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3년의 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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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후3년의 역은 1083년에서 1087년까지 일어난 무사 가문 간의 권력 투쟁으로, 데와 기요하라 씨 내부의 갈등과 미나모토노 요시이에의 개입으로 전개되었다. 기요하라 씨의 내분은 미나모토노 요시이에가 무쓰노카미로 부임하면서 심화되었고, 요시이에가 중재를 시도했으나 실패하여 결국 군대를 동원해 전투를 종결시켰다. 이 전투는 요시이에의 정치적 입지에 영향을 미쳤으며, 간토 지역 무사들의 지지를 얻어 훗날 가마쿠라 막부 창건의 기반을 다지는 계기가 되었다. 또한, 오슈 후지와라 씨가 이 지역의 지배 세력으로 부상하는 결과를 낳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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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3년의 역 - [전쟁]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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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요 | |
분쟁 명칭 | 고산넨 전투 (후삼년의 역) |
분쟁 시기 | 1083년–1089년 (이견 있음) |
분쟁 장소 | 무쓰국, 도호쿠 지방, 일본 |
분쟁 원인 | 기요하라 씨 가문 지도력을 둘러싼 분쟁 |
분쟁 결과 | 군사적 교착 상태 |
교전 세력 | |
교전 세력 1 | 기요하라 씨 여러 분파 세력 |
교전 세력 2 | 미나모토노 요시이에 휘하 병력, 무쓰국 태수 |
지휘관 | |
지휘관 1 | 기요하라노 이에히라 기요하라노 다카히라 기타 |
지휘관 2 | 미나모토노 요시이에 후지와라노 기요히라 |
관련 전투 | |
관련 전투 목록 | 38년 전쟁 덴교노 란 도이 침공 젠쿠넨 전투 고산넨 전투 호겐의 난 헤이지의 난 겐페이 전쟁 |
일본어 정보 (後三年の役)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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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기 | 에이호 3년 (1083년) - 간지 원년 (1087년) |
장소 | 오우 지방 |
결과 | 미나모토 씨, 기요하라노 기요히라 (후지와라노 기요히라) 측의 승리 |
일본어 교전 세력 | |
교전 세력 1 | 기요하라 씨 겐지[[파일:Sasa Rindo.svg|20px]] |
교전 세력 2 | 기요하라 씨 |
일본어 지휘관 | |
지휘관 1 (1083년) | 기요하라노 사네히라 미나모토노 요시이에[[파일:Sasa Rindo.svg|20px]] |
지휘관 2 (1083년) | 기요하라노 이에히라 기요하라노 기요히라 기치히코노 히데타케 |
지휘관 1 (1086-87년) | 미나모토노 요시이에[[파일:Sasa Rindo.svg|20px]] 기요하라노 기요히라 기치히코노 히데타케 미나모토노 요시미쓰 (1087년) |
지휘관 2 (1086-87년) | 기요하라노 이에히라 기요하라노 다케히라 |
2. 경위
1083년 (에이호 3년) 미나모토노 요시이에가 무쓰노카미로 부임하면서 기요하라 씨 내전에 개입하게 된다.[2] 요시이에는 기요하라노 마사히라, 이에히라, 나리히라 사이의 분쟁을 중재하려 했으나 실패했다.[2]
요시이에가 부임할 당시, 기요하라 씨 내부에서는 요시히코 히데타케와 사네히라 간의 갈등이 격화되고 있었다. 사네히라는 히데타케를 토벌하기 위해 군사를 일으켰고, 히데타케는 사네히라와 사이가 좋지 않던 기요히라와 이에히라 형제에게 봉기를 제안했다. 기요히라와 이에히라 형제는 이에 호응하여 거병, 시라토리무라(白鳥村)를 불태웠다.
