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구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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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관구검은 삼국 시대 위나라의 장수로, 하동군 문희현 출신이다. 그는 관구흥의 아들이자 3정의 한 명으로, 요동 정벌과 고구려 정벌을 이끌었다. 조위의 요동 정벌과 고구려 원정에서 공을 세워 안읍후에 봉해졌으나, 사마사의 전횡에 반발하여 문흠과 함께 반란을 일으켰다. 반란은 실패로 돌아갔고, 관구검은 도주 중 살해되었다. 관구검은 탁월한 능력으로 평가받았으나, 반란으로 인해 일족이 몰락하는 결과를 맞았다. 이름은 무구검으로도 불리며, 고구려 정벌을 기념하는 비석이 발견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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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구검 - [인물]에 관한 문서 | |
---|---|
기본 정보 | |
이름 | 관구검 |
한자 표기 | 毌丘儉 |
자 | 중공 (仲恭) |
출생지 | 사례 하동군 원희현 |
사망일 | 255년 3월 16일 |
사망 장소 | 예주여남군 신현 |
아버지 | 관구흥 |
형제 | 관구수 |
자녀 | 관구전 관구종 세 명의 다른 아들 |
관직 | |
역임한 관직 | 형주자사 유주자사 호오환교위 탁료장군 좌장군 예주자사 진남장군 진동장군 |
최종 관직 | 진동장군 |
봉작 | 안읍후 |
생애 및 활동 | |
유주자사 임명 시기 | 235년 |
진동장군 임명 시기 | 252년 |
기타 | |
관련 인물 | 조비 조예 조방 조모 |
2. 생애
관구검은 하동군 문희현(현재의 산시성 원시현) 사람으로, 관구흥(毌丘興)의 아들이다. 아버지 관구흥은 조위에서 무위군 태수를 지냈고 고양향후 작위를 받았다. 관구검은 아버지 사후 작위를 물려받아 평원후문학 벼슬을 지냈다. 이후 형주, 유주, 예주 등 각지의 지방관직을 역임했다.
237년 조예의 지시에 따라 오환족과 선비족을 거느리고 공손연을 공격했으나, 공손연의 저항과 장마철 요하 범람으로 우북평으로 철수하였다. 238년 사마의가 이끄는 4만 대군에 합류하여 공손연 정벌에 성공, 안읍후로 승진하였다.[21][22]
242년 고구려가 서안평을 공격하자 오환족[23]과 선비족[24]을 이끌고 고구려를 공격, 동천왕을 상대로 대승을 거두고 수도 환도성을 함락했다. 동천왕은 옥저로 도망하였다.[29] 244년~245년 고구려 원정에서 관구검은 예하 현도 태수 왕기를 부여에 파견, 부여는 군량을 지원하였다.[25]
이후 진동도독으로 임명되어 양주에서 오의 제갈각[30]의 침공을 막았다. 255년 사마사의 전횡에 분노, 문흠과 함께 반란을 일으켰으나 실패하고 도주 중 장속에게 살해당했다.
2. 1. 초기 생애와 관직 생활
하동군 문희현(현재의 산시성 원시현) 출신이다. 아버지 관구흥(毌丘興)은 조위(曹魏)에서 무위군 태수를 지냈고, 고양향후(高陽鄉侯) 작위를 받았다. 관구검은 아버지 사후 작위를 상속받았고, 평원후의 서리 관료로 일했다.
문제 조비 시대에 평원후(平原侯)의 문학(文學)이 되었다. 태화 원년(227년), 명제 조예가 황제로 즉위하자 상서랑, 이어서 우림감으로 옮겼다. 조예가 동궁(황태자) 시절부터 알고 지낸 사이였기에 두터운 신임을 받았다.
226년, 조예 즉위 후 상서랑(尚書郎)과 시중으로 임명되었다. 관구검은 황태자 시절 조예를 보좌했기에 특별 대우를 받았다. 이후 낙양 전농으로 승진, 조예에게 사치스러운 궁궐 건축 사업 축소를 조언하는 편지를 보냈다. 형주 자사로 승진했다.
