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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조 우지쓰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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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호조 우지쓰나는 1487년에 태어나 1541년에 사망한 센고쿠 시대의 무장으로, 호조 소운의 아들이자 호조 우지야스의 아버지이다. 1518년 가독을 상속받아 오다와라성을 중심으로 세력을 확장했으며, 에도 성을 함락하고 고노다이 전투에서 승리하여 간토 지방의 패권을 다졌다. 그는 정치가로서도 능력을 발휘하여 토지 검사 실시, 영내 사법권 강화 등 정책을 추진했으며, 쓰루가오카 하치만구 재건 사업을 주도했다. 1541년 사망 직전 아들 우지야스에게 5개조의 훈계장을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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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조 우지쓰나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호조 우지쓰나
이름호조 우지쓰나
본명이세 우지쓰나
일본어 이름北条 氏綱
로마자 표기Hōjō Ujitsuna
출생1487년
사망1541년 8월 10일
사망 장소오다와라 성, 사가미 국, 일본
별명신쿠로
묘소소운지(가나가와현아시가라시모 군하코네 정)
계명춘송원쾌옹활공
정치
직위후호조 씨 당주
재임 시작1519년
재임 종료1541년
선임자호조 소운
후임자호조 우지야스
관위종5위하 좌경대부, 증 종3위
막부간토 간레이(아시카가 하루우지 보임)
소속후호조 씨
가계
아버지호조 소운
어머니오가사와라 마사키요의 딸
형제호조 우지토키, 가즈라야마 우지히로, 호조 겐안
배우자정실: 요주인도노; 계실: 고노에텐 (고노에 히사미치의 딸)
자녀호조 우지야스, 호조 다메마사, 호조 우지타카, 대정원(호조 쓰나시게의 아내), 고겐인(호리코시 사다모토의 아내), 정심인(오타 스게타카의 아내), 호슌인(아시카가 하루우지의 계실), 치요 (가즈라야마 우지모토의 아내), 딸 (기라 요리야스의 아내)
양자호조 쓰나시게
군사
지휘오다와라 성
참전 전투에도 공방전(1524년)
나시노키다이라 전투(1526년)
에도 성 공방전(1535년)
무사시마쓰야마 공방전(1537년)
고노다이 전투(1538년)

2. 생애

1487년(조쿄 원년) 아버지 이세 모리토키(후의 호조 소운)와 어머니 오가사와라씨의 장남으로 태어났다.[5] 1518년(에이쇼 15년), 아버지가 은거하자 가독을 물려받아 당주가 되었다. 이세 모리토키는 가독을 물려준 이듬해에 사망한다.

1512년 우지쓰나는 소운의 후계자로서 활동을 시작했고, 오다와라성(小田原城)을 오모리 씨로부터 탈취한 후 그곳을 지키고 있었다.[5] 그 후, 소운과 함께 사가미국 평정전에 참전하여 미우라 씨의 본거지인 아라이 성을 포위하고 1516년에 멸망시켰다. 이 사이에 결혼하여 1515년에는 우지야스가 태어났다.

호조 우지쓰나는 아버지 호조 소운의 거점인 이즈 니라야마 성에서 오다와라성으로 본거지를 옮기고, '이세'에서 '호조'로 성을 고쳤다.[1] 1524년, 우지쓰나는 오기가야쓰 우에스기 가의 당주 우에스기 도모오키의 가신 오타 스게타카를 포섭하여 에도 성을 손에 넣었다.[2][3] 같은 해 2월, 이와쓰키 성을 공격해 함락시키고 오타 빗추노카미(오타 스게요리의 형)를 죽였다. 그리고 게로 성주 게로 타로와 오카모토 쇼겐을 아군으로 끌어들여 게로에서 이시도에 이르는 지역을 제어, 마쓰야마성과 가와고에 성 사이의 통행을 차단했다.

이에 맞서 우에스기 도모오키는 1524년 6월 18일 오타 스게요리와 손을 잡고, 7월 20일에는 다케다 노부토라와 연합하여 무사시국으로 쳐들어가 이와츠키 성을 함락시키고 오타 스게요리에게 성을 돌려주었다. 1530년 호조 우지쓰나는 장남 호조 우지야스와 함께 다마가와 강 부근에서 우에스기 도모오키를 상대로 대승을 거두었다(오자와가하라 전투).[4]

1535년, 우지쓰나가 다케다 가문과 싸우러 간 사이 우에스기군이 다시 에도를 공격했지만, 우지쓰나가 돌아와 우에스기 도모오키를 패퇴시키고 땅을 되찾았다. 1537년 우에스기 도모오키가 사망하고 우에스기 도모사다가 뒤를 잇자, 호조 우지쓰나는 곧바로 침공하여 가와고에 성을 점령했다.[1]

이후 우지쓰나는 간토 공방 아시카가 하루우지와 좋은 관계를 맺고자 했다. 이는 간토 관령 직을 염두에 두었기 때문이라는 추측이 있지만, 이후에도 고호조 씨의 일원이 간토 관령을 자칭한 적은 없다. 1538년 호조 우지쓰나는 오유미쿠보 아시카가 요시아키사토미 요시타카의 연합군을 격파하고 아시카가 요시아키를 죽여 오유미쿠보를 멸망시켰다(고노다이 전투).[3][1] 이로써 그의 영향력은 무사시 남부와 시모우사까지 미치게 되었다.