사네히라는 요시이에가 무쓰노카미로 부임하자 그를 환영하고 데와로 출격했다. 이 틈을 타 기요히라 형제는 사네히라의 본거지를 공격했지만, 요시이에에게 패하고 항복했다. 그러나 데와로 향하던 사네히라가 급사하면서 상황이 급변했다.[2]
사네히라 사후, 요시이에는 오쿠로쿠 군을 기요히라와 이에히라에게 분할 상속했다.[2] 비옥한 남쪽 3개 군(와가, 에사시, 이사와)은 기요히라에게, 북쪽 3개 군(이와테, 시와, 히에누키)은 이에히라에게 주어져 이에히라의 불만을 샀다.[2]
1086년, 이에히라는 기요히라의 거주지를 공격하여 불태우고 처자를 살해했다. 기요히라는 요시이에에게 도움을 요청했고, 요시이에는 기요히라를 지원했다.[2] 요시이에는 수천 기를 이끌고 누마(沼) 요새(아키타 현 요코테 시)에 웅거한 이에히라를 공격했으나, 겨울 추위로 인해 철수해야 했다.
1087년 7월, 조정은 "오슈 합전 정지" 관사를 파견하기로 결정했다.[7] 요시이에는 기요히라와 함께 가네자와(金澤) 요새(요코테 시)에 웅거한 이에히라와 다케히라를 공격하여 병량 공세를 통해 함락시켰다.[8] 다케히라는 처형되었고, 이에히라도 도주 중 살해당했다.[8]
2. 1. 배경
11세기 도호쿠 지방은 데와국의 기요하라 씨가 장악하고 있었다. 전9년의 역 이후, 무쓰국의 호족 아베 씨가 미나모토노 요리요시를 위시한 중앙군과 데와 기요하라 씨의 협공으로 멸망하면서, 기요하라 씨가 무쓰의 아베 씨 영지까지 차지하게 되었다. 형식상으로는 미나모토노 요리요시의 휘하 군사였지만, 실제로는 데와 기요하라 씨가 전9년의 역을 진압한 주역이었다. 요리요시가 이요노카미로 옮겨가면서, 데와 기요하라 씨는 아베 씨를 대신하는 유력 호족으로 성장했다.[2]1083년까지 도호쿠 지역의 자세한 정치 상황은 알려져 있지 않지만, 다케노리를 거쳐 그의 아들 다케사다로 당주 자리가 이어졌다. 다케사다는 전9년의 역에서 처형당한 후지와라노 쓰네키요의 아내이자 아베 씨 당주 요리토키의 딸을 측실로 맞이했다. 다케사다는 그녀의 아들(후지와라노 쓰네키요의 아들)을 양자로 받아들여 기요하라 기요히라라 이름 짓고, 그녀와의 사이에서 이에히라를 낳았다. 이에히라는 데와 기요하라 씨와 아베 씨 양쪽의 피를 모두 이어받은 셈이었다.
고산넨 전투는 이러한 무사 가문 내부의 권력 투쟁에서 비롯되었다. 기요하라 씨 내부의 갈등은 쉽게 해결되지 않았고, 1083년에 무쓰노쿠니노카미가 된 미나모토노 요시이에가 기요하라노 마사히라, 이에히라, 나리히라 사이의 싸움을 중재하려 했으나 실패했다. 결국 요시이에는 군대를 동원했고, 후지와라노 기요히라의 도움을 받아 전투를 중단시켰다. 이 과정에서 이에히라와 나리히라는 사망했다.[2]
1086년부터 1089년까지 벌어진 가네자와 공성전에서 요시이에는 숲에서 날아오르는 새떼를 보고 매복을 간파하기도 했다.[3][4]
기요하라 씨는 아베 씨의 멸망과 다케노리의 영달을 통해, 무쓰국 오쿠로쿠군을 지배하게 되었다. 다케노리는 아베 요리토키의 딸을 다케사다의 아내로 삼아, 기요하라 기요히라를 양자로 맞이했다. 이후 다케사다 부부는 이에히라를 낳았다. 다케사다에게는 적남 사네히라도 있었는데, 이들 세 형제(사네히라, 기요히라, 이에히라)의 분열이 후3년의 역의 원인이 되었다.
