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륜화정공주
1. 개요
고륜화정공주는 건륭제의 일곱 번째 딸로, 효의순황후에게서 태어났다. 1770년 몽골 초용친왕 책릉의 손자인 납왕다이제에게 하가했다. 그녀는 고륜공주로 책봉되었지만, 결혼 후 몽골로 떠나 18세의 젊은 나이에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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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56년 출생 -
윌리엄 고드윈
윌리엄 고드윈은 영국의 정치 철학자, 소설가, 저널리스트로서 무정부주의와 공리주의 사상의 선구자로 여겨지며, 대표작 『정치적 정의에 관한 탐구』를 통해 근대 무정부주의 사상의 초석을 놓았고, 이성과 개인의 자유를 강조하며 정부와 강제적 권력을 비판했으며, 소설 『캘럽 윌리엄스』로 사회 제도와 권력의 부조리를 고발했고, 작가 메리 울스턴크래프트의 남편이자 메리 셸리의 아버지이다. -
1756년 출생 -
볼프강 아마데우스 모차르트
오스트리아 잘츠부르크 출신의 천재 작곡가 볼프강 아마데우스 모차르트는 다양한 장르에 걸쳐 900곡이 넘는 방대한 작품을 남겼고, 유럽 순회 연주 여행과 빈에서의 프리랜서 활동을 통해 성공적인 음악가 경력을 쌓았으며, 그의 음악은 독일 고전주의 음악의 정수로 평가받는다. -
1775년 사망 -
존 해리슨
존 해리슨은 영국의 시계 제작자로, 해상용 크로노미터(H4)를 발명하여 경도 문제 해결에 기여했으며, 혁신적인 기술 개발과 장기간의 연구 끝에 정확한 경도 측정을 가능하게 했으나, 당시 과학계의 반대와 어려움을 겪기도 했다. -
1775년 사망 -
효의순황후
효의순황후는 건륭제의 총애를 받은 후궁으로, 황귀비까지 올라 황후의 역할을 대행하며 가경제의 생모로서 사후 황후로 추존되었으나, 권력욕에 대한 비판적 시각도 있다. -
고륜공주 -
고륜순희공주
고륜순희공주는 순치제의 서손녀이자 화석공친왕의 서녀로 강희제의 총애를 받았으며 몽골 귀족 반디의 두 번째 부인이었으나 자녀는 없었고 70세에 사망하였다. -
고륜공주 -
수장고륜공주
함풍제의 이복 여동생인 수장고륜공주는 박라특 덕휘와 혼인 후 사별했으며 함풍제, 동치제, 광서제의 총애와 공경을 받았다.
2. 어린 시절
건륭 21년(1756년) 7월 15일 인시에 원명원 오복당에서 태어났다.
건륭 28년(1764년) 4월 28일, 흔귀비 대가씨가 난산으로 사망하자, 8공주와 함께 경교 외곽의 정안장으로 가서 흔귀비에게 효를 다했다.
건륭 29년(1764년) 1월 7일, 건륭제는 납왕다이제에게서 10년치 봉급을 지급하고 내무부 대신에게 전당포를 열어 이자를 벌게 했는데, 원금과 이자를 합쳐 17,147냥으로 1년에 2천냥을 벌 수 있었다. 당시 7공주는 겨우 9살이었다.
건륭 35년(1770년) 1월, 7공주는 황제의 은덕을 입어 고륜화정공주(원래는 화석공주)로 진봉했지만, 실제 처우는 적누이인 고륜화경공주보다 훨씬 못했고, 대부분 화석공주로 대접 받았다. 화정공주는 연봉 은 400냥, 화경공주는 1000냥이었다.
3. 혼인
건륭 35년(1770년), 화정공주는 몽골 초용친왕 책릉의 손자이자 고륜순각공주의 아들인 납왕다이제에게 정식으로 하가했다. 7월 21일 정대광명전에서 초례를 올렸는데, 그 혼례에 사용된 술은 건륭제 이전에 출가한 공주들보다 훨씬 적었다.
건륭 36년 3월 24일, 화정공주는 타미르로 떠나 성곤자포에게 조의를 표했다. 원래 이 해 1월 10일에 출발할 예정이었으나, 칼카 지방의 추운 날씨와 봄철 눈보라를 우려하여 연기되었다. 화정공주는 6월 10일 타미르에서 경성으로 돌아와 피서산장으로 가서 황태후에게 문안 인사를 올렸다.
같은 해 6월, 호군학교는 공주가 상경하지 않아 화정공주의 일일 음식 할인 은냥을 체납하여 은 92냥 5전을 받았다. 이 때문에 장기간 파면되고 내무부의 심문을 받게 되었다. 장사 촌새는 공주부의 전곡을 관리하는 사람으로, 평소 사찰에 대비하지 못해 은과 양침을 일삼아 감봉 1년을 받았다. 8월 11일, 납왕다이제의 아버지인 장군 성곤자포가 병사하였다. 화정공주는 피서산장에 머물다 황태후를 따라 북경에 돌아왔지만, 부마와 함께 타미르에 가지 않았다. 건륭제는 내년에 다시 타미르로 가라고 공주에게 지시했지만, 공주는 경성에 머물렀다.
건륭 35년과 36년에 부마의 부모가 잇따라 사망하자, 부마는 몽골로 건너가 부모의 효를 지켰다. 건륭제는 성지를 내려 가산을 다투는 행위를 용납하지 않겠다고 경고하고, 재산을 공평하게 분배하도록 했다. 부마의 형제인 델란도르제는 이미 분가했고, 나머지 두 형제는 모두 라마가 되어 가산을 분배할 필요가 없었으므로, 남은 재산은 대부분 부마인 납왕다이제가 가졌다.
4. 죽음
건륭 40년 (1775년) 1월 10일, 화정공주는 스무 살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화정공주가 별세한 후, 장례 의례와 화정공주 원침 공사 등에 14311냥을 썼다. 이 비용과 원침 규제는 15년 전 세상을 떠난 건륭제의 양녀 화석화완공주보다 적었다. 《흠정팔기통지》에는 고륜공주의 원침 규격 등은 군왕과 같이하고, 화석공주의 원침 규격 등은 패륵, 패자와 같이 한다고 쓰여 있다. 같은 해, 고륜화정공주와 적누이인 화경공주의 부마인 색포등파륵주이도 세상을 떠났는데, 건륭제는 화경공주의 부마인 색포등파륵주이의 정삭적인 규격에 따라 비정을 지었는데 화정공주의 비정이 필요없다는 것을 확인하라는 지시를 내렸다.
부마 납왕다이제에도 속현이 있어 유일하게 재혼 기록을 갖고 있다. 화정공주는 동직문 밖에 있는 원침에 묻혔고, 고륜공주의 부마인 납왕다이제가 죽은 후에 공주와 합장하였다. 이 무덤은 현재 베이징 차오양구 둥직먼 외곽 장타이향 다청각 장촌 동쪽에 있다. 그 후, 후손인 차가바질과 증손자인 다르마의 2대 왕가 부부와 가정에 올랐다. 이 묘역에 함께 묻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