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조 쓰나시게
1. 개요
호조 쓰나시게는 이마가와 가문의 가신 구시마 마사시게의 아들로, 호조 우지쓰나의 사위이자 호조 우지야스의 의붓형제였다. 그는 호조 가문을 위해 1537년부터 여러 전투에서 활약했으며, 특히 가와고에 성 전투에서 뛰어난 활약을 보이며 '지황 팔幡'이라는 별칭을 얻었다. 1571년 은퇴 후 1587년에 사망했으며, 그의 묘는 다마나와 성 근처의 류호지 절에 있다.
| 이름 | 호조 쓰나시게 |
|---|---|
| 본명 | 가쓰치요 |
| 일본어 이름 | 北条 綱成 |
| 일본어 (로마자) | Hōjō Tsunashige |
| 출생 | 1515년 |
| 사망 | 1587년 6월 11일 |
| 사망 장소 | 가나가와현 가마쿠라시 다마나와성 |
| 별명 | 지황 하치만 |
| 직위 | 다마나와성 성주 |
|---|---|
| 임기 시작 | 1542년 |
| 임기 종료 | 1587년 |
| 전임 | 호조 다메마사 |
| 후임 | 호조 우지시게 |
| 씨족 | 후쿠시마 씨 → 다마나와 호조 가문 |
|---|---|
| 아버지 | 구시마 마사시게 |
| 양아버지 | 호조 다메마사 |
| 장인 | 호조 우지쓰나 |
| 처 | 대정원 (호조 우지쓰나의 딸) |
| 형제자매 | 쓰나후사 (후쿠시마 벤치요) 마쓰다 모리히데의 부인 |
| 자녀 | 고레시게 (우지시게) 누마타 야스모토 (호조 우지히데) 고겐인 (호조 우지노리의 부인) 조코인 (도야마 마사카게의 형, 도야마 하야토노스케의 부인) |
| 소속 | 미쓰우로코 후기 호조 씨 |
|---|---|
| 복무 기간 | 불명 |
| 계급 | 지휘관 |
| 지휘 | 다마나와성 가와고에성 후카자와성 |
| 주요 전투 | 무사시마쓰야마 포위전 (1537년) 고노다이 전투 (1538년) 가와고에성 포위전 (1545년) 히라이성 포위전 (1551년) 오다와라성 포위전 (1561년) 고노다이 전투 (1564년) 누마지리 전투 (1567년) 후카자와 포위전 (1571년) |
| 아명 | 가쓰치요 |
|---|---|
| 통칭 | 손쿠로 |
| 수령명 | 사에몬노다이후, 가즈사노스케 |
| 시호 | 엔류인덴 가쿠겐 도칸 대선정문 |
| 묘소 | 가나가와현 가마쿠라시의 류호사 |
-
구시마씨 -
후쿠시마씨
후쿠시마 씨는 일본의 여러 씨족을 지칭하며 오와리, 미노, 스루가, 셋쓰, 시나노 계로 나뉘고, 각 계통은 시조와 유래가 다르다. -
다마나와 호조가 -
다나카번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사카이 다다토시를 초대 번주로 임명하며 시작된 다나카번은 여러 다이묘 가문이 통치하다 혼다 씨가 7대에 걸쳐 다스렸으며 메이지 유신 이후 폐번치현되었다. -
다마나와 호조가 -
가케가와번
가케가와번은 에도 시대 도토미국 가케가와에 존재했던 번으로, 센고쿠 시대에는 이마가와 씨의 요새였으나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가신이 다스리게 되었고, 에도 시대 초기에는 이에야스의 측근들이 번주를 역임했으며, 1746년 이후 오타 가문이 안정적으로 통치하다가 1869년 시즈오카 번에 흡수되었다. -
1587년 사망 -
메리 1세 (스코틀랜드)
메리 1세는 스코틀랜드 여왕으로 즉위하여 프랑스 왕비가 되었지만, 남편 사후 스코틀랜드로 돌아와 종교 갈등과 정치적 음모에 휘말리다 잉글랜드 여왕 엘리자베스 1세에 의해 처형되었고, 그녀의 아들은 훗날 잉글랜드의 제임스 1세가 되었다. -
1587년 사망 -
존 폭스
존 폭스는 잉글랜드의 종교 개혁 시기 작가로, 《순교자 열전》을 저술하여 개신교 순교자들의 삶을 기록했으며, 잉글랜드 종교 개혁에 영향을 미쳤다.
