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오자스 부드라이티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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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후오자스 부드라이티스는 리투아니아의 배우, 사진 작가, 문화 외교관이다. 1940년 리투아니아에서 태어나 클라이페다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으며, 빌뉴스 대학교에서 법학을 전공했다. 1966년 영화 '아무도 죽기를 원치 않았다'로 배우 데뷔 후, '방패와 칼', '리어왕', '인생은 아름다워' 등 다수의 영화에 출연하며 배우로서 명성을 얻었다. 1990년대 이후에는 러시아 영화에도 출연했으며, 사진 작가로도 활동하며 개인 사진전을 열었다. 1995년부터 모스크바에서 리투아니아 대사관 문화 고문으로 활동하며 문화 외교에도 기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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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오자스 부드라이티스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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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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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명 | 유오자스 스타니슬라바스 부드라이티스 |
출생일 | 1940년 10월 6일 |
출생지 | 리투아니아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리에피나이 |
직업 | 배우 |
활동 기간 | 1966년–현재 |
2. 생애
유오자스 스타니슬라바스 부드라이티스는 1940년 리투아니아 SSR에서 태어나 빌뉴스 대학교 법학부에 재학 중이던 1966년 영화 ''아무도 죽기를 원치 않았다''에 출연하며 배우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2] 이후 리투아니아 영화 스튜디오 소속 배우로 활동하며 소련 전역에서 인지도를 쌓았고, 리투아니아뿐만 아니라 다른 공화국 영화에도 다수 출연했다.[2]
1970년대 후반에는 모스크바에서 영화 연출을 공부하고 감독 데뷔를 시도했으나 큰 성공을 거두지는 못했다.[2] 1980년대에는 카우나스 국립 드라마 극장 소속으로 연극 무대에서도 활발히 활동했으며, 영화와 텔레비전 시리즈에도 꾸준히 출연하며 대중적인 인기를 누렸다.[2]
리투아니아가 독립한 1990년대 이후에도 리투아니아와 러시아를 오가며 영화 및 연극 활동을 지속했다.[2] 또한 1995년부터는 모스크바 주재 리투아니아 대사관의 문화 고문 및 참사관으로 활동하며 문화 외교 분야에서도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다.[2]
2. 1. 초기 생애 및 교육
유오자스 스타니슬라바스 부드라이티스는 1940년 10월 6일 리투아니아 SSR 켈메의 리에피나이 마을에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났다. 1945년 가족은 클라이페다로 이사했고, 1955년에는 작은 마을인 슈베크슈나로 다시 이사했다.[2]1958년부터 1960년까지 부드라이티스는 클라이페다의 훈련 및 생산 공장에서 노동자로 일했다. 군 복무를 마친 후, 그는 빌뉴스 대학교 법학부에 입학했다. 대학 3학년 때, 그는 비타우타스 잘라케비치우스 감독의 영화 ''아무도 죽기를 원치 않았다''(1966년 개봉)에서 주요 배역 중 하나를 맡게 되었다. 이 영화 출연으로 인해 부드라이티스는 3학년 과정을 통신으로 마치고 통신학과로 전과했다. 1968년 대학을 졸업하고 리투아니아 영화 스튜디오에서 배우로 활동하기 시작했으며, 이때 이미 그는 유명한 배우가 되어 있었다.[2]