낙양 전농 시절, 조예가 농민 징발하여 궁전 조영을 시도하자 이를 간했다. 청룡 3년(235년), 형주 자사로 전임되었다.
청룡 4년(236년), 유주자사·도료장군·사지절·호오환교위가 되어, 요동군 평정을 조예에게 제안하여 허락받았다. 연나라와 전쟁 전, 오환 선우 구루돈(寇婁敦) 등과 교섭하여 국교를 맺었다. 이는 외형상 구루돈이 위나라에 조공을 바치는 형태였으나, 각국 필요에 따라 변할 수 있는 가변적 의전이었다.
2. 2. 공손연 토벌
경초 원년(237년), 관구검은 요수에 주둔하며 5천여 명의 부하를 이끌고 요서군오환도독인 호류, 우북평 오환선우인 구루돈 등을 항복시켰다. 요동군을 지배하던 공손연과의 싸움에 대해서는, 『삼국지』의 관구검전에는 "공손연은 관구검과 싸웠으나 불리해 철수했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명제기에는 "긴 장마로 인해 요수가 범람했기에, 조칙에 의해 관구검의 군대를 철수시켰다"라고 기록되어 있고, 공손연전(공손도전 부록)에는 "(공손연이) 요수에서 관구검 등을 요격하여 불리해진 관구검 등이 철수했다"라고 기록하고 있다.[7]같은 해, 조예의 지시에 따라 오환족과 선비족을 거느리고 공손연을 공격하였으나, 공손연의 저항으로 요하를 넘지 못한 채 요수(遼隧)에서 발이 묶였다. 장마철이 되어 요하가 범람하자 요동에서 물러나 우북평으로 철수하였다. 관구검이 격퇴당한 뒤 공손연이 연왕(燕王)을 자칭하고 소한(紹漢)이라는 연호까지 제정하면서 독립 의지를 천명하였다.
경초 2년(238년), 위나라는 공손연 정벌을 위해 4만 대군과 함께 사마의를 급파하였다. 사마의는 요동으로 진군하면서 우북평에 주둔하고 있던 관구검의 군대를 휘하에 편입하고, 성공적으로 공손연을 정벌하여 선비족[21]과 고구려[22]와 함께 요동의 공손씨 정권을 붕괴시켰다. 이 공으로 관구검은 안읍후로 승진하였다.
2. 3. 고구려 원정
242년 고구려가 서안평(西安平)을 공격하자 오환족[23]과 선비족[24]을 거느리고 고구려를 공격하였다. 관구검은 고구려 동천왕을 맞아 처음에는 비류수와 양맥곡에서 각기 3천 군사가 참획되는 등 고전했지만, 이후 고구려군 2만 명 가운데 1만 8천여 명을 죽이는 대승을 거두고 수도 환도성을 함락하였다. 이후 관구검이 다시 고구려를 공격하자, 동천왕은 옥저로 도망하였다.[29]위나라가 공손씨(公孫氏)를 멸망시킨 다음, 당시 유주자사이던 관구검은 고구려를 쳤는데(244~245), 이때 관구검은 그 예하의 현도 태수 왕기(王頎)를 부여에 보냈다. 부여의 위거왕은 사신을 보내 교외에서 왕기를 맞게 하고, 군량을 보냈다.[25] 그러나 왕기가 부여에 들른 것은 고구려 원정의 길이 아니라 원정이 완료된 후 회군할 때의 일로 보는 설도 있다. 즉, 고구려의 동천왕을 북옥저에까지 추격한 왕기는 간도 지방에서 무단강 유역으로 진군하여, 그 서북으로 연결되어 있는 소백산계(小白山系)의 산맥을 넘어 부여가 자리잡고 있는 아러추허(阿勒楚喀) 평야를 거쳐 오늘날 푸순 시가 있는 현도 군치(玄菟郡治)로 개선, 귀진(歸陣)하였다는 것이다.[26] 그러나 왕기(王頎)가 동북 만주(滿洲)의 밀림 지대를 크게 우회, 부여를 거쳐 귀진(歸陣)하였다는 데는 반론도 있어[27]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지지 않고 있다.[28]
관구검은 현도 태수를 보내어 동천왕을 추격하고 왕기는 다시 따로 군사를 보내어 동천왕을 추격하였으나, 고구려 장수 유유와 밀우의 활약으로 동천왕은 위나라 군대의 추격에서 벗어나 관구검이 철수한 뒤 환도성으로 돌아왔다.
