다.[4]

2. 3. 레알 소시에다드

베라온도는 1909년 고향으로 돌아가 클루브 시클리스타 데 산 세바스티안에서 뛰었다. 이 팀은 1909년 코파 델 레이에서 우승했는데, 이는 마드리드를 제외하고 5년 만에 처음으로 다른 팀이 우승한 것이었다.[7] 몇 달 후, 베라온도는 1909년 9월 7일 레알 소시에다드를 창단했으며, 초대 부회장으로 선출되었다.

1909년부터 1913년까지 4년 동안 레알 소시에다드에서 선수 겸 주장 겸 코치로 활동하며 잉글랜드에서 얻은 지식을 활용하여 팀을 강화했다. 소시에다드는 1910 코파 델 레이(UECF)에 바스코니아 스포팅 클럽의 후원으로 참가했다. 베라온도는 레이싱 클럽 데 이룬과의 플레이오프 두 경기에서 모두 승리하며 팀의 토너먼트 진출에 기여했다.[8][9] 이 토너먼트에서 전 소속팀인 마드리드를 2-0으로 꺾었지만, 결승전에서 아틀레틱 클럽에 0-1로 패했다.[10]

1913 코파 델 레이에서 소시에다드는 FC 바르셀로나와 결승전에서 맞붙었다. 베라온도는 결승전의 첫 두 경기에서 수비를 맡았지만, 두 경기 모두 무승부로 끝났다. 세 번째 경기에서 베라온도는 교체되었고, 바르셀로나가 2-1로 승리했다.[11] 1913년 10월 5일, 베라온도는 아토차 스타디움 개장 경기에 참여하여 3-3 무승부를 기록했다.[12] 같은 해, 35세의 베라온도는 선수 은퇴를 결정했다.

베라온도는 호세 베론도와 종종 혼동되었는데, 이로 인해 베라온도가 마드리드 FC와 FC 바르셀로나에서 모두 뛴 최초의 선수 중 한 명이라는 오해가 있었다.[13][14]

3. 행정가 경력

마드리드 FC에서 아돌포 멜렌데스 장군(1908–10) 재임 기간 동안 이사회의 직책을 맡았다. 선수이자 팀의 주장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부회장으로 선출되었다. 군인이었고 멜리야 전쟁에 참전해야 했던 멜렌데스의 부재 기간 동안 베라온도는 몇 달 동안 마드리드 FC의 임시 회장직을 수행했다.[4] 1909년 산 세바스티안으로 이주하면서 이 직무를 사임해야 했고, 이후 클럽 부회장직에서 물러났다. 그는 이 직책을 매우 명예롭게 수행했다. 같은 해 레알 소시에다드 창립에 참여하여 초대 이사회 멤버였으며, 팀의 선수이자 주장을 맡으면서 몇 년 동안 부회장직도 수행했다.

베라온도는 1913년 스페인 왕립 축구 협회와 기푸스코아 축구 협회 창립에 참여했으며, 이 협회의 조직도에서 다양한 직책을 역임했다. 1923년 기푸스코아 축구 협회 회장으로 제안되었지만 그 직책을 수락하지 않았다.

4. 심판 경력

베라온도는 1911 코파 델 레이 예선 라운드에서 빌바오 FC와 ''아카데미아 데 아르틸레리아''의 경기를 심판하면서 현역 선수로 뛰고 있었다.[2] 5년 후, 1916 코파 델 레이 준결승전에서 마드리드 CF와 FC 바르셀로나의 경기를 심판했는데, 이 대회 역사상 최초의 엘 클라시코였다.[15]

