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석화각공주
1. 개요
화석화각공주는 청나라 건륭제의 딸로, 1758년에 태어나 1780년에 사망했다. 그녀는 찰란태에게 하가하여 결혼했으며, 화석화각공주로 봉해졌다. 23세의 젊은 나이에 폐결핵으로 사망했으며, 딸을 낳았다. 사후, 건륭제는 그녀의 딸을 궁에서 양육하고, 외손녀의 혼인을 결정했다.
| 이름 | 화석화각공주 |
|---|---|
| 로마자 표기 | Heshúo Hékè Gōngzhǔ |
| 배우자 | 1등무의무용공 오아 찰란태 |
|---|---|
| 자녀 | 딸 1명 |
| 부친 | 건륭제 |
|---|---|
| 모친 | 효의순황후 위가씨 |
| 형제 | 황14자 영로 (동복형제) |
| 형제 | 황15자 가경제 (동복형제) |
| 형제 | 황16자 (요절) (동복형제) |
| 형제 | 황17남 화석경친왕 영린 (동복형제) |
| 자매 | 황7녀 고륜화정공주 (동복형제) |
| 출생일 | 건륭 23년 7월 14일 (1758년 8월 17일) |
|---|---|
| 사망일 | 건륭 45년 11월 19일 (1780년 12월 14일) |
| 향년 | 23세 |
| 사망 장소 | 베이징 |
| 묻힌 곳 | 차오양 구, 베이징 |
| 왕가 | 아이신-교로 (출생) |
|---|---|
| 가문 | 오야 (결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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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80년 사망 -
히라가 겐나이
히라가 겐나이는 에도 시대에 의사, 작가, 발명가, 화가 등 다방면에서 활동한 인물로, 엘렉키텔 연구, 풍자 소설 및 정루리 작품 발표 등 활발한 활동을 펼쳤으며 과학 기술 발전에도 기여했으나 말년에 수수께끼에 싸인 채 생을 마감하여 현대에도 재해석되고 있다. -
1780년 사망 -
윌리엄 블랙스톤
윌리엄 블랙스톤은 1723년에 태어나 1780년에 사망한 영국의 법학자이자 법관이며, 《잉글랜드 법 해설》을 저술하여 영국과 미국의 법률 교육에 큰 영향을 미쳤다. -
화석공주 -
화석화가공주
화석화가공주는 청나라 건륭제의 딸로, 부찰 부항의 차남 복륭안과 혼인했으며 23세에 사망했고, 소설 《황제의 딸》의 하자미의 모티브가 되었다. -
화석공주 -
장경화석공주
장경화석공주는 건륭제의 손녀이자 가경제의 딸로, 몽골 귀족과 혼인하여 청나라 황실의 몽골 세력 안정에 기여했으나, 자녀 없이 천연두로 사망하고 사후 셍게린첸이 양자로 들어왔다. -
청나라의 종실 -
고륜순희공주
고륜순희공주는 순치제의 서손녀이자 화석공친왕의 서녀로 강희제의 총애를 받았으며 몽골 귀족 반디의 두 번째 부인이었으나 자녀는 없었고 70세에 사망하였다. -
청나라의 종실 -
롱슈
청나라 공주 롱슈는 공충친왕 혁흔의 딸이자 서태후의 양녀로, 궁중에서 성장하여 부찰 지단과 결혼 후 사별하고 고륜공주로 진봉되었으며, 서태후에게 간언을 자주 하는 등 총애를 받았다.
2. 생애
건륭 23년(1758년) 7월 14일에 태어났으며, 어머니가 사망한 후에는 영황의 장남 면덕과 함께 상을 입었다. 건륭 36년(1771년) 12월, 화석화각공주로 봉해졌다. 그녀는 청나라 황녀들 중 유일하게 어머니가 황후로 추존되고 성년이 되었지만, 고륜공주로 승격하지 못한 공주이다.
건륭 29년(1764년), 조혜가 베이징에서 병사하자, 건륭제는 화각공주를 찰란태에게 하가하는 것을 허락하였다. 건륭 37년(1772년) 8월, 정식으로 오야 가문 출신의 찰란태에게 하가했고, 자녕궁에서 연회가 열렸다. 화석화각공주는 경성에 거주했기 때문에 혼수품 중 일부가 건륭제에게 돌아갔다. 이러한 감축은 사실상 공주의 예를 삭감한 것으로, 건륭제의 다른 공주들의 최저 수준이었다.
건륭 38년(1773년) 10월, 딸 하나를 낳았다. 건륭 45년(1780년) 11월 19일, 폐결핵으로 23세의 젊은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침상용 자재 은수는 총 11674냥으로, 원래 예산보다 195냥 더 많았다. 원침의 규모와 비용은 건륭제의 양녀인 화석화완공주보다 낮았다.
2.1. 출생과 초기 생애
건륭 23년(1758년) 7월 14일에 태어났다. 건륭 29년(1764년) 6월 4일, 생모 신빈 배이갈사씨가 사망하였다. 신빈이 죽자, 화석화각공주와 영황의 장남인 면덕이 입상하였다. 양어머니는 서비 예허나라 가문 출신이었다.
2.2. 혼인
건륭제 29년(1764년), 조혜가 베이징에서 병사하자 건륭제가 친히 그 집에 가서 제사를 지내며 화각공주를 찰란태(札蘭泰)에게 하가(下嫁)하는 것을 허락하였다. 건륭 36년(1771년) 12월, 화석화각공주(和碩和恪公主)로 봉해졌다. 건륭 37년(1772년) 8월, 정식으로 협찬대학사(協辦大學士)이자 1등 무의무용공(武毅謀勇公) 조혜의 아들인 오아 찰란태(烏雅 札蘭泰)에게 하가하였고, 자녕궁에서 연회가 열렸다.
2.3. 사망
건륭 38년(1773년) 10월, 딸 하나를 낳았다. 건륭 39년(1774년), 경귀비 육씨가 북소화원에서 사망하자, 화각공주와 황제 15남 영염이 입상하였다. 건륭 45년(1780년) 11월 19일, 어의들이 전력을 다했으나, 화각공주는 폐결핵으로 23세의 젊은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침상용 자재 은수는 총 11674냥으로, 원래 예산인 11478냥보다 195냥 더 많았다. 씀씀이는 허락되지 않고, 원래 추산한 은량에서 모두 처리하였는데, 원침의 규모와 비용은 건륭제의 양녀인 화석화완공주보다 낮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