2. 2. 기요하라 씨 내분
1083년(에이호 3년), 데와 기요하라 씨의 당주 사네히라는 간무 헤이지 일족인 나리히라를 양자로 맞이하고, 미나모토노 요리요시의 서녀를 나리히라의 아내로 삼는 등 겐지와의 연척관계도 구축하고자 했다.[6]나리히라의 혼례식 날, 사네히라의 숙부이자 기요하라 씨 일족의 장로인 기미코노 히데타케가 축하를 위해 사네히라의 저택을 방문했다. 히데타케는 전9년의 역에서 공을 세운 인물이기도 했다. 그는 주칠한 항아리에 사금을 담아 예물로 가져왔으나, 사네히라는 바둑에 빠져 히데타케를 무시했다. 이에 모욕감을 느낀 히데타케는 가져온 사금을 뜰에 쏟아붓고 데와로 돌아가 버렸다.
2. 3. 미나모토노 요시이에의 개입
1083년 가을, 미나모토노 요시이에가 무쓰노카미로 임명되어 무쓰 국에 부임하면서 기요하라 씨 내전에 개입하게 된다.[2] 요시이에는 기요하라노 마사히라, 이에히라, 나리히라 사이의 분쟁을 중재하려 했으나 실패했다.[2]요시이에가 부임할 당시, 기요하라 씨 내부에서는 요시히코 히데타케와 사네히라 간의 갈등이 격화되고 있었다. 사네히라는 히데타케를 토벌하기 위해 군사를 일으켰고, 히데타케는 사네히라와 사이가 좋지 않던 기요히라와 이에히라 형제에게 봉기를 제안했다. 기요히라와 이에히라 형제는 이에 호응하여 거병, 시라토리무라(白鳥村)를 불태우고 사네히라의 저택으로 향했다. 사네히라는 군사를 돌려 이들을 공격하려 했으나, 형제는 본거지로 후퇴했다.
사네히라는 다시 히데타케 토벌을 준비하던 중, 요시이에가 무쓰노카미로 부임하자 그를 성대하게 환영하고 데와로 출격했다. 이 틈을 타 기요히라 형제는 사네히라의 본거지를 공격했지만, 요시이에에게 패하고 항복했다. 그러나 데와로 향하던 사네히라가 급사하면서 상황이 급변했다.[2]
사네히라 사후, 요시이에는 사네히라의 영지였던 오쿠로쿠 군을 기요히라와 이에히라에게 분할 상속했다.[2] 이때 비옥한 남쪽 3개 군(와가, 에사시, 이사와)은 기요히라에게, 북쪽 3개 군(이와테, 시와, 히에누키)은 이에히라에게 주어져 이에히라의 불만을 샀다.[2]
1086년, 이에히라는 기요히라의 거주지를 공격하여 불태우고 처자를 살해했다. 기요히라는 요시이에에게 도움을 요청했고, 요시이에는 기요히라를 지원하기로 결정했다.[2] 요시이에는 수천 기를 이끌고 누마(沼) 요새(아키타 현 요코테 시)에 웅거한 이에히라를 공격했으나, 겨울 추위로 인해 철수해야 했다.
1087년 7월, 조정은 "오슈 합전 정지" 관사를 파견하기로 결정했다.[7] 요시이에는 기요히라와 함께 가네자와(金澤) 요새(요코테 시)에 웅거한 이에히라와 다케히라를 공격했다. 요시이에는 병량 공세를 통해 가네자와 요새를 함락시켰다.[8] 다케히라는 처형되었고, 이에히라도 도주 중 살해당했다.[8]
2. 4. 전투의 종결
1086년 사네히라가 급사한 뒤, 미나모토노 요시이에는 사네히라의 영지였던 오쿠 6군을 기요히라와 이에히라에게 3군씩 나누어 주었다. 그러나 영지 배분에 불만을 품은 이에히라는 같은 해 기요히라의 저택을 공격하여 그의 처자 일족을 몰살했다.[2] 간신히 살아남은 기요히라는 요시이에에게 도움을 요청했고, 요시이에는 기요히라를 지원하여 이에히라에 맞섰다.이에히라는 누마 요새에서 농성하며 저항했고, 요시이에와 기요히라 연합군은 공격을 시도했으나 겨울철 추위와 부족한 준비로 인해 패배하고 말았다. 이후 다케히라가 이에히라에게 가세하여 난공불락의 요새로 알려진 가네자와(金澤) 요새로 옮겨 싸울 것을 권했다.
