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24년 5월 독일 국가의회 선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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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1924년 5월 독일 국가의회 선거는 초인플레이션으로 인한 경제 위기 속에서 치러졌으며, 프랑스의 루르 점령과 도즈 안을 둘러싼 갈등이 주요 쟁점이었다. 선거 결과, 극우 정당인 독일 국가인민당과 극좌 정당인 독일 공산당이 약진하고, 중도 정당들이 쇠퇴했다. 이로 인해 마르크스 내각이 총사퇴하고, 재구성되었으나, 결국 국회 해산과 12월 총선으로 이어졌다. 선거에서는 국가사회주의자유운동이 처음으로 원내 진출했으며, 주요 당선자로는 에른스트 텔만, 오토 폰 비스마르크, 루돌프 힐퍼딩 등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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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4년 12월 독일 국가의회 선거는 바이마르 공화국의 불안정 속에서 사회민주당이 가장 많은 의석을 차지했으나, 공산당 약진과 보수 정당 확대로 정부 구성에 어려움이 예상되었고, 국가사회주의 독일 노동자당의 등장과 함께 독일 정당 구도 분열을 보여주며 향후 정치에 큰 영향을 미쳤다. - 1924년 5월 - 제15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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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4년 5월 독일 국가의회 선거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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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거 개요 | |
국가 | 바이마르 공화국 |
선거 유형 | 의회 선거 |
투표 유형 | 일반 투표 |
이전 선거 | 1920년 독일 연방 선거 |
이전 선거 연도 | 1920년 6월 |
다음 선거 | 1924년 12월 독일 연방 선거 |
다음 선거 연도 | 1924년 12월 |
내각 | 제1차 빌헬름 마르크스 내각 |
해산일 | 1924년 3월 13일 |
선출 의석수 | 472석 |
선거 제도 | 비례대표제 |
유권자 | 20세 이상 독일 국민 |
등록 유권자 수 | 38,374,983명 |
선거일 | 1924년 5월 4일 |
투표율 | 77.4% |
지도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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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요 정당 1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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색상 | EB001F |
지도자 | 헤르만 뮐러, 오토 벨스, 아르투어 크리스피엔 |
지도자 임기 시작 | 1919년 |
이전 선거 결과 | 102석, 21.7% |
당선 의석 | 100석 |
의석 변동 | '2석' |
득표수 | 6,008,905표 |
득표율 | 20.5% |
