효의순황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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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효의순황후는 청나라 건륭제의 후궁이자 가경제의 생모로, 최종 시호는 효의공순강유자인단각민철익천육성순황후이다. 본래 만군 정황기 포의인 출신으로 건륭제에게 총애를 받아 귀인, 영빈, 영비, 영귀비, 황귀비를 거쳐, 건륭 60년에 황후로 추존되었다. 슬하에 2남 2녀를 두었으며, 건륭제의 계황후가 폐위된 후 황귀비로서 육궁을 통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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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나라 건륭제의 황후인 계황후는 휘발나랍씨로, 황귀비에서 황후가 되었으나 강남 순행 중 머리를 자른 사건으로 폐위되어 시호도 받지 못했으며, 그녀의 성씨, 생년, 폐위 경위 등은 논쟁의 여지가 있다. - 건륭제의 황후 - 효현순황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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효의인황후는 청나라 강희제의 황후이자 옹정제의 양모로, 귀비에서 황귀비를 거쳐 황후가 되었으나 자녀는 없었고 옹정제 교육에 힘썼으며, 옹정제 즉위 후 시호를 받고 태묘에 배향되었다. - 한군 기인 - 돈숙황귀비
돈숙황귀비 연씨는 옹정제의 후궁으로, 옹친왕 시절부터 그의 측실이었으며 옹정제 즉위 후 귀비, 황귀비로 책봉되었으나 요절한 자녀가 많았고 사망 후 돈숙황귀비라는 시호를 받았다.
효의순황후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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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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휘 | 위(魏), 후에 위갸(魏佳氏) |
씨족 | 만주족 양황기 포의관령 소속 |
사후 시호 | 효의공순강유자인단각민철익천육성순황후(孝儀恭順康裕慈仁端恪敏哲翼天毓聖純皇后) |
생애 | |
출생 | 1727년 10월 23일 (옹정(雍正) 5년 9월 9일) |
사망 | 1775년 2월 28일 (건륭(乾隆) 40년 1월 29일) |
사망 장소 | 자금성, 베이징 |
묻힌 곳 | 유릉, 청 동릉 |
가족 관계 | |
배우자 | 건륭제 (1745년 결혼) |
자녀 | 화정고륜공주 화각화석공주 가경제 경희친왕 영린 |
아버지 | 위 청태(魏淸泰) |
어머니 | 양갸씨(楊佳氏) |
기타 | |
만주어 시호 | hiyoošungga yongsonggo yongkiyaha hūwangheo |
2. 생애
건륭제 재위 기간에 입궁하여, 건륭 10년(1745년) 귀인(貴人)으로 책봉되었다가 같은 해 영빈(令嬪)으로 진봉되었다. 건륭 14년(1749년) 영비(令妃)로 진봉되었다. 건륭 21년(1756년) 황7녀 화정공주를 낳았고, 건륭 22년(1757년) 황14자 영로(永璐), 건륭 23년(1758년) 황9녀 화격공주를 낳아 건륭 24년(1759년) 귀비(貴妃)로 진봉되었다. 건륭 25년(1760년) 황15자 가경제를 낳았고, 건륭 27년(1762년) 황16자를 낳았으나 일찍 죽었다. 건륭 31년(1766년) 황17자 영린(永璘)을 낳았다.
건륭 30년(1765년), 휘발나랍씨가 유폐된 직후 황귀비(皇貴妃)로 특진되어 황후 대리로서 육궁(六宮: 내명부)을 통솔했다. 청나라의 황귀비는 황후 내정자에게 주어지는 작위이나, 건륭제가 새 황후를 책립하지 않아 황후에 오르지 못했다.
