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24년 12월 독일 국가의회 선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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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1924년 12월 독일 국가의회 선거는 1924년 5월 선거 이후 연립 정부 구성의 어려움으로 인해 치러졌다. 선거 결과, 사회민주당이 의석을 늘리며 원내 1당을 유지했고, 국가인민당 역시 의석을 확보했으나, 기존 중도 정당만으로는 과반을 확보하지 못했다. 공산당과 국가사회주의 자유운동의 의석은 감소했다. 결국 빌헬름 마르크스 내각이 총사퇴하고, 한스 루터가 국가인민당 등을 포함하는 우익 성향의 내각을 구성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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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4년 12월 독일 국가의회 선거 | |
---|---|
선거 개요 | |
국가 | 바이마르 공화국 |
선거 유형 | 의회 선거 |
이전 선거 | 1924년 5월 독일 연방 선거 |
이전 선거 연도 | 1924년 5월 |
다음 선거 | 1928년 독일 연방 선거 |
다음 선거 연도 | 1928년 |
선출 의석수 | 493석 |
과반 의석수 | 247석 |
등록 유권자 수 | 38,987,324명 |
투표율 | 78.8% |
이전 정부 | 제2차 마르크스 내각 |
이전 정부 정당 | Z–DVP–DDP |
이후 정부 | 제1차 루터 내각 |
이후 정부 정당 | DVP–DNVP–Z–DDP–BVP |
독일 사회민주당 (SPD) | |
![]() | |
지도자 | 헤르만 뮐러, 오토 벨스, 아르투어 크리스피엔 |
이전 선거 결과 | 20.5%, 100석 |
최종 의석수 | 131석 |
의석 변동 | 31석 |
득표수 | 7,881,041표 |
득표율 | 26.0% |
득표율 변동 | 5.5% |
독일 국가인민당 (DNVP)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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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도자 | 쿠노 폰 베스타르프 |
이전 선거 결과 | 19.5%, 95석 |
최종 의석수 | 103석 |
의석 변동 | 8석 |
득표수 | 6,205,802표 |
득표율 | 20.5% |
득표율 변동 | 1.0% |
중앙당 (Z)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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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도자 | 빌헬름 마르크스 |
이전 선거 결과 | 13.4%, 65석 |
최종 의석수 | 69석 |
의석 변동 | 4석 |
득표수 | 4,118,849표 |
득표율 | 13.6% |
득표율 변동 | 0.2% |
독일 인민당 (DVP) | |
![]() | |
지도자 | 구스타프 슈트레제만 |
이전 선거 결과 | 9.2%, 45석 |
최종 의석수 | 51석 |
의석 변동 | 6석 |
득표수 | 3,049,064표 |
득표율 | 10.1% |
득표율 변동 | 0.9% |
독일 공산당 (KPD)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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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도자 | 루트 피셔, 아르카디 마슬로 |
이전 선거 결과 | 12.6%, 62석 |
최종 의석수 | 45석 |
의석 변동 | 17석 |
득표수 | 2,709,086표 |
득표율 | 8.9% |
득표율 변동 | 3.7% |
독일 민주당 (DDP)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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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도자 | 에리히 코흐-베저 |