양 팀이 각각 홈 경기를 승리한 후 열린 재경기에서 베라온도는 자신의 옛 소속팀에게 유리한 몇 가지 논란이 많은 결정을 내렸다. 예를 들어, 바르사의 파울리노 알칸타라가 득점한 골을 무효로 처리했고, 마드리드에게 세 개의 페널티킥을 부여했다. 처음 두 번은 바르사의 골키퍼 루이스 브루가 막았지만, 세 번째 페널티킥은 산티아고 베르나베우가 118분에 성공시켜 6-6 무승부가 되었고, 결국 다시 재경기가 치러지게 되었다. 베라온도가 다시 심판을 맡은 이 경기에서도 2-2 동점 상황에서 종료 직전 페널티킥을 주는 등 몇 가지 의문스러운 결정을 내렸지만, 브루가 그것마저 막아 연장전으로 이어졌다. 연장전에서 소테로 아랑구렌이 두 골을 넣었지만, 바르셀로나 선수들은 마드리드 공격수들이 두 번째 골에서 브루를 붙잡았다고 항의했다. 그러나 베라온도는 이를 무시했고, 바르셀로나는 항의하며 기권했다.[15] 경기 종료 후, 관중들은 베라온도의 판정에 강력하게 항의했고, 1916년 결승전에서 마드리드와 아틀레틱 빌바오의 경기가 바르셀로나에서 열렸을 때, 관중석의 일부 현수막에는 베라온드의 처벌을 요구하는 내용이 적혀 있었다.[15]

베라온도는 1921 코파 델 레이 결승전에서 아틀레틱 클럽과 아틀레틱 마드리드의 경기도 심판했는데, 이 경기는 같은 클럽에서 시작했던 '두 아틀레틱' 간의 첫 번째 만남이었으며, 빌바오 팀이 4-1로 크게 이겼다.[2][16]

5. 기자 경력

베라온도는 스포츠 저널리즘에도 종사하여, 《엘 파이스 바스코(El País Vasco)》의 스포츠 편집자와 《라 노티시아(La Noticia)》 신문의 편집자로 일했다. 마드리드 FC에 있으면서, 《에랄도 데 마드리드(Heraldo de Madrid)》에 각 선수 포지션별 자질, 훈련, 결점, 장점에 대한 흥미로운 연대기를 실었다. 코너킥 방어법, 스피드 테스트, 골키퍼를 위한 특별 훈련 등이 여기에 포함되었다.[4]

6. 감독 경력

베라온도는 레알 소시에다드, 스페인 축구 국가대표팀, 레알 마드리드의 감독을 역임했다. 그는 레알 소시에다드의 초대 감독이었으며, 선수 은퇴 후에도 감독직을 수행했다.[17] 1913년에는 스페인 최초의 비공식 국제 경기를 이끌었고, 1920년 하계 올림픽에서는 스페인 대표팀 코치로 임명되었으나, 실제로는 파코 브루가 팀을 이끌었다.[20] 이후 3인 위원회에 참여하여 대표팀을 감독했으나, 선수 기용 문제로 사임했다.[4] 1924년 파리 올림픽 실패 후 다시 코치로 임명되었지만, 언론인 직무 때문에 수락하지 않았다. 1927년 다시 국가대표팀 감독으로 임명되어 1928년 하계 올림픽을 준비했으며, 동시에 레알 마드리드 감독직도 수행했다.[22] 그러나 훈련 부족과 아마추어 선수 선발 문제로 올림픽에서 부진한 성적을 거두고 사임했다.[4] 레알 마드리드에서도 성적이 좋지 않아 1928년에 감독직에서 물러났다.[22]

6. 1. 레알 소시에다드

베라온도는 레알 소시에다드 역사상 최초의 감독이었다. 레알 소시에다드 웹사이트에 따르면, 베라온도는 1909년부터 1922-23 시즌까지 레알 소시에다드의 감독을 맡았으며, 이때 레알 소시에다드는 구단 역사상 최초의 프로 감독인 헝가리 출신 리포 헤르츠카를 영입했다.[17] 베라온도는 1909년 산 세바스티안 팀에 합류하여 1913년 은퇴할 때까지 레알 소시에다드의 주장이었다. 축구 선수 은퇴 후에도 감독으로서 소시에다드와 계속 관계를 맺은 것으로 보이는데, 1917년 보도 자료에서 "베라온도가 팀 감독직에서 사임한다"는 내용이 언급되었지만, 구단에 의해 받아들여지지 않았다.[17] 따라서 당시에는 공식적인 직함이 없었지만, 주장으로서, 그리고 이후에 이러한 역할을 수행했다고 볼 수 있다.[17]

6. 2. 스페인 국가대표팀

베라온도는 1913년 5월 25일 온다리비아의 아무테 스타디움에서 열린 스페인 최초의 비공식 국제 경기를 주도했으며, 스페인 대표팀의 코치 역할을 수행했고 심지어 직접 심판까지 맡았다. 그가 선발한 선수단은 레알 소시에다드 선수들(11명 중 5명)로 주로 구성되었다. 그날, 스페인은 프랑스 대표팀과 경기를 치렀으며, 경기 결과는 후안 아르수아가의 막판 동점골로 1-1 무승부로 끝났다.[18]