득표율 변동 | '1.2%' |
주요 정당 2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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색상 | 98F6FF |
지도자 임기 시작 | 1919년 |
이전 선거 결과 | 71석, 15.1% |
당선 의석 | 95석 |
의석 변동 | '24석' |
득표수 | 5,696,475표 |
득표율 | 19.5% |
득표율 변동 | '4.4%' |
주요 정당 3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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색상 | FFEB3B |
지도자 | 콘스탄틴 페렌바흐 |
지도자 임기 시작 | 1923년 |
이전 선거 결과 | 64석, 13.6% |
당선 의석 | 65석 |
의석 변동 | '1석' |
득표수 | 3,914,379표 |
득표율 | 13.4% |
득표율 변동 | '0.2%' |
주요 정당 4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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색상 | 8B0000 |
지도자 | 루트 피셔, 아르카디 마슬로프 |
이전 선거 결과 | 4석, 2.1% |
당선 의석 | 62석 |
의석 변동 | '58석' |
득표수 | 3,693,280표 |
득표율 | 12.6% |
득표율 변동 | '10.5%' |
주요 정당 5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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색상 | 1874CD |
지도자 | 구스타프 슈트레제만 |
지도자 임기 시작 | 1919년 |
이전 선거 결과 | 65석, 13.9% |
당선 의석 | 45석 |
의석 변동 | '20석' |
득표수 | 2,694,381표 |
득표율 | 9.2% |
득표율 변동 | '4.7%' |
주요 정당 6 | |
![]() | |
색상 | 804C19 |
지도자 | 에리히 루덴도르프, 알브레히트 폰 그레페 |
지도자 임기 시작 | 1924년 |
이전 선거 결과 | 신당 |
당선 의석 | 32석 |
의석 변동 | '32석' |
득표수 | 1,918,329표 |
득표율 | 6.5% |
득표율 변동 | '6.5%' |
정부 | |
선거 이전 수상 | 빌헬름 마르크스 |
선거 이전 정당 | 중앙당–인민당–바이에른 인민당–민주당 |
선거 이후 수상 | 빌헬름 마르크스 |
선거 이후 정당 | 중앙당–인민당–민주당 |
기타 참여 정당 (한국어 문서에서만 확인) | |
독일 민주당 | 28석 |
바이에른 인민당 | 16석 |
독일 중산층국가당 | 7석 |
2. 선거 배경
1923년 프랑스군의 루르 점령에 대한 소극적 저항으로 초인플레이션이 발생하여 경제가 위기에 빠지자, 구스타프 슈트레제만 내각이 들어섰으나, 독일 사회민주당(SPD)이 여당에서 이탈하고 내각 불신임안이 가결되어 붕괴되었다.[1][2] 이후 1923년 11월 30일, 중앙당의 빌헬름 마르크스가 수상이 되어 제1차 마르크스 내각을 성립시켰다.[3]
제1차 마르크스 내각은 통화 개혁과 재정 재건을 위해 의회 심의 대신 수권법(전권 위임법)을 가결시켜 명령으로 사태를 수습하려 했다.[4] 그러나 1924년 2월 국회가 소집되자 야당은 명령 변경 및 폐지를 요구했고, 제3차 긴급 과세령을 두고 반감이 높아졌다.[5] 이에 1924년 3월 13일, 사민당의 긴급령 폐지 동의가 가결될 것을 우려한 마르크스 내각은 국회 해산을 결정했다.[6]
2. 1. 경제 위기와 사회 불안