2. 2. 배우 경력
빌뉴스 대학교 법학부에 재학 중이던 3학년 때 비타우타스 잘라케비치우스 감독의 영화 ''아무도 죽기를 원치 않았다''(1966)에 출연하며 배우 활동을 시작했다.[2] 이를 계기로 통신 과정으로 학업을 전환하여 1968년 대학을 졸업했으며, 이후 리투아니아 영화 스튜디오 소속 배우로 본격적인 활동을 펼쳤다.[2]부드라이티스는 소련 시절 리투아니아를 넘어 다른 공화국 영화에도 다수 출연하며 폭넓은 인지도를 쌓았다. 1960년대 후반부터 1970년대에 걸쳐 여러 주요 작품에 참여하며 입지를 다졌다.[2]
1976년부터 1978년까지는 모스크바의 시나리오 작가 및 영화 감독 고등 과정에서 영화 연출을 공부하고, 스승인 잘라케비치우스 감독 밑에서 조감독으로 실무를 경험하기도 했다. 그러나 직접 연출한 데뷔작 ''새들의 도시''(1982)가 흥행에 실패하면서 감독으로서의 경력은 더 이상 이어가지 못했다.[2]
1980년대에는 카우나스 국립 드라마 극장 소속 배우로 활동하며 연극 무대에서도 활약하는 동시에, 영화 출연도 꾸준히 병행했다. 이 시기 텔레비전 시리즈 ''부자와 가난한 자''(1983) 등에 출연하며 대중적인 인기를 누렸다.[2]
1990년대 이후 리투아니아의 독립을 거치면서도 리투아니아와 러시아 영화계를 오가며 꾸준히 활동을 이어왔으며, 연극 무대에도 참여하며 연기 경력을 지속했다.[2]
2. 2. 1. 초기 활동 (1960년대 ~ 1970년대)
리투아니아 SSR 켈메의 리에피나이 마을에서 1940년 10월 6일 농부의 아들로 태어났다. 1945년에는 가족과 함께 클라이페다로 이사했고, 1955년에는 작은 마을인 슈베크슈나로 거처를 옮겼다.[2]1958년부터 1960년까지는 클라이페다의 훈련 및 생산 공장에서 노동자로 일했다. 군 복무를 마친 후 빌뉴스 대학교 법학부에 입학했다. 대학 3학년 때인 1966년, 비타우타스 잘라케비치우스 감독의 영화 ''아무도 죽기를 원치 않았다''에서 주요 배역 중 하나를 맡으며 배우로서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이 영화 출연을 계기로 그는 3학년 과정을 통신으로 마치고 통신학과로 전과했다. 1968년 대학을 졸업하고 리투아니아 영화 스튜디오 소속 배우로 활동을 시작했으며, 이때 이미 상당한 인지도를 얻은 상태였다.[2]
1968년부터 1976년까지 리투아니아 공화국 및 다른 소련 감독들의 여러 영화에 출연하며 활발한 활동을 이어갔다. 이 시기 주요 출연작은 다음과 같다.[2]
연도 | 제목 | 비고 |
---|---|---|
1967 | 방패와 칼 | |
1968 | 두 명의 동지가 복무했다 | |
1969 | 란피에르 식민지 | |
1969 | 화이트 듄스 | |
1970 | 리어왕 | |
1970 | 아베 비타 | |
1971 | 루도벨 공화국 | |
1973 | 그 달콤한 말: 자유! | |
1973 | 너와 함께 그리고 너 없이... | |
1974 | 봉쇄 | |
1975 | 시간은 기다리지 않는다 | |
1976 | 페르디난트 루스의 삶과 죽음 | |
1976 | 틸의 전설 | |
1976 | 잃어버린 집 |
1976년부터 1978년까지는 모스크바의 국립 영화 위원회 산하 시나리오 작가 및 영화 감독 고등 과정에서 영화 연출을 공부했다. 이 기간 동안 자신의 스승이자 멘토인 잘라케비치우스 감독의 촬영 현장에서 조감독으로 실무 경험을 쌓기도 했다.[2]
2. 2. 2. 전성기 (1980년대 ~ 1990년대)
1980년부터 1988년까지 카우나스 국립 드라마 극장의 배우로 활동하며 연극 무대에서도 활약했다. 이 시기 출연한 주요 연극으로는 ''빌더 솔네스''(1980), ''샤루나스'' (''다이나브스키 공작'', 1980), ''붉은 풀밭 위의 푸른 말''(1982), ''칼리굴라''(1983), ''개인''(1985), ''노인을 위한 집''(1986) 등이 있다.[2]극장 활동과 병행하여 영화에도 꾸준히 출연했다. 1980년대 주요 출연작으로는 ''인생은 아름다워''(1979), ''페어팩스의 백만 달러''(1980), ''위험한 시대''(1981), ''니콜로 파가니니''(1982), ''아메리카의 신혼여행''(1982), ''아내의 고백''(1984), ''모스크바 전투''(1985), ''제13사도''(1988), ''죄인''(1988) 등이 있다.[2]
