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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차 양맥 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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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1차 양맥 전투는 245년 가을, 위나라 유주자사 관구검이 오환족과 선비족을 이끌고 고구려를 침공하면서 벌어진 전투이다. 동천왕은 2만 명의 군사를 이끌고 비류수 전투에서 위군을 격파하고, 양맥 전투에서도 승리하여 위군 3천여 명을 전사시켰다. 그러나 연이은 승리에 자만하여 관구검에게 패배, 1만 8천 명의 군사를 잃고 도주했으며, 고구려의 수도 환도성이 함락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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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전투 개요

245년 가을 8월, 의 유주자사 관구검이 오환족[1]선비족[2]을 이끌고 고구려를 침공하였다. 이에 동천왕은 보병과 기병 2만 명을 거느리고 비류수와 양맥에서 위군과 전투를 벌였다.

2. 1. 비류수 전투

동천왕은 보병과 기병 2만 명을 거느리고 비류수에서 군과 전투를 벌여 크게 쳐부수고 3천여 명을 전사시켰다.[1]

2. 2. 양맥 전투

245년 가을 8월, 의 유주자사 관구검이 오환족[1]선비족[2]을 이끌고 고구려를 침공하였다. 이에 동천왕은 보병과 기병 2만 명을 거느리고 비류수 전투에서 위군을 크게 쳐부수고 3천여 명을 전사시켰다. 이후 양맥 골짜기에서 다시 위군을 크게 쳐부수고 3천여 명을 전사시키는 대승을 거두었다.

3. 전투 이후 양상

연이은 승전에 동천왕은 여러 장수들에게 "(魏)의 대병력이 오히려 우리 고구려의 적은 군사만도 못하다. 관구검이란 자는 위 나라의 명장이지만, 오늘날에는 그의 목숨이 나의 손에 달려 있구나."라고 말하며 자만하였다. 그러나 결국 관구검에게 크게 패하여 고구려군 1만 8천 명을 잃고 가까스로 도주하였다.[1]

이후 관구검은 고구려 수도 환도성을 함락시켰다.[1]

4. 결과

연이은 승전으로 동천왕은 여러 장수들에게 "의 대병력이 오히려 우리 고구려의 적은 군사만도 못하다. 관구검이란 자는 위 나라의 명장이지만, 오늘날에는 그의 목숨이 나의 손에 달려 있구나."라고 말하며 자만하였다. 그러나 관구검에게 크게 패하여 고구려군 1만 8천 명을 잃고 가까스로 도주하였다.[1]

이후 관구검은 고구려의 수도 환도성을 함락시켰다.[2]

참조

[1] 서적 관구검기공비
[2] 서적 십육국춘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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