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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에노 마사후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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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오에노 마사후사는 일본 헤이안 시대의 문인, 관료이다. 그는 학자 집안에서 태어나 어려서부터 문학적 재능을 보였으며, 16세에 성시에 합격하여 문장득업생이 되었다. 이후 관직 생활을 시작하여 지부소승, 식부소승을 거쳐 종5위까지 올랐다. 고산조 천황, 시라카와 천황, 호리카와 천황 3대에 걸쳐 동궁학사를 역임하며, 새로운 정치의 브레인 역할을 수행했다. 좌대변, 곤노주나곤 등을 거쳐 정2위까지 올랐으며, 다자이노곤노소치를 지냈다. 학문적으로는 《강도독납언원문집》, 《강수집》 등을 저술했고, 와카에도 능하여 칙찬 와카 모음집에 작품이 수록되었다. 또한 병법에도 능하여 미나모토노 요시이에의 스승이 되었다는 일화가 전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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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에노 마사후사
기본 정보
오에노 마사후사 초상 (기쿠치 요사이 그림)
오에노 마사후사 초상 (기쿠치 요사이 그림)
시대헤이안 시대 후기
출생1041년
사망1111년 12월 7일
이명에노스이 (호)
에다이부쿄
에도토쿠
관위정2위・오쿠라쿄
주군고레이제이 천황
고산조 천황
시라카와 천황
호리카와 천황
도바 천황
씨족오에 씨
부모아버지: 오에노 나리히라
어머니: 다치바나노 다카치카의 딸
배우자후지와라노 시게쓰네의 딸
자녀다카카네
고레요시
양자: 히로후사
양자: 아리모토
저서
주요 저서고케 시다이
고토 도쿠간 문슈
유조키
가이라이시키
라쿠요 덴가쿠키
조쿠 혼초 오조덴

2. 경력

고산조 천황이 즉위하자 구란도(蔵人)로 임명되었다. 이듬해인 엔큐 원년(1069년)에는 사에몬노곤노스케(左衛門権佐), 게비이시노스케(検非違使佐), 우소벤(右少弁)을 겸하며 삼사겸대(三事兼帯) 즉 세 개의 관직을 모두 겸하는 영예를 얻었다. 또한 시라카와 천황의 동궁학사를 맡기도 하였다.

고산조 천황의 치세 아래서 천황이 추진하던 엔큐 선정(延久善政)에서 마사후사는 브레인 역할을 맡아 천황의 측근 신료로써 중요한 역할을 맡았다. 엔큐 4년(1073년) 시라카와 천황이 즉위한 뒤에도 구란도를 맡는 동시에 호리카와 천황의 동궁학사가 되어 3대에 걸쳐 동궁학사를 맡게 된다. 오토쿠 원년(1084년) 좌대변(左大弁)에 임명되었고 오토쿠 3년(1086년)에는 종3위로 서임되어 구교(公卿) 반열에 올랐다. 이 사이 조랴쿠 2년(1078년) 자신의 저택에 고케 문고(江家文庫)를 설치하였다.

호리카와 천황 즉위 후 간지 2년(1088년) 정3위 산기(参議), 간지 8년(1094년) 종2위 곤노주나곤(権中納言)이 되는 등 순조롭게 승진하였다. 간지 4년(1090년) 호리카와 천황 앞에서 《한서》(漢書)를 강의하기도 하였다. 에이쇼 2년(1097년) 다자이노곤노소치(大宰権帥)로 임명되어 이듬해인 조토쿠 2년(1098년) 다자이후로 내려갔다. 고와 4년(1102년) 다자이후 낙향의 노고를 치하한다는 의미로 정2위가 되었으나 얼마 되지 않아 다자이노곤노소치를 사임하였다. 조지 3년(1106년) 곤노주나곤을 사임하고 다시 다자이노곤노소치로 임명되었다. 도바 천황 덴에이(天永) 2년(1111년) 대장경(大蔵卿)으로 옮겨졌으나 그 해에 서거하였다.