2. 생애
에이쇼 12년(1515년) 이마가와 씨의 가신 구시마 마사시게의 아들로 태어났다.
다이에이 원년(1521년) 이다가와라 전투에서 패해 마사시게의 일족들이 많이 전사했기 때문에 오다와라(小田原)로 달아나 호조 우지쓰나(北条氏綱)의 보호를 받았다라는 설이 있다. 그리고, 덴분 5년(1536년) 아버지가 이마가와씨 내분(하나쿠라의 난)에 말려 이마가와 요시모토(今川義元)의 이복형 겐코에탄(玄広恵探)을 지지했기 때문에 살해되었다고 한다. 그래서 우지쓰나 밑으로 와 보호를 받았다라는 설도 있다. 이렇게 두 가지 설이 존재한다.
호조 우지쓰나는 쓰나시게가 매우 마음에 들었기에 자신의 딸과 결혼시켜 호조씨 일문으로 맞이한다. 그리고 호조라는 성을 주었다고 한다. 쓰나시게의 쓰나(綱)는 우지쓰나에서 왔고, 시게(成)는 아버지 구시마 마사시게에서 왔다. 이 둘을 합친 것이다. 이것을 보더라도 호조 우지쓰나에게 쓰나시게가 얼마나 높은 평가를 받았었는지 대략 알 수 있다. 호조 우지쓰나는 아들 다메마사의 후견인역을 쓰나시게에게 맡겼다. 덴분 11년(1542년) 다메마사가 죽은 후 다마나와 성(玉縄城)의 성주가 된다.
덴분 6년(1537년)부터 우에스기 가문과의 전투를 비롯 각지를 전전한다. 덴분 10년(1541년) 우지쓰나가 죽어 호조 우지야스(北条氏康)가 가독을 승계했어도 그 신뢰는 변함이 없었다. 덴분 15년(1546년) 가와고에 성 전투에서는 가와고에 성에서 반년 남짓을 견뎌내 호조 군의 대승을 이끌었다. 이 공적으로 가와고에 성의 성주도 겸하게 된다. 이 후에도 사토미 요시타카와의 고노다이 전투, 다케다 신겐(武田信玄)과의 스루가 후카자와 성 전투에서 활약한다.
겐키 2년(1571년) 10월 우지야스가 병으로 죽자 쓰나시게도 가독을 아들 우지시게에 양도하고 은거한다. 그리고 출가를 해 "가즈사뉴도도칸(上総入道道感)"이라고 이름을 바꾼다. 덴쇼 15년(1587년) 5월 6일, 병으로 죽었다. 향년 73세.
쓰나시게의 어린 시절 이름은 '가쓰치요'였다. 그의 아버지는 이마가와 가문의 가신인 구시마 마사시게였다. 쓰나시게는 호조 우지야스의 형제인 타메마사의 의붓아들이자 호조 우지쓰나의 사위였다.
1537년부터 호조 가문을 위해 싸웠으며, 군인들의 노란색 군복과 뛰어난 창의력의 깃발 때문에 '지오 하치만'(노란 깃발을 든 전사의 신)으로 알려졌다. 쓰나시게는 다마나와 성과 가와고에 성을 지휘하는 성주였다.
1545년 가와고에 성 전투에서, 약 85,000명에 달하는 압도적인 공격군에도 불구하고, 호조 쓰나시게 휘하의 3,000명의 가와고에 성 수비대는 호조 우지야스의 구원군이 도착할 때까지 포위를 막아냈다. 그는 이 포위전을 격퇴하여 명성을 얻었다.
1551년에는 우에스기 노리마사에 맞서 히라이 성 전투에 참전했다.
1561년에는 제1차 오다와라 포위전에서 우에스기 겐신에 맞서 싸웠다.
1564년에는 제2차 고노다이 전투에서 사토미 요시히로에 맞서 싸웠다.
1567년에는 누마지리 전투에서 사타케 요시시게에 맞서 싸웠다.
1571년, 쓰나시게가 방어하던 후카자와 성은 다케다 신겐의 대군에 의해 포위되었다. 쓰나시게는 잘 버텼지만 항복할 수밖에 없었다. 이후 그는 자신의 다마나와 성으로 물러났다.