1923년 프랑스군의 루르 점령에 대해 독일 정부는 소극적 저항(루르 주민에게 프랑스 점령 당국에의 협력 거부를 호소)을 펼쳤지만, 이로 인해 초인플레이션이 발생하여 경제가 위기적 상황에 빠졌다. 이를 수습하기 위해 1923년 8월 독일 인민당(DVP)의 구스타프 슈트레제만을 수상으로 임명하고, 인민당, 중앙당(Zentrum), 독일 사회민주당(SPD), 독일 민주당(DDP), 바이에른 인민당(BVP) 등 광범위한 정당이 여당이 되는 대연립 정권이 수립되었다.하지만 사민당은 작센-튀링겐 문제(공산당을 정권에 참여시킨 사민당의 주 정부 해체에 국군이 출동한 사건)를 놓고 슈트레제만 내각에 반감을 품고 여당에서 이탈했다.[1] 1923년 11월 23일, 야당 독일 국가 인민당(DNVP)이 바이에른 문제(바이에른에 대한 국군 출동)와 루르의 소극적 저항 중지에 대한 반발로 제출한 내각 불신임안에 사민당도 찬성하여 231대 156으로 가결되었다. 이로 인해 슈트레제만 내각은 총사퇴했다.[2]
이후 11월 30일 중앙당의 빌헬름 마르크스가 수상으로 임명되어, 중앙당, 독일 인민당(DVP), 독일 민주당(DDP)을 여당으로 하는 제1차 마르크스 내각이 성립되었다.[3] 통화 개혁과 재정 재건이라는 과제를 앞둔 제1차 마르크스 내각은 국회에서의 기반 약세와 시간적 제약으로 인해 의회 심의를 단념하고, 시한부 입법으로 수권법(전권 위임법)을 가결시켜 명령에 의한 사태 수습을 꾀했다.[4]
하지만 1924년 2월 국회가 소집되자, 이러한 명령의 변경 및 폐지를 요구하는 야당의 동의가 잇따라 제출되었으며, 수권법 기한 만료 전날인 2월 14일에 대통령 긴급령으로 발령된 제3차 긴급 과세령을 두고 야당의 반감이 높아졌다.[5] 사민당의 긴급령 폐지 동의가 가결될 우려가 있자, 1924년 3월 13일 마르크스 내각은 국회 해산을 결정했다.[6]
2. 2. 슈트레제만 내각의 등장과 붕괴
1923년 프랑스군의 루르 점령에 대해 독일 정부는 소극적 저항을 펼쳤지만, 이로 인해 초인플레이션이 발생하여 경제가 위기에 빠졌다. 이를 수습하기 위해 1923년 8월 독일 인민당(DVP)의 구스타프 슈트레제만을 수상으로 임명하고, 인민당, 중앙당(Zentrum), 독일 사회민주당(SPD), 독일 민주당(DDP), 바이에른 인민당(BVP) 등 여러 정당이 참여하는 대연립 정권이 수립되었다.[1][2]하지만 독일 사회민주당(SPD)은 작센-튀링겐 문제(공산당을 정권에 참여시킨 사민당 주 정부 해체에 국군이 출동한 사건)를 놓고 슈트레제만 내각에 반발하여 여당에서 이탈했다.[2] 1923년 11월 23일, 야당 독일 국가 인민당(DNVP)이 바이에른 문제(바이에른에 대한 국군 출동)와 루르의 소극적 저항 중지에 대한 반발로 제출한 내각 불신임안에 사민당도 찬성하여 231대 156으로 가결되었다. 이로 인해 슈트레제만 내각은 총사퇴하였다.[3]
2. 3. 마르크스 내각의 국회 해산
1923년 프랑스군의 루르 점령에 대한 소극적 저항으로 초인플레이션이 발생하여 경제가 위기에 빠지자, 구스타프 슈트레제만 내각이 들어섰으나, 독일 사회민주당(SPD)이 여당에서 이탈하고 내각 불신임안이 가결되어 붕괴되었다.[1] 이후 1923년 11월 30일, 중앙당의 빌헬름 마르크스가 수상이 되어 제1차 마르크스 내각을 성립시켰다.[2]제1차 마르크스 내각은 통화 개혁과 재정 재건을 위해 의회 심의 대신 수권법(전권 위임법)을 가결시켜 명령으로 사태를 수습하려 했다.[3] 그러나 1924년 2월 국회가 소집되자 야당은 명령 변경 및 폐지를 요구했고, 제3차 긴급 과세령을 두고 반감이 높아졌다.[4] 이에 1924년 3월 13일, 사민당의 긴급령 폐지 동의가 가결될 것을 우려한 마르크스 내각은 국회 해산을 결정했다.[5]
3. 선거 제도