2. 1. 초기 생애

오에 씨(大江氏)는 예로부터 기전(紀伝)의 도(道)[18]를 가학(家学)으로 하는 학자 집안이었으며, 마사후사 자신도 어려서부터 문학에 재능을 보였다고 전한다. 자서전 《모년기》(暮年記)에서 마사후사는 「내 나이 네 살 때에 처음으로 글을 읽었고, 여덟 살 때에는 중국의 역사를 통달하였고, 11세 때에는 시를 지어서, 당시에 신동(神童)이라 불렸다.」고 적고 있다.[19]

마사후사는 이른 시기인 덴기(天喜) 4년(1056년) 16세로 성시(省試)에 합격해 문장득업생(文章得業生)이 되고, 고헤이(康平) 원년(1058년) 대책(対策)에서 급제했다. 고헤이 3년(1060년)에는 지부소승(治部少丞)이 되고 이어 식부소승(式部少丞)으로 임명되었으며, 관위는 종5위였다.

그 뒤 승진이 멈추고 일시 은둔 생활을 하기도 했지만, 후지와라노 쓰네토(藤原経任일본어)의 충고로 그만두고 지랴쿠(治暦) 3년(1067년) 동궁(東宮) 다카히토 친왕(尊仁親王)의 학사로 임명되었다. 학사를 맡고 있던 중에 다카히토 친왕의 신뢰를 얻었다.

2. 2. 관직 생활

오에 씨(大江氏)는 예로부터 기전(紀伝)의 도(道)[18]를 가학(家学)으로 하는 학자 집안으로 마사후사 자신도 어려서부터 문학에 재능을 보였다고 전한다. 16세에 성시(省試)에 합격해 문장득업생(文章得業生)이 되고, 고헤이(康平) 원년(1058년) 대책(対策)에서 급제해 고헤이 3년(1060년)에는 지부소승(治部少丞)을 거쳐 식부소승(式部少丞)으로 임명되었다. 관위는 종5위하였다.

그 뒤 승진이 정체되어 일시 은둔 생활을 하기도 했지만 후지와라노 쓰네토(藤原経任일본어)의 충고로 그만두고 지랴쿠(治暦) 3년(1067년) 동궁(東宮) 다카히토 친왕(尊仁親王)의 학사로 임명되었다. 다카히토 친왕의 신뢰를 얻어 지랴쿠 4년(1068년) 친왕이 고산조 천황(後三条天皇)으로 즉위하자 구란도(蔵人일본어)로 임명되었다. 이듬해인 엔큐(延久) 원년(1069년) 사에몬노곤노스케(左衛門権佐일본어, 게비이시노스케, 検非違使佐일본어) ・ 우소변(右少弁)을 겸하며 삼사겸대(三事兼帯) 즉 세 개의 관직을 모두 겸하는 영예를 얻었다. 또한 동궁 ・ 사다히토 친왕(貞仁親王, 훗날의 시라카와 천황)의 동궁학사를 맡기도 하였다.

고산조 천황 치세 아래서 천황이 추진하던 새로운 정치(엔큐 선정延久善政)에서 마사후사는 브레인 역할을 맡아 천황의 측근 신료로써 중요한 역할을 맡았다. 엔큐 4년(1073년) 12월 시라카와 천황 즉위 후에도 계속해서 구란도를 맡는 동시에 요시히토 친왕(善仁親王, 훗날의 호리카와 천황)의 동궁학사가 되어 3대에 걸쳐 동궁학사를 맡게 된다. 변관으로써도 오토쿠(応徳) 원년(1084년) 좌대변(左大弁)에 임명되었고 오토쿠 3년(1086년)에는 종3위로 서임되어 구교(公卿) 반열에 올랐다. 이 사이 조랴쿠(承暦) 2년(1078년) 자신의 저택에 고케 문고(江家文庫)를 설치하였다.

호리카와 천황 즉위 후 간지(寛治) 2년(1088년) 정3위 산기(参議), 간지 8년(1094년) 종2위 곤노주나곤(権中納言일본어)이 되는 등 순조롭게 승진하였다. 이 사이 간지 4년(1090년) 호리카와 천황 앞에서 중국의 역사책인 《한서》(漢書)를 강의하기도 하였다. 에이쇼(永長) 2년(1097년) 다자이노곤노소치(大宰権帥일본어)로 임명되어 이듬해인 조토쿠(承徳) 2년(1098년) 다자이후로 내려가 고와(康和) 4년(1102년)에는 다자이후 낙향의 노고를 치하한다는 의미로 정2위가 되었으나 얼마 되지 않아 다자이노곤노소치를 사임하였다. 조지(長治) 3년(1106년) 곤노주나곤을 사임하고 다시 한 번 다자이노곤노소치로 임명되었다. 도바 천황(鳥羽天皇) 덴에이(天永일본어) 2년(1111년) 대장경(大蔵卿)으로 옮겨졌으나 그 해에 서거하였다.