244년, 관구검은 고구려로 징벌 원정을 이끌어 고구려-위 전쟁을 일으켰다. 그는 동가강 인근에서 고구려 동천왕이 이끄는 고구려 군대를 격파하고 고구려의 수도 환도성을 점령했다. 다음 해에 이어진 작전에서 그는 다시 환도성을 점령했고 동천왕은 동남쪽으로 도망가게 만들었다. 군대의 일부는 한반도 동해안에 도달했고, 다른 일부는 북부 만주에 도달했지만 곧 퇴각했다. 관구검의 이 작전의 승리를 기념하기 위해 석각이 만들어졌다. 1905년, 기념비의 조각이 발견되었다. 그것은 관구검 기공비(毌丘儉紀功碑)라고 불린다.
2. 4. 오나라와의 전쟁
정시 9년(248년)[5]에 좌장군, 가절, 감예주 제군사, 예주자사를 거쳐 진남장군으로 승진하였다.가평 4년(252년) 4월, 오나라 황제 손권이 죽자, 왕창, 호준과 함께 오나라를 칠 것을 제안했다.[9] 같은 해 11월, 위나라는 세 방향에서 오나라를 공격했다. 관구검은 무창으로 진군했으나, 동흥에서 제갈탄 등의 군대가 제갈각에게 패하면서 전군이 철수했다.[10] 이후 관구검은 제갈탄과 임지를 교체하여 진동장군, 도독양주 제군사가 되었다.
가평 5년(253년), 제갈각이 합비신성을 포위했지만, 사마사의 지시에 따라 성을 지켜냈다.[11]
가평 6년(254년) 2월, 합비 전투에서 포로가 되었음에도 충절을 지킨 병사 유정과 정상을 칭찬하는 상소를 올렸다. 이들은 관중후로 추증되었고, 자식들이 그 작위를 이었다.[12]
2. 5. 관구검·문흠의 난
255년 관구검은 사마사(司馬師)의 전횡에 분노하여 문흠(文欽)과 함께 반란을 일으켰다. 그러나 문흠이 사마사에게 패하면서, 관구검은 야반도주하였고, 자연히 그가 거느린 군대의 군세는 약화되었다. 도주 중에 안풍진(安風津) 도위부(都尉部)의 백성인 장속(張屬)의 활에 맞아 죽었고, 장속은 그 목을 경도(京都: 수도)인 낙양으로 보내 그 공으로 후(侯)에 봉해졌다.[13]이후 장남인 관구전(毌丘甸)은 반(反)사마씨 봉기를 일으켰다가 주살되었고, 차남인 관구종과 그의 아들이자 관구검의 손자인 관구오는 훗날 서진(西晉) 시대에 출사했다.
일부 역사학자들은 관구검이 위 황제 조모에게 충성했고, 사마씨가 배후에서 위나라 정부를 통제하는 것에 불만을 품었기 때문에 반란을 일으켰다고 주장한다. 다른 자료에서는 그가 254년에 사마사가 3대 위 황제 조방을 폐위하고 조모로 교체한 시기에 사마사에 의해 숙청된 하후현과 가까웠으며, 관구검은 하후현과 같은 처지가 될까 두려워 사마사에 대항하여 반란을 일으키기로 결심했다고 한다. 이 반란은 몇 달 안에 진압되었고, 관구검은 수춘에서 안휘성 비동현의 읍인 신현(慎縣)으로 도망친 후 장속(張屬)에게 살해당했다. 관구검의 가족 대부분이 살해되었고, 생존자들은 도망쳐 위나라의 경쟁 국가인 동오로 귀순했다.