국회는 정당 명부 비례대표제를 통해 선출되었다. 이를 위해, 독일은 35개의 다선거구 선거구로 나뉘었다. 정당은 6만 표를 얻을 때마다 의석을 얻을 자격이 있었다. 의석 배분은 세 단계로 계산되었는데, 선거구 수준, 여러 선거구를 합친 중간 수준, 그리고 전국 수준이었다. 전국 수준에서는 모든 정당의 초과 득표수가 합산되었다. 세 번째 전국 단계에서 정당은 이전 두 하위 선거구 수준에서 이미 얻은 의석 수보다 더 많은 의석을 받을 수 없었다. 의석당 고정된 득표수 때문에 국회의 규모는 선거마다 투표자 수와 투표율에 따라 변동했다. 투표 연령은 20세였다.[5]
4. 선거 운동
1924년 5월 독일 국가의회 선거는 도즈 안 찬반 논쟁을 중심으로 전개되었다. 우익 국가인민당은 "제2의 베르사유 조약"이라며 강하게 비판했고, 좌익 사회민주당은 수용 입장이었다.[2][3] 국가사회주의 독일 노동자당은 독일 민족자유당과 국가사회주의자유당(NSFP)이라는 위장 정당을 만들어, 공산당과 함께 도즈 안에 반대했다.[2][4]
4. 1. 도즈 안 논쟁
4월 9일, 독일 배상 문제의 도즈 위원회와 매케나 위원회는 국제 연맹 배상 위원회에 보고서를 제출했고, 4월 11일에 국제 연맹 배상 위원회가 이를 승인했다(도즈 안). 독일 정부는 이 도즈 안을 수용할 방침을 밝혔지만, 이로 인해 선거전의 쟁점은 일시에 도즈 안 찬반으로 좁혀졌다[1]。독일 국가인민당은 우익 야당으로서 도즈 안을 "제2의 베르사유 조약"으로 격렬하게 비판했다[2]。반면 독일 사회민주당은 좌익 야당이었으나 도즈 안을 용인했다[3]。
국가사회주의 독일 노동자당(NSDAP, 나치당)은 당시 당이 금지되었으므로, 독일 민족자유당과 함께 국가사회주의자유운동(NSFP)이라는 위장 정당을 창설하여 선거전에 임했다. 독일 공산당은 1924년 4월 7일에 금지가 해제되었으므로 그대로 선거전에 참여했다[2]。국가사회주의자유운동과 공산당은 모두 도즈 안에 반대했다[4]。
4. 2. 각 정당의 선거 운동
1924년 4월 9일, 독일 배상 문제의 도즈 위원회와 매케나 위원회는 국제 연맹 배상 위원회에 보고서를 제출했고, 4월 11일에 국제 연맹 배상 위원회가 이를 승인했다(도즈 안). 독일 정부는 이 도즈 안을 수용할 방침을 밝혔지만, 이로 인해 선거전의 쟁점은 일시에 도즈 안 찬반으로 좁혀졌다.[1]우익 야당인 국가인민당은 도즈 안을 "제2의 베르사유 조약"으로 격렬하게 비판했다.[2] 한편 좌익 야당인 사회민주당은 도즈 안을 용인했다.[3]
국가사회주의 독일 노동자당(NSDAP)은 당시 당이 금지되었으므로, 독일 민족자유당과 함께 국가사회주의자유당(NSFP)이라는 위장 정당을 창설하여 선거전에 임했다. 공산당은 1924년 4월 7일에 금지가 해제되었으므로 그대로 선거전에 참여했다.[2] 국가사회주의자유당과 공산당 모두 도즈 안에 반대했다.[4]
5. 선거 결과
1924년 5월 4일 총선에서 도스 안에 반대한 극우 및 극좌 정당들이 약진했다. 독일 국가인민당(DNVP)은 95석으로 원내 제1당이 되었으며, 독일 공산당(KPD)도 62석을 획득하며 크게 성장했다. 나치당의 위장 정당인 국가사회주의 자유운동(NSFB)도 32석을 얻었다.[1]
반면, 도스 안에 찬성한 여당과 독일 사회민주당(SPD)은 의석수가 감소했다. 특히 독일 사회민주당은 100석으로 대패했으며,[2] 독일 인민당(DVP)과 독일 민주당(DDP)도 각각 45석, 28석으로 의석을 잃었다.[3]
선거에서 승리한 독일 국가인민당은 마르크스 내각에 퇴진을 요구했고, 이에 5월 26일 내각이 총사퇴했다.[6] 그러나 6월 2일, 제1차 내각과 거의 같은 구성원으로 제2차 마르크스 내각이 성립되었다.[7] 이후 마르크스 내각은 독일 국가인민당을 여당으로 끌어들이는 데 실패하고, 결국 10월 20일에 국회가 해산되어 12월 7일에 총선거가 다시 치러졌다.[8]
정당별 득표율과 의석수 변화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정당별 득표율 및 의석수 변화' 하위 섹션에서 확인할 수 있다.