마사후사의 관직 이력은 다음과 같다.

시기관직
덴기 4년(1056년) 12월 29일문장득업생(급료)
덴기 5년(1057년) 2월 30일단바 권
고헤이 원년(1058년) 12월 29일대책
고헤이 3년(1060년) 2월 21일치부 소승
고헤이 3년(1060년) 3월 20일식부 소승
고헤이 3년(1060년) 7월 6일종5위하(책)
지랴쿠 3년(1067년) 2월 6일동궁학사(춘궁・존인 친왕)
지랴쿠 4년(1068년) 4월 19일오위 장인(고산조 천황수선일, 선방학사)
지랴쿠 4년(1068년) 7월 8일중무 대보
지랴쿠 4년(1068년) 7월 19일정5위하(학사로)
지랴쿠 5년(1069년) 정월 27일좌위문 권좌
지랴쿠 5년(1069년) 4월 28일겸 동궁학사(춘궁・사다히토 친왕)
지랴쿠 5년(1069년) 12월 17일겸 우소변(삼사겸대)
엔큐 4년(1072년) 4월 26일겸 빈중 개, 방압하사
엔큐 4년(1072년) 12월 8일오위 장인, 겸 동궁학사(춘궁・실인 친왕)
엔큐 6년(1074년) 정월 28일종4위하(책), 미마사카 수
쇼호 2년(1075년) 정월 5일정4위하(선방학사)
쇼랴쿠 4년(1080년) 8월 22일권 좌중변, 지수
에이호 1년(1081년) 8월 8일좌중변
에이호 3년(1083년) 2월 1일겸 비젠 권수, 겸 식부 권대보
오토쿠 1년(1084년) 6월 23일좌대변
오토쿠 2년(1085년) 2월 15일감해유 장관
오토쿠 2년(1085년) 11월 8일지학사
오토쿠 3년(1086년) 11월 20일종3위
오토쿠 4년(1087년) 정월 25일식부 대보
간지 2년(1088년) 정월 19일정3위(원행행차별당상)
간지 2년(1088년) 정월 25일겸 주방 권수
간지 2년(1088년) 8월 29일참의
간지 6년(1092년) 정월겸 에치젠 권수
간지 8년(1094년) 6월 13일권중납언[17]
간지 8년(1094년) 12월 11일종2위?
에이초 2년(1097년) 3월대재 권수
고와 4년(1102년) 정월 5일정2위(부임상, 추서)
고와 4년(1102년) 정월득체 해임
초지 3년(1106년) 3월 11일거 권중납언
덴에이 2년(1111년) 7월 29일대장경
덴에이 2년(1111년) 11월 5일사망


3. 가계

아버지 쪽 증조부모는 오에노 마사히라아카조메 에몬이며, 마사히라 본인은 오에노 고레토키의 손자였다. 고레토키는 오에노 지후루의 아들이자 오에노 오톤도의 손자였다. 오톤도는 아보 친왕의 아들이며, 아보 친왕은 헤이제이 천황의 아들이었다.[2]

관계이름
아버지오에노 나리히라
어머니다치바나노 다카치카의 딸
아내후지와라노 소이의 딸
아들오에노 다카카네
아들오에노 유이준 (생모 불명)
양자오에노 히로후사 (실제 다치바나노 모치쓰나의 아들)
양자오에노 아리모토 (실제 미나모토노 아리무네의 아들)


4. 사상 및 학문적 업적

오에노 마사후사는 학문과 와카(和歌)에 뛰어난 재능을 보였다. 생전에 많은 원문(願文)을 대작(代作)했는데, 이를 모은 《강도독납언원문집》(江都督納言願文集)이 남아있다. 와카에도 능하여 《후습유화가집》(後拾遺和歌集)에 2수가 실린 것을 시작으로, 칙찬(勅撰) 와카 모음집에는 114수의 작품이 수록되었다.[23] 마사후사 자신의 와카 모음집으로는 《강수집》(江帥集)이 있다.

마사후사는 오에 씨(大江氏)의 시조인 오에노 오토히토(大江音人)를 간무 천황의 손자인 아보 친왕(阿保親王)의 아들이라고 하는 전승을 만들었다는 주장이 있다.[22]

그의 담화를 후지와라노 사네카네(藤原実兼)가 필기한 《강담초》(江談抄), 1096년에 에이초의 오덴가쿠를 기록한 《낙양전락기》(洛陽田楽記), 유직고실서인 《강가차제》, 『화한낭영집』의 주석서인 《낭영강주》, 1101년에서 1111년사이에 저술한《속본조왕생전》,《본조신선전》등의 저서를 남겼다.