이전 선거 결과 | 5.7%, 28석 |
최종 의석수 | 32석 |
의석 변동 | 4석 |
득표수 | 1,919,829표 |
득표율 | 6.3% |
득표율 변동 | 0.6% |
선거 지도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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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선거 배경
1924년 5월 국회 선거 결과, 빌헬름 마르크스 내각은 불안정한 상황에 놓였다. 강경 보수 야당인 국가인민당과 극우 및 극좌 정당들이 약진했기 때문이다.[5] 국가인민당은 정권 교체를 요구했고, 마르크스 내각은 총사퇴했다. 이후 도스 안 채택을 둘러싸고 여당 내 분열과 정국 불안이 이어졌다. 결국 연립 정부 구성에 난항을 겪은 마르크스 총리는 국회 해산을 결정했고, 프리드리히 에베르트 대통령은 이를 승인했다.[10]
2. 1. 도스 안 채택과 정국 불안
1924년 5월 4일 국회 선거에서 강경 보수 야당 국가인민당이 크게 약진했고, 극우 (당시 비합법화된 나치당 위장 정당)와 극좌 (공산당)도 약진했다. 이로 인해 빌헬름 마르크스 내각 (중앙당, 인민당, 민주당, 바이에른 인민당) 연립 정권은 불안정해졌다.[5]국가인민당은 선거 승리에 고무되어 마르크스 내각에 퇴진을 요구하며 정권 담당 의지를 보였다. 마르크스 내각은 5월 26일 총사퇴했다.[5] 인민당은 국가인민당을 정권에 참여시킨 신내각 창설을 주장했지만, 국가인민당은 선거전에서 도스 안을 맹렬히 공격했기 때문에 태도 변화 없이는 정부 참여가 현실적으로 어려웠다.[6]
결국 6월 2일 제1차 내각과 거의 같은 인물로 구성된 제2차 마르크스 내각이 성립했다.[7] 이후 도스 안 관련 법안이 국회에 제출되었는데, 이 중 하나가 헌법 개정에 해당되어 3분의 2 찬성이 필요했고, 국가인민당 협력이 불가피했다. 8월 27일, 프리드리히 에베르트 대통령은 "도스 안 관련 법안 부결 시 국회 해산"을 선언했고, 해산을 두려워한 국가인민당 투표 분열로 법안은 가결되었다.[8]
마르크스 총리는 법안 표결에 즈음하여 국가인민당이 찬성하면 정부에 참여시키겠다고 약속했다. 결과는 분열 투표였지만, 인민당은 국가인민당 입각을 강력히 추진했고, 민주당은 반대하면서 여당 내 의견이 분열되었다. 정부 개조 논의는 9월부터 10월까지 প্রায় 2개월간 계속되었다. 사민당과 연립 교섭도 진행되었지만, 합의를 얻지 못했다.[9]
10월 20일 각료회의에서 마르크스 총리는 정권 개조 논의가 가망 없다고 판단, 국회 해산을 결정했다. 에베르트 대통령은 내각 요청으로 국회를 해산했고, 총선거는 12월 7일로 정해졌다.[10]
2. 2. 연립 정부 구성 난항과 국회 해산
1924년 5월 4일 국회 선거에서 강경 보수 야당인 국가인민당이 크게 약진했고, 극우(당시 불법 정당이던 나치당의 위장 정당)와 극좌(공산당)의 약진으로 빌헬름 마르크스 내각(중앙당, 인민당, 민주당, 바이에른 인민당)의 연립 정권이 불안정해졌다.[5]이에 국가인민당은 마르크스 내각에 퇴진을 요구하며 정권 담당 의지를 보였고, 마르크스 내각은 5월 26일에 총사퇴했다.[5] 집권 여당 중 인민당은 국가인민당을 정권에 참여시킨 신내각 창설을 주장했지만, 국가인민당은 선거전에서 도스 안을 맹렬히 공격했기 때문에 태도 변화 없이는 정부 참여가 현실적이지 않았다.[6]
결국 6월 2일, 제1차 내각과 거의 같은 인물들로 구성된 제2차 마르크스 내각이 성립했다.[7] 이후 도스 안 관련 법안이 국회에 제출되었는데, 그중 하나가 헌법 개정에 해당되어 3분의 2 찬성이 필요했고, 국가인민당의 협력이 불가피해졌다. 8월 27일, 프리드리히 에베르트 대통령은 "도스 안 관련 법안 부결 시 국회 해산"을 선언했고, 해산을 두려워한 국가인민당의 투표 분열로 법안이 가결되었다.[8]
마르크스 총리는 도스 안 관련 법안 표결에서 국가인민당이 찬성하면 정부에 참여시키겠다고 약속했다. 인민당은 국가인민당의 입각을 강력히 추진했지만, 민주당은 반대하면서 여당 내 의견이 분열되었다. 정부 개조 논의는 9월부터 10월까지 2개월간 계속되었다. 그동안 사민당과의 연립 교섭도 진행되었지만, 합의를 얻지 못했다.[9]
결국 10월 20일 각료회의에서 마르크스 총리는 정권 개조 논의에 가망이 없다고 판단, 국회 해산을 결정했다. 에베르트 대통령은 내각의 요청을 받아 국회를 해산했고, 총선거는 12월 7일로 정해졌다.[10]
3. 선거 제도
1924년 12월 독일 국가의회 선거는 정당 명부식 비례대표제를 통해 의원을 선출했다. 유권자는 정당에 투표하고, 각 정당은 득표수에 비례하여 의석을 배분받았다.
