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1년 독일 연방의회 선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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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1961년 독일 연방의회 선거는 1961년 9월 17일에 치러졌으며, 소선거구 비례대표 병용제를 통해 치러졌다. 선거는 베를린 위기와 베를린 장벽 건설이라는 상황 속에서 진행되었으며, 기독교민주연합(CDU)/기독교사회연합(CSU) 연합은 과반 의석 확보에 실패했다. 사회민주당(SPD)은 빌리 브란트를 총리 후보로 내세웠으며, 자유민주당(FDP)은 에리히 멘데가 이끌었다. 선거 결과, CDU/CSU는 FDP와 연립 정부를 구성하게 되었고, 콘라트 아데나워는 총리직을 유지했으나, 이후 정치적 어려움을 겪고 1963년 사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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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1년 독일 연방의회 선거 | |
---|---|
선거 개요 | |
국가 | 서독 |
선거 유형 | 의회 선거 |
이전 선거 | 1957년 서독 연방의회 선거 |
이전 선거 연도 | 1957년 |
선거일 | 1961년 9월 17일 |
다음 선거 | 1965년 서독 연방의회 선거 |
다음 선거 연도 | 1965년 |
선출 의석 | 499석 (분데스탁) |
추가 의석 정보 | 서베를린 주의회에서 선출된 22명의 비투표 대의원 포함 |
과반 의석 | 250석 |
등록 유권자 | 37,440,715명 |
등록 유권자 변화 | 증가 (5.8%) |
투표율 | 87.7% |
투표율 변화 | 감소 (0.1%p) |
지도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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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요 후보 | |
후보 1 | 콘라트 아데나워 |
정당 1 | CDU/CSU |
이전 선거 결과 1 | 50.2%, 270석 |
의석 1 | 242석 |
추가 의석 정보 1 | 서베를린 비투표 대의원 9명 포함 |
의석 변화 1 | 감소 28석 |
득표수 1 | 14,298,372표 |
득표율 1 | 45.3% |
득표율 변화 1 | 감소 4.9%p |
후보 2 | 빌리 브란트 |
정당 2 | 독일 사회민주당 |
이전 선거 결과 2 | 31.8%, 169석 |
의석 2 | 190석 |
추가 의석 정보 2 | 서베를린 비투표 대의원 13명 포함 |
의석 변화 2 | 증가 21석 |
득표수 2 | 11,427,355표 |
득표율 2 | 36.2% |
득표율 변화 2 | 증가 4.4%p |
후보 3 | 에리히 멘데 |
정당 3 | 자유민주당 |
이전 선거 결과 3 | 7.7%, 41석 |
의석 3 | 67석 |
의석 변화 3 | 증가 26석 |
득표수 3 | 4,028,766표 |
득표율 3 | 12.8% |
득표율 변화 3 | 증가 5.1%p |
정부 | |
선거 전 정부 | 제3차 아데나워 내각 |
선거 전 정당 | CDU/CSU |
선거 후 정부 | 제4차 아데나워 내각 |
선거 후 정당 | CDU/CSU–FDP |
2. 선거 배경
이번 선거는 베를린 위기와 베를린 장벽 건설이라는 상황 속에서 치러졌다.[1]
SPD은 빌리 브란트 서베를린 시장을 총리 후보로 내세웠는데, 이는 당 의장이 아닌 인물을 총리 후보로 지명한 첫 사례였다. 브란트는 베를린 장벽 건설 이후 지지도가 상승한 반면, 콘라트 아데나워 총리는 서베를린 시민에 대한 지원이 부족하다는 비판을 받았다. 아데나워는 CDU/CSU의 절대 다수 유지를 목표로 했으나, 고령과 장기 집권으로 인해 4선 연임에 대한 의문이 제기되었다.
2. 1. 선거 제도
독일 연방의회 선거는 소선거구 비례대표 병용제를 채택하고 있다. 유권자는 지역구 후보에게 투표하는 1차 투표와 정당에 투표하는 2차 투표를 한다. 전체 의석은 2차 투표(정당 투표)의 득표율에 따라 배분되지만, 소수 정당 난립을 막기 위해 전국 득표율 5% 이상 또는 지역구 3석 이상을 얻어야 한다는 5% 봉쇄 조항을 적용한다.2. 2. 정당 및 주요 인물
- '''기독교민주연합(CDU)/기독교사회연합(CSU)''': 콘라트 아데나워 총리가 이끄는 중도우파 정당 연합이다. 오랜 집권과 고령의 나이로 인해 아데나워의 리더십에 대한 의문이 제기되었다.[1]
- '''독일 사회민주당(SPD)''': 빌리 브란트 서베를린 시장을 총리 후보로 내세운 중도좌파 정당이다. 브란트는 베를린 장벽 위기에 대한 적극적인 대응으로 인기를 얻었다.[1]
- '''자유민주당(FDP)''': 에리히 멘데가 이끄는 자유주의 정당이다.