또한 병법에도 뛰어나 미나모토노 요시이에(源義家)의 스승이 되었다는 일화가 있다. 전9년의 역 이후 요시이에는 마사후사의 제자가 되어 병법을 배우고, 후3년의 역에서 활용하여 성공을 거두었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마사후사가 지은 와카로는 "높은 모래산 언덕 위에 벚꽃이 피었네. 먼 산의 안개여, 걷히지 않기를 바라네." (《백인일수》 73번: 《후습유화가집》)가 있다.

5. 평가 및 영향

오에노 마사후사는 학문과 와카에 뛰어났으며, 많은 저술을 남겼다. 그의 저서로는 《강도독납언원문집》, 《강수집》, 《낙양전락기》, 《본조신선전》 등이 있다. 특히 《강담초》는 마사후사의 담화를 후지와라노 사네카네(신제이의 아버지)가 필기한 것으로 유명하다.[23]

마사후사는 오에 씨 가문의 재흥을 염원하였으며, 오에노 고레토키 이후 끊어졌던 구교의 자리에 오른 것을 크게 기뻐했다. 그는 증조부 오에노 마사히라에 대해 "내가 의식하고 있던 것은 고레토키 뿐"이라고 말하며, 정4위하에 그쳤던 마사히라는 구게를 목표로 하던 자신에게는 특별히 주목할 만한 인물이 아니었음을 은근히 드러냈다.[21]

마사후사가 태어났을 때, 증조할머니 아카조메 에몬(마사히라의 부인)은 증손자의 탄생을 기뻐하며 와카를 읊었는데, 이 와카는 《후습유화가집》(권7 하438)에 실려 있다.

오에 씨의 시조인 오에노 오토히토를 아보 친왕의 아들로 하는 전승을 만든 것은 마사후사라는 설이 있다(이마이 겐에이 설).[22]

마사후사는 병법에도 뛰어나 미나모토노 요시이에의 스승이 되었다는 일화가 있다. 요시이에는 전구년의 역 이후 마사후사의 제자가 되어 병법을 배우고, 후삼년의 역에서 이를 활용하여 성공을 거두었다고 한다. 이 이야기는 전국 시대에 규슈에서 용맹을 떨친 야마다 무네마사에게도 영향을 미쳐, 그는 "마사후사의 병법을 얻었다"고 하며 "야마다 교토쿠"라는 이름을 사용했다.[15]

6. 일화


  • 오에 씨를 다시 일으키기를 바랐던 마사후사에게 있어서 오에노 고레토키 이래 끊어져 있던[20] 구교의 자리에 자신이 취임한 것은 크나큰 경사였다. 고레무네노 다카코토(惟宗孝言)가 당시 대학자로써 알려져 있던 마사후사의 증조부 오에노 마사히라(大江匡衡)에 대해 물었을 때 마사후사는 "내가 의식하고 있던 것은 고레토키 뿐"이라고 대답해서, 은근히 마사히라는 평가할 가치도 없음을 비쳤다고 한다.[21] 이는 정4위하에서 마쳤던 증조부 마사히라는 구게를 목표로 하던 마사후사에게는 특별히 돌아볼 인물이 아니었다는 것을 보여준다.
  • 《속습유화가집》(続拾遺和歌集) 권7 가(賀)438에는 마사후사가 태어났을 때 아직 살아있었던 증조할머니 아카조메 에몬(赤染衛門, 마사히라의 부인)이 증손자의 탄생에 기뻐하며 읊었던 와카가 남아 있다.
  • 오에 씨의 시조인 오에노 오토히토(大江音人)를 간무 천황의 손자인 아호 친왕(阿保親王)의 아들이라고 하는 전승을 지어낸 것은 마사후사 본인이었다는 일본의 국문학자 이마이 겐에(今井源衛)의 주장이 있다.[22]
  • 생전에 학문적 재능을 의지해 많은 원문(願文)을 대작해 주었는데 이들을 정리한 《강도독납언원문집》(江都督納言願文集)이 남아 있다.
  • 와카(和歌)에도 뛰어나서 《후습유화가집》(後拾遺和歌集)에 2수가 실린 이래로 칙찬(勅撰) 와카 모음집에는 114수의 작품이 수록되어 있다.[23] 마사후사 자신의 와카 모음집으로 《강수집》(江帥集), 저서로 《낙양전락기》(洛陽田楽記), 《본조신선전》(本朝神仙伝)이 있다. 또한 《강담초》(江談抄)는 그의 담화를 후지와라노 사네카네(藤原実兼, 신제이의 아버지)가 필기하였다고 되어 있다.