건륭 40년(1775년) 황귀비 신분으로 사망하여 '영의황귀비'(令懿皇貴妃)란 시호를 받았다.[1] 청동릉 유릉(裕陵)에 안장되었으며, 효현순황후와 사이가 좋았다고 전해진다. 건륭 60년(1796년) 가경제가 즉위하자 황제의 생모 자격으로 황후로 추존되었으며, 최종 시호는 '''효의공순강유자인단각민철익천육성순황후'''(孝儀恭順康裕慈仁端恪敏哲翼天毓聖純皇后)이다.[1] 1928년 유릉 도굴 후 조사 결과, 효의순황후의 유해가 잘 보존되어 있었다.[2]
2. 1. 가계와 초기 생애
원래 성은 위(魏)씨로, 내총령 ᠪᠣᠣᡳ ᠨᡳᠶᠠᠯᠮᠠ|Booi Niyalmamnc 위청태(魏淸泰)의 딸이다. 본래 만군 정황기(正黃旗) 포의 출신이었으나, 후에 건륭제가 위씨의 소속을 만주 양황기의 기분 니루로 변경하고 '위가씨'(魏佳氏, ᠸᡝᡳᡤᡳᠶᠠ|Weigiyamnc)라는 만주 성씨를 하사하였다.[1] 효의순황후의 이름은 역사에 기록되어 있지 않다. 그녀는 한족 출신으로, 정황기 소속이었다.[2]건륭제의 재위 연간에 입궁해 건륭 10년(1745년)에 귀인(貴人)으로 책봉됐다가 같은 해 영빈(令嬪)으로 진봉되었다. 건륭 13년(1748년) 영비(令妃)로 진봉됐다.[1][2]
건륭 21년(1756년)에 첫 아이를 출산하여 황7녀 화정공주를 낳았으며,[1] 건륭 22년(1757년)에는 황14자 영로(永璐),[1][2] 건륭 23년(1758년)에는 황9녀 화격공주를 낳아[1][2] 건륭 24년(1759년)에 귀비(貴妃)로 진봉됐다.[1] 건륭 25년(1760년)에 황15자를 생산했는데, 그가 바로 건륭제를 이어 7대 황제로 등극하는 가경제이다.[1][2] 건륭 27년(1762년)에 황16자를 낳았으나 일찍 죽었다. 건륭 31년(1766년)에 황17자 영린(永璘)을 낳았다.[1][2]
건륭제의 비 중에서 가장 많은 4남 2녀를 낳았다.[2]
아버지 | 위청태(魏清泰) - 내관령(內管領)이라는 5품 문관직을 역임했고, 삼등공(三等公)이라는 3등작의 작위를 받았다.[2] |
---|---|
외조부 | 웨이지우링(魏九齡)[2] |
어머니 | 양가씨(楊佳氏)[2] |
언니 | 1명[2] |
2. 2. 건륭제의 후궁
魏氏중국어는 옹정제 재위 시기(1722-1735)에 내무부에 선발되어 궁녀로 후궁에 들어갔으며, 첫 번째 황후인 효현순황후로부터 교육을 받았다. 건륭제 즉위 후에는 다음과 같은 작위를 받았다.[1]:1[2]:2[3]:3[4]:4[5]:5시기 | 작위 | 품계 | 비고 |
---|---|---|---|
1745년 | 귀인(貴人중국어) | 6품 | 18세에 책봉 |
1745년 12월 9일 | 영빈(令嬪중국어) | 5품 | 영(令)은 영리하고 유쾌하다는 의미 |
1749년 5월 20일 | 영비(令妃중국어) | 4품 | |
1760년 2월 3일 | 영귀비(令貴妃중국어) | 3품 | |
1765년 7월 28일 | 황귀비(皇貴妃중국어) | 2품 | 휘발나랍씨 유폐 직후 |
1775년 3월 12일 | 영의황귀비(令懿皇貴妃중국어) | (추존) | 사후 추존 |
1796년 | 효의황후(孝儀皇后중국어) | (추존) | 가경제 즉위 후 추존 |
1799년 | 효의순황후(孝儀純皇后중국어) | (추존) |
건륭제의 비 중에서 가장 많은 4남 2녀를 낳았다.