1920년 7월, 베라온도는 1920년 하계 올림픽에서 국제 데뷔를 앞둔 스페인 국가대표팀의 코치로 임명되었다.[19] 하지만 파코 브루가 벨기에에서 스페인 팀을 이끌었고, 스페인 국가대표팀의 첫 번째 코치로 역사에 기록되었다.[20]

1년 후, 스페인 팀을 담당할 선발 위원회가 구성되었는데, 베라온도, 훌리안 루에테, 마누엘 카스트로로 구성된 3인 위원회였다. 이 위원회가 감독한 첫 경기는 1921년 10월 9일 벨기에와의 친선 경기였으며, 올림픽 이후 스페인의 첫 경기이자 자국에서의 첫 경기였다.[21] 스페인이 2-0으로 승리한 경기 후, 베라온도는 1921년 12월 18일 스페인이 포르투갈을 상대로 한 두 번째 자국 경기를 앞두고 특정 선수 기용에 대한 압력을 수용하기를 거부하여 사임했다.[4]

1924년 파리 올림픽에서 스페인이 실패한 후, 베라온도는 코치로 임명되었지만, 산세바스티안의 신문 ''엘 파이스 바스코''의 스포츠 편집자 직무 때문에 이 직책을 수락하지 않았다.

1927년 7월, 그는 다시 국가대표팀 감독으로 임명되었고, 1928년 하계 올림픽을 위한 준비를 시작하기로 결정했다. 그러나 그는 레알 마드리드 감독직 제안도 받았고, 1927-28 시즌 동안 두 직책을 모두 수행했다.[22] 베라온도는 스페인 대표팀과 함께 훈련 계획을 수행할 수 없는 현실에 직면했다. 1928년 상반기에 포르투갈, 이탈리아를 상대로 두 번의 친선 경기를 치렀는데, 두 경기 모두 무승부였다.[23] 1928년 올림픽 직전에 사임서를 제출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올림픽 경기는 아마추어 경기였고, 프로 선수들은 설 자리가 없었다. 다른 국가 대표팀은 비밀리에 프로 선수일지라도 최고의 선수들을 출전시켰다.[4] 이러한 사실은 당시 스페인 축구의 주요 인물인 골키퍼 리카르도 사모라, 호세 사미티에르, 비센테 피에라 등이 불참하는 결과를 낳았다. 베라온도의 올림픽 팀은 멕시코를 7-1로 꺾으며 시작했고, 이탈리아를 상대로 1-1로 비겼다. 그러나 3일 후 재경기에서 이탈리아는 7-1로 스페인을 탈락시켰다.[24][4] 베라온도는 호세 마리아 하우레기를 출전시킨 결정에 대한 비판이 많았다. 올림픽의 실패 이후 베라온도는 감독직에서 사임했다.[4]

6. 3. 레알 마드리드

베라온도가 이끌었던 1927-28 시즌 레알 마드리드의 성적은 좋지 않았다. 레알 마드리드는 1927-28 센트럴 챔피언십에서 아틀레틱 마드리드에 밀려 2위를 기록했고, 1928 코파 델 레이에서는 발렌시아 CF에게 8강에서 패했다.[22] 1928년 10월 3일, 베라온도는 건강상의 이유로 레알 마드리드 감독직에서 사임하고 기푸스코아로 돌아갈 것을 발표했다.[22]

1927-28 시즌의 부진한 성적 이후, 베라온도는 축구계를 떠났고, 이후 몇 년 동안 스포츠 뉴스에 등장하지 않았다.[4]

7. 수상 내역

wikitext

대회우승 횟수연도
코파 델 레이41905, 1906, 1907, 1908
센트로 선수권 대회41904–05, 1905–06, 1906–07, 1907–08
코파 델 레이11910
코파 델 레이11913


7. 1. 선수

베라온도는 잉글랜드에서 유학하며 축구를 처음 접했고, 브렌트포드 FC 1군 팀에서 뛰기도 했다.[4] 26세에 스페인으로 돌아와 마드리드에 정착한 후, 1904년 마드리드 FC(현재의 레알 마드리드)에 입단했다.[4]