1539년에는 고가 구보 요시아키를 패퇴시키고 아와국(지바)을 장악했다.[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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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북조씨(北条氏) 씨망(氏綱) 관련 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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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조 우지쓰나는 1524년 우에스기 도모오키가 지배하던 에도 성을 함락시켰다.[2][3] 이는 호조 씨와 우에스기 가문 사이의 오랜 라이벌 관계의 시작이었다.

1537년 우에스기 도모오키가 죽자, 우지쓰나는 무사시국을 점령하고 가와고에성을 장악하여 간토 지방의 지배권을 확고히 했다.[1] 1538년 고노다이 전투에서 승리하여[3] 호조 씨에게 시모사국을 확보했다.[1]

우지쓰나의 이러한 군사적 성공은 숙적 우에스기 도모오키가 병상에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도모오키는 1537년 4월 사망했고, 어린 우에스기 도모사다가 뒤를 이었다. 도모오키는 생전에 우지쓰나가 보소(房総)로 출병했을 때를 노려 에도 성을 탈환하려 했으나 실패했다.

한편, 우지쓰나와 적대하지는 않았지만 오기가야쓰 우에스기(扇谷上杉)를 지원하던 고가 공방 아시카가 요시아키(足利義明)는 1534년 마리야쓰 노부키요(真里谷信清)가 사망한 이후 마리야쓰의 꼭두각시에서 벗어나 오히려 마리야쓰에 대한 영향력을 증대시켰다. 1536년 5월, 요시아키는 영토를 확장하는 우지쓰나에 대항하기 위해, 호조가 스루가(駿河) 공격으로 지쳐있을 때를 노려 보소를 통일하고자 호조와 내통하는 마리야쓰 노부타카(真里谷信隆)를 추방하고 마리야쓰 노부오(真里谷信応)를 옹립하기 위해 출진했다. 요시아키의 출진으로 가즈사(上総)의 호족들은 차례로 항복했고, 노부타카는 사가미(相模)로 도망쳤다. 요시아키는 사토미 요시타카를 종속시키고 단번에 보소를 제압했다.

우지쓰나는 고가 공방과 대립하는 고가 공방 아시카가 하루우지(足利晴氏)와 동맹을 맺고 요시아키를 토벌하기 위해 거병했다. 1538년 7월 무사시에 출진하여 에도 성에 입성, 15,000명의 병력을 에도 주변에 집결시켰다. 이에 대응하기 위해 오기가야쓰 우에스기 군이 남쪽으로 주력을 이동시키자, 우지쓰나의 아들 우지야스(氏康)가 2,000명의 병력을 이끌고 우에스기 도모사다의 본거지 가와고에 성을 급습했다. 도모사다는 마쓰야마 성으로 도망쳤고, 호조 군은 가와고에 성을 점령했다. 우지쓰나는 셋째 아들 다메마사를 성주 대리로 임명했다. 우지쓰나와 아시카가 요시아키는 그동안 대립과 화친을 반복하면서도 전면적인 대결을 피해왔지만, 가와고에 성 함락에 위기감을 느낀 요시아키는 가사이(葛西) 성 전투에서 오기가야쓰 우에스기 가문에 원군을 파견하기로 결정하고, 직접 군사를 이끌고 고노다이 성에 입성하여 호조 군을 견제했다.

가와고에 성이 호조 측에 넘어가자, 오기가야쓰는 군사 일부를 가와고에 성에 배치해야 했다. 그러나 가와고에 성은 버텼고, 그 사이 조세이(城西)의 모로 성(毛呂城), 가쓰누마 성(勝沼城)을 조략(調略)했다. 12월에는 아시카가 하루우지와 밀약을 맺고 우지쓰나의 딸을 하루우지에게 시집보내 고가 공방을 함께 토벌하기로 결정했다.