출생년도 | 자녀 | 비고 |
---|---|---|
1756년 | 고륜화정공주(固倫和靜公主) (황7녀) | |
1757년 | 황14자 영로(永璐) | 1760년 요절 |
1758년 | 화석화각공주(和碩和恪公主) (황9녀) | |
1760년 | 애신각라 영염(永琰) (황15자) | |
1763년 | 황16자 | 1765년 요절 |
1766년 | 애신각라 용린 (황17자) |
1765년 두 번째 황후인 황후 나라씨가 폐위된 후, 황귀비로 진봉되어 황후 대리로서 육궁(六宮: 내명부)을 통솔했다. 건륭제는 새로이 황후를 책립하지 않았기 때문에, 황귀비 신분으로 1775년 사망할 때까지 사실상 황후의 역할을 수행했다. 그녀는 조상 제단에서 의례를 주관하고, 인사를 평가하고, 예산을 승인하고, 황자들의 교육을 감독하고, 모든 황실 결혼을 계획했다. 또한 정기적으로 환관, 궁녀, 황제의 다른 후궁들과 황녀들을 만났고, 건륭제와 함께 태산, 적하, 장강 남쪽 지역으로 유람을 동행했다.
2. 3. 황귀비 시기
건륭 30년(1765년), 건륭제의 계후(繼皇后)였던 휘발나랍씨가 유폐된 직후 황귀비(皇貴妃)로 특진되어 황후 대리로서 육궁(六宮: 내명부)을 통솔했다.[1] 청나라의 황귀비는 황후 내정자에게 일시적으로 주어지는 작위이기도 하나, 건륭제가 새로운 황후를 책립하는 것을 거부했기 때문에 황후에 오르지 못했다.[1]황귀비가 되기 전의 행적은 다음과 같다.
시기 | 내용 |
---|---|
건륭 10년 (1745년) | 귀인(貴人)으로 책봉, 같은 해 영빈(令嬪)으로 진봉.[1] |
건륭 14년 (1749년) | 영비(令妃)로 진봉.[1] |
건륭 21년 (1756년) | 황7녀 화정공주(和碩和靜公主) 출산.[1] |
건륭 22년 (1757년) | 황14자 영로(永璐) 출산.[1] |
건륭 23년 (1758년) | 황9녀 화격공주(和碩和恪公主) 출산.[1] |
건륭 24년 (1759년) | 귀비(貴妃)로 진봉.[1] |
건륭 25년 (1760년) | 황15자 가경제 출산.[1] |
건륭 27년 (1762년) | 황16자 출산 (조졸).[1] |
건륭 31년 (1766년) | 황17자 영린(永璘) 출산.[1] |
2. 4. 죽음과 추존
건륭 30년(1765년), 건륭제의 계황후였던 휘발나랍씨가 유폐된 직후 황귀비(皇貴妃)로 특진되어 황후 대리로서 육궁(六宮: 내명부)을 통솔했다. 청나라의 황귀비는 황후 내정자에게 일시적으로 주어지는 작위이기도 하나, 건륭제가 새로이 황후를 책립하기를 거부한 탓에 황후에 오르지 못하고 건륭 40년(1775년)에 황귀비의 신분으로 사망했으며, '영의황귀비'(令懿皇貴妃)란 시호를 받았다.[1] 령비(令妃)는 1775년 2월 28일, 장녀가 사망한 지 한 달도 채 되지 않아 47세의 나이로 사망하였다. 같은 해 3월 12일, 그녀는 사후에 령의비(令懿妃)로 추봉되었다. 11월 19일, 령의비는 일반적인 의비의 장례보다 훨씬 화려한 장례를 치른 후 청동릉의 유릉(裕陵)에 안장되었다.[2] 옛날에 섬겼던 효현순황후와 사이가 좋았다고 전해지며, 효현순황후와 함께 유릉에 묻힌 것에 대해 건륭제는 “옛날에 당신 덕분에 나의 사랑하는 비가 된 사람이, 지금도 당신 곁에 있습니다(舊日玉成侶,依然身傍陪)”라고 읊었다.[1]건륭 60년(1796년)에 가경제가 황위에 오르자 황제의 생모 자격으로 황후로 추존되었다. 최종 시호는 '''효의공순강유자인단각민철익천육성순황후'''(孝儀恭順康裕慈仁端恪敏哲翼天毓聖純皇后)이다.[1] 1796년 2월 9일, 건륭제는 령의비를 효의황후(孝儀皇后)로 추존하고, 영연(永琰)을 가경제로 책봉하고, 자신은 태상황제가 되었다. 1799년 2월 7일 건륭제가 사망한 후, 가경제는 어머니를 효의춘황후(孝儀純皇后)로 추존하고 건륭제의 능 옆 오른쪽에 재매장하였다. 효현순황후는 왼쪽에 안장되었다.[2]