야르자, 프라스트, 파라게스, 아르만도 지랄트 등이 있었지만, 베라온도는 입단 1년 만인 1905년에 마드리드 FC의 주장이 되었다. 당시 주장은 전술 지시와 선수 선발을 해야 했고, 스페인 축구에는 아직 전문 코치가 없었기 때문에 선수 겸 코치 역할을 했다.[4]

그의 주장 하에 마드리드는 1905년부터 1908년까지 4번의 코파 델 레이 우승을 차지했으며, 지역 선수권 대회에서도 여러 차례 우승했다.[6] 베라온도는 잉글랜드에서 배운 축구 지식을 동료들에게 전수하며 레알 마드리드 초기 팀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4]



1909년, 고향으로 돌아가 클루브 시클리스타 데 산 세바스티안에서 뛰었고, 이 팀은 1909년 코파 델 레이에서 우승했다.[7] 몇 달 후, 베라온도는 우승 선수들과 함께 1909년 9월 7일 소시에다드 데 푸트볼(현재의 레알 소시에다드)을 창단했고, 초대 부회장으로 선출되었다.

1909년부터 1913년까지 4년 동안 레알 소시에다드에서 선수 겸 주장 겸 코치로 활동하며 잉글랜드에서 얻은 지식을 활용해 팀을 강화했다. 소시에다드는 1910 코파 델 레이(UECF)에 참가하기 위해 레이싱 클럽 데 이룬과의 플레이오프에서 승리했고, 베라온도는 두 경기 모두 출전했다.[8][9] 이 토너먼트에서 마드리드 FC와 아틀레틱 클럽과의 삼각 풀리그에서 전 소속팀인 마드리드를 2-0으로 이겼지만, 결승전에서 아틀레틱에 0-1로 패했다.[10]

1913 코파 델 레이에서 소시에다드는 FC 바르셀로나와 결승전을 치렀다. 베라온도는 결승전 첫 두 경기에서 마리아노 아라테와 함께 수비를 맡아 무승부를 기록했지만, 세 번째 경기에서는 에구이아로 교체되었고, 바르셀로나가 2-1로 승리했다.[11] 1913년 10월 5일, 베라온도는 아토차 스타디움 개장 경기에 참여해 3-3 무승부를 기록했다.[12] 같은 해, 35세의 베라온도는 선수 은퇴를 결심했다.

베라온도는 12세 연하의 축구 선수 호세 베론도와 종종 혼동되었고,[13] 이로 인해 베라온도가 마드리드 FC와 FC 바르셀로나에서 모두 뛴 최초의 선수 중 한 명이며, 제1차 세계 대전 발발 전에 마지막으로 그렇게 한 선수라고 잘못 알려지기도 했다.[14]

8. 비판 및 논란

베라온도는 1911 코파 델 레이 예선 라운드에서 빌바오 FC와 ''아카데미아 데 아르틸레리아''의 경기를 심판하면서 현역 선수로 뛰고 있었다.[2] 1916 코파 델 레이 준결승전, 마드리드 CF와 FC 바르셀로나의 경기에서 베라온도는 자신의 옛 소속팀에게 유리한 몇 가지 논란이 많은 결정을 내렸다. 예를 들어, 바르사의 파울리노 알칸타라가 득점한 골을 무효 처리했고, 마드리드에게 세 개의 페널티킥을 부여했다.[15] 처음 두 번은 바르사의 골키퍼 루이스 브루가 막았지만, 세 번째 페널티킥은 산티아고 베르나베우가 118분에 성공시켜 6-6 무승부를 만들었고, 재경기가 치러지게 되었다.[15]

베라온도가 다시 심판을 맡은 재경기에서도 그는 2-2 동점 상황에서 종료 직전 페널티킥을 주는 등 몇 가지 의문스러운 결정을 내렸지만, 브루가 막아 연장전으로 이어졌다. 연장전에서 소테로 아랑구렌이 두 골을 넣었지만, 바르셀로나 선수들은 마드리드 공격수들이 두 번째 골에서 브루를 붙잡았다고 항의했지만, 베라온도는 무시했고 바르셀로나는 항의하며 기권했다.[15] 경기 종료 후, 관중들은 베라온도의 판정에 강력하게 항의했고, 1916년 결승전에서 마드리드와 아틀레틱 빌바오의 경기가 바르셀로나에서 열렸을 때, 관중석의 일부 현수막에는 베라온드의 처벌을 요구하는 내용이 있었다.[15]