1538년, 요시아키는 고노다이 성에 집결하여 2만 가까운 대군을 이끌었다. 고가 공방은 호조 군을 가사이 성에 묶어두고 요시아키가 거병하여 고가 공방을 멸망시키려는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 우지쓰나는 가와고에 성에 있는 우지야스를 아라카와(荒川)를 통해 가사이 성에 합류시켜 사기를 높이고, 일부 군사를 지바(千葉) 영지에 투입하는 책략을 썼다. 10월, 호조 군의 움직임이 멈춘 것을 안 요시아키가 거병하여 고노다이 성에 입성했다. 이를 안 우지쓰나는 가사이 성에 입성했다. 이 시점에서 고가 공방 군은 약 18,000명, 호조 군은 지바와 합쳐 약 20,000명으로 거의 대등했다. 10월 7일, 호조 군이 다이니치 강(太日川)을 건너기 시작했다. 사토미 요시타카는 강을 건널 때 기습해야 한다고 진언했지만 요시아키는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 사이 우지야스의 기습으로 마쓰도 성이 괴멸되었고, 본대인 우지쓰나도 강을 건넜다. 이를 안 요시아키는 격노하여 성을 나와 호조 군과 격돌했다. (제1차 고노다이 전투). 초반에는 사기가 높은 공방 군에 호조 군이 밀렸지만, 고가 공방의 원군이 도착하자 전세가 역전되어 아시카가 모토요리(足利基頼), 아시카가 요시즈미(足利義純)가 전사하고, 우지야스가 요시아키를 죽이는 대승을 거두었다. 이로써 고가 공방을 멸망시키고 무사시 남부에서 시모사, 가즈사에 걸쳐 세력을 확대하여 남관동 일대의 패권을 확립했다.

'이사하야 문서(伊佐早文書)'에 따르면, 고가 공방 아시카가 하루우지는 전투의 승리를 칭찬하며 우지쓰나를 간토 관령에 임명했다고 한다. 간토 관령 임명은 막부의 권한이며, 간토 관령 야마노우치 우에스기 노리마사가 존재하는 이상 정식적인 것이 될 수 없었지만, 고가 공방을 받드는 우지쓰나, 우지야스는 동국의 전통 세력에 대항하는 정치적 지위를 얻게 되었다. 1539년, 우지쓰나는 딸(호슌인)을 하루우지에게 시집보내 고가 공방과의 유대를 강화하는 동시에 아시카가 씨의 '어일가(御一家)' 신분도 얻었다.

호조 우지쓰나는 1524년 우에스기 도모오키가 지배하던 에도 성을 함락시키며 우에스기 가문과의 오랜 대립을 시작했다.[2][3] 1526년 나시노키다이라 전투에서 다케다 노부토라에게 패배했고, 이후 우에스기 군의 공격으로 가마쿠라의 쓰루가오카 하치만구가 불타는 큰 피해를 입었다.[1] 우지쓰나는 즉시 쓰루가오카 하치만구 재건을 시작하여 1540년에 완공했다.[1] 1530년, 아들 우지야스가 오자와하라 전투에서 우에스기 도모오키를 물리쳤다.[4]

1535년, 우지쓰나가 다케다와 싸우는 사이 우에스기 군이 다시 에도를 공격했으나, 우지쓰나가 돌아와 격퇴하고 영토를 되찾았다. 1537년 우에스기 도모오키가 사망하자 무사시 국을 점령하고 가와고에 성을 장악하여 간토 지방 지배권을 확고히 했다.[1] 1538년 고노다이 전투에서 승리하여 시모사 국을 확보했고,[3][1] 1539년에는 고가 구보 요시아키를 패퇴시키고 아와 국을 장악했다.[2]

한편, 1531년 우지쓰나는 아시카가 하루우지와 동맹을 맺고, 사토미 가문을 포섭하여 고유미 구보 세력을 약화시키려 했다. 1533년 이나무라의 변으로 사토미 사네타다가 숙청되자, 그의 아들 사토미 요시타다를 지원하여 아와를 공격, 이누가케 전투에서 승리했다.

우지쓰나는 이마가와 가문과의 동맹을 기반으로 다케다 신코와 대립했다. 1534년 이마가와 군이 카이를 침공했으나 실패했고, 1535년 다케다 신코의 스루가 침공에 맞서 산중 전투에서 대승을 거두었다.

1536년 이마가와 요시모토다케다 하루노부와 갑슌 동맹을 맺자, 우지쓰나는 스루가에 침공하여 가쓰야마 우지히로를 종속시키고 흥국사성의 헤이와 우지타카를 회유하여 순가 국의 갓토 지방(후지가와 동쪽)을 점령했다. 타이하라 셋사이가 이끄는 이마가와 군과의 전투에서 승리한 후, 다케다 하루노부의 중재로 갓토 지방을 호조 령으로 하는 일시적 휴전이 성립되었다. 이로써 이마가와 가문과의 종속 관계를 해소하고 독립을 달성했다.