특히 1983년에는 어윈 쇼의 동명 소설을 원작으로 한 텔레비전 시리즈 ''부자와 가난한 자''에서 주연을 맡았고, 로맨틱 코미디 ''회전목마''에도 출연하며 당대 가장 인기 있는 배우 중 한 명으로 자리매김했다.[2]
1990년대에도 영화 활동을 이어갔다. 이 시기 출연작으로는 ''매드 로리''(1991), ''아무것도 묻지 마세요''(1991), ''비의 흔적''(1991), ''세기의 비극''(1993), ''바위 위의 집''(1994), ''악마의 매력''(1994), ''나는 내가 누구인지 모른다''(1995) 등이 있다.[2]
2. 2. 3. 후기 활동 (2000년대 ~ 현재)
2000년대 이후에도 부드라이티스는 리투아니아 및 러시아 영화에 활발히 출연했다. 주요 작품으로는 ''제대''(2000), ''복수는 달콤하다''(2001), ''다운 하우스''(2001), ''슬루츠카야 공주''(2004), ''제국의 몰락''(2005), ''늑대개''(2006), ''탱커 탱고''(2006), ''예, 당신은 심판받지 않을 것입니다...''(2007), ''크로모프''(2009), ''빚''(2009), ''무장 저항''(2009), ''블랙 애로우''(2009) 등이 있다.[2]영화 활동 외에도 연극 무대에서도 활동을 이어갔다. 2008년 2월에는 러시아 무대에 처음으로 올라 프레스냐코프 형제가 쓴 연극 ''PAB''에서 주요 배역 중 하나를 맡았으며, 이 공연은 세르푸호프카의 테아트륨에서 초연되었다.[2] 2009년에는 핀란드 감독 크리스티안 스메즈가 연출한 연극 ''벚꽃 동산''에 출연했다.[2]
2. 3. 감독 경력
1976년부터 1978년까지 부드라이티스는 모스크바의 국립 영화 위원회 산하 시나리오 작가 및 영화 감독 고등 과정에서 공부했다. 이후 그는 자신의 스승이자 교사인 비타우타스 잘라케비치우스가 있는 촬영 현장에서 조감독으로 견습 과정을 거쳤다. 그러나 유리 올레샤의 이야기를 바탕으로 한 그의 감독 데뷔작 ''새들의 도시''(1982)가 흥행에 실패하면서 감독으로서의 경력은 크게 성공하지 못했다.[2]2. 4. 문화 외교 활동
1995년부터 부드라이티스는 모스크바에 거주하며 리투아니아 대사관의 문화 고문으로 활동하기 시작했다.[2] 2001년에는 러시아 주재 리투아니아 대사관의 문화 참사관으로 임명되었다.[2]문화 참사관으로 재직하는 동안, 그는 시인이자 외교관이었던 유르기스 발트루샤이티스를 기리는 활동에 힘썼다. 그는 발트루샤이티스 재단 설립의 발기인 중 한 명이 되었으며, 발트루샤이티스의 집이 모스크바 지식인들과 리투아니아 공동체 구성원들의 교류 중심지이자 국제 학술 회의 장소로 활용되도록 기여했다.[2]
또한 부드라이티스는 러시아에서 여러 해 동안 진행된 리투아니아 문화 소개 프로그램인 "리투아니아로의 창"을 직접 기획했다.[2] 그의 노력 덕분에 모스크바 외교 문학 안뜰에서는 미칼로유스 콘스탄티나스 치우를료니스를 기념하는 행사가 열렸고, 모스크바 국립 대학교에는 발트해 연구 센터(MV로모노소프 발트해 통계 센터)가 개설되었다.[2]
이러한 외교 및 문화 교류 활동의 공로를 인정받아 2002년에는 특명전권대사 직위를 받았다.[2]
3. 예술 활동
빌뉴스 대학교 법학부 3학년 재학 중 비타우타스 잘라케비치우스 감독의 영화 ''아무도 죽기를 원치 않았다''(1966)에 주요 배역으로 캐스팅되면서 영화계에 데뷔했다. 이를 계기로 통신 강좌로 학업을 전환하여 1968년에 대학을 졸업하고 리투아니아 영화 스튜디오 소속 배우로 본격적인 활동을 시작했다.[2]
배우 데뷔 초창기인 1968년부터 1976년까지 리투아니아 및 다른 소련 공화국 감독들의 여러 영화에 출연하며 이름을 알렸다.
1976년부터 1978년까지는 모스크바의 국립 영화 위원회 산하 시나리오 작가 및 영화 감독 고등 과정에서 연출을 공부했다. 스승인 잘라케비치우스 감독의 조감독으로 현장 경험을 쌓기도 했으나, 직접 연출한 데뷔작 ''새들의 도시''(1982)가 흥행에 실패하면서 감독으로서의 경력은 이어가지 못했다.[2]
1980년부터 1988년까지는 카우나스 국립 드라마 극단 소속 배우로 활동하며 연극 무대에도 섰다.