정원 2년(255년) 정월, 서북쪽 하늘 끝까지 이르는 수십 장 길이의 혜성이 나타나자, 관구검은 이를 자신들의 길조라고 여겼다. 그리하여 곽태후의 조칙이라고 칭하며 사마사의 죄상을 탄핵하고, 결탁한 양주 자사 문흠과 함께 반역의 군사를 일으켰다. 회남의 장병과 관민을 협박하여 수춘성을 지키게 하고, 관구검과 문흠은 5, 6만 병사를 이끌고 출격했다. 관구검은 항성을 굳게 지키고, 문흠은 밖에서 유격군이 되었다. 또한 두 사람 각각의 아들 4명을 인질로 오나라에 파견하여 구원을 요청했다.[14] 이에 맞선 사마사는 중군 보병과 기병 십수만 명을 이끌고 이들을 포위했다. 여러 군대에 성벽을 굳게 지키게 하고, 전투를 금지했다. 관구검과 문흠은 어찌할 바를 몰랐고, 또한 회남의 장병들의 집은 모두 북쪽에 있었기 때문에, 그 마음이 꺾여 항복자가 잇따랐다.
2. 6. 최후와 평가
255년 반란이 진압된 후, 관구검은 도주 중에 장속의 활에 맞아 죽었고, 장속은 그 공으로 후(侯)에 봉해졌다. 관구검의 장남 관구전은 반(反)사마씨 봉기를 일으켰다가 주살당했고, 차남 관구종과 손자 관구오는 서진(西晉) 시대에 출사했다.진수는 『삼국지』에서 관구검을 "탁월한 재능과 식견을 갖추었다"고 평가하면서도, 왕릉, 제갈탄, 종회와 함께 "큰 야심을 품고 재앙을 돌아보지 않고 사변을 일으킨 결과, 일족이 몰락하는 결과를 초래했다"고 평했다.[1]
습착치는 "관구검은 명제(조예)의 유언에 감격하여 이 전역을 일으킨 것"이며, "일은 성공하지 못했지만, 충신이라고 칭할 만하다"고 칭찬했다.[2]
3. 이름 논란
관구(毌丘)라는 성은 조위의 관구(毌丘)라는 지역명에서 창성되었다. 관(毌)자와 무(毋)자는 동일한 한자이다. 관구검이 무구검으로도 불리는 것은 동일한 한자에 복수 발음이 존재하는 이유 때문이다. 현재에도 뜻과 발음이 2, 3가지인 한자가 많이 있다. 毌의 "관", "무"는 본래 존재하였던 복수 발음이며, 고대에 毋은 고대에 사용되었던 속자이다. 毌의 만주 속음에도 '무'라는 발음이 현재에도 존재한다. 광둥어로 관구는 관야우인데, 만주에서는 관자가 완으로 ㄱ 발음이 누락, 교환되기도 하여, 완야로 교환되기도 한다.
관구검(毋丘儉)의 이름은 종종 '''무구검'''으로 읽히며, 사마광의 《자치통감》 제73권에 그렇게 나타난다. 그러나 오금화(吳金華)는 원래의 발음은 "모구"(母丘; 毋丘, 曼丘|만구중국어로도 표기)였으며, "관구"(毌丘)는 당나라와 송나라 시대로 거슬러 올라가는 후대의 필사 오류라고 주장했다. 그는 삼국 시대의 묘비에 모구(母丘)가 성씨로 나타나는 것과 청나라 초기의 학자 고염무의 《일지록》(日知錄)에 나타나는 것을 근거로 그의 주장을 뒷받침한다. 또한 1993년에 발굴된 은만(尹灣) 한나라 시대 무덤에서 나온 고대 인장과 대나무 조각에서 무구(毋丘)가 성씨로 나타나는 것을 근거로 제시했다. 오금화는 또한 한고조의 전기 두 번째 부분에 만구신(曼丘臣)이라는 장군이 언급되어 있으며, 당나라 역사가 안사고의 주석에 "만구와 모구는 원래 같은 성씨였다"고 언급되어 있다는 점도 지적했다.