호조 우지쓰나는 1541년 5월에 병으로 쓰러져 7월 19일에 55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그는 죽기 직전 아들 우지야스에게 5개조의 훈계장을 전했는데, 그 내용은 장수와 시종, 농민에게 자애로울 것, 교만하지 않고 자신의 신분을 지킬 것, 검약에 힘쓸 것, 항상 승리하고 있다고 교만하여 적을 경솔히 여기지 말 것 등이었다.[7] 우지쓰나는 소운으로부터 이즈, 사가미, 무사시 반국, 시모우사 일부, 스루가 반국을 영토로 물려받았으며, ''호조키(北条記)''는 우지쓰나를 "아버지의 뒤를 잘 이어 후계자로서의 공이 있었다"라고 평가한다.

우지쓰나 사후 우지야스가 뒤를 이었으며, 하코네의 소운지에는 우지쓰나를 포함한 호조 5대의 묘소가 있는데, 이는 1672년 우지노리의 자손이자 사야마한 호조가 5대 당주인 호조 우지하루가 건립한 공양탑이다. 우지쓰나의 본래 묘소는 옛 소운지 경내의 춘송원에 있었으나, 도요토미 히데요시 군대에 의해 소실되어 현재는 위치를 알 수 없다.

소운지의 호조 5대의 묘. 오른쪽에서 두 번째가 우지쓰나의 묘.

2. 1. 가독 승계 (1518년 ~ 1523년)

1487년(조쿄 원년) 아버지 이세 모리토키(후의 호조 소운)와 어머니 오가사와라씨의 장남으로 태어났다.[5] 1518년(에이쇼 15년), 아버지가 은거하자 가독을 물려받아 당주가 되었다. 이세 모리토키는 가독을 물려준 이듬해에 사망한다.

1512년 우지쓰나는 소운의 후계자로서 활동을 시작했고, 오다와라성(小田原城)을 오모리 씨로부터 탈취한 후 그곳을 지키고 있었다.[5] 그 후, 소운과 함께 사가미국 평정전에 참전하여 미우라 씨의 본거지인 아라이 성을 포위하고 1516년에 멸망시켰다. 이 사이에 결혼하여 1515년에는 우지야스가 태어났다.

2. 2. 무사시·시모사 세력 확장 (1524년 ~ 1537년)

호조 우지쓰나는 아버지 호조 소운의 거점인 이즈 니라야마 성에서 오다와라성으로 본거지를 옮기고, '이세'에서 '호조'로 성을 고쳤다.[1] 1524년, 우지쓰나는 오기가야쓰 우에스기 가의 당주 우에스기 도모오키의 가신 오타 스게타카를 포섭하여 에도 성을 손에 넣었다.[2][3] 같은 해 2월, 이와쓰키 성을 공격해 함락시키고 오타 빗추노카미(오타 스게요리의 형)를 죽였다. 그리고 게로 성주 게로 타로와 오카모토 쇼겐을 아군으로 끌어들여 게로에서 이시도에 이르는 지역을 제어, 마쓰야마성과 가와고에 성 사이의 통행을 차단했다.

이에 맞서 우에스기 도모오키는 1524년 6월 18일 오타 스게요리와 손을 잡고, 7월 20일에는 다케다 노부토라와 연합하여 무사시국으로 쳐들어가 이와츠키 성을 함락시키고 오타 스게요리에게 성을 돌려주었다. 1530년 호조 우지쓰나는 장남 호조 우지야스와 함께 다마가와 강 부근에서 우에스기 도모오키를 상대로 대승을 거두었다(오자와가하라 전투).[4]

1535년, 우지쓰나가 다케다 가문과 싸우러 간 사이 우에스기군이 다시 에도를 공격했지만, 우지쓰나가 돌아와 우에스기 도모오키를 패퇴시키고 땅을 되찾았다. 1537년 우에스기 도모오키가 사망하고 우에스기 도모사다가 뒤를 잇자, 호조 우지쓰나는 곧바로 침공하여 가와고에 성을 점령했다.[1]

이후 우지쓰나는 간토 공방 아시카가 하루우지와 좋은 관계를 맺고자 했다. 이는 간토 관령 직을 염두에 두었기 때문이라는 추측이 있지만, 이후에도 고호조 씨의 일원이 간토 관령을 자칭한 적은 없다. 1538년 호조 우지쓰나는 오유미쿠보 아시카가 요시아키사토미 요시타카의 연합군을 격파하고 아시카가 요시아키를 죽여 오유미쿠보를 멸망시켰다(고노다이 전투).[3][1] 이로써 그의 영향력은 무사시 남부와 시모우사까지 미치게 되었다.