연도 | 제목 | 비고 |
---|---|---|
1980 | 빌더 솔네스 | |
1980 | 샤루나스 | 다이나브스키 공작 |
1982 | 붉은 풀밭 위의 푸른 말 | |
1983 | 칼리굴라 | |
1985 | 개인 | |
1986 | 노인을 위한 집 |
연극 활동과 병행하여 영화에도 꾸준히 출연했다. 1980년대 주요 출연작은 다음과 같다. 특히 1983년에는 어윈 쇼의 소설을 원작으로 한 TV 시리즈 ''부자와 가난한 자''와 로맨틱 코미디 ''회전목마''에 출연하며 큰 인기를 얻었다.[2]
연도 | 제목 |
---|---|
1979 | 인생은 아름다워 |
1980 | 페어팩스의 백만 달러 |
1981 | 위험한 시대 |
1982 | 니콜로 파가니니 |
1982 | 아메리카의 신혼여행 |
1984 | 아내의 고백 |
1985 | 모스크바 전투 |
1988 | 제13사도 |
1988 | 죄인 |
연도 | 제목 |
---|---|
1991 | 매드 로리 |
1991 | 아무것도 묻지 마세요 |
1991 | 비의 흔적 |
1993 | 세기의 비극 |
1994 | 바위 위의 집 |
1994 | 악마의 매력 |
1995 | 나는 내가 누구인지 모른다 |
2000년대 이후에도 리투아니아 국내 영화뿐 아니라 러시아 영화에도 적극적으로 출연하고 있다.[2]
연도 | 제목 |
---|---|
1999 | 클래식 |
2000 | 제대 |
2001 | 복수는 달콤하다 |
2001 | 다운 하우스 |
2004 | 슬루츠카야 공주 |
2005 | 제국의 몰락 |
2006 | 늑대개 |
2006 | 탱커 탱고 |
2007 | 예, 당신은 심판받지 않을 것입니다... |
2009 | 크로모프 |
2009 | 빚 |
2009 | 무장 저항 |
2009 | 블랙 애로우 |
2008년 2월에는 프레스냐코프 형제의 연극 ''PAB''에 출연하며 러시아 연극 무대에 데뷔했고,[2] 2009년에는 핀란드 감독 크리스티안 스메즈가 연출한 연극 ''벚꽃 동산''에 출연했다.[2]
3. 1. 사진 작가 활동
1960년대 후반부터 전문 사진 작가로 활동하기 시작했다. 그의 개인 사진전은 빌뉴스, 칼리닌그라드, 니즈니노브고로드 등에서 열렸으며, 작품은 모스크바와 상트페테르부르크의 주요 갤러리에서도 전시되었다. 2010년 봄에는 모스필름 갤러리에서 '환상'이라는 제목의 사진 전시회를 열었는데, 이 전시회에서 그는 모델이자 사진작가로서 참여했다. 그는 리투아니아 사진 예술가 연맹, 리투아니아 영화 제작자 연맹, 리투아니아 연극인 연맹의 회원이다.4. 수상 및 서훈
연도 | 내용 | 비고 |
---|---|---|
1982년 | 리투아니아 SSR 인민 예술가[2] | |
2000년 | 우정 훈장[2] | 러시아-리투아니아 문화 협력 보존 및 발전에 기여한 공로 |
2003년 | 리투아니아 공로 훈장 사령관 십자장[2] | |
2010년 | 리투아니아 외교 봉사 공로 메달[2] |
5. 출연 작품
후오자스 부드라이티스는 1966년 영화 ''아무도 죽기를 원치 않았다''로 데뷔한 이래[2] 리투아니아와 소련, 러시아 등에서 꾸준히 활동해 온 배우이다. 그는 영화뿐만 아니라 연극 무대에서도 활발한 활동을 펼쳤다.
1980년부터 1988년까지 카우나스 국립 드라마 극장 소속 배우로 활동하며 ''빌더 솔네스''(1980), ''샤루나스'' (''다이나브스키 공작'', 1980), ''붉은 풀밭 위의 푸른 말''(1982), ''칼리굴라''(1983), ''개인''(1985), ''노인을 위한 집''(1986) 등 다수의 연극에 출연했다.[2]
2008년에는 프레스냐코프 형제의 연극 ''PAB''로 러시아 무대에 데뷔했으며,[2] 2009년에는 핀란드 감독 크리스티안 스메즈가 연출한 연극 ''벚꽃 동산''에 출연했다.[2]
자세한 영화 출연 목록은 아래 하위 섹션에서 확인할 수 있다.