후카자와 성 전투 이후, 쓰나시게는 공직에서 은퇴했으며, 1587년에 사망했다. 쓰나시게의 묘는 다마나와 성 근처의 류호지 절에 있다.
2.1. 초기 생애와 호조 가문과의 인연
에이쇼 12년(1515년) 이마가와 씨의 가신 구시마 마사시게의 아들로 태어났다. 다이에이 원년(1521년) 이다가와라 전투에서 아버지 마사시게를 포함한 일족이 전사하거나, 덴분 5년(1536년) 하나쿠라의 난에서 아버지가 이마가와 요시모토의 이복형 겐코에탄을 지지하다 살해당한 후, 오다와라로 도망쳐 호조 우지쓰나의 보호를 받았다고 전해진다.
호조 우지쓰나는 쓰나시게의 재능을 높이 평가하여 자신의 딸과 결혼시키고 호조 성을 하사했다. 쓰나시게의 이름은 우지쓰나의 '쓰나(綱)'와 아버지 마사시게의 '시게(成)'를 합친 것으로, 우지쓰나의 신뢰를 짐작할 수 있다. 덴분 11년(1542년) 우지쓰나의 아들 다메마사가 사망하자 그의 뒤를 이어 다마나와 성의 성주가 되었다. 다만, 쿠로다 모토키는 양자 연을 맺은 것은 없다고 주장하며, 쓰나시게는 타메마사의 추선을 행하는 입장에 있었지만, 그 지위도 에이로쿠 9년(1566년) 이후에는 우지야스의 넷째 아들인 호조 우지노리에게 물려주었다고 한다.
어머니에 대해서는 요쇼인덴이라고 전해지고 있다. 덴분 13년(1544년) 윤 11월에 작성된 '에지마 천궁 기진 주문'에는 '손쿠로 인쿄', '손쿠로', '손지로', '손지로 덴 고치', '마츠다 덴 고치기'라는 이름이 있으며, 각각 형제의 어머니, 쓰나시게, 쓰나후사, 쓰나후사의 아내, 여동생(마츠다 모리히데의 아내)에 비정되고 있다. 또한, 쿠로다 모토키는 요쇼인덴을 호조 씨 가신인 아사쿠라 씨 출신이라고 주장한다.
쓰나시게의 출생과 아버지에 대해서는 여러가지 설이 있다. 미사키 토키오는 이다가와라 전투에서 전사한 것은 후쿠시마 사에몬노죠 스케하루가 맞고, 하나쿠라의 난에서의 후쿠시마 씨의 세력을 보아도 이다가와라 전투 후에 그 아이가 고아가 되는 상황은 상상할 수 없다고 주장한다. 쿠로다 모토키는 시라코하라 전투에서 전사한 이세 쿠로(별명: 쿠시마 쿠로)라고 주장하고, 시모야마 하루히사도 마찬가지로 쿠시마 쿠로의 가능성을 제기한다. 타카자와 히토시는 무사시 국하리사와 군의 무사시 7당이노마타 당 노베(노베) 씨의 후예라고 고찰하고 있다.
2.2. 지황 팔幡의 용장
호조 쓰나시게는 호조 우지쓰나의 사위이자 호조 우지야스의 동생 타메마사의 의붓아들로, 어린 시절 이름은 가쓰치요였다. 이마가와 가문의 가신인 구시마 마사시게의 아들이었다. 1537년(덴분 6년)부터 우에스기 가문과의 전투를 시작으로 각지를 전전하며 무공을 세웠다. 호조 가문의 호조 오색비 중 황색 부대를 담당했으며, 전투에서 황색 깃발을 사용하고 용맹하여 '지황 팔幡'(地黄八幡)으로 불렸다.
1541년(덴분 10년) 우지쓰나가 사망하고 호조 우지야스가 가독을 이어받았지만, 쓰나시게에 대한 신뢰는 변함이 없었다. 1545년 가와고에 성 전투에서는 약 85,000명에 달하는 공격군에도 불구하고, 3,000명의 가와고에 성 수비대를 이끌고 호조 우지야스의 구원군이 도착할 때까지 포위를 막아내 큰 명성을 얻었다. 1546년(덴분 15년)의 가와고에 야전에서는 반년 이상 농성전을 견뎌낸 데다 본군과 호응하여 출격해 적을 무너뜨리는 등 호조군의 대역전 승리에 큰 공을 세워 가와고에 성 주를 겸하게 되었다.