1539년에는 고가 구보 요시아키를 패퇴시키고 아와국(지바)을 장악했다.[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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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북조씨(北条氏) 씨망(氏綱) 관련 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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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3. 간토 공방과의 관계 및 고노다이 전투 (1538년)

호조 우지쓰나는 1524년 우에스기 도모오키가 지배하던 에도성을 함락시켰다.[2][3] 이는 호조 씨와 우에스기 가문 사이의 오랜 라이벌 관계의 시작이었다.

1537년 우에스기 도모오키가 죽자, 우지쓰나는 무사시국을 점령하고 가와고에성을 장악하여 간토 지방의 지배권을 확고히 했다.[1] 1538년 고노다이 전투에서 승리하여[3] 호조 씨에게 시모사국을 확보했다.[1]

우지쓰나의 이러한 군사적 성공은 숙적 우에스기 도모오키가 병상에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도모오키는 1537년 4월 사망했고, 어린 우에스기 도모사다가 뒤를 이었다. 도모오키는 생전에 우지쓰나가 보소(房総)로 출병했을 때를 노려 에도 성을 탈환하려 했으나 실패했다.

한편, 우지쓰나와 적대하지는 않았지만 오기가야쓰 우에스기(扇谷上杉)를 지원하던 고가 공방 아시카가 요시아키(足利義明)는 1534년 마리야쓰 노부키요(真里谷信清)가 사망한 이후 마리야쓰의 꼭두각시에서 벗어나 오히려 마리야쓰에 대한 영향력을 증대시켰다. 1536년 5월, 요시아키는 영토를 확장하는 우지쓰나에 대항하기 위해, 호조가 스루가(駿河) 공격으로 지쳐있을 때를 노려 보소를 통일하고자 호조와 내통하는 마리야쓰 노부타카(真里谷信隆)를 추방하고 마리야쓰 노부오(真里谷信応)를 옹립하기 위해 출진했다. 요시아키의 출진으로 가즈사(上総)의 호족들은 차례로 항복했고, 노부타카는 사가미(相模)로 도망쳤다. 요시아키는 사토미 요시타카를 종속시키고 단번에 보소를 제압했다.

우지쓰나는 고가 공방과 대립하는 고가 공방 아시카가 하루우지(足利晴氏)와 동맹을 맺고 요시아키를 토벌하기 위해 거병했다. 1538년 7월 무사시에 출진하여 에도 성에 입성, 15,000명의 병력을 에도 주변에 집결시켰다. 이에 대응하기 위해 오기가야쓰 우에스기 군이 남쪽으로 주력을 이동시키자, 우지쓰나의 아들 우지야스(氏康)가 2,000명의 병력을 이끌고 우에스기 도모사다의 본거지 가와고에 성을 급습했다. 도모사다는 마쓰야마 성으로 도망쳤고, 호조 군은 가와고에 성을 점령했다. 우지쓰나는 셋째 아들 다메마사를 성주 대리로 임명했다. 우지쓰나와 아시카가 요시아키는 그동안 대립과 화친을 반복하면서도 전면적인 대결을 피해왔지만, 가와고에 성 함락에 위기감을 느낀 요시아키는 가사이(葛西) 성 전투에서 오기가야쓰 우에스기 가문에 원군을 파견하기로 결정하고, 직접 군사를 이끌고 고노다이 성에 입성하여 호조 군을 견제했다.

가와고에 성이 호조 측에 넘어가자, 오기가야쓰는 군사 일부를 가와고에 성에 배치해야 했다. 그러나 가와고에 성은 버텼고, 그 사이 조세이(城西)의 모로 성(毛呂城), 가쓰누마 성(勝沼城)을 조략(調略)했다. 12월에는 아시카가 하루우지와 밀약을 맺고 우지쓰나의 딸을 하루우지에게 시집보내 고가 공방을 함께 토벌하기로 결정했다.

1538년, 요시아키는 고노다이 성에 집결하여 2만 가까운 대군을 이끌었다. 고가 공방은 호조 군을 가사이 성에 묶어두고 요시아키가 거병하여 고가 공방을 멸망시키려는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 우지쓰나는 가와고에 성에 있는 우지야스를 아라카와(荒川)를 통해 가사이 성에 합류시켜 사기를 높이고, 일부 군사를 지바(千葉) 영지에 투입하는 책략을 썼다. 10월, 호조 군의 움직임이 멈춘 것을 안 요시아키가 거병하여 고노다이 성에 입성했다. 이를 안 우지쓰나는 가사이 성에 입성했다. 이 시점에서 고가 공방 군은 약 18,000명, 호조 군은 지바와 합쳐 약 20,000명으로 거의 대등했다. 10월 7일, 호조 군이 다이니치 강(太日川)을 건너기 시작했다. 사토미 요시타카는 강을 건널 때 기습해야 한다고 진언했지만 요시아키는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 사이 우지야스의 기습으로 마쓰도 성이 괴멸되었고, 본대인 우지쓰나도 강을 건넜다. 이를 안 요시아키는 격노하여 성을 나와 호조 군과 격돌했다. (제1차 고노다이 전투). 초반에는 사기가 높은 공방 군에 호조 군이 밀렸지만, 고가 공방의 원군이 도착하자 전세가 역전되어 아시카가 모토요리(足利基頼), 아시카가 요시즈미(足利義純)가 전사하고, 우지야스가 요시아키를 죽이는 대승을 거두었다. 이로써 고가 공방을 멸망시키고 무사시 남부에서 시모사, 가즈사에 걸쳐 세력을 확대하여 남관동 일대의 패권을 확립했다.