어린 시절부터 학문에 뛰어났음을 보여주는 일화는 다음과 같다.

일화 내용
미나모토노 모로후사에게 "눈 속에서 소나무의 굳건함을 본다(雪裏看松貞)"라는 제목을 받았는데, 붓이 멈추지 않고 한시를 지어 모로후사를 깊이 칭찬하게 했다 (『만년기(暮年記)』).
11세 때, 뛰어난 한시를 지은 것으로 고레이제이 천황이 보았는데, 천황은 감탄하여 마사후사에게 학문료를 하사했다 (『속고사담(続古事談)』)[16]
후지와라노 요리미치가 마사후사를 보고 땅을 밟고 사람을 뛰어넘어 반드시 높은 지위에 이를 것이라고 말했다 (『만년기』).
관백 후지와라노 요리미치가 뵤도인을 창건하기 위해 미나모토노 모로후사와 우지를 방문했을 때, 대문이 북쪽을 향하고 있었다. 그래서 요리미치는 모로후사에게 절의 문이 북쪽을 향하고 있는 예가 있는지 물었다. 모로후사는 "저는 모르지만, 뒤에 타고 있는 마사후사는 이 일에 통달하고 있으니 물어보겠습니다"라고 말하고 마사후사에게 물었다. 마사후사는 즉시 천축의 나란다 사찰, 진단의 서명사, 본조의 로쿠하라미쓰지는 문이 북쪽을 향하고 있다고 답변하여 요리미치를 놀라게 했다 (『십훈초(十訓抄)』, 『고사담』).


참조

[1] 서적 Legends of the Samurai Overlook Duckworth
[2] 문서 Britannica Kokusai Dai-Hyakkajiten articles "Ōe no Masafusa", "Ōe no Masahira" and "Ōe no Koretoki", and MyPaedia article "Abo-shinnō"
[3] 서적 人物伝小辞典 古代・中世編 東京堂出版 2004
[4] 서적 今鏡 巻1,すべらぎの上,つかさめし
[5] 문서 「美作土民散任藤原秀隆塔願文」『江都督納言願文集』
[6] 문서 『水左記』承保4年12月15日条
[7] 문서 『水左記』永保元年8月28日条
[8] 서적 『今鏡』村上の源氏,第七,うたたね
[9] 문서 『中右記』長治2年8月27日条
[10] 문서 『中右記』天永2年11月5日条
[11] 문서 『中右記』天仁元年3月5日条
[12] 문서 維時の系統では傍流の[[大江斉光]]が公卿になっているが、彼の子孫は出家するなどして断絶している。
[13] 문서 『永昌記』天永2年11月5日条
[14] 서적 王朝文学と官職・位階 竹林舎 2008
[15] 서적 人物伝小辞典 古代・中世編 東京堂出版 2004
[16] 서적 『続古事談』第2,臣説
[17] 문서 『中右記』
[18] 문서 일본 율령제 아래 대학료(大学寮)에서 역사(주로 중국사)를 가르쳤던 학과(도道). 훗날 한문학 학과인 문장도(文章道)와 통합해서 역사 ・ 한문학 양쪽을 모두 가르치게 되었는데 학과는 「기전도」(紀伝道), 그 학과를 가르치는 박사는 「문장박사」라는 정식 명칭을 사용하였고, 이를 통칭해서 「기전박사」(紀伝博士), 「문장도」라고 부르기도 하였다(다만 통합 당시에는 「기전도」니 「문장도」니 하는 명칭은 성립되지 않았다는 설도 있다).
[19] 서적 人物伝小辞典 古代・中世編 東京堂出版 2004
[20] 문서 고레토키의 계통에서는 방계인 오에노 다다미쓰(大江斉光)가 구교가 되기도 했지만 그의 자손은 출가하는 등의 이유로 단절되었다。
[21] 문서 《영창기》(永昌記) 덴에이(天永) 2년 11월 5일조。
[22] 서적 大江匡房の官職・位階と文学 竹林舎 2008
[23] 문서 《칙찬작자부류》(勅撰作者部類).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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