4. 친족 관계
관계 | 이름 | 비고 |
---|---|---|
부친 | 관구흥 | 장작대장, 고양향후 |
장남 | 관구전 | 신안 영산으로 도주 |
차남 | 관구종 | 관구검의 풍격을 지녔으며, 오나라 멸망 후 중국으로 귀환 |
동생 | 관구수 | 관구검을 따랐으나 오나라로 도망 |
손자 | 관구중 | 관구검을 따랐으나 오나라로 도망 |
손자 | 관구오 |
관구검의 부친 관구흥은 도적 장진 등을 토벌한 공으로 장작대장·고양향후가 되었고, 관구검이 그 작위를 이었다.[15] 동생 관구수, 손자 관구중은 최후까지 관구검을 따랐지만 오나라로 도망쳤으며, 그 후의 행적은 불명이다.[15] 아들 관구종은 관구검의 풍격을 지녔으며, 관구검의 거병 당시 인질로 오나라에 파견되었으나, 오나라가 멸망한 후 태강 연간에 형제와 함께 중국으로 귀환했다.[15]
신안 영산으로 도주한 아들 관구전 등, 오나라에 망명하지 못한 관구씨 일족은 모두 살해당했다.[15] 그러나 관구전의 아내 순씨는 순의의 상표에 의해 방면되었다.[15] 그 딸 관구지(영천 태수 유자원의 아내)도 순씨의 구명 탄원을 받아 하증이 "시집가기 전의 딸은 부모의 형벌을, 이미 혼례를 치른 부인은 남편의 집 형벌만을 따르면 된다"라고 상의했고, 이것 또한 받아들여졌다.[15]
5. 관구검을 섬긴 사람들
6. 유적
1906년, 지안 북방에서 『관구검기공비』가 발견되었다. 242년(위 정시 3년)에 건립된 것으로 보이며, 고구려 정벌의 공적을 칭송하는 내용이다.[16]。 고구려 정벌에 대해서는 『삼국지』[17]와 『삼국사기』 고구려 본기에서 연대가 어긋났지만, 이 석비에 근거하면 그 둘 다 오류가 된다.
2005년 3월 5일, 관구검의 본적지인 산시성 윈청 시 원시 현에서 관구검과 그의 일족을 모신 비석이 발견되었다. 비석에는 관구 일족 18명의 성명과, 뒷면 하단에 “난주 관구검”이라고 새겨져 있었다. “난”은 사마사에게 패배하여 죽임을 당한 난을 겪은 것을 의미한다. 양쪽에는 건립주로 보이는 관구원현, 그의 아들 관구세위, 그의 아들 관구효충, 비구(승려) 등의 성명이 새겨져 있었다. 『평양부지』에 따르면, 관구원현이 399년경에 관구사에서 수행을 하였으며, 비석은 이 전후에 건립된 것으로 보인다.[18]
참조
[1]
Sanguozhi
Sanguozhi vol. 4
[2]
서적
Sanguo Zhi jiaoyi xul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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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서
[4]
삼국지
『三国志』魏書 高貴郷公紀
[5]
서적
萬斯同『魏方鎮年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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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三国志』魏書 [[衛臻]]伝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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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三国志』魏書 公孫度伝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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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三国志』魏書 明帝紀注『志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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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三国志』魏書 [[傅嘏]]伝注『戦略』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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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三国志』呉書 [[孫亮]]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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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三国志』魏書 斉王紀注『[[漢晋春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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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지
『三国志』魏書 斉王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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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晋書』景帝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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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
拓本
文字拓本 魏晋 魏毌丘倹紀功碑
http://kanji.zinbun.[...]
京都大学人文科学研究所
2023-08-05
[17]
삼국지
[18]
뉴스
山西發現三國人物遇難紀念碑
http://big5.xinhuane[...]
新華社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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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인용
고구려 공략 유주자사는 '무구검'
https://news.naver.c[...]
연합뉴스
2008-1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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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육국춘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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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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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구검기공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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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육국춘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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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지
[26]
간행물
曹魏の東方經略
[27]
간행물
魏の東方經略と扶餘城の問題
[28]
웹인용
중국정사조선전 주석보기 > 三國志 卷 030 魏書 30 東夷傳 第 030
http://db.history.go[...]
국사편찬위원회
[29]
삼국지
[30]
인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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