3. 1. 선거구
국회는 정당 명부 비례대표제를 통해 선출되었다. 이를 위해, 국가는 35개의 다수 의석 선거구로 나뉘었다. 정당은 60,000표를 획득할 때마다 의석을 받을 자격이 있었다. 의석 배분은 세 단계를 거쳤다. 먼저 선거구 수준에서 의석을 배분하고, 여러 선거구를 합친 중간 수준에서 다시 의석을 배분했다. 마지막으로 전국 수준에서 모든 정당의 잔여 표를 합산하여 의석을 배분했다. 단, 전국 수준에서 정당은 이전 두 선거구 수준에서 이미 얻은 의석보다 더 많은 의석을 받을 수 없었다. 의석당 고정된 투표 수가 있었기 때문에, 국회의 의석 수는 유권자 수와 투표율에 따라 선거마다 변동했다. 투표 연령은 25세였다.3. 2. 의석 배분
국회는 정당 명부 비례대표제를 통해 선출되었다. 국가는 35개의 다수 의석 선거구로 나뉘었으며, 정당은 획득한 60,000표마다 의석을 받을 자격이 있었다. 의석 배분은 선거구, 여러 선거구를 합친 중간 수준, 전국 수준의 세 단계를 거쳐 계산되었으며, 전국 수준에서는 모든 정당의 잔여 표가 합산되었다. 전국 단계에서 정당은 이전 두 선거구 수준에서 이미 얻은 의석보다 더 많은 의석을 받을 수 없었다. 의석당 고정된 투표 수 때문에 국회 의석 수는 유권자 수와 투표율에 따라 변동했다. 투표 연령은 25세였다.[1]정당명 | 득표수 | 득표율 (이전 선거 대비) | 의석수 (이전 선거 대비) |
---|---|---|---|
독일 사회민주당 (SPD) | 7,881,041표 | 26.02% (+5.50%) | 131석 (+31) |
독일 국가인민당 (DNVP) | 6,205,802표 | 20.49% (+1.04%) | 103석 (+8) |
중앙당 (Zentrum) | 4,118,849표 | 13.60% (+0.23%) | 69석 (+4) |
독일 인민당 (DVP) | 3,049,064표 | 10.07% (+0.87%) | 51석 (+6) |
독일 공산당 (KPD) | 2,709,086표 | 8.94% (-3.67%) | 45석 (-17) |
독일 민주당 (DDP) | 1,919,829표 | 6.3% (+0.69%) | 32석 (+4) |
바이에른 인민당 (BVP) | 1,134,035표 | 3.74% (+0.51%) | 19석 (+3) |
국가사회주의 자유운동 (NSFB) | 907,242표 | 3.00% (-3.55%) | 14석 (-18) |
독일 중산계급 경제당 (WP) | 692,963표 | 2.29% (+0.58%) | 12석 (+5) |
Reichslandbund|농촌 동맹de | 499,383표 | 1.65% (-0.31%) | 8석 (-2) |
Bayerischer Bauernbund|바이에른 소작농·독일 중산계급de | 312,442표 | 1.03% (신규) | 5석 (신규) |
독일-하노버 당 (DHP) | 262,691표 | 0.87% (-0.22%) | 4석 (-1) |
기타 여러 정당 | 597,665표 | 1.97% | 0석 |
유효 투표 총수 | 30,290,092표 | 100.00% | 493석 (+21) |
3. 3. 투표 연령
투표 연령은 20세였다.4. 선거 결과
1924년 12월 7일에 치러진 독일 국가의회 선거 결과는 다음과 같다.
정당 | 득표수 | 득표율(%) | 의석수 | 의석수 변화 |
---|---|---|---|---|
독일 사회민주당 (SPD) | 7,881,041 | 26.0 | 131 | +31 |
독일 국가인민당 (DNVP) | 6,205,802 | 20.5 | 103 | +8 |
독일 중앙당 | 4,118,849 | 13.6 | 69 | +4 |
독일 인민당 (DVP) | 3,049,064 | 10.1 | 51 | +6 |
독일 공산당 (KPD) | 2,709,086 | 9.0 | 45 | -17 |
독일 민주당 (DDP) | 1,919,829 | 6.3 | 32 | +4 |
바이에른 인민당 (BVP) | 1,134,035 | 3.7 | 19 | +3 |
국가사회주의 자유운동 (NSFB) | 907,242 | 3.0 | 14 | -18 |
독일 중산층경제당 | 692,963 | 2.3 | 12 | +5 |
농업동맹 | 500,525 | 1.6 | 8 | -2 |
바이에른 농민동맹 | 312,442 | 1.0 | 5 | +2 |
독일-하노버당 (DHP) | 261,549 | 0.9 | 4 | -1 |
기타 | 597,665 | 2.0 | 0 | 0 |
기권/무효 | 414,934 | - | - | - |
합계 | 30,705,026 | 100 | 493 | +21 |
등록 유권자/투표율 | 38,987,324 | 78.8 | - | - |