5. 1. 정당별 득표율 및 의석수 변화
정당 | 득표수 | 득표율 (%) | 의석수 | 의석수 변화 |
---|---|---|---|---|
독일 사회민주당 (SPD) | 6,008,905 | 20.5 | 100 | -2 |
독일 국가인민당 (DNVP) | 5,696,475 | 19.5 | 95 | +24 |
독일 중앙당 | 3,914,379 | 13.4 | 65 | +1 |
독일 공산당 (KPD) | 3,693,280 | 12.6 | 62 | +58 |
독일 인민당 (DVP) | 2,694,381 | 9.2 | 45 | -20 |
국가사회주의 자유운동 (NSFB) | 1,918,329 | 6.5 | 32 | New |
독일 민주당 (DDP) | 1,655,129 | 5.7 | 28 | -11 |
바이에른 인민당 (BVP) | 946,648 | 3.2 | 16 | -4 |
농업동맹 | 574,939 | 2.0 | 10 | New |
독일 중산층경제당 | 500,820 | 1.7 | 7 | New |
Deutschsoziale Partei (Weimarer Republik)|독일 사회당|독일 사회당 (바이마르 공화국)de | 333,427 | 1.1 | 4 | +4 |
독일-하노버당 (DHP) | 319,792 | 1.1 | 5 | 0 |
독일 독립사회민주당 (USPD) | 235,145 | 0.8 | 0 | -84 |
Bayerischer Bauernbund|바이에른 농민동맹|바이에른 농민동맹de | 192,786 | 0.7 | 3 | -1 |
기독교사회인민공동체 | 124,451 | 0.4 | 0 | New |
폴란드 인민당 | 100,260 | 0.3 | 0 | New |
국가자유당 | 62,071 | 0.2 | 0 | New |
분데고이센 | 59,222 | 0.2 | 0 | New |
소작민의 당 | 45,920 | 0.2 | 0 | New |
독일 공화당 | 45,722 | 0.2 | 0 | New |
독일 노동자당 | 36,291 | 0.1 | 0 | New |
자유경제연합 FFF | 36,013 | 0.1 | 0 | New |
Sozialistische Bund|사회주의자 그룹|사회주의자 그룹de | 26,418 | 0.1 | 0 | New |
해우세분데 | 24,451 | 0.1 | 0 | New |
Wendische Volkspartei|소르브 인민당|소르브 인민당de | 10,827 | 0.0 | 0 | 0 |
볼키치 블록 | 9,561 | 0.0 | 0 | New |
슐레스비히 클럽 | 7,620 | 0.0 | 0 | 0 |
바이에른 중산층그룹 | 5,659 | 0.0 | 0 | New |
독립경제그룹 | 1,848 | 0.0 | 0 | New |
마수리안 연합 | 1,029 | 0.0 | 0 | New |
합계 | 29,709,380 | 100 | 472 | +13 |
기권/무효 | 427,582 | – | – | – |
등록유권자/투표율 | 38,374,983 | 77.42 | – | – |
출처: [http://www.gonschior.de/weimar/Deutschland/RT2.html Gonschior.de] |
1924년 5월 4일 총선 결과, 도스 안에 반대한 극우 및 극좌 정당들이 약진했다. 독일 국가인민당(DNVP)은 95석으로 원내 제1당이 되었으며, 독일 공산당(KPD)도 62석을 획득하며 크게 성장했다. 나치당의 위장 정당인 국가사회주의 자유운동(NSFB)도 32석을 얻었다.[1]
반면, 도스 안에 찬성한 여당과 독일 사회민주당(SPD)은 의석수가 감소했다. 특히 독일 사회민주당은 100석으로 대패했다.[2] 독일 인민당(DVP)과 독일 민주당(DDP)도 각각 45석, 28석으로 의석을 잃었다.[3]
5. 2. 선거 결과 분석
5월 4일 총선거는 도즈 안에 반대한 극우 및 극좌 정당이 압승을 거둔 선거였다. 독일 국가인민당(DNVP)은 65석에서 96석으로 크게 성장했고, 10석을 얻은 농촌 리스트와 합쳐 국회 제1당이 되었다. 독일 공산당(KPD) 역시 17석에서 62석으로 크게 약진했다. 나치당의 위장 정당인 국가사회주의자유당(NSFB)도 처음으로 출마하여 32석을 획득했다.도즈 안에 찬성한 여당과 독일 사회민주당(SPD)은 득표율이 크게 하락했다. 특히 독일 사회민주당은 171석에서 100석으로 크게 패배했다. 부르주아 정당 중에서는 독일 인민당(DVP)과 독일 민주당(DDP)도 큰 타격을 입었다. 독일 인민당은 의석의 3분의 1을 잃어 45석을, 독일 민주당은 28석을 얻는 데 그쳤다.