고지 3년(1557년) 제3차 가와나카지마 전투(우에노하라 전투)에서는 다케다 측에 대한 원군을 이끌고 우에다까지 진출하여 우에스기 겐신 세력을 격퇴했다. 사토미 요시히로·오타 스케마사와의 제2차 고노다이 전투에서는 기습 부대를 이끌고 사토미 군을 격파하는 등 호조 가문 제일의 맹장으로 활약했다.
『고요 군감』에 따르면, 에이로쿠 12년(1569년) 10월 6일 다케다 신겐과의 미마스고개 전투에서는 쓰나시게 지휘하의 철포대가 다케다 군의 좌익 대장 아사리 노부타네를 사살했다고 한다.
1571년(겐키 2년) 스루가 후카자와 성 전투에서는 다케다 신겐의 대군에 맞서 항전했으나, 결국 성을 내주고 다마나와 성으로 물러났다. 이후, 쓰나시게는 공직에서 은퇴했으며, 1587년에 사망했다. 덴쇼 15년(1587년) 5월 6일, 병으로 사망했으며, 향년 73세였다. 묘소는 다마나와의 류호지에 있다.
2.3. 은거와 죽음
겐키 2년(1571년) 10월, 호조 우지야스가 병사하자 쓰나시게도 가독을 아들 우지시게에게 물려주고 은거했다. 출가하여 '가즈사뉴도도칸(上総入道道感)'이라 칭했다. 후카자와 성 전투 이후, 쓰나시게는 공직에서 은퇴하였다. 덴쇼 15년(1587년) 5월 6일, 병으로 사망했다. 향년 73세. 묘소는 다마나와 성 인근의 류호지 절에 있다.
3. 인물 및 일화
호조 쓰나시게는 젊어서부터 무용이 뛰어나 매달 15일에는 반드시 몸을 깨끗이 하고 하치만다이보사쓰(八幡大菩薩)에게 승리를 기원했다고 한다. 전투에서는 항상 호조 군의 선봉을 맡았으며, '지황 팔幡' 깃발을 꽂고 용맹하게 싸워 '상승 군단'으로 불렸다. 이 깃발은 구치바색으로 물들인 6척 9촌의 네리키누에 「하치만」이라고 쓰여 있었으며, "나는 하치만의 직류이다"라는 의미를 담고 있었다.
소년 시절에는 호조 우지야스 대신 호조 가문의 당주로 추대하려는 움직임이 있었을 정도로 능력을 인정받았다. 호조 우지야스와는 동갑이자 의형제였기 때문에 신임이 두터워 외교와 군사 전권을 위임받기도 했다. 야전에서는 대장임에도 불구하고 항상 선두에서 "이겼다! 이겼다!"라고 외치며 돌격했다고 전해진다. 그의 무용은 다케다 신겐을 위시한 다케다 군도 두려워했으며, 후카자와 성 전투에서는 압도적인 병력 차이에도 불구하고 선전했다.
쓰나시게의 '지황 팔幡' 깃발은 현재 나가노현 나가노시 마쓰시로의 사나다 보물관에 현존한다. 겐키 2년(1571년) 다케다 신겐에게 후카자와 성을 넘겨주고 오다와라로 물러갔을 때 성내에 방치되어 있었던 것을 다케다 신겐이 자신의 가신 사나다 유키타카의 아들 겐지로(사나다 노부타다)에게 주었다고 한다.
1545년 가와고에 성 전투에서 약 85,000명에 달하는 공격군에도 불구하고, 호조 쓰나시게 휘하의 3,000명의 가와고에 성 수비대는 호조 우지야스의 구원군이 도착할 때까지 포위를 막아냈다.
무용뿐만 아니라 시라카와 하루쓰나, 나가오 마사나가, 아시나 모리우지 등과의 외교 교섭 등 외교 사절로서 활동하기도 했다.
4. 유물
5. 평가
5.1. 긍정적 평가
5.2. 부정적 평가
5.3. 종합적 평가
6. 관련 작품
에구미 타카유키 『호조 쓰나시게』(PHP 문고, 2008년) ISBN 9784569670775
미야케 코타로 『호조 쓰나시게』(가쿠요 서방 인물 문고, 2010년) ISBN 9784313752573
카이도 류이치로 『후호조 용호전(호조 용호전)』(신초샤, 신초 문고) ISBN 4103027312(ISBN 410125043X)