1087년 요시이에·기요히라 연합군은 가네자와 요새를 공격했지만, 요새는 쉽게 함락되지 않았다. 이때 기미코노 히데타케의 제안으로 요새를 포위하고 식량을 고갈시키는 전술을 채택하여 전세가 역전되었다. 양식이 바닥난 이에히라와 다케히라는 가네자와 요새를 불태우고 도망쳤다.[8] 다케히라는 숨어있다가 붙잡혀 처형되었고, 이에히라는 하인으로 변장하고 도망치려다가 붙잡혀 죽었다. 이로써 1087년 12월, 후3년의 역은 종결되었다.
요시이에는 조정에 반란 진압에 대한 관부 발급을 요청했지만, 조정은 이를 요시이에의 사적인 싸움으로 간주하여 인정하지 않았고, 포상도 이루어지지 않았다.[7] 오히려 요시이에는 무쓰노카미에서 해임되고, 공납을 제대로 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오랫동안 어려움을 겪었다. 그러나 요시이에가 사재를 털어 병사들에게 은상을 내린 일은 간토에서 미나모토 가문의 명성을 높이는 계기가 되었고, 훗날 미나모토노 요리토모가 가마쿠라 막부를 창건하는 기반이 되었다고 평가받는다.
3. 후삼년 전투의 영향
요시이에는 전쟁이 끝난 뒤 조정에 승전 소식을 보고하고 논공행상을 청했지만, 조정은 이 전쟁을 요시이에 개인의 사적인 전쟁으로 보았다. 결국 요시이에는 무쓰노카미에서 해임되었을 뿐만 아니라, 전쟁 기간 동안 지방관으로서 조정에 공납해야 하는 황금의 양을 제대로 채우지 못했다는 이유로 관직 진출도 제한당했다.[1] 조토쿠(承德) 2년(1098년) 시라카와 법황의 배려로 미납된 공납의 양을 메울 수 있었다. 요시이에는 자신의 개인 재산을 털어 은상을 받지 못한 무사들에게 상을 주었고, 이는 간토에서 무사 가문으로서 겐지의 명성을 높이는 계기가 되었다.
기요히라는 전쟁이 끝난 뒤 데와 기요하라 씨가 다스렸던 옛 영지를 손에 넣고, 친아버지 쓰네키요의 성인 후지와라 씨를 회복하여 오슈 후지와라 씨를 열었다.
3. 1. 정치적 영향
요시이에는 전쟁이 끝난 뒤 조정에 승전 소식을 보고하고 논공행상을 요청했지만, 조정은 이 전쟁을 요시이에 개인의 사적인 전쟁으로 간주하여 거부했다. 요시이에는 무쓰노카미에서 해임되었을 뿐만 아니라, 전쟁 기간 동안 지방관으로서 조정에 공납해야 하는 황금의 양을 제대로 채우지 못했다는 이유로 관직 진출도 제한당했다. 조토쿠(承德) 2년(1098년)에야 시라카와 법황의 배려로 미납된 공납의 양을 메울 수 있었다. 요시이에는 자신의 개인 재산을 털어 은상을 받지 못한 무사들에게 상을 주었고, 이는 간토에서 무사 가문으로서 겐지의 명성을 높이는 계기가 되었다. 훗날 후손 미나모토노 요리토모(源賴朝)에 의한 가마쿠라 막부 창건의 주춧돌이 되었다고 평가받고 있다.기요히라는 전쟁이 끝난 뒤 데와 기요하라 씨가 다스렸던 옛 영지를 손에 넣었다. 그리고 친아버지 쓰네키요의 성인 후지와라 씨를 회복하여 오슈 후지와라 씨를 열었다. 이후 오슈 후지와라 씨는 4대 100년에 걸쳐 무쓰ㆍ데와 지역의 대호족으로 군림하게 된다.