선거에서 승리한 독일 국가인민당은 마르크스 내각에 퇴진을 요구했고, 마르크스 내각은 그 요구대로 5월 26일 총사퇴했다.[6] 그러나 6월 2일, 제1차 내각과 거의 같은 구성원으로 제2차 마르크스 내각이 성립되었다.[7] 마르크스 내각은 독일 국가인민당을 여당으로 끌어들이려는 다수파 공작을 벌여, 도즈 안 관련 법안 표결에서 독일 국가인민당 의원들의 투표를 분열시키는 데 성공했지만, 동 당을 완전한 여당으로 끌어들이는 데는 실패했고, 또한 독일 사회민주당을 여당으로 끌어들이는 공작에도 실패하여 다수파 공작을 포기했다. 10월 20일에는 다시 국회가 해산되었고, 12월 7일 총선거가 치러지게 되었다.[8]
6. 선거 이후 정국
1924년 5월 4일 총선 결과, 도스 안에 반대한 극우 및 극좌 정당이 압승했다. 독일 국가인민당(DNVP)은 65석에서 96석으로, 독일 공산당(KPD)은 17석에서 62석으로 약진했고, 나치당의 위장 정당인 국가사회주의자유당(NSFB)도 32석을 얻었다.[6]
반면 도스 안에 찬성한 여당과 독일 사회민주당(SPD)은 의석이 줄었다. 특히 독일 사회민주당은 171석에서 100석으로 크게 감소했고, 독일 인민당(DVP)과 독일 민주당(DDP)도 타격을 입었다.[6]
선거에서 승리한 독일 국가인민당은 마르크스 내각의 퇴진을 요구했고, 5월 26일 내각은 총사퇴했다.[6] 그러나 6월 2일, 제1차 내각과 거의 같은 구성원으로 제2차 마르크스 내각이 성립되었다.[7]
마르크스 내각은 독일 국가인민당과 독일 사회민주당을 여당으로 끌어들이려 했으나 실패하여 다수파 형성을 포기했다. 결국 10월 20일 국회가 해산되었고, 12월 7일 총선거가 치러졌다.[8]
6. 1. 마르크스 내각의 유지와 한계
1924년 5월 4일 총선거에서는 도스 안(Dawes Plan)에 반대한 극우 및 극좌 정당들이 압승을 거두었다. 독일 국가인민당(DNVP)은 65석에서 96석으로 약진하여 농촌 리스트(Landliste, 10석)와 함께 국회 제1당이 되었다. 독일 공산당(KPD)도 17석에서 62석으로 크게 약진했으며, 나치당의 위장 정당인 국가사회주의자유당(NSFB)은 처음 치른 선거에서 32석을 획득했다.[6]도스 안에 찬성한 여당과 독일 사회민주당(SPD)은 득표율이 하락했다. 특히 독일 사회민주당은 171석에서 100석으로 크게 패했다.[6] 독일 인민당(DVP)은 의석의 3분의 1을 잃어 45석, 독일 민주당(DDP)은 28석을 얻는 데 그쳐 부르주아 정당들도 큰 타격을 입었다.