2. 3. 주요 쟁점
베를린 위기와 베를린 장벽 건설 상황 속에서 선거 운동이 진행되었다.[1]SPD은 처음으로 당 의장이 아닌 서베를린 시장 빌리 브란트를 총리 후보로 발표했다. 베를린 장벽 건설 후, 브란트는 점점 더 많은 지지를 얻었지만, 콘라트 아데나워 총리는 서베를린 시민에게 충분한 지원을 보이지 않았다는 비판을 받았다. 아데나워는 CDU와 CSU의 절대 다수를 지켜야 했지만, 그의 나이와 오랜 총리 재임 기간을 고려할 때, 그가 네 번째 임기를 이끌어야 하는지에 대한 큰 의문이 제기되었다.
3. 선거 운동
베를린 위기와 베를린 장벽 건설이라는 긴장된 상황 속에서 선거 운동이 진행되었다.[1]
SPD는 처음으로 당 의장이 아닌 서베를린 시장 빌리 브란트를 총리 후보로 발표했다. 베를린 장벽 건설 이후, 콘라트 아데나워 총리가 서베를린 시민에게 충분한 지원을 보이지 않았다는 비판을 받으면서, 빌리 브란트는 점점 더 많은 지지를 얻었다. 한편, 콘라트 아데나워는 CDU와 CSU의 절대 다수를 지켜야 했지만, 그의 나이와 오랜 총리 재임 기간을 고려할 때, 그가 네 번째 임기를 이끌어야 하는지에 대한 큰 의문이 제기되었다.
4. 선거 결과
1961년 9월 17일에 치러진 독일 연방의회 선거는 87.7%의 투표율을 기록했으며, 총 32,849,624명이 투표에 참여했다. 이 중 유효표는 31,550,901표였다. 기독교민주연합(CDU)과 기독교사회연합(CSU)은 과반 의석 확보에 실패하여, 자유민주당(FDP)과 연립정부를 구성하게 되었다.
4. 1. 총 의석
정당 | 의석 수 | 비고 |
---|---|---|
기독교민주연합(CDU) | 192석 | |
기독교사회연합(CSU) | 50석 | 기독교민주연합과 연합 |
사회민주당(SPD) | 190석 | |
자유민주당(FDP) | 67석 | |
총합 | 499석 |
4. 2. 정당별 득표율
정당 | 득표율(%) | 득표수 |
---|---|---|
독일 사회민주당(SPD) | 36.2 | 11,427,355 |
독일 기독교민주연합(CDU) | 35.8 | 11,283,901 |
자유민주당(FDP) | 12.8 | 4,028,766 |
기독교사회연합(CSU) | 9.6 | 3,014,471 |
전독일당 (GDP) | 2.8 | 870,756 |
독일 우파당 (DRP) | 0.8 | 262,977 |
남슐레스비히홀슈타인 유권자연합 (SSW) | 0.1 | 25,449 |
기타 정당 | 2.0 | 637,226 |
4. 3. 주별 선거 결과
주(州) | 총 의석 | 지역구 획득 의석 | ||
---|---|---|---|---|
CDU | SPD | CSU | ||
style="background:;" | | style="background:;" | | style="background:;" | | ||
바덴-뷔르템베르크 | 33 | 27 | 6 | |
바이에른 | 47 | 5 | 42 | |
브레멘 | 3 | 3 | ||
함부르크 | 8 | 8 | ||
헤센 | 22 | 3 | 19 | |
니더작센 | 34 | 15 | 19 | |
노르트라인-베스트팔렌 | 66 | 41 | 25 | |
라인란트-팔츠 | 15 | 10 | 5 | |
자르 | 5 | 5 | ||
슐레스비히-홀슈타인 | 14 | 13 | 1 | |
합계 | 247 | 114 | 91 | 42 |
주 | 총 의석 | 비례대표 획득 의석 | |||
---|---|---|---|---|---|
SPD | CDU | FDP | CSU | ||
style="background:;" | | style="background:;" | | style="background:;" | | style="background:;" | | ||
바덴뷔르템베르크 | 33 | 16 | 5 | 12 | |
바이에른 | 39 | 23 | 8 | 8 | |
브레멘 | 2 | 1 | 1 | ||
함부르크 | 10 | 1 | 6 | 3 | |
헤센 | 23 | 2 | 14 | 7 | |
니더작센 | 26 | 6 | 11 | 9 | |
노르트라인-베스트팔렌 | 89 | 35 | 35 | 19 | |
라인란트팔츠 | 16 | 6 | 6 | 4 | |
잘란트 | 4 | 3 | 1 | ||
슐레스비히홀슈타인 | 10 | 7 | 3 | ||
합계 | 252 | 99 | 78 | 67 | 8 |
5. 결과 분석 및 영향
자유민주당이 에리히 멘데의 지도 하에 약진하면서, 보수 연합은 과반 의석을 확보하지 못했다. 1961년부터 1983년까지 기민/기사련, 사민당, 자민당은 연방 의회에서 선거 "과점"을 형성했다.
콘라트 아데나워는 총리직을 유지하며 기민/기사련-자민당 연정을 구성했다. 1962년, 국방장관 프란츠 요제프 슈트라우스(기사련)가 슈피겔 스캔들로 인해 언론인 5명을 체포하도록 명령하면서 자민당이 일시적으로 연정에서 탈퇴했다. 이로 인해 아데나워는 다섯 번째 내각을 발표해야 했다. 1963년, 아데나워는 총리직에서 물러났고 루트비히 에르하르트가 연립 정부를 이끌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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