'이사하야 문서(伊佐早文書)'에 따르면, 고가 공방 아시카가 하루우지는 전투의 승리를 칭찬하며 우지쓰나를 간토 관령에 임명했다고 한다. 간토 관령 임명은 막부의 권한이며, 간토 관령 야마노우치 우에스기 노리마사가 존재하는 이상 정식적인 것이 될 수 없었지만, 고가 공방을 받드는 우지쓰나, 우지야스는 동국의 전통 세력에 대항하는 정치적 지위를 얻게 되었다. 1539년, 우지쓰나는 딸(호슌인)을 하루우지에게 시집보내 고가 공방과의 유대를 강화하는 동시에 아시카가 씨의 '어일가(御一家)' 신분도 얻었다.

2. 4. 스루가 침공 및 가토의 난 (1536년 ~ 1541년)

호조 우지쓰나는 1524년 우에스기 도모오키가 지배하던 에도 성을 함락시키며 우에스기 가문과의 오랜 대립을 시작했다.[2][3] 1526년 나시노키다이라 전투에서 다케다 노부토라에게 패배했고, 이후 우에스기 군의 공격으로 가마쿠라의 쓰루가오카 하치만구가 불타는 큰 피해를 입었다.[1] 우지쓰나는 즉시 쓰루가오카 하치만구 재건을 시작하여 1540년에 완공했다.[1] 1530년, 아들 우지야스가 오자와하라 전투에서 우에스기 도모오키를 물리쳤다.[4]

1535년, 우지쓰나가 다케다와 싸우는 사이 우에스기 군이 다시 에도를 공격했으나, 우지쓰나가 돌아와 격퇴하고 영토를 되찾았다. 1537년 우에스기 도모오키가 사망하자 무사시 국을 점령하고 가와고에 성을 장악하여 간토 지방 지배권을 확고히 했다.[1] 1538년 고노다이 전투에서 승리하여 시모사 국을 확보했고,[3][1] 1539년에는 고가 구보 요시아키를 패퇴시키고 아와 국을 장악했다.[2]

한편, 1531년 우지쓰나는 아시카가 하루우지와 동맹을 맺고, 사토미 가문을 포섭하여 고유미 구보 세력을 약화시키려 했다. 1533년 이나무라의 변으로 사토미 사네타다가 숙청되자, 그의 아들 사토미 요시타다를 지원하여 아와를 공격, 이누가케 전투에서 승리했다.

우지쓰나는 이마가와 가문과의 동맹을 기반으로 다케다 신코와 대립했다. 1534년 이마가와 군이 카이를 침공했으나 실패했고, 1535년 다케다 신코의 스루가 침공에 맞서 산중 전투에서 대승을 거두었다.

1536년 이마가와 요시모토다케다 하루노부와 갑슌 동맹을 맺자, 우지쓰나는 스루가에 침공하여 가쓰야마 우지히로를 종속시키고 흥국사성의 헤이와 우지타카를 회유하여 순가 국의 갓토 지방(후지가와 동쪽)을 점령했다. 타이하라 셋사이가 이끄는 이마가와 군과의 전투에서 승리한 후, 다케다 하루노부의 중재로 갓토 지방을 호조 령으로 하는 일시적 휴전이 성립되었다. 이로써 이마가와 가문과의 종속 관계를 해소하고 독립을 달성했다.

2. 5. 사망 (1541년)

호조 우지쓰나는 1541년 5월에 병으로 쓰러져 7월 19일에 55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그는 죽기 직전 아들 우지야스에게 5개조의 훈계장을 전했는데, 그 내용은 장수와 시종, 농민에게 자애로울 것, 교만하지 않고 자신의 신분을 지킬 것, 검약에 힘쓸 것, 항상 승리하고 있다고 교만하여 적을 경솔히 여기지 말 것 등이었다.[7] 우지쓰나는 소운으로부터 이즈, 사가미, 무사시 반국, 시모우사 일부, 스루가 반국을 영토로 물려받았으며, ''호조키(北条記)''는 우지쓰나를 "아버지의 뒤를 잘 이어 후계자로서의 공이 있었다"라고 평가한다.