선거에서 승리한 독일 국가인민당은 마르크스 내각에 퇴진을 요구했고, 이에 따라 마르크스 내각은 1924년 5월 26일 총사퇴했다.[6] 그러나 6월 2일, 제1차 내각과 거의 같은 구성원으로 제2차 마르크스 내각이 성립되었다.[7] 마르크스 내각은 독일 국가인민당을 연립 정부에 참여시키고자 도스 안 관련 법안 표결에서 독일 국가인민당 의원들의 투표를 분열시키는 데는 성공했지만, 당을 완전히 연립 정부에 끌어들이는 데는 실패했다. 독일 사회민주당을 연립 정부에 참여시키려는 시도 역시 실패로 돌아가면서, 마르크스 내각은 다수파 형성을 포기했다. 결국 1924년 10월 20일 국회가 해산되었고, 12월 7일 총선거가 치러지게 되었다.[8]
6. 2. 국회 재해산과 12월 총선
5월 총선에서 도스 안(Dawes Plan)에 찬성한 여당과 독일 사회민주당(SPD)은 득표율이 크게 하락했다. 특히 독일 사회민주당(SPD)은 171석에서 100석으로 대패했다.[6] 반면 도스 안에 반대한 극우와 극좌 정당은 의석수가 크게 늘었다. 독일 국가인민당(DNVP)은 96석을 획득하여 제1당이 되었고, 독일 공산당(KPD)도 62석으로 약진했다.선거에서 승리한 독일 국가인민당(DNVP)은 마르크스 내각에 퇴진을 요구했고, 마르크스 내각은 5월 26일 총사퇴했다.[6] 그러나 6월 2일, 제1차 내각과 거의 같은 구성원으로 제2차 마르크스 내각이 다시 성립되었다.[7]
마르크스 내각은 독일 국가인민당(DNVP)을 여당으로 끌어들이기 위해 노력했고, 도스 안 관련 법안 표결에서 독일 국가인민당(DNVP) 의원들의 투표를 분열시키는 데는 성공했지만, 여당으로 만드는 데는 실패했다. 또한 독일 사회민주당(SPD)을 여당으로 끌어들이는 데도 실패하여 다수파 형성을 포기했다. 결국 10월 20일 국회가 다시 해산되었고, 12월 7일 총선거가 치러지게 되었다.[8]
7. 주요 당선자
다음은 1924년 5월 독일 국가의회 선거의 주요 당선자 목록이다.
- 에른스트 텔만 (독일 공산당): 1925년 10월부터 독일 공산당 당수를 역임했다.
- 오토 폰 비스마르크 (독일 국가 인민당): 독일 제국 재상 오토 폰 비스마르크의 손자이자 후작이다.
- 알프레트 폰 티르피츠 (독일 국가 인민당): 독일 제국 시대의 해군 대신이었다.
- 루돌프 힐퍼딩 (독일 사회민주당): 독일 재무장관을 역임했으며, 『금융 자본론』의 저자이다.
- 고트프리트 페더 (국가사회주의자유당): 국가 사회주의 독일 노동자당의 전신인 독일 노동자당의 창립 멤버 중 한 명이다.
- 빌헬름 프릭 (국가사회주의자유당): 훗날 독일 내무 장관을 역임했다.
- 에리히 루덴도르프 (국가사회주의자유당): 제1차 세계 대전 당시 독일 제국군 참모 차장을 지냈으며, 아돌프 히틀러와 함께 뮌헨 폭동의 중심 인물이었다.
- 에른스트 룀 (국가사회주의자유당): 돌격대 사령관이었다.
참조
[1]
서적
Elections in Europe: A data handbook
2010
[2]
문서
[3]
논문
The German Elections
https://www.cambridg[...]
1924
[4]
서적
The Weimar Republic
Routledge
2004
[5]
논문
Power distribution in the Weimar Reichstag in 1919–1933
https://link.springe[...]
2013-02-21
[6]
문서
아이크II巻 1983, p.131
[7]
문서
아이크II巻 1983, p.144
[8]
문서
아이크II巻 1983, p.159/167-1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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