3. 2. 사회적 영향
요시이에는 전쟁이 끝난 뒤 조정에 승리 소식을 보고하고 논공행상을 요청했지만, 조정은 이 전쟁을 요시이에의 사적인 전쟁으로 간주하여 거부했다. 요시이에는 무쓰노카미에서 해임되고 공납 미납을 이유로 관직 진출이 제한되었다가 1098년 시라카와 천황의 배려로 복귀했다. 요시이에는 간토 출신 무사들에게 사재를 털어 보상했고, 이는 간토에서 겐지의 명성을 높여 훗날 미나모토노 요리토모의 가마쿠라 막부 창건의 기반이 되었다고 평가받는다.[1]기요히라는 전쟁 후 데와 기요하라씨의 옛 영지를 차지하고, 후지와라씨를 회복하여 오슈 후지와라씨를 열었다. 오슈 후지와라씨는 이후 4대 100년간 무쓰ㆍ데와 지역의 대호족으로 군림했다.[1]
3. 3. 문화적 영향

후3년의 역의 많은 부분은 1171년에 제작된 ''회권'' 형식의 서사적 두루마리인 ''후3년기 합전 그림 두루마리''에 묘사되어 있다.[5] 이 작품은 현재 일본 돗토리현 돗토리시에 있는 와타나베 미술관이 소장하고 있다.
4. 일화
미나모토노 요시이에와 관련된 여러 일화가 전해져 내려온다.
요시이에 군의 가마쿠라 가게마사는 16세의 젊은 무사였는데, 전투 중 오른쪽 눈에 화살을 맞고도 적을 쏘아 죽이고 돌아왔다. 동료가 화살을 뽑으려 하자 무사의 얼굴을 밟는 것은 치욕이라며 화를 냈다는 일화가 있다. 이는 용맹함과 명예를 중시하는 무사의 모습을 보여준다. 가게마사가 눈을 씻은 강에는 외눈박이 동사리가 살게 되었다는 전설이 전해지며, 그가 적의 시체를 모아 묻고 삼나무를 심은 "가게마사 공명총"은 가나자와 공원으로 정비되었다.
또한, 요시이에는 병사들의 사기를 높이기 위해 '강억의 좌'라는 것을 설치하여 용감한 자와 겁이 많은 자를 구별했다. 용감한 병사였던 후지와라 스에카타와는 달리, 스에와리 시로 코레히로는 겁이 많아 항상 강억의 좌에 들지 못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1]
4. 1. 기러기 떼의 흐트러짐
미나모토노 요시이에는 가나자와 책으로 행군하던 중, 니시누마(요코테시 가나자와 나카노) 부근에서 정연하게 날아야 할 기러기 떼가 흐트러져 나는 것을 보았다. 요시이에는 오에노 마사후사에게서 배운 손자병법을 떠올리고, 기요하라 군의 복병을 간파하여 섬멸했다.[3][4] 요시이에는 "고시의 한 마디가 없었다면 위험했을 것이다"라고 말했다고 한다.
요시이에는 전9년의 역 이후, 후지와라노 요리미치 저택에서 자신의 전공을 평가할 때 마사후사가 "그릇은 현명한 무사이나, 아직 전쟁의 도를 모른다"라고 중얼거린 것을 전해 듣고, 그의 제자가 되었다고 한다. 마사후사는 요시이에의 동생 요시미쓰에게 생황의 피리 비법을 가르치기도 했다.
요시이에가 말을 멈춘 언덕은 "릿바코(立馬郊)"라고 불렸으며, 훗날 다이쇼 천황 즉위 기념 공원으로 정비되었다. 현재 니시누마에는 헤이안의 바람이 부는 공원이 조성되어 있고, 『후3년의 역 그림 두루마리』(도쿄 국립 박물관 소장)에서도 이 장면이 가장 유명하다. 미사토정 이이즈메 부근은 기러기의 마을이라고 불린다.