우지쓰나 사후 우지야스가 뒤를 이었으며, 하코네의 소운지에는 우지쓰나를 포함한 호조 5대의 묘소가 있는데, 이는 1672년 우지노리의 자손이자 사야마한 호조가 5대 당주인 호조 우지하루가 건립한 공양탑이다. 우지쓰나의 본래 묘소는 옛 소운지 경내의 춘송원에 있었으나, 도요토미 히데요시 군대에 의해 소실되어 현재는 위치를 알 수 없다.

3. 묘소

1590년 오다와라 정벌 당시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군대에 의해 소운지(早雲寺)가 소실되기 전, 호조 우지쓰나의 묘소는 구 소운지 경내 쇼슌인(春松院)에 있었다. 그러나 소운지가 불타버렸기 때문에 정확한 위치는 알 수 없다. 현재 가나가와현 아시가라시모군 하코네정에 있는 소운지에는 호조 우지쓰나와 호조 소운을 포함한 호조 5대의 위패가 모셔져 있다. 이는 에도 시대1672년(간분 12년) 사야마 번 제4대 번주 호조 우지하루(北条氏治)가 호조 소운의 기일인 8월 15일에 건립한 공양탑이다.

4. 정책 및 평가

호조 우지쓰나는 1523년 6월에서 9월 사이에 이세 씨에서 싯켄 호조 씨(이세 씨의 동족)의 후예를 자처하며 호조 씨로 성을 바꾸었다. 이는 가마쿠라 막부 시대에 간토를 지배한 호조 씨의 정통성을 잇고자 하는 의도였다. 그는 "虎"와 "郡"이 새겨진 도장을 사용한 문서를 다수 남겼다.

우지쓰나는 아버지 호조 소운을 능가하는 정치가로 평가받는다. 사가미에서 센고쿠 다이묘로서는 최초로 토지검사를 실시하고 가신단의 영민 지배에 힘썼다. 평정중(評定衆)과 봉행(奉行)을 영내에 설치하고, 호족들의 사법권 행사를 억제하며 권력을 호조 가문으로 집중시켜 번영의 기반을 닦았다.

우지쓰나는 호랑이 인판장을 사용하여 징수 명령의 효력을 규정하고, 군대와 대관의 백성 및 장인에 대한 불법적인 착취를 억제하는 체제를 정비했다. 인판장의 출현으로 전국 다이묘의 마을과 백성에 대한 직접 지배가 가능해졌다.

니라야마성이 아닌 오다와라성을 본성으로 삼고, 가독 상속과 함께 대대적인 검지를 실시하고 안도장을 발급했다. 1521년부터 1527년까지 칸카와 신사 보전, 하코네 신사 보전, 이즈야마 곤겐 재건 등 사찰 및 신사 조영 사업을 활발히 추진하며 '소슈 타이슈'를 자칭, 사가미 지배자임을 주장했다.

쓰루가오카 하치만구. 가나가와현 가마쿠라시.


우지쓰나 시대에 후호조씨의 지성 체제가 확립되어 오다와라성을 중심으로 니라야마성, 타마나와성, 미사키성(아라이성), 코기세성, 에도성, 가와고에성이 영역 지배의 거점이 되었다. 특히 타마나와 성주였던 셋째 아들 타메마사는 가와고에 성주도 겸임하며 우지야스에 필적하는 중요한 지위를 차지했다.

중세에 폐지되었던 전마 제도를 부활시켜 영내 물자 유통 및 수송을 정비하고, 검지로 늘어난 전지와 공수한 은전, 교통 요충지에 고령소(직할지)를 설치하여 측근을 대관으로 임명했다. 직인 집단을 모아 상인과 직인을 통제하고 연공 외 제역 및 제공사를 부과했으며, 1530년에는 오다와라 성하의 쓰다 후지베에에게 람병전(람염 업자에 대한 부과금) 징수를 허락하는 호랑이 인판장을 발급했다. 1538년에는 이즈와 사가미의 피작 (피혁 가공 직인)에 촉두를 두어 무구 제작에 필요한 피작을 장악했다.

1526년 화재로 소실된 가마쿠라 쓰루가오카 하치만구 조영 사업은 우지쓰나의 대사업 중 하나였다. 1532년부터 시작된 공사는 코후쿠지의 번장을 불러들여 진행되었고, 간토 제영주에게 봉가를 요구했으나 양 우에스기씨는 거부했다. 1540년 상궁정전이 완성되어 호조 일문이 참석한 가운데 낙경식이 거행되었으며, 조영 사업은 우지야스 시대인 1544년까지 계속되었다. 미나모토노 요리토모 이래 무문의 수호신인 쓰루가오카 하치만구 재흥은 집권 호조 씨와 가마쿠라 칸페이 등 동국 무가 정권의 정치적 계승자를 자처하는 의미를 지녔다.