5. 1. 영화
빌뉴스 대학교 법학부 3학년 재학 중 비타우타스 잘라케비치우스 감독의 영화 ''아무도 죽기를 원치 않았다''(1966)에 주요 배역으로 출연하며 배우 경력을 시작했다.[2] 이후 통신 강좌로 학업을 이어가며 리투아니아 영화 스튜디오 소속 배우로 활동하기 시작했고, 곧 유명 배우로 자리 잡았다.[2]1960년대 후반부터 1970년대까지 다수의 소련 영화에 출연하며 활발한 활동을 펼쳤다. 이 시기 주요 출연작으로는 ''방패와 칼''(1968), ''두 동지가 복무했다''(1968), ''란피에르 식민지''(1969), ''화이트 듄스''(1969), ''리어왕''(1970), ''아베 비타''(1970), ''루도벨 공화국''(1971), ''그 달콤한 말: 자유!''(1973), ''너와 함께 그리고 너 없이...''(1973), ''봉쇄''(1974), ''시간은 기다리지 않는다''(1975), ''페르디난트 루스의 삶과 죽음''(1976), ''틸의 전설''(1976), ''잃어버린 집''(1976) 등이 있다.[2]
1976년부터 1978년까지 모스크바의 국립 영화 위원회 산하 시나리오 작가 및 영화 감독 고등 과정에서 공부하며 영화 감독을 준비했다. 스승 잘라케비치우스의 작품에서 조감독으로 견습하기도 했으나, 유리 올레샤의 이야기를 바탕으로 연출한 데뷔작 ''새들의 도시''(1982)가 흥행에 실패하면서 감독으로서의 경력은 이어가지 못했다.[2]
이후 다시 배우 활동에 집중하여 1980년대에는 영화 ''인생은 아름다워''(1979), ''페어팩스의 백만 달러''(1980), ''위험한 시대''(1981), ''니콜로 파가니니''(1982), ''아메리카의 신혼여행''(1982), ''아내의 고백''(1984), ''모스크바 전투''(1985), ''제13사도''(1988), ''죄인''(1988) 등에 출연했다.[2] 특히 어윈 쇼의 동명 소설을 원작으로 한 텔레비전 시리즈 ''부자와 가난한 자''(1983)와 로맨틱 코미디 ''회전목마''(1983)에 출연하며 당대 가장 인기 있는 배우 중 한 명으로 큰 사랑을 받았다.[2]
1990년대에도 꾸준히 활동하며 ''매드 로리''(1991), ''아무것도 묻지 마세요''(1991), ''비의 흔적''(1991), ''세기의 비극''(1993), ''바위 위의 집''(1994), ''악마의 매력''(1994), ''나는 내가 누구인지 모른다''(1995) 등의 영화에 출연했다.[2]
2000년대 이후에도 리투아니아 국내 영화뿐 아니라 러시아 영화에도 적극적으로 출연하고 있다. 주요 작품으로는 ''클래식''(1999), ''제대''(2000), ''대위의 딸''(2000), ''복수는 달콤하다''(2001), ''다운 하우스''(2001), ''슬루츠카야 공주''(2004), ''제국의 몰락''(2005), ''늑대개''(2006), ''탱커 탱고''(2006), ''예, 당신은 심판받지 않을 것입니다...''(2007), ''크로모프''(2009), ''빚''(2009), ''무장 저항''(2009), ''블랙 라이트닝''(2009), ''스타''(2014), ''전쟁 속 우정: Anton''(2019) 등이 있다.[2] 최근에는 넷플릭스 오리지널 시리즈인 ''퀸스 갬빗''(2020)에 출연하기도 했다.
=== 주요 출연작 ===
''아무도 죽기를 원치 않았다'' (1966)
''방패와 칼'' (1968)
''필링스'' (1968)
''두 동지가 복무했다'' (1968)
''란피에르 식민지'' (1969)
''리어왕'' (1971)
''그 달콤한 단어: 자유!'' (1973)
''상처 입은 게임'' (1977)
''켄타우르스'' (1978)
''인생은 아름다워'' (1979)
''빅 나이트 배스'' (1980)
''페어팩스의 백만 달러'' (1980)
''파크타스'' (1981)
''궤도 이탈'' (1983)
''모스크바 전투'' (1985)
''분노의 날'' (1985)
''13번째 사도'' (1988)
''붉은 피리'' (1989)
''복수'' (1991)
''대위의 딸'' (2000)
''제대'' (2000)
''다운 하우스'' (2001)
''아리에'' (2004)
''제국의 몰락'' (2005, TV)
''늑대개'' (2006)
''블랙 라이트닝'' (2009)
''스타'' (2014)
''전쟁 속 우정: Anton'' (2019)
''퀸스 갬빗'' (2020, TV 미니시리즈)
참조
[1]
서적
Historical Dictionary of Russian and Soviet Cinema
Rowman & Littlefield
[2]
웹사이트
Юозас Станиславас Будрайтис. Биографическая справка
https://ria.ru/sprav[...]
[3]
웹사이트
Festival de Cannes: Wounded Game
http://www.festival-[...]
2009-05-11
[4]
웹사이트
Lithuanian traces in The Queen's Gambit on Netflix: Mikėnas' game variation and 'old man' Budraitis
https://www.lrt.l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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