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콘 5세
1. 개요
호콘 5세는 1299년부터 1319년까지 노르웨이의 국왕이었다. 망누스 6세의 아들로 태어났으며, 형 에이리크 2세가 후사 없이 사망하면서 왕위를 계승했다. 재위 기간 동안 한자 동맹과의 갈등, 스웨덴과 덴마크의 내정 간섭으로 왕권이 약화되었고, 수도를 베르겐에서 오슬로로 이전했다. 호콘 5세는 아케르스후스 요새와 보후스 요새 건설을 진행했으며, 외손자인 스웨덴의 망누스 4세가 그의 뒤를 이어 노르웨이 왕이 되었다. 그는 오슬로의 성 마리아 교회에 묻혔으며, 이후 유해가 발견되어 아케르스후스 성의 왕실 묘소에 재안치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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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19년 사망 -
정신부주
충렬왕의 첫 번째 왕비였던 정신부주는 원 세조의 딸 제국대장공주가 왕비가 되면서 제2비로 밀려나 별궁에서 40여 년간 지내다 제국대장공주 사후에 궁으로 돌아와 정신부주로 불렸고 불교에 귀의하여 전등사와 인연을 맺었다. -
1319년 사망 -
에리크 6세 (덴마크)
에리크 6세는 에스트리센 가 출신으로 1286년부터 1319년까지 덴마크를 통치한 국왕이었으나, 잦은 전쟁과 사치로 덴마크를 파산시켜 "붕괴 시대"의 중심 시기로 평가받는다. -
1270년 출생 -
미켈레 다 체세나
미켈레 다 체세나는 프란체스코회 총장, 신학자로서 교황 요한 22세와 청빈 문제로 대립하며 교황의 권위에 도전하고, 파문당한 후에도 복음적 청빈을 옹호하다가 1359년에 복권되었다. -
1270년 출생 -
레이시 내친왕 (1270년)
레이시 내친왕은 1270년 고후카쿠사 천황의 황녀로 태어나 고니조 천황의 준모로 책립되었으며, 고우다 상황에게 총애를 받았으나 1307년 병으로 사망했다. -
스베리르가 -
망누스 6세
13세기 노르웨이 국왕 망누스 6세는 스코틀랜드와의 관계를 정리하고 전국법과 도시법을 제정하여 왕권 강화에 기여했으나, 성급한 개정으로 '개법왕'이라 불리며 후대 노르웨이에 큰 영향을 미쳤다. -
스베리르가 -
에이리크 2세
에이리크 2세는 망누스 6세의 아들로 1280년부터 1299년까지 노르웨이를 통치하며 덴마크, 한자 동맹과의 갈등을 겪었고 스코틀랜드와의 관계 개선을 위해 노력했으나 후계자 없이 사망하여 왕위는 동생에게 넘어갔다.
2. 생애
망누스 6세의 아들로 태어났다. 1299년 형인 에이리크 2세가 아들 없이 사망하면서 노르웨이의 왕위 계승법에 따라 왕위를 승계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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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콘은 노르웨이의 법률 제정자 마그누스 왕과 그의 아내 덴마크의 잉에보르 사이에서 태어난 둘째 아들이었다. 어머니를 통해 덴마크 왕 에릭 4세의 후손이었다.
국왕으로 재위하는 동안 한자 동맹과 통상 등 여러 분야에서 이권을 두고 대립하면서 왕권이 약화되었다. 이로 인해 노르웨이는 한동안 스웨덴과 덴마크의 내정 간섭을 받았다. 베르겐에서 오슬로로 수도를 옮긴 후에는 지방 통제에 힘썼다.
1319년, 호콘은 아들이 없었기 때문에 그의 딸 잉에보르의 아들인 망누스 7세에게 왕위를 물려주었다. 어린 망누스 7세를 대신해 잉에보르가 섭정을 맡았고, 하브토레 존손이 이듬해 사망할 때까지 섭정 정부에 참여했다.
호콘의 장녀는 아그네스 호콘스다터 공주였으며, 1290년 시구르드 로딘손의 딸이자 바우게이 Steinarsdatter의 아내인 그로 시구르즈다터와의 사이에서 혼외 관계로 태어났다.
2.1. 초기 생애
망누스 6세의 아들로 태어났다. 1273년 형 에이리크 2세가 아버지 망누스 왕의 치세 하에 부왕으로 지명되었다. 동시에 호콘은 "노르웨이 공작" 칭호를 받았으며, 1280년 아버지 사후 동부 노르웨이 오슬로와 남서부 스타방에르를 중심으로 한 넓은 지역을 에이리크 왕에게 종속되어 통치했다. 1299년 형이 아들 없이 사망하자 노르웨이 왕위 계승법에 따라 왕위를 계승했다.