1541년 5월, 우지쓰나는 후계자 호조 우지야스에게 5개조의 훈계장을 남겼다. 그 내용은 의리, 백성 사랑, 겸손, 검약, 승리 후 교만 경계 등이었다.

5. 가족 관계

호조 소운을 아버지로, 호조 게난을 동생으로 두었다. 어머니는 난뇨인 도노이다. 부인은 요주인 도노이며, 측실은 고노에 도노이다. 요주인 도노와의 사이에서 호조 우지야스를 낳았으며, 호조 쓰나시게를 양자로 들였다. 그 외에 자녀로는 호조 타메마사(1520년-1542년), 호조 우지타카(1522년-1562년)가 있었다. 딸로는 조신인(오타 스케타카와 결혼), 기라 요리야스와 결혼한 딸, 아시카가 하루우지와 결혼하여 호슌인이라 불린 딸, 호리코시 사다토모와 결혼한 사키히메, 호조 쓰나모리와 결혼한 다이초인, 가쓰라야마 우지모토와 결혼한 치요가 있었다. 우지쓰나에게는 두 명의 정실과 네 명의 아들, 여섯 명의 딸이 있었던 것으로 확인된다.

정실은 양주원(養珠院)이며, 장남은 호조 우지야스이다. 계실은 근위전(近衛殿)으로, 간파쿠 고노에 히사미치의 딸이다. 어머니가 불명확한 자식으로는 요절한 차남, 호조 다메마사, 호조 우지타카가 있다. 딸로는 오타 스케타카의 아내가 된 정심원, 호조 쓰나나리의 아내가 된 다이초인, 기라 요리야스의 아내가 된 세타가야고쇼, 아시카가 하루우지의 아내가 된 호슌인이 있었다. 또한 호리코시로쿠로의 아내 사키히메(고겐인), 가쓰라야마 우지모토의 아내 치요가 있었다. 양자로는 호조 쓰나나리가 있다.

정실 양주원의 출신은 불명확하다. 이본오다와라키에는 호리코시 공방의 가신에 호조씨가 있어 호리코시 공방 아시카가 마사토모의 명령을 받고 그 딸을 우지쓰나의 아내로 했다는 전승이 있다. 이 기록은 소즈이의 가계가 호조씨로 개성하기 위한 꾸밈으로 간주되었지만, 근년에 발견된 "다카하시케 카코쵸"에는 양주원을 "다이에이 7년 정해년 7월 17일 멸망", "요코에 호조 사가미노카미 녀"라고 적고 있다. "요코에"가 고호조씨의 가신에게도 그 이름이 있고, 가마쿠라 호조씨의 말예를 자칭했던 요코이씨(오와리 국 출신)의 일이라면, 양주원의 출신이 호조씨로 여겨지는 전승에도 재검토가 필요하다.

계실인 근위전은 간파쿠 고노에 히사미치의 딸이며, 1531년부터 1532년 무렵에 결혼했다고 추측되지만, 남동생인 고노에 다네이에는 이 무렵에는 31세가 되어 있고, 당시 여성으로서는 만혼이기 때문에 외교적인 필요로 인한 명목적인 것이라고 생각된다.

사키히메는 아들 기라 우지토모(호리코시 우지토모)가 기라 씨를 계승했기 때문에, 기라 요리야스의 아내와 혼동되는 경우가 많았지만 다른 사람이다.

6. 각주

7. 외부 링크

참조

[1] 웹사이트 Hōjō Ujitsuna https://kotobank.jp/[...] kotobank 2021-10-17
[2] 서적 A History of Japan, 1334–1615 Stanford University Press
[3] 서적 The Samurai Sourcebook Cassell & Co.
[4] 웹사이트 三代氏康と合戦 https://www.city.oda[...] Odawara city official 2021-10-18
[5] 문서 [[小笠原氏|京都小笠原氏]]の当主。北条氏家臣の[[小笠原元続]]の祖父、元続の子・[[小笠原康広|康広]]および[[細川氏|細川家]]家臣[[小笠原秀清|小笠原少斎]]の曽祖父にあたる。
[6] 웹사이트 総論 北条氏綱論 https://www.ebisukos[...] 戒光祥出版 2016-06-00
[7] 웹사이트 五箇条の御書置の書き下し文と訳 - 出典サーチ http://www.kokin.rr-[...] 古今名言集~座右の銘にすべき言葉~ 2012-07-30
[8] 문서 「宮﨑文書」戦国遺文後北条氏編3535
[9] 문서 「雀神社鰐口銘写」戦国遺文後北条氏編4355
[10] 문서 『鎌倉殿并古河・喜連川様御代之盃名帳』
[11] 문서 『兼右卿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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