1920년 총선에서 의석이 크게 줄었던 사민당은 당세를 회복하여 131석을 얻었다. 국가인민당도 득표와 의석을 약간 늘려 103석을 얻었다. 중앙당, 인민당, 민주당 등 중도 3당도 의석을 약간 늘렸으나, 이들만으로는 정권 구성이 불가능했다. 따라서 우익(국가인민당)이나 좌익(사민당) 중 한 세력의 참여가 필요했다.[11]
공산당과 국가사회주의 자유운동(뮌헨 폭동 실패로 금지된 나치당 세력과 독일 민족자유당의 합당 정당) 등 극좌, 극우 정당은 의석이 크게 줄었다. 이는 정부에 비판적인 세력의 약화를 의미하며, 연립 정부 구성 가능성을 높였다.[11]
4. 1. 정당별 결과 분석
1924년 12월 독일 국가의회 선거에서 각 정당의 득표율과 의석수 변화는 다음과 같다.정당 | 득표수 | 득표율(%) | 의석수 | 의석수 변화 |
---|---|---|---|---|
독일 사회민주당 (SPD) | 7,881,041 | 26.0 | 131 | +31 |
독일 국가인민당 (DNVP) | 6,205,802 | 20.5 | 103 | +8 |
독일 중앙당 | 4,118,849 | 13.6 | 69 | +4 |
독일 인민당 (DVP) | 3,049,064 | 10.1 | 51 | +6 |
독일 공산당 (KPD) | 2,709,086 | 9.0 | 45 | -17 |
독일 민주당 (DDP) | 1,919,829 | 6.3 | 32 | +4 |
바이에른 인민당 (BVP) | 1,134,035 | 3.7 | 19 | +3 |
국가사회주의 자유운동 (NSFB) | 907,242 | 3.0 | 14 | -18 |
독일 중산층경제당 | 692,963 | 2.3 | 12 | +5 |
농업동맹 | 500,525 | 1.6 | 8 | -2 |
바이에른 농민동맹 | 312,442 | 1.0 | 5 | 신규 |
독일-하노버당 (DHP) | 261,549 | 0.9 | 4 | -1 |
기타 | 597,665 | 2.0 | 0 | 0 |
이전 선거와 비교했을 때, 독일 사회민주당(사민당)은 31석을 추가하며 가장 큰 의석 증가를 보였다. 독일 국가인민당 또한 8석을 늘렸다. 중도 정당인 독일 중앙당, 독일 인민당, 독일 민주당도 소폭 의석을 늘렸다. 반면, 극좌 정당인 독일 공산당은 17석을 잃었고, 극우 정당인 국가사회주의 자유운동은 18석을 잃으며 크게 의석이 감소했다.[11]
이러한 결과는 극단주의 정당의 약화와 중도 정당의 소폭 강세를 보여준다. 특히, 원칙을 고수하며 정부에 반대하는 세력의 의석 감소는 연립 정부 구성 가능성을 높였다.[11]
4. 2. 한스 루터 내각 출범
1924년 12월 7일 투표 결과, 1920년 총선에서 의석을 크게 줄였던 사민당이 다소 당세를 회복하여 131석을 획득했다. 국가인민당도 이전 선거보다 득표와 의석을 약간 늘려 103석을 획득했다. 중앙당, 인민당, 민주당 등 중도 3당도 약간이나마 득표와 의석을 증가시켰다. 그러나 중도 3당만으로는 정권을 구성할 수 없는 구도는 같았고, 따라서 우익(국가인민당) 또는 좌익(사민당) 중 하나를 정권에 참여시킬 필요가 있는 상황은 변하지 않아, 의회에 뚜렷한 변동은 없었다고 할 수 있다.[11]한편 극우와 극좌의 득표가 크게 감소했으며, 공산당과 국가사회주의 자유운동 (뮌헨 폭동의 실패로 금지되었던 구 나치당 세력과 독일 민족자유당의 합당 정당)이 의석을 크게 줄였다. 원칙에 굳게 고집하여 항상 정부 반대에 나서는 세력의 의석이 줄었기 때문에, 약간이나마 조각이 용이해진 결과였다.[11]
마르크스 내각은 12월 15일에 연립 교섭을 포기하고 총사퇴했지만, 에베르트로부터 조각을 명받은 재무장관 한스 루터는 우익으로 정권을 확장하는 것을 선택하여, 1925년 1월 15일에 국가인민당, 인민당, 중앙당, 바이에른 인민당을 여당으로 하는 루터 내각을 창설하게 되었다.
4. 3. 주요 당선 의원
참조
[1]
서적
Elections in Europe: A data handbook
2010
[2]
논문
The Reichstag Elections
https://www.cambridg[...]
1925
[3]
서적
The Weimar Republic
Routledge
2004
[4]
논문
Power distribution in the Weimar Reichstag in 1919–1933
https://link.springe[...]
2013-02-21
[5]
문서
아이크II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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