참조

[1] 웹사이트 Berraondo, José Ángel Berraondo Inchausti - Footballer https://www.bdfutbol[...] 2022-07-24
[2] 웹사이트 Berraondo, José Ángel Berraondo Inchausti - Referee https://www.bdfutbol[...] 2023-03-13
[3] 웹사이트 Berraondo, José Ángel Berraondo Inchausti - Manager https://www.bdfutbol[...] 2023-03-13
[4] 뉴스 Berraondo, el hombre que lo fue todo en el fútbol http://www.marca.com[...] 2015-04-26
[5] 웹사이트 Ficha José Angel BERRAONDO http://www.elaguanis[...] 2022-07-24
[6] 웹사이트 Las 19 Copas de España del Real Madrid https://www.realmadr[...] 2014-04-17
[7] 웹사이트 Spain - Cup 1909 https://www.rsssf.or[...] 2000-01-13
[8] 웹사이트 Reporte Vasconia-Irún 1910 https://www.realsoci[...] Página oficial de la Real Sociedad 2022-07-24
[9] 웹사이트 Reporte Irún-Vasconia- 1910 https://www.realsoci[...] Página oficial de la Real Sociedad 2022-07-24
[10] 웹사이트 Spain - Cups 1910 https://www.rsssf.or[...] 2000-01-13
[11] 웹사이트 Spain - Cups 1913 https://www.rsssf.or[...] 2000-01-13
[12] 뉴스 El viejo Atocha abrió sus puertas hace un siglo http://real-sociedad[...] El Diario Vasco 2013-10-12
[13] 웹사이트 José Berrondo Silva - Footballer https://www.bdfutbol[...] 2024-02-15
[14] 웹사이트 Every Player to Have Played for Both Real Madrid and Barcelona https://www.90min.co[...] 2020-04-16
[15] 웹사이트 Clásicos polémicos Real Madrid - Barcelona: 1916. Berraondo y sus penaltis https://www.marca.co[...] 2019-02-05
[16] 웹사이트 Spain - Cup 1921 https://www.rsssf.or[...] 2022-02-12
[17] 뉴스 Real Sociedad of San Sebastián - News http://hemeroteca.mu[...] Mundo Deportivo 1917-01-09
[18] 웹사이트 El primer partido de la Selección Española de Fútbol https://www.cihefe.e[...] CIHEFE 2021-02-14
[19] 뉴스 Ante las Olimpiadas http://hemeroteca.mu[...] Mundo Deportivo 1920-07-29
[20] 뉴스 Denmark vs Spain, 28 August 1920 https://eu-football.[...] Eu-football.info
[21] 뉴스 Spain vs Belgium, 9 October 1921 https://eu-football.[...] Eu-football.info
[22] 웹사이트 ENTRENADORES DEL REAL MADRID C.F. https://web.archive.[...] 2018-03-20
[23] 뉴스 Portugal vs Spain, 8 January 1928 https://eu-football.[...] Eu-football.info
[24] 뉴스 José Berraondo, football manager https://eu-football.[...] Eu-football.info
[25] 웹인용 ENTRENADORES DEL REAL MADRID C.F. http://www.leyendabl[...] 2018-03-20
[26] 뉴스 Berraondo, el hombre que lo fue todo en el fútbol http://www.marca.com[...] 2015-04-26



본 사이트는 AI가 위키백과와 뉴스 기사,정부 간행물,학술 논문등을 바탕으로 정보를 가공하여 제공하는 백과사전형 서비스입니다.
모든 문서는 AI에 의해 자동 생성되며, CC BY-SA 4.0 라이선스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위키백과나 뉴스 기사 자체에 오류, 부정확한 정보, 또는 가짜 뉴스가 포함될 수 있으며, AI는 이러한 내용을 완벽하게 걸러내지 못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제공되는 정보에 일부 오류나 편향이 있을 수 있으므로, 중요한 정보는 반드시 다른 출처를 통해 교차 검증하시기 바랍니다.

문의하기 : help@durumi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