1295년 호콘은 조니 백작 장 1세의 딸 이사벨과 결혼했으나, 1297년 자녀 없이 사망했다. 1299년 초 비츠슬라프 2세의 딸 에우페미아와 재혼, 1301년 잉에보르 호콘스도테르 공주를 낳았다.
2.2. 노르웨이 국왕 즉위
망누스 6세의 아들이자 에이리크 2세의 동생으로, 1299년 형이 아들 없이 사망하면서 노르웨이 왕위 계승법에 따라 왕위를 승계받았다.
1295년 조아니 백작 장 1세의 딸 이자벨과 결혼했으나 자녀 없이 1297년 사망했다. 1299년 비츠슬라프 2세의 딸 에우페미아와 재혼하여 1301년 딸 잉에보르를 낳았다.
호콘 5세는 형 에이리크 2세와 달리 한자 동맹과 통상 및 이권 문제로 대립하며 왕권이 약화되었다. 또한 스웨덴과 덴마크의 내정 간섭을 받았다.
외손 망누스(스웨덴의 망누스 4세, 노르웨이의 망누스 7세)가 왕위를 계승했다.
2.3. 통치 기간
망누스 6세의 아들로 태어났다. 1299년 형인 에이리크 2세가 아들 없이 사망하면서 노르웨이의 왕위 계승법에 따라 왕위를 승계받았다.
1295년, 호콘은 조니 백작 장 1세의 딸 이사벨과 결혼했지만, 1297년 자녀 없이 사망했다. 1299년 비츠슬라프 2세의 딸 에우페미아와 재혼하여, 1301년 딸 잉에보르 호콘스도테르 공주를 낳았다.
호콘의 통치 기간 동안 오슬로는 공식적인 선포는 없었지만 점차 노르웨이의 수도로서 베르겐의 기능을 이어받았다. 아케르스후스 요새와 보후스 요새 건설도 진행했다. 그의 통치 기간 동안 형의 덴마크에 대한 전쟁 정책을 부활시켰지만, 1309년에 종전했는데, 이는 일반적으로 덴마크-노르웨이 전쟁의 종결을 의미했다. 국내 문제에 있어서는 유력자들의 권력을 제한하고 왕의 권력을 강화하기 위해 적극적이고 성공적으로 노력했다.
한자 동맹과 통상 등의 분야에서 각종 이권을 놓고 대립하면서 왕권이 약화되었다. 이를 계기로 노르웨이는 한동안 스웨덴, 덴마크의 내정 간섭을 받았다.
1319년 호콘은 딸의 아들인 마그누스 7세에게 왕위를 물려주었고, 그는 아직 어린아이였다. 호콘의 딸 잉에보르는 아들의 섭정으로 인정받았다. 하브토레 존손은 이듬해 사망할 때까지 섭정 정부에 참여했다.
호콘은 오슬로의 성 마리아 교회에 묻혔다. 그 교회의 유적 발굴 과정에서 호콘과 에우페미아로 추정되는 두 사람의 유해가 발견되어 아케르스후스 성의 왕실 묘소에 재안치되었다.
2.4. 사망과 계승
1299년 에이리크 2세가 아들 없이 사망하면서, 노르웨이의 왕위 계승법에 따라 호콘 5세가 왕위를 계승했다. 그는 한자 동맹과의 대립으로 왕권이 약화되었고, 스웨덴과 덴마크의 내정 간섭을 받았다. 이를 계기로 노르웨이의 수도를 베르겐에서 오슬로로 이전하고 지방 통제에 주력했다.
호콘 5세는 슬하에 아들이 없었기 때문에, 1319년 외손자인 망누스 7세에게 왕위를 물려주었다. 그의 딸 잉에보르는 어린 아들의 섭정으로 인정받았다.
호콘 5세는 오슬로의 성 마리아 교회에 묻혔다. 이후 교회 유적 발굴 과정에서 호콘 5세와 에우페미아로 추정되는 두 사람의 유해가 발견되어 아케르스후스 성의 왕실 묘소에 재안치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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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 매장
호콘은 오슬로의 성 마리아 교회(Mariakirken)에 묻혔다. 그 교회의 유적 발굴 과정에서 호콘과 에우페미아로 추정되는 두 사람의 유해가 발견되어 아케르스후스 성의 왕실 묘소에 재안치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