4. 2. 가마쿠라곤고로 가게마사(鎌倉権五郎景政)의 분전
미나모토노 요시이에 측 선봉군에는 가마쿠라 가게마사(곤고로)라는 16세의 젊은 무사가 있었다. 기요하라 군이 쏜 화살이 오른쪽 눈에 박혔지만, 그 적을 거꾸로 쏘아 죽이고 자기 진영으로 돌아왔다. 고통스러워하는 가게마사에게 동료 미우라 헤이타로 타메쓰기가 달려와 화살을 뽑으려 가게마사의 얼굴에 발을 올렸다. 가게마사는 분노하여 타메쓰기를 베려 했다. 놀란 타메쓰기에게 가게마사는 "무사라면 화살에 맞아 죽는 것은 당연하지만, 맨발로 얼굴을 밟히는 것은 치욕이다"라고 말했다고 한다. 타메쓰기는 사과하고 다시 무릎으로 얼굴을 눌러 화살을 뽑았다고 전해진다[1]. 가게마사의 자손 중에는 가마쿠라 막부 창건의 공신 가지와라 가게토키가 있다.가게마사가 눈을 씻었던 강인 즈시가와에는 외눈의 동사리가 살게 되었다는 전설이 있다.
4. 3. 강억의 좌(剛臆の座)
금척 공격 당시 요시이에는 병사들의 사기를 높이기 위해 전투에서 용감하게 행동한 자와 겁이 많았던 자를 가려내기 위한 강억의 좌(강겁의 자리)를 설치했다.[1] 요시미쓰의 낭당 후지와라 스에카타는 항상 강억의 좌에 드는 용자였던 반면, 스에와리 시로 코레히로라는 자는 강억의 좌에 한 번도 들지 못했다.[1] 그 때문에 코레히로는 선봉에 섰지만 적의 화살이 목뼈에 맞아 전사했고, 그 목의 상처에서 먼저 먹었던 밥알이 나와 사람들에게 조롱을 받았다고 한다.[1]5. 역사적 평가 및 의의
요시이에는 전쟁이 끝난 뒤 조정에 승리 소식을 보고하고 여러 차례 논공행상을 요청했지만, 조정은 이 전쟁을 요시이에 개인의 사적인 전쟁으로 간주하여 이를 거부했다. 요시이에는 무쓰노카미에서 해임되었을 뿐만 아니라, 전쟁 기간 동안 조정에 공납해야 하는 황금의 양을 채우지 못했다는 이유로 처벌받았다. 조토쿠(承德) 2년(1098년)에야 시라카와(白河) 법황의 도움으로 미납된 공납을 해결할 수 있었다. 요시이에는 은상을 받지 못한 무사들에게 개인 재산을 털어 보상했고, 이는 간토에서 무사 가문으로서 겐지의 명성을 높이는 계기가 되었다. 훗날 후손 미나모토노 요리토모(源賴朝)가 가마쿠라 막부를 세우는 기반이 되었다고 평가받는다.
기요히라는 전쟁이 끝난 후, 데와 기요하라씨가 다스렸던 옛 영지를 차지했다. 그리고 친아버지 쓰네키요의 성인 후지와라씨를 회복하여 오슈 후지와라씨를 창건했다. 이후 오슈 후지와라씨는 4대 100년에 걸쳐 무쓰ㆍ데와 지역의 유력 호족으로 성장했다.
참조
[1]
서적
Warriors of Japan as Portrayed in the War Tales
[2]
서적
A history of Japan to 1334
Stanford University Press
[3]
서적
The Samurai Sourcebook
Cassell & Co.
[4]
서적
The Samurai, A Military History
MacMillan Publishing Co., Inc.
[5]
문서
[6]
서적
河内源氏 頼朝を生んだ武士本流
中公新書
[7]
서적
河内源氏 頼朝を生んだ武士本流
中公新書
[8]
서적
日本の歴史07 武士の成長と院政
講談社学術文庫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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