1928년 유릉이 도굴당한 후, 조사 결과 효의춘황후의 유해가 잘 보존되어 있었던 것으로 드러났다.[2]
3. 가계
관계 | 이름 | 출생 | 사망 | 비고 |
---|---|---|---|---|
남편 | 건륭제 | 1711년 9월 25일 | 1799년 2월 7일 | 청나라 제6대 황제 |
장녀 | 고륜화정공주 | 1756년 8월 10일 | 1775년 2월 9일 | 1770년 할하 보르지긴 씨 라왕돌제와 결혼 |
장남 | 영로 | 1757년 8월 31일 | 1760년 5월 3일 | 건륭제의 열네 번째 아들 |
차녀 | 화석화각공주 | 1758년 8월 17일 | 1780년 12월 14일 | 1772년 만주 우야 씨 찰란태와 결혼 |
차남 | 영염 | 1760년 11월 13일 | 1820년 9월 2일 | 건륭제의 열다섯 번째 아들, 청나라 제7대 황제[6] |
삼남 | (이름 없음) | 1763년 1월 13일 | 1765년 5월 6일 | 건륭제의 열여섯 번째 아들 |
사남 | 영린 | 1766년 6월 17일 | 1820년 4월 25일 | 건륭제의 열일곱 번째 아들, 경희친왕 |
4. 대중문화
중국 드라마 《황제의 딸》, 《연희공략》, 《여의전》 등에서 주요 인물로 등장한다. 건륭제의 총애를 받아 여섯 자녀를 낳았고 가경제의 어머니이기도 하기에 건륭대의 황실을 다루는 드라마에 빠짐없이 등장하는 편이다. 《연희공략》에서는 주인공 위영락으로, 계황후 휘발나랍 씨를 주인공으로 한 《여의전》에서는 주인공을 악랄하게 괴롭히는 악역 위연완으로 등장하였다.[1] (매체로 인해 효의순황후의 이름을 위연완 등으로 잘못 알고 있는 경우가 더러 있는데, 청대의 황실 여성들 가운데 실명이 전해져 오는 건 청초나 청말의 몇몇 후비들 뿐 대개의 황실 여인들은 그 이름이 전해지지 않는다.)[1]
- 《청나라의 흥망》(1988) - 천득화(Chan Tik-wah) 연기[1]
- 《황제의 딸》(1998) - 조려전(Zhao Lijuan) 연기[1]
- 《황제의 딸 3》(2003) - 진려(Chen Li) 연기[1]
- 《호접몽》(2007) - 천옥분(Sharon Chan) 연기[1]
- 《신황제의 딸》(2011) - 유소예(Liu Xiaoye) 연기[1]
- 《연희공략》(2018), 《연희공략: 공주 모험》(2019) - 우금연(Wu Jinyan) 연기[1]
- 《여의전》(2018) - 리춘(Li Chun) 연기[1]
- 《환주격격 ~황녀의 탄생~》(1998년, 중국) - 娟子[1]
- 《여의전 ~자금성에 흩어지는 운명의 황후~》(2017년, 중국) - 리춘[1]
- 《영락 ~자금성에 타오르는 역습의 황후~》(2018년, 중국) - 오진언[1]
참조
[1]
문서
乾隆十年 十一月 十七日
null
[2]
문서
乾隆十四年 四月 五日
null
[3]
문서
乾隆二十四年 十二月 十七日
null
[4]
문서
乾隆三十年 六月 十一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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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문서
乾隆四十年 二月 十一日
null
[6]
문서
즉위 후 피휘(避諱)를 위해 돌림자인 영(永)을 버리고 옹염(